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 00:01ㆍ선교자료/5.선교자료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질·지형
세계 육지면적의 1/15을 차지하는 중국은 러시아·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지형은 3단계의 계단식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제1단계 지역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칭짱고원[靑藏高原(청장고원);티베트고원·西藏高原(서장고원)]으로 평균해발고도는 4500m, 면적은 230만㎢에 달한다. 칭짱고원의 북쪽 끝에 쿤룬산맥[崑崙山脈(곤륜산맥)]과 치롄산맥[祁連山脈(기련산맥)]이 거의 비슷하게 동서로 뻗어 있고 동쪽 끝에는 헝돤산맥[橫斷山脈(횡단산맥)]이 남북으로 놓여 있다. 제2단계 지역은 중국 북서부로부터 대부분의 중앙부를 차지하는 해발고도 1000~2000m의 지역으로 준가얼분지·타림분지·쓰촨분지[四川盆地(사천분지)]·내몽골고원·황투고원[黃土高原(황토고원)]·윈구이고원[雲貴高原(운귀고원)] 등 3분지와 3고원이 있는데 이 지역의 면적이 가장 넓다. 제2단계 지역과 제3단계 지역의 경계는 거의 남북방향이며 북쪽부터 대싱안링산맥[大興安嶺山脈(대흥안령산맥)]·타이항산맥[太行山脈(태행산맥)]·우산산맥[巫山山脈(무산산맥)]·우링산맥[武陵山脈(무릉산맥)]·쉐펑산맥[雪峰山脈(설봉산맥)] 등이 남부국경에까지 이른다. 이 경계로부터 동쪽이 해발고도 500m 이하의 제3단계 지역이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인류의 활동무대였던 곳으로 둥베이평원[東北平原(동북평원)]·화베이평원[華北平原(화북평원)]·창장중샤유평원[長江中下游平原(장강중하유평원)]·포양분지 등이 있다. 이 지역의 동쪽 끝에는 동중국해가 있는데 수심 약 200m의 대륙붕이다.
중국의 이와 같은 대산맥의 기본 형태는 몇 차례의 조산운동을 거쳐 거의 중생대에 생긴 것이다. 새로운 강한 융기운동은 서부에서 가장 격렬하였다. 칭짱고원·히말라야산맥·쿤룬산맥·톈산산맥[天山山脈(천산산맥)] 등은 모두 제3기 활동의 결과이다. 히말라야산맥의 시샤방마봉에서의 관측결과에 따르면 제3기 말 이래 융기량이 약 3000m로 평균 1만 년에 약 30m가 상승했다는 계산이 된다. 중국과 네팔국경에 위치한 에베레스트산은 해발고도 8848m로 세계의 최고봉이다. 쿤룬산맥은 서쪽이 파미르고원에서 시작하여 칭짱고원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동쪽은 쓰촨분지에 이르며 길이 약 2500㎞, 평균해발고도 약 5000m이다. 동쪽에는 호흐시리산맥[可可西里山脈(가가서리산맥)]과 바옌카라산맥[巴顔喀拉山脈(파안객납산맥)]이 있어 양쯔강[揚子江(양자강)]과 황허강의 분수령이 된다. 톈산산맥은 서쪽 끝이 키르기스스탄에서 시작되고 길이가 약 2500㎞, 해발고도 3000~5000m이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신강유오이자치구)]는 톈산산맥에 의해 타림분지와 준가얼분지로 나뉘어진다. 톈산산맥이 융기했을 때 부분적으로 함몰하여 투르판분지[吐魯蕃盆地(토로번분지)]·하미분지[哈密盆地(합밀분지)]·옌치분지[焉耆盆地(언기분지)]와 일리곡지(谷地) 등이 생겼다. 투르판분지의 가장 낮은 곳은 해면보다 낮아 해면 밑 154m인 곳도 있다. 알타이산맥[阿爾泰山脈(아이태산맥)]은 러시아연방과 몽골 그리고 중국의 국경에 걸쳐 있으며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어 있고 구조적으로는 톈산산맥과 같으며 몇 가지의 계단모양 비탈이 있다. 난링산맥[南嶺山脈(남령산맥)]은 동서로 약 1000㎞이며 후난성[湖南省(호남성)]과 장시성[江西省(강서성)] 남부와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광서장족자치구)], 광둥성[廣東省(광동성)] 북부를 구획한다. 평균해발고도 약 1000m 정도이며 양쯔강과 남쪽 주장강[珠江(주강)]의 분수령이다. 그러나 봉우리가 연속되지 못하고 사이에는 해발고도 200~400m의 낮은 산간 애로(隘路)가 몇 군데 있다. 대싱안링산맥은 내몽골고원의 동쪽을 북동에서 남서로 향해서 뻗은 해발고도 1000~1400m의 기복이 완만한 산지이다. 동쪽 비탈은 경사가 급한 데 반하여 서쪽 비탈은 완만하다. 헝돤산맥은 칭짱고원의 남동부를 거의 남북으로 뻗은 세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선의 평균해발고도가 3000~4000m이고 가장 높은 궁가산은 해발고도 7556m이다. 높은 능선과 능선 사이에는 비고(比高)가 2500m에 이르는 깊은 계곡이 있고 진사강[金沙江(금사강)]·란창강[瀾滄江(난창강)]·누장강[怒江(노강)] 등 몇 개의 강이 남쪽으로 흐른다. 내몽골고원은 칭짱고원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새로운 지질시대에 융기하였으나 칭짱고원만큼 융기량이 크지 못하여 해발고도가 1000~1500m의 완만한 기복을 이루고 있다. 수백㎞의 고도차가 200~300m이기 때문에 고원의 표면은 완만한 구릉과 같다.
제1단계와 제2단계의 경계, 제2단계와 제3단계의 경계, 그리고 제3단계와 태평양의 경계지대는 지각운동이 활발하기 때문에 지진과 화산이 많고 지열도 높다. 대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은 류판산맥[六盤山脈(육반산맥)], 쓰촨성 서부, 윈난성[雲南省(운남성)], 타이항산맥의 동쪽기슭, 옌산산맥[燕山山脈(연산산맥)] 남쪽기슭 등이다. 1966년 타이항산맥 동쪽의 싱타이[邢臺(형대)]대지진, 1970년 윈난성의 퉁하이[通海(통해)]대지진, 1976년 옌산산맥 남쪽의 탕산[唐山(당산)]대지진 등이 유명하다. 이 대지진으로 넓은 면적의 지면이 40~50m씩 상승하거나 하강하였다. 지진·화산 지역에는 온천이 많아 약 1900개에 이르며 윈난성·광둥성·푸젠성[福建省(복건성)] 등지에 분포한다. 칭짱고원의 해발고도 5500m지점에도 온천이 있어 90℃ 이상의 뜨거운 물이 나온다.
중국의 지형을 영력(營力)에서 보면 ① 유수작용(流水作用)이 주를 이루는 동부의 계절풍습윤구(季節風濕潤區) ② 풍력과 건조박식작용(乾燥剝蝕作用)이 많은 북서부의 건조구 ③ 주빙하작용(周氷河作用)과 빙하작용이 많은 칭짱고원구 등 3지역으로 나뉜다. 황허강[黃河(황하)]은 황투고원을 둘러싸듯 흐르는데 황투고원은 해발고도가 1000~1500m이고 면적이 약 60만㎢이며 그 70%가 제4기의 황토로 덮여 있다. 황토층의 두께는 50~80m로서 최대 100m에 달한다. 중국 서부의 설선고원(雪線高原)은 알타이산맥 3000m, 칭짱고원 5500~6000m, 에베레스트산 북쪽사면에서는 6200m이다. 빙하의 총면적은 4400㎢이다. 제4기 빙하기에는 빙하활동이 북위 27~28˚까지, 윈난성에서는 북위 23˚ 부근까지 남하하였는데 북반구 전체와 비교할 때 상당히 저온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칭짱고원의 서부와 남부의 해발고도가 높은 지방에는 지금도 빙하가 있다. 대륙성기후이므로 영구동토(永久凍土)가 중국 전면적의 23%를 차지한다. 칭짱고원과 주요산지의 영구동토 분포의 하한해발고도는 히말라야산맥(북위 28~29˚) 5000m, 톈산산맥 중부(북위 42˚) 2700~2800m, 창바이산지[長白山地(장백산지);북위 43˚] 2200~2300m, 대싱안링 남부(북위 43˚) 1600~1900m 등이다. 사막은 109만 5000㎢로 전국 총면적의 11.4%에 이르며, 이 가운데 타림분지 서부에 있는 타클라마칸사막이 면적 32만 7000㎢로서 중국 최대의 넓이이다. 그중 유동사구(流動砂丘)로 덮인 면적이 85%이고 나머지는 고정 또는 반(半)고정사구지역이다. 유동사구가 높은 곳은 200~300m에 달하지만 50m 정도가 80%를 차지한다.
중국의 토양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둥베이지구는 삼림토양으로, 북쪽부터 차례로 북부의 타이가토, 동부의 암갈색 삼림토, 남부에서 화베이의 습원토(濕原土)와 암갈색토, 양쯔강 중류·하류지역과 화난[華南(화남)]의 황색과 적색의 수전토(水田土), 남부 국경 근처의 순적색토와 라테라이트 지역 등이다. 한편 둥베이지구 중앙으로부터 내몽골과 황허강 중류지역에 걸친 밤색·갈색·회색의 사막토, 그리고 일부에는 풍사(風砂)가 분포한다. 서북부의 건조·반건조지역에는 회갈색과 갈색의 사막토가 널리 분포하고 있다. 칭짱고원과 그 밖의 높은 산지는 산지삼림토와 고산갈색토, 그리고 고도가 더 높은 곳은 고산사막토로 바뀐다.
중국은 또한 수계(水系)가 발달된 나라로서 유역면적이 100㎢ 이상의 하천이 5만 개가 넘는다. 바다로 유출되는 외류유역(外流流域)은 전국 총면적의 64%이며 그 밖의 것은 내륙유역이다. 수계 가운데 태평양으로 흐르는 것이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이 유역은 강수량이 연 912㎜로 약 50억㎥이며 증발량 또한 연 517㎜, 28억㎥에 달한다. 황허강이 나르는 토사는 나일강의 34배에 이르는데, 1㎢의 황토지역에서 매년 3700t의 토양을 침식운반하는 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후
중국 기후의 지역구분은 다음과 같다.
① 둥베이형: 최한월(最寒月) 평균기온은 0℃ 이하이고 최난월(最暖月)은 10℃ 이상이다. 겨울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겨울의 10배 이상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Ⅰa, Ⅰb는 저지이므로 최난월의 월평균기온은 22℃ 이상이 된다. Ⅰc, Ⅰd는 산지 또는 구릉지이므로 22℃ 이하이다.
② 북부 스텝형: 증발량이 강수량보다 많고 저온이며 최난월의 월평균기온은 18℃보다 낮다. Ⅱa는 내몽골자치구의 스텝, Ⅱb는 몽골인민공화국의 스텝이다.
③ 북서부산악형: 툰드라기후이다.
④ 북서부사막형: Ⅳa는 오르도스, Ⅳb는 고비, Ⅳc는 아루샤우루, Ⅳd는 타림, Ⅳe는 준가얼, Ⅳg는 차이다무[柴達木(시달목)] 등의 분지 또는 사막지역이다.
⑤ 화베이형: 북부는 스텝형이고 남부는 온대하우기후(溫帶夏雨氣候) 또는 온대다우기후(溫帶多雨氣候)로 최한월의 월평균기온은 0~18℃ 이다.
⑥ 화중형[華中型(화중형)]: 연중 비가 고르게 오고 현저한 건기는 없다. 온도조건은 화베이형과 거의 같다.
⑦ 화난형: 온대하우기후이지만 고온이다.
⑧ 하이난형[海南型(해남형)]: 최한월의 월평균기온이 18℃ 이상이고 열대사바나기후 또는 계절풍기후이다.
⑨ 서부형: 북부는 냉대하우기후(冷帶夏雨氣候)로서 차고 남부는 온대하우기후로서 따뜻하며 지역차가 크다. Ⅸa는 윈난, Ⅸb는 티베트자치구 남동부, Ⅸc는 티베트자치구 동부, Ⅸd는 친링산맥[秦嶺山脈(진령산맥)]이다.
⑩ 티베트형: 고산기후로서 툰드라 또는 빙설기후(永久凍結氣候)이다.
이상과 같은 기후학적인 기후구분 외에도 농업에 따른 기후구분이 있다. 일평균기온이 10℃ 이상이 되는가의 여부는 식물의 성장에 중요하기 때문에 10℃ 이상을 유효온도라고 하며 유효온도 기간의 기온 합산을 유효적산온도(有效積算溫度)라고 한다.
이 원칙에 따라 중국을 구분하면 한온대·중온대·난온대·아열대·열대·칭짱고원지역 등 6기후구로 나눌 수 있다.
① 한온대: 유효온도기간은 100일 이하, 유효적산온도는 1600℃ 이하이다. 농작물은 조생종의 봄밀·보리·감자 등을 생산하며 1년 1작이다.
② 중온대: 만리장성 이북 지역과 준가얼분지로서, 유효온도기간이 100~160일, 유효적산온도가 1600~3400℃이다. 농작물은 콩과 봄밀이 주종을 이루며 1년 1작이다.
③ 난온대: 만리장성 이남으로 친링산맥과 화이허강[淮河江(회하강)] 이북의 황허강 중류·하류지역과 타림분지이다. 유효온도기간은 160~220일, 유효적산온도는 3400~4500℃이다. 농작물은 쌀·옥수수·수수·면화·겨울밀이 주종을 이루고 1년 2작 또는 2년 3작이다.
④ 아열대: 친링산맥과 화이허강 이남의 넓은 지역으로 양쯔강·주장강 유역과 윈구이고원의 거의 대부분이 포함된다. 유효온도기간이 210~365일, 유효적산온도가 4500~8000℃이다. 농작물은 대부분이 1년 2작 이상이며 쌀은 2모작이 가능하다.
⑤ 열대: 광둥성의 해안부 레이저우반도[雷州半島(뇌주반도)], 하이난섬, 윈난성의 남부지역이다. 유효온도기간은 거의 1년이고 유효적산온도는 8000℃ 이상이다. 쌀은 3모작이 가능하고 사탕수수는 1년 4작, 야자·고무·마·후추·코코아 등 열대작물을 재배한다. 열대우림으로 산림자원이 풍부하다.
⑥ 칭짱고원지역: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에 저온이고 유효적산온도가 2000℃ 이하이다. 공기가 맑기 때문에 투과일사량(透過日射量)이 크다. 10월부터 5월까지 제트기류로 인해 바람이 강한데 특히 오후에 바람이 심하다. 이 지역 남부의 해발고도가 낮은 지방은, 저지에서는 쌀을, 경사지에서는 감귤류와 바나나를 재배하면서 국지적 기후의 조건을 활용하고 있다.
장마가 시작하는 날과 끝나는 날, 장마기간중의 강수량 등은 해마다 다르다.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는 화난 5월 말, 양쯔강유역 6월 중순, 화이허강유역 6월 말 무렵이며 장마기간도 해마다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양쯔강 중류·하류유역의 장마기간은 짧은 해에는 11일, 긴 해(1954)에는 49일이었다. 장마가 끝나면 한여름이 되며 이것을 보통 루푸[入伏(입복)]라고 한다. 북태평양고기압이 대륙 위로 진출하므로 날씨가 맑고 고온이며, 국지적으로 뇌우가 동반되지만 광범위한 강수는 없다. 이것을 한여름의 소건조기로서 푸한[伏旱(복한)]이라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생물상
중국 식물계는 식생의 종류가 복잡하고 식물의 종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고등식물은 아한대(亞寒帶)·온대·열대에 속하며 3만 2000종 이상이 있고, 식물군계(植物群系)는 고북극군계(古北極群系)·중앙아시아군계·북아메리카군계·히말라야군계·인도말레이시아군계·일본군계·범세계군계·중국특산군계 등으로 복잡하게 분류된다. [지도]는 식생의 지역구분도이다.
