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대 이집트와 이슬람이후의 이집트

2008. 12. 27. 10:28교회사자료/10.세계사

고대 이집트의 주민과 언어
고대 이집트인은 니그로이드를 모체로 함족과 셈족의 피가 섞인 주민이다. 고대 이집트어는 아프리카적 요소에 함어와 셈어가 섞여 발달했다. 아프리카적 요소인 상형문자(히에로글리프)는 셈족의 쐐기문자와 같은 비상형문자로 바뀌지 않은 채 3000년 이상 사용되었다. 고대 이집트어는 고왕국시대의 고어(古語), 중왕국시대∼신왕국시대의 중기어(中期語), 신왕국시대∼말기왕조시대의 말기어 3가지로 나누어진다. 신전의 문자나 칙령 등에는 히에로글리프를 사용했다. 한편, 고왕국시대의 신관(神官)은 히에로글리프의 간략서체인 신관문자를 만들었다. BC 7세기에는 도상성(圖像性)이 없는 속필문자(速筆文字)인 민중문자가 고안되어 상업 등에 이용되었다. 콥트어는 3세기 말 이집트어에서 생긴 뒤 새로운 문자체계로 표현되었다. 이슬람교도에게 정복당한 이후는 아라비아어를 사용했으며, 오늘날은 아라비아어의 이집트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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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이전
구석기시대 이집트인은 유목생활을 하였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가 건조화되기 시작한 이후는 강가에 모여 살았다. 신석기시대는 하(下)이집트 파이윰분지에서 BC 5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는데 이 문화를 파이윰A라고 한다. BC 4500년 무렵에는 상(上)이집트에 구리를 이용하는 바다리문화가 발생했다. BC 4000년 무렵에는 보다 진보된 나카다 제 1 기문화가 출현하여 초보적인 이집트문자가 발생했으며, 이어 BC 3500년 무렵 나카다 제 2 기문화로 발전했다. 나일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연합하고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에 국가가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하이집트는 파이윰으로부터 북쪽지역에, 상이집트는 파이윰에서 아스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⑴ 초기왕조시대:BC 3000년 무렵 상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한 뒤 제 1 왕조가 시작되었다. 수도는 티니스에 있었다. 왕권이 신격화되어 왕관의 형상도 왕권의 상징인 매와 뱀으로 정해졌다. 호루스신을 섬겼으며, 대형 왕묘 구축기술을 갖추었다. 제 2 왕조 초기의 왕은 수도를 멤피스 근처로 옮기고 왕묘를 세웠으며, 다음 왕 페리브센은 수도를 상이집트의 아비도스로 옮기고, 호루스신의 적(敵)인 세트신을 섬겨 종교상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 2 왕조는 BC 2700년 무렵의 카세케무이왕시대에 몰락했다. 이 제 1 ∼2왕조시대를 티니스시대·고졸시대(古拙時代)·초기왕조시대라 한다.

⑵ 고왕국시대:BC 2700년 무렵 제3왕조는 멤피스에 수도를 두었다. 조세르왕시대에 국력이 신장되어 최초의 석조피라미드를 사카라에 구축했다. 그 규모는 동서 121m, 남북 109m, 높이 60m였다. 그 뒤의 왕은 이것을 모방하여 피라미드로 왕묘를 만들었다. 제 4 왕조는 BC 2600년 무렵 스네프루왕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남쪽으로 누비아, 동쪽으로 아시아, 서쪽으로는 리비아로 진출했다. 스네프루왕은 마이둠피라미드·굴절피라미드와 그 뒤 다슈르의 저경사(低傾斜)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아들 쿠푸왕은 기자에 대형피라미드를 세웠다. 카프레·멘카우레 등의 왕들도 각각 피라미드를 구축했으며, 제 4 왕조에서 라(Ra;太陽神) 신앙은 왕가의 신앙인 동시에 국가의 신앙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이때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도 생겼다. 제5왕조는 BC 2450년 무렵 우세르카프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나스왕의 피라미드에는 사후 왕의 안녕과 영생을 기원하는 피라미드 교서가 내부에 새겨져 있다. 제 6 왕조 페피 2세시대는 왕권이 쇠약해져 지방호족과 고관이 권력을 장악하다가 BC 2263년 무렵 몰락했다. 제3∼6왕조에 이르는 이 시대를 피라미드시대라고도 한다.

