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교황권 제도의 발전사

2008. 7. 3. 23:58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제13장 교황권 제도의 발전사

오늘날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이 교황의 호칭은 언제부터 생겼으며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진실하고 솔직한 심정으로 역사 발전의 과정을 잘 배우도록 해야 하겠다.

1.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장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황권 제도가 어떻게 발전되었다고 하는가? 여기에는 성경적 기초와 역사적 기초를 말하고 있다.

(1) 성경적 기초

1) 마16:18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에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분명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준다고 했고, 또 베드로의 반석 위에다<참고하세요! : 베드로=조약돌,페트로스(헬) vs. 예수그리스도=반석,페트라(헬)=고전10:4> 교회를 세운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건설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사도 베드로가 세운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2) 행12:17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서 풀려나와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는데 그 다른 곳이 곧 로마를 뜻한다. 베드로는 AD42년부터 67년까지 로마 교회를 건설하고 제1대 교황으로 지내다가 네로 황제 박해 때 순교당하였다.

3) 벧전5:13에는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베드로전서를 쓴 베드로가 바벨론교회에서 문안을 전하는데 바벨론교회란 바로 로마교회를 뜻한다.

4) 요21:18-19에는 베드로가 순교당할 것이 예언되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예언대로 AD67년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로마의 광장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이상과 같은 성경 인용으로 베드로의 로마사역은 확실하며, 주님이 그에게 천국열쇠를 맡겼으므로 베드로의 후임자들은 베드로와 똑 같은 권한이 계승된다고 믿는다.

(2) 역사적 기초

이것은 사도 이후 역대 교부들의 말을 근거로 삼는다.

1) 로마의 클레멘트(AD96-? 로마감독, Clement of Rome)

클레멘트가 에베소와 고린도교회에 보낸 몇 통의 서한이 있다. "베드로는 순교와 같은 사역을 하였다."

2) 이그나티우스(AD30-110, 안디옥의 감독, Ignatius)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편지를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함께 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3) 고린도의 데니스(AD171년경, Denis of Corinth)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그 같은 사실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4) 이레니우스(AD190년경)

베드로는 로마에서 살았다는 것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5) 터툴리안(AD202, Tertullian)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면 그는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죽었을 것이다.

6) 오리겐(AD255, Origen)

베드로는 네로 황제 때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것이다.

7) 유세비우스(AD339, Eusebius)

베드로는 로마의 대형경기장에서 만인이 보는 데서 순교당하였다.

8) 제롬(AD430, Jerom)

베드로는 AD42년부터 67년까지 로마에서 사역을 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대 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였다. 이것이 폴랜드 소설가 H. Sienkeevicz(1846-1916)에 의해 "Quo Vadis?"(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작품이 되었다. 그 이후로 아무도 이 사실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3) 결론

1) 베드로는 분명히 제1대 로마교회 감독이었다.

2) 마16:18-19에는 베드로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다고 하였다.

3) 따라서 로마교회의 감독들은 베드로와 똑 같은 특권을 행사할 자격이 계승되고 있다.

2. 성경에 의한 증명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로마에 간 일이 없다.

(1) 소극적인 증명

1) 행12:17에 '다른 장소'라고 한 것이 로마라는 것은 다소 비약된 감이 많다.

2) 갈2:7-11에 보면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에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기록연대가 AD50-55년간으로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끝난 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게바가 안디옥에 있었다는 것과 카톨릭에서 AD42-67년에 로마에 있었다는 것은 상반된 사실이다.

3) 고전1:12에 보면 고린도교회의 파벌 중에 게바파가 있었다. 또 고전9:5에 게바는 아내된 자매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고린도서 기록연대가 AD55-57년경으로 본다. 그런데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왜 이 같은 기록이 생겼을까?

4) 벧전5:13에 나오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란 말이 반드시 로마교회를 뜻하는가?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는 BC605-535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이후 유대인은 포로에서 귀환하지 않고 전 유럽으로 분산되었다. 이 흩어진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들이 바벨론교회일 수도 있다.