Ⅰ의 한온대침엽림구역의 55%는 천연림으로 싱안낙엽송이 75%를 차지하며 등피나무·몽골소나무 등이 있다. 2차림은 자작나무이다.
Ⅱ는 온대침활엽혼교림구역(溫帶針闊葉混交林區域)으로 창바이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Ⅲ의 난온대낙엽활엽림구역(暖溫帶落葉闊葉林區域)에서는 단풍나무·자작나무·벵골보리수 등이 주종을 이룬다. Ⅱ에 가까운 랴오둥반도[遼東半島(요동반도)]와 산둥반도[山東半島(산동반도)]에는 상수리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Ⅳ의 아열대상록활엽림구역(亞熱帶常綠闊葉林區域)은 해발고도에 따라 다르지만 열대삼림과 비슷하다. 삼림의 상층에는 너도밤나무과에 속하는 것이 많고 중층에는 애기동백나무과에 속하는 것이 많다.
Ⅴ의 열대계절풍우림과 우림구역에서는 높이가 40m에 이르는 상록수에 넝쿨과 착생식물(着生植物)이 자란다.
Ⅵ의 온대초원구역에는 가늘고 굳은 잎의 싹이 대초원을 이룬다.
Ⅶ의 온대황막구역(溫帶荒漠區域)은 식생이 거의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 오아시스에는 황철나무가 있고 염호(鹽湖) 주변에는 염생식물(鹽生植物)이 자란다.
Ⅷ의 칭짱고원 고한식피구역(高寒植被區域)에서는 남향사면(南向斜面)에 초원이 펼쳐져 있다. 고원황막지대에는 작은 관목이 있을 뿐이다.
중국에 생존하는 육생척추동물은 2091종이 있어 현재 알려진 세계의 총종수의 9.9%이다. 양서류가 196종으로 세계의 7%, 파충류가 315종으로 5%, 조류가 1166종으로 13.5%, 포유류가 414종으로 9.7%이다. 중국은 제4기 이후 대륙빙하에 덮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되거나 진귀한 종류가 현존한다. 자이언트팬더는 현재 헝돤산맥 북부와 그 주변에서만 살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지(地誌)
중국은 전체적으로 볼 때 농업과 공업 모두 지역차가 있는데, 이는 배경이 되는 지형과 기후 등 자연조건과 지하자원의 부존상황 등에 기인한다. 농업의 중심은 전 국토면적의 12%를 차지하는 평야와 10%를 차지하는 구릉 속의 소평지이고 대부분 바다에 가까운 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비교적 강수량이 많고 특히 친링산맥과 화이허강을 잇는 선의 남쪽은 연강수량이 1000㎜ 또는 그 이상인 습윤지역으로 논벼 재배의 중심지이다. 이 선의 이북은 비교적 강수량이 적고, 수리시설의 개선으로 벼농사가 약간 증가했지만 여전히 보리와 잡곡이 중심이다. 총면적의 19%를 차지하는 분지가 있으나, 농업을 영위하는 비옥하고 넓은 분지는 쓰촨분지뿐이다. 국토의 서부는 동부와는 대조적으로 비가 적고 초원과 사막, 그리고 고비(礫質沙漠)가 많다. 국토 전체의 33%가 산지이고 26%가 고원인데, 대부분이 대싱안링산맥·타이항산맥·쉐펑산맥을 잇는 선을 경계로 하여 서쪽에 있다. 황투고원과 윈구이고원에서는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생산성은 낮다. 칭짱고원 북서부에는 한랭하고 건조한 한대사막이 있다. 에너지자원의 부존상황도 지역 차이가 큰데, 북부에는 석탄의 매장량과 석유의 생산량이 많고 남부는 하천유역에서의 포장수력(包藏水力)이 많다.
둥베이[東北(동북)]
둥베이지구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흑룡강성)]·지린성[吉林省(길림성)]·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으로 이루어진다. 동쪽과 북쪽은 북한과 러시아에 접하고 서쪽에는 대싱안링산맥이 있으며, 남쪽에는 랴오둥반도가 바다에 돌출해서 보하이[渤海(발해)]와 황해(黃海)를 양분한다. 중국·러시아의 국경을 흐르는 헤이룽강의 남쪽에 소싱안링산맥[小興安嶺山脈(소흥안령산맥)]이 있고 북한과의 국경에는 창바이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이 산지들에 둘러싸여 중국 최대의 평원지대인 둥베이평원이 펼쳐지는데 이 평원은 남쪽의 랴오허평원[遼河平原(요하평원)]과 북쪽의 쑹넌평원[松嫩平原(송눈평원)]으로 나뉜다. 쑹넌평원은 헤이룽강의 지류인 쑹화강[松花江(송화강)]과 넌강[嫩江(눈강)]유역에 해당된다. 또 쑹화강과 중국·러시아의 동부국경을 흐르는 우수리강[烏蘇里江(오소리강)]이 헤이룽강의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 근처에 있는 습지성의 산장평원[三江平原(삼강평원)]에는 많은 국영농장이 있다.
이들 농장에서는 봄밀과 옥수수 등의 식량작물 외에 콩·사탕무·아마·해바라기 등 상품작물의 재배가 성행하고 있다. 주변산지에는 침엽수의 원생림이 분포하며 종이와 펄프의 주요 공급원이 된다. 랴오둥반도에는 사과농장이 많고 단둥[丹東(단동)]에서는 양잠업이 활발하다. 지하자원은 헤이룽장성과 랴오닝성에 석탄의 매장량이 많다. 석유도 전국생산량의 50%를 생산하는 헤이룽장성의 다칭유전[大慶油田(대경유전)]이 있고 지린성의 푸위유전[扶余油田(부여유전)], 라오닝성의 랴오허유전 등이 있다. 다칭유전에서는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베이징·친황다오[秦皇島(진황도)]·다롄[大連(대련)]·푸순[撫順(무순)] 등지로 원유를 직송한다. 수력발전소는 쑹화강의 바이산[白山(백산)]·펑만[豊滿(풍만)], 압록강의 윈펑[雲峰(운봉)]·라오후사오[老虎哨(노호초)] 등이 있다.
둥베이지구는 본래 여진족(女眞族) 등 유목민족이 살던 곳이고 남부는 고구려의 땅이었다. 선양[瀋陽(심양)] 이남의 랴오닝성 일부에는 일찍부터 한족(漢族)이 정착하였으나 헤이룽장성과 지린성에 한족이 본격적으로 이주한 것은 비교적 근세에 와서이다. 즉 둥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만주족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여 세운 청(淸)나라 후반기 이후이며, 19세기 말 이후에는 러시아제국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고 특히 1932~1945년 사이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중국 수립 후 제1차 5개년계획에서 일본이 안산[鞍山(안산)]·번시[本溪(본계)]·푸순 등에 건설한 광공업 시설을 복구·확장하면서 새로운 중공업시설을 건설하였다. 창춘[長春(장춘)]의 자동차생산공장과 하얼빈[哈爾濱(합이빈)]의 발전설비공장, 선양의 각종 중화학공업시설이 있으며 선양을 중심으로 하는 랴오닝성 북부는 대표적인 중화학공업지대가 되었다.
지금은 랴오허유전과 랴오양[遼陽(요양)]의 석유화학 등 새로운 산업시설이 생겼다. 에너지의 수요도 늘어서 석탄생산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내몽골자치구의 이민강[伊敏河(이민하)]·훠린강·톈바오산[天寶山(천보산)] 등의 노천굴 탄광을 개발하여 그 부족분을 메우고 있다.
황허강 중류·하류유역
이 지구는 베이징·톈진[天津(천진)] 등의 정부직할시와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산시성[山西省(산서성)]·허난성·산시성[陝西省(섬서성)]으로 이루어진다. 황허강의 중류부 양쪽에 펼쳐진 황투고원의 대부분과 황허강 하류부를 분수계(分水界)로 하여 그 북쪽의 하이허강[海河(해하)]유역과 남쪽의 화이허강유역을 합친 화베이평원이 포함된다. 동부에는 산둥반도가 황해에 돌출해 있다. 황허강은 길이가 5460㎞, 연간유출량이 480억 t이다.
화베이평원은 황허강이 운반해 주는 비옥한 황토토양과 여름에 고온다우한 기후로 예로부터 발달한 농업지대였다. 겨울밀·면화·땅콩·깨·담배 등이 생산된다. 산둥반도에는 산이 많지만 경사지를 이용하여 포도·사과 등 과수를 재배한다. 황투고원의 산시성[山西省(산서성)]과 산시성[陝西省(섬서성)]의 농업은 펀수이강[汾水(분수)]과 웨이수이강[渭水(위수)]유역의 작은 평야에서 보리·면화 등의 생산성이 높고 고원 위에서는 잡곡을 주로 생산하지만 생산성은 낮다. 이 지역의 석탄은, 매장량과 생산량이 모두 중국 제1인 산시성[山西省(산서성)]과 생산량 제2위인 허난성, 제4위의 허베이성, 제6위의 산둥성과 산시성[陝西省(섬서성)]에서 생산되고 있다.
유전은 톈진의 다강[大港(대항)], 허베이성의 지중[冀中(기중);任邱(임구)], 산둥성의 성리[勝利(승리)], 허난성의 중위안[中原(중원)]·난양[南陽(남양)], 보하이의 청베이 등에서 잇따라 개발되었다. 중국 성립 이래 종래의 카이롼·다퉁[大同(대동)]·자오쭤[焦作(초작)]와 함께 허베이성의 펑펑[峰峰(봉봉)], 허난성의 핑딩산[平頂山(평정산)]·이마[義馬(의마)]·산시성[山西省(산서성)]의 타이구란[太古嵐(태고람)]·핑숴[平朔(평삭)]·산둥성의 옌저우 등에서 새로이 탄광이 개발되었다. 또 룽옌[龍煙(용연)], 첸안[遷安(천안)] 철광산의 확장 및 개발에 따라 베이징·탕산·타이위안[太原(태원)]·한단[邯鄲(감단)] 등지에 중·대규모의 제철소가 건립되었다. 치보·창저우[滄州(창주)]·텐진·베이징 등지의 석유화학과 정저우[鄭州(정주)]의 방적기계, 뤄양[洛陽(낙양)]의 트랙터, 베이징·시안[西安(서안)]의 전기기계와 항공기, 타이위안의 대형기계, 지난[濟南(제남)]·베이징의 자동차, 카이펑[開封(개봉)]의 화학, 바오딩[保定(보정)]의 필름, 스자좡[石家莊(석가장)]·한단·셴양[咸陽(함양)]·시안·정저우·위츠[楡次(유차)] 등의 면방직, 산하이관[山海關(산해관)]의 교량용 철재 등 다양한 공업이 발달했고 베이징·톈진 등은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이 동시에 발달한 종합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지역은 황허문명의 발상지로서, 시안·뤄양·카이펑·베이징을 비롯하여 한단·취푸[曲阜(곡부)]·타이위안·쉬창[許昌(허창)] 등 역사적인 도시가 많으나, 이 도시들도 각각 특징 있는 근대적 공업도시로 바뀌고 있다. 특히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 정치·문화·교육·경제·통신·교통의 중심지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양쯔강 중류·하류유역
이 지구는 후베이성[湖北省(호북성)]·후난성·장시성·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장쑤성[江蘇省(강소성)]·저장성[浙江省(절강성)]과 정부직할시 상하이[上海(상해)]가 포함되는데, 양쯔강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중국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양쯔강은 길이 6300㎞, 연간유출량이 9793억 t 으로, 길이는 황허강과 큰 차이가 없으나 황허강의 약 20배에 달하는 강물을 바다에 흘려보낸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도 많지만 황허강에 비해서 중류·하류에 큰 지류가 많다. 중류유역에는 량후평원[兩湖平原(양호평원)]과 포양분지가 있고 하류의 남북 양쪽 기슭에도 강남삼각주와 장화이평원[江淮平原(강회평원)]이 있다.
강남삼각주와 량후평원은 예로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하며 지금도 쌀과 보리의 2모작과 쌀의 2기작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식량 산지이고, 장화이평원과 함께 면화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양쯔강 남쪽의 구릉지대에는 차나무밭이 분포하며 계곡에서는 채종(菜種)을 재배하고 있다. 산지에는 옻나무와 유동(油桐)이 많이 자라서 동백기름이 산출된다. 항저우만[杭州灣(항주만)]에 가까운 저우산군도[舟山群島(주산군도)]는 중국 최대의 연안어장이다. 남쪽 해안은 어업도 하지만 원저우[溫州(온주)] 등은 감귤류의 산지이기도 하다. 강남삼각지에서는 양잠을 하며 저장성의 진화[金華(금화)]는 햄의 산지로 유명하다.
지하자원으로는 북부 화이허강 하류부근에 화이베이[淮北(회북)]·화이난[淮南(회남)]·쉬저우[徐州(서주)] 등의 탄전이 있으며 양쯔강 이남은 후난성에 탄전이 약간 있는 정도이고 나머지는 장시성의 핑샹[萍鄕(평향)]처럼 작은 탄전이 있을 뿐이다. 유전도 쑤베이[蘇北(소북)]·쳰장[潛江(잠강)] 등 작은 유전뿐이다. 금속광물로는 마안산[馬鞍山(마안산)]·다예[大冶(대야)]·어청[鄂城(악성)] 등의 철, 퉁링[銅陵(동릉)]·다예·장시성 더싱[德興(덕흥)]의 동, 장시성 남부의 텅스텐, 후난성 주석광산(朱錫鑛山)의 안티몬, 수이커우산[水口山(수구산)] 등의 납과 아연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마안산·우한[武漢(무한)]·바오산[寶山(보산)]의 3대 제철소를 비롯하여 각종 중화학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종합공업도시 상하이는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며 최신예의 바오산제철소와 진산웨이[金山衛(금산위)]의 석유화학콤비나트도 있다. 화학공업도시로 석유화학이 발전한 난징[南京(남경)], 제철과 각종 기계공업이 활발한 우한, 국영제2자동차공장이 있는 스옌[十堰(십언)]·주저우[株州(주주)]·샹탄[湘潭(상담)]·마안산 등 신흥 중공업도시와 이정[儀徵(의징)]·웨양[岳陽(악양)] 등의 석유화학공업도시가 있다.
한편 항저우·쑤저우 등 역사적인 도시에서도 견직물 및 다양한 기계공업이 발달했다. 이 공업도시들의 전력공급원으로는 단장커우[丹江口(단강구)]·신안장[新安江(신안강)] 등 많은 댐이 있고 양쯔강 본류에도 이창[宜昌(의창)]에 커저우바댐이 있다. 항저우만의 친산[秦山(진산)]과 양쯔강 하류의 전장[鎭江(진강)]에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될 계획이다.
화난[華南(화남)]
이 지구는 푸젠성·광둥성과 광시좡족자치구 등으로 이루어진다. 예로부터 중국 남방의 문호 역할을 했으며 민족적·문화적으로 북방과 다르고 주체성이 강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산지에서 유출되는 짧은 강들이 많은 곡저평지(谷底平地)와 작은 삼각주를 이룬다. 이 가운데에서 주장강삼각주가 가장 넓은 평야이다. 광시좡족자치구에는 카르스트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하이난섬과 5000여 개의 작은 섬들이 연안과 남중국해에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이 북회귀선 남쪽에 있으며 연강수량은 중국에서 가장 많고 아열대식물과 열대식물이 번성한다.
