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 7 (마 6:9-13)

2010. 10. 24. 01:35목양자료/3.강해설교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예수님은 기도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시고 저녁에는 또 다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앞에 두시고서는 언제나 먼저 기도로서 준비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며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본문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주기도문에 나타난 방식대로 그 정신에 따라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주기도문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주기도문적인 기도는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말씀 중심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서로 한 짝입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때 예수님은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며, 둘째는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니라. 바로 이 두 가지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높이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문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야 함을 발견합니다. 주기도문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처음 나오는 3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광 돌리는 마음도 없이 사람에게 보이려고만 기도했습니다. 자기들이 영광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국이 낳은 명장 가운데 찰스 조지 고든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수단에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입니다. 그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직접 군인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갔습니다.


그런데 고든 장군이 기거하는 막사 앞에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하얀 손수건 한 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 손수건이 걸려 있을 때에는 특별한 용무가 아닌 한 그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그 손수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바로 고든 장군이 매일 아침 하나님께 기도하던 시간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제작하며 동상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대로 만들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작위를 주고 포상금을 지급하려 했으나 그것마저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그를 겨우 설득해서, 그의 업적을 새겨 넣은 자그마한 금메달 하나만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유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보여야 할 금메달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 금메달은 그가 애지중지하던 것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 금메달의 행방을 찾아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그 금메달을 녹여서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아끼던 것을 오늘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바쳤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삶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를 바랍니다.


2.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내용 중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드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져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로 쓰여 있을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모두 우리입니다. 나 개인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를 드리지 말고 이웃을 위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도에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어느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 따로 서서 자신을 뽐내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런 기도여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나는 물론 언제나 우리여야 합니다. 이웃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님의 본받아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여 응답 받고 사랑 받는 기도의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2 (마 6:9-13)


오늘도 “이렇게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주기도문 두 번째 강해시간입니다. 아무렇게나 기도한다고 기도가 아닙니다. 확실히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계속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이 부름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대부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마6:6에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하셨고, 예수님도 “아바 아버지여”(막14:36) 하시며 아들 신분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부자지간이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는 자녀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고 자녀는 마땅히 아버지께 받아야 할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믿음과 용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부자지간의 관계로서 기도할 때 진정 응답 받는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로 없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우리가 범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우리도 조금만 믿음 떨어지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내가 무엇이 예뻐서 들어 주실까? 내가 한 일이 없으니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구할 엄도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예수님의 공로로 하는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아버지께 받을 자녀의 권리로서 구하는 것이지 종도 남도 아닙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 부자지간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다면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같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말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교훈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거룩이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존경 받으시고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방송을 통해서든지 신문을 통해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을 높이는 소리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아직 4분의 3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북한 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회교를 믿는 중동이라든지 오대양과 육대주의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척하거나 식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때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결부시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기쁘시게 들어주십니다. 출 32장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범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노하시고 모세에게 그들을 다 진멸시켜 버리시고 모세를 통해서 큰 나라를 이룩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의 기도가 위대합니다. 출32:12에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이 백성들 소행으로 봐서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방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졸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나를 위해서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나를 위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결부시켜 기도할 때 기도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더욱 당당해지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고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참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우리 주님을 본받아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확신 있게 구하여 모두 사랑 받고 응답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3 (마 6:9-13)


우리 영적 체험의 첫째는 기도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다 아름다운 체험하는 건 아닙니다. 기도를 잘 배우고 배운 대로 바로 실천할 때 하나님과 깊은 영적 관계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기도문 속에는 바른 기도의 정수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예수님의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5. 하나님의 나라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0절 상반부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에게 그리고 이 세상 곳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막9:1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현재적 하나님의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상대적으로 사단의 나라를 멸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두 종류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 하나는 사단의 나라입니다. 사단이 아담에게서 세상 왕권을 빼앗아 합법적 왕권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다 이기심으로 예수님이 그 왕권을 빼앗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단과의 충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영이 있는 곳은 사단의 나라가 임해 있고 반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사실도 모르고 왜 이 세상에 흉악한 일이 있느냐고 하나님이 정말 계시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영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어도 사단의 영을 허용한다면 그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사단의 나라는 무너집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벙어리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사단의 나라는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임하는 현재적 천국이 임할 때 모든 것이 풀립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인생을 살고 이것을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활개치도록 방치하고서 무슨 평안과 형통이 있기를 원합니까?