⑶ 제 1 중간기:고왕국시대 뒤 제 1 중간기는 혼란기였다. 이 혼란기는 제7∼10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왕조들은 전국토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지역적 존재에 불과했다.

⑷ 중왕국시대:제11왕조의 안데프 1세는 BC 2160년 무렵 상이집트 테베를 중심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재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멘투헤테프 2세가 재통일을 완성하고, 상부를 피라미드형으로 만든 대형 장제전(葬祭殿)을 디르알바리에 세웠다. 멘투헤테프 3세는 누비아의 일부를 이집트 지배하에 두었다. BC 2000년 무렵 아메넴하트 1세에 의해 시작된 제12왕조는 수도를 하이집트의 이타우이(지금의 다슈르)로 옮겼다. 그리고 테베지역의 아멘신을 왕가의 신으로 섬겼다. 아메넴하트 1세는 수에즈 지협에 성채를 구축했고, 말년에는 아들 세누세르트 1세와 공동통치를 하였다. 세누세르트 1세는 나일강지류를 개발, 홍해에 연결하였으며, 아메넴하트 3세는 농업을 진흥시키고 하이집트에 댐을 구축했다. 한편, 세누세르트 1세에 의해 식민지가 된 누비아에서는 금이 산출되어 이집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제12왕조는 행정 및 군사제도를 정비했으며 문화적으로 번영했는데, BC 1785년 무렵 몰락하고 제13왕조가 이를 계승했다. 우카프·소베리호테프·아메넴하트·세켐레스·켄지엘 등의 왕들이 알려져 있으나 통치력은 극히 미약했다. 이 시대는 BC 1750년 무렵에 몰락하였다.

⑸ 제 2 중간기:중왕국시대가 끝난 뒤 혼란기인 제 2 중간기가 시작되었다. 제 2 중간기 초에는 이집트인을 왕으로 세운 제14왕조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침입한 힉소스는 BC 1730년 무렵 아바리시(지금의 타니스)를 수도로 제15왕조를 세웠고, 그 뒤 제16왕조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힉소스는 하이집트만 직접 통치했을 뿐 상이집트는 지방호족을 통해 간접 통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베에 기반을 둔 영주가 BC 1680년 무렵 제17왕조를 세웠다. 초기에는 힉소스왕조와 공존했으나 5대 세케넨레왕에 이어 그의 아들 카메스왕이 힉소스를 몰아냈다.

⑹ 신왕국시대:힉소스를 완전히 몰아낸 것은 다음 왕 아메스 1세시대 BC 1580년 무렵이다. 그로부터 제18왕조가 시작되어 수세평화주의(守勢平和主義) 국가에서 공격적인 군사국가로 변했다. 전쟁에서는 힉소스가 들여온 말과 전차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아멘신(神)의 세력이 팽창하여 힉소스를 몰아내고 최고의 국가신이 된 동시에 태양신 라를 흡수하여 아멘라라고도 했다. 또한 아멘신을 위한 카르나크신전·룩소르신전, 핫솁수트여왕이 장제전(葬祭殿) 등을 세웠다. 6대왕 투트모세 3세는 영토를 가장 크게 넓혔는데,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나일강 제 4 급류까지,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일대까지 지배했다. 제10대 이크나톤왕은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아멘신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축소시켰다. 한편 이 시대의 아마르나양식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8왕조 이후에 람세스 1세가 삼각주지대에 제19왕조를 세웠으며, 3대 람세스 2세는 정복왕 또는 건축왕으로 유명하다. 히타이트와 맺은 평화조약은 인류가 맺은 최초의 성문화된 평화조약이다. 건축은 이집트 및 누비아·아시아 각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아부심벨의 대암굴신전이 대표적이다. 제20왕조는 BC 1200년 무렵 세트나크트가 세웠다. 그러나 아들 람세스 3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BC 1080년 무렵 몰락했다.

