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3

2011. 3. 10. 01:38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한국명 : 牟三悅, 毛三栗) 선교사는 1860년 9월 15일 미국 일리노이 그랜드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했다. 1889년 몬타나 (Montana)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1892)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감동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선교사를 지망했다. 무어 선교사도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1892년 8월 16일 부인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함께 한국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배편으로 호놀룰루와 일본의 요코하마, 부산-인천을 경유하여 목선으로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1892년 9월 21이었다.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걸어서 성안으로 갔다. 남대문에 도착해보니 이미 성문은 닫혀 있어 성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성벽 아래쪽에 개구멍이 있어 브라운 아들은 거기로 기어 성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른들은 체구와 체통 때문에 시도조차 못했다. 하는 수 없이 6m 되는 높은 성벽에 로프를 걸어 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어를 배우는 일부터 착수했다. 한국어 선생을 두어 매일 방문하도록 하여 공부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 이외에 마펫(Moffett)선교사의 성경공부 반을 도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경을 장과 절까지 말하며 척척 외우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그들이 각 처로 흩어져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자로 일할 것이므로 신학반 인도는 더욱 기대를 부풀게 하는 일이었다. 어서 빨리 한국어에 능통하여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마 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급속히 늘었다. 약 반년이 지난 1893년 3월 19일 주일에는 한국인들과 쉬운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예배순서에서 한국말 기도를 담당했다. 1893년 6월, 곤당골 높직한 곳에 2층집을 지어 터를 잡았다. 무어 부인은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아낙네들에게 재봉틀도 보여 주어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환심을 샀다. 약 9m 깊이로 판 우물에서는 다른 집보다도 수질이 좋아 이웃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어느 해에는 100명에게 세례를 집례 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 백장(白丁)을 대상으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하도록 하는데 전력하였다. 1896년 에비슨 선교사와 협력하여 신분 철폐와, 천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고종 임금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복장제한(服裝制限) 제도를 철폐하여 양반과 천민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데 기여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그를 가리켜 “백장 해방운동의 지도자”라 칭호가 붙여졌으며, 사랑의 사도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천민 층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1893년 3월 19일 승동(곤당골)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대현교회, 동막교회 등 25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1906년 7월 12일에는 그리스도 신문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장티푸스로 인하여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15년간의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1906년 12월 2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부인 로즈 엘리(Rose Ely)선교사는 남편이 별세한 뒤 얼마동안 한국에 머물다가 1907년 11월 18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무어 부부는 3남 1녀의 자녀가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추모비 (승동교회, 동막교회 일동)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전면

 

묘비에는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Devoted servant of Jesus Christ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 unselfish in his love for the Korean people)'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이 6·25 전쟁 때 총탄으로 파손되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후면

 

묘비에는 우리말로“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죠지 H. 루, 류제한>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안식교 선교사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안식교 선교사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한국명: 劉濟漢, 1889-1993)는 1889년 6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 오크랜드에서 출생했다. 1924년 로마린다 의대를 졸업하고, 워싱턴주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다가 1929년 5월 7일 안식교 선교사로 부인(May Belle Ames)과 함께 내한했다.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순안병원(평남) 의료선교사로 시작하여,1931년 6월 서울(소공동)에 2층집 두 칸을 세로 얻어 클리닉을 개설하고, 회기동 출장소를 개소하여 왕진했다. 1932년 11월 인사동에 침상 8개의 '경성요양병원'을 개원하고, 1933년 3월, 휘경동에 땅 1만2천평을 1만 2천원에 매입, 병원을 신축하여 1936년 2월부터 진료했다. 1936년 부인과 사별한 뒤 1938년 서울의료요양원을 설립하고, 1941년 2월 16일 일시 귀국했다. 1947년 그레이스와 재혼하고 4월에 내한, 병원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5월 11일 서울위생병원으로 개칭했다. '그의 시술(施術)은 크게 명성을 얻어 환자는 경향 각지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1948년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로 위촉받았다'고 김재신 목사(전 삼육간호대학장)는 증언했다. 6·25 전쟁 직전에 미국 총회에 참석하였다가 그해 10월 이승만 대통령 요청으로 한국에 돌아와 병원 진료에 전념했다.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남하하여, 미쳐 피난하지 못한 수 백 명을 미군 수송선(LST)으로 제주도로 운송하는데 기여했다. 성산포에 임시병원을 개설하고, 부산지역에도 1951년 3월 15일 대통령부인(프란체스카) 주선으로 용봉동 창고를 진료소로 개조하고 위생병원 부산 분원을 개설했다. 그는 1967년 7월 1일 서울위생병원장을 은퇴한 뒤, 8월 3일 귀국했다. 이 병원은 현재 450여 개의 침상이 있는 서울 위생병원으로 발전했다. 1968년 이후 6차례나 왕래하며 병원사업에 협력하다가 1993년 11월 18일 미국 노드랜드에서 94세로 별세하였다. "나는 한국에 구경 삼아 온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왔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려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온 선교사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승만)을 치료할 때나, 시골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라는 어록을 남겼을 만큼 의료선교사로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고마운 은인이다.  한민국 문화훈장(1954), 중앙대 명예박사(1963), 서울시 명예시민증(1965)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안식교 선교사 약력

 

부인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부인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1900-1936 )는 미국에서 아버지(J. J. Ames, 장로)와 어머니(전도부인)에게서 1900년 10월 30일 태어났다. 태평양 유니온대학 재학 중 루(George Henry, Rue)를 만나 1921년 6월 19일 결혼했다. 그들은 1923년 큰딸 베티(Betty, 주:한국에서 수년간 간호사로 봉사함. 그 남편 밋첼은 삼육대학을 건축함.)와 1925년 아들 죠지(George H Rue)의 남매를 낳았다. 1928년 11월, 남편과 함께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6년 4월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하는 등 많은 활동과 남편의 선교사업을 성실히 내조하고, 전도와 의료선교사로 공헌했다. 1936년 12월 16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안식교 선교사 최초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948년 12월 18일 서울에 “메이 벨 기념교회”가 남편에 의하여 헌당되었다.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 약력

 

그레이스 루 (Rue, Grace 한국명: 柳恩惠) 선교사


1947년 루의 두 번째 부인으로 미국에서 결혼했다. 같은 해 남편의 뒤를 따라 안식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 위생병원 수간호원으로 활동했다. 6·25 전쟁 기간 중 부산에 병원 설립을 주도했다. 서울로 복귀하여 위생병원 안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며 고아원을 개설하고 환자와 어린이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입양사업도 병행하여 미국, 노르웨이, 호주 및 스웨덴 등에 수많은 고아들을 입양시켰다. 서울 상봉동 200번지 땅 9,800평과 건물 164평을 매입하여 ‘성육원’을 설립 주도하고 초대 원장으로 사회봉사와 구제사업에 헌신했다. 1967년 귀국, 워싱턴주 매로우스톤섬(Nordland)에서 개인성경교수와 사회봉사를 계속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찰스 알렌 클라크, 곽안련 선교사>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선교사 가족 묘지


다섯 자녀 중 알렌 D. 클라크(Clark, Allen D. 郭安全)와 캐더린(Clark, Katherine Edith, 郭佳全)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또한 손자 도날드(Clark, Donald N. )는 양화진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여 자료 제공에 크게 기여했다.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선교사 가족 묘지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선교사 가족 묘지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선교사


