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시대 종교들

2008. 12. 27. 10:09교회사자료/10.세계사

그리스-로마시대 종교들

 

고대 그리스 종교

고대 그리스의 종교에는 교의가 없었다. 비록 어떤 행동들은 비종교적이어서 초자연적 권세들에게 불쾌한 것으로 판결되었지만 아테네나 제우스를 숭배하는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여야 하는 도덕적 규약이나 제도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세주의는 주류를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숭배되고 있던 신들은 일상생활의 일들을 관장하던 신들이었고, 더욱 이 종교는 본질적으로 집단적 또는 공동체적 문제였다.


서사시대 : 호머

호머는 그리스 전통의 토대에 서 있으며 고대시대의 말기까지 교육과정에서의 그의 지대한 영향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의 헬라종교사상에 있어서 그가 근본적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적 문화에 있어서 호머의 영향은 실로 지극히 큰 것이었고, 헬라 발달에 있어서 호머 종교적 사상의 위치는 유대와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성경이 차지하는 위치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호머는 모세와 같은 신앙인이 아니었고 그의 시 또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은 아니어서 문화적 배경은 주로 세속적이었다. 호머의 글들은 내용이 풍부한 편이었다.

신-신들은 스칸디나비아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민족의 신들보다 더 신인동형적이었다. 신들은 비록 다른 민족들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지만 모든 민족에 속하는 것으로 이미 생각되었다. 신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제우스 주의에 신적 사회같은 것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제도의 최상의 위치를 차지했다.

호머에 나오는 신들은 후일 헬라역사에 나오는 신들과 같았는데, 단지 디미터와 디오니소스는 거의 나오지 않으며 나중에 가졌던 중요한 위치를 이때는 갖지 못했던 차이가 있다.

도덕성-신들은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에는 도덕적 규칙을 보호했다.

종교행사-호머는 주인공이 어떤 적과 싸우는 영웅시대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예배에서는 은총을 보답으로 받거나 악운을 제거하기 위해서 제물을 바치며, 죽은 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관례같은 의식에서 바치는 것은 악운을 두려워하거나 축복을 원해서가 아니라 죽은 자의 필요를 채워줌으로 그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영혼과 내세-올바르게 장사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없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잘못 놓여진 사람"으로서 방황하며 항상 평안치 못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가 이 세상에서 했던 일을 계속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호머에서는 이 세상에서 중요했던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서도 계속 중요했다. 그 영웅들은 기억되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헤시오드

헤시오드는 그리스 전통에의 중요성과 시간상 호머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글들은 여러면에서 호머의 시들과 정반대였다. 호머는 미케네 시대 말기를 묘사하고 있으나, 헤시오드는 그의 당대의 과두정치를 다루고 있다. 호머의 무대는 헬라 세계 전체였으나 헤시오드의 무대는 그의 고향인 보오샤라는 지방이었다. 호머의 시에서 저자는 무대 뒤에 숨겨져 있으나 헤시오는 개인적이며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썼다. 호머는 신화를 서술(서사시), 헤시오드는 교훈적인 시를 썼다. 도덕성은 호머에서는 부수적이었으나 헤시오드에서는 강하게 강조되었다.

정의-헤시오드는 정의와 일이라는 두 가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는 인간의 도덕적 의무였다. 정의라고 번역된 단어는 응보의 정의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악한 행위를 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원-헤시오드는 또한 죄의식, 불순, 그리고 사물의 이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신들의 탄생』은 헬라인들이 산출해 낸 순수 종교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영웅들-영웅숭배가 문학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헤시오드에서이다. 영웅이라는 말은 인간으로 존재했었으나 죽고 난 후에도 이 세상에 있는 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로 남아 있기 때문에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부르는 관례적 경칭이었다.


고풍시대

신전들-최초의 그리스 신전들은 고풍시대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크지 않았고 특별한 경우들에만 사용되었다. 비록 그리스의 신들이 우주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숭배는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었다.

종교행사-로마와는 달리 인구의 많은 비율이 종교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집단의식에 참여하면 신들이 자기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개인적인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동은 봉헌예물과 정화였다. 재물 없이 신에게 소원을 말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했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에는 선물이 요구되었다. 헬라종교는 농업주기를 토대로 한 것이고, 축제의 대다수는 농업에 연관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인간의 삶이란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 종교가 강한 시민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영웅 숭배였다.

신들에 대한 경향-델피의아폴로의신탁은식민지화,종교법의발달,그리고의식적정화에큰영향을끼쳤다.법률들이이기간동안에문자로표기되었고,국가차원의숭배는그들의법적규범의일부였다.아폴로는법,질서,도덕성의강조를초래했고삶의헬라적이상의표본이되었다.

