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은 없다.

2010. 10. 7. 23:08목양자료/3.강해설교

다른 복음은 없다.

 

문동학 목사님의 갈라디아서1~2장 강해 설교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1절-10절

 

 

갈라디아서는 영적 자유의 ‘마그나 카르타’, 종교개혁가들의 전쟁선포문, 그리스도인의 독립선언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이름으로 종교에 예속되어, 순종의 간판 아래에서 종교적 권위의 노예로 살며, 복음의 껍질을 쓴 율법의 늑대들의 먹이거리로 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헌법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종교와 율법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때,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높이 치켜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복음이라는 탈을 쓴 율법적 종교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자유인으로 살 수 있도록 영적 그리스도인의 주민등록증을 새롭게 발급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은 당신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종교와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면, 이제 갈라디아서 말씀과 함께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될 것이며, 이 통찰력과 더불어 당신의 영적 여정은, 그 방향과 과정이 결정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복음의 은혜, 그리고 복음 안에서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에 관해서 명확하게 정립하는 여행을 저와 함께 시작합시다.


시작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전쟁


교회 역사학자들은 “종교 개혁의 기초는 개혁가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이었다”고 말합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말하자면,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 Katherine - 캐서린은 그의 아내이었다 -이다”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works)이라는 교리를 천년이 넘도록 가르쳐 왔습니다. 이에 반하여 개혁가 루터는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grace working through faith)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새롭게 발견하고 선포했는데,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주석을 쓴 메릴 테니 Merril C. Tenney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갈라디아서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단지 또 다른 유대 종파의 하나로 남아 있었을 것이며, 서구의 사상은 전적으로 이방적이 되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키게 만들었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모퉁이돌이었다. 왜냐하면, 오직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은 개혁가들이 외쳤던 내용이기 때문이다.1)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의 메시지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슬과 종교적 율법주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지인데, 이 메시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별히 우리 세대에 아주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교회가 종교적 율법주의로 전락해 가는 현상이 요즈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측면입니다. 이 이유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신학적 이해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나라의 사회가 개인적 자유주의로 인하여 분열과 혼란이 현상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측면입니다. 이 이유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어느 때보다 갈라디아서를 철저하게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깊이 있게 살펴 보면서, 그 말씀 안에 있는  은혜의 보석을 캐고, 그 보석을 귀하여 여기며, 그 보석 이외의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중요한 시작(1-5절)


갈라디아서는 편지로서, 당대의 일반적인 편지가 갖고 있는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보내는 자, “바울은”, 수신자인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것이 편지의 전형적인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전형적인 양식에 여러 가지 내용을 덧붙이면서, 바울은 이 편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시작은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보내는 자, “바울”을 말할 때, 즉 스스로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사도권(apostleship)에 대한 주장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에 대한, 비판과 부인(denial), 그리고 반대와 공격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는 시작부터 ‘논쟁적’입니다. 바울 자신을 비판하고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 자신이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앞으로 갈라디아서에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갖고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즉 제1차 선교여행 때,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지방(오늘날 터이키 지방)에서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교회를 여러 개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 때,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오염된 메시지’ polluted message를 퍼뜨렸고, 이것이 전체 복음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교를 받아들어야 한다 -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알고,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즉,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제1차 사도총회가 있기 바로 전에,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하면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편지를 쓰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복음의 진리 위에 올려 놓기 위한 기도와 희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이 서신을 받고,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주후 40년 어간에 쓰여진 이 편지는, 그 후 2천년 동안, 교회의 빛과 나침반이 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종교적 율법주의로 타락하는 교회에 대한 경고이면서, 복음의 회복을 위한 나침반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4절) 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로 한 것은, 주님의 희생입니다. 우리의 죄가 대속받기 위하여 필요로 한 것은, 주님의 희생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이 주님에게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내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그래서,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영광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1장 4절과 5절은, 갈라디아서의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는데, 앞으로 계속해서 더 깊이 있게,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편지 서두를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편지 쓸 때, 인사를 마친 후, “다름이 아니오라.... ”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6절부터 갈라디아서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6-10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인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을 잊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할 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속적이있고, 분열과 갈등이 심했고, 비도덕적이었고, 미성숙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대해서는, 이러한 칭찬과 감사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걱정과 우려, 그리고 꾸중과 질책을 먼저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의 인격이 이 정도로 미성숙한 것입니까? 바울이 상식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만큼, 갈라디아 교회의 현실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문제는 바른 교리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바른 생활에 대한 문제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논쟁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그들의 생활이 나빴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달랐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침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이 짓밟히고, 그 대신에 선행(good deeds)과 공로(works)의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교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저주를 가져 올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속히, 그렇게 빠르게, 그들이 복음을 떠나, 율법으로 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을 전해 받았을 때, 그것은 은혜와 진리의 복음이었습니다. 일제 시대와 육이오 전쟁 전후,  그때의 설교를 읽어 보면, 복음과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70년 대, 이후, 한국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설교를 듣거나 읽어 보면, 복음 대신 율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93.5 퍼센트가 율법적 메시지라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경험적으로 판단해 볼 때에도, 90 퍼센트 이상의 교회가 율법적 설교, 율법적 목회, 율법적 신앙, 율법적 생활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은, 성경적, 보수적, 정통적, 그리고 복음적 신앙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은혜가 충만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복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율법적인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것,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한 세기도 되기 전에, 복음에서 율법으로 전락했을까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은혜에서 행위로, 자유에서 예속으로, 사랑에서 두려움으로 전락했을까요? 사실 이러한 전락은 복음이 종교로 전락하는 현상입니다. 종교는 본질상 율법적입니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 즉 율법주의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하는지, 바울의 말을 모아 볼까요? 6절, “너희를 부르신 이, 하나님을 떠났다.” 7절, “다른 복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했다.” 8절,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절,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절,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심각성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 이러한 표현은 극단적입니다. 이 표현보다 더 이상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자주 쓰는 성품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교회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의식하면서, 쓴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의 수신자가 되는 교회치고, 문제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대하여, 갈라디아서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한 곳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복음에서 율법으로 전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것으로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과 율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복음과 율법이 병행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과 율법이 50% 대 50%, 또는 80% 대 20 % - 섞여있을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복음입니다. 복음에 율법이 섞이면, 그것은 율법입니다. 위조지폐가 무엇입니까? 99퍼센트는 진짜이지만, 1퍼센트가 가짜인 것은, 위조지폐 아닙니까? 90퍼센트의 복음이지만, 1퍼센트의 율법이 섞이면, 그것은 율법입니다.