 

이것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기도와는 다른 기도입니다. 그들의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메시아관은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모든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세계를 다스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나라는 땅에 속했고 당시 사람들은 로마 압제 하에서 혁명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도 칼을 품고 다니는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종들이 칼로서 싸웠을 것입니다. 국방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처럼 한 단계 위를 보고 악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다니엘이 금식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천군장 미가엘이 도우므로 악의 정권 파사의 배후에 있는 악의 군대가 무너지고 따라서 세상 악의 정권도 무너졌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땅의 정권도 개선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1973 빌리그레이엄 대성회를 시작으로 거의 해마다 여의도 광장에서 대성회가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1974년 8월 한국기독교가 엑스플로 74성회로 여의도 광장에 100만 명 이상 모여 한 주간 내내 주야로 민족복음화와 국가를 의해서 기도했습니다. 날은 덥고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가 하면 비가 와서 우중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방종교의 중흥을 꾀하려는 거두를 제거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나라의 안정과 교회의 부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는 서기관의 기도와는 달라야 합니다. 진짜 악의 배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교회에 직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부패한 사회와 위기에 처한 나라와 사악한 북한 정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교문화권 이슬람문화권 힌두교문화권 기타 잡신문화권에 사단의 지배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려 주실 때 이 땅은 평화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6.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0절 하반부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천국이 왜 아름답고 위대합니까? 왜 천국에 사는 성도들은 모두 행복하고 기쁠까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언제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며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에 천국인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거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 속에는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단에 매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사모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면 만사형통일 텐데 자기주장과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 해도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부르짖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억만 배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당신의 소원들 가운데 한 가지만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시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아뢰겠습니까?" 그때 그는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장 원하신 것으로 이루어 주세요.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무엇이 절실하게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구하라는 것은 내 뜻 철저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항상 성경 말씀대로 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모하고 여쭙고 기다리고 갈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복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신 기도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구하고 또 그의 옳다 하시는 의도 구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여 그의 원하시는 대로만 살면 사랑 받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여 주여 이름은 부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책망하시며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눅6:49)다 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버리고 주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전파하셨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워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내 뜻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천국과 동일하게 함께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4 (마 6:9-13)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할까?


7.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은 무엇일까요? 마6:25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육신의 것은 아버지께서 다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의 양식이 없다면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항구적이든 임시적이든 무슨 길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세상 어떤 적선보다 더 큰 적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날마다 육신의 양식 구해서 지금 먹고 삽니까? 우리나라에서 육신의 양식 구하는 사람  과연 몇 %나 될까요? 대부분은 구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지 않습니까?


그럼 이 양식은 무엇일까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듯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우리가 날마다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양식입니다. 구하는 양식이 다릅니다. 요 4장에 나오듯 제자들이 구하는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었지만 예수님의 양식은 영혼의 양식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입만 벌리면 구하는 것이 육신의 양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가득히 저장해 부자 되기를 날마다 갈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약자의 재산을 삼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어 많이 거둔 후에 곡간을 새로 짓고 그 속에 여러 해 쓸 곡식을 채워놓았습니다. 그는 만족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 여러 해 쓸 곡식들을 많이 쌓아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고 편안히 즐기며 쉬자."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부자도 되게 하셔요. 상상할 수 없는 부자도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물질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목적이 있습니다. 선한 사업에 힘쓰라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업을 위해 풍성하기를 구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구하는 것은 영혼의 양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똑같은 간구가 눅11:3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생각날 때마다 이따금씩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날마다 은혜의 양식을 갈망해야 합니다.


양식이 무엇일까요? 요4:3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양식입니다. 사명도 양식입니다. 매일매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도 양식입니다. 오늘도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매일 그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육신의 양식만 구하고 영혼의 양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영혼이 잘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돌아보세요. 육신의 본능에만 사로잡힌 기도가 아니었습니까?


영혼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요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짝입니다. 이렇게 기도했다면 말씀의 원리도 그래요. 영혼이 잘 되어야 다 잘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빼고서는 이것이 신령한 원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영혼과 육체가 다 잘될 수 있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영혼의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 그리고 매일매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육신의 양식에서 벗어나 영혼의 양식을 구하여 영혼은 물론 육체까지도 잘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5 (마 6:9-13)


계속하여 산상보훈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본받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이 시간에는 주기도문 중에서 죄 사함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8.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함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죄는 빚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이 빚지고는 살 수 없지요. 무엇보다 죄의 빚은 철저히 정리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는 원문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채무자를 이미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채무를 이제 용서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이 기도는 더 이상 죄악의 채무에 시달리지 않고 죄책감을 훌훌 떨쳐 버리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미국 뉴욕시 근교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 특이한 비석이 하나가 서 있다고 합니다. 다른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쓰여 있는 비문이 특이합니다. 한 단어만 쓰여 있습니다. 이름도 태어난 날도 부름 받은 날도 아니고 딱 한 단어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Forgiven" 곧 "죄 사함을 얻었다."는 한 마디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평안하게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그렇게 적게 한 것이었습니다.