디오니소스-디오니소스 숭배는 B.C 7세기에 헬라세계에서 확립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관련지어졌지만 식물과 다산의 일반적 신이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무아지경적인 광란이 그 특색이었다. 그러므로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는 헬라의 경험의 양면, 즉 이성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르페이즘-오르페이즘은 B.C 6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하나의 정체나 조직적 교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관심과 비슷한 생각으로 특정지어질 수 있는 운동을 대표하는 것이다. 오르페이즘은 디오니소스 숭배에 대한 개혁운동으로서 디오니소스 숭배의 중심 되는 의식이었던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동물을 토막내어 먹는 의식을 악한 타이탄들의 범죄로 변형시켜서 보았다. 기독교의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오르페즘의 부활이 오르페우스 찬송가에 의해서 증거 된다.

정통 또는 초기의 오르페이즘 문학의 많은 성격이 일반적 헬라전통과는 차이점이 있다. 호머에서의 영혼은 뚜렷하지 않고 가려진 개념인데 비해 이 문학의 문맥에서는 영혼은 현재의 육체적 삶의 전후에 존재하는 인격체를 나타내고 있다. 오르페즘은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는 인간 존재에 관련된 죄의식을 반영한다.


고전 시대의 붕괴의 징조들

B.C 5세기와 4세기 초는 그리스 종교에 있어서 가장 외적으로 화려한 시기였다. 고전 종교의 가장 위대한 기념비들이 창조되었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고전시대에는 전통적 헬라 종교를 붕괴시키게 되었던 추세들이 시작되었다. 국가의 주요 신들보다는 하급 신들과 영웅들을 찾는 현상이 증가했다. 새로운 종교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확장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의술의 신 Asclepius 숭배였다. 루스드라에서의 바울의 경험(행 14:8 이하)은 예전의 다신교적 종교활동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고대 로마 종교

로마인들이 초기에 문화적 접촉을 가졌던 주된 민족은 잠시 로마를 지배했던 에트루이라인Etruscans들이었다. 그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로마인들이 그들에 대해 한 말과 고고학적 유물들에서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들, 종교적 신상들, 그리고 예언하는 방법들이 신들을 삼인조로 묶는 관습과 함께 에트루이라인들에게로부터 인수되었다.


신들

대부분의 초기 로마신들은 아무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우멘'이라는 단어로 특징지어 진다. 그들을 가리키는 또 다른 라틴어는 '제니우스'였는데, 그 뜻은 "장소의 영"이라는 것이다. B. C 3세기 말부터 로마신들과 그리스신들의 완전한 동일화가 있었다. 이집트에서처럼 제우스가 동시에 암몬인 식이 아니라 제우스가 바로 주피터였다. B. C 500년경 캐피톨린 언덕에는 주피터, 미네르바와 주노를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다. 신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되었다. 로마인들은 신들 자신보다는 신들의 행동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신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생각의 특성은 신들의 역할과 관계에 대해 조심스럽게 정의를 내리는 것과 그들에 대해 의무감을 갖는 것이다.


종교인사

국가는 가족과도 같았다. 업무들은 콜레기아라고 알려진 여러 종교활동을 책임졌던 작은 그룹들에 의해서 다루어졌다. 폴라맨은 제사장을 가리키는 옛 말로 전담 사역자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폰티펙스는 제사장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특정한 날에 의식을 주도했지만 전문직은 아니었고 분류된 계급층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주로 신들에 관련된 일들에 대한 전문가들이었다.


종교행사

고대세계에서는 신들이 그들에게 제사된 음식과 음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일반적 생각이 있었다. 특히 로마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제사는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누멘의 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연중행사 의식은 국가에 의해서 행해졌다. 국민들의 책임은 단지 금지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국가와 공식적인 종교와의 연관은 로마의 신성한 경계인 포메리움에서도 볼 수 있다. 승인을 받은 종교만 그 안에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고, 오직 거기서만 시민의 길조(예언)를 취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탄원이나 감사의 날들이 공포되기도 했다. 그리스인은 제사를 드릴 때 머리를 가리지 않았으나 로마인들은 가렸다.


로마 종교의 특징

로마종교는 집합적이고 법적이었다. 그리스 도시에서는 모든 종교 활동의 주기에 걸쳐서 개인이 다 참여하였지만 로마에서의 주도권은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었고, 개인의 참여는 제한되어 있었다. 종교는 오늘날의 법처럼 전문가들이 다룰 문제였다. 그래서 일반 국민의 종교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위기를 만났을 때는 새로운 종교가 자주 소개되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종교는 가톨릭 교회와 희랍 정교회의 발전에서 분별될 수 있다. 전자에서는 입법, 사법적 정확성, 조직의 발달, 제사장직의 권력독점, 그리고 의식과 올바른 절차의 강조가 발전되었으며, 후자에서는 서약의 더 큰 비중, 민중의 자발적 신앙심, 그리고 교리에 대한 사색적 관심이 발달되었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의 종교 : 일반적 특성