당신은 지금 두렵습니까? 염려하십니까?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당신이 이제까지 희생하고 헌신한 대상이,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당신이 피와 땀을 흘리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이,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에 답이 있습니다. 제가 갈라디아서를 여러 기회에 여러 차례 강해하면서, 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무엇을 느껴 왔는지 아십니까? 저는, 목회자들 모임과 신학생 모임, 그리고 여러 평신도 성경공부 모임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수 차례 강의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어렵다는 느낌입니다. 무엇이 어렵다는 것입니까? 율법을 받아들이기는 쉬워도, 복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저절로 이해가 되고, 저절로 수용이 됩니다. 하지만, 복음은 진리를 가르쳐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자신이 복음적 신앙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말입니다. 또,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할 때에는, 논쟁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자체가 논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치명적이리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시작할 때에, “갈라디아서 말씀은, 당신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자주 읽어 주십시오. 갈라디아서에 관한 주해서나 참고자료들을 읽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함께 참여하십시다. 당신이 열정적으로 참여할수록, 말씀의 은혜가 더욱 뜨겁게 임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 자유의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가들의 전쟁선포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독립선언문입니다. 갈라디아서와 함께, 당신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함께 당신에게 복음의 은혜, 그리고 자유의 기쁨, 그리고 진리의 즐거움으로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복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 이것을 깨닫고, 그 기쁨 가운데 사는 당신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오직 계시

 

 

갈라디아서 1장 11절-24절



2003년 1월 17일자 모 일간지에 콧수염에 대한 재미있는 컬럼이 있었습니다.


중세 프랑스 프랑수아 1세는 어느 겨울날 술마시고 근위대장과 눈싸움을 하다가 입술에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를 숨기고자 수염을 길렀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염 기르는 것이 프랑스 내에서 크게 유행했다.  그런데 이를 국왕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 하여 귀족 이외에는 수염 기르는 자에게 권리금을 지급토록 하여 유행에 제동을 걸었다. 러시아의 피터 대제(大帝)도 유럽처럼 수염을 깎는 풍속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풍속개혁을 선포했고, 수염 기르는 자에게 세금을 부과시켰다. 이에 수염이 간판인 러시아정교 동방교회의 성직자들이 성이 났다. ‘수염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항의하여 일부지역에서 소위 수염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카스트로나 비트족을 비롯하여 이념이나 체제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수염을 기르는 것이 이 러시아 수염의 반란에서 비롯됐다 한다.