찰스 알렌 클라크(Clark, Charles Allen, 郭安連, 1878-1961)는 미국 미네소타에서 1878년 11월 17일 출생했다. 미네소타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902)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2년 9월 22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뉴욕 출신의 부인(Mabel Craft)과 함께 내한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승동교회 제2대 교역자로 교회당을 건축(1905)했다.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계급 관념과 남녀의 차별 제도를 개선하고 교회를 부흥시켰다. 이 무렵 어린 세 자녀를 잃게되어 양화진 등에 안장했다. 그 후 평양신학교 교수(1916)로 활동하며 실천신학을 강의하고, 한국 교계의 목회자를 양성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의 회계(1916), 부회장(1917), 경충노회장 등으로 봉직했다. 1930년 1월부터 기독교 교육과 아동을 위한《종교 교육》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욥기, 시편의 주석을 편찬하고, 잠언, 전도서, 아가서,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의 순서로 계속하여 성경의 주석서를 발행했다. 한편 경기 양평의 고읍, 상십리, 묘곡, 고송, 용문동, 마배교회(1913-1915)와, 광주의 신사리교회(1912) 등에서 동사목사로 시무했다. 신사 참배를 거절(1940)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세계평화기도문 사건(1941)으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40년 동안 젊음과 인생의 황금기를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힘써 일한 고마운 선교사이다. 그 후 부인 마벨은 1946년 미국에서 별세하였으며, 자신은 1961년 5월 26일 오클라호마에서 별세했다. 


버튼(Burton)과 고든(Gordon) 2세


버튼 W. 클라크(Clark, Burton winthrop, 1903-1904)는 C. A. 클라크와 마벨 사이에서 큰아들로 1903년 4월 3일 출생했다. 1904년 12월 21일 홍역으로 서울에서 2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고든 N. 클라크(Clark, Gordon Neil, 1905-1905)


클라크(곽안련)의 둘째 아들로 1905년 4월 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출생한지 6개월만에 소화기 질환으로 1905년 10월 29일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Allen)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C. A. 클라크의 딸 캐더린 (Clark, Katherine Edith, 郭佳全)


1919년 출생했다. 1947년 10월 28일 북장로회 여선교사로 내한하여 안동 지방에서 구제사업 등 선교활동과 대구 선교부에서 계명학원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로 선임(1954)되었다. 1968년 본국으로 귀국했다.


장신대 교수 알렌 D. 클라크(郭安全, 1908-1990) 2세


알렌 D. 클라크(Clark, Allen D.)는 클라크(郭安連)의 아들로 서울에서 1908년 11월 6일 출생했다. 미국에서 미네소타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1933)하고, 1933년 8월 2일 부인 유지니아(Eugenia Roberts, 전 평양외국인학교 동창생)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6년 청주로 옮겨 1940년까지 농촌 선교에 몰두하였다. 일제 말기에 강제 추방되었다가 1953년 11월에 다시 내한하여 1973년까지 청주에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노력했다. 장신대 교수(1954-1965)와 피어선 성경학교 교장과 대한성서공회 번역위원 등으로 헌신하였으며, 1990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저서로는《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1972》가 있다. 이들 부부의 자녀로서 로버트(Robert)는 평양에서, 도로시(Dorothy)와 캐더린(Kathleen)은 청주에서, 넷째 도날드(Donald N. Clark)는 콜럼비아에서 출생했다. 특히 도날드는 부인 린다(Linda)와 함께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서 봉사했다. 그리고 텍사스의 트리니티(Trinity) 대학에서 역사 교수로서 한국교회 역사에 관한 연구와 양화진 묘역에 관한 저서(1984, 1997)를 발간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필자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프릭 사관>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1886-1912)은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제1진인 프릭(Frick, Sofia), 코흘러(Kohler, Magda), 우을선(Olsson, Verna) 등 3인가운데 한 1인으로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이 중 프릭 사관은 한국에 파송된 구세군 선교사 중 최초(1912)로 양화진에 묻혔으며 코흘러는 다음해(1913) 안장된 독신 여성 선교사이다. 프릭 사관은 1886년 8월 16일 스웨덴 텔례북에서 출생하였다.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11월 20일 참위 직분을 받았으며,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을 한국에 파송하면서, 프릭이 한국으로 갈 수 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말했다. 그 사유는 “본래 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로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프릭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울 평동에 머물면서 한국말을 익혀 빠른 기간에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들에게 “자기는 도저히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갖지 아니하며, 오직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인을 위하여 죽을 줄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쪽 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주며 문서전도와 노방전도에 힘썼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한 뒤,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한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4) 그는 선교사로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던 프릭이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1912년 4월 29일 오전 4시 45분 순직하였다. 그와 함께 생활하던 본영 총무서기관 크리스핀(Crispin, Jhon, 한국명 : 길수빈)은 프릭 선교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프릭 사관과 한 대문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오전 일곱 시쯤이면 성경을 들고 집 뜰 주변을 거닐었다. 궁금하여 그에게 하루의 생활을 물었더니 그는 매일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이를 실천한다고 했다. 또한 이른 아침에 자주 높은 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한국을 위하여 기도한다고도 했다. 한국인을 구원하여 주님의 빛을 발하도록 하려는 생각만 간절하다고 했다. 한국말은 잘 하지 못하지만, 구세 신문과 마가복음을 자기 돈으로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므로 칭송이 그치지 아니한다.”고 했다. 크리스핀은 “프릭 사관은 비록 별세하였으나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며 모든 선교사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아름다운 삶과 열성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주님의 사업을 잘 행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장례식은 구세군 본영에서 호가드(R. Hoggard, 許嘉斗) 사령관에 의하여 집례되었고 유해는 양화진에 운구되어 호가드 부부와 여러 조문객들이 모여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때 사관학생 김병도는 추도사를 통하여 “그는 4만리 먼 곳에서 한국인이 죄악 가운데 빠져있음을 전해 듣고 성신의 인도하심으로 대장의 명을 받아 일가친척과 고국을 이별하고 바다를 배편으로 건너고 육지를 기차로 횡단하면서 여러 나라를 지나 언어와 풍속이 다른 한국 땅에 왔다. 그는 육신을 한국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한국어와 성경을 열심히 익히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죽음을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통곡할 일이나 영혼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찬송할 것이다.”라고 했다. 프릭 선교사는 한국 체류 활동 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간 선교사였다. 그의 장례식 때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진심으로 슬퍼하였으며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초로 순직한 구세군 선교사였다. 묘비에는 “1886년 8월 10일 출생하여 1912년 4월 29일 승천”이라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 사관  

 

 

<메리 리 로간 선교사>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 선교사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1856-1919)은 1856년 9월 17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J. V. 로간(Logan, Mrs. J. V.)의 부인이 되었으며, 남편은 켄터키 센트럴대학 학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이 때 그는 같은 대학에서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육성하였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힘을 썼다. 1908년 남편과 사별한 뒤 한국에 협력선교사로 자원하여 1909년 3월 5일 53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선교사(Regular Members)로 임명되어 보수(報酬)와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1884년 9월 20일 내한한 알렌(Allen)부터 1962년 9월 12일 내한한 포(Poe)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386명의 선교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로간 선교사의 경우 해외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활동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Affiliated Members)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주일학교,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반, 여성 전도반, 여성지도자반 등을 육성하면서 충북지역의 선교와 여성교육에 커다란 공을 세운 여성 선교사였다. 자기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5-60여명에 이른다. 이 무렵 그가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1911년 건립)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그는 한국말도 잘 구사하고 충북과 청주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준비된 자애로운 어머니”로 밀러(Miller)의 부인 도티(Doty)여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며,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병으로 1919년 12월 7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양화진 제2묘역(가-6)에 안장되었다. 한편 1921년 6월 청주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청주시 남문로 1가 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 화강석으로 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m 규격의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충북기독교100년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첫째,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기념비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둘째, 한문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 봉승(奉承) 진출갈력(盡忠竭力) 등 한문 용어까지도 한글로 기록하여,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가 앞장서 우리글과 말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운동-민족운동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이 비석은 여전도회 중심으로 건립되고 여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192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남·여석을 구분했던 휘장을 제거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로간 선교사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며 충북지역 여성교육에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외롭게 묻혔다. 앞으로 그의 위대한 선교정신과 삶을 뒤돌아보며 기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 선교사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1921.6.1 화강석으로 추모비 세움)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그러나 이 한글 기념비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기독교 역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로교 선교사를 천주교 신부(神父)로 잘못 소개한 사례도 있었다. 비문 첫 줄의 “아메리가나신부인” 부분을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간행된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책에서 “아메리카 나 신부”로 해석하여 미국의 나씨 성을 가진 신부의 선교비로 전해진 사실이 있다. 결국 한글에 띄어쓰기를 하지 아니하여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를 사실과 다르게 천주교 신부로 오인한 사연의 한 토막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하지만 정확하게 전해져야 한다. 문장의 작성에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링콘 프렌치>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1898-1923)