헬라시대와 초기 로마시대의 종교가 일률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일반화는 시킬 수 있었다. 로마제국시대에도 종교의 본질은 헬라적이었다. 로마의 가장 큰 공헌은 보안을 이룩하고 사람들을 한 국가로 단합시킨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이방종교는 배타적이 아니었다. 신들의 동일화는 신들의 숫자를 줄이게 되는 경향이 있었고 일신론적 사상을 가져오는데 공헌했다. 일신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은 이교도 저자들의 용어에는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꾸준하게 사용되는 적은 거의 없었다. 고전 헬라 종교의 신의 인간화는 힘의 숭배로 인해 약화되었다. 반면에 미덕이나 이익을 신격화하는 현상도 있었다. 작은 신들과 중간급의 권세들은 귀신들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종교의 귀신화가 있었다. 운명의 힘은 제국의 초기에 매우 강하게 느껴졌다. 운명에 대한 믿음은 별들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과 흔히 연결되어서 점성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술은 인간과 우주적 권세들과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인기있는 표현이었다. 종교의 단체적 또는 사회적인 면은 그리스-로마시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도덕성은 종교와 친밀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가정 종교와 지방 종교

그리스-그리스 가정의 문 옆이나 정원 한 가운데는 그 짐에 거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제우스 헤르케이오스에게 바치는 제단이 있었다. 이런 상징물들을 소유하고 그에 따른 종교적 활동을 함으로써 그리스 신민임을 알아볼 수 있다. 제우스 헤르티아와 연관되어 제우스 크테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집에서 숭배되었다. 난로는 그리스 가정 종교의 중심이었다. 식사는 종교행위로 시작하고 끝났다. 그리스인들은 시골을 산, 숲, 나무, 돌, 강, 샘에 귀신이나 영들이 살고 있는 곳, 초자연적 힘으로 가득 찬 곳으로 생각했다.

로마-폼페이는 1세기 로마의 가정 종교가 계속 되었다는 확고한 증거를 제공한다. 로마인의 집 출입문 근처에는 레어스를 모신 신당 역할을 하는 벽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정과 각 식구들을 보호해 주고 지켜주는 영들이었다. 매 식사 때마다 소량의 음식이 라라리움(가족신당) 앞에 놓여졌다.


민간종교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종교는 사회의 기초였다. 종교는 공적인 것이었고 사회체제의 한 부분이었다. 민간종교는 그 형태에 있어서 과거로부터 기독교가 태어난 기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헬라시대는 흔히 전통종교가 쇠퇴한 시대로 여겨져 왔다. 그와 함께 많은 민간종교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애국적 종교를 퇴치하는 대신 로마제국의 종교는 그들과 연관을 맺었다.


지배자숭배

민간종교의 절정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지배자 숭배에서 나타났다. 지배자 숭배는 은혜를 끼친 자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시작되어서 경의와 충성의 표현이 되었다. 이것은 지배자에게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문제였다. 즉 신에게 구하던 것같은 초자연적인 도움을 왕에게서는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배자 숭배의 종교적 의미는 주권을 가진 가문의 야심을 충족시켜 주고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는 역할을 했던 사회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중요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정치적 번영은 진실한 종교적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지배자 숭배가 초기 교회와 이교도와의 갈등의 핵심점이 되기도 했다.


개인종교

기독교 시대 초기 몇 세기에는 특정의 심리적-종교적 필요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운명 앞에서의 무기력함, 내세에 대한 불확실함,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들이 종교에의 신비적 입문, 마술, 사적종교단체, 그리고 계시문헌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도 했다.

신탁-유행했던 종교적 활동 중 하나는 유명한 신전에 순례여행을 가서 그곳의 신탁을 상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인들 뿐 아니라 도시들도 신들의 뜻을 결정하는데 사용하는 흔한 방법이었다. 위대한 신탁의 장소들은 민간종교의 일부였다. 헬라시대에는 신탁들은 더 이상 정치적이나 종교적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으나 계속 지역적인 종교문제로는 상고되었다.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해 상고하려고 개인들도 계속 신탁으로부터 상담을 구했다. 이교도주의(3-4세기)의 마지막 시기에는 신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얻기 위해 신탁들을 상고했었다. 많은 신탁의 장소가 있었고 그중 델피는 아폴로의 신탁의 대표적이었다. 델피의 신탁은 헬라시대 후기와 로마시대 초기에 쇠퇴하고 있었으나 신탁이 완전히 쇠퇴하기 전이었던 2세기에는 다시 부흥하기도 했다.