러시아 정교 동방교회의 성직자들이 한 말, ‘수염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수염에 대한 논쟁은 풍속과 관행의 결과이었습니다. 이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둘째, 수염에 대한 풍속의 갈등, 그 이면에는 민족적 갈등, 즉 민족적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염에 대한 갈등, 그 이면에는 체제에 대한 반항, 즉 정치사회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풍속과 이데올로기와 정치사회적 입장을 갖고 서로 싸우면서, 그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법’과 연결시켰습니다. 즉, 우리의 풍속, 나의 신념, 나의 정치적 입장이 ‘구원의 길’인 것처럼, 교리화(dogmatized)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염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교리, 또는 율법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물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교리와 전통의 부정적 단면을 하나 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교리가 이런 배경과 함께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천년 교회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일반종교들의 분쟁의 역사를 살펴 보면, 교리와 교파의 발전의 역사는, 그 교리와 교파의 주체가 되는 그룹들의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파, 교단의 분열의 역사를 깊이있게 살펴 보아도, 교리적 갈등 때문에 교단과 교파가 분리된 것도 있지만,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재정적 갈등 때문에 교단이 분열되고, 분열된 교단과 교파들이 자기들을 정당화시키고 신학화시키기 위하여 특정 교리를 강조하면서 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교파 분리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를 피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교리의 기원이 사회적인지 정치적인지 그래서 지극히 인간적인지, 아니면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열매인지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서, 그래서 인간적인 기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직 계시(11-12절)


1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절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 말씀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 - 즉,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복음’에는 최소한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계시가 성취된 것이다. 둘째,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살았는가 - 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셋째, 이 구원의 문은 유대인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 첫째와 둘째 차원은 종교 개혁이후, 즉 개혁교회의 시작과 함께 신학적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셋째 차원, 즉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가?’ 는, 바울 시대에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관심의 초점이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 - 이것이 바울과 유대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유대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가르침은 용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도 그들에게 용납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례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전제로 해서,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 - 만들어 진 것 - 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진리는, 인간적인 교리도 아니고, 정치사회적인 이념도 아니고, 종교현상도 아니고, 오직 계시에 의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하신 진리인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의 교리 또는 바울의 복음이라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만, 오직 말씀으로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하시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율법을 혼합하고, 은혜와 선행을 혼합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문화를 혼합하는 것 - 이것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 - 만들어 진 것 - 이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13-14절)


바울은 13절부터 24절까지, 자기의 전기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자기가 전한 복음이 오직 계시로 받은 것임을, 체험적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유대교의 지도자이었고 율법학자이었고 실천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을 박해하고 진멸하려 했습니다. 유대교 즉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의 열정과 헌신은 당대 따를 자가 없었다 했습니다. 그러던 이러한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친척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보다 먼저 사도된 사람들, 즉 열두 사도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삼면 만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때, 2주 정도 머물렀는데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났을 뿐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임을, 즉 거짓말이 아님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 후 바울은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게 되었는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단지 한 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절)


바울과 함께, 저도 체험적인 말씀을 하겠습니다. 저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저희 부모는 제주도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섬지방의 무속신앙과 미신적 신앙에 젖어 있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미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계신 것을 익숙히 알고 성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게를 세우지 말라! 화가 임한다. 발을 흔들지 말아라! 발을 털지 말아라! 복이 나간다. 등등, 제가 기억하는 것을 모은다면 수백 개가 넘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모든 말씀은 복과 화에 대한 공식입니다. 제가 비교종교학과 종교현상학을 배우면서, 어머니의 이러한 믿음들은 금기신앙 tabooism 과 무속신앙 sharmanism이 혼합된 종교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까운 친척 중 한 분은 종친회 회장이기 때문에 저는 그분을 통해서 유교적 제사법에 대해서 자세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비교종교학과 종교현상학, 문화 인류학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을 포함해서, 세계의 여러 종교들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또 제가 구약학을 공부하면서 구약시대의 배경이 되는,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 애굽과 고대 근동 Ancient Near East 지방의 역사와 종교, 문화와 사상 등을 공부했습니다. 저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아람어, 우가릿어, 모압어, 가나안어, 에돔어, 이집트어, 아카드어, 시리아어 등의 고대언어들을 공부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언어를 학습하면서 고대문헌들과 비문들을 판독하고 해석을 해갔습니다. 고대 근동에 대한 연구에만 바친 세월이, 한 5-6년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월은 저의 영적 여정에 있어서 상대주의, 더나아가 허무주의의 시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종교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구약신앙과 유대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문헌들의 내용이 대부분 비슷하고, 종교현상들이 비슷하고, 제사법과 제사제도가 비슷하고, 제사장과 성전에 관한 제도가 거의 비슷한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기원, 종교의 진화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여호와 하나님마저도 불확실해져 갔습니다. 제가 배운 모든 종교는 복과 화의 공식입니다. 축복과 심판의 공식, 축복과 심판의 율법, 행운과 저주의 메카니즘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만들어 왔고, 그 종교는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현상학적으로 보면 모세의 율법은 고대 근동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다른 종교적 율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깊은 회의와 혼란 속에서 사라져가는 저의 영적 정체성을 아예 포기하고 싶은 단계, 깊은 수렁에 들어 갔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때가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단계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절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 말씀을 저에게 비유하여,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13절 제가 이전에 종교학과 구약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멸시하고 박해하고,