양화진 성지에는 구세군선교사 묘역이 특별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9월 ‘구세군순교성지기념사업회’가 양화진 제2묘역 서쪽 언덕을 대상으로 대구와 충북(영동)에 묻혔던 구세군 선교사까지 이곳에 이장하여 집단화하며 성역화 사업을 시행했다. 한국에서 구세군 소속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헌신하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는 8명에 이른다. 프릭(Frick), 코흘러, 리처드, 에이커홈, 힐, 토프트, 위더슨(Widdowson), 홉스(Hobbs) 선교사 등이다. 그리고 선교사 가족도 7명에 이른다. 실베스터 선교사의 두 아들(Douglas, Goldon)을 비롯하여 힐의 아들(W. O. Hill), 프랜치의 아들(Lincoln), 스미스의 딸(Dolleen), 폭스의 아들(Norman), 본윅의 딸Cathie)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을 국적별로 구분하면 영국인이 9명으로 가장 많고, 스웨덴 3명, 미국, 호주, 남아공이 각 1명으로 모두 15명에 달한다. 구세군 선교사 가족 가운데 링컨 프렌치(French, Lincoln)의 삶은 특별하다. 1898년 3월 1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년기가 시작되는 18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한국 사령관으로 전임(轉任)되었을 때, 여동생 등 4명의 가족이 1916년 10월 2일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아버지 조지 프렌치가 1919년 11월 인도의 서 군국 사령관으로 전임하게 되어 한국을 떠난 후에도 그는 한국에 계속 머물러 독립생활을 하면서 한국인을 일깨워 주는 어학선생으로 봉사하였다. 결국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 생활 7년 만에 25세의 나이로 1923년 4월 18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정동교회에서 스티븐스(Stevens, William, 한국명: 신태빈) 구세군 사령관 인도로 집례 되었으며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 건립된 그의 묘비에는 ‘평안히 잠드소서(Rest in Peace)’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조지 프렌치 구세군 사령관의 아들 링콘 프렌치(French, Lincoln, 1898-1923)  

 

조지 프렌치(French, George) 구세군 사령관


조지 프렌치(French, George, 한국명: 부래지)는 영국 브리스톨 출신으로 1882년에 임관되었으며, 미국 서부 군국 서기 장관으로 봉직하다가 허가두(Hoggard)의 후임으로 1916년 6월 30일 제2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10월 2일 밤 9시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 추수감사 예배와 10월 8일 주일 예배에 설교하고 10월 13일부터 3회에 걸쳐 지방을 순회하였다. 첫 일정은 충남의 공주(유구)였다. 그는 서울과 지방 순회를 통하여 신실한 사관과 교우들이 힘써 일하고 희생한 결과로 이루어 놓은 훌륭한 선교 업적을 확인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수 백 만 한국인이 요망하는 바를 깨닫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간절한 뜻과 생각이 마음 가운데 가득하다고 했다. 많은 무리를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능력이 생기리라고도 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지만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만 의지하고 나아가면 성공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힘써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구원 하는 일에 열성을 다하자고 하였다. 그는 3년간 제2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봉직하다가 1919년 11월 5일 인도 서부 군국 사령관으로 전보(轉補)되어 한국을 떠났으나 교회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1919년의 교회 수는 3,279개였고 교인 수는 355,114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의 임기 중 신설된 구세군 교회는 1916년에 교하, 옥천, 부토리를 비롯하여 1917년 건주리, 천흥, 안성, 김천, 광평, 연안 진남포, 낙평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 3영, 맹해리, 수원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특히 사회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육아원 개설에 공로가 있다. 그는 성결을 주장하며 “성결의 길(이사야 35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여기에는 첫째, “정결(淨潔)의 대로(大路)”를 통하여 사상과 언어와 행동이 정결하면 언행이 변화되어 선행(善行)을 한다고 했다. 둘째, 분명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걷게 되면 곤란이 없을 것이며,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 명령을 잘 복종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다고 했다. 셋째, 안전대로(安全大路)처럼 우리 마음의 중심이 정결하여야 안전하다고 했다. 이밖에 희락이 충만한 영광(榮光) 스러운 길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자고 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베어드 가족>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 가족 묘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 기념비와 가족묘

 

숭실대학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 부부 기념비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는 1891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평양에서는 장로교 최초로 숭실대학을 설립하였다.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찰스턴)에서 출생하였고, 1885년 하노버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888)했으며, 하노버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학위를 받았다. 1891년 2월 1일 인천에 도착한 그 해 9월부터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95년에는 대구로 옮겨 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로 옮겨 경신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97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한 후 1906년 9월 감리교와 연합하여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근로와 자조 정신을 교육 목표로 삼았으며, 네비어스(Neveus) 방법을 한국 실정에 맞게 자립(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자족(Self-Support)에 기초한 선교 정책을 입안하였다. 숭실대학장을 사임(1916. 3. 31)한 뒤에는 교재 발간등 문서선교에 치중하였다. 1931년 11월 29일 장티푸스로 평양에서 별세하여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자리에는 가족들에 의하여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윌리엄 베어드의 아내 베어드 A. 아담스 (Baird, Annie Laurie Adams, 1864-1916)


1864년 9월 16일 출생하여 1883년 웨스턴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하노버 대학(1884)과 워시번 대학(1885)을 졸업하였다. 1890년 11월 18일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였다. 1891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安愛梨(理)라는 이름으로 부산 대구지방에서 남편의 선교활동을 도왔다. 평양에 있는 숭실학당, 외국인학교, 여자성경학교, 숭의여학교 교사 혹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5남매의 현모양처로서 찬송가 "440장(멀리 멀리 갔더니)" 창작을 비롯하여 한국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평양에서 1916년 6월 9일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기념비가 있다.


평양성경학교장 베어드, R.피터롤프 (Rose May Fetterolf,1881-1946)


1881년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하여 브룸스버그대학을 졸업하고, 1918년 8월 7일 시카고에서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고 같은 해 선교사로 내한하여 裵路使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 출판위원과 성서번역에 공헌하였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평양 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었다. 1946년 11월 13일 일리노이에서 별세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베어드 2세 (Baird, William M. Jr. 1897-1987),  리처드 H. 베어드 (Richard Hamilton Baird 1898-1995) 묘

 

재령지방 선교사 베어드 2세 (Baird, William M. Jr. 1897-1987)


윌리엄 M. 베어드와 아담스의 아들로 1897년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4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裵偉林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1929년 라이스트(Reist Anna L.)와 결혼하고, 1939년 건강문제로 평양에 이주하여 1940년 11월 귀국하였다. 1987년 8월 5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 기록되어 있다.