농사는 벼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2기작이 많으며 3기작을 하는 곳도 있다. 상품작물로서 사탕수수가 재배되고 주장강삼각주에서는 양잠을 많이 한다. 하이난섬에는 고무농장이 있고 커피도 재배된다. 바나나·파인애플·여주 등 열대과수와 감귤류도 재배한다. 그러나 산지가 많아 생산량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많은 이민자(華僑)를 냈다. 지하자원은 주장강 하구의 앞바다에서 하이난섬 연안을 거쳐 북부만까지의 연해부 해저에 석유 매장이 예상되어 외국 석유자본과의 합작으로 시굴이 진행되고 있다. 내륙부에는 약간의 철과 석탄자원 외에 텅스텐·주석·우라늄 등의 금속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에너지자원의 부족으로 광둥성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러한 농산물·광산물을 기초로 하여 각종 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푸젠성의 산밍[三明(삼명)], 광둥성의 광저우[廣州(광주)]·사오관[韶關(소관)] 등에는 중간 규모의 제철소가 있다. 주장강삼각주 등에는 근대식 제당공장과 제사·견직물 공장이 있고 마오밍[茂名(무명)]에는 석유화학공장이 있다. 난닝[南寧(남녕)]·류저우[柳州(유주)]·광저우에는 기계공장이, 샤먼[廈門(하문);아모이]·산터우[汕頭(산두)]에는 통조림공장과 전기기계공장이 있다. 1979년 홍콩[香港(향항)]과 경계를 이루는 선전, 마카오와 인접하는 주하이[珠海(주해)], 산터우, 샤먼 등이 경제특구로 지정되었고 외국자본에 대한 우대조치를 취하여 합작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수출품 생산에 힘쓰고 있다.
하이난섬과 푸저우[福州(복주)]·광저우·잔장[湛江(담강)]·베이하이[北海(북해)] 등에서도 외자에 대한 개방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화교 및 그 밖의 외국자본과의 합작기업 유치에 힘쓰고 있다. 이것은 재외화교의 고향이 대부분 화난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다화[大化(대화)]·시진[西津(서진)]·신풍강(新豊江) 등에 대형댐이 있고 그 밖에 수많은 소규모 수력발전소가 있는데 이는 농촌 전기공급에 이용된다.
시난[西南(서남)]
쓰촨성·윈난성·구이저우성[貴州省(귀주성)]이 포함되는데, 이 3성에는 많은 자치주와 자치현이 있고 티베트족·이족[彛族(이족)]·먀오족[苗族(묘족)]·야오족[瑤族(요족)]·타이족[泰族(태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쓰촨분지는 <천부(天府)의 나라>라고 불리는 비옥한 땅으로 인구와 지하자원이 많다. 남쪽의 윈구이고원은 넓은 카르스트지대이고 돌리네는 바즈라고 불리며 이곳에 농경지가 집중되어 있다. 산이 많지만 기후가 좋아서 농사가 잘 되고 인구도 많다. 쓰촨성과 윈난성의 서쪽 반은 칭짱고원의 동쪽 끝이며, 남북으로 뻗은 험준한 여러 개의 산맥을 일컬어 헝돤산맥이라고 한다. 이 높은 산들 사이를 진사강(양쯔강 상류)·란창강(메콩강 상류)·누장강(살윈강 상류) 등이 깊은 협곡을 이루면서 남류한다. 막대한 포장수력을 가지고 있는데 쓰촨성의 궁쥐·퉁제쯔[銅街子(동가자)], 윈난성의 루부화[魯布華(노포화)]·톈성차오[天生橋(천생교)], 구이저우성의 우장두[烏江渡(오강도)] 등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완성되었거나 건설중이다.
지하자원으로는 구이저우성의 수은, 윈난성의 구리·주석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중국이 성립된 뒤 쓰촨분지의 석유·천연가스, 충칭[重慶(중경)] 부근의 철·석탄, 최근에 쓰촨성 남부의 판즈화[樊枝花(번지화)]철광산·바오딩탄광[寶鼎炭鑛(보정탄광)], 구이저우성의 류반수이[六盤水(육반수)]탄전, 구이양[貴陽(귀양)] 부근의 보크사이트 등이 개발되었다. 또 헝돤산맥 내부에서 다금속공생광상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쓰촨성 쯔궁[自貢(자공)]에서는 천연가스 외에 지하염수를 이용한 제염도 성행하고 있다.
농업에 있어서는 쓰촨성이 중국 유수의 곡창지대로 쌀과 보리를 생산한다. 윈난성·구이저우성에서도 쌀 외에 옥수수가 많이 생산된다. 윈난성·쓰촨성에서는 사탕수수와 면화의 생산이 많다. 쓰촨성은 양잠과 채종·감귤의 생산이 전국 제1위이다. 구이저우성·윈난성에서는 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공업은 쓰촨성 두커우[渡口(도구)]의 판즈화제철소 외에 충칭의 제철소, 구이양의 알루미늄공장, 쯔궁의 화학비료공장이 있다. 청두[成都(성도)]도 큰 공업도시로 방직과 기계 등이 생산되고, 촉금(蜀錦)·마오타이주[茅臺酒(모대주);貴州省(귀주성)] 등이 있다.
칭짱고원
칭하이성[靑海省(청해성)]과 티베트자치구가 포함되며 주민 대부분이 티베트족으로 종교는 거의가 라마교이다. 교통이 불편하여 인구밀도가 희박하였지만 최근에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칭짱고원의 남쪽에는 히말라야산맥이 있고 북쪽에는 쿤룬산맥 등이 있다. 고원에는 캉티쑤산맥[岡底斯山脈(강저사산맥)]·탕구라산맥[唐古拉山脈(당고납산맥)]·바옌카라산맥·아니마칭산맥[阿尼瑪卿山脈(아니마경산맥)] 등이 있다. 모두 만년설과 빙하가 덮여 있는 고산이지만 고원과의 비고차(比高差)는 별로 없다. 고원은 산맥으로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강수량이 매우 적고 한랭하며 건조한 한대사막도 있다.
농경지는 야루짱부강[雅魯藏布江(아로장포강);브라마푸트라강 상류]의 곡저평야와 칭하이성의 시닝[西寧(서녕)] 부근, 차이다무분지[柴達木盆地(시달목분지)]의 골무드[格爾木(격이목)] 부근에 있을 뿐이다. 그 밖의 대부분은 초원이며 주로 야크를 방목한다. 해발고도 3000m 전후의 낮은 농경지에서는 밀의 재배도 가능하지만, 고랭지에서 재배되는 것은 내한성 보리에 속하는 쌀보리 정도이다.
지하자원으로는 석탄이 해발고도 5000m의 마르찰라탄광을 비롯하여 칭하이성의 다퉁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석유는 차이다무분지 서부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나 본격적인 개발을 하지 않고 있다. 차이다무분지의 수칸후염호에서는 칼륨염을 채취하고 시톄산[錫鐵山(석철산)]에서는 납과 아연을 생산한다. 황허강 본류인 룽양샤[龍羊峽(용양협)]에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티베트자치구에서는 라싸[拉薩(납살)]의 북서쪽 양바징[羊八井(양팔정)]에 지열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행정·문화·공업·교통의 중심지는 라싸와 시닝이며 공장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시닝에는 모방직·식품·기계·의약품 등의 공장이 많다. 골무드·렁후[冷湖(냉호)] 등에도 공업이 발달했고 닌치의 근대식 모방직공장도 유명하다.
서북
간쑤성[甘肅省(감숙성)]·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영하회족자치구)]·신장웨이우얼자치구로 구성되었다. 지역은 광대하지만 근대적 산업이 적고 인구가 희박한 과소지대(過疏地帶)이다. 중국에서 가장 깊숙한 내륙이며,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옛날에는 실크로드가 있었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는 중앙을 동서로 가르는 톈산산맥에 의해 북쪽의 준가얼분지와 남쪽의 타림분지로 나뉜다. 타림분지의 한가운데는 타클라마칸사막이며 주변의 고비지대에 오아시스가 산재하여 관개농업을 한다. 준가얼분지의 톈산산맥의 북쪽 기슭에서도 관개농업을 하며 모두 밀·면화·사탕무 등을 생산하고 있다. 또 준가얼분지는 타림분지보다 강수량이 약간 많기 때문에 초지의 비율이 높고 양과 염소를 많이 방목하고 있다. 간쑤성의 동부는 황투고원이고 북서부는 허시후이랑[河西回廊(하서회랑)]이라고 하는 고비지대로서 주취안[酒泉(주천)]·둔황[敦煌(돈황)] 등의 오아시스가 있다. 닝샤후이족자치구에서는 황허강에서 끌어들인 용수로를 따라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후는 강한 대륙성기후로, 타림분지에는 연강수량 15㎜ 이하의 건조지역도 있고 투루판은 여름에 그늘에서도 48℃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닝샤후이족자치구의 스쭈이산[石嘴山(석취산)]·스탄징[石炭井(석탄정)], 간쑤성의 란저우[蘭州(난주)]·우웨이[武威(무위)],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하미·우루무치[烏魯木齊(오로목제)] 등에서 석탄이 생산된다. 석유의 경우 위먼유전[玉門油田(옥문유전)]은 쇠퇴했지만 간쑤성 동부의 창칭[長慶(장경)],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커라마이[克拉瑪依(극랍마의)]를 비롯하여 닝샤후이족자치구와 타림분지에서 발견되었다. 간쑤성 바이인[白銀(백은)]의 동, 진창[金昌(금창)]의 니켈, 징톄산[鏡鐵山(경철산)]의 철 등 많은 금속이 발견되었고, 자위관에는 제철소가 있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커라마이·두산쯔[獨山子(독산자)]·우루무치, 간쑤성의 란저우에는 석유화학공업이 발달했고 황허강의 류자샤[劉家峽(유가협)]·바반샤[八盤峽(팔반협)]·옌궈샤[鹽鍋峽(염과협)]·칭퉁샤[靑銅峽(청동협)]에는 수력발전소가 있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는 면·모의 방직물·융단·옥기(玉器)를 생산한다.
내몽골
동쪽의 대싱안링산맥에서 오르도스지방을 거쳐 서쪽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와의 경계까지 경도 약 29˚에 걸쳐 있는 중국의 북단부로 면적은 120만㎢에 달한다. 몽골고원의 남동부에 위치하며 북쪽은 몽골국과 경계를 이룬다. 서반(西半)은 바다인자란 등의 대사막과 넓은 고비이기 때문에 식생이 적은 건조지역이지만 동반(東半)은 강수량이 약간 많아서 좋은 초원을 이루어 몽골족에 의한 방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남동쪽은 한족들의 경작지역이다. 또 오르도스지방의 우위안[五原(오원)] 부근에서는 황허강에서 물을 끌어 관개농업으로 봄밀·잡곡(조·옥수수)·사탕무·감자·유료작물(油料作物) 등을 생산한다. 가축은 삼하마(三河馬)·삼하우(三河牛) 등을 비롯하여 양·소·말 등이 많다.
지하자원으로는 철과 희토광물(稀土鑛物) 등이 있어 바오터우[包頭(포두)]제철소의 원료로 사용된다. 또 이민강[伊敏河(이민하)]·훠린강·톈바오산·준가얼·우다[烏達(오달)] 등에는 대규모 탄전이 있다. 지란타이염지[吉蘭泰鹽池(길란태염지)]의 소다는 우하이[烏海(오해)]에 있는 화학공장의 원료로 사용된다. 공업이 발달한 지역은 구도(區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호화호특)]와 그 밖에 바오터우·우하이·츠펑[赤峰(적봉)]·퉁랴오[通遼(통료)] 등지이며, 몽골 국경 근처의 엘롄하오터[二連浩特(이련호특)]에서는 최근 석유가 개발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중국의 성립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중국의 성립을 선언하였고, 국민정부군을 대륙에서 몰아냄으로써 거의 중국 전 국토를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안팎에 걸쳐서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국가조직면에서 당을 기축으로 국가를 통치한다는 방침에 변함은 없었지만, 당이 그대로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형태를 이룩해내는 노력이 필요했다. 만 18세 이상의 남녀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어 인민대표 1226명을 선거로 선출하여 1954년 7월 베이징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헌법과 그 밖의 중요법안을 가결했으며, 국가주석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 국무원 총리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변경인 옌안[延安(연안)]에서 문화가 오래되고 인습의 골이 깊은 베이징으로 진출하자, 간부당원 사이에서는 독직·낭비·관료주의의 경향이 나타났고, 당은 이를 배제하기 위하여 이른바 3반운동(三反運動)을 창도(唱導)해야만 했다. 정풍운동(整風運動)이라고 일컫는 이와 같은 숙청은 문예·학술 분야로도 확대되어, 애매한 혐의로 희생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던 중국정부는 소련식 중공업국가 건설을 목표로 1953년부터 제1차5개년계획에 착수하였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뒷받침이 되는 농업진흥이 필요했으므로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농촌의 공산화를 꾀하였고, 1955년부터 생산합작사(生産合作社:후의 人民公社)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지방에서 혼란을 일으켰으며, 생산이 감퇴되었다. 당중앙에서는 이것이 공산화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1958년부터 <대약진운동>으로 농민의 협동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생산증대를 강요하였다. 그 결과 생산은 더욱 감축되어 1959년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는 이런 실패를 반성하였고, 류사오치를 국가주석에 선임, 방침을 변경하였다. 농업이 1959년부터 3년 연속 대흉작으로 심각한 국난에 직면하자, 새 정부는 농촌의 지나친 공사화(公社化)를 중지하고 농가의 자류지(自留地;자기소비를 중심으로 부업에 의존하는 경작지)를 인정하였으며 자유시장을 부활시켜 농민의 생산의욕 증진에 힘썼다. 이 조정정책이 주효하여 1962년 무렵에는 생산도 회복되고 위기상태에서 벗어났다.
문화대혁명
이러한 조정정책은 공산주의의 원리, 특히 마오쩌둥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동지를 규합하여 권력회복을 꾀하였다. 군부의 린뱌오[林彪(임표)]와 상의해서 배후를 굳혔고, 청소년들을 홍위병(紅衛兵)이라 하여 동원함으로써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였다. 학교나 공장에는 대자보(大字報)를 내붙여 간부를 공격, 사퇴하게 하였으며 지방정부나 당간부도 이에 동조하지 않는 자는 추방하였다. 국가주석 류사오치, 당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그 계파의 간부가 모두 퇴진하였고 마오쩌둥이 복귀했으나, 이 무렵에는 그의 지도력이 이미 쇠퇴기에 들어서, 대신 린뱌오가 실권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강청)]과 신진인사인 왕훙원[王洪文(왕홍문)]·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야오원위안[姚文元(요문원)] 등 4명이 그 뒤를 이었다.
문화대혁명운동의 처음 의지는 어디까지나 언론투쟁이었으나 이 운동의 주력이 청소년 쪽으로 옮겨지자 군중심리에 선동된 폭도들의 파괴적 충동을 차단할 수 없었다. 이 폭동이 수습되고 질서가 회복된 것은 1969년 무렵이었다. 마오쩌둥은 당주석으로서의 실권은 회복하였으나 지도력을 완전히 잃어 린뱌오나 장칭의 망동을 막지 못하였다. 당전국대표대회에서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로서 차기 당주석으로 지명되었으며, 이것을 당규에 넣도록 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장칭 일파와 격렬한 당쟁이 되풀이되었고 알력은 점점 심해져서 1971년 7월 신변의 위험을 느낀 린뱌오는 비행기로 국외탈출을 꾀하다가 내몽골 상공에서 추락, 목숨을 잃었다. 장칭 일파는 이른바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라 하여, 몇 천년 전에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중국사회를 정체에 빠뜨렸다고 하는 공자와 함께 린뱌오를 극악무도의 표본처럼 비난하였다. 그러나 비림비공운동의 이면에는 저우언라이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유동적인 형세 속에서 장칭일파로부터 비방을 받은 것은 저우언라이로서도 심한 타격이었으나, 마오쩌둥의 신뢰를 받아왔던 그는 정적에 대항하는 가운데서도 실각중인 덩샤오핑을 등용하여 자신의 후임자로 생각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나자 이러한 불안정한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 후임으로 무명에 가까운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을 대리총리로 기용한 것은, 당의 분열을 우려하여 그로 하여금 조정 역할을 하게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칭·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 이른바 4인방(四人幇)은 정권 탈취의 기회로 판단하고, 1976년 4월 청명절(淸明節)에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군중이 톈안먼[天安門(천안문)] 앞에 모여서 시위를 벌였던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덩샤오핑을 실각시켰다. 게다가 9월에 마오쩌둥이 죽자 장칭 일파의 권력회복운동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화궈펑은 덩샤오핑 등 저우언라이파의 힘을 빌리고 군부의 원조를 얻어 4인방을 일망타진 체포, 재판에 회부하였다. 4인방이 몰락한 뒤 정계의 실권은 차츰 덩샤오핑에게 옮겨 갔다.
