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변증가들

2010. 6. 21. 00:44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초대교회 변증가들(1) - 저스틴 마터

 

1.1. 변증가들

“초대 교회에는 많은 변증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가운데 6인물을 꼭 기억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스틴 마터(d. 약 165)
이레니우스(약 130-200)
클레멘트(d. 약 217)
터툴리안(약 155-230)
오리겐(약 182-251)
키프리안(d. 258)


“어때요? 낯익은 인물들이 있죠? ‘핍박들’이란 주제를 통해 이미 이런 분들의 순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기억이 나지 않으시거나 생소하다면 ‘교수가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제 잘못이고 저의 부덕입니다. 다음부터는 기억이 나도록 잘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한 바탕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억납니다. 교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또 한 바탕 웃음이 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아무튼 생소한 주제이거나 이름들이 아님에는 틀림없었다.

“이 6명의 사람들을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는 특징도 갖고 있습니다. 먼저 동방교회의 저스틴 마터와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그의 제자 오리겐, 그리고 카르타고의 터툴리안과 그의 제자 키프리안으로 짝을 이룹니다. 연대순은 아니지만 이렇게 짝을 지워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6인물 외에 어떤 변증가들이 2-3세기에 활동했는지, 아니면 어떤 지도자들이 있었는지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장이권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변증가들로 활동한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히폴리투스(Hippolytus, 236), 코넬리우스(Cornelius, 253), 노바티안(Novatian, 257), 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Great, c. 264),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68), 피르밀리안(Firmillian, 268),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Gregory Thaumaturgus, 268), 아르켈라우스(Archelaus, 282) 등입니다. 혹시 낯익은 인물들이 있는지요?” 그러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모두들 시선을 책상만 보고 있었다.

“자 그러면, 먼저 저스틴 마터라는 분에 대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1.1.1. 저스틴 마터

▲저스틴 마터
“‘저스틴 마터’라는 이름은 ‘저스틴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마터’란 영어로 ‘martyr’, 즉 순교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라틴어로 읽게 되면, ‘유스티누스’라고도 합니다. ‘저스틴’이란 말은 영어식 이름이지요. 혼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저스틴은 순교하신 분이심이 틀림없음을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저스틴은 철학자, 순교자,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입니다. 지난 번 ‘핍박들’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로마제국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순교하신 분이심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전반적으로 그분에 대해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철학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저스틴은 약 110년경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하신 인물입니다. 야곱의 우물 근교이며 현재 나블로우스, 즉 사마리아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태어난 이방인이었습니다. 부친과 조부는 로마인으로 여겨집니다. 분명히 교육을 잘 받은 인물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한 편으로는 경쟁을 즐겼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의 영혼의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지식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주의에 심취했다고 할 수 있죠. 플라톤 철학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스틴이 가르친 당시의 에베소
“게다가 나이 많은 분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저스틴과 함께 철학적 주제들을 논의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스틴에게 철학자들이 있기 전에 있었던 히브리인 선지자들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저스틴은 진리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영혼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선지들에 대한 열망, 그리스도 친구들에 대한 열망으로 저는 사로잡혔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이야말로 참된 철학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이러한 분, 즉 구세주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보다 알기 위해 기독교인들의 삶에 관심을 보다 깊게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철학자의 옷을 입고 여전히 다녔습니다. 에베소에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고 후에 로마에서도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담대하게 죽음을 기도로 맞이하는 순교자들
“그런데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서고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적인 용감함을 보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놀랍게도 견고히 고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저스틴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죠. 당시 기독교인들의 순교는 그야말로 이방인들, 즉 비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적인 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결한 삶은 이방인들에게 큰 도전과 아울러 감동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전파가 이러한 것으로 인해 널리 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저스틴이었습니다.”

“개종한 저스틴은 복음전도자로서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철학임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알렸습니다. 여러 곳으로 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에 거하기도 했고, 상당한 기간 동안 로마에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에 거하면서 아마도 기독교 교사직을 감당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곳에 거하면서 견유학파(Cynics)가 그에 대해 음모를 꾸며 검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스틴은 순교로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했습니다. 165년 그는 참수형을 당해 순교를 하게 이릅니다.”

1.1.1.1. 스토아 철학

“저스틴의 삶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그가 쓴 작품들에서 나옵니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작품들을 썼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기에 살면서 작품을 썼다고 믿어집니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순교를 당했다고 믿어집니다.” “저... 교수님!” 정현숙씨가 질문을 한다. “죄송하지만 저스틴이 로마에 거하면서 ‘견유학파’를 만났고, 그들이 그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고 하셨는데 그 학파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예, 그렇군요. 제가 보다 잘 설명하지 못했네요. 질문을 잘 하셨습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였던 안티스테네스(약 445-365 B.C.)가 세운 학파입니다. 견유학파는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덕스러운 삶이라고 보며 덕행을 행하게 되면 행복을 얻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가치관, 즉 부귀영화와 사회적 신분과 같은 가치관을 포기했습니다. 그런 가치관은 자연과 위배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견유학파는 그렇게 잘 조직적인 철학학파는 아니었습니다. 철학 체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한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의 많은 사상들은 스토아 철학(Stoicism), 즉 금욕주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질문이 있으시나요?” “예, 교수님! 또 질문이 있는데요. ‘스토아 철학’이 무엇인가?”하고 정현숙씨가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물었다.

▲제노
“‘스토아 철학’이란 우주처럼 사람들의 정치적이고 개인적 삶을 질서 있기를 바라는 헬라 철학을 말합니다. 모든 스토아 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 명령이 자연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는 에베소의 헤라클리투스입니다. 그는 스토아 철학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개인이 자연법이나 로고스에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을 사랑했던 견유학파들처럼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300년B.C.경 제노라는 사람이 아테네에서 강의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헬라인들에게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를 규명했습니다. 그런 후 A.D. 1-2세기에 이르러 이미 보았던 세네카와 황제 아우렐리우스에 오면서 스토아 철학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세네카(약 4년 B.C.-A.D. 65)는 황제 네로의 스승이기도 했죠.”