강계성경학교장 리처드 H. 베어드 (Richard Hamilton Baird 1898-1995)


1898년 9월 1일 평양에서 윌리엄 M. 베어드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8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Golden Stockton)과 함께 내한하였다. 裵偉就이라는 이름으로 강계지방에서 순회 전도하였고, 강계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전도인 양성에 헌신하였다. 1941년 일시귀국 후 1957년 다시 내한하여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총무로 봉직하다가 1960년 귀국하였다. 오클랜드에 거주하면서도 한국유학생 생활과 신앙을 지도하였다. 1995년 1월 1일 별세하여 가족들이 양화진 자리에 안장하였다. 묘역에는 잔디 대신 맥문동이라고 약초로 쓰이는 초화가 심어져 있다.

 

 

<홉스 선교사>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묘

 

E. P. 홉스(Hobbs, Beatrice Ellen Pugh, 1880-1934) 선교사, 토마스 홉스의 부인  


엘렌 P. 홉스 (Hobbs, Beatrice Ellen Pugh) 선교사는 1880년 8월 24일 영국에서 출생하였다. 토마스 홉스와 결혼하였으며 1910년 9월 16일 남편과 함께 구세군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남편의 성서공회사업 등 선교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기독교 부인절제연합회 회계(외국인부서)로 봉사하고, 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했다. 동물학대방지협회 등에서 사회활동도 하였다. 진명여학교 등 2개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육체적 힘을 능가하는 열정을 가진 헌신적인 선교사'로 전해진다. 이질에 걸려 서울에서 치료하다가 해외 치료가 필요하여 1924년 11월 서울을 떠나 1925년 2월 돌아오기도 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1932년 1월 30일 남편과 함께 서울을 떠나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1933년 2월 7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34년 4월 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성서공회 외국인 선교사로는 첫 번째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 홉스를 내조하면서 22년간 봉사했던 성서공회와 한국교회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5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영국성서공회 총무 토마스 홉스( Hobbs, Thomas , 1880- )선교사 


토마스 홉스( Hobbs, Thomas 한국명: 許曄 )선교사는 1880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영국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9월 16일 구세군 선교사(사관)로 부인(엘렌 P. 홉스)과 함께 내한했다. 1911년 구세군 한국 본영에서 활동하고 개성 지방관으로 전임하였다. 원당 사평 장단 등 지방 군영을 개설하거나 관리와 순회 전도를 하였다. 문맹 퇴치와 사회 계몽 활동에도 힘썼다. 1913년 1월, 저다인(J. L. Gerdine)선교사와 밀러(Miller, Hugh 閔休) 총무의 추천에 의하여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부총무로 선임되었다. 그가 선임된 배경에는 '구세군 사관(정위)으로 2년간 근무한 32세의 기혼자이며, 한국어를 잘하는 동시에 이미 한국인 권서와 함께 전도를 해오고 있고, 권서 사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며 그 부인도 권서인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공회 사업을 관장하면서 특히 권서인(勸書人)의 조직과 관리를 주관하였으며, 전도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의 권서 방식은 '모든 가정, 모든 사람(Every home, and Every man)'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호별 방문 형식의 권서 보급 운동을 장려하여 많은 성경을 보급하였다. 1921년에는 권서인을 위한 잡지 를 편집, 발간하였다. 밀러의 안식년 때(1916.7-1917.8)에는 대리 총무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자 지원 입대 한 후 제대하여 1919년 9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1937년 10월 제2대 밀러 총무가 정년으로 은퇴하게 되어 후임으로 제3대 영국성서공회 총무가 되었다. 부총무로 25년간 경륜을 쌓은 뒤 57세의 나이로 총무직을 맞게 되었으므로 이미 성서사업에 노련한 전문가로서 한국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밀러 총무가 추진하던 개역성경 번역작업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고 신ㆍ구약을 합본하여 <성경 개역>으로 출간하는 등 성서 출판과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8년 '영국성서공회'(BFBS)의 명칭을 '조선성서공회'로 바꾸는 등 대한성서공회 발전에도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1년 3월, BFBS에 속했던 모든 성경 재고와 조성된 자금을 조선성서공회에 기부했다. 그는 1934년 엘렌 부인과 사별한 뒤, 1935년 9월 11일 이화여전 교수 밴플리트(Van Fleet, Edna Marie)와 재혼하였다. 1941년 5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미국 성서공회 임시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 성서사업의 계속 수행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에케르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 묘

 

한국 군악대 창설자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독일 실레지아주에서 출생하여 브레스라우 음악학교와 드레스덴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군악대 대원이 되었다가 해군 군악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악대 조직의 필요성이 논의되기는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1894년 갑오경장까지로 볼 수 있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겸하여 영국, 독일, 불란서, 오스트리아, 미국 등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귀국하여 서양 문명을 본대로 정부에 보고하면서 새로운 제도인 군악대 설치를 적극 주장하여 1900년 12월 군악대 설치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 귀국하려던 에케르트를 초청하여 1901년 2월 7일 내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국 최초의 군악대 조직과 창설 작업에 착수했다. 악기들을 구입하는 동시에 악사들에게 제복을 입혀 훈련을 시작했다.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을 제일 먼저 시도하였다. 고종 임금 제50회 탄신 기념일인 1901년 7월 25일(양력 9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서양 음악으로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이 연주회에 대하여 코리아 리뷰(1901. 9월호)에는 “고종황제의 제50회 탄신 축하 행사는 적시 적기에 아주 훌륭한 순서로 거행되었다. 이 축하 행사는 한국 발전 역사상 반세기 역사를 앞당긴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는 한 번 연주되고 정식 채용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 제국의 가사는 지금의 애국가보다 간결하다. "샹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영히 번영하야 해돋이 무궁하도록 성디 동방의 문명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 군악대는 27명의 한국인으로 4개월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악기를 다루는 솜씨나 음악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에케르트의 공로가 컸으며 연주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지휘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그의 제자로 백우용 강흥준 김창희 등이 그의 뒤를 따라 군악대의 지휘봉을 들었다. 늠름한 제복차림, 번쩍거리는 악기들,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 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글로 새긴 은(銀) 기념 메달도 하사되었다고 한다. 이 군악대는 1907년 우리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되었다. 에케르트는 이때 일자리를 빼앗겼으나 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6일 자택에서 별세하여 8월 8일 3일장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카톨릭 신자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작곡자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는 태극장 3등을 수여하였다. 그의 부인은 그가 별세한지 5년 후 1920년 독일로 돌아가서 1934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한국에서 출가하였다. 맏딸(아마리 에케르트)은 프랑스 외교관 마르델(Martel, Emile)과 결혼하였으며, 그는 한국에서 불어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힘썼다. 한국에서 55년(1894-1949) 동안 장기간 활동하다가 마르텔도 양화진에 묻혔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채핀 선교사, 로사 베어>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안나 B. 채핀 부부 묘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선교사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蔡彼得, 1881-1916)선교사는 1881년 미국에서 출생했다. 1911년 6월 안나 채핀과 결혼하여, 1913년 4월 23일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부인(안나 채핀)과 딸, 그리고 처제(로사 베어)를 동반하여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1914년 감리회 선교사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1914년 12월 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기,충청노회의 허락을 받아 서울 서부지역과 경기도의 고양, 김포지역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동사목사(同使牧使)로 활동했다. 새문안교회, 양평동교회 등 여러 교회를 순회 시무(관리)하였으며 노회의 총대로 활동했다. 선교 활동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5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경충노회록에는 “원두우(언더우드)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한 채피득(채핀) 목사가 세상을 떠나... 섭섭하고, 슬프고, 막막한 일이며 애도한다”고 기록되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회 여성 목사로 활동한 안나 B. 채핀(1883-1977) 