꿈과 점-꿈은 신의 명령을 받는 통로로서 신유의 종교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점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을 예견하고 예고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표적을 보기 원하는 소망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

신유 종교들-헬라 세계에는 여러 치유의 신들이 숭배되었었다. 암피아라우스, 아스클레피우스가 바로 이들이다. 신유신당을 방문할 때 환자는 자신을 신성한 샘에서 정결하게 하고 제사를 드렸다. 당시 풍습에는 신이 치유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선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치유신전에서의 치료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나 만짐으로 된 치유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마술과 저주

마술이란 특수하고 비밀스러운 지혜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초자연 능력들을 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비성서적이고 과학과도 다르다. 모방적인 것과 전염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마술이란 단어는 페르시아의 제사장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고, 그리스어에서 외래어로 사용되었다. 마술의 근본 사상은 올바른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신들이나 귀신들이 무언가를 해주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술은 다른 곳에서는 이미 버린 종교의 오래되고 원시적인 면으로부터 나오는 사상들을 계속 사용했다.


저주와 맹세

저주의 특별한 종류는 성전에 걸린 죄의 고백이었다. 범법자가 자기의 잘못, 특히 의식적 개념을 소홀히 한 것으로 인해 자신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맹세는 사회의 근본 그 자체로서 위정자들, 재판관들, 시민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귀신과 미신

다이몬(귀신)이라는 말은 인간을 동반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세력을 가리킨다.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는 귀신이란 말을 기독교 복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악한 존재의 개념으로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점성학, 점성종교, 운명

점성학은 과학적이기도 했고 종교적이기도 했다. 별들에게 신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천문학에다 신비적인 요소를 소개했다. 점성학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은 헬라시대에 발전되었다. 점성학의 개념과 상징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점성학적 믿음에 저항적인 유대교도 점성학에서 나온 비유적 표현들의 영향을 받았다. 점성학은 절대적 결정론의 궁극적인 정당화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과율을 철저히 그리고 예외없이 적용시켰다.

운명의 여러 면들을 나타내는 말로는 호머가 쓴 모이라(개인의"합당한몫")를 비롯해서 투케(운수, 우연), 헤이마메네(점성학적 결정론의 의미에서 운명)등 세 개가 사용되었다.


죽음과 내세

죽은 자와 관련된 고대 풍습은 죽음은 오염을 가져왔고 정결화를 위한 행동을 필요하게 했다는 것과 송장을 묻지 않은 채 내버려두는 것은 영혼 위에 좋지 못한 영향을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죽은 자의 숭배는 "예배"는 아니었지만 죽은 자가 기억에 남도록 하기 위해서와 죽은 자의 안락과 상쾌함을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화장-화장은 B. C 400년부터 A. D 1세기까지 로마세계에서의 정상적인 풍습이었다. 헬라세계는 매장과 화장을 함께 행했다. 셈족의 지역에는 주로 나무관에 넣어서 묻는 매장이 일반적 관습이었다.

내세-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정의되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외에 고대세계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인들이었다.


헬라의 신비의식과 동방종교

신비의식은 본래 그리스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많은 동방의 종교들이 헬라 세계에 들어올 때 신비의식의 비방 전수를 받아들였다. 헬라인들은 미스테리아나 텔레테라는 말을 "신비의식"과 다른 신성한 의식들 사이에 두는 구분을 두지 않고 사용하였다. 헬라인들은 매년 또는 주기적으로 비밀스럽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수행되었던 많은 의식을 가졌다. 신비의식들은 지방적인 것과 전세계적인 것으로 구별될 수 있다. 기독교 시대 시초에는 어떤 것들을 굉장히 오래 많은 지방 신비의식들이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번성하였다. A. D 1세기에 그 범위가 전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신비의식은 디오니소스의 신비의식과 동방신들, 특히 이스시의 신비의식이었다.


그노시스, 연금술 문헌, 갈대아 신탁

그노시스주의-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그노시스교의 형태는 이방사상, 유대교, 기독교의 모든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그오시스교의 요소들은 신피타고라스주의나 중간 플라톤주의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서 일종의 헬라적 추론들이 합하여 그노시스교를 발생시켰다. 기독교 사상의 뼈대에 있어서 결정적인 그노시스의 공헌이라고 주장되어 온 주요 기독교 이전의 특징은 "구속자 신화"였다. 이 견해에는 초자연적 존재인 우주적 인간은 구원받은 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구로 내려왔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의미가 기독교에서 설명되었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기독교 이전에 이러한 구속자 신화를 포함하고 있는 문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노시스주의는 악의 근원과 구속의 방법으로서의 "영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반우주적"인 입장을 표명했고, 물질세계에 완전히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그노시스주의의 편견은 악의 문제에 대한 편견,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느낌, 우주의 비밀에 대한 특별하고 친밀한 지식에 대한 열망(지식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 이원론(심리적, 윤리적 이원론과 물질세상과 천상의 영적 세상의 이원론의 혼합물이었다. 이와 상응하는 것이 숨겨진 신과 창조주 신과의 구분이다), 우주론(플레로마 또는 신의 세계는 제1원리로부터 방사 또는 퇴화한 존재들의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론(영적인 존재, 정신적인 존재, 물질적인 존재로 발렌티누스주의의 세 계급을 말한다), 과격하게 이미 이루어진 종말(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인 나라), 윤리적 의미로 영적인 자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왔던 것처럼 도덕적 법규로부터 자유로왔다.