5) 골4:10에는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그를 영접해 주라고 해서 마가가 바울의 심부름으로 아시아에 간 기록이 있다. 골로새서는 엡, 빌, 골, 몬과 함께 옥중서신이다. 이 서신은 AD63-64년경 로마 옥중에서 쓴 글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왜 마가가 베드로의 사역을 돕지 않고 바울의 사역을 돕고 있는가? 우리가 아는 바 대로 마가는 베드로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벧전5:13)로 가까운 관계가 아닌가?

6) 딤후4:11에는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바울은 로마 옥에서 에베소교회에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여기서도 보면 마가는 그의 스승이었던 베드로에게서 일을 했으나 후에는 바울의 로마 사역에 계속 동조하고 있음을 본다. 과연 베드로가 로마에 사역을 하고 있는 데도 마가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2) 적극적인 증명

1) 행15:6-11에 보면 AD45년경 예루살렘에서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베드로나 바울이 다 함께 참석하였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AD42-67년의 베드로의 로마 사역을 주장한다. 어느 것이 맞는 주장일까?

2) 롬16:12-16에 보면 바울이 AD56-59년 사이에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 십여명에게 문안의 글을 전하고 있다. 카톨릭의 주장대로 AD42-67년 사이에 베드로가 로마에 사역을 하고 있었다면 왜 바울은 베드로에 대한 문안을 하지 않았을까? 바울과 베드로가 숙명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3) 롬15:20에는 바울이 자기 목회소신을 밝히는 중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다"고 하였다. 만약 카톨릭 주장대로 베드로가 AD42-67년 사이에 로마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면 바울의 이 같은 주장은 전혀 거짓말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성경의 명확한 기록을 믿어야 되는가? 아니면 교부들이 차츰 말을 보탠 전승을 믿어야 되는가?

4) 골4:10-14에 보면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갇힌 채 AD63-64년경에 자기를 찾아준 많은 방문객들의 이름을 아시아의 골로새교회에 전하고 있다. 만일 카톨릭의 주장대로 베드로가 AD42-67년간에 로마에서 사역을 했다면 왜 바울은 방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베드로의 로마 사역은 전혀 거짓말 같다.

5) 몬23-24에도 바울이 함께 갇힌 자들과 자기를 도와주는 인물들을 말하고 있고, 빌4:21-22에도 역시 같은 문안이 있다. 이 두세 가지 서신이 모두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기록들인데 여기에는 베드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바울이 착각을 한 것도 아닐 것이고, 한 번도 아니고 각기 다른 서신들에서도 베드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분명 베드로는 로마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 간 일이 전혀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베드로의 로마 순교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역사의 전설이라고 해서 다 믿을 수 없다는 진실에 부닥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베드로의 로마 사역설과 그를 제1대 교황으로 모시는 카톨릭의 교황권 제도가 생겨지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이제까지 알아왔던 모든 선입관을 멀리하고 열린 마음으로 역사적 진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카톨릭의 주장에 그대로 맹신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서 이 같은 사실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사실 규명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을 미처 몰랐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 변화를 기대하고 싶다.

3. 교황권의 기초자들

(1) 역대의 교부들

앞서 교부들을 연구하는 항목에서 살펴보았지만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교회 지도자들은 각인각색으로 그들의 주장이 달랐다. 그들 중에는 감독직의 우위성을 주장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 같은 이가 있었는가 하면,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한 키프리안(AD195-258, Cyprian)이 있었다.

키프리안은, 감독이 다스리는 교회는 다 같지만 그중에도 로마의 교회만은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로마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뿌리라고 하였다. 이 이후부터 로마교회의 감독들은 키프리안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려 했으나 전체교회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의 상황은 점차 기묘하게 발전되어 갔다. 콘스탄틴 황제가 AD33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이렇게 되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황제가 수백년 정착해 있던 로마는 황제가 없으므로 해서 정치적으로는 약화되었으나 그대신 종교적 중심지로 더 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AD325년 니케아 회의 때에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교회는 다른 지역의 감독들보다는 좀 더 높은 '대감독(Patriachs)'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그 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 때는 콘스탄티노플교회 감독도 대감독의 호칭이 주어졌고, 451년 칼케돈회의 때는 예루살렘교회 감독에게도 대감독이 주어졌다.