저우언라이의 후계자인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론을 영원한 진리로 생각하지 않고 실천 가능한 부분을 선택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당내에는 아직도 무조건 마오쩌둥을 신봉하고 그의 이론을 빠짐없이 준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왕둥싱[汪東興(왕동흥)] 일파가 있었다. 양자의 싸움에서 결국 덩샤오핑이 승리하여 왕둥싱은 추방되었다. 이와 함께 왕둥싱과 가깝고 태도가 애매모호한 화궈펑도 비판을 받아, 당주석과 국무원총리를 사임하고 당부주석이 되었다가 다시 당중앙위원으로 격하되어 정국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덩샤오핑은 최고실권자가 되었으나, 국가주석과 당주석 등 현직에 나서지 않고 1981년 국무원총리에 자오쯔양[趙紫陽(조자양)], 당총서기에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을 내세워 놓고 눈에 띄지 않는 직책에서 군부를 장악하는 등 실력 있는 후견인 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마오쩌둥 초기의 영원혁명론은 퇴색하고 대신 저우언라이가 주장한 상식적인 경제발전정책, 즉 농업·공업·국방 및 과학기술의 <4가지 근대화>가 지도원리가 되었고, 그 실현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였다. 과거의 극좌이론이 범한 과격하고 공상적인 정책이 차례로 조정되고 잘못 비판당했던 희생자의 권리와 죽은 사람의 명예도 회복되었다.
중국은 건국 이래 40여 년 동안 경제건설이 매우 침체되어 있었으나 현대에 안정을 얻어서 4가지 근대화에 매진하게 되었다. 근대화란 곧 서유럽화와 수정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K. 마르크스나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한 일탈행위였다. 전에는 당내 좌파의 공격을 받아 좌절되었을 정책이 덩샤오핑 밑에서 지장 없이 수행된 것은 정권이 안정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1989년 4월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집회가 시작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대해 리펑[李鵬(이붕)] 총리는 계엄령을 선포, 학생들의 무기한 농성이 진행되고 있던 톈안먼광장을 무력진압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90년 6월 자오쯔양 총서기는 톄안먼사건에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장쩌민이 총서기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 등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의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되어 1992년 12월 상하이·선전 등을 순방하여 개혁과 개방의 가속화를 촉구했으며 당시의 어록인 남순강화는 당·정·군에 걸쳐 전국적으로 학습되었다. 이러한 개방화의 물결은 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에서 WTO가입을 승인받아 국제자유무역체제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세계 7번째 무역대국으로서 본격적인 개방시장 경제체제로 진입하게 되었다. 또 2001년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200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7년 2월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추진의 총설계로 추앙받던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장쩌민은 차오스를 비롯한 고령 정치국원들을 대거 탈락시키고 자신의 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테크노크라트 인사들을 대거 발탁하는 이른바 연경화(年輕化)식 세대교체를 통해 권력기반을 강화한다. 2002년 11월 제16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의 뒤를 이어 후진타오 공산당 총서기를 핵심으로 하는 이른바 4세대 지도부가 출범한다. 지난 13년간 중국을 이끌어온 장쩌민 주석을 비롯 리펑, 주룽지 등 3세대 지도부가 자연스레 퇴진한 것이다. 권력의 핵심인 당중앙위원 198명과 후보위원 158명 중 절반 이상이 교체되어 평균연령은 55.4세로 연경화되었다. 앞으로 이들이 중국의 미래를 어떨게 펼쳐나갈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제정세
중국은 건국 당시에는 소련의 원조를 받는 일이 많았고, 그들과 동맹을 맺어 굳건한 단결을 자랑하였다. 제1차5개년계획은 소련식 중공업 건설을 목표로 하였고, 각종 플랜트를 수입하였으며 기술자를 초빙하여 그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에서 J. 스탈린이 죽은 뒤, 그의 독재 압정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는데, 그 비판 가운데 마오쩌둥에게 해당되는 것도 있었으므로 양국 사이에는 점차 위화감이 확산되었다. 소련을 수정주의(修正主義), 중국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서로 헐뜯는 노선전쟁이 고조되었고 1960년 소련은 중국에 건설중이던 공장의 소련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중국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자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여 계획을 완성시켰다. 이와 같은 양국관계의 결렬 배후에는 현실적인 영토문제가 숨어 있었다. 오랫동안 중국령이었던 외몽골은 러시아혁명 때 소련 적군(赤軍)의 원조 덕분에 백군(白軍)을 쫓아내고 중국으로부터 독립(몽골인민공화국)함으로써 소련의 동맹국이 되었다. 중국은 소련이 제정러시아시대의 팽창정책을 계속 수행하는 신(新)차리즘에 불과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1969년 우수리강 가운데의 작은 섬인 전바오[珍寶(진보);다만스키]섬의 귀속을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무력충돌사건까지 일어났는데, 이는 중국이 더 이상 소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중국외교의 전환점이 되어 이후 중국은 서방 여러 나라의 국제사회로 복귀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1971년 국제연합에 가입하여 타이완[臺灣(대만)] 대신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한편 미국이 후원하는 남쪽의 베트남공화국 내부의 부패·혼란을 틈타 중·소 양국이 지원하는 북쪽의 베트남민주공화국에 의하여 베트남이 통일되었으나, 베트남은 통일 후 전적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중국과의 국교단절을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국 내의 화교 및 중국계 인민에게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의 이면에도 영토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흩어져 있는 도서군(島嶼群)과 남해제도(南海諸島)를 모두 중국령이라고 선언하고, 베트남령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중국과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삼은 미국은 중국에 접근을 꾀하여 1972년 R.M.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고 국교재개를 합의하였다. 1979년 미국은 중국과 우호조약을 맺고 타이완과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소련(러시아)은 오래 전부터 시베리아 개발을 열망하였으며, 제2시베리아철도 개통을 추진하면서 중국에 줄곧 화해를 요청하였다. 이에 중국은 외몽골로부터의 소련군 철수, 베트남에 대한 원조 정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소련군 철수 등을 요구하여 큰 진전이 없었으나, 계속적인 노력 끝에 1989년 역사적인 양국정상회담의 성사로 30년 불화를 청산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외교·군사
정치개관
중국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1919년 5·4운동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과 봉건적 지주제의 수탈에 반대하는·민주주의투쟁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 뒤 30년 동안 북벌전쟁·토지혁명전쟁·항일전쟁·국공내전(國共內戰) 등 4단계에 걸친 무장투쟁을 거쳐 1949년 중국을 수립, 사회주의로의 이행단계에 들어갔다. 중국은 노동자계급이 기본 주체세력이 되어 농민을 긴밀한 동맹자로 삼고 그 밖의 민주세력과 통일전선을 펴며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후 토지·주요자원·주요시설 등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노동에 따른 분배제도를 시행하여 사회주의의 건설과 인민생활의 향상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구제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지도한 중국공산당의 경험부족과 당 최고지도자에 대한 과도한 개인숭배 등의 병폐가 나타났다. 1955년 농업의 집단화와 수공업·개인상업의 개조를 지나치게 서둘렀고 1958년 경제법칙과 객관적인 조건을 무시한 <생산대약진>정책을 시행하였다. 1966~1976년 계급투쟁이 없어야 할 사회주의 사회에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서 국민경제와 사회·문화의 발전속도가 상당히 늦어졌다.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제3차중앙위원회의 총회에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정치개혁과 개방정책이 채택되어 당의 노선과 정책은 대폭적으로 시정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근대화가 일정한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1984년 이후 경제과열현상과 1989년 톈안먼[天安門(천안문)]사태 등으로 개혁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듯 하였으나 1990년 이후 경제안정과 정치력에 힘입어 개방·개혁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정치제도
중국의 현행헌법은 1982년에 제정된 것으로서 1954년·1975년·1978년의 헌법에 이어서 4번째의 헌법이며, 1988년·1993년·1999년에 일부 개정되었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유경제가 보장된 <사회주의시장 경제발전>을 전문에 새로 포함시키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명문화하고 반혁명활동죄를 국가안전위해죄로 변경했다.
현행헌법은 제1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을 지도계급으로 하는 노농동맹(勞農同盟)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전정(專政)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전정>이란 집권 또는 독재라는 의미로, 현행 헌법의 머리말에서는 인민민주주의 전정은 실질적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전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중국의 국가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고 그 상설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이다. 이 대표대회와 상무위원회가 국가의 입법권을 행사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각 성(省)·자치구·직할시와 군대에서 선출된 2979명(1998)의 대표(이 가운데 20%는 여성)로 구성된다. 각 소수민족도 각각 적당수의 대표(전체의 13% 정도)를 갖고 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대의원의 임기는 5년이며 대표대회는 원칙적으로 매년 한 번 회의를 개최하도록 되어 있고 헌법개정과 기본적인 법률의 제정·개정, 인민공화국의 주석과 부주석의 선출, 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선출, 전쟁과 평화문제의 결정, 그리고 그 밖의 주요직권을 행사한다. 중국의 최고행정기관은 국무원(國務院;中央人民政府)이고 총리 1명과 부총리 약간명, 국무위원 약간명, 각 부의 부장, 각 위원회의 주임, 회계검사장(會計檢査長), 비서장으로 구성되며 그 임기는 인민대표대회의 임기와 같다. 국무원 총리의 인선은 공화국 주석의 제청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출하며 부총리 이하의 국무원 인사는 총리의 제청에 따라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인준한다. 국무원의 직권에는 행정법규의 제정과 결의·명령 등의 반포,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상무위원회에 대한 시안(試案)의 제출, 그리고 경제·사회 발전계획과 국가예산의 수립·집행, 그 밖에 헌법으로 규정된 많은 주요사항이 포함된다.
중국의 지도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인 중국공산당이다.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사상을 행동지침으로 삼는다고 1982년 당의 제12차전국대표대회에서 결정된 현행 당규약에 규정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 당원은 6635만 명(2002)에 이르고 있으나 간부대열의 혁명화, 세대교체, 교육수준의 제고, 전문화가 요구되고 있다. 현행 당규약에는 중앙과 지방에 규율검사위원회가 신설되어 이에 따른 점검활동이 시작되었고 당중앙에는 서기국만 두고 주석과 부주석을 폐지함으로써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공산당 외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중국민주동맹·중국민주건국회·중국민주촉진회·중국농공민주당·중국치공당(中國致公黨)·구삼학사(九三學社)·타이완민주자치동맹[臺灣民主自治同盟(대만민주자치동맹)] 등의 정당이 있다. 이 정당들은 모두 조직이 작고 신규로 입당하는 청년이 많지 않지만 중국공산당과 각종 인민단체, 그리고 각계의 대표와 함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라는 통일전선을 조직하여 공산당과 장기공존·상호감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힘쓰고 있다.
중국의 선거제도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와, 성·직할시·구(區)가 설치되어 있는 시(市)의 인민대표대회의 대표는 한 급 아래의 인민대표대회에서 선출된다. 구가 없는 시와 시관할구·현(縣)·향(鄕)·민족향(民族鄕)·진(鎭)의 인민대표대회 대표는 선거민이 직접 선출한다. 만18세 이상의 중국국민은 민족·종족·성별·직업·출신계급·종교·교육정도·재산상황·거주기한 등에 관계없이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중국의 사법기관으로는 최고인민법원과 지방의 각급 인민법원, 특별인민법원이 있다. 검찰기관으로는 최고인민검찰원, 지방의 각급 인민검찰원, 특별인민검찰원이 있다. 인민법원은 국가의 재판기관이며 사건의 심리는 원칙적으로 공개되고, 피고인은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중국에는 형법·형사소송법·민사소송법이 있지만, 인민들의 법률관념이 희박하여 전국적으로 준법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또 60여 만 명의 사법요원이 있지만, 법학을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8%에 불과해서 사법요원에 대한 수준 높은 사법교육이 시급한 실정이다.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민단체로는 중화전국공상업연합회(中華全國工商業連合會)·중화전국총공회(中華全國總工會;노동조합의 전국조직)·중국공산주의청년단·중화전국청년연합회·중화전국학생연합회·중국소년선봉대(中國少年先鋒隊)·중화전국부녀연합회 등이 있다.
지방행정
중국의 각 성·직할시·시·시관할구·현·향·민족향·진에는 모두 인민대표대회와 인민정부가 있다.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는 지방의 국가권력기관이며 인민대표의 임기는 성·직할시·구가 설치되어 있는 시에서는 5년, 구가 없는 시·시관할구·현·향·민족향·진에서는 3년이다.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는 행정구역 내의 경제와 문화, 공공사업의 건설에 대한 계획을 심사·결정한다. 현급 이상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는 행정구역 내의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예산과 집행상황의 보고를 심사·승인한다. 현 이상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에는 상무위원회를 두고, 성과 직할시의 인민대표대회와 상무위원회는 지방의 법규를 제정할 수 있다.
지방의 각급 인민대표대회는 각각 동급의 인민정부의 성장(省長)과 부성장·시장·부시장·구장(區長)·부구장·현장(縣長)·부현장·향장(鄕長)·부향장·진장(鎭長)·부진장을 선출하거나 파면할 권한을 가진다. 지방의 각급 인민정부는 지방의 각급 국가행정기관이다. 도시와 농촌에는 주민의 거주구역마다 주민위원회 또는 촌민위원회라고 하는 대중적 자치조직이 있어 거주구역의 공공사업과 공익사업을 관장하고 치안유지에 협력한다. 소수민족의 자치지역에는 자치기관으로 자치구와 자치주, 자치현의 인민대표대회와 인민정부가 있고 그 밖에 민족의 특징에 따라 자치조례를 제정하여 민족문화의 번영을 위한 행정을 시행하고 있다.
외교
1954년 국무원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인도와 미얀마를 방문하여 두 나라와 함께 평화5원칙을 제창하였다. 주권과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이라는 이 5원칙은 국제정세의 어지러운 변화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호응을 얻어 많은 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중국외교의 기본원칙은 평화5원칙을 준수하며 제3세계의 단결을 지원하고 피압박민족과 피압박인민의 반제·반식민·반패권투쟁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대소·대미관계는 오랫동안 불화가 계속되었는데 이는 1974년 국제연합 특별총회에서 덩샤오핑(당시 국무원 총리)이 주창한 <3개의 세계론>을 통해 명백해졌다. 3개의 세계론이란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미·소 양대국을 제1세계로, 서유럽과 동유럽 여러 나라를 미·소 양대국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제2세계로, 미·소의 억압 밑에 놓인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및 그 밖의 발전도상국과 중국을 제3세계로 보는 견해로서 그 밑바닥에는 중·소 양국 공산당의 대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시대의 도래, 1979년 이후 경제개혁을 위한 서방으로부터의 자본과 기술도입의 필요성, 동유럽의 민주화 등을 경험하면서 더이상 외교적 고립상태나 민주화에 대한 억압이 이 시대에는 걸맞지 않음을 깨닫고 외교방침을 전환, <제3세계 외교>에 치중하던 중국이 국제무대의 중심국가로 부상하기 위한 <전방위 외교>로 선회하여 다방면으로 국제무대에 진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로써 비우호적인 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하여 현재 130여 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특히 2002년 WTO의 정식회원국으로 편입됨으로써 국제사회의 중심권 진입을 가속화하고 있다.