14절  제가 제 동료 중 여러 연갑자보다 역사적 비평학을 지나치게 믿어 제 신학적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런데 바로 그때 주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저에게 오셔서 제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체험을 여러 번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도 주님께서 저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역사학적 구약비평학의 깊은 수렁에 빠져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졌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저를 다시 더 만나주셨고 그리고 저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오경을 비롯하여 성경에 있는 말씀 속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이것은 바울이 주님을 만날 때와 비유가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절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이 말씀을 저에게 비유하여,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15절 그러나 저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저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저를 부르신 이가

16절 그의 아들을 ‘아직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 the unchurched 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를 제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돌이켜 보니, 바로 그 때 다시 깨달은 것이 바울의 복음, 은혜의 복음, 오직 계시의 복음입니다. 그때, 모든 율법의 본질을 다시 한 더 심각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다는 것, 무엇을 지킴으로써 복을 받고, 무엇을 지키지 아니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 잘 모를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는 것, 그래서, 교회의 제도적 권위와 제사장의 종교적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평화와 축복의 통로라는 것, 기타 등등 - 이러한 것은 그저 종교적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종교인이나, 종교학자나, 종교적 지도자, 율법학자나, 서기관이나, 제사장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그 후, 저는 신학적 입장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후배 신학도들에게 복음적 신학을 공부하며, 강해설교를 공부하라고 권면합니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목회를 할 때에도, ‘아직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 pre-christian 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를 하라고, 이방들에게 선교지향적인 교회,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 the unchurched 을 위한 전도지향적인 교회를 세우라고 권면합니다. 제가 신학을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할 때에는 복음적 신학을 멸시했는데, 이제 와서 오히려 복음적 신학을 더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신학이 다 복음적 신학은 아닙니다. 보수신학이 오히려 율법적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변한 저를 돌이켜 보니,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과 같습니다.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절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절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저는 이 말씀을 저에게 적용하면서, 이러한 말씀이 저에게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22절    어떤 교단 또는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절    다만 우리를 멸시하던 자가 전에 멸시하던 그 복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절    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아멘!


이것이 저의 소명이며 저의 기도입니다.


오직 계시!