갈대아 신탁-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 때 신적 계시들에 근거했다고 주장되는 헬라 구절들의 모음이다. 후에 신플라톤 학파의 "성경"이 되었다. 그 목적은 마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노시스적 구조의 일부 요소를 철학적 옷을 입혀 제공한다. 이것은 정화와 의식을 통해 갇힌 영혼들을 해방시켜 준다.


 

유일신론쪽으로 기울어지게 돤 경향은 철학자 제노파네스와 안티스테네스이다. 그리스-로마의 이방종교에 있어서의 유일신론은 단 하나의 경향으로 남았다. 유일신은 모든 신, 또는 많은 신을 하나의 신 아래 둔 것이거나 하나의 철학적 원리였다. 태양신학의 발생은 고대 말기의 이방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발전이다. 태양신학은 스토아 철학과 태양이 혹성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당시의 대중 점성학의 혼합의 결과이다. 주로 태양숭배는 지식층과 지배자 계급의 종교로 남는다. 그러나 태양숭배의 어떤 점들은 대중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유대교

유대역사-페르시아 시대-고레스와 분산-페르시아 시대는 팔레스틴 유대인의 역사에 있어서 불확실한 시대의 하나인데, 이는 성경 외의 자료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성서시대 이후 유대교의 기반이 이때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페르시아 지배자들의 보호 하에 바벨론 귀양으로부터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업적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선민의 계속적인 존재에 있어서 남왕국 생존자들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헬라시대-알렉산더의 도래-마케돈의 알렉산더 대왕은 B. C 332년에 팔레스틴을 정복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앞에 나타나 그 앞에 순복했을 것이며, 알렉산더는 "그들의 선조의 율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알렉산더의 팔레스틴 진입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헬라화 과정을 가속화시켰다.

톨레미 왕조의 지배-이 시기는 유대인들에게는 힘든 시기로 나타난다. 정치적으로는 평화적인 시기였는데, 이는 애굽과 시리아간의 불화가 내면적으로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왕조 동안에 종교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일이다.

실루쿠스 왕조의 통치-예루살렘의 헬라문화 과정은 야손 아래서 박차를 가하였다. 이 왕조는 돈이 필요했고, 부유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소유하기 원했다. B. C 167년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종교의식을 금하였다. 안식일과 절기들이 더 이상 지켜지지 못했으며, 음식에 관한 율법은 파기되었고, 할례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았다. 167년 말에는 번제 제단의 상단에 조그만 제단을 세웠고, 유대교에 대한 지독한 모욕으로서 그 위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마카비 시대-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어긋나는 칙령들을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반발하였다. 그 반항은 예루살렘을 떠난 신앙심이 강한 자들에 의해서 확대되어 갔다. 제사장 맛디아는 이방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고 나아가 왕실의 요구에 부응한 유대인과 관원을 죽였다. 그의 아들들이 산중으로 도망하여 선조들의 율법을 열심히 사모하는 자들을 모아 조직화된 저항운동을 하였다.

로마정권시대-로마정복-헤롯 대왕-B. C 40년에 원로원들에 의해 왕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능력있는 왕임을 증명했다. 농업과 상업을 통해 왕국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이러한 자금들을 사치스러운 건물의 건축에 소비했다. 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엄청난 상전재건이었다. 그 건축은 예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훈련된 제사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종교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그의 혈통은 에돔인이다. 그는 유대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극도로 자신의 지위를 경계했다.

초기 총독들-초기 총독들 중 가장 알려진 인물은 본디오 빌라도이다. 그는 총독들 중 처음으로 유대인들에 대해 적의를 품은 자이다.

후기 총독들-후기의 총독들은 모두 좋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초기 로마제국의 유대인

팔레스틴이나 외국에 살든 초기의 제국시대에 살았던 유대인은 헬라문화의 충격을 경험했다. 헬라언어, 문화, 교육, 그리고 습관들이 알려지고 다소간 받아들여짐에 따라, 유대교는 보편주의와 개인주의의 경향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헬라와 로마의 문화적인 경향에 대하여 다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자기들의 고유함을 지켜나갔다. 그로 인해 유대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자기들의 종교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로마정부의 신상들을 예배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신들의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삶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군복무 면제, 안식일 준수의 보호,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성전세를 운반하는 사람들의 보호 등이 그것이다.


당파들과 분파들

바리새인-이 말은 "분리된"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parush"에서 유래되었다. 그들은 마카비 반란 당시에 하시딤으로부터 부상당한 단체들 중 하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힐카누스가 동시에 왕과 제사장이 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자신의 율법 해석을 온 나라에 강제 적용시키려고 한 정치적 당파였다. 그들의 체계의 기둥은 "토라와 전통"이었다.