안나 B. 채핀 (Chaffin, Anna Bair, 蔡富仁)선교사는 1883년 9월 26일 미국 아이오와주 매닝에서 출생했다. 1901년 라도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간 교사로 활동했다. 1906년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1년 간 공부하고 워싱턴 존 플래처 대학 피아노과를 졸업(1911)했다. 빅터 채핀과 결혼하여 딸 모텔을 낳았으며 남편을 따라 선교사로 내한했다. 1916년 남편과 사별하고 감리회 부인성경학원 교사가 되었으며 1918년 앨벗슨(Albertson)의 후임으로 원장이 되었다. 안식년(제1차)때 뉴욕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1919-1920)했다. 1920년 한국에 돌아와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안식년(제2차) 에는 콜럼비아대학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우리 집》선교잡지 편집인과, 《절제, The Tempreance News》발행인으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1931년 6월 14일 양주삼 총리사 집례로 개성에서 한국 최초 여성 목사가 되었다. 협성여자신학교와 협성신학교가 통합되면서 부교장으로 여성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만주신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38년 경기, 충청지역 여성선교회와 사회복지사업을 관장했다. 친동생 로사 베어 목사가 이곳에서 선교 활동 중 뇌암으로 별세했기에 1940년 강제 귀국하였다가, 1946년 크리스마스 무렵 다시 돌아와 여선교회 사업을 재개했다. 그는 “한국선교 35주년기념 및 회갑연” 과정에서 “내 평생 사업이 여성교역자 양성에 있으므로, 일생을 바쳐 일한 은퇴 여전도사 안식관 설립”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0월 5일 “채부인 기념 여전도인 안식관”이 개관되었다. 그는 은퇴(1952) 한 뒤에도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 사업국장으로 봉직하고, 이화유지재단(有夏學園)이사장을 역임(1954-1958)했다. 일평생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오직 선교와 여성교역자 양성에 헌신하고 1962년 미국으로 돌아가 1977년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 남편 곁에 안장되었으며 묘비에 채핀 부부 생졸 연대가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빅터 D. 채핀(Chaffin, Victor D.,) 선교사  처제  로사 B. 베어

 

여성 사회사업에 헌신한 로사 B. 베어(1888-1938) 선교사


로사 B. 베어(Bair, Blanche Rosa, 裵義禮)선교사는 1888년 미국 디모인에서 출생했다.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했다. 1913년 감리회 선교사로 언니 안나 B. 채핀(Chaffin, Anna Bair, 蔡富仁)을 따라 내한했다. 해주, 공주, 인천지역에서 전도 및 여성 사회사업에 종사했다. YMCA 영어학교 교사로 봉직(1929)했다. 1930년 태화 여자관 관장으로 여성 사회사업을 했다. 그의 언니 안나 채핀과 같은 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천안지방에서 여성사회사업을 위하여 활동(1934-1938)했다. 1938년 3월 10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병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캠벨 선교사>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기념비 (배화학원, 종교교회, 자교교회)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묘비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선교사는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21세 되던 1874년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하여 1남 1여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었다. 이 같은 불행을 격은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며 “一生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貢獻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했다. 캠벨 선교사는 그 후 미국 ‘남감리회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1897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며 한국으로 오면서 중국인 양녀(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윤치호의 마중을 받았으며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리드(李德) 선교사 부부가 이미 훌륭하게 선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감리회의 상동병원과 북장로회의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다.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했다. 이때 교사(敎師)는 2명이었고, 과목(科目)은 한글과 한문이었다.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한편 그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춘수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移轉)하여 종교(宗橋)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의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紫橋)교회로 발전했다고 한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11월 12일 별세했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다.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다. (참고자료: 배화백년사, 감리교 인물사전, 종교-자교교회사)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젠센 선교사>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선교사 가족 묘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선교사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全善, 별명: Kris, 1897-1956) 선교사는 1897년 3월 14일 덴마크 네스보그(Naesborg)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서 일하다가 1914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으로 참전하여 1818년 11월 11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924년 아이오와주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보스턴대학 신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미국 감리교 국내선교부에서 일하다가 1927년 8월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기·서울지역에서 1956년까지 활동했다. 내한 초기 인천에서 7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34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1년 후 다시 돌아와 수원 인천 원주 서울 등지의 순회 선교사로 시무했다. 1940년 일제의 추방령으로 출국되었다.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하던 1950년 6월 개성 출장 중에 6·25 전쟁을 만난다. D. N. 클락의 기록에 의하면 젤러스(L.Zellers)와 북한군 포로가 되고, 평양에서 압록강(만포진)에 이르는 “죽음의 행렬”에 낀다. 3년간의 억류 생활을 하다가 1953년 5월 휴전으로 석방되어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5월 13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1954년 10월 부인과 함께 또다시 내한하여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재건하려는 교회에 도움을 주면서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진력했다. 1955년 연세대학 재단이사로 활동하고, 1956년 11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고문단’ 일행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가 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11월 23일 감리회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마치고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요한복음 15장 13절 첫 부분(Greater love hath no man...)을 기록하고 그 밑에 Because man goeth to his long home, and the mourners go about the streets. Then shall the dust return to the earth as it was. and the spirit shall return unto God who gave it(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M. K. 젠센(1904-1998) 과 딸 클레어 리 젠센 묘

 

감리회 첫 여성 목사 M. K. 젠센(1904-1998) 


매드 키스터 젠센(Jensen, Maud Keister)목사는 1904년 9월 27일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하여 1926년 5월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28년 7월 13일 A. K. 젠센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딸(Clair Lee)과 아들 필립(Philip,성장하여 미국에서 교수와 감리교 목사로 활동함)을 낳았다. 내한 초기에는 인천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감리회 초기 여성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드루(Drew)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선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한국에 남아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유동식)’에 따르면 1958년 8월 17일 조직된 정동교회건축기성회 임원으로 위촉되었다. 남편 젠센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미국에서 모금(7만$)하여 ‘젠센기념관’을 2층 양옥으로 건립했다. 이 건물은 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정동제일교회에 헌증되었다. 이 기념관은 교육관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특별집회나 부인회 등의 모임장소로 제공되고, 학생들을 위한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총리원 주최 회의 장소나 특별집회 용도로 제공하도록 하였다. 1969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가 1970년 2월 28일 선교사직을 정년퇴임하고 뉴저지 주 매디슨(Madison)에 살다가 1998년 10월 12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감리회 첫 여성 목사 M. K. 젠센(1904-1998)  후면

 

젠센 부부의 딸 클레어 리 젠센(Jensen, Clair Lee,1929-1996)


1929년 10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미국 뉴저지에서 사회봉사 사업가로 복지와 장애인을 위해 일했다. 1996년 2월 26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유해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피터스 선교사 가족>

 

엘리자베스 C. 피터스(Pieters, Elizabeth Campbell,1872 -1906)  여성 선교사

 

엘리자베스 C. 피터스(Pieters, Elizabeth Campbell,1872 -1906)  여성 선교사


1902년 미국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던 유태계 러시아인 알렉산더 A. 피터스와 결혼했다. 1904년 9월 13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사업에 활동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건강이 약화되고 폐결핵을 앓다가, 러일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필리핀 마닐라로 갔다가 일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폐결핵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06년 1월 4일 서울에서 34세로 별세했다. 묘지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남편 A. 피터스는 1930년 “엘리자베스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하고,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전개했다.