죄 사함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없이는 영원한 안식도 평안도 임재의 기쁨과 즐거움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은 예수 믿는 자라면 다 받은 것입니다. 롬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랬습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 자는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죄 사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죄 사함을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또 사함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까?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그 영역은 무엇이고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그 영역은 자범죄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그 사실을 요한복음 13장에 잘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베드로가 못 마땅해서 발 씻기를 거부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상관이란 관계를 뜻합니다. 이 상관은 다른 단절이 아니라 교제의 단절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경우처럼 잠시 믿음 없어 하갈을 첩으로 맞았다가 13년이나 침묵하셨습니다. 교제의 단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그러하시다면 내 발뿐만 아니고 내 손과 내 머리도 함께 씻겨 주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여 졌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발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더럽혀진 심령상태나 주님을 슬프게 해드린 여러 자범죄들입니다. 주님을 슬프게 하면 교제가 막힙니다. 기도가 막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법적인 죄 사함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자녀의 친밀한 관계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욕이 우리가 믿을 때 받는 영원한 죄 사함이라면 발 씻음은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완악한 마음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잘못을 회개할 때 그 겸손함을 보시고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맘을 서운하게 했다면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도의 죄는 부자지간을 파괴할 만큼의 죄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잡혀 있던 방탕한 아들을 빚을 갚고 빼내왔지만 집에 와서 감사할 줄 모르고 자꾸만 아버지에게 대항하면 아버지께서 기뻐할까요? 법적으로 영원한 내 자식임은 틀림이 없지만 관계는 나빠집니다. 그래서 잘못할 때는 징계도 하십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법적인 속죄만 강조하고 삶속에서 하나님을 서운하게 하는 일에는 상관이 없다 합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죄 사함도 모르는 자이고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주장입니다. 우리가 보혈의 공로로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면 고백되어야 합니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죄송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의 기도는 최소한 양심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도 속에는 최소한 양심적인 기도여야 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의 크고 영원한 속죄를 받았음에도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살다보면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마다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천인공노할 양심불량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단서입니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잘 해주는 이웃만 사랑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축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마5:43∼44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자기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민망한 일입니까?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해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그 모습은 아닌지,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게 지적하시는지 예수님의 지적이 놀랍습니다. 산상보훈을 강해하면서 번번이 우리 주님의 날카로운 지적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수들을 긍휼히 여기고 축복하지는 않는 체 내 죄만 용서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거져 주시는 영원한 속죄를 받고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남에게 베풀지 못한다면 그것은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기도를 아버지께서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임금에게 큰 빚을 진 신하가 나옵니다. 금 일만 달란트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신하가 빌기에 불쌍히 보고 빚 전체를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신하는 그런 큰 은혜 받고서도 자기에게 빚진 동관을 용납하지 못하고 갚겠다는 동관을 잡아 가둘 때 그걸 본 사람들이 심히 민망하여 임금에게 고할 새 임금이 그 듣고 노하여 신하에게 다시 빚을 갚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마18:35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기도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평안과 긍휼과 회복과 기쁨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 말씀 가지고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벗들을 위해 빌매 여호와께서 돌아보시고 건강을 회복하시고 전보다 갑절이나 복 주셨습니다. 죄를 자백했는데도 이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가 하는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고 용서한 만큼 사랑과 용서를 누린다는 사실입니다. 최소한 주님 보시기에 민망하지는 않게는 믿어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사랑을 구하고 용서를 베풀면서 용서를 구할 때 아버지의 사랑의 영이 흐르고 용서의 영이 우리에게 흐르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기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기도였다면 고치시기 바랍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우리도 함께 실천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6 (마 6:9-13)


이렇게 기도하라.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신 기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간구는 천국에 가는 그 시간까지 어떤 환경, 어떤 시험이 와도 승리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교회에는 두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지 않는 일이 오면 시험 드는 신자와 무슨 일이 생겨도 시험 들지 않고 더 씩씩하게 신앙생활하는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우리는 약하고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참으로 절실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시험이란?


좋은 시험 - test
마귀 시험 - temptation


그럼 시험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시험"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좋은 의미, 다른 하나는 나쁜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너의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드려라." 이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test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시험입니다.


반면에 악한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시험했습니다. 또 마귀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나쁜 의미의 시험입니다. 이것을 영어에서는 "temptation" 즉 "유혹"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시험에는 이기고 봐야 합니다. 좋은 시험이라고 방심하면 복을 받을 수 없을 것고, 나쁜 시험 역시 방심하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기고 봐야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어떤 시험이든 이기고 볼 때 사탄은 물러가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 받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2.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환경따라 시험드는 자인가?
시험을 이기
는 전천후 신자인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시험을 없게 해 달라고 가르치지 않으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해 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시험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아니면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 기도합니까?