타이완과의 관계는 여전히 1국 2체제를 적용, 만일 타이완이 독립을 기도할 경우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 분야에서는 2000년 초 타이완 투자자들의 중국 국영기업 취득 허용 및 천연자원개발사업 참여, 세제혜택 등을 골자로 한 <타이완투자보호법>을 도입하는 등 협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군사
중국 군대는 인민해방군이라 하고 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가 이를 통솔한다. 중국공산당 내에도 중앙군사위원회가 있고 당군사위원회의 주석과 부주석이 국가군사위원회의 주석과 부주석을 겸하는 전통이 있으므로 사실상 군대는 당에서 지도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해방군의 전투부대는 4개의 성에 걸쳐 있는 7개의 대군구(大軍區)와 1개 위수군구로 편성되어 있다. 대군구는 다시 성군구(省軍區)로 세분된다. 전투부대는 명목상 국방부에 속하지만 지휘권은 군사위원회의 총참모장과 각 군구의 사령원(司令員)이 가지고 있다. 보병을 위주로 하는 단일병종(單一兵種)에서 출발하였으나 공군·해군, 포병·장갑병·공병, 철도병·통신병, 화학전부대·전략로켓부대 등을 창설, 혼성군으로 발전하여 지금은 여러 군종(軍種)과 병종을 합친 혼성집단군이 조직되어 있다. 1984년 병역법을 개정하여 중국인민해방군은 의무병역제를 주로 한 지원병역제를 병용하고 있으며, 병역기간도 종래의 육군 3년, 해군·공군 4년에서 1998년 12월부터 육·해·공군 모두 2년으로 단축하였다.
2004년 총병력은 237만 명으로 육군 160만 명, 해군 25만 명, 공군 42만 명, 제2포병 10만 명이며 줄이는 추세에 있다. 1964년 처음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였고, 1966년 원폭과 미사일결합 실험을 하였으며, 1967년 수소폭탄도 보유하게 되었다. 2004년 국방예산은 250억 달러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산업
중국의 경제 성장은 1949년부터 1957년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마오쩌둥의 <대약진>과 <인민공사(人民公社)> 정책이 계획경제라는 명목에 부합되지 않아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였다. 1959년부터 연속 3년 동안의 자연재해와 1960년 소련의 원조단절 등은 중국경제를 더욱 침체시켰다. 1963년부터 개선되기 시작했으나 실리보다 사상을 우선하는 정치체질과 권력투쟁으로 1978년까지 26년 동안의 연평균성장률은 2%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 당시 중국 경제는 고도의 중앙집권체제를 이루며 경제와 행정명령이 우선하였다. 중공업 위주의 경제계획으로 1977년 공업생산액이 국민총생산(GNP)의 44%(그 중 60% 이상이 중공업비율)에 이르고 1983년 사회총노동력의 74.5%가 농촌에 편중되어 노동력 비율이 불균형 상태를 이루고 기업체제를 효율화시킬 내부기구도 없었다. 1952년에 농촌노동력이 사회총노동력의 88%로 압도적인 다수였고 1983년에도 여전히 74.5%였다. 즉 인구의 80%가 오랫동안 농촌에 머물러 이동하지 않았으며, 이는 중국공업의 고도성장이 농촌과 격리된 상태에서 투자를 위한 투자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중국은 지난 십수년간 평균 30% 정도의 높은 저축률을 기록했다. 1978년에는 국민소득의 36.5%가 저축기금이었고 이 가운데 26.2%가 생산적 축적에 소비되었다. 그러나 공업에 대한 투자는 공장증설에 치우쳤고 기존설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중국 기업체제에 효율화를 촉진하는 내적 기구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옛 경제체제의 결함을 감안하여, 1978년 말에 <4대 근대화>라는 경제개혁에 착수하였다. 이 경제개혁은 자영농 육성과 농산물가격 인상을 먼저 꾀하고 중공업의 일방적인 발전을 억제, 농업과 경공업에 대한 투자를 증가시켰으며 생활필수품과 내구소비재의 생산을 늘렸다. 특히 개혁개방저책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 이후 20년간 연평균 국내 총생산 증가율 9.3%라는 경이적 성장을 지속해왔다. 국제통화기금은<세계경제전망보고서>에서 중국이 현재의 고도경제성장을 유지하면 10년내로 미국, 유럽연합에 필적하고 15년내에 세계경제의 20%를 점유, 서구경제를 압도할 것으로 예측했다. 중국은 국민총생산목표를 2010년까지 2000년의 배로 늘리고 건국100주년이 되는 2049년 현대화를 실현하고 민주적이며 문명화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자원
중국은 국토의 광활함과 자원의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산물과 에너지자원은 종류도 많고 절대량도 크지만, 인구비율로 나누어 본다면 그렇지도 못하다. 광물자원은 130여 종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 가운데 텅스텐·주석·안티몬·아연·리튬·프랑슘·티탄·황철석(黃鐵石) 등은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고 석탄·철·구리·알루미늄·몰리브덴·납·수은·인(燐)·붕산 등도 세계굴지의 양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광산물에 빈광(貧鑛)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① 철광은 성분비 30% 정도의 빈광이 전체의 95%를 차지하며 부광(富鑛)은 분산되어 있어 개발에 불리하다. 상하이 바오린제철소[寶林製鐵所(보림제철소)]는 성분비 55~60%의 광석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원광을 수입하거나 비용을 들여 부광처리를 해야만 한다. 구리도 함유율이 1%만 되어도 부광에 속하며 콩고민주공화국과 잠비아산의 3.5~6%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인·보크사이트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② 성분이 복잡한 공생광(共生鑛)이 많아서 얻고자 하는 광물의 야금(冶金)과 제련에 어려움이 많다.
③ 칼륨 등 몇 가지 광물의 매장량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철광자원의 분포는 랴오닝성에 많고 쓰촨성·허베이성·산시성[山西省(산서성)]·안후이성·후베이성·내몽골자치구·산둥성·윈난성의 순이다.
주요 철광산에는 반드시 제철소가 있다. 석탄의 매장량은 세계의 1/10 정도이다. 2000년의 석탄생산량이 9억 9800t으로 세계 1위이며 화베이지역이 전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연간 생산 1000만t 이상의 탄광은 둥베이의 기시[鷄西(계서)]·허강[鶴崗(학강)]·푸순·푸신[阜新(부신)], 화베이의 카이뤄·펑펑·다퉁·양촨[陽泉(양천)]·시산[西山(서산)], 화둥[華東(화동)]의 화이베이·쉬저우, 중난[中南(중남)]의 핑딩산 등 12곳이 있다. 500~1000만t급은 13개소, 그리고 이곳들을 모두 포함한 국영탄광의 총수는 2200개소이며 내몽골자치구의 준가얼탄광과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안타이바오탄광[安太堡炭鑛(안태보탄광)] 등의 대규모 탄광이 새로 채탄하고 있다. 10만t 이하의 소규모 탄광은 지방에서 경영되며 약 1만 7000개소가 있다. 화베이에서는 석탄이 남아돌지만 화둥·중난·둥베이에서는 부족한 상태이고 고품위탄도 수요에 따르지 못하는 형편이다. 주요 에너지원인 석탄의 수송량이 많으므로 철도수송이 곤란을 겪고 있다.
석유는 1960년 다칭유전에서 생산이 시작되면서 자급에 성공하였다. 그때까지는 위먼·두산쯔·쿠라마이·렁후 등 서북쪽 유전에서 공급되는 것 외의 부족분은 소련으로부터 수입했다. 22개 성과 직할시·자치구에서 새로운 유전과 가스전이 발견되고 있으나 유전매장량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생산량으로 본다면 성리[勝利(승리)]·랴오허[遼河(요하)]·다강[大港(대항)] 순이다. 1978년 이후 해양석유개발이 시작되었고 보하이·통킹만·하이난섬 해역에서 전망있는 유층이 발견되었으며, 서방의 석유회사와의 공동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서부의 타림·준가얼·차이다무에도 유전이 있으나 동부공업지역으로 수송하는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수자원은 양쯔강수계가 가장 많아서 전체의 50% 이상이며 티베트의 야루짱부강·누장강·란창강 등의 순서이다. 또 황허강은 6%, 주장강이 5.2%이다. 1993년부터 다시 원유 수입국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12억 7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였다.
수자원은 서남지방에 풍부하지만 경제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개발이 곤란하다. 전력개발의 중점은 동부연안지방과 양쯔강·황허강 중류에 두어 왔다. 25만㎾ 이상의 발전소가 18개소, 500㎾ 이하의 작은 발전소가 8만여 개에 이른다. 그러나 화력발전과 수력발전을 합쳐 전국 6300만㎾의 시설용량 가운데 수력발전은 20% 정도를 차지, 개발가능량의 3%를 개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최대 건설공사로 일컬어지는 싼샤댐을 총공사비 244억 달러로 1994년 12월에 착공했다. 양쯔강을 막아 댐을 건설하겠다는 발상은 쑨원이 제기한 것으로 양쯔강 중류지역인 후베이성 싼샤에 건설되는 이 댐은 세계최대의 다목적댐으로 길이 2.5㎞, 제방높이 185m, 정상저수수위 175m, 총저수량 393억 ㎥로 2003년 가동될 1·2호기의 연간 발전량은 870억㎾에 이른다. 원자력발전소는 2003년까지 6개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한편 중국의 땅은 토양유실(土壤流失)이 심한 지역이다. 황허강 중류에 있는 황투고원은, 동쪽의 타이항산맥에서 서쪽의 칭하이 르웨산[日月山(일월산)]까지, 남쪽의 친링산맥 동부 푸뉴산맥[伏牛山脈(복우산맥)]에서 북쪽의 만리장성에 이르는 약 40만㎢에 인구 약 6000만에 이르는 이 지역에서는 토지 총면적의 80%에서 토사의 유실이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1㎢당 4000t~1만t 가량의 토사가 유실된다고 한다. 따라서 황허강 중류의 하상이 매년 10~20㎝씩 높아지며 정저우의 하류에서는 3~10m 이상의 천정천(天井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산림의 훼손과 마구잡이식 개간 등 불합리한 토지의 이용으로 생긴 것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서는 넓은 토지를 개간해야 했고 수년 뒤 황폐해지면 또 다른 땅을 개간했기 때문에, 숲과 초원을 잃게 되고 토양유실이 계속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데 이것을 윤경(輪耕)이라고 한다.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먼저 녹화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순서지만 숲이 적으므로 농가에서는 땔감이 부족하여 초목 그루터기와 풀뿌리, 짚을 때고 소와 말의 배설물까지 건조시켜 연료로 쓴 결과 농경지에 사용할 비료가 없어져 토질이 황폐해졌다. 양쯔강의 <황허강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상류에서 많은 나무를 남벌하여 숲의 피복도(被覆度)가 10여%로 떨어졌고 양쯔강에 토사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강수기에는 수량이 2~3배로 불어나고 건기에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1980년 이후 쓰촨분지 이하의 유역에서 우기에 흥수의 위험이 늘어났고 수운(水運)에 지장이 생겼다. 내몽골자치구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도 오랫동안 계획성 없이 초지를 농경지로 바꾸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농림수산·목축업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도시화의 추세 속에서도 농업인구는 여전히 많고, 작물의 다양성과 생산고에 있어서 세계유수의 농업국이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증가에 따른 농민 1인당 경지면적의 협소화는 농업의 근대화와 생산성 향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중국이 성립된 뒤 농업분야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는 의식부족(衣食不足) 문제를 일단 해결했다는 사실이다. 1998년에는 식량생산이 5억 1230만t으로 과거 최고치였던 1996년의 5억 454만t을 넘어섰다. 면화는 450만 1000t으로 급증했고 설탕 826만t, 차종류 66만 5000t, 돼지 4억 2256만 마리(1998) 등을 생산하였다. 옥수수는 둥베이지방의 풍작과 운반수단의 부족으로 저장할 수 없을 정도의 공급과잉이 초래되어 식품가공공장과 사료공장을 건설하자는 소리가 나왔으며, 면화도 저급품의 생산지에서는 거래가 늦어져서 야적한 채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이런 성과로 식량의 1인당 보유량은 쌀(벼)·보리가 265㎏, 면화가 6㎏에 이르는 등 의식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량은 충족되었다.
1949년 중국이 성립했을 때 중국공산당은 인구의 10% 정도인 대지주와 부농이 경작지의 70%를 차지했던 지주제를 폐지하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한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회복시켰고 1952년 말에는 농공업의 생산량이 혁명 전의 최고수준을 돌파하였다. 1952년부터 사유제적 자주조직인 호조조(互助組)가 새로 생겨났는데 이는 생산협동조합인 초급합작사로 발전하였다. 1955년에 이르러 소련의 콜호스와 비슷한 고급합작사가 조직되고 토지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이미 농민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정적 개입으로 조직을 만드는 지방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958년부터 중국공산당은 고급합작사를 연합한 거대 조직, 즉 인민공사를 만들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공사는 선전에 의해 미화되었으나, 실제로는 공유의 정도가 지나쳐 작업 배당과 보수 분배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저하시켰다. 과장된 거짓보고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1958~1959년 수치상으로는 대풍작이었지만 곳곳에서 기근이 발생했고 군대 또한 동요하였다. 그러자 당중앙은 경영수준을 생산대(生産隊;이전의 초급합작사, 20戶 정도)로 되돌려 놓았고 농민에게는 자영지를 주었으며 인민공사와 생산대대(生産大隊;이전의 고급합작사, 생산대의 연합조직), 그리고 생산대라는 3급소유제를 실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는 생산대의 소유가 되었다.
1965년 중국농촌은 3년 동안의 식량위기에서 겨우 벗어나는 듯했으나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10년 동안 마오쩌둥과 그 측근에 의해서 행해진 문화대혁명으로 도시와 농촌은 대혼란에 빠졌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극좌파는 농민의 자영지와 가내부업을 금지시키고 자유시장과 소매상까지도 <자본주의의 꼬리>라고 하여 제거하였다. 지방에 따라서 식량의 자급과 증산을 요구했고 공예작물과 임산·목축·어업 등이 억압당하거나 경시당해 농학연구와 품종개량·기술보급이 정체되었다. 무상노동에 의한 축적이 장려되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식량의 소비수준은 1950년대보다 낮았다. 1976년 극좌파가 타도되고 1978년에 정책전환이 분명해지자 농촌은 활기를 되찾았다. 가격과 세금, 금융, 정부의 농산물매입 등이 개선되었고 농가에 자영지가 부활했으며 다각경영이 인정되어 농촌에 자유시장이 서게 되었다. 행정기관이 무상으로 노동력과 물자를 조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생산대의 경영자주권이 존중되었고 노동의 정도에 따라 분배를 하게 되었다. <포건도호(包乾到戶)>라는 생산청부제를 취하여 노동력과 가족수에 따라 농가에 분배되었고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생산을 청부하였다. 농가에서는 식량을 정부에 팔아넘기고 조세의 의무를 다하면 자유로운 생산 및 판매가 가능했으며 필요에 따라 공동작업을 하더라도 농민에게 큰 자영권이 주어졌다. 종래의 자급형 농업은 부정되었고 상품생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농가의 부업으로서 전에는 금지되던 상업과 운수업·여관업·창고업, 그리고 여러 가지의 서비스업까지도 인정받게 되었다. 또 1979년 식량의 정부매입가격이 20%, 의무매도초과분 50% 등의 할증가격이 실시된 뒤부터는 자영화에 의한 생산비의 하락과 함께 식량생산의 수익률이 30% 가량 되었다.