“이들은 윤리를 나무의 열매처럼 표현했습니다. 삶은 우주의 은택과 질서를 따라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삶의 결과는 영적 평안과 부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혼의 행복은 신성을 닮아 가는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종적 목적은 하나님처럼 자선적이고, 자발적이고, 그리고 한결같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언제든 덕행을 쌓아야한다고 믿었죠. 최고의 덕행은 행위가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성이며,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함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어떻게 나눠줄 것을 아는 공의이며, 자제심입니다.”

1.1.1.2. 작품들

▲저스틴의 전집 안표지
“저스틴의 작품들은 2세기에 쓰인 것으로 기독교인들을 위한 『변증서』로 유명합니다.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변증서 1』과 『변증서 2』로 나눠집니다. 『변증서 1』은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에게, 그의 아들들 루키우스와 마르쿠스 아렐리우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들과 로마인들에게 보낸 작품이었습니다. 두 번째 책인 『변증서 2』는 로마 원로원들에게 보낸 작품입니다. 결국 이 두 작품은 로마인들의 핍박에 대한 변증서란 말이죠. 이 작품은 당시의 이교도들과 기독교인들 간에 있었던 관계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들에게 전해 줍니다.”

“그 외 그의 작품은 『트리포와의 대화』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유대인 트리포에게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아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외 저스틴의 작품들은 소실되었지만 ‘헬라인들에게 주는 글’ ‘헬라인들에게 주는 권면’ ‘하나님의 유일한 통치에 대해’ ‘디오그네투스 서신’ ‘부활에 관한 여러 말씀들’ ‘여러 파편들’ ‘참된 신앙 해설’ ‘정통을 위한 답변’ ‘이방인들에게 묻는 기독교 질문들’ ‘기독교인들에게 묻는 이방인들의 질문들’ ‘제나스와 세레누스 서신’ ‘아리스토텔레스 어떤 교리들에 대한 논박’ 등입니다. 어때요? 상당한 많은 작품들을 썼죠?”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지금 저스틴의 귀한 작품들을 저희들에게 소개해 주셨는데요. 그런 내용을 저희들이 접할 수 있나요?”하고 뒷자리에 앉아있는 한 남자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한글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영어로는 번역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선상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 그 사이트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http://www.iclnet.org/pub/resources/christian-history.html 에 들어가시면 저스틴의 작품들만 아니라 초대교회, 즉 우리가 배우는 모든 교부들의 작품들을 영어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스틴의 작품들 중 『변증서 1』의 구성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이 불공정한 것임을 철학자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변증한 내용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참된 철학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1-12장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들을 제시한 후, 13장부터 긍정적인 증거들을 설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즉 모든 만물의 창조자를 경배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올바른 도덕성을 가지도록 했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61-67장에서 기독교인들의 매일의 삶들을, 즉 세례, 성찬, 그리고 주일예배 등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변증서 2』는 부록으로서 핍박 아래 살았던 기독교인들의 삶을 강조하면서 인내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트리포와의 대화』는 서론에 이어 10-30장에서 기독교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법임을 설명합니다. 31-108장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인 부분인 109-142장에서 기독교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때요?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이러한 책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죠? 그러면...”

잔잔한 미소를 띠시면서 학생들을 한 번 훑어본 후 조용히 “그러면... 영어를 잘해야죠? 하하하.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영어 잘한다고 잘난 체하네’라고 하시는 분들이 혹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넓은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허허허.” 웃으시면서 그동안 강의를 하시면서 쓰셨던 내용들을 지우셨다.

이레니우스

 

1.1.1. 이레니우스

흑판 중앙에 교수님은 아래와 같이 쓰셨다.



이레니우스 ― 성경중심
사도적 계승
이단들에 대하여


이어서 우리를 향하시며 강의를 시작하셨다.

“이레니우스는 ‘성경중심’, ‘사도적 계승’, 그리고 ‘이단들에 대하여’라는 말과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 ‘성경, 사도적 계승, 그리고 이단들’을 기억하시면서 이레니우스의 생애부터 시작하도록 합시다.”

1.1.1.1. 생애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의 출생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약 120년, 또는 130년이라고도 합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자로서 소아시아에서 출생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기독교인들로 그를 '위대한 교회 지도자'이며 속사도인 폴리캅, 즉 서머나 감독 폴리캅에게로 보내어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에게서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위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었던 것이죠. 폴리캅 역시 이레니우스의 현명함과 성실함을 보고 그에게 경건과 학자의 자세를 가르쳤습니다. 저는 이처럼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서는 빙그레 웃으신다. 조금 후에 모든 학생들이 그 의미를 알았다는 듯이 모두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맞습니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맞습니다”라고 하며 반복한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교수님은 이레니우스에 관한 생애를 계속하신다.

“폴리캅의 인도 속에 이레니우스는 훌륭한 성도, 학자,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마치 폴리캅의 복사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훌륭한 분을 만나면 그의 목소리까지 닮고 싶고 그분의 옷차림까지도 아니 걸음걸이까지도 닮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것처럼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을 닮아갔습니다. 당시에 이단들을 직면하기 위해 이레니우스는 이교 철학자들을 탐구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터툴리안을 비롯한 여러 변증가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철학의 오류들, 영지주의자들과의 전투들을 수년 간 경험한 이레니우스는 스승 폴리캅의 권면에 따라 고올 지방, 즉 지금의 프랑스로 임지를 옮겼습니다. 그 이유는 동방교회, 즉 소아시아의 이단자들이 서방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론 강을 건너 리용이라는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리용 감독 포티누스를 도왔습니다. 나이가 많은 포티누스는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탈적인 삶들을 직면하고 대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레니우스의 도움이 요구되었던 것이지요.”

