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통역의 은사

2009. 8. 13. 01:06목양자료/4.기도자료

방언 통역의 은사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 13-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방언 기도는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은 그 기도의 내용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그 기도에 참예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방언으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마음은 기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언으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방언 기도와 우리말 기도를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하는 방언이 통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방언은 매우 유익하고 귀한 은사지만, 그것이 통역되어야 비로써 온전한 은사가 된다.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방언을 말함으로써 받게 되는 은혜의 절반 밖에는 받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는 은사 받기를 애쓰며 기도해야 한다. 


방언 통역은 그것을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내가 하는 방언의 해석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열리며 그 방언의 뜻이 내 마음에 떠오르게 되고 그래서 내 영이 지금 무엇에 대해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2) 타인이 하는 방언의 통역

여기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ㄱ) 남이 하는 방언을 듣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그 방언이 통역되어 내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

내가 그 방언을 통역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도 통역이 되어 나오며, 그 통역된 우리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 밖으로 나온다.

통역이 끝난 뒤에도 내가 뭐라고 통역을 했는지 모를 때가 많다.

성령께서 어떤 비밀을 우리들에게 알게 하실 때 이 방법을 사용하신다.

사람의 입을 통해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 방언을 통역하게 하심으로 그것을 사람들로 알게 하신다.

이 경우는 남이 하는 방언이 내 귀로 들어와서 나의 이성(理性)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입을 통해 통역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통역에는 나의 생각이나 주관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ㄴ) 남이 하는 방언을 듣고 그 방언을 통역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통역하는 것.

이때, 그 대략적인 뜻만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단어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다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의도적으로 통역하고자 하면 그 말하는 방언의 뜻이 일단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고 그것을 내가 우리말로 바꾸어 통역을 하는 것이다.

남이 하는 방언을 듣고 그 뜻을 내 안에서 해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그 통역에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 혼합될 위험이 있고, 때로는 전혀 틀리는 통역을 하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 방언을 통역하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갑자기 귀가 열리며 옆 사람이 하고 있는 방언의 뜻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게 될 때가 있는데, 이럴 때에는 그 통역은 일단 바른 통역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러나 남이 하는 방언을 통역하려고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일 때에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 통역에 혼합될 위험이 다분히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하고자 하는 사람은 늘 깊은 기도를 하며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통역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방언 통역 배우는 법


방언은 배워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은사라고 말했지만, 방언 통역도 어느 정도까지는 배워서 할 수 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처럼, 방언을 받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까지는 방언 통역의 은사도 함께 주시는 것이다.

방언 통역을 배운다는 것은 은사 그 자체를 배우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받을 때 함께 받은 그 작은 방언 통역의 은사를 찾아내어 훈련하는 것에 의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은사로 키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작은 방언 통역의 은사를 찾아내어 개발하고 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는 기도이다. 둘째도 기도이다. 셋째도 기도이다.

 

오직 기도만이 신령한 것을 얻을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는 은사는 오지 않는다.

특히 예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는 참으로 많은 기도를 쌓아야 한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매우 흡사하다.

둘 다 하나님께서 영의 음성을 통해 알게 해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을 하기 우해서는 늘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유지해야 한다.


먼저, 내가 하는 방언을 통역하기 위한 훈련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아무리 방언을 유창하게 해도 자기가 하고 있는 방언을 통역하지 못하면 방언을 받은 은혜는 반감하고 만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방언 정도는 통역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영의 상태가 어떠한지, 지금 내 영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내 영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제 1단계

우리말 기도와 방언 기도를 교대로 하며 기도를 한다.

먼저 우리말로 기도를 하고 이어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

이때, 가령, “하나님, 방언 통역의 은사를 주시옵소서.”하는 것이었다면 그 간절한 소원을 그대로 마음속에 품고 그 뜻을 방언 소리에 실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말한 방언이 “하나님, 방언 통역의 은사를 주시옵소서.”라는 뜻의 방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에 유의할 것은 내가 지금 말하는 방언이 정말 그런 뜻의 방언일까? 하고 의심하거나 자신 없어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런 뜻이라고 믿고 하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뜻이 같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고 자꾸 하다보면 차츰 같아지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기도를 한 구절씩 짧게 끊는 것이다.