1984년 농산물의 상품화율이 50%를 초과하게 되자 당국은 <통일매입·통일판매(식량의 국가통제)>를 꾀하여 농민에게 시장의 수요에 따라 생산하게 하도록 통제를 완화하고 가격을 시장원리에 따라 조절하는 방향으로 진행시켰다. 통일매입은 식량·착유원료·면화에 한정하고 할당매입을 18종에서 9종으로 줄였다. 여기에는 농산물의 매입과 판매의 이중 가격에 의한 재정부담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있다. 농산물의 공급증가는 농민의 현금수입을 증가시켰다. 1978년 중국의 생산대와 농민의 현금수입은 580억 위안[元(원)]이었으나 1984년에는 1500억 위안을 초과하여 17.2%의 증가율(1953~1978년은 5.5%)을 보였다. 현금수입의 증가는 국내시장을 확대시켰고 1984년 사회구매력의 50% 이상을 농민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도시의 공업과 농촌의 소공업화를 자극하였다. 농촌에서는 보다 좋은 것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자전거·라디오·시계 등의 보급률이 높아짐과 동시에 세탁기·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혜택은 도시근교에 집중되고 벽지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므로 지역간 격차가 증대되었다. 정부는 20~40%라는 과잉노동력의 해소를 위해서 농민에게 농촌광공업과 건축업, 운수업과 소매업, 식당과 그 밖의 서비스업에 대한 전업과 겸업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공업도 농촌의 과잉인구를 받아들일 만큼 급속한 발전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 또 농촌청년은 도시에 나가고 싶어하지만 당국에서는 급속한 도시화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들의 이동범위를 현성(縣城)과 진(鎭)을 중심으로 지방 소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방침이다. 1978년 이후의 경제개혁은 소수민족지역에도 파급되었다.
목축도 집단에서 개인경영으로 바뀌었고 전통적인 호조노동(互助勞動)이 부활하였다. 좋은 목야지를 개척하여 농경지로 바꾸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목축업의 보호를 우선하였다. 한족 청년을 오아시스와 유목지대로 대량 이주시키는 정책도 중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발생한 문화대혁명이 초래한 정체는 목야지의 황폐화, 농경지의 알칼리화, 가축의 개량과 방역의 불비 등 문제점을 낳았다. 수산업은 원양어업은 거의 없고 연안어업이 중심인데, 잦은 남획으로 어종이 치어화되는 등 자연보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한편 화난을 중심으로 담수어와 해조류의 양식이 확대되어 내륙지방에서도 양식어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공업
1949년부터 1952년 사이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으로부터의 회복기였고 1953년부터 대규모 건설이 시작되었다. 1998년 생산실적은 석탄 12억 5000만t과 석유 1억 6100만t의 광업생산으로, 발전량 1조 1670억㎾/h, 조강생산 1억 1559만t에 달하였다. 이 사이에 면사·면포·시멘트·석탄·화학비료 등은 세계 3위 이내, 철강은 제4위, 발전량과 석유 등도 10위권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문별로 보면 중화학공업의 성장속도가 현저하게 빠른데 그 이유는 중국 성립 전에는 소비재공업에 편중되어 유력한 생산재공업이 없었던 반면 그 뒤의 투자가 생산재생산부문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중화학공업의 과도한 성장이 소비재생산을 압박하여 필요한 소비재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반성으로 한때 투자가 억제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 다시 중화학공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국의 공업규모는 대부분이 소규모의 공장들이다. 가령 조강의 연간생산량이 100만t 이상인 대형철강공장이 총생산량의 85%를 생산하고 있지만 이런 기업은 9군데에 불과하였다. 자동차공장은 9군데의 대·중형공장이 생산의 62%를 차지하고 연간생산 5000대 이하의 소형공장이 전국 25개 성(省)에 분산되어 있다.
1970년대에는 중공업이 급속도로 신장되어 지방에 소공장을 많이 건설하였는데, 자본주의국가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소기업이 반드시 하청공장은 아니다. 작으면 작은대로 부품에서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산한다. 이것이 생산원가를 높이는 원인이 되어 철강과 화학공업 등의 분야에서는 일부 조업을 중단한 기업도 있어 중소기업의 전문화와 계열화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대기업과 중형기업은 국가 또는 성에서 경영하고 소기업은 현에서 경영한다. 이 밖에 향진기업(鄕鎭企業)이라고 하는 지방농촌의 영세기업이 있다. 이는 통계상으로는 부업에 들어가지만 농업생산재의 생산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농촌의 과잉인구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향진기업의 제품은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하여 수요에 따라 생산하고 있다.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공정가격의 석탄·전력·강재(鋼材)를 입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생산원가가 인상되지만 국영상점보다 제품을 비싸게 팔 수 있어서 경영상태가 나쁜 편은 아니다. 공업이 침체했던 1970년대 말에는 조강 생산량이 설비능력의 60%에 머물렀고 기계공업의 조업률도 절반이었으며 제품의 재고도 많았다. 교통·수송·전력에 문제점이 있는 데다가 제품은 목표량만 달성하면 되었고 질은 문제시되지 않았으므로 수요에 부응할 수 없는 조악품도 있었다.
1984년 5월 국무원은 <국영기업의 자주권 확대 문제에 관한 잠정규정>을 시달하였다. 이로써 각 기업은 계획 외 생산과 판매권을 가지게 되었고, 원가상각준비금의 기업 내 유보가 1985년부터 70%로 인상되었으며, 기업 내에서의 공장장의 권한이 커졌다. 행정기관인 기계공업부는 공장에 대한 직접관리를 중단하고 국영기업도 독립채산제로 전환하였다. 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기업경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왔다. 즉 가격·세금·이율로 기업이 운영되고 경영은 기업주가 책임지며 소비자의 욕구와 생산품의 품질향상을 최우선시하는 시대가 온다.
무역
산업 전반과 마찬가지로 1978년을 경계로 크게 모습이 바뀌었다. 그 이전의 구체제 아래에서는 자력갱생이 원칙이었으므로 무역의 규모가 작았고 엄격한 중앙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1978년 이후 적극적인 무역정책으로 전환하여 무역의 권한을 지방에 넘겨 주었으며, 외화획득을 위해서 무역형태의 다양화를 추진하고있다. 그 결과 무역액도 크게 증대되어 수출입총액은 1950년 11억 달러에서 1999년 3607억 달러로 매년 10% 이상 증가해 왔다. 2003년에는 수출 4383억 7000만 달러, 수입 4128억 7000만 달러이다.
수출품목은 농산품이 많았으나 경제건설의 진전과 함께 경공업제품과 광산물·중공업제품 등의 비중이 커졌다. 대약진기에는 오히려 무역이 후퇴했다가 1963년부터 1966년의 조정기에 회복되었다. 문화대혁명기에는 경공업(특히 방직업)제품이 수위를 차지하였고 중공업제품은 그 뒤를 이었다. 극좌파의 실각 후에는 수출이 급증하여, 1979년 경공업제품이 수출총액의 45%, 중공업제품이 32%, 농산물이 23%를 차지하였다. 수출이 증가된 원인은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신장과 석유수출의 증가에 있었다. 반면 1차생산품의 비율도 여전히 높았다. 수입은 1960년 <대약진>의 실패까지는 생산재(원료와 플랜트·기계 등)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1965년 농업 부진을 반영하여 식량 등 소비재의 비율이 40%까지 상승한 것을 고비로 줄고 1980년 이후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입이 늘었다. 1990년의 수입은 중화학공업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1차생산품도 공업원료와 식품을 합쳐서 20% 이상이었다. 수출은 경공업제품이 36%로 가장 많았고 석유와 석탄이 그 뒤를 이었다. 식량은 수출입을 상쇄하자 1984년부터는 수출초과가 되었으나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은 아직 주류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무역상대국은 1950년대 말까지는 소련과 동유럽권의 비중이 높았지만, 1960년대 초 이후에는 서방측과의 무역증대를 꾀하는 등 수출다변화에 노력하였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1999년 현재 일본 18.3%, 미국 17%, 유럽연합 15.4%, 홍콩 12.1% 등의 순서이다. 1970년대 말에 기술의 낙후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중국은 재정능력을 감안하지 않고 대형 플랜트 도입을 꾀했으나 국내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외화 획득과 기술 도입을 위해 1980년 선전·주하이·샤먼·산터우 등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서방측 자본을 유치하는 정책을 추진, 이러한 개방정책은 계속 확대되어 갈 전망이다.
재정
중앙재정과 지방재정(省·自治區·直轄市, 市·縣·自治州 등)으로 나뉘며 중국의 재정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91년에 19%로 이른바 <작은 정부>이다. 이것은 국가재정을 통하지 않은 투자로서 예산 외 자금이 있기 때문이다. 예산 외 자금은 지방이나 기업의 관리에 맡겨지는 유동자금 보전(補塡)을 위한 은행융자와 기업의 감가상각비 등이다. 예산 외 자금은 중앙정부가 집권적인 정책을 내세울 때는 작고 반대일 때는 커지는데 너무 커지면 지방이나 기업의 투자가 확대되어 중앙의 조절이 불가능해지는 경향이 있다. 주된 재정수입은 조세수입·기업의 이윤 상납·공채·대외차관·보험수입·감가상각기금 등이다. 주요 국세는 물품세, 집단소유기업으로부터의 소득세·농업세이다. 지방세는 도시토지가옥세, 시장거래세, 차량·선박의 면허세 등이다.
1979년 경제개혁 전에는 지방수입이 중앙으로 집중된 뒤 재분배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국영기업의 고정자산과 운전자금의 70%가 중앙으로부터 지급되었으나 경제개혁 후에는 지방분권적으로 되었고, 국가재정의 비율은 30%대에서 20%대 이하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중앙의 직접적인 행정적 조절이 없어지고 세금·이자·가격의 계획과 그 인허가 등의 거시적 수단에 의한 간접적 통제로 바뀌고 있다. 1979년 170억 위안의 재정적자 이래 재정수지는 매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농산물 매입가격의 인상과 노동자의 임금 인상, 주택 건설, 문화대혁명기 때 경제 효율을 무시한 경제건설로 인한 세입의 부진에 원인이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적자는 30억 위안 정도로 감소되었다. 이것은 재정수입이 호전되었기 때문이지만 물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이 그것을 상쇄하였다. 1998년에는 재정적자가 918억 위안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사회기반 건설과 농림·수산업 대책, 수리사업, 국영기업 개혁에 따른 실업자 생활보장 등에 중점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교통·통신
철도구간은 1949년의 2만 2000㎞에서 1998년 5만 7584㎞로 연장되었으며, 티베트자치구를 제외한 전국에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자동차도로도 8만 1000㎞에서 127만 8474㎞로 연장되었으며, 향·진의 92%에 자동차도로가 통하고 있다. 주요 항만의 출입량은 1949년의 42배인 5억 600만t에 달하고 있다. 1998년 화물 수송량은 3조 7201억t·㎞가 되었는데 해운 53%, 철도 33%, 자동차 13.8%이고, 항공 10억t·㎞를 차지하였다. 주요 항만의 출입량도 1990년대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운수수단의 확대가 경제발전 속도보다 뒤져 산업이 집중된 동부조차 충분한 철도망이 없다. 철도망이 비교적 조밀한 지역은 둥베이로 크고 작은 70개 철도의 총길이는 1만 5000㎞로서 전국 총 연장의 30%를 차지한다.
철도망이 빈약하기 때문에 양쯔강과 연해안에서는 수운에 의한 수송이 확대되었고, 내륙지방에서는 자동차수송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교통사고도 늘고 있다. 석탄수송 등 트럭에 의한 장거리수송이 증가하였다. 무역용 항만시설과 철도수송의 허용량이 적어 화물하역이 매우 더디다. 이 밖에도 하역·운반기계의 노후화 등은 경제개혁으로 관리가 국가에서 시로 옮겨진 뒤 개선책이 강구되고 있다. 여객수송은 농촌경제의 호전과 함께 급증하여 1998년 1조 559억 2444만 명/㎞에 달하였다. 여객수송 비율은 자동차 56.3%, 철도 36%, 항공은 전년대비 30.4% 증가하는 반면 수운은 감소하였다.
우편·통신부문은 개방조치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으며 2001년 현재 전화보유대수는 1억 7900만 대, 휴대전화는 1억 4481만 대를 돌파하였다.
항공수송은 1998년 12월 현재 국제선 131노선, 국내선 983노선이며 민영항공 143기, 민간항공기 801기이다. 여객수는 5755만 명이며 여객수송량은 800억 2444만 명/㎞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온 중국문명은 특유의 정치적 성격을 띠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천자(天子)> 즉 황제가 군림하는 중앙정부 아래에서 지방을 통괄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사회는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법률과 관료가 지배하는 독자적 사회형태를 형성해 왔다. 1949년 중국의 성립으로 과거의 악폐와 인습이 급속하게 배제되고 사회생활면에서도 인민 전체의 신분적 평등과 노동생활권이 처음으로 보장되는 등 전통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회가 정치노선의 방향에 따라 심하게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실현되었으나 중국의 현실사회에는 여전히 관료제사회의 전통이 이어지고, 1958년 <대약진>정책의 실패, 1966년부터 1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 의한 사회·경제적 파탄, 마오쩌둥시대의 종언에 따른 급격한 현대화 경제정책의 추진 등 중국 성립 이후 38년 동안 끊임없이 흔들린 정치노선투쟁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계층은 인민이었다. 사회경제적 측면만을 보면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에 놓여 있지만, 새로운 중국이 성립된 지 40여 년 밖에 되지 않았고 폭발적인 인구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건설이 쉽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주민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주민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한족에 의해 역사와 문화가 창조되어왔다. 2003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12억 8697만 5000명(타이완·홍콩·마카오는 포함하지않음) 가운데 한족은 전체의 92%가 넘는다. 그 밖의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은 민족으로는 좡족·후이족·위구르족·이족·먀오족·만주족·티베트족·몽골족 등이 있다. 거주지역의 면적은 한족과 혼합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하면 50%에 이르지만,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동부에서는 한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중국인·중국어·중국요리라는 말은 그대로 한족·한어(漢語)·한족의 요리 등과 동의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동부에 치우친 견해이고, 중국인이란 정확하게는 한족 및 그 밖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말이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도 북쪽과 남쪽 사이에는 체격, 음식·주거의 습관, 풍속, 사용하는 언어에 큰 차이가 있다. 즉 화베이·중위안지방의 한족은 키가 큰 사람이 많고 음식도
소수민족정책
중국의 민족은 총인구의 90%이상을 차지하는 한족과 국가가 인정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다. 인구 100만 명을 초과하는 소수민족은 좡·후이·위구르·이·먀오·만주·티베트·몽골·투쟈[土家(토가)]·부이[布依(포의)]·조선·둥·야오·바이[白(백)]·하니[哈尼(합니)] 등 15개 민족이며 이 가운데 좡족은 1000만을 넘는다. 이들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서로 융합·변모하면서 형성되어 왔는데, 언어체계의 어족계에 의한 분류가 비교적 문화적 특징과 부합된다.
오늘날 중국민족학에서는 일반적으로 한장어족(漢藏語族)·알타이어족·오스트로(南)아시아어족·오스트로네시아(南島)어족·인도유럽어족의 5대 어족으로 분류, 다시 10개의 어군으로 구분한다. 가장 큰 범위를 차지하는 한장어족에는 광시의 좡, 윈난의 타이, 구이저우의 부이·둥 등 서남지방에 거주하는 좡·둥어군의 도작문화(稻作文化) 여러 민족, 칭짱고원·쓰촨·윈난일대에 거주하는 티베트·좡 등 티베트계, 이·리스·나시·하니 등 이족계의 티베트·버마어군의 여러 부족, 윈난·구이저우·후난 일대의 산악지구에 거주하는 먀오·야오계 여러 부족, 투쟈족 등이 포함된다.
알타이어족에는 서북지방의 위구르·카자흐·우즈베크 등의 터키계 유목민족, 내몽골 초원지구의 몽골계 유목민족, 둥베이지방의 오로촌·에벤키 등 퉁구스계 수렵민족이 있다. 이 밖에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윈난지방 원주민인 와족[低族(저족)] 등의 여러 부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는 고사(高砂;高山)·리족, 인도유럽어족에 러시아계의 오로스, 아리아계의 타지크족이 있다.