이 같은 시대적 흐름과 함께 로마교회에서 170년경 고린도인이었던 '데니스'(Denis)가 베드로의 로마사역을 전설로 전하기 시작했고, 로마감독 '다마수스 I'(AD366-384, Damasus I)는 최초로 로마교회가 사도적 전승교회라고 주장했다. 그는 비서로 수종들던 유태인 학자 제롬에게 라틴어로 된 성경번역을 명령하였고, 그리고 그 성경에다가 로마교회는 베드로가 기초한 교회이며 로마의 감독들은 베드로의 후계권이 계승된다는 사실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enry Betterson교수가 쓴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판, 1963), pp.32-33에 잘 소개되어 있다. 카톨릭은 교회 역사도 자기들이 편리한 대로 조작하고 만들어가는 일에 조금도 꺼리지 않는 일을 하였다.

(2) 레오 1세(AD440-461, Leo I)

1) 레오의 정치적 발휘

앞서 말한 대로 330년에 로마 황제궁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터키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된 이후 로마시에는 정치적 공백 및 약화를 가져왔다. 이 무렵 서 로마는 계속 외적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410년에 고트(Gots)족의 침략이 있었는데 그 후에도 훈(Hun)족과 반달(Vandal)족의 침입이 또 있었다(455년). 이 같은 민족들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동로마의 황제들은 군사적으로 서 로마제국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서 로마제국은 실패하였다.

이무렵 로마의 감독 '레오'는 북아프리카의 '아틸라'(AD452, Attila)왕의 반항을 무마시키고 또 '가이스릭'(AD455, Geisric)의 불만도 외교적 설득으로 무마시켰다. 이렇게 되자 동 로마의 황제들 입장에서 보면 레오 감독이야말로 서 로마를 견재하게 한 구국 공신이었다.

2) 레오의 서한이 칼케돈에서 채택되다.

우리는 앞서 교회회의를 배우는 중에 451년 칼케돈회의 때에 레오가 보낸 편지(Leo of Tom)가 칼케돈신조로 채택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배웠다. 레오는 정치적으로 제왕들의 신임을 얻었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얻는데다 교회적으로도 기여하였다.

3) 레오가 로마교회는 수사도 베드로가 세운 으뜸 교회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교회들은 레오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으나 황제들은 레오의 공로로 봐서 그 같은 주장쯤은 능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추인하였다. 이것이 로마교회가 베드로 수사도를 계승한 교회라는 주장을 하게 된 공식적인 시발이었다.

(3) 그레고리 1세(AD590-604, Gregory I)

레오 1세가 로마교회가 수사도의 계승교회라는 주장으로 공헌한 다음, 그 후에 그레고리 1세는 로마교회 감독은 곧 교황이며,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이론을 수립한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마지막 교부요, 최초의 교황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카톨릭의 시작을 590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타당한 관찰이라고 본다.

1) 그레고리 1세의 배경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원로원의 의전관이었고, 모친 실비아(Sylvia) 역시 돈독한 신앙을 가져 전 가족이 성자 호칭을 받을 정도의 좋은 집안이었다. 그레고리는 573년에 로마의 지사 물망에 오를 정도로 출세의 길이 보였다. 그런데 그레고리는 정치적 출세보다는 종교적 헌신을 택한다. 부친이 물려준 유산을 많이 정리하여 자선비용과 수도원 건립기금으로 바친다. 그리고 그 자신은 574년에 성 안드레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된다.

그레고리의 헌신과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교황 '베네딕트'(Benedict I) 1세는 그레고리를 콘스탄티노플의 특사로 파견한다. 해를 넘긴 뒤 다시 586년에 로마로 돌아와 성 안드레수도원 원장이 되었다가 교황의 비서가 된다.

교황 펠라기오 2세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니 590년 9월이었다. 그로부터 604년까지 눈부신 활동을 한다.

2) 그레고리의 신앙

그레고리는 극심한 고행을 즐겼다. 그의 성격은 야심이 많았고, 의협심이 대단했다. 그는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인간에게도 겸손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관은 첫째, 로마교회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또한 베드로의 후계자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제는 반드시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1139년에 사제의 독신법으로 제정된다. 그는 또한 연속설을 신앙의 한 요목으로 삼았다.