사람이 어떤 교리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교단과 교파에 속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어떤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복을 받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상급을 받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 - 이런 가르침은 모두 사람의 뜻을 따라 된 종교적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사람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사람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오직 계시!”를 강조하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율법이며, 율법은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며, 그것이 곧 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붙드는 것이고,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고, 말씀과 함께 씨름하는 것이고, 말씀과 함께 생명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말씀과 함께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오직 은혜!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당신이 구원받기 위하여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당신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복을 더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만약, 돈과 건강과 출세가 복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돈과 건강과 출세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치가 돈과 건강과 출세의 가치보다 못하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오직 은혜이며, 그 이후 돈과 건강과 출세를 받는다면 그것도 오직 은혜입니다. 만약 돈과 건강과 출세를 받지 못한다 해도, 모든 것되시는 예수님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도 오직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오직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로 이 은혜의 복음만이, ‘오직 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다른 종교적 율법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사도 바울이 ‘오직 계시!’를 강조하는 이유를 하나 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의 진리는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현실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도 ‘오직 은혜’의 진리에 무엇인가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종교를 가리켜 그것이 ‘복음’이라고 주장하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갈라디아서 말씀이 당신에게 걸림돌이 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갈라디아서 말씀이 당신이 가는 믿음의 여정에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복음! 이것은 오직 계시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갈라디아서 2장1절-10절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큰 복을 붙잡으세요!” “부자 되세요!” “부탁이예요! 돈 많이 버세요!” 듣기 좋은 말들입니다. 덕담입니다. 복은 많이 받을수록 좋아합니다. 다섯가지 복, 즉 오복이란 말이 있지요.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가장 행복한 삶은 오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합니다. 상서(尙書)에 언급된 오복의 내용과 민간에서 유통되는 것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오래 사는 것, 부자되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은 공통됩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오래 살고, 부자되고, 건강하라는 바램을 서로 주고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복(福)이라는 글자를 대들보, 대문, 숟가락, 이불 등에 써 붙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래 살고 싶고, 부자 되고 싶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또 권리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며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 욕구와 권리가 모든 종교와 인종과 문화와 역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현상은 기독교뿐만 아니고 모든 종교에 나타나 있고, 모든 도덕과 철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행복추구에 대한 기본 욕구요 기본 권리입니다. 바로 이것, 즉 복(福)에 대한 인간의 기본 욕구를  ‘복음’(gospel)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복음을 의미하는 헬라어를 ‘복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효과와 동시에 부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효과란, 복음이라는 개념이 복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의 심성에 쉽게 수용이 되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효과란 복음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람에게 이미 익숙해있는 ‘오복’(五福)과 쉽게 동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3절-17절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1장 18절-24절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유대 교회로부터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했고, 2장 1절-10절에서  예루살렘 기둥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님을 명백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2장 11절-21에서는 복음을 베드로부터 받은 것도 아님을 강조할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자기가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함께 이르게 된 결론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전파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복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만민을 위한 본질적인 복음, 즉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4 년 후 예루살렘 방문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지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합니다. 회심 이후 14년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지만, 문맥을 통하여 보면, 첫 번째 방문 이후 14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바울의 이 두 번째의 방문을 통해서,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자 사이에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유대적인 것과 이방적인 것을 포함하는 ‘보다 보편적인 복음’(a more Jewish-and-Gentile-universalistic gospel)을 주창했고, 베드로를 포함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보다 유대적이며 민족적인 복음’(a more Jewish-nationalistic gospel)을 대표했습니다. 바울 측과 베드로 측은 신학적인 논의를 거친 후, 합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파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 바,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기둥 사도들은(pillar apostles) 자기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 바, 그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대상이 달랐지만,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님을 서로 확인했습니다. 각자가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What)은 같았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은 그들이 복음을 “누구에게”(To whom) 전파하는가? 즉 전파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1-3절)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14년 후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로 방문할 때 바나바와 디도를 동반합니다. 본명이 요셉인 바나바는 레위 지파이었으며, 사이프러스 (Cyprus, 구브로)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사역을 열매를 본 사도들이 그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붙여 주였는데, 이 이름은 “예언의 아들”을 뜻합니다. “예언과 위로를 잘하는 사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바나바는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때,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한편, 디도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신약성서의 ‘디도서’의 주인공입니다. 이 디도는 바울의 이방 선교의 열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인 바나바를 자기들의 형제로 환영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헬라인 디도를 어떻게 했을까요? 디도가 헬라인, 즉 이방인이기 때문에 환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서 조건 없이 환영했을까요? 혹은, 디도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인 것은 인정하지만, 디도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조건부로 디도를 환영했을까요?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지도자 또는 그리스도인들 중 누군가가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디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인 것은 인정하지만,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예식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상징이며, 모세 율법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방인 디도가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쳤습니다.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하여,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약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을 받는데 충분하지 않은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은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하나님에게 반역합니다.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죄인으로서 죄를 범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이며, 죄의 자식입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게 되었고, 또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것이 죽음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 “죄의 종”이라는 상태에서 구원받는 것이고, 이 ‘죽음’에서 건져내어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서, 죄를 범하며, 그 후 죄책감의 고통을 받으며, 죄의 결과로서 죽음의 세력, 죽음의 영향력 안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 공포, 절망, 흑암, 등은 죄의 실존이며 죄의 현실이다. 이 ‘죽음’은 통전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육체적 죽음, 심리적 죽음, 영적 죽음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이 구원받기 전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왔는데, 율법과 종교는 구원의 방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금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을 철저히 지킨다고 해도 죄와 죄책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금하고,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벗는다고 해서, 진정한 구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구원이 오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지키고 금하고 버리고 벗는다면, 그것을 철저하게 잘했을 때 오는 것은 ‘무’(無, nothing)입니다. 그러나 ‘무’(無)는 구원이 아닙니다. ‘무’는 ‘무’일 뿐입니다. ‘무’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종교는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율법과 종교는 구원의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에게 금기의 멍에를 씌우며 타부(taboo)의 족쇄를 채울 뿐입니다. 버리고 벗는 것이 구원의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심리적인 편안함을 제공해 줍니다. 그것도 불충분하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종교가 아닌 복음은 구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죽음, 또는 죽음의 실존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죄와 죄책감,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서 발생되는 형벌이 통합된 것입니다. 이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기 위해서, 즉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댓가와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 댓가와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두 치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한 제물입니다.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완전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 구원은 우리로 말미암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이미 죽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시 살릴 수 있으며,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비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어떤 것도 보충될 필요가 없고, 보충해서도 않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일지라도! 그것이 모세 율법일지라도! 그것이 엘리야의 예언일지라도!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충 또는 보완으로 덧붙여져서는 않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한 복음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지난 14년 동안 전파해 왔습니다.