“177년 경, 즉 그러니까 로마제국 황제 아우렐리우스 시기에 포티누스의 사명을 받들어 이레니우스는 로마로 간 사이에 그 지역에 핍박이 있었고 감독 포티누스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되돌아온 이레니우스는 그를 이어 리용 감독이 되었습니다. 감독이 된 이레니우스는 리용을 기독교의 모범지역으로 인도해갔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10년째 치리하던 시기, 즉 202년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1.1.2. 작품들

▲집필하는 이레니우스
“그도 저스틴 마터처럼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5권으로 된 『소위 영지주의라 불리는 자들을 발견하고 이기기 위해』라는 책을 180-189년에 썼습니다. 참으로 긴 제목이지요. 그래서 이 책을 흔히들 『이단들에 대하여』라고 부릅니다. 원본은 그리스어였지만 지금은 상실된 상태고 현존하는 것은 라틴어판입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양한 영지주의 단체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것입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낙 함마디’라는 영지주의 문서가 1945년에 발견된 것을...” 학생들 가운데 어느 분이 대답하기를 “혹시 교수님, 그 문서가 ‘다빈치 코드’에 나오지 않나요?” “예, 맞습니다. 읽어보셨네요. 그렇습니다. 이 문서가 발견되지 전, 즉 1945년까지는 ‘영지주의’에 관한 책으로서 이레니우스의 이 작품이 최고였습니다. 이 작품은 1885년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교수님, ‘영지주의’에 관해 조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나요?” 질문했던 학생이 또 한 번 질문했다.

“아, 죄송하지만 초대교회사의 네 가지 주제들 중 마지막이 ‘이단들’에 관한 것인데 그때 제가 자세하게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예, 좋습니다. 교수님, 저의 이름은 ‘인내’입니다. 기다릴 수 있어요”하며 눈을 아래로 깔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러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어디까지 했나요? 그렇지요. 이레니우스의 작품인 『이단들에 대하여』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받아쓰게 되었는데, 분명한 것은 이단자들의 오류들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감독의 부탁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1권은 다양한 영지주의 종파들의 오류들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발렌티니아니즘(Valentinianism)에 관한 것입니다. 영지주의를 가장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발레티니안이죠. 그리고 2-5권은 영지주의자들의 오류들을 논박하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2권에서 이레니우스는 철학적으로 접근해 가서 논박한 후, 3권에서 ‘전통’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규율’을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하지요. 그 전통을 통해 교회의 순결성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된다고 합니다. 4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는 구약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마르키온에 반대하여 신ㆍ구약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5권에서 어떤 강조를 하지 않지만 이레니우스는 종말에 관한 내용에 관심을 갖습니다.”

“정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레니우스는 앞으로의 영지주의 사상이 수많은 이단들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고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를 설명함에 있어 그는 자세하지만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인용한 문서들의 정확한 연대와 핵심을 지적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의 책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논증한다』는 『이단들에 대하여』를 쓴 후에 쓰였습니다. 마르키안이라 불리는 친구에게 보낸 것이죠.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먼저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선지자들로부터 이런 교리들을 찾아내었다고 강조하면서 교리의 진실성을 나타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용상 『이단들에 대하여』와 유사한 논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의 작품 가운데 몇 가지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단들에 대하여』에서 발췌한 부분들을 나눠드렸는데 혹시 받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나요? 그러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책의 1권 10장 1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상 끝까지 어디든지 교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나님, 성부, 전능자, 그리고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를 믿는 신앙을 사도와 그들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섭리와 재림, 그리고 동정녀 탄생, 그분의 고통,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심, 성부의 영광을 받으시면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과 성령을 믿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불가시적 성부에 따라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와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는 무릎을 꿇을 것이고 모든 입들이 그분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배교자들이 되고 범죄한 사악한 자들과 천사들, 또 불법을 자행한 사람들 가운데 신성모독적인 행사를 범한 자들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질 것입니다. 하지만 의롭고 거룩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으로 가득 찬 복과 영생을 베풀 것입니다. 또 그분의 계명, 즉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며 회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베푸십니다.

“다음은 3권 3장 1절의 내용입니다. 강경희씨가 읽어주시겠습니까?”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쉽게 얻게 되는 진리를 다른 분들 가운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은행에 많은 돈을 가진 한 부유한 사람과 같습니다.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물을 그들로부터 길어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생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도둑이며 강도들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진리의 전통을 열심히 고수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감동적이죠. 약 1900년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를 향해 주는 메시지들입니다. 이렇게 고전들을 읽다보면 마치 명상록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저는 받곤 합니다. 이런 감동이 모든 분들에게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수업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주 토요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레멘트

 

1.1.1. 클레멘트

토요일 수업을 마친 후 성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많은 보화들을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동안 이런 보화들을 억지로 외면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올바른 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나 실수도 했고, 그리고 다시 일어선 모습들을 기억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다른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지금 성민은 다시 한번 교회사를 배우는 자신을 뿌듯하게 여겼다. 그리고 순교자들을 통해 쓰여진 교회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소개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 본다.

그리고 다시 토요일이 밝았다. 서둘러서 참석한 ‘교회사 학교’에 새로운 분들이 보이는 듯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처음 성민 자신이 참석했을 때 어색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성민은 그들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인사를 먼저 건넨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최성민이라고 합니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것이라도 있는지요? 언제든 말씀하시면 아시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상대방도 역시 멋쩍은 모습으로

“아 예, 저는 정기철이라고 합니다.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의 소개보다는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이러한 ‘교회사 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욕이 앞설 뿐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가운데 수업시간이 되어 서로 눈인사로 ‘쉬는 시간에 보지요’하며 자리를 잡고 수업에 임했다.

▲클레멘트의 모습
“반갑습니다. 일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시간까지는 ‘교부들’이라는 제목 아래 두 분의 위대한 교부들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1~2세기의 교부들을 지나 2~3세의 교부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 세기의 교부들을 가리켜 우리는 ‘변증가들’이라는 칭호를 특별히 붙입니다. 그 이유는 핍박을 받는 분들을 위한 변증, 핍박하는 자들에게 기독교를 변증, 그리고 이단들에 반대하는 변증 등을 행하면서 작품을 남기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동방교회, 즉 안디옥과 서머나에서 태어나신 분들,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무대를 북아프리카로 옮겨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두 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두 분들은 클레멘트와 그의 제자 오리겐입니다. ‘클레멘트’라고 하니까 아마 복습하신 분들은 “로마의 클레멘트와 혼동할 수 있겠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처음 교회사를 배울 때 혼동되었습니다. 아마도 혼동하실 분이 있을까 봐서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교회사 책들은 1세기의 교부인 클레멘트를 ‘로마의 클레멘트’라 부르고 2세기의 클레멘트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라 부릅니다.”