⑺ 후기왕조시대:스멘데스왕이 타니스에 세운 제21왕조에 이어 BC 960년 무렵 리비아인이 제22왕조를 열었다. 힉소스 이래 2번째 외국인 왕조이다. BC 817년 무렵에도 리비아인이 제23왕조를 세웠으나 사이스에 기반을 둔 이집트인 지도자가 일어나 BC 780년 무렵 제24왕조를 세웠다. 21∼24왕조시대를 말기왕조시대 또는 제3중간기라 한다. 제 3 중간기 뒤에는 누비아인이 제25왕조를 열었다. BC 663년에는 이집트인이 제26왕조를 세웠고, BC 525년에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페르시아령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제27왕조이다. BC 404년 이집트인 아미르타이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제28왕조를 세운 이후 이집트인이 제29·30왕조를 세웠다. 이 세 왕조가 파라오시대의 마지막 이집트 왕조이다.

⑻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BC 341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3세가, BC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부장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이집트 고유의 문화를 존중했으며, 왕들은 이집트식 신전을 세우고 이집트식 상형문자를 새겼다. 왕가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으며, 왕명은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문자 3가지로 발표했다.

⑼ 로마제국령시대:BC 30년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자살하자, 로마는 이집트를 속주로 삼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가져갔다. 395년 로마제국이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으로 분열된 이후는 비잔틴제국령으로 편입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대제가 신전폐쇄를 명한 이후 파라오시대의 문화전통이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비잔틴제국령이 되기 이전부터 이집트에 들어와 있었으며, 콥트어에 그리스문자 및 음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콥트문자체계를 만들었다. 비잔틴제국시대의 이집트는 물질적인 착취와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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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이후
641년 아랍인 아므르 빈 알라스가 이집트를 정복하여 군영도시 푸스타트를 건설하고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랍인은 푸스타트·알렉산드리아·아스완 등 주요 도시에 살며 조세를 징수하고 수비대를 두었다.

⑴ 옴미아드·아바스왕조:이집트의 아랍화·이슬람화는 칼리프권력에 복종하던 옴미아드왕조·아바스왕조시대(661∼868)에 진행되었다. 현주민 콥트계 그리스도교도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아랍인이 농촌에 정착했다. 통치기구가 정비되고 8세기 이후에는 아라비아어가 공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아랍화·이슬람화에 대해 콥트계 그리스도교도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아랍인은 지도적 위치를 잃었다.

⑵ 독립왕조시대:868년 이집트에 파견된 투르크계 군인 아마드 빈 툴룬은 반(半)독립왕조인 툴룬왕조를 세웠다. 아마드 빈 툴룬은 877년 시리아를 점령하고 툴룬왕조에 통합시켜 영역국가(領域國家) 이집트의 원형을 만들었다. 아바스왕조로의 재통합시대와 이흐시드왕조시대를 거쳐 969년 이후는 파티마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했다. 그해 이집트를 공략한 파티마왕조의 제 4 대 칼리프인 무이즈의 장군 자우하르는 푸스타트 북동쪽에 카히라라는 수도를 건설했다. 파티마왕조는 수니파 아바스왕조의 칼리프에 대해 칼리프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아즈하르사원을 건설하는 등 활발한 종교·문화활동을 벌였다. 1169년 파티마왕조의 재상이었던 쿠르드인 살라 웃딘은 아이유브왕조를 수립했다. 살라 웃딘은 십자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고 시리아의 영유권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수니파의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이크타제도를 도입하여 군인에게 봉토를 지급했다. 1250년에는 맘루크세력이 신왕조를 수립했으나 뒤에 바리 맘루크왕조(1250∼1390)와 부르지 맘루크왕조(1382∼1517)로 나뉘었다. 술탄을 우두머리로 바리 맘루크왕조는 십자군과 몽고인을 격퇴시킴으로써 강성해졌으나, 군벌의 세력다툼 격화와 왕조 말기의 경제적 혼란 및 중계무역지로서의 기능상실로 점차 쇠퇴하였다.