이 14년 동안 바울은 반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반대파들은 예루살렘에도 있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다른 지역, 다른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4년 동안 한결같이 단 하나의 복음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 복음을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는 것을 기회삼아 예루살렘의 기둥인 사도들에게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의 기둥은 베드로,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사로이’, 즉 비공개적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기둥 사도들과 대화했습니다. 왜냐하면, 안디옥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교리 논쟁을 하다 보면 이 논쟁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그래서 원치 않게 복음이 훼손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 복음이 훼손당한다면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이제까지 달려왔던 선교의 달음박질이 헛수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대하여 불확실해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에 관한 한 확신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의 관심사는 혹시 믿음이 연약한 사람 즉 이방인들 가운데 아직 믿음의 뿌리가 든든하지 않은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4-5절)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절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했던 사람들은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만히 들어 온 거짓 형제들”이라 부릅니다. 그들을 “거짓 형제들”이라 부르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거짓 형제들’은 ‘사탄의 종’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을 보고, 방탕 또는 방종이라 해석했고, 그래서 타락 또는 범죄 행위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율법의 종, 죄의 종이 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 대하여 바울과 함께 한 그리스도인들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러한 반대를 수용하거나, 그래서 반대자들과 타협하거나, 그래서 율법의 하나라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바울 자신이 받아들이고, 가르친다면,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서 없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반대자들의 제안을 이렇게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개인적인 의도와 사리사욕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독선적인 것도 아닙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 형제들’은 “바울의 복음은 정통이 아니다” 고 비판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다르다”고, “바울의 복음은 잘못이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apostleship)을 비판했고, 바울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난 14년 동안 이러한 비판과 공격을 끊임없이 받으면서도, 한시도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이방인에게 전해 왔던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이 계시는 유대인 또는 헬라인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이 계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비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만민을 위한 복음입니다.


만민을 위한 복음(6-10절)


6절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절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유력하다는 이들”- 이 표현이  2절과 6절에 두 번 나오고,  9절에는 “기둥같이 여기는” - 이 표현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이들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들의 명성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명성을 손상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을 비아냥거리면서 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그들이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 인정했고, 또 9절에서 그들은 바울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런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근거로서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을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인용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과연 바울의 복음을 비판하고 공격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기둥같은 사도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첫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다”(They added nothing to my message.) - 이 말씀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또 다른 의무나 수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정해 준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 추가하거나 삭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공증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바울의 부름(calling)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이 무할례자 즉 이방인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 즉 유대인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과 같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과 바울은 함께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셔서 유대인들의 사도로 삼으셨고, 바로 그 또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을 설고 인정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 서로는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사역을 기억하자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특별히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는 오랜 가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제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 - 이것은 복음에 대한 책임입니다. 구제는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responsibility)으로서 이웃을 돌아 보는 것입니다. ‘구제사역’이 구원에 대한 조건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애걸하는 행위도 아닙니다.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구제’는 우리가 받은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주는 복음입니다.


이렇게 거짓 형제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 사이를 이간질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같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전파하는 대상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예루살렘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달랐을 뿐, 복음의 내용은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서가 네 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런데 복음서가 네 개가 있다고 해서 복음이 네 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복음서가 네 개일 뿐입니다. 이 네 개의 복음서가 말하는 복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이 네 개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복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의 복음과 다르며, 또 바울의 복음은 베드로의 복음과 다르며, 또 바울의 복음은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의 복음과 다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바울의 복음과 야고보의 복음은 서로 정반대이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 이러한 입장은 옳지 않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과 바울의 복음, 그리고 야고보의 가르침 - 그들은 문체(Style)가  다르고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성품과 인격이 다르고, 또 글을 쓰는 대상과 상황이 다를 뿐입니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모두 한 복음의 다른 측면을 강조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글을 쓴 것이고, 야고보는 도덕과 윤리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쓴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복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은 하나입니다. 신약성서의 복음은 하나입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합하여 성경의 복음은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 준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며, 이 믿음과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이 복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문화와 인종이 달라도 이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나 노인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나, 과학자나 비과학자나, 지식인이나 비지식인이나,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은 하나입니다. 그 표현이 다르고, 그 스타일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은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울은 ‘거짓 형제들’에 대해서 얼마나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한편 바울은 ‘연약한 형제들’에 대해서는 온유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거짓 형제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강요했을 때에는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바울이, 나중에 ‘연약한 형제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것일 뿐, 복음의 진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훼손시키는 ‘거짓 형제들’,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바울이 그 어디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엄격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단호했습니다. 양보와 타협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 이 외의 다른 율법을 첨가해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또는 무엇을 금해야 구원받는다! 는 식의 오염된 복음을 전하지도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이 오염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 시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소위 유력하다는 사람들이 더 복음의 진리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 가운데, 지금 당신 가운데 항상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으로 살라!

 

 

갈라디아서 2장11절-21절

 


이사야서 43장 16절부터 28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진행되는 법적 심리(legal trial)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하나님을 기소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번제와 제물로 하나님을 제사해 왔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이방인에게 진멸당하도록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론을 제기하십니다. “너희들이 너희의 번제와 제물로 나를 섬긴 것이 아니고, 너희는 내가 너희를 섬기게 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이 법적 공방을 보면, 번제와 제물에 대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해석이 극명하게 대비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번제와 제물에 대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다가올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이 바치는 번제와 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더 괴롭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발생하는 이러한 입장차이 - 이러한 오해가 오늘 우리들 가운데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1절부터 21절은 여러 면에서 특별합니다. 통상적으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 라고 번역되는 단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단어가 갈라디아서에서 이 본문에 처음 나옵니다. 또,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와 그리스도의 믿음(faith in Christ)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라는 명령도 이 본문에 처음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는 개념도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종교개혁가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할 때, 이 본문을 위해서 무려 80 페이지를 사용했습니다. 루터는 바로 이 본문을 통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는데, 80 페이지나 할애했던 것입니다. 이 본문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초대 교회의 두 기둥,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발생했던 갈등과 충돌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충돌 - 이것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사건 가운데서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사건 중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성령이 충만한 사도이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에 의하여 특별하게 부름을 받았고,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지탱시켜 주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도 베드로의 이야기와 바울의 이야기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누어집니다. 이렇게 중요한 두 사람이 공개석상에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11-14절)