1.1.1.1. 생애

“클레멘트를 생각하면, ‘윤리학’이 시작되었다고 기억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분의 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입니다. 2세기 중엽에, 즉 약 150년 경에 태어났고 211년과 216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분이십니다. 태어난 곳은 북아프리카이기보다는 아마도 아테네라고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그의 탁월한 그리스어 실력 때문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과 시인들에 대한 수많은 인용들은 그가 그리스인임을 증명하는 듯합니다.”

▲300B.C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클레멘트는 그리스, 이태리,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로 여행하여 이곳에 정착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면서 저스틴처럼 하나님에 대한 문제로 고민했으며 마침내 기독교인들의 교리와 숭고성, 도덕성을 통해 개종되었다고 믿어집니다. 여행을 하면서 기독교 교사들을 만나기를 염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약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고 약 190년 경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교장 판타에누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판타에누스의 이름의 뜻은 ‘시실리아의 벌’이라는 뜻입니다. 클레멘트는 그를 이어 그 학교의 학교장이 되었습니다.”

▲톨레미가 그린 알렉산드리아
“교수님!” 하고 성민은 교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예, 성민 씨 말씀하십시오.” “저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라고 하셨잖아요? 그 학교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요?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그렇습니다. 궁금하실 것이라 예상됩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공관복음의 저자 마가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역사 기록상으로 교리문답 학교가 언제 설립됐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 진리와 신앙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알기를 원했던 교리문답자들을 위한 학교였음에는 분명합니다. 약 180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판타에누스가 최초의 교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되는 클레멘트이죠.”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런데 로마제국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핍박으로 인해 교리문답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클레멘트는 202년 또는 203년경 캅파도키아로 가서 알렉산더라 불리는 감독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215년 또는 216년경 알렉산더는 예루살렘 감독이 되었습니다.”

1.1.1.2. 저서

“그리스인, 철학자, 여행자라는 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클레멘트는 열린 마음과 귀족적 마음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친절을 늘 베풀었습니다. 박식한 그는 비범했으며 어느 누구도 그만큼 이교도 저자들과 기독교 저자들의 글을 인용한 사람이 당대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그의 제자 오리겐도 그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폭넓은 지식을 갖기 위해 많은 독서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렇게 박식한 그였지만 그는 자신이 다루는 주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문법적 오류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정통신앙과 조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그의 주요한 목적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짓는 것이고, 철학으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계시를 과학적 신학으로 바꾸는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정통에서 벗어난 갖가지 이론들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작품들은 세 가지입니다. 『권면』, 『교사』, 그리고 『잡록』 등입니다. 『권면』은 이교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오류들을 저버리라는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개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두 12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2세기 다른 작품들과 유사합니다. 이교도들이 믿는 신앙들의 비진리성을 나타내고 그것들이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 무의미할 뿐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완전한 진리는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두 번째 작품인 『교사』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독교적 삶을 살도록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먼저 어리석은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인들이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하며 보다 나은 지식, 즉 영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클레멘트는 세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영지는 단순히 신앙의 발전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에서 그는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다양한 삶의 현장들을 언급하면서 덕스러운 삶에 대한 지침을 줍니다.”

“그가 도덕가임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작품은 세 번째 작품인 『잡록』에서입니다. 완전한 기독교인을 참된 영지주의자로 묘사하면서 다양한 기독교 교리들을 교육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모두 8가지 수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데오도레스에게 보낸 클레멘트의 서신의 한 부분
“그 외 그가 쓴 작품으로는 『개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신ㆍ구약성경에서 발췌된 구절들을 주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서신, 요한서신, 그리고 사도행전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주석적 방법은 주로 알레고리칼, 즉 풍유적입니다. 그 외에도 『구원받는 부자는 누구인가?』는 마가복음 10:17-31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데오도레스에게 보낸 서신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학식이 높은 알렉산드리아인들을 전도하기 위한 마음의 소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이라는 학자는 클레멘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클레멘트가 가진 두드러진 결점들은 신약성경의 전 정경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기독교 신조의 초기 형태인 믿음의 도에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비밀적 전통을 싫어했던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클레멘트는 비밀적 전통을 언급했으며 영지주의에 대한 그의 호감은 영지주의적 단어들을 빌려와 사용한다는 수준을 훨씬 넘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그는 윤리학 교사로 알려져 있다. 클레멘트 덕분에 기독교 교리신학은 홀로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고 잘 발전된 윤리학의 조직과 함께 동반자 관계에서 들어갔다. 클레멘트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도덕신학은 교리신학과 함께 나란히 왔으며, 실제로 기독교 신학이 꽃필 때마다 윤리학 뿐만 아니라 교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오리겐(上)

 