한족은 예로부터 주변 이민족을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으로 불러 멸시해 왔다. 역사책에서도 소수민족에 대한 호칭을 험윤·갈료·과라·동·요·단(蛋) 등과 같이 개사슴록변과 벌레충편방을 사용한 글자가 많다.
이와 같은 경향은 중국이 수립된 직후까지 계속되었다. 구중국에서 소수민족 거주지구의 경제와 문화가 만주·몽골·후이족·티베트제족을 제외하고는 한족사회보다 크게 낙후되어 있으므로 차별과 빈곤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한족의 편견과 차별을 고치는 계기가 된 것은, 중국공산당군의 장정(長征)시기에 소수민족 거주지구 실태견문을 통하여 피차별민족해방의 긴요성이 통감되었기 때문이었으며 그것은 신중국의 민족정책과 연계되었다. 그 기본방침은 민족상호간 평등의 견지와 단결의 강화, 소수민족지구의 자치 이행, 소수민족 간부의 양성, 소수민족의 경제·문화 발전을 위한 지원, 소수민족의 언어·문자의 사용과 향상을 위한 지원, 소수민족의 풍속습관 존중 등으로 집약된다. 민족 상호간의 평등·단결·호혜의 원칙은 중국 제1차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공동강령으로 규정되었고 그 뒤 신헌법으로 계승되었는데, 중앙인민정부는 신정부 수립 직후부터 서남·서북·중남·동북·내몽골 등으로 방문단을 파견하여 내외에 민족정책의 보급을 선전하였다. 소수민족거주지구 각 민족에 의한 자치정책은 새로운 중국 민족정책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서 1958년까지 각 해당지구의 90%가 지방자치를 실현하고, 1965년 티베트자치구의 정식 성립으로써 실질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00년 현재 자치구 5(내몽골·신장웨이우얼·광시좡·닝샤후이·티베트), 자치주 30, 특별구 2, 자치현 121 등 모두 158개의 자치지역을 인정하고 있다.
언어
한어는 중국 전체에서 한족 외에 후이족·만주족·쇼족이 사용할 뿐, 그 밖의 소수민족은 모두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전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쓰는 한어가 중국의 공용어이다. 분포범위가 넓고 방언의 종류도 다양하여 같은 한족 사이에서도 지방에 따라서는 대화를 원활하게 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라디오·텔레비전 등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푸퉁화[普通話(보통화)]>이다. 푸퉁화는 한국의 <표준어>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베이징관화[北京官話(북경관화)]를 기초로 하며 베이징어음[北京語音(북경어음)]을 표준음으로 삼고 있는데, 엄밀하게 좁은뜻의 실제 베이징방언과는 약간 다르다. 한어방언은 관화방언(官話方言;화베이지방)·오방언(吳方言;장쑤·저장지방)·민방언(푸젠지방)·월방언(광둥지방)· 객가방언(客家方言;푸젠·광둥 부근 客家의 언어)의 5계통으로 나뉘며, 다시 둥베이·산둥·쓰촨·장쑤·저장 등 각 지방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국 성립 후에는 원칙적으로 푸퉁화를 기본으로 하는 언어교육을 추진하고 있으므로 광둥이나 푸젠처럼 북방과 차이가 심한 지방도 신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는 대개 푸퉁화를 구사하고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방언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화베이·중원지방, 강남지방, 푸젠지방·광둥지방에서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현저한 차이가 있다. 또한 소수민족에게는 각각 독자적 언어가 있고 그 사용이 공식적으로 인정·보호되고 있다.
한족 이외에 통용문자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티베트·몽골·위구르·조선·타이·카자흐·시보·키르기스·우즈베크·타타르·오로스 등으로, 이들 민족이 거주하는 자치구·주·현에서는 신문·출판물과 문서 그리고 시가(市街)를 표기하는 공용어나 언어교육에도 독자적 문자가 쓰이며, 한어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이·먀오·나시·징포우·리스·와 등의 여러 민족에게도 통용되는 정도는 다르나 고유한 문자가 있다.
국민생활
1949년 중국 성립 이래 혼란이 반복된 중국공산당의 정치노선과 이를 반영한 국내정책 변동의 직접적 영향을 받아 국민생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58년 대약진 정책의 좌절과 그에 따른 <인민공사>의 출현은 당시의 자연재해와 더불어 농촌 각지에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왔으며, 또한 1966년 이래 전국을 휩쓴 문화대혁명은 국민정신생활면에서의 황폐와 농업·공업생산의 낙후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시대에 이어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방경제정책의 가속화에 따라 농업에서는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생산책임제가 도입되었고 공업과 상업에서도 공장·기업마다 경제책임제를 채택하였으며 외자의 적극적인 도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생활이 점차 풍요로워지고 있다.
또한 개방정책을 시작한 이래 국민경제도 활성화되어 2003년 국내총생산은 1조 4098억 달러였지만 국내총생산 1인당은 1090달러로, 국민의 생활수준은 유럽·미국 등에 비하여 매우 낮다. 그 원인으로는 정치노선에 따른 경제정책의 불안정성, 행정기구의 성격과 깊이 관련된 노동생산성의 저하 등 중국사회 특유의 배경 이외에도 중국 성립 이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 급증을 들 수 있다. 2003년 총인구는 12억 8697만 5000명으로, 세계 총인구의 1/5이 넘는다. 1971년의 약 7억 5000만 명과 비교하면 엄청난 증가다. 전체 인구 중 농민이 약 80%를 차지하는데, 해마다 도시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인구밀도는 134명/㎢(2003)이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자연환경 때문에 서부·북서부에 비해 동부의 주요 도시에 인구가 지나치게 치우쳐 있어서 도시의 인구과밀은 심각한 상태이다. 인구팽창을 억제하기 위해서 정부는 만혼의 장려와 1자녀 갖기 운동으로 산아제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인구문제는 경제건설의 당면과제 중의 하나이다. 1997년의 평균 인구증가율은 1000명당 9.3명으로, 차츰 억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대학과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개인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분배>제도에 따라 국가가 직장을 결정해주는데 취직고용문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1998년 12월 현재 정부통계로 전국의 도시노동자는 2억 678만 명이며 농촌노동력은 4억 9279만 명이다. 도시 실업률은 3.1%이며 실업자는 571만 명으로 앞으로 매년 약 500만 명 정도씩 국가가 청년노동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직장을 분배해 주어야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은 1996년 연간수입 6216위안이었다. 한편 주택은 농촌의 경우 종래에는 인민공사와 생산대대, 1985년 이후 향인민정부(鄕人民政府) 밑으로 거민구(居民區)가 건설되어 주택도 그에 따라서 건설되고 있다. 도시도 마찬가지로 근로자가 소속된 단위(관청·공장·학교 등)에서 공동주택을 건설하고 있으나 노동인구 유입이 격심하고 주택 공급도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최근 대도시에서는 신축 주택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교육
현대 중국의 교육기본방침은 지육·덕육·체육 각 방면의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유용한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현행 교육제도는 초등학교 5∼6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2∼3년, 대학·학원(종합대학·단과대학) 4년이 기본이고 이 밖에 중등기술학교·중등사범학교·농업중학교·직업중학교·공독중학교(工讀中學校;근로학생 대상)가 있고,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단기직업대학과 방송대학·성인교육을 위한 업여대학(業餘大學) 등의 제도가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공격 대상이 되었던 것이 교육분야로서, 구제도에 대한 발본적(拔本的) 재평가가 요구되어 입시 선발제도를 소속 단위의 추천제로 고쳤으며 취학기간을 큰 폭으로 단축하는 등 대담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시기의 혼란이 청년층의 학력과 지식을 크게 저하시켜 <4인방> 실각 후인 1978년 대학과 학원의 전국 통일적 입시제도가 부활하였다. 이때부터 차츰 교육제도도 복구되기 시작하여 대학원에 해당하는 연구생제도가 마련되었다. 1980년부터는 학위제도가 시행됨으로써 박사·석사·학사의 칭호가 수여되고 있다. 학교교육은 교육부가 전체를 통괄해 왔으나 1985년 이를 없애고 국가교육위원회가 신설되어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 교육수준은 전체적으로 볼 때 높다고는 할 수 없다. 1957년 근로자의 취학률은 초등학교 졸업자가 64%, 중학교 졸업자는 20%에도 못미치며 문맹률은 15%에 달했다. 그 뒤 의무교육의 실시로 수준이 향상되어 1991년 취학연령 아동의 초등학교 입학률이 98%에 달하였다. 전국의 약 1/4의 현과 구에 실질적인 초등교육이 보급되었고 최근에는 기술전문교육도 보급되고 있다. 1998년 현재 대학교는 1022개교, 학생수는 340만 9000명이며 직업교육 학생수는 820만 5000명으로 교원 한 명당 학생수는 14.9명이다.
종교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불교·도교·이슬람교·그리스도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 등의 종교가 흥망을 거듭했으며, 엄격한 종교 탄압의 역사도 가지고 있다. 중국 성립 이후 종교 신앙의 자유가 원칙적으로는 인정되었으나, 사회에 대한 종교활동은 특정 소수민족지구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억제되어 왔다. 현행 신헌법 제36조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公民)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어떠한 국가기관·사회단체·개인도 공민에 대하여 종교의 신앙 또는 불신앙을 강제해서는 안 되며, 종교를 신앙하거나 신앙하지 않는 공민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 종교정책의 근간이 되고 있다. 중국 성립 직후부터 주요 종교의 각파는 계속해서 전국 규모의 조직을 설립하였고 그 설립을 대외적으로 선언하였다.
역사상 최대의 영향력을 가졌던 불교는 1953년 3월에 각 지역·민족·종파의 불교도가 베이징에 모여서 중국불교협회를 설립하였다. 이슬람교도는 중국 성립 당시에 1000만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신도 가운데 절반 이상이 후이족·위구르족·카자흐족·타타르족·키르기스족·우즈베크족 등 소수민족으로, 1953년 베이징에서 중국 이쓰란교[伊斯蘭敎(이사란교);이슬람교]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중국수립 전 가톨릭교도는 300만 명으로 1957년 베이징에서 중국천주교애국회를 설립하였고, 프로테스탄트교도는 70만 명 정도로 1945년 상하이에서 중국 그리스도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三自愛國運動委員會)를 설립하였다. 또한 민간신앙으로 뿌리가 깊은 도교는 명나라·청나라시대 이후 쇠퇴하였으나 1957년 베이징에 중국도교협회를 설립하였다.
이들 종교조직의 활동은 허용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옛 사회의 폐단으로 지적되어 승려나 도사들은 사찰과 도관에서 쫓겨났으며 시설들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4인방>이 실각된 뒤 정부의 개방화정책에 따라 전통적인 사회풍속이 서서히 복구되었고 1977년 종교활동도 가능해져 승려와 성직자들은 절과 교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베이징의 파위안사[法源寺(법원사)]·융허궁[雍和宮(옹화궁)], 시안의 칭전사[淸眞寺(청진사);이슬람교 聖院(성원)], 상하이의 그리스도교 무언당[沐恩堂(목은당)], 광저우의 석실천주당(石室天主堂), 간쑤의 라브랑사, 칭하이의 타아르사, 티베트의 다자오사[大昭寺(대소사)] 등의 유명사찰과 교회가 복구되어 신도들에게 개방되었다. 1983년 4월 국무원은 전국 160건의 사찰·도관을 전국중점사원궁관(全國重點寺院宮觀)으로 지정하여 보호 대상으로 삼았다.
민속
고대로부터 유교의 예(禮)에 바탕을 둔 관혼상제(冠婚喪祭)제도의 규정이 있었다. 전국시대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유교경전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의 삼례(三禮)는 국가의 제도나 사대부의 예제(禮制)를 기록한 고전이지만 사회풍속, 서민의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대 이래의 예는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생활이나 민속행사에 큰 영향을 주고 있고, 유교의 확고한 전통이 가미되어 그 특유함을 더해주고 있다. 중국 성립 이후 이런 습속은 대부분 옛 사회의 유물이라 하여 폐지되었지만, 아직 서민들 사이에 남아 있는 뿌리깊은 민속행사도 있다. 연중행사는 농경민족의 특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농사력(農事曆;太陰曆)에 바탕을 둔 제사나 행사가 전해져 온다. 중국 성립 이전의 관습은 청나라의 《연경세시기(燕京歲時記)》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성립 이후 전통적인 축제나 풍습이 자취를 감추었다고는 하지만 춘절(春節;음력 正月)은 오늘날에도 최대의 축제일이자 휴일이며, 등절(燈節;元宵節, 음력정월 14~15일), 청명절(淸明節;4월 5~6일), 단오절(端午節;음력 5월 5일)·용선경조(龍船競漕), 중추절(仲秋節;음력 8월 11~15일) 등의 전통적 연중행사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편 중국이 국가적으로 제정한 중요 기념일·절일(節日;祝日)에는 국경절(중화인민공화국 성립 기념일;10월 1일), 노동절(5월 1일), 5·4운동기념일(5월 4일)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혁명사상 중요한 기념일이다. 일상생활에서 전통적인 풍속습관은 중국 성립 이후 대부분 폐지되었으나, 문화대혁명 이후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식이 점점 화려해지고 농촌이나 지방도시에서의 혼수비용은 증가하고 있으며 장례도 전통 의식에 따라 악대 행렬 등을 수반하는 예가 있다. 농촌의 경우 무덤은 여전히 토장(土葬)인 작은 분묘가 많다.
의료·복지
보건·의료·위생의 개선은 중국 성립 이래의 큰 과제였으며 전국적 규모의 강력한 위생방역운동을 추진하였다. 위생부(보건부)지도 아래 기술적으로는 중국전통의학과 서양근대의학의 접목을 기초로 농촌의 예방위생운동·대중위생운동·출산계획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고등의료진과는 별개로 <향촌의생(맨발의 의사;인민공사원이 약 3개월간의 의료훈련을 받고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간단하게 치료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경우)>을 말단으로 하고 인민공사 생산대의 위생소로부터 도회지의 큰 병원에 이르는 전국 규모의 의료망을 단기간 내에 수립한 것은 큰 성과였다.
1998년 총 병상 수는 291만 3700개로 431명 당 1개꼴이며 2002년 영아 사명률은 3.7%였다. 일반 의료시설은 각 단위(공장·학교·공사 등)에 부설된 의원이 있고 그곳에서 진료를 할 경우 개인부담은 무료이거나 무료에 가깝다. 유아보육 부문은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맞벌이가 원칙이므로 각 근로자 소속 단위별로 탁아소가 마련되어 있다. 노인문제는 1999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의 노인이 총인구의 8.6%를 차지한다. 1956년과 1982년의 퇴직자수를 비교하면 그 수가 140배 급증하여, 양로복지제도의 정비가 시급한 실정이다. 경제력이 없는 노인의 대부분은 자녀들이 부양하고 있다. 보험사업은 사회제도적 성격도 있으며 자동차·선박·가축·기계 등의 사회적 재산보험을 제외하고는 아직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개관
현대중국의 문화는 사회주의체제속에서 엄격하게 통제된 문화이다. 중국 성립 후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정치노선투쟁은 문학·연극·영화를 비롯한 모든 문화영역의 활동 방향을 좌우하였고 문화는 각 시기마다 흔들리는 사회정책의 여러 모습을 여실히 반영했다. 특히 문학·예술의 영역에서는 마오쩌둥의 《문예강화(文藝講話;1942년 혁명근거지인 延安에서의 문화좌담회 때 행한 강화)》가 오랫동안 당중앙 정책의 지침이 되었고, 모든 문예작품과 활동에는 사상개조와 사회교육이라는 사회주의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당의 지도가 너무 강경해지면 문예창작이 침체되므로 실제로는 단속과 자유화의 정책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따라서 중국 성립 후의 변동기에 문예영역에 나타난 경향은 그 당시 노선투쟁 방향을 알려주는 확실한 지표가 되기도 하였다.