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 본문의 배경은 안디옥입니다.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환영받았고,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성찬을 나누었다. 문제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베드로가 방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그 때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메시지 때문인지 또는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인지,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베드로가 식사를 중단하되 ‘은밀하게’ 하지 않고 ‘명백하게’ 했기 때문에, 바나바와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베드로의 행동에 설득당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드로와 함께 한 그들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행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절)


베드로, 바나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과 식사하기를 멈춘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바울은,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비판했을까요? 먼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은 누구인지 살펴 봅시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과 커넥션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먼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은 식사에 관한 율법이 거론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중단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 생각하고 스스로 중단했을까요? 아니면 그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했을까요? 베드로의 동기가 어떤 것이든 그의 행동으로 파생된  파장은 보통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절부터10절까지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제시했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옳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랬던 그 베드로가 여기 안디옥에서는 다르게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 12절은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했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는데, 여기에서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이 바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종교가 나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은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기를 멈춘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경우, 혹시 어떤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경우 유대주의자들과 어떤 마찰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경우 예루살렘에서의 지도력에 어떤 손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경우 혹시 어떤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바로 이 두려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을 경우 혹시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바로 이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그 식사를 중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이 왜? 이렇게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공박했을까요? 예루살렘에서처럼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를 설득하거나 또는 베드로와 조용하게 대화하지 않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베드로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손상을 입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베드로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은 복음의 진리에 더 큰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 때문에 바나바도 베드로를 따르게 되었고 다른 유대인들까지 베드로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계속해서 이방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베드로를 따라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것은 바울과 베드로의 인간적인 관계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거짓, 복음과 율법,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믿음, 생명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복음주의적 신학자 존 스토트는 갈라디아서 주해서,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만일 그 당시 베드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바울이 피력하지 않았다면, 모든 기독교 교회들까지도 유대인의 침체상태로 흘러 들어가 그대로 악화되었거나 한 주가 아닌 두 주(主)의 성찬, 즉 이방인과 유대인의 기독교 사이에는 영원한 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베드로에게 저항하는 바울의 놀라운 담력은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형제자매 관계를 모두 보전시켰다.” 그렇습니다. 그 때 만약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베드로의 행동이 신학적으로 비판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모방적으로 반복되었다면, 그래서 베드로의 철저하지 못했던 행동이 오히려 신학적으로 변증이 되었다면, 우리 기독교는 현재 율법적 유대교의 한 아류로 남아있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율법의 행위와 예수의 믿음(15절-17절)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먼저 16절에 ‘율법의 행위’와 ‘의롭게 되는 것’ - 이 두 어구가 세 번씩 반복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17절에 “의롭게 되려 하다”가 한 번 더 언급됩니다. 바울의 이 의도적인 언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결코 서로 혼합 mixed 될 수도 없고, 통합될 integrated  수도 없고, 조화될 harmonized 수도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은 분명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말씀드립니다. 첫째,  ‘율법’은 일반적으로 오경을 가리킬 수 있고 더 확대하면 ‘성경’을 말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하는 율법의 의미는 이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면서 여러 가지로 권면하는 것은 그대로 신학적 의미와 영적 가치가 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신실하게 살도록 권면하고 훈계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둘째, 오늘의 본문에서 강조되는 ‘율법의 행위’ 즉 ‘복음’과 반대되는 ‘율법의 행위’는 율법의 다른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능,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기능, 하나님의 복을 얻는 기능, 그래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적,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에서 초점이 되고 있는 율법의 기능은 바로 이 둘째 기능입니다. 율법의 다양한 기능에 대해서는 갈라디아 4장에서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단순하게 말한다면 ‘율법의 행위’라는 개념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법적으로 ‘무죄’(innocent, not guilty)를 의미합니다. 달리 표현하여 ‘율법의 행위’는 ‘내가 율법을 행하여 지킬 때 하나님께서 내가 무죄하다고 판단하신다’는 사상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신학과 사상의 이면에는 죄와 벌에 대한 공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유죄로 판단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을 열거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열거된 행위들을 범하지 아니하면, 즉 율법을 지키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죄하다고 판단하신다는 종교사상이 ‘율법의 행위’, 또는 ‘율법의 공로’ 사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을 가능성이 있는 죄의 목록을 모두 열거할 수도 없다는 것이고, 또 열거할 수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것들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무죄하기를 원하면서 만든 율법 시스템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죄할 수 없는 시스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때 한 말을 다시 들어 봅시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이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당신이 율법을 모두 다 지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어찌하여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려느냐? 율법은 베드로만 다 지킬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다 지킬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 지킬 수 없으니, 그 중에서 몇 개라도 정성스럽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구약에 명백하게 언급된 율법을 다 지켜야 할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 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래되어 내려오는 구전적인 율법도 다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또 있을까 해서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율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그것까지도 다 지키려 했는데, 그것까지 다 지켜야 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양적으로 모두 지켜야 합니다. 즉 율법 가운데서 한 개도 빠지지 않고 모두 지켜야 율법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튼 것은 또 시간적으로 항상 지켜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99 퍼센트의 양과 시간을 잘 지키다가 1 퍼센트를 지키지 못하면 그 때에는 유죄가 판결됩니다.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무죄’하다고 인정받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죄’하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은혜로 주어집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칠 때, 이러한 율법의 한계성을 모르면서 가르친다면 이것은 무지와 나태일 것이고, 이러한 율법의 한계성을 알면서도 가르친다면, 이것은 거짓과 기만입니다. 율법의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받거나, 그것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거나, 그것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지와 나태이든지, 또는 거짓과 기만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위입니다.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율법을 지키야 의롭게 되는 줄 알고 율법을 지키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우리는 율법을 어길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유죄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 이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는데, 다시 율법을 지키려 할 때’입니다. 이 말은 ‘복음과 율법을 섞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무죄하다고 했다가, 또 우리를 유죄하다고 하신다는 것입니까? 결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니, 복음과 율법을 섞지 마십시오.