⑶ 오스만지배하의 이집트:1517년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의 속주가 되어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때문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는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이집트는 정체기를 맞이했다. 초기에는 중앙집권적 징세체제가 시행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 징세청부제도가 보급되면서 징세청부를 맡은 맘루크층은 농촌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이집트총독의 권한은 명목적인 것이 되었다. 한편, 맘루크층은 파벌을 조성하며 이집트사회에 토착화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언하는 유력한 맘루크가 나오게 되는데, 이 맘루크를 뒷받침한 것은 농촌으로부터의 수입 외에 동방무역에서 얻은 수익이었다.

⑷ 메메트알리왕조:1798년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3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이 3년동안 나폴레옹은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이스탄불로부터 알바니아인 용병대 장교를 파견했으며, 1805년 나폴레옹이 퇴각한 뒤에 이 사업은 메메트 알리에게 넘어갔다. 메메트 알리는 맘루크세력을 없애고 징세청부제도를 폐
지했다. 그리고 토지를 조사하여 일원적으로 농민을 지배하는 한편 전매제도(專賣制度)·근대공장설립·징병제 실시와 함께 근대적 군대를 창설하고 기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와하브파를 소탕하기 위해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여 수단을 정복하고 그리스독립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을 지원했으며 제1·2차 시리아전쟁 등을 통한 영토확장정책을 꾀했다. 그러나 유럽 열강과 충돌하여 40년 런던 4 국조약을 체결하고, 수단을 제외한 정복지를 포기하는 동시에 이집트 국내시장을 개방했다. 한편, 그 대가로 메메트 알리 일족의 이집트총독 세습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⑸ 영국식민지 이집트와 독립:메메트 알리가 죽은 뒤 사이드와 이스마일은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원칙으로 수에즈운하 개설 등 근대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동안 이집트재정의 외자의존과 목화의 단일경작 농업구조가 진전됨에 따라 이집트경제는 유럽에 종속되었다. 1876년 이집트재정은 파탄되어 국제관리하에 놓여졌으며, 유럽열강은 이집트내정에 간섭했다. 79년 일어난 민족주의운동이었던 아라비의 반란을 무력진압한 영국은 이집트를 군사지배하에 두었다. 제 1 차세계대전 뒤 1919년 자글룰을 지도자로 하여 반영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은 22년 명목상 이집트독립을 승인했다. 그 뒤 이집트 정치는 영국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목표로 전개되었다.

⑹ 나세르 이후:1952년 7월 23일 G.A.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이집트혁명으로 파루크를 퇴위시키고, 이듬해 이집트공화국을 선언했다. 혁명정권은 제 1 차농지개혁과 공업화정책 등을 통해 국민통합과 자립된 국민경제를 목표로 했으나 56년 제 2 차중동전쟁(수에즈전쟁) 뒤에는 계획경제를 바탕으로 공공부문을 확대했다. 58년에는 시리아와 통합하여 아랍연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61년 시리아통합이 해체된 뒤에는 제 2 차농지개혁, 대기업의 국유화, 사회복지제도 확충 등 사회주의적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 동안 나세르는 아랍민족주의운동을 배경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비동맹중립주의를 지켰으나, 이 정책은 67년 제 3 차중동전쟁을 계기로 좌절되었다. 70년 요르단내전으로 아랍세계의 분열위기가 높아지고 요르단정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의 화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나세르가 죽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M.A. 사다트는 73년 제 4 차중동전쟁을 계기로 경제통제를 완화하고, 외자를 도입할 목적으로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그에 따라 경제는 활기를 띠고 물자가 풍부해진 반면 국제수지는 악화되고 물가가 폭등했다. 77년 1월에는 생활필수품의 가격인상을 계기로 폭동이 일어났다. 사다트는 친러시아노선에서 벗어나 친미국노선으로 전환하고 77년 11월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79년에는 캠프데이비드합의에 따라 이스라엘과 단독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외교정책은 아랍세계의 분열과 이집트의 고립을 가져왔으며, 그는 81년 10월 이슬람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그 후임으로 M.H.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87년 재선되었다. 90년 이슬람원리주의자들과의 대결이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총선거에서 여당인 국민민주당이 압승하여 무바라크가 계속 정권을 잡았다.

출처 :행복†충전소 원문보기 글쓴이 : 익명회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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