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창조의 3대 원리 -본문:(창1:1-5)

2007. 5. 12. 00:27목양자료/3.강해설교

제목:창조의 3대 원리 -본문:(창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1-5) (강해)

오늘부터 창세기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으로서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사람과 짐승, 죄와 구속, 축복과 저주, 사회와 문명, 결혼과 가정, 기술과 산업 등 실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신령한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씨(백성), 땅(영토), 주권(하나님의 뜻)라는 3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 순종에 의하여 예견되고 준비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좀 더 좁혀서 본서는 각인의 심령에 나타나는 영적인 원리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즉 창조의 기사는 물질계의 창조와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창조하신 구속사역의 귀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이 시간에는 이런 신령한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1. 그럼 천지창조가 어떻게 구속사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결론은 창조의 원리는 물질계나 구속사나 동일합니다. 시51:10에서 다윗은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악으로 혼미한 자기의 심령상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창조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엡2:10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구속사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구체적인 적용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4절의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를 고후6:14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의와 불법의 분리에 적용시켰습니다(호크마주석131p). 이것을 볼 때 성경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건을 문자에 그치지 않고 영적으로 적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세기의 빛나는 교부 어거스틴 역시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천지창조와 함께 신령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구원의 문제는 개조가 아니라 창조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포함한 아름다운 새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즉 아담의 속성은 십자가에서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그리스도 안의 창조를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창조론을 통해서 죄인의 심령상태를 발견합니다.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여기 땅 앞에 접속사 ( , 웨)와 정관사 ( , 하)가 붙어 있어 직역하면 '그런데 그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의역한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그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물의 재료인 질료를 창조하실 때의 상태를 기록한 말입니다(원용국). 먼저, 혼돈하다고 했습니다. 여기 '혼돈하다'는 '공허, 헛된 것' 등의 의미인데 전혀 형체가 없거나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창조하시기 전의 죄인의 심령상태가 그렇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율법을 통해서 죄인의 심령상태의 본질을 드러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 중 중요한 한 가지가 그것입니다. 바울의 간증이 그것입니다. 롬7:18-20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혼돈한 상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잘 알지 못해 이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 율법만 알고 복음을 알지 못할 때 그랬습니다. 그래서 롬7:23-24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인의 본질적 영적상태를 깊이 깨달아야 복음을 수납할 준비가 되어집니다. 그 다음에 죄인의 심령상태는 공허합니다.

여기 공허는 ( 보후)로서 앞의 혼돈과 흡사한 의미로서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는 적막한 상태, 무가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명체도 살지 않는 무질서하고 텅빈 상태였습니다. 죄인의 영적상태가 그렇습니다. 벧전1:18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에서 '망령된'이란 원문에서 '공허한'의 뜻입니다. 베드로가 죄인의 영적상태를 '공허한'으로 표현한 것도 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바울도 엡4:17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하면서 죄인의 영적상태가 허망함을 교훈했습니다. 사48:22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죄인의 심령은 공허하기에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고독이야말로 죄인들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 가장 가혹하고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인적인 경험이지만 예수 믿은 후 변화된 것을 들라면 고독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그 고독한 죄인의 심령상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때 슬프고 공허하고 불행한 심령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탄식의 세월이었습니다. 고독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일분 일초가 힘겨웠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으면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죄인의 심령상태는 어둡습니다. 엡4:18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했습니다. 롬1:21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했습니다.

죄인의 심령상태는 어둡기 때문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고 정욕을 따르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꿉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면 엄연한 성경 진리도 왜곡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거합니다. 엡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리고 권면합니다. 엡5:11-12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영적상태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 가지 상태가 천지창조의 예비적인 상태였듯이 죄인의 상태를 상태대로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그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야 진실로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구세주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생이 재미없어 자살하려다가 극적으로 예수를 영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 상태를 깨닫는 것도 은혜입니다. 3. 우리는 창조론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1-3절에 "하나님이 - 하나님의 신(神)은 - 가라사대"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는,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을 발견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에는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원천이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화에 관하여 난감해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화 역시 내 주권이 아니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술대 위의 환자는 묵묵히 의사에게 자기를 맡겨야 하고 진흙 덩어리 역시 토기장이의 손에 자기를 맡기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길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나를 온전히 창조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이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온전히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셨으면 끝을 보시는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래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그는 그의 갈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역시 목적지는 가나안인 줄 알았지만 어떻게 인도하실지 그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성도 역시 목적지는 천국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임은 알지만 믿음 안에서 자기를 어떻게 완성시켜 나가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몰라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테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시면 됩니다. 다음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성자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 사역은 말씀의 사역입니다. 요1:1-3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서 복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셨습니다. 요20: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발견해야 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성을 잘 수립하고 그 앞에 겸손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어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에 입각하여 사는 삶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고 승리를 얻었고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연합의 은총도 받았습니다. 이 복음에 설 때부터 창조가 경험되어집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복음을 생각하면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저는 운전을 배우면서 실수할까봐 누워서도 엑셀레이터 브레이크 두 종류에 대해서만은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무의식 중에서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고요한 심정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감격이 넘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반복하는 훈련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날마다 거의 한 순간도 잊지 않고 묵상했던 것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다시 살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높이 되고 승리하여 영광 중에 있다' 라는 예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삼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다해도 항상 노력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 번째 원리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1:2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신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운행하시니라의 원 뜻은 '알을 품다'는 의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기도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에 설 뿐 아니라 늘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실재적으로 적용시키시는 임무가 있습니다. 혹시 복음을 믿지만 그 실재를 경험치 못한다면 성령의 충만 부분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구하지 않아도 성령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은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를 부지런히 사용하여 예배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과정을 보면 먼저는 이적을 통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의 과정을 거친 제자들은 비로소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군으로 온전히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의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심히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래서 바울은 이 비밀을 알고 그 때부터 자기나 타인이나 결코 육체대로 알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항상 엎드려 성령을 구하는 생활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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