우리말 기도를 길게 끌고 이어서 방언 기도도 길게 끌지 말고 한 구절씩 짧게, 짧게 끊어 나간다.

가령, 주기도문을 예로 든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끊고, 이어 그 뜻을 마음속에 품고 방언을 하고, 다시 이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끊고 이 뜻을 마음속에 품고 방언을 말하고, 이런 식으로 해 나간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조금씩 길게 끊어도 된다.

이렇게 우리말과 방언을 교대로 하며 기도를 해 나간다.

하루나 이틀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계속해 해 나가는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위해서 별도로 기도를 하기 보다는 평상시에 드리는 기도를 이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제 2단계

제 2단계에서는 방언으로만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냥 소리만 내서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을 품고 그것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아뢰면서 입으로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우리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으로 하는 것이다.

나의 기도 말을 방언으로 바꾸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묵상 기도 할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묵상 기도를 할 때에는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하고 소리는 밖으로 내지 않는다.

이런 묵상 기도의 상태에서 입술을 놀려 방언을 말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내가 우리말로 기도를 하는데도 입에서는 방언이 되어 밖으로 나간다.

필자는 평소 기도를 할 때, 주로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한다.

옆에서 들으면 방언만 하는 것 같지만, 내 속에서는 우리말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 2단계의 훈련이 충분히 되었으면 다음 제 3단계로 넘어간다.


제 3단계

제 3단계는 드디어 내가 하는 방언을 통역하게 되는 단계이다.

기도를 충분히 해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 있을 때, 방언을 짧게 말하고 곧 우리 말 기도로 그 방언을 받는다.

제 1단계에서는 우리말로 먼저 기도하고 그것을 방언으로 받았지만, 여기서는 거꾸로 먼저 방언을 말하고 이어 우리말 기도로 받는다.

이때, 우리 말 기도는 내 뜻대로 내가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심령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대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하다보면 내가 방언을 말 할 때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 될 때가 있는데 그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방금 말한 방언의 뜻이라고 생각해 본다.

유의할 것은 이렇게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반드시 다 그 방언의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떠오르는 생각이 때로는 방언의 뜻과는 다른 나 자신의 생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매우 흡사한 은사이다.

이 두 은사는 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게 주시는 영의 언어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잘못 받은 예언이나 거짓 예언이 있는 것처럼, 방언 통역에도 잘못된 통역이나 거짓 통역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할 때에는 나 자신의 생각을 방언의 뜻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나 자신의 생각이 방언 통역에 혼합되지 않도록, 내 속을 완전히 비우고 오직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방언을 통역하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밑에서 나 자신을 죽이고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바른 방언 해석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오로지 성령의 음성만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하는 방언을 통역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럼 이번에는 남이 하는 방언을 통역하기 위한 훈련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 남이 하는 방언을 많이 들을 것.

2)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합심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기회를 많이 가질 것.

3) 신령한 사람들이 방언을 할 때, 옆에서 그 방언 소리를 들으며 함께 방언을 할 것.

그리고 그들이 하는 방언에 내 마음을 합치시키고 그들의 영과 나의 영이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 볼 것.

이때, 내가 하는 방언을 통역할 때처럼, 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이 하는 방언의 뜻이라고 일단 생각해 볼 것.

이상과 같은 훈련을 수 없이 반복하다보면, 남이 하는 방언을 듣기만 해도 그 방언의 뜻이 내 속에서 통역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참고 사항 몇 가지만 말하자.

신령한 사람이 하는 방언일수록 그 방언을 통역하기가 쉽다.

별로 신령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방언은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명확한 통역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가짜 방언 곧 영이 실려 있지 않고 입술로만 하는 방언은 뜻이 없는 소리일 뿐이기 때문에 통역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남이 하는 방언을 통역하는 훈련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과 늘 가까이 하며 함께 기도하며 그들이 하는 방언부터 통역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차츰 덜 신령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듣고 그것을 통역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의 사항 몇 가지.