1.1.1. 오리겐

1.1.1.1. 생애

“다음으로 우리는 초대교부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553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오리겐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쓴 오리겐의 1백개의 서신을 소개하면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리겐의 작품들을 통해 그의 생애를 우리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오리겐의 본명은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경건한 기독교인 부모의 자녀로 약 185년 또는 186년경 태어났습니다. 그는 7 형제ㆍ자매들 중 맏이였습니다. 부친 레오니다스로부터 처음에 학문과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부친 레오니다스는 202년경 로마제국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 핍박 시에 참수형을 당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오리겐의 연구하는 모습
“그런 후 오리겐은 판타에누스와 클레멘트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나이 17세에 문법 분야에 큰 두각을 나타내다가 18세에 이르러 클레멘트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금욕적 삶을 산 오리겐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학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야만 여인들을 가르칠 때에 유혹을 면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리겐은 마태복음 19:12를 문자적으로 채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고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212년 그는 제자들 중 헤라클라스를 택하여 교리학교의 초급반을 맡겼고 자신은 고급반을 맡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까지 가르쳤습니다. 오리겐은 204년부터 230년까지 가르친 후 23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리아에서 가르쳤습니다.”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종교회의’라고 늘 말씀하시잖아요? 종교회의와 ‘범교회 종교회의’와 차이점이 있나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종교회의라는 말은 지역 종교회의, 즉 영어로는 synod라 보고요. ‘범교회 종교회의’란 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전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어로는 Council이라 하는데요. 현재 교회로 보면, 교단마다 ‘총회’가 있잖아요. 그 총회를 ‘범교회 종교회의’라 여겨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단이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가 있으니 혼동되지만 말입니다. ‘종교회의’에 관해서는 ‘이단들’이란 주제를 배울 때 보다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회사에서는 생소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체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요. 제가 미국에서 교회사를 배울 때입니다. 한국에서는 ‘플라톤주의’라고 배웠는데 영어 발음에서는 ‘타니즘’이라고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혀 다른 것인 줄 알았습니다. 수업 후에 교수님께 철자를 적어달라고 하자. 바로 플라톤주의(platonism)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 시험에 어느 교수님은 용어 문제를 내곤 했습니다. 단답형으로 말입니다. 이해되시죠? 언제든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항상 학문을 배우는 학도의 자세를 잊지 않았습니다. 25세 나이에 그는 신플라톤주의 암모니우스 사카스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적 지식을 완벽하게 알기 위함이었지요. 그 외에도 그는 성경 말씀을 늘 묵상했으며 히브리어를 배워 원어로 읽는데 노력했습니다. 또 유대인들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후에 『헥사플라』(히브리어와 5가지 그리스어를 함께 쓴 6가지 성경본문)를 썼습니다. 약 215년에 로마제국 황제 카라칼라의 핍박이 교회에 임하게 되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도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카이사리아 감독 테오크티스투스를 만나 사귀었습니다.”

“교수님” 하고 전옥녀씨가 질문한다.

“계속하여 교수님께서 카이사리아라고 말씀하시는데 카이사리아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 ‘가이사리아’를 일컫는 지역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오리겐에 대한 평판을 들은 예루살렘 감독 알렉산더는 그로 하여금 두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사실은 일반 신자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당시에 허용되지 않았거든요.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218-219년에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오도록 하고 다시금 교리학교 직을 맡도록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당시에 오리겐은 가장 인기 있는 교사였다고 여겨집니다. 요즘도 그렇잖아요. 인가가 있거나 잘 가르치면 스타처럼 여기저기서 초청하지 않습니까?”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오리겐은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이미 가르치고 있었기에 여유가 있어 집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약 230년 아카이아로 여행을 했는데 다시금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리아를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인 데오크티스투스와 알렉산더는 그를 다시금 붙잡고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우스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오리겐을 사제로 임명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오리겐을 자신들과 함께 일하도록 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데메트리우스는 불평하면서 오리겐을 231년경에 교리문답 학교장직에서 파직시켰고 사제직 역시 파직시켰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데메트리우스는 서신들을 써서 여러 교회들에게 이 불법적 처사를 고발했습니다.”

“오리겐은 이제 더 이상 이집트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한 직장에서 한 상사에게 잘못 보이면 그것이 꼬리표가 되어 다른 곳에 옮겨갔을 때에 새 직장에서 과거의 경력을 조회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하극상의 경우가 있었다면 아마도 새 직장에서 자신을 채용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고문당하는 오리겐
“아무튼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을 당하자 하는 수 없이 카이사리아로 가서 자신의 두 번째 경험을 그곳에서 갖게 됩니다. 목회를 할 뿐만 아니라 여러 문학 활동을 아울러 했습니다. 아마도 이곳의 경험으로 인해 거의 3백여 편의 설교를 썼습니다. 오리겐은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로마제국 황제 막시미누스(235-237)의 핍박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잠시 피했습니다. 240년에 다시금 그는 아테네로 여행했고, 244년 아라비아로 여행했고, 그 후 보스트라 감독 베릴루스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250-251)의 핍박으로 인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거의 죽게 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후 고문 결과 로마제국 황제 갈루스 시기, 즉 254년이나 255년에 69세의 나이로 뵈니키아의 두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리겐(下)

 

1.1.1. 오리겐

1.1.1.2. 저서

정말 오리겐은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헌신된 금욕적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작가였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먼저 그의 작품들 가운데 성경적 작품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작품은 누가 뭐라 해도 『헥사플라』와 성경 주석류입니다.”

▲'헥사플라'의 한 페이지
“교수님, 앞에서도 『헥사플라』에 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구체적으로 그리스어 역이 어떤 것인지, 또는 히브리어 역은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정도전씨가 물었다.

“예, 정도전씨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도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물어보실까 하며 망설였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질문하시네요.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말씀드리지요.”

“6개의 칼럼, 즉 세로 줄로 된 구약성경 대역서라고 하는 것이 좋겠죠. 첫줄에는 히브리어로 된 히브리어 본문, 다음은 그리스어로 된 히브리 본문, 세번째 줄은 아퀼라(Aquila)의 그리스어 역본, 네 번째 줄은 심마쿠스(Symmachus)의 그리스어 역, 다섯째 줄은 셉투아진트(70인역)의 그리스어 역, 그리고 여섯째 줄은 데오도티온(Thedotion)의 그리스어 역입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시편은 8개의 칼럼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역본을 더한 것이겠죠. 이러한 역본을 쓴 오리겐의 목적은 성경 역본들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셉투아진트임을 밝히기 위함이고 히브리 본문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의식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약 24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쓰기 시작했다가 카이사리아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성경적 작품으로는 『주해』(Scholia), 『설교집』(Homilies), 그리고 『주석집』 등입니다. 『주해』는 성경구절들 중 난해한 것들을 순수하게 문법적으로 성경을 주해한 것입니다. 주로 모세 5경과 이사야, 시편, 전도서, 마태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관한 것입니다. 『설교집』은 성경에 관해 신실한 사람들과의 친밀한 대화를 엮은 것입니다. 마치 교수와 학생과의 대화처럼 말입니다. 약 500여개의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200여개는 라틴어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주석집』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성경구절들을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찾는데 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의로 해석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오리겐의 성경 해석방법이 알레고리칼, 즉 풍유적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 성경은 무오류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류인 것처럼 여겨지는 본문에 관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늘한 날에 낙원에 거니셨다고 하실 때의 의미는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은유라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의 『요한복음 주석』은 교사였던 그의 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 그의 작품들은 변증적 작품으로 『셀수스에 반대하여』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작품으로는 『첫 번째 원리들』이 있. . .” “교수님, 죄송하지만, 이 작품에 관해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소선희 씨가 질문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하시던 말씀을 멈추시면서 빙그레 웃으신다. 마치‘정말 좋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 . .’라는 듯이.