사두개인-이 말은 그 유래가 확실치 않지만 그 단어는 일반적으로 다윗 때의 제사장이나 아니면 후기의 사독과 연결된다. 그들은 부유한 제사장들 및 귀족 계층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정치적인 위치와 생존에 관한 실제적인 감각은 특정한 헬라문화의 영향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바리새인들의 의견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로마제국이 들어선 후 그들은 지배권력과의 협력을 꾀했으며 자신의 현재상태를 유지하여 권력과 영향력을 보존하려고 했다.


쿰란 공동체, 에센인들, 테라퓨테

유대교 내에 이미 알려진 쿰란 공동체는 에센인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쿰란 공동체는 투철한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살았다. 그들은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을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기다리면서 성경연구에 전념했다. 공동체의 식사는 신성한 성격을 띠었고, 그 절차는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공동체는 예루살렘 제사장직에 의해 준수된 태음 태양력을 따르지 않고, 주빌리서와 에녹 1서의 것과 동일한 태양력을 따랐다. 신약성서의 인물 중 쿰란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인물이 세례 요한이다. 요세푸스는 요한의 세례를 쿰란의 세정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와 쿰란의 세정식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로서 단 한번에 끝나지만 쿰란의 세정식은 매일 행하는 정결의식이다. 쿰란의 세정은 본인 스스로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회원이 되기 위해서 회원 서약을 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이 근원은 구약의 정결함을 씻는 관습에서 유래하였다. 나아가 예수님과 쿰란과의 관계성은 거의 없다. 예수님은 성전과 사람들의 종교의식을 저버리지도 않았으며, 금욕주의를 실천하지도 않으셨다. 안식일에 관한 이해도 쿰란과는 달랐다. 성경은 요한복음이 가장 헬라식으로 쿰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대 교회는 여러 면에서 쿰란과 유사한 것이 있다. 떡과 포도주에 축사하는 것과 교회의 조직이 그것이다.

열심당원-열심당원이라는 이름은 비느하스 때부터이다. 요새푸스에 의하면 A. D 66년 일어난 폭동과 관련해서 그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들은 혁명주의자들 중에도 극단주의자들이었고, 폭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사마리아인들-이들의 근원은 열왕기 하 17장에 묘사되었다. 신약에 나오는 사마리아 공동체는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이방종교와의 융합주의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신약시대까지 유대인들은 이들을 이방인으로 보았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유대인들과 동일한 영향을 받았다(행 8장의 시몬).


신조들과 관습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신조들보다는 윤리적인 원리들을 강조해 왔다. 게다가 고대인들은 한 사람이 유대 백성에 속한 사실을 인친 할례, 안식일에 쉬는 것과, 종교적 절기를 준수하는 것 등을 기준하여 식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확신들과 태도들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은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 토라들이었다.


조직과 제도

성전과 제사장직-성전-순례 절기들의 목적지인 산헤드린의 소재지, 그리고 희생제를 드리는 장소인 성전이 세상의 모든 유대인들의 초점이었다. 성전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 돔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 근처에 위치했다.

제사장-제사장들은 24반차로 나뉘어졌는데 각 반차는 한 번에 한 주간씩 일년에 두 번 성전의 의식을 거행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 순례 축제일에는 모든 반차가 대기해야 했다.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바깥에 거주했고, 자기의 반차가 임무를 수행할 때에만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 제사장과 전국에 퍼져있던 평이한 제사장간에는 엄청난 사회적 격차가 있었다. 성전에서의 구체적 임무는 제비를 뽑아서 부여했다.

산헤드린-이 말은 헬라어 "synedrion"의 히브리어 음역이다. 신약시대 예루살렘에 있던 산헤드린은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지파, 거짓 선지자, 대제사장에 관련된 경우를 판결했다.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을 주도했다.

사회조직-유대인의 사회조직은 과두정치, 민주주의, 전제정치의 성격들을 보였고, 종종 이 세 가지의 측면들이 함께 기능을 발휘했다.

랍비들-임명된 학자를 일컫는 전문용어이다. 이들은 하나의 직무에 임명되었다. 유대의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법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회당-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다 신빙성이 있는 이론들은 율법연구와 독서를 위한 모임들이 포로기 또는 포로기 이후에 있었던 것으로 언급한다. 고고학적인 증거는 B. C 3세기부터 애굽에 회당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회당은 유대인의 공동체적,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생활의 중심이었다. 회당의 예식에는 기도와 성서연구라는 두개의 중심이 있었다. 회당예식의 기본구조는 현대에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어디에서건 10명이 회당을 조직하기를 원하면 회당을 조직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누구나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설교하거나, 또는 기도들과 셰마를 인도할 수 있었다. 어떤 특수층도 예식의 집행을 독점할 수 없었다.