 

사실은 남이 하는 방언의 통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사가 없으면 아무리 이런 훈련을 한다고 해도 전혀 통역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방언 통역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방언 통역 그 자체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흥미를 가지고 남이 하는 방언 통역을 위한 훈련을 한 번 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훈련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다소간의 은사는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가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열심을 보시고 그의 작은 은사를 큰 은사로 바꿔 주실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이런 훈련을 하지 않아도 남이 하는 방언이 그 마음속에서 척척 통역이 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훈련을 쌓아야 한다.

은사는 어느 은사건 그것을 갈고 닦아야 더욱 커지고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방언 통역 활용법


왜 방언은 통역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여기서는 방언을 통역해서 그것을 실제로 우리의 기도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유익하게 활용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 내가 하는 방언 통역의 활용법

 

(ㄱ) 가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를 잘 모를 때가 있다.

해야 할 기도 제목은 많지만, 그것 말고 뭔가 다른 것, 꼭 기도를 해야 할 다른 기도 제목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그것을 찾아내고 못하고 있을 때가 가끔 있다.

또 계속 기도를 하고 있는데도 심령이 채워지지 않고 마음속에 갈급함이 계속 남아 있을 때도 있다.

이것은 나의 영이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내가 그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기도를 해도 해도 심령은 계속 갈급해지기만 하는 것은 나의 영이 하고 싶어 하는 기도를 내가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은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나의 마음은, 나의 지성(知性)은, 나의 영의 소원에 반해서 다른 것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그것을 통역한다.

그런 다음 그 통역된 내용을 기도 제목으로 해서 우리말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기도는 내가 나의 영의 소원을 따라 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참으로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기도, 그러면서도 내가 잊고 있던, 또는 미처 생각지 못해서 드리지 못했던 그런 기도인 것이다.    

나는 가끔 산에 가서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그것을 통역해서 노트에 옮겨놓고 그것을 매일 매일의 기도 제목으로 삼는다.

이렇게 함으로 내가 꼭 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그만 놓치고 있는 기도 제목을 찾아내어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ㄴ)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나 방언에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때로는 방언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어떤 계시나 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어떤 계시나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나는 모르고 있으나 나의 영은 그것을 알고 있을 때가 있다.

이때, 이 방언을 통역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계시나 기도에 대한 응답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입에서 방언이 튀어나왔을 때, 그것을 통역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계시 혹은 예언인 경우가 많다.

방언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내 입으로 방언을 말해도 방언만 하고 있으면 그 뜻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통역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그 방언이 통역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생각할 때,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 그 과거의 일들이 마음속에 꼬리를 물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지만, 그 회상을 중지하려고 마음먹으면 순간 마음속의 장면들이 소멸되고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방언도 그냥 방언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지만, 그것을 통역하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부터 그것이 우리말로 변하여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뜻하지 않게 입에서 튀어 나왔을 때에는 그냥 넘기지 말고 그것을 통역해 보도록 해야 한다.

 

(ㄷ)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 사람에 관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거나 환상이 보이거나 할 때가 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긴 가정을 심방해서 그를 위해 기도를 하면 음성이나 환상을 통해 그 문제가 언제쯤 해결될 것이라든가 혹은 참고 기다리라든지 하는 성령의 응답이 들려온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응답 대신 기도가 갑자기 방언으로 바뀔 때가 있다.

이때 그 방언을 통역해 보면 대개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 또는 그 문제와 관련된 어떤 일들, 그 문제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나 그 가족 또는 그 문제 자체에 대한 어떤 숨겨진 일들에 대한 것들일 때가 많다.

말하자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어떤 일들이 그 방언을 통역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어떤 일들을 나의 영에게 알게 하시고 나의 영은 방언을 통해 그것을 말하고 그래서 그 방언을 통역하면 바로 그 문제 해결의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한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자.

삼 형제가 동업으로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한 가정이 이 목사님의 교회로 옮겨 왔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형제간에 다툼이 그치질 않았고 동서 간에도 사이가 아주 나빴다.

목사님은 이 삼형제 내외를 맏형 집에 모이게 해서 예배를 드리고 이들의 화목을 위해 기도를 했다.