▲오리겐 작품의 '로마서 주석' 한 페이지
“좋습니다. 이 작품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셀수스라는 사람은 박식한 플라톤주의자입니다. 그는 ‘참된 강론’이라는 작품을 써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약 177-178년경의 일이지요. 이 안에서 셀수스는 기독교란 당시의 이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을 언급하면서 사용했지만 극히 주관적으로 사용했지요. 마치 볼테르와 같은 인물이었죠. 다시 말하면, 냉소주의자였습니다. 이 작품을 읽은 오리겐의 친구 암므로스는 오리겐에게 부탁하여 비판책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셀수스의 책의 모든 부분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면서 비판했습니다.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의 작품은 신학적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그의 두 번째 조직신학 작품으로 『첫 번째 원리들』입니다. 이 책은 클레멘트 작품과 유사한 것으로 기독교 신앙을 알렉산드리아 철학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그는 한 분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지배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독생자이시고, 성령은 그 두 분들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성부로부터 존재를, 성자로부터 이성을,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거룩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두 가지 창조를 말합니다. 첫 번째 창조는 몸 없는 영들의 창조입니다. 영들은 자유의지를 가졌지만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창조가 요구됩니다. 두 번째 창조는 물질적 창조입니다. 고통을 인간이 받는 이유는 우리의 죄의 선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플라톤 철학적 관점입니다. 또 이 책에서 그는 ‘보편 구제설’(universalism)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지어 사탄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끝에 가서는 모두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죠.”

“금욕주의자였던 오리겐의 세 번째 작품은 『순교에 대한 권면』 그리고 『기도에 관하여』가 있습니다. 로마제국 황제 막시미누스 핍박시기에 검거되어 순교한 자들과 검거되어 있는 자들을 위해 235년에 쓰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대한 여러 편의 설교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하여』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1~17장과 18~30장입니다. 주님의 기도, 즉 주기도문 해설서라 할 수 있습니다. 231년 이후에 쓰인 책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모든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브라운 박사의 평가를 읽어보도록 합시다.

오리겐의 탁월한 공헌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삼위일체 정통이라 부르는 것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불행하게도 이러한 대 알렉산드리안 [오리겐]을 추억할 때 그의 상상력이 너무나 풍부하고 그의 사색이 너무나 가공적이어서, 동방정교는 그를 성자나 교회의 교부로 보지 않고 단지 대 이단으로만 여길 뿐이다. 자신보다 앞선 터툴리안처럼 오리겐은 정통 교리의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했지만 너무나 많은 비정통 사상도 산출했기 때문에, 하르낙과 같은 대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환대하지만 정통 기독교인들은 그에 대해 수치감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받는 첫번째 이유는 그의 삼위일체론 입장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서로 ‘동일본질’(homoousios)을 말한 사람은 바로 오리겐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는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그 두 분의 관계를 ‘종속’의 관계임을 동시에 암시했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성령을 단순히 사역이나 역할로 보았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다고 보지만 성령을 동일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큰 무리를 둔 설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의 선재설을 언급했습니다. 다시 브라운 박사의 평가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오리겐은 인간의 영의 선재설 (preexistence)을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독단성을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영들을 포함한 형체가 없는 수많은 영혼들을 창조하셨다. 태어나기 전에 그러한 영들은 자유의지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각 영들은 물질적 육체를 수여 받는다.31) 이런 설명은 마치 영지주의와 흡사하다. 선재한 영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선택에 따라 일시적인 정체를 부여받는다. 영의 선재설 개념은 16세기 이후 극적으로 말일예수그리스도교 (몰몬교)의 교리에서 다시 재발한다.

“그의 금욕적 삶과 교훈은 후에 수도사들이 그의 사상을 닮고 추구하곤 합니다. 이것으로 오리겐에 관한 이야기를 마쳤으면 합니다. 우리가 아직 교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교리적 문제가 나오면 저 역시 부담스럽습니다. ‘교부들’, 즉 ‘변증가들’에 대한 설명이 마친 후 교리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연대기적 사실들을 알고 난 후에야 교리적 설명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는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교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조금 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에 대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부탁이 있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후에 ‘동일본질’에 관해 말씀해 주시겠지만 간략하게나마 지금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채송화 씨가 묻는다. 미소를 조용히 지으시던 교수님은 “좋습니다.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 '호모오시오스'라는 용어는 '동일본질',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철학적인 개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64-268년경에 개최된 안디옥 종교회의에서는 이 단어가 영지주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여 정죄했습니다. 그렇지만 325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는 ‘유사본질’(homoiousios [호모이오시오스])이라고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동일본질’이란 용어를 정통으로 인정했습니다. ‘유사본질’ ‘동일본질’ 과의 사이에는 단순히 ‘i’(이오타)의 차이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다릅니다. ‘이오타’가 덧붙여지므로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을 닮았다고 표현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신성이 무너지게 되는 셈이죠. 또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교사로만 인식하게 되고 모본자로만 인식하므로 인간종교로 기독교를 전락시키고 말 것입니다.”

“어때요? 채송화씨? 오히려 더 복잡해지죠? 제가 뭐라 하던가요. 차라리 설명을 듣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말입니다. 하하하.” “교수님, 그런데 우리가 흔히 닮고자 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여길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신앙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의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어떻게 자신도 구원 못하는 죄인이 다른 죄인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원의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셈이죠. 기독교는 도덕종교에 불과하죠.”

터툴리안

 

1.1.1. 터툴리안

1.1.1.1. 생애

▲터툴리안의 모습

“지금까지 변증가들 가운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교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두 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은 스승과 후계자의 관계이기도 하며 북아프리카 출신이기도 합니다.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지요. 먼저 터툴리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터툴리안이라고 하면, ‘삼위일체’(trinitas)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교부입니다. 아무튼 잠깐 쉬고 계속 할까요?”