 

알렉산더 A. 피터스 선교사(Pieters, Alexander Albert, 彼得,1871-1958) 


1871년 12월 30일 러시아(Ecoternoslav)에서 유태인으로 출생하여 인문고를 졸업했다. 1895년 4월 일본(나가 사키)에서 피터스 목사의 전도와 세례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 개명했다. 1891년 ABS 루미스(Loomis, Henry) 일본 총무에 의하여 권서(Colporteur)로 채용되어 1895년 5월 16일 내한했다. 1895년 9월부터 1898년 6월까지 3년 간 ABS 권서 겸 한국 부총무로 활동하면서 빠른 시일에 한국어를 익혔다. 서울 근교와 호남과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성서도 판매했다. 1897년부터 시편 번역에 착수하여 1898년에 12월 6일, 62편의 시편을 번역하여《시편 촬요》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구약성서를 발행했다. 그의 시편 번역에 대하여 루미스 총무는 1902년 10월 ABS 본부 헤이븐 (Wm. I. Haven)에게 “피터스는 4년 전에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당시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편을 번역하는데 보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예약에 의해 1,500부가 인쇄되었고, “수요를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보고했다.(자료:대한성서공회사) 1898년 7월 1일부터 1900년 가을까지는 BFBS 권서 겸 부총무로 활동했다. 그의 좋은 성품과 ABS 권서로서 3년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켄뮤어 총무는 적임자로 판단하여 2년 간 연봉 140파운드와, 매월 15$의 전세비를 지급했다. 이때 시편을 찬송가로 여러 편 운률화(韻律化)했다. 예를 들면 기도와 간구를 위한 찬송가 479장(내가 깊은 곳에서)은 시편 130장을 운률화한 것이다. 1900년, 미국 매코믹신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하고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04년 9월 미국북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구약 성서번역위원(1906)과 성서개역위원회 임원(1911) 등으로 활동했다. 1913년 황해도 재령으로 옮겼다가 1921년 평북 선천으로 이동했다. 1927년 서울로 돌아와 성서 개역에 참여하고 1937년 구약성서 완성에 공헌했다. 1941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8년 6월 29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에바 필드 피터스 (Pieters, Eva Field, 1868-1932)  여성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 피터스 (Pieters, Eva Field, 1868-1932)  여성 의료선교사


1868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897년 10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여성독신 의료선교사로 실드(Shields, Esther)와 함께 내한했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1908년 A. 피터스와 결혼했다. 그 후 이들은 10년 간 황해도 재령에서 기독교 교육과 의료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에바 필드 선교사는 수학 교과서를 편찬한 공적이 있다. 리차드(Richard)와 루벤(Reuben) 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은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2년 선천으로 이동 한국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찬송가도 편집하여 발행했다. 그러나 불치의 암으로 인하여 그가 봉직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1932년 7월 20일 64세로 별세했다. 묘지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남편 A. 피터스는 1932년 “에바 필드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치과 수술실을 마련했다. 비문에는 “예수 안에 잠들다.(A sleep in Jesus)”라고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벙커 선교사>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부부 묘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D. A. 벙커는 1853년 8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이 한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국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했다. 미국 공사 푸드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두 여성(엘러스, 길모어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 했다. D. A.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고관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7년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했다. 육영공원이 폐쇄 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활동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 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通政大夫 戶曹參議”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矯導所) 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등과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고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선진 외국에서 시행되는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 고문제도의 폐지,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 인권 보호를 건의했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과 과학, 철학, 역사 등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옥중 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투옥되었던 신흥우의 아버지(申冕休)는 “옥중(獄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예전에도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는 ‘獄中開學顚末’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1890년 6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목회 활동도 했다.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기구로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자신의 선교사역을 계속하면서 성서 보급을 위하여 미국성서공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0년 한국에 잠시 방문하였으며,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별세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그 부인은 남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 4월 8일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부인 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 추모비


미국 미시건주 버오크에서 1860년 8월 31일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출생하였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으로 와 달라는 알렌(H. N. Allen, 安連)의 요청과 한국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다음 해(1887년, 27세 때) 미국에서 함께 내한한 육영공원 교사 D. A.벙커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시의(侍醫),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은퇴하여 귀국했다. 그 후 다시 내한하였다가, 1938년 10월 8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가냘픈 여성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제중원 의사로 열심히 봉직하여, 왕실과 고관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성 환자 치료와 간호에 주력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던 알렌 의사와 협력하며 황후의 옥체를 진료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業精至善 施療衆民)로 그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 통정대부(堂上階 通政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명성황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의 글인 ‘閔妃와 西醫’라는 제목에서는 “나는 1888년 3월부터 여관(女官)의 직임을 띠고 나의 본직인 의사로서 황후의 옥체를 시위(侍衛)하게 된 것을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는 왕비에게는 손을 대고 진맥(診脈)도 못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했다. 이 같은 과정은 1895년 한국학연구지 에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제목의 글에 자세히 발표되었다. 전택부는 “알렌은 고종황제를 진찰한 적은 있으나 황후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대궐에서 기별이 오기를 황후께서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알렌은 그 증세를 물은 다음 짐작해서 약을 지어 보냈다. 며칠 뒤 또 기별이 나오기를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다른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병세를 들은 뒤에 짐작해서 다른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보냈다. 또 며칠 뒤에 내시가 나와 약효가 전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느냐?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알렌은 용기를 내어 황후를 직접 진찰하기 전에는 약효를 낼 수 없으니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엘러스가 궁중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진찰했다”는 것이다. 당시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로 연결하여 진맥(診脈)하던 시절에, 엘러스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청진기를 들이댔다. 1886년 9월 14일은 황후가 현대 의술에 의한 최초의 진단을 시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가 설립한 경신(儆新)학교와 엘러스가 세운 정신(貞信)여학교는 한국 장로교단 최초의 남매 학교이다. 경신사(고춘섭 편저)에 따르면 “1887년 언더우드학당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목욕을 시킨 다음 새 바지저고리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어 땋아 주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여자임을 발견하고 언더우드는 기겁을 했다. 곧바로 제중원 여의사 엘러스가 거주하는 옆집으로 보내 정동여학당의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정신백년사(박광현 편저)’에는 “1887년 6월 엘러스 선교사는 정동 소재의 제중원 사택에서 한명의 고아(5살, 정례)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얼마 안가서 그해 겨울에는 3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시초이고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정동 1번지이다.”라 했다. 그는 정신여학교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으로 1888년 9월까지 봉직했다. 그 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게 되어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기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1926년,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재차 내한했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8일 서울 정동 그레이 하우스에서 별세하여 10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경성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은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 학교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그린필드 선교사>

 

마우드 S. 그린필드(Greenfield, Maud Saxe) 여성 선교사


마우드 S. 그린필드(Greenfield, Maud Saxe, 1874-1910)는 1874년 미국 뉴욕주 왈덴(Walden)에서 출생했다. 1907년 9월 15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Greenfield, M. Willis)과 함께 내한하였으며, 1909년 정신여학교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전임자였던 제5대 교장이며 에드워드 H. 밀러(密義斗)의 부인 헨리 밀러(Miller, M. Henry)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여학교 교장 재임 중인 1910년 1월 5일 아들 그린필드(Greenfield, Willis Saxe)를 낳았지만, 산후 후유증으로 1910년 1월 29일, 출산한지 3주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1909년 9월 한국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시신의 매장 준비(Preparation of the body for burial)"라는 제목의 논문을 선교잡지(KMF)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묘비에는 여성 선교사로서 한 아내와 어머니로 헌신한 그린필드를 사랑 가운데 기억하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Rom. 8:30)"라는 기록이 쓰여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남편 M. W. 그린필드 선교사