만약 바울이 오늘 당신에게 말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당신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킬 수 없지요?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유죄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자가당착에 빠지는 행위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함께 여행할 수 없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동반자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기독교 안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율법의 행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지켜라!

철저하게 지켜라!


이런 저런 것을 지키면 보수 신앙과 정통 신앙이고, 지키지 않으면 자유신앙과 신신학이다고 말하는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켜야 한다는 이런저런 것이 무엇인지 차후에 논의하도록 하지요.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율법적 신앙’, 이 율법적 종교, 이 종교적 율법들’, ‘기독교적 율법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일일이 다 말한다면 종교현상학 교과서를 한권 집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쉬운 방법을 하나 알려 드린다면, ‘지킨다’는 동사의 ‘목적어’를 열거하는 것입니다. 모모를 지킨다고 할 때, 그 모모가 바로 한국적 기독교의 종교적 율법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철저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어떤 것들을 지키면 보수적이고, 어떤 어떤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자유적이다”는 명제는 옳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만약 어떤 어떤 것들을 지키면서 스스로 보수적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자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과여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을 계기로 율법의 본질을 설명했을뿐더러,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제 18절 이후부터 바울 자신의 고백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에 대하여 사는 그리스도인(18절-21절)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의 고백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율법은 구원에 관한 한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원과 사랑에 관한 한 율법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율법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내가 헐었다가 내가 다시 그 율법을 세운다면, 내가 나를 범법자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당신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고해 보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당신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까? 당신이 어떤 율법을 정성스럽게 잘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셨습니까? 당신이 어떤 율법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을 때, 당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던 것을 죄로 여기면서, 그 죄를 뉘우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살겠다고 다짐했을 때, 바로 그 때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이었습니다. 구원이 임한 그 순간, 율법은 허물어진 것입니다. 당신이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당신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그 순간, 율법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구원을 받은 다음, 다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을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는 것이고, 결국 당신은 다시 죄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율법도 당신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율법과 당신은 이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과 율법은 이제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율법과 당신은 이제 완전히 이혼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이제 하나님과 결혼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습니다. 율법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해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율법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아니한 채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면, 당신은 영적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불륜입니다. 영적인 스캔들입니다. 그런 죄악을 다시 범하지 마십시오. 이제 율법이 당신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율법이 죽게 만든 것은 당신이 아닙니다. 율법은 본질상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은혜이며,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야 비로소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경험할 때,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나의 죄값은 내가 나를 위하여 치룰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듯이 내가 나를 위한 죄값을 나를 위하여 지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귀하신 몸을 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모두 몸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율법에 의하여 정죄당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몸소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스스로 몸소 대신 받으셨음을 말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도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죽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율법이 나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적인 나는 죽었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율법적인 내가 아닙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성령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당신의 고백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복음도 믿고 율법도 지키자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믿음이 어릴 때에는 율법을 가르치고 믿음이 성숙해질 때 은혜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래도 이왕이면 율법도 지키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죽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다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