잠깐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어느 형제가 교수님께 다가가서 질문을 하는 듯 싶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님은 손짓을 하시거나 팔짱을 끼고 왼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시면서 또는 고개를 끄덕거리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중 벌써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어느 형제로부터 유익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에 관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몇가지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를 ‘한 본질과 세 위격들’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신ㆍ구약’ 성경이라는 용어도 처음으로 그가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즉 하나님에 관해 알려고 할 때에 반드시 터툴리안의 설명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죠.”

“터툴리안(약155–230)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입니다. 참 긴 이름이지요. 당시 그의 부친은 로마 장교로서 카르타고에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터툴리안은 덕스러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터툴리안은 아마도 모든 일에 있어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문성도 뛰어났습니다. 특별히 로마법에 관해 심오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직업상 법률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차분하고 냉정한 이성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약 197~198년경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글쎄요. 어떻게 개종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니 분명한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겠죠. 역사는 기록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1.1.1.1.1. 몬타니즘

“약 200년경 결혼한 그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46-211)의 핍박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터툴리안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이유는 몬타니즘(Montanism)을 로마교회가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몬타누스파는 재혼을 금했는데 로마감독의 권위를 가지고 재혼을 허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217~222년 경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겸양에 관하여』를 쓴 후 역사의 기록에서 벗어났습니다.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으로 개종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몬타니즘’이 무엇입니까?”라고 권정기 씨가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님은 “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몬타니즘은 초대교회 때, 즉 2세기 중엽에 일어난 기독교의 한 종파였습니다. 창설한 자는 ‘몬타누스’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 운동을 강조한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몬타누스는 두 여인, 즉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와 함께 동행했는데 그녀들은 성령의 인도를 직접적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의 3장 ‘프리스킬라: 이단자’를 보면, 몬타니즘에 관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몇 부분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책 44페이지 앞부분을 정유영 씨가 읽어주시겠습니까?”

사도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동안 일부 개종자들이 이상한 교리들을 수용하고 채택했다.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와서 미혹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다(마 13:20-22).

▲몬타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그 결과 사도들은 성도들을 미혹시키기 시작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에 대해 교회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데 주력했다(행 20:29-30; 벧후 2:1-3). 하지만 이단 사설은 교회 전체에 퍼져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였다(요일 2:19). 2세기 말 소아시아 지방에 프리기안이라는 곳에 이단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령께서 교회에 새로운 계시를 주시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두 명의 여인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는 그 계시를 받는 선지자들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받은 계시를 ‘새 예언’(New Prophecy)라고 불렀다. 새 예언은 박해와 금식에 저항하고, 재혼을 금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을 강조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이단들’이란 주제를 다룰 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까지 참을 수 없다고 여기시는 분들은 『이단과 정통』의 129~133페이지를 읽어보시면 그 궁금증이 시원하게 풀릴 것이라 믿어집니다.”

 

터툴리안(下)

 

1.1.1. 터툴리안

1.1.1.2. 저서


▲터툴리안의 전집 앞 페이지
“아무튼 터툴리안은 탁월한 변증가, 논리적인 변증가, 철의 의지를 지닌 변증가였습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단호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분한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왜곡하거나 사실을 과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도덕성을 과장하는 경우도 혹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학문성을 평가 절하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탁월한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무려 31권의 작품들을 집필했습니다. 대부분이 변증적 작품, 논쟁적 작품, 교의적 작품, 도덕적 작품들 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변증적 작품들 중에서 『이교도들에 관하여』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권은 이교의 도덕들을 비판하고, 2권은 바로(Varro)라는 사람이 제시한 이교 신앙들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책 『변증학』은 197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이전의 선배들처럼 이교를 비판하고 기독교인들의 순수성을 변호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부당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세 번째 책인 『영혼의 증거에 관하여』는 197~200년에 쓰인 작품으로, 6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마치 『변증학』의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200~206년에 쓰여진『유대인들에 반대하여』는 기독교의 진실성을 예언서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두 14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두 번째 범주는 논쟁적 작품들입니다. 이단들에 관한 책으로, 이레니우스처럼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가지고 이단자들에 반대했습니다. 1~14장은 신실한 성도들에게 이단과 이단자들을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5~37장은 이단자들도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정당함을 말하지만, 성경은 진실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의 것이지 거짓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8~44장은 이단자들이 지닌 기강들은 도둑과 강도들이 지닌 것과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두 번째 책인 『마르키온에 반대하여』는 이단자 마르키온에 대해 비판한 책입니다.”

“세 번째 범주에 해당되는 교의적 작품들은 주로 『세례에 관하여』, 『스콜피온 해독제』, 『그리스도의 몸과 부활에 관하여』,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 『영혼에 관하여』등입니다. 그 가운데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는 성부 고난설을 주장하는 지도자인 프락세아스에 반대해 쓴 작품입니다. 이 당시 프락세아스는 아프리카 지방에 거짓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그에게 삼위일체 위격들의 구별과, 존재의 단일성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 범주에 속하는 도덕적 작품들 가운데 『기도에 관하여』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1~9장은 주기도문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작품입니다. 10~27장은 선한 기도의 도덕적 조건, 육체적 조건, 그리고 예식적 조건들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28~29장은 기도의 유효성을 설명합니다. 다음은 『회개에 관하여』, 『자선에 관하여』, 『여성들을 존경함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에서는 여성들의 옷차림, 장식을 간단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젊은 여성들에 관하여』, 『결혼에 관하여』, 『과부에 관하여』, 『순교자들에 관하여』, 그리고 『인내에 관하여』등이 있습니다.”


▲『구경거리에 관하여』의 한 페이지
“마지막 범주는 기강에 관한 작품들입니다. 『구경거리에 관하여』, 『양심에 관하여』, 『핍박에 관하여』, 『우상숭배에 관하여』, 『외투에 관하여』가 있습니다.”