시험이 오면 물리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리쳐도 사라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연단시키시는 훈련용으로 생각하고 참 신앙훈련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기도는 없고 시험을 없게 해달라고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히 메시아가 오셔서 모든 정치적 압박과 가난과 고통에서 해결해 주시고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치심은 어떤 시련이 있다 해도 시험에 들지 않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지 않아야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와도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시험이 많았지만 그 환경에서 신앙으로 이기다가 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불같은 시험이 많았지만 거기서 신앙으로 승리하고 복을 받았습니다. 시험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기회가 왔고 그들이 큰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 당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거기에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정금같은 신앙으로 만드시려 하심입니다. 교만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일한 시험을 받는 자들을 돕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나라를 더욱 동경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생각을 틈타고 들어와서 악으로 시험합니다. 혹은 함정을 파고 넘어지기를 바라고 미끼를 던지고 유인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부패를 자극시키고 분발시킵니다.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위장시킵니다. 일시적으로 중단했다가 다시 공격합니다.


또 사탄은 거짓 것을 믿게 합니다. 사탄은 성도를 교회와 떼어놓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열시켜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유혹으로 범죄하게 합니다. 영적 생활을 방해합니다. 어느 성도가 기도하려고 하면 30분만 되어도 졸음이 오고 힘이 빠져 기도하기 어려웠는데 이게 사탄의 방해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기도했더니 몇 시간이고 기도가 잘 되더라는 간증이 있습니다.


3. 우리를


나만 위한 기도인가?
공동체를 위한 기도인가?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랬습니다. 우리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도 필요하지만 우리를 위한 기도도 많아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친척 친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평안이 우리의 평안이요, 공동체의 어려움이 곧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과 말씀으로 더욱 강해져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어떤 환경에서도 시험 들지 않는 영적으로 건강하고 강한 전천후 성도가 되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평안할 수 있도록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7 (마 6:9-13)


이 시간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지막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송영 부분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하면서 기도의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확신 가지고 돌아가야 응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부분이 괄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고대 신약사본들 가운데는 이 부분이 빠져있는 사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되어 있는 사본도 있기에 전통적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는 이 부분도 암송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와서 대개가 어딧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마지막에 의문점이 하나 있지요? 우리가 주기도문할 때 한글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대개”라는 말을 삽입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대개가 뭘까요? 대충, 대략이라는 그런 뜻입니까? 여기 "대개"는 헬라어 "호티"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 단어는 "왜냐하면," "그 이유는"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입니다. 대개라는 단어에서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을 봅니다.


응답 받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1. 진리에 타당해야 합니다.


즉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그동안 주기도문으로 구했던 그 내용의 타당성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구한 이유는 그런 뜻입니다.


즉 영광의 아버지시니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마땅하고, 온 우주가 다 아버지의 나라이니 이 땅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고, 아버지께 모든 권세가 있으시니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심은 물론 그 무엇도 하실 수 있으시기에 이렇게 구했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타당성 있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주는 기도의 교훈은 타당성 있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 합리적 잣대의 타당성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타당성 기도입니다. 먼저는 아버지의 뜻이어야 하고,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아버지께서 보실 때 타당하면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시니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나라, 권세, 영광 이 세 가지는 타당성의 3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구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성경에 어긋난 기도를 하면 잘못 구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영광 돌릴 목적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가장 타당성 있는 기도입니다.


2. 주님의 공로여야 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즉 이제까지 구한 것은 아버지의 그 아름다운 사랑과 권세와 능력과 책임지심을 의지한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이 내용에 기도의 공로성이 명백히 나타납니다.


기도란 내 공로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이 없으니 구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좋으신 아버지 의지해서 하는 것이고, 예수 이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14:13-14에“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야곱이 에서로 변장하고 아버지에게 축복 받았습니다.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창27:22) 하며 축복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사랑과 예수 공로 의지해서 하면 다 들어주시는 중요한 기도 응답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내가 구제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의로우니 들어달라고 자기 공로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명분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3. 응답의 확신 가져야 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즉 “제가 이렇게 구한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 기도에서 기도의 확신을 느낍니다. 당연한 걸 정당한 방법으로 당연하게 구했으니 응답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옳게 구했느냐 입니다. 옳게만 구했으면 응답은 100% 믿어도 됩니다. 요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십년을 구해도 바르지 못한 기도는 응답이 없지만 바른 기도는 하루를 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맨 끝 단어가 “아멘”입니다. 진실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진실로 진실로"는 헬라어 "아멘 아멘"을 번역한 것입니다. 기도하고 진실로 그렇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쓸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에 한 번 기도한 다음에는 다시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아도 틀린 말입니다. 기도하고 잊거나 기도한 걸 기억만 하고 있어서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늘 그 제목으로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시인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기도하고 아멘의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타당한 기도를 드리고, 내 공로가 아닌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이름의 공로로 기도하고, 아멘의 확신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아름다운 기도의 응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