1958년 대약진운동 때 백가쟁명(百家爭鳴)·백화제방(百花齊放)이 제창되면서 한때 자유로운 기풍이 생겨났으나 반우파(反右派)투쟁으로 상황이 역전됨으로써 많은 문화인·학자가 우파분자로 몰려 추방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깝게는 문화대혁명 때 <사구타파>라는 표어 아래 낡은 것이 모두 부정되면서 전통적인 경극(京劇)이 금지되고 <혁명모범극>으로 바뀐 적도 있었다. 또한 《홍루몽(紅樓夢)》과 《수호전(水滸傳)》 비판,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과 같이 역사상의 인물이나 문학작품을 비판하면서 그 이면에 현재의 특정 정치가나 정치 노선 세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중층구조적운동이 자주 실행되는 것도 중국 문예계의 특유한 경향이다. 문예활동이 인민교육이라는 사회적 임무를 지고 있는 한 사상교육적·윤리적인 풍조는 부정하기 어려우나, <4인방> 이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개방정책에 따라 자유로운 기풍이 점차 고조되어 전통적 연극의 부활, 화극(話劇)이나 영화의 새로운 흐름의 대두, 소설에서의 새로운 경향, 고전문학·역사서적 출판의 급증, 고대문물과 유적의 보수·보호 등은 문예부흥이라고도 할 만한 새로운 조류를 느끼게 한다.
국민성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의 중국은 전통적·보수적인 유교사상이 뿌리깊었으며, 가정은 가부장제도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고전문학 등에 의하면 옛 중국사회에서는 <사세동당(四世同堂)> <오세동당>과 같은 대가족제도가 이상적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윤리에 의한 가정관의 특징적인 일면을 나타낼 뿐 일반적으로 근친까지 포함하여 4~5세대가 동거한 경우는 드물며 양친 및 미혼 자녀, 조부모가 동거하는 것이 통례였다. 가부장제에서는 부모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였고, 그 가권재산(家權財産)은 장남이 이어받았다. 이러한 가족제도의 풍습은 중국 성립 후 농촌에서의 토지 사유제 철폐라는 사회변혁에 의해서 급속히 변화되어 왔지만 부모와 기혼의 아들가족이 동거하는 경우는 아직까지도 많다.
신헌법에서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부양할 의무가 있음과 동시에 성년자녀는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교사회 고유의 가정관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현대중국사회에서도 도시권에서는 가족구성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지만 부모 자식 사이의 연결은 물론, 가까운 친척을 포함한 동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상호부조와 같은 규칙이 확립되어 있다.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인은 항상 느긋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데, 이는 유교사회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국민성은 국토가 넓고 기후 풍토가 모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면서 체면을 중시하고 강한 향토지향성과 애국심으로 뭉쳐진 동포의식은 중국 고유의 사회·역사 속에서 배양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체제가 변혁된 오늘날에도 인민의 총체적인 기질은 그러한 완고한 전통을 이어받아 기본적으로는 변함이 없다.
문화재·문화시설
수천 년 역사의 중국 고미술품과 지하문물의 발굴이 근대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대략 20세기 초부터의 일이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외국의 지배와 내전의 영향으로 석굴의 불상·조각·회화·공예품 등이 국외로 많이 반출되었고,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된 역대 궁정 미술품은 국민당정부에 의해서 대부분이 대만으로 옮겨졌다. 1949년 중국 중앙정부의 문화부에 문물사업관리국이 설립되어 비로소 문화재보호가 법률적 조치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부터 전국 각지에서 고고학 발굴이 추진되었고, 종래의 역사 서술을 바꿀 만한 새로운 유적과 유물 발굴이 계속되었다. 1961년 국무원에 의해서 최초로 전18조의 문물보호관리잠행조례(文物保護管理暫行條例)가 공포되었고, 제1차중점문물보호단위(한국의 국보, 중요유형·무형문화재, 史蹟에 해당) 180건(그중 혁명유적·건조물 33건)이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의 사유(私有)와 100년 이상된 문물의 해외유출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각지에 남아 있는 고건축이나 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보존시책과 대중에 대한 계몽이 충분치 못했고,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오래된 문물이 <사구타파>의 표적이 되어 역사적 유산에 대한 분별없는 파괴행위가 자행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특히 최근의 개방정책에 따라서 고고학 발굴도 급격히 증가하였고, 중요한 발견이 계속됨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물관은 베이징의 역사박물관과 오랜 역사의 고궁박물원·난징박물원·상하이박물관·광둥성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문학·예술
중국의 문학·예술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사회조직의 일부로서, 문화·사회 전반에 걸쳐서 추진된 지식인의 사상 개조 및 인민에 대한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0년간에 걸친 문화대혁명 시기는 전통적인 경극이 부정되고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江靑(강청)]이 주도한 <혁명모범극> 일색으로 탈바꿈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의 지도에 의한 사상 개조운동의 문예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이를 부정하고 당시의 고통스러움을 폭로하는 <상흔문학(傷痕文學)>이나 같은 취향의 연극이 생겨났고, 1980년 이후에는 개방정책의 추진에 따라서 문예계에도 자유로운 풍조가 싹터, 휴머니즘과 모더니즘, 소외론과 실존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983년 무렵 한때 자유화 경향에 대한 제동으로서 <정신오염>을 제거하려는 반동이 나타났으나, 이미 대외 개방정책은 출판·보도·표현 영역까지도 포함해서 억제할 수 없는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언론·출판
현대중국의 매스컴은 신문·라디오·텔레비전·출판의 모든 분야가 중앙정부의 엄격한 관리를 받도록 되어 있다. 신헌법 제28조는 언론·통신·출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유주의 사회와 같은 <표현의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 본질은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극단적인 개방정책으로 옮겨간 현재에 와서도 달라진 것이 없다. 신문은 1999년 말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000종에 발행부수 약 300억 부에 이르고 있으며 그 중 기업지가 가장 많고 당기관지, 학교신문, 경제지, 과학기술지, 문화지 등의 순이다.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이고 일간 전국지로서 최대의 발행부수(155만 부)를 자랑한다. 그 밖의 전국지로는 발행부수 100만 부인 베이징의 《광명일보(光明日報)》, 상하이의 《문회보》가 유력지이고, 지방지와 석간지로는 지식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베이징일보》 《베이징만보[北京晩報(북경만보)] 《양성만보(羊城晩報)》 등이 있다. 《해방군보(解放軍報)》는 당중앙군사위원회, 《공인일보(工人日報)》는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의 기관지이고, 이 밖에 《체육보(體育報)》 등의 전문지가 있다. 위구르·몽골·카자흐·조선·티베트 등의 소수민족 지구에서는 고유언어에 의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또한 외국의 뉴스를 번역 편집한 《참고소식》이 나와 구독은 지식계급에 한정되어 내부 간행자료가 되고 있다. 대체로 신문의 기사는 정책·캠페인과 경제건설·생산실적, 업적이 우수한 단위 등에 관한 보도가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개방정책에 따라 일상적인 사회면에 해당하는 뉴스나 독자의 투서와 같은 기사도 실리기는 하나 아직은 이른바 <보도의 자유>에는 이르지 못한 형편이다.
뉴스는 국영통신사인 신화사(新華社)에 의해 각 신문과 텔레비전·라디오에 제공된다. 방송사업은 공산당중앙방송사업국이 일원적으로 관장하고 있으며 베이징 중앙인민방송국 밑에 지역별로 지방방송국을 설치하여 방송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전국에 298개의 라디오방송국이 있다. 텔레비전방송은 1958년 중앙TV방송국이 방송을 시작한 이래 정체기를 거쳐 1983년부터 급속한 발전을 보여 현재 전국에 500여 개의 방송국이 있다.
출판사업은 국가기관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는 만큼 당 중앙의 정치노선을 반영하고 있는데 주요 출판사업은 정치·사상관계의 선전·교육도서이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몽서적과 마오쩌둥의 저작 등이 압도적인 부수를 차지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정치·사상관계와 특정한 목적에 따른 인문사회과학계의 도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이 정체했었으나, 최근 수년 동안 일반교양·오락·실용·문학·인문사회과학·과학기술 등의 출판이 일제히 행해졌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역사서적·학술서적을 포함한 많은 서적이 발행되고 있다.
과학기술
중국 성립 직후 중국의 과학기술은 오랫동안의 내전과 외국 지배로 인해 피폐해졌고, 기술자의 수준과 공장설비가 크게 뒤처져 있었으므로, 소련의 기술원조를 받아 새로이 출발하였다. 1953년 제1차 5개년계획 아래 소련으로부터 대형플랜트가 도입되었으나 중국의 자연조건·사회경제 및 기초적 기술수준과 부합되지 않아 정착하지 못하였다. 1957년 제3차 5개년장기계획인 <과학기술발전 12개년계획>이 세워졌고 낙후된 분야의 강화, 자연조건에 대한 조사, 기초연구 추진 등이 도모되었다. 그 뒤 1960년대에 재차 수정된 계획을 추진했지만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좌절되었다가 1978~1985년 <전국과학기술발전계획요강>이 제시되었고, 농업·에너지원·재료·컴퓨터·레이저·우주공간과학기술·고에너지물리학·유전공학의 8개 중점분야를 1970년대의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내세웠다. 이어서 경제개방정책이 채용되자 뒤처진 과학기술의 만회를 위해 해외자본과 기술을 도입, 선진 여러나라 자본과 합작기업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0년 4개의 경제특별구(선전·주하이·산터우·샤먼), 1984년 14개의 경제개발구(다롄·톈진·상하이·광저우를 중점지구로 하고 그 밖에 10개의 연안도시)가 신설됨으로써 외자도입의 특별개방도시가 되었다. 이리하여 현재는 과거의 자력갱생적 입장에서 180˚ 전환한 경제개방정책에 의하여 1975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제시한 <금세기 안의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의 근대화(4대 근대화)>를 실현하였고, 공업총생산을 20년 동안 4배로 늘린다는 목표를 향하여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과학기술연구의 중심인 중국과학원은 1949년 설립되었으며, 중국사회과학원은 사회과학·인문과학 연구의 최고기관으로 1977년 중국과학원의 철학사회과학부가 독립하여 발족되었다. 그 밖에 군사과학원·중국의학과학원 등이 있다. 1999년 12월 현재 인터넷 이용자는 890만 명으로 머지않아 2000만 명을 돌파할 것이다. 중국정부는 1999년 1월 외무부 등 각 부문의 정보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인터넷 정부계획>을 시작하였다. 또한 국가기밀 누설방지를 위해 2000년 1월에 <인터넷 비밀보호 관리규정>을 시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과 한국과의 관계
중국은 1949년 10월 대륙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 양대진영론에 입각, 반미(反美)를 기본외교정책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친북한정책으로 일관하여, 북한과는 1949년 10월 수교관계를 맺었고, 6·25 때는 북한을 도와 약 85만명의 중국군이 참전하였다. 그러던 중 1978년 말에 열린 제11기 3차전국인민대표회의를 계기로 대외개방정책·개혁실용주의노선·독립자주외교노선을 취함으로써 한국에 대해서도 종래의 인식과 태도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82년 제12기 전국인민대표회의의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의 정치보고에서 중국의 우호국이 될 수 없는 국가군에서 한국이 제외되었다. 1983년 5월 중국민항기피납사건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 사이에 직접 접촉이 이루어지고 처음으로 중국 당국자에 의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사용되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중국은 홍콩·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과 직접적인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비정치적 영역에서 한국과의 관개개선에 더욱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1984년 9월의 제3차 아시아올림픽위원회총회에 중국은 공식대표단을 파견하였고,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는 대규모의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1988년 초부터 한국측의 선제접촉으로 시작된 한·중 교역은 연중 계속되어 경제·사회·문화별로 다변화되었다. 그해 7월 한국정부는 <중공>의 호칭을 <중국>으로 공식화했고, 이범준(李範俊) 교통부장관과 중국국제여행총사 허루창[何儒昌(하유창)] 부사장 사이에 관광교류가 합의되었다. 9월에는 한·중무역사무소 개설이 합의되어 베이징에 대한 무역진흥공사 무역관, 서울에는 중국무역사무소가 개설되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는 중국이 750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였고, 1990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11회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대표단이 참가하였으며 운영기술면에서 각종 지원을 하였다.
경제교류에서도 1990년 대우·삼성 등 대기업의 중국 현지투자가 활발해져 중국은 한국의 5대 무역상대국으로 떠올랐다. 1991년 10월 첸치첸 중국 외교부장이 방한하여 양국 외무장관회담이 열린데이어,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이 발효되어 82년만에 양국간 정식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2002년 한중수교 10주년을 맞아 양국은 협력 및 동반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다짐했는데 그동안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경제적 교류확대이다. 1991년 10억 251만 달러에 불과했다. 대한수입은 2003년 219억 1000만 달러로 1991년에 비해 18배 이상 증가하였고 대한수출은 2003년 351억 1000만 달러로 1991년에 비해 3.9배 가까이 증가했다. 교역량은 1991년 44억 4300만 달러에서 2001년 314억 9300만 달러로 7배 증가했다. 한국의 대중국투자는 1991년까지 101건에 6500만 달러에 불과하지만 2002년 상반기까지 6634건에 58억 3000만 달러로 90배 가까이 급증했다.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휩쓸었고 관광분야에서는 중국관광객이 1992년 8만 6865명에서 2001년 48만 2227명으로 늘어났다.
연표
AD | 1949 | 중화인민공화국 정식 발족.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이 됨 | ||||||
1951 | 인민해방군, 티베트에 진출, 해방 | |||||||
1953 | 제 1 차 5개년계획 시작 | |||||||
1964 | 프랑스와 외교관계 수립 | |||||||
1966 |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에 관한 16개조 결정 발표 | |||||||
1970 | 중국,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라 비난 | |||||||
1971 | 린뱌오[林彪] 사망. 국제연합에 가입 | |||||||
1972 | 닉슨 미국대통령·다나카[田中] 일본수상 중국 방문, 중·일 국교정상화 | |||||||
1976 |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사망. 마오쩌둥 주석 사망. 4인방(江靑·王洪文·張春橋·姚文元) 체포됨. | |||||||
1977 | 덩샤오핑[鄧小平] 복권, 문화혁명파 배척 | |||||||
1978 |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 | |||||||
1979 | 미국과 30년 만에 수교 재개.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 파기 | |||||||
1980 | 4인방 재판 | |||||||
1981 | 제11기 5중전회(五中全會) 개최(류사오치[劉少奇]의 명예회복,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 선임 결정) | |||||||
1982 | 제12차 당대회(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덩샤오핑, 신임 총서기에 후야오방, 총리에 쟈오쯔양[趙紫陽] 체제 이룩). 5기 전인대, 새헌법 채택 | |||||||
1984 | 경제개혁 단행. 홍콩 장래에 관한 중·영협정 조인 | |||||||
1986 |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 참가 | |||||||
1988 | 7기 전인대, 리펑[李鵬]수상 취임. 제24회 서울올림픽 참가 | |||||||
1989 | 민주화시위 전국 확산, 시민·학생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평화적 시위, 200여 명 사망 | |||||||
1990 | 톈안먼사건 체포자 573명 석방 발표. 덩샤오핑 사임, 장쩌민[江澤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 한국과 무역사무소 상호개설문서 조인 | |||||||
1991 | 첸치첸[殘基琛] 외교부장, 한국 첫 방문 | |||||||
1992 | 한국과 국교 수립 | |||||||
1993 | 한·중 첫 정상회담 개최 | |||||||
1997 |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뉴욕4자회담 예비회담과 12월 제네바 본회담 참가 | |||||||
2000 |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구 1,000명당 출생률 16.12명. 제10차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5개년계획 발표 | |||||||
2003 |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취임. 베이징에서 제1차 북핵 문제 6자 회담 |
'선교자료 > 5.선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 Dei) (0) | 2012.02.25 |
---|---|
언어 학습 방법 (0) | 2010.10.01 |
세계선교전략사 (0) | 2010.09.30 |
한국 선교사의 정체성에 대한 소고 (0) | 2010.09.30 |
각 나라별 선교 현황 (0) | 2010.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