 

고대 세계 속의 기독교

 

초기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고고학적 유물

명문(銘文)

갈리오의 델피 명문-클라디우스 황제의 담서를 포함한 명문의 일곱 단편들이 그리스의 텔피에서 발견되었다. 클라디우스의 26번째 황제 선언은 A. D 51년 말과 8월 1일 사이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다른 자료들을 통해 안다. 그 당시 갈리오는 아가야의 총독이었다. 원로원이 선출되는 지방들의 총독들은 7월 1일 경인 여름에 관직에 취임하고, 통상적으로 일년을 근무하기 때문에, 갈리오의 총독 임기는 51년 여름에서 52년 여름 사이였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시기를 50년 초로 볼 수 있는 증거이다.


파피루스들

알렉산드리아인들에게 보내는 클라우디우스의 편지(A.D 41)-알렉산드리아에서 정치적인 권리들에 대한 헬라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불화에 대한 클라우디우스의 처결(필로가 인솔한 외교단을 칼리굴라의 통치 하에 있는 로마로 파견하게끔 만든)은 1세기 유대역사에 대한 엄청난 중요함을 지니며, 일반적으로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의 법적 지위에 대한 암시들을 지닌다.

기독교 파피루스들-파피루스들은 기독 문학상 가장 초기의 유물들을 제공해 주었다. 현재 신약성서의 부분들을 포함한 것으로서 그 연대가 3세기까지의 여러 파피루스들이 있다.


화폐

초기 로마 제국의 풍부한 화폐들은 신약성서와 그 역사적인 배경과의 수많은 접촉점들을 가져다 준다.

초기 기독교의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존재한다는 주장

2세기 말엽 또는 약 A.D 200년 이전에는 확실하게 연대를 산정할 수 있는 기독교의 고고학적 유물들이 없다는 사실을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인다. 확실히 1세기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약간의 유물들이 있지만 그것들의 기독교적 특색은 모호하다.

Rotas-Sator 사각 연어-대표적인 예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의 시렌스커의 메소포타미아의 두라 유로푸스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두 개는 A.D 79년 이전의 것이 틀림없다.

  그 의미는 분명치 않다. 그것이 기독교와 연관되는 것은, Pater        Noster(라틴어의 주기도문의 "우리 아버지")라는 철자가 'A'와 'O'     중의 남는 철자를 각 십자가의 가로 막대에 놓고, Noster의 'N'이     두 십자가의 교차점을 형성하는 식인 십자가 형태로 두 번 재배열     되는 것에 의존한다. 이것은 1세기에 라틴어로 된 주기도문이 예배    시에 사용되었다는 것과 폼페이가 파괴되기 전에 거기에 기독교 공    동체가 존재했었다는 것과 기독교에서 그렇게 일찍 십자가가 사용되었다는 것, 그리고 헬라어의 알파와 오메가를 'A'와 'O'로 나타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헤르쿨라네움에 있는 십자가-헤르쿨라네움(A,D 79년 베수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매몰됨)에 있는 이층으로 된 공동주택에는 한쪽 벽이 흰 석고로 덮힌 방이 있었다. 그 석고 벽에는 높이가 0.43미터, 너비가 0.365미터 되는 라틴 십자가의 형체가 새겨져 있었다.

탈피옷(Taopioth:예루살렘)의 공동 매장지-예루살렘의 탈피옷 교외의 주변에 있는 무덤 단지로부터 발견된 공동 매장지는 기독교가 탄생한 나라에서 그것에 관한 가장 초기의 증거를 제공할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이 매장지는 1세기 중엽의 것들이다.

베드로의 무덤-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의 바실리카의 아래를 판 발굴 작업들과 베드로의 것이라고 주장된 뼈들의 발견으로 인해 방대한 참고 목록이 만들어졌다. 2세기 후반부터 바티칸 언덕에는 베드로의 순교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베드로의 무덤자리는 아니었다.


기독교인에 대한 이교도들 태도

2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 상류층의 문학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미신으로 서술되었다(비교 행 25:19). 당시 다른 모든 민족들의 적이라는 비난이 유대인들에게 적용되었고 그런 비난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사회활동에 빠지는 유대인들과 동일한 성격 때문에 그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인 문제 외 천재지변에 대한 편리한 속죄양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이교도들은 단지 "몸을 먹는 것"과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사랑의 교제" 그리고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을 듣고서 그릇된 개념을 갖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법적 지위

처음에 로마 정부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법적인 보호(종종 사회적인 비난도 함께)를 공유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여러 법적 장애들과 함께 시작했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이 온 것도 또 기반을 둔 것도 반역죄에 해당되는 고소로 로마당국에 의해 처형된 자로부터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관헌들 간에 적대감은 아니더라도 혐의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는 그것이 가르쳐 지는 곳은 어디건 로마와 지방 당국들이 좋게 간주할 수 없는, 소동과 폭동들을 야기 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기독교 수용를 저해하는 것들

이교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주된 방해는 전통 그 자체와 사회구조였다. 기독교의 법적 지위는 단지 상황의 외부 증세였다.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게다가 정치적인 것 등이 다신교적 전통과 함께 뒤섞여 있었다. 교회는 고대사회에서 많은 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겪었던 비난에도 동참해야만 했다. 유대인들의 배타주의, 유대인들의 특권에 대한 거부감, 유대인들의 야망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유대인들의 충성심에 대한 후기의 의혹에 대한 이방인들의 혐오감 등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태도에도 영향을 까쳤으며, 또 어떻게든 간에 이러한 특징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가되었다.