“이상의 저서들 중 몇 가지만 간추려 읽어보도록 합시다. 먼저 『변증학』에 관한 작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큰 공헌을 했던 것처럼 터툴리안도 역시 이단들에 반대하여 큰 공헌을 했습니다. 다음은 『변증학』의 21장 6절, 19장 3절입니다. 김주식 씨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수님, 어디에 있는 것이라구요?”라고 김주식 씨가 묻자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분이 “김 선생! 뭐 하고 있어? 여기잖아.”하면서 말한다. 그러자 김주식 씨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두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또 성령으로부터 나오시는 성령도 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에 수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근원에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며 결코 분리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기독교 기강과 신앙에 대한 진리가 현존하는 곳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성경의 설명도 발견할 수 있고 모든 기독교 전통 진리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기도에 관하여』의 6장 2절의 내용인데요. 천강식 씨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이며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떡이 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그분의 몸은 떡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일용할 양식을 간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함을 기도하며 그분의 몸과 분리되지 않도록 간구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의 2장 1절을 차동희 씨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처럼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십니다. 말씀이신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그분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이 성부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사람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분이 성경에 따라 고통을 당하셨고, 죽으셨고, 그리고 장사되셨음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분이 성부의 우편에 앉아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이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약속에 따라 성부께서 성령을 즉 모든 자들의 신앙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을 보내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신앙의 이와 같은 규율은 복음의 시작한 후에 있었습니다. 초기 이단자들이 일어나기 전에도 말입니다.”

“터툴리안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정통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한 자였습니다. 영혼이 선재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 개념은 후에 있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성부 고난설’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삼위일체 개념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경륜(economy), 위격, 그리고 본질’ 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그는 ‘믿음의 규율’을 언급했는데 이는 교회의 권위 있는 전통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전통이 아니라 바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키프리안(上)

 

1.1.1. 키프리안

1.1.1.1. 생애

▲키프리안
키프리안(약 210-258)은 터툴리안처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으로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입니다. 카르타고는 지도에서 보다시피 로마와 매우 근접해 있는 도시입니다. 지도에서 한 번 확인하도록 하지요. 아마도 제가 ‘한니발’을 설명하면서 지적한 것으로 여깁니다만… 생각이 나지 않으시면 여러분들이 잘못 배운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허허허. 한번 지도를 볼까요?” 하시면서 교수님은 지도를 펼쳐 보이신다.

“이제 카르타고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핍박을 설명하면서 키프리안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아무튼 키프리안은 카르타고 출신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키프리안이라 하면 카르타고를 기억하는 동시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라는 것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키프리안은 약 210년에 카르타고에서 이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카에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입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웅변가, 즉 수사학자로서 법률을 배웠습니다. 그 후 그는 카르타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락과 명예로 만족하지 못한 키프리안은 245년 카르타고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제인 카에실리아누스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종 시기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245~248년이라 여겨집니다. 개종한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제로 수임을 받았습니다. 249년 초 그는 도나투스를 이어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독직을 9년 동안 유지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250년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의 핍박으로 인해 카르타고를 떠나 인근 지역에 피했기 때문입니다. 데시우스 핍박에 관해서 ‘핍박들’이라는 주제로 설명해 드렸는데 혹시 기억하고 있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기억이 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잘못 가르쳤으니깐요…”하시면서 웃자 모두들 빙그레 웃었다.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는 교회의 감독들과 지도자들에게 명하여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충성을 맹세하라는 의도였죠. 그만큼 제국이 불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 군사들은 마을을 다니면서 황제령을 시행했습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도주했던 것입니다. 핍박의 시기 다음 해인 251년 봄, 카르타고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배교자들’(Lapsi, 랍시) 문제를 직면하게 됐습니다.”

“교수님, 배교자들이란 누구를 일컫는 말인가요? 강의를 통해 짐작하건대 핍박과 관련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데요…”하며 진지하게 질문하는 곽기섭 씨였다.

“좋은 질문입니다. 배교자들이란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임을 부인한 자들을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담대하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낸 ‘고백자들’도 있었습니다. 핍박이 두려운 자들은 돈을 주고서라도 희생제를 드렸다는 증거를 구입했습니다. 그 증서의 이름이 ‘비렐룸’(libellum)이라 부릅니다.

배교자들의 문제에 있어 키프리안은 어려움을 직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겁쟁이처럼 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로마 감독에게 고발했습니다.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키프리안에게 글을 써서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자신의 도주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신적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도덕성과 관련되어 일어났다기보다는 배교자들에 관련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배교자일지라도 공식적인 회개를 하는 사람들을 다시금 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이자고 키프리안이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키프리안이 도주했던 시기 동안 장로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임명한 펠리키시무스 집사는 키프리안의 제안을 정면으로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키프리안은 그를 파직하고 출교를 명했습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는 노바투스의 지원을 받고 반대파들을 이끌면서 분파를 자행했습니다.

그러자 251년 키프리안은 『배교자들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고 카르타고에서 감독자들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펠리키시무스를 정죄하고 키프리안의 권면을 채택했습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를 따르는 자들은 키프리안을 반대하고 감독을 선출하여 분파를 또 이끌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감독까지 선출해 점차 노바티안을 따르는 자들의 분파는 심각해져 갔습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교인들의 도덕성에 관한 글들을 써서 권면하며 분파자들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6세기에 그려진 ‘역병’에 관한 그림
“252년과 254년 간 역병이 카르타고에 몰아쳤습니다. 이 역병은 전 로마제국을 15년 동안 휩쓸었던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데시우스의 아들 호스틸리안도 이 역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죠. 이에 대해 키프리안은 『역병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역병으로 인해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이 동일하게 역병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그 후의 삶은 다르다고 강조했습니다.

255년 다시금 키프리안은 다른 문제를 맞이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주재한 세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감독 스테판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스테판은 이단자들의 세례도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합법적으로 행했다면 그 세례가 정당하다고 했죠.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자들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257년 8월 새로운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의 핍박이었죠. 이 핍박으로 인해 논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판과 그의 후계자가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핍박에서 키프리안은 담대하게 자신의 양떼들과 함께 맞섰습니다. 그러자 그는 쿠루비스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 후 258년 그는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키프리안은 앞서 배웠던 터툴리안의 작품들을 탐독한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터툴리안과는 다른 온건하고 친절한 성품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터툴리안이 열정적이었다면, 키프리안은 참을성 있고 균형 잡힌 인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