윌리스 M.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 權弼斗,權日斗 )는 1907년 9월 15일 부인(Maud Saxe)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1908년 3월 서울에서 경신학교 교장 서리로 취임하였으며, 다음해인 1909년 사임했다. 1908년 11월 11일 숭신방(명륜동)에 이석진 조사를 파송하여 숭신예배처소(명륜 중앙교회)를 마련했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같은 해 청송군 수락(水洛)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예배당도 건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에는 구미 옥계교회에 약 15평의 토당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1911년 이후에는 대구지역 선교부로 옮겨 경상북도 지방에서 폭 넓은 전도 활동을 하다가, 1911년 12월 6일 경상노회(慶尙老會)가 설립되면서 선교사의 선교 구역은 12개로 분구(分區)되어, 그린필드 선교사는 칠곡, 포항, 경산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게되었다. 1911년 칠곡군 남율(南栗)교회를 설립하고, 이사윤(李士允)조사로 하여금 시무 하도록 했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시골길의 장거리 전도여행 기록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913년에 경북지방에서 180여일 동안을 시골마을과 산길을 두루 걸어다녔는데 그 도보(徒步) 거리가 무려 6천리(1530마일, 2,461km) 이상이었으니, 참으로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1914년에도 열심히 전도한 결과 영일군 대전(大田)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으며, 같은 해 경산군에 조사와 권사, 임시전도사를 대동하고 김처진(金處鎭) 씨 집에 임시전도소를 마련하고 전도에 힘을 써, 경산군 경산읍 교회도 설립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1909년부터 1914년 사이에 교육과 전도에 관한 주제로 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 중에 1913년 10월 선교잡지(The Korea Mission Field)에 게재한 '대구지역 선교사업의 의의와 전망'에 관한 논문에서, "지나간 세월에 어둠 속에서 지내던 한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손길을 통하여 선교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국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 도움이 계속 될 것이다."라는 어록(語錄)을 남겼다. 그 후 1916년 6월 5일 장로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뒤에는 대구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동(1908-1914)하다가 귀국한 밀즈(Mills, Anna Rae) 여사와 재혼하여 여생을 보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 레이놀즈 선교사>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존 볼링 레이놀즈(Reynolds, John Bolling, 李保璘) 가족묘


레이놀즈와 팻시 보링의 둘째 아들로 1894년 9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20년 남장로회 교육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 광주와 전주 신흥학교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시립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70년 3월 20일 테네시에서 75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미국은 제2고향이고, 한국이 제1고향”이라고 하면서 한국을 많이 사랑했다. 평생 김치를 좋아했고, 애국가를 매일아침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죽음이 가까워지자 양화진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화장한 유해를 그의 부인이 연로하여 한국에 올 수 없어 소포로 보내졌다. 우체국 검열과정에서 유해가 ‘화공 약품’으로 오해받아 함부로 취급되고, 유골이 흩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선교사의 헌신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그렇게 외롭게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묻혔다. 하관식에는 원일한(언더우드 3세) 장로 부부 등 몇 분이 참석하였다는 것을 이강필 소장의 증언으로 알게 됐다.

 

아버지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햄덴 시드니 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외국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축구 야구 정구 등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892년 5월 5일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은 미국 남장노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때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선교사가 함께 내한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폭 넓게 헌신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어머니 보링(Patsy Bolling) 선교사


1868년 9월 28일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국적 현모양처로서 대외 활동보다 가정에 충실했으며 남편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출생 당년에 사망한 W. D. 레이놀즈는 레이놀즈 부부의 맏아들로 1893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같은 해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밀러 선교사>

 

밀러 가족 묘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ughes. 한국명 : 密義斗)


1873년 7월 18일 미국 펜실베니아 루스벌에서 출생했다. 로스앤젤러스에서 옥시덴탈 대학을 졸업(1898)하고 1901년 9월 10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미 북장로회 여성 선교사 헨리(Miller, Mattie Henry)와 결혼(1902)했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을 위한 학생교육에 진력(1905-1913)하였으며, 연희전문(연세대)에서 화학 교수와 이사로 활동(1918-1942)했다. 한편 1927년 12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12년간에 걸쳐 서교동장로교회 제3대 교역자(당회장)로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 전도부인 급여를 자비로 지원했으며, 응암교회를 설립하는 등 전도사업을 활성화했다. 교인들을 지도할 영수(領袖)와 서리집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선거를 통하여 임기제로 교인들 스스로 선임하게 했다.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한 면모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심씨라는 분은 '불신자(不信者)와 약혼'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교회 헌법에 위반하였다고 책벌(責罰,1933)받기도 했다. 박씨라는 분은 다른 교회에 출석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제명(1938)된 일도 있었다.  세례 문답에 있어서도 어느 교인은 성찬의 뜻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한글을 이해하지 못해서 탈락된 일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4차례를 거듭해서 세례 문답에 응했으나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사유로 성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학습 문답의 경우에도 3차례씩이나 계속해서 '도로 학습' 또는 '기다림' 등으로 판정하여 교인들이 보다 열심히 신앙 훈련을 쌓으면서 한글을 깨우치고 더 공부하도록 했다. 1928년 2월 19일에는 학국교회 역사상 3쌍동이(정순택-유순도 자녀)의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진귀한 성례식을 집례하기도 했다. 그는 행주교회와 도내리교회 당회장으로도 겸직한 기록(老會錄)이 있다. 또한 제1회(1911년) 노회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의 경충노회와 경기노회에서 서울을 포함한 경기남부, 청주 동편, 경기 중앙시찰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공천위원, 목사장립 예식위원, 정사위원 등으로 폭 넓은 노회 활동을 했다. 이 밖에 기독교서회 이사(1934), YMCA 이사 등으로 문서선교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같은 그의 폭 넓은 선교활동은 일본 당국자들에게 곱지 않게 보여 간첩 염의로 투옥(1941.12.27-1942.5.26)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강제 추방되어 194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천로지남(1914)'과 '예수께서 구원하심(1938)' 등이 있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미국에서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 방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1966년 6월 6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정신여학교 교장 헨리 밀러 (1873-1966)선교사 


M.헨리 밀러(Miller, Mattie Henry) 선교사는 1873년 미국 아이오아에서 출생했다. 1897년 훼어필드 파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까지 무디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1년 5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1902년 밀러(밀의두) 목사와 결혼했다. 정신여학교 제5대(1905-1909)와 제8대(1910-1912)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에 찬송가 수 십 곡을 번역하고, 정신학교 교가(校歌)도 작사 작곡했다. (주: 그후 정신교가는 아담스에 의해 곡이 바뀌고, 박목월에 의해 작사됨). 특히 M. 헨리 선교사는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 '초학지지' '산수 교과서' 등을 편찬하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의 교육선교 분야에 공헌했다. 1943년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기타 성공회 신부, 수녀 묘>

 

 성공회(Anglican) 선교사 묘역


한국에 내한한 최초의 성공회 선교사는 1890년 9월 29일 영국 캔터베리 대교구의 코프(Corfe, Charles John)주교였으며, 양화진에 처음으로 안장된 성공회 선교사는 1896년에 내한한 터너 제2대 주교였다. 양화진에는 1926년에 내한한 차드웰 주교와 1960년에 내한한 구드윈 주교의 묘지도 함께 있다. 이밖에 허지스(Hodges, 許世實), 카트라이트(Cartwright, 車神父) 신부와, 노라(Nora, 1849-1919), 웹스터(Webster, 1856-1898), 로이스(Lois, 1854-1899)수녀 등도 묻혀 있다. 그리고 찰스워스(Charesworth, ? -1904)를 비롯하여 성체 성사를 받은 외국인과 한국인 묘도 있다.