 

종교적 경쟁 상대들

유대교-유대인들에 대한 이교도의 부정적인 태도들 그들의 배타주의와 다른 종교들을 관용하지 않는 점, 이상한 습관들(안식일), 혐오스러운 관습들(할례)에도, 그리고 바코흐바의 반란 이후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경향이 유대인들 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이교도 회심자들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기독교의 막강한 경쟁상대로서 계속 존재했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에 경쟁한 번역판(Version)들-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우스주의에 의한 교리상의 논쟁들은 교회의 "주류"를 어지럽혔다. 이런 모든 불화합은 기독교의 전파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기독교의 여러 형태들은 이방종교와 철학과 기독교의 복음이 혼합된 결과일 뿐 아니라, 유대문화의 기반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유대적 기독교-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유대적 틀을 전혀 깨지 않았다. 고대 세계에서의 기독교 개관은 이 기독교의 변형에 대해 다소 주목해야 한다. 유대적 기독교인의 역사가 분명치 않고 자료들도 제한되어 있지만, 그들이 신약시대 이후에도 존속되었음은 확실하다. 교회가 압도적으로 비유대적이 됨에 따라, 어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보다 커다란 이방적인 기독교에 흡수되었다. 다른 유대인 신자들은 유대식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 갔고, 이방적인 기독교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서, 이단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들은 여러 영향에 지배를 받았으며, 비록 신약시대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계보적인 연속성이 있을 법도 하지만, 신앙에 대한 동일성이 있었다고는 가정할 수 없다. 뚜렷한 경향들이 일어났고, 일반적인 용어들로 그 성격이 부여될 수 있다.

영지주의적 경향들-영지주의적 사상들은 몇몇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요한 사도와 동시대의 사람인 세린투스처럼 기묘한 사람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유대적인 사상들(천년설)을 주장했지만, 또한 가현설의 사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근본적인 하나님과 창조간에 영지주의적인 분리를 만들었다.

화해하는 경향들-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준수하며 살면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했다. 그 외에도 배타적이고 분파적인 특색을 지진 에비온파가 있다. 그들의 이름은 시편과 쿰란, 그리고 아마도 신약성서에 반영된 용법으로써 주님을 신뢰하는, 핍박받는 미천한 자들을 언급하는바 "가난한 자"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였다.


기독교에 유리한 요인들

외부적 상황-로마 제국에 의한 단일적인, 안정된 정부의 축복들은 기독교의 파급과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외부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축복들은 특히 여행의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기독교에 기여한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은 헬라어의 파급이었다. 헬라어는 로마제국의 범제국적인 언어였다. 이와같은 공통적 지시의 틀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헬라식 유대교-히브리 성서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는데(70인역), 이것은 구약성서의 신앙을 헬라어 사용자들에게도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성경적인 사고에 대한 개념적인 번역을 현실에 대한 헬라식의 관점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헬라 세계에 살던 유대인들은 성경적인 종교를 변호함, 그것의 미덕을 선전함, 그리고 그것의 중심적인 확신들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종교적 탐구-이미 로마 제국에 있었던 종교들,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그 시대의 종교적인 관심을 증명하는 경쟁적인 종교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도덕적인 처지와 기존의 종교들에 만족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전파에 대해 수용적이었다.


기독교만 지녔던 유일한 특성

기독교는 그 자체를 신의 계시로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활동으로 인한 결과라고 제시한다. 기독교의 권위는 그 가르침과 관습들의 절대적인 독창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를 위해 신이 행하신 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 독창성을 최소화시켰다. 기독교의 주장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인지 아닌지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독창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역사적인 조사에 의해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물론이요 그 가치도 그 독특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진실로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기독교의 시작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셨으며 그것의 핵심을 지속시키신다. 이것은 역사적인 의미상 그렇다. 그분의 삶과 교훈들이 상고의 한 부분이나 혹 다른 부분과 얼마나 많이 일치하건 간에, 예수님 그분의 인상과 행함은 기독교에게만 있는 독특함이다.

기독교의 진실에 관한 주장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가와 같은 그분의" 인성과 그 사역"과 확고하게 결속되어 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기독교를 독특하게 만든 점은 바로 예수께서는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그가 단언하신 것을 행하셨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져다 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거기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믿음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