한참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입에서 방언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방언을 통역해 보았더니 “아버지, 이들이 서로 속이고 서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 주시고 그래서 이들이 예전처럼 화목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목사님은 그들을 향해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세 분은 천형제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서로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섯 사람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윽고 맏형이 큰 소리를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둘째도 셋째도 모두가 무릎을 꿇고 바로 앉아 눈물 콧물 흘리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회개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세 형제가 서로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회사 돈을 조금씩 유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를 불신하게 되고 서로를 미워하게 되고 서로 속이고 거짓말을 하며 계속 회사 돈을 유용해서 회사가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것이었다.

이들은 회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사님 앞에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다시 옛날처럼 한 마음이 되어 회사를 일으킬 것을 다짐했다.

이어 잔칫상이 벌어지고 삼 형제는 이구동성으로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 어떻게 그것을 아셨습니까?”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니까 알게 되는 거죠.”

이 일 이후 이 목사님은 신령한 목사님으로 교인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방언 통역의 은사는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함께 남을 권면하고 안위하는데 매우 요긴한 역할을 한다.

권면하고 안위하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안위하고 권면하는 은사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예언의 은사나 방언 통역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중 적어도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을 바르게 권면하고 안위할 수가 있는 것이다.

(ㄹ)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만한 영력이 있는 사람 말고는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불가능하다.

또 하나님의 응답(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확실한 응답, 이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응답은 받지 못할 때도 많다.

특히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응답을 받아야 할 때에는 응답이 안 나오거나 처음에는 이 응답이 왔다가 다시 기도하면 저 응답이 왔다가 해서 애를 먹을 때가 있다.

필자도 한 때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교회를 옮기고 싶은데 과연 옳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안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 기도한 일이 있었다. 나는 이 기도를 6 개월이나 했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무릎을 꿇고 앉자 입만 벙긋해도 응답이 오는데 이 교회 옮기는 기도에 대해서만은 아무 응답도 오지 않았다.

응답을 받기 위해 추운 겨울에 삼각산 능력봉을 몇 번 올랐는지 모른다.

이럴 때, 방언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기도의 응답을 방언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나는 방언 통역을 조금은 할 수 있었지만, 방언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는 법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훨씬 후에야 방언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누구한테 들어서 배운 것은 아니다.

체험을 통해 성령께서 그 방법을 알게 해 주셨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응답 받고자 하는 문제를 놓고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방언을 말하고 그 방언을 통역하면 그것이 곧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통역이 정확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통역이 잘 못 된다면 당연히 틀린 응답이 된다.

귀신은 방언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통역은 방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평소 많은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있어야 한다.


2) 남이 하는 방언 통역의 활용법

(ㄱ) 방언을 통역함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계시를 주실 때, 어느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방언으로 주시고 그 방언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통역하게 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실 때가 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가끔 사람의 방언을 통해 계시를 주시는데, 그러므로 그 계시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그 방언이 통역되어야 한다.

이렇게 오는 계시는 대개는 어느 성도의 개인적인 문제나 교회의 어떤 문제를 놓고 여럿이 모여 합심 기도를 할 때 흔히 온다.

이때 방언은 말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중에 방언을 말하며 또 그것을 통역을 하는 사람도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에 이끌리듯 통역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받게 되는 계시의 내용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이거나 그 문제의 원인, 해결 방법, 책망, 명령 등이다.     

(ㄴ) 남이 하는 방언을 듣고 그것을 통역하면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신앙상의 문제점이나 본인도 모르고 있는 영적인 문제점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올바른 권면을 할 수 있게 된다.


방언은 신령한 영계의 문이라고 말했지만, 방언을 말하는 것이 영계를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그 영계의 소리까지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가 있을 것 같다.

또, 방언을 말하기만 하는 것을 TV 대담 프로의 화면만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방언 통역을 하는 것은 그 대답 프로의 말소리까지 함께 듣는 것이라고 할 수 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방언 통역하기를 힘써야 한다.

남이 하는 방언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내가 하는 방언만이라도 통역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방언을 말하기만 하고 통역을 하지 못하는 것은 소리가 안 들리는 TV 대담 프로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