 

카트라이트(Cartwright, 車神父) 신부

 

카트라이트(Cartwright, 車神父) 신부

 

웹스터(Webster, 1856-1898) 수녀 

 

웹스터(Webster, 1856-1898) 수녀


 

<다니엘 기퍼드>

 

다니엘 L. 기퍼드 (1861-1900)와 부인  헤이든 M. 기퍼드(1857-1900)의 묘

 

다니엘 L. 기퍼드 (1861-1900)와 부인  헤이든 M. 기퍼드(1857-1900)의 묘


다니엘 L. 기퍼드 (1861-1900)는 1888.10.27 미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 새문안교회 교역자, 경신학교 교장으로 목회와 교육 분야에 폭넓게 활동 하였다.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00.4.10 경기지방 선교 중 이질에 걸려 별세하여 양화진에 별세 하였다. 부인 헤이든 M. 기퍼드(1857-1900)는 1888.9.29. 미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 정신 여학당장과 여성 선교사역으로 경기지방과 황해도 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헤이든은 1895년 54곡의 찬송가 집을 출판 하였고, 이어 1898년 83곡, 1900년 87곡의 제 3판을 공동 출판 하였다. 이 찬송가는 장로회 선교 본부로 부터 최초의 공인 찬송으로 채택되어 장로 교단이 사용하게 되었다.  헤이든은 서울 남쪽 지방을 순회하다가 이질에 걸려 1900.5.5. 남편과 함께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제임스 무어, 모 야곱, 처 조카 캐더린 A. 킬보른 >

 

제임스 H. 무어 (모 야곱, 1914-1967) 의 묘

 

제임스 H. 무어 (모 야곱, 1914-1967) 의 묘


제임스 H. 무어 (모 야곱, 1914-1967) 는 1914.9.27. 미국 뉴욕 존슨시티에서 태어나 1939 애즈베리 대학교, 1945년 드루신학교, 1946년 코넬 대학을 졸업했다. 1947년 10월 미 북 감리회 선교사로 1948년 뒤따라 온 부인과 함께 시청각 교육국의 전신인 음영위원회에서 한국 기독교 음영 및 연극 선교에 공헌 하였다. 1967년까지 기독교연합회에서 시청각부장으로 봉직 하면서 시청각 교육 뷴야에 크게 공헌 하였다.  1967.4.4. 서울 마포구 신수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한 후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그의 부인 모진주(마가레트 무어의 자리가 옆에 마련되어 있다. 묘비에는 "참된 목사 참된 선교사"라 기록되어 있다. 

 

제임스 H. 무어 (모 야곱, 1914-1967) 의 처 조카 캐더린 A. 킬보른의 묘

 

캐더린 A. 킬보른의 묘


캐더린 A. 킬보른은  제임스 H. 무어 (모 야곱, 1914-1967)의 부인 마틴 마가레트 무어(모진주)의 여동생의 딸이다. 여동생 에드나는 성결교 선교사 에드윈 W. 킬보른과 결혼하였다. 킬보른 선교사는 191949년에 내한 서울신학대학 2대 학장을 지냈다. 캐더린 A. 킬보른은 그의 딸로 1950.5.8. 어린나이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촬스 A. 사워 부부와 아들 로버트 G. 사워 추모비


촬스 A. 사워(1891-1972)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921년 부인과 함께 내한 평북 연변선교부에서 숭덕학교 교장을 하였다. 안식년 후 1929년 목사 안수을 받고 1932년 공주 영명학교로 전임 농공분야와 실수 교육에 전념 공주 지역 농가 소득에 기여하였다. 1936년부터 감리교 총리원에서 회계직을 맡아보다 일제에 의해 1941년 본국으로 강제 송환 되었다. 1949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계로 교회 복구 사업에 헌신 하였다. 1949-1958년까지 연세대 외국어학당장으로 봉직 하였다.  1962년 70세로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1972.9.13.  오하이오 애실리에서 별세 하였다. 로버트 G. 사워(1925-1995)는 촬스 사워의 둘째 아들로 1925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미국 웨슬리언대학교, 오하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1956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1957년 부터 연세대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밖에 그는 배화여중고, 광성학교, 배제학교, 영명학교, 외국인학교 이사로 활동하였다. 1995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촬스 사워 가족은 2대에 걸쳐 한국에서 헌신한 선교사 가족이다.

 

촬스 A. 사워 부부와 아들 로버트 G. 사워 추모비

 

플로렌스 힐(Hill, Riley Florence, 許日夫人, 1891-1922)

 

플로렌스 힐(Hill, Riley Florence, 許日夫人, 1891-1922)


영국에서 출생하여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구세군 최초 선교사 일행으로 1908. 10. 1 내한하였다. 호가드 사령관의 비서로 일하다가 1909. 3. 27부터 충청지방관으로 대천, 은진, 서산과 전북 군산 등지를 걸어서 전도했다. 1912. 2월에는 호가드 부인과 대흥 홍산 지방의 험로를 말을 타고 다니며 집회를 인도 하고, 같은 해 4월에는 전북지방(여산, 은진, 익산, 고산, 금구)을 순회 집회하였다. 1913. 2월에는 경북 지역을 걸어 다니며 전도와 부인사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1913. 6. 11 힐(Hill, Alfred William, 許日)과 결혼하고, 남편이 충청지방관에서 사관학교장으로 임명(1917. 5. 3)되므로 서울로 옮겨 부인회 집회 인도와 여자 사관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순직 선교사에 관한 글도 썼다. 1922. 1. 5 사관학교 사택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여 신태빈(Stevens) 사령관 집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오벨리스크 형식의 묘비에는 "東出十三年餘之生命 爲朝鮮民族獻身日日歡迎", “Jesus, Jesus, Precious Jesus(예수, 예수, 귀한 예수)”라 쓰여 있다. 옆 자리에는 아들(윌프레드 힐)도 묻혀있다  (글 출처- http://www.yanghwajin.co.kr/신호철장로)

 

제임스 A. 웨이드와 리 맥클린톡 웨이드 부부의 묘

 

제임스 A. 웨이드 (1930-1983)


제임스 A. 웨이드는 1930.1.5. 일리노이 그라니트에서 출생하였다.1952년 시카코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미육군으로 내한 하였다. 1960년 부인과 함께 내한한 그는 연세대 음대 교수 등으로 폭넓게 활동 하였는데 많은 작고 활동을 하였다. 그 중 오페라 "순교자"는 유명하다. 1983.8.1.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부인  맥클린톡 웨이드의 묘


리 맥클린톡 웨이드 (1936-1973)는 1936년 미국 세인트루이에서 출생하였다.  제임스 웨이드와 결혼하여 1960년 남편과 함께 내한 하였다. 용산 미군 도서관 사서로 1973년까지 활동 하였다. 1973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백인 혼혈 주디 홀트(1955-1955)


주디 홀트는 1955.1..30 출생 버려진 전쟁 고아로 1955.6.22.  혼혈아 입양 창시자 해리 홀트(1905-1964)에 의해 입양되었다. 주디 홀트는 입양된 후 한달 후 1955.7. 21. 사망하였다. 1955.6. 해리 홀트는 내한하여 8명의 혼혈아를 입양하였다. 주디 홀트는 가장 나이 어린 아이로 잠간 동안 이나마 해리 홀트의 사랑을 받았다. 주디의 장례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집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