전에 '아렐레이트'(Arelate)의 가이사리우스는 죄에는 대죄와 소죄가 있다고 해서 소죄는 생전의 선행과 사후의 불로써 소멸된다고 하였다. 그레고리는, 적은 허물은 심판을 받기 전에 연옥의 불로써 다 소멸되고(고전3:11-15),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에 의하여 연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3) 그레고리의 공적

① 교회의 우선순위 중에서 로마교회를 제1위로 올려놓았다.

② 로마교회 감독은 모든 감독 중 으뜸이 되는 대사교로서 팰륨(Pallium ; 양털로 짠 흰 떡)을 띄어야 한다.

③ 정치 지도력을 확장했다.

그레고리는 롬 바르트족과 협상하여 이탈리아는 물론 남부 프랑스와 북부 아프리카까지 교회령을 넓혔다. 그는 또 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서 영국을 그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였고, 고울과 독일을 교황청 산하로 두었다.

④ 저작으로 성경 주해들을 썼다.

「욥기 해설」, 「목회자의 임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및 설교집 등이 있다.

성례전 신학을 수립했다.

인간은 회개하고 세례받을 때 구원을 받고, 세례 후에 지은 죄는 회개와 함께 보상을 치뤄야 한다. 세례 후에 지은 죄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보상과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성찬은 주님의 희생의 반복이라는 화체설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

⑥ 예배 모범과 교회 음악을 개혁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전까지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예배의식이 행해졌었다. 그레고리는 예배의식을 일반화시켰고, 성가와 시편송을 만들어 교회음악을 증진시켰다. 그레고리가 만든 성가는 지금까지도 서방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⑦ 가장 큰 공헌은 그 자신이 교황(Universal Father)이라고 칭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이란 호칭은 그레고리 1세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권한 행사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4) 그레고리 7세(1073-1085, GregoryVII)

그레고리 7세의 본명은 '힐데브란트'이다. 그는 12년 동안 교황으로 있으면서 많은 치적과 에피소드를 남겼다.

1) 그레고리 7세의 배경

그레고리 7세는 1015년 '투스카니'(Tuscany)의 소 도읍 소아나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때 로마 아웬디노에 있는 마리아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원장이 그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힐데브란트의 외모는 보잘 것 없었으나 굳은 의지와 많은 지략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당시 독일 황제 헨리 3세가 교황권을 개혁하려는 것에 협력하여 그레고리 6세 후에 레오 9세(1048-1054)를 교황으로 세우는데 협력한 것이 인정되어 교황청의 집사장이 된다.

레오 9세는 교황청 내에 새로운 추기경(Cardinal)원을 설치하고 교회의 대표인물을 뽑게 된다. 이때에 힐데브란트도 대표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 대표자들은 추기경이라고 해서 빨간 망토를 걸치게 하였으므로 이들을 소위 '홍의 주교'라고 했다.

교황 니콜라스 2세(1058-1061)는 교황 선임순서를 새로 제정했다. 과거에는 황제들이 교황을 선정하고 그 후에 로마에서 인준을 하였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1059년에 로마대회를 열어서 교황 인선은 '홍의 주교'회에서 먼저 선출하고, 그 다음에 황제의 승인을 얻도록 하였다.

사실 '홍의 주교' 회원은 콘스탄틴 황제 이전부터 각 교회의 장로들을 추기경이라고 했었는데 11세기 무렵에 와서 교황의 자문역을 할 수 있는 측근을 추기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직위가 교황, 홍의 주교, 추기경, 대 감독, 감독, 대 집사, 신부(장로), 집사 등으로 정해졌다.

니콜라스가 죽고 그 후임으로 안셀무스(Anselm)라는 힐데브란트의 친구가 교황이 되었는데(1061-1073) 그가 죽자 힐데브란트는 1073년 58세 때 그레고리 7세로 교황에 오른다.

2) 그레고리 7세인 힐데브란트의 신앙

그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에서 설명한 세계 신정국가를 지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교황이 감독들을 임명하고 파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의 제왕들의 임면권도 소유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했다.

①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보이는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을 계승하는 대행기관이다.

모든 교회 중에서 로마교회는 베드로가 직접 세운 교회이므로 로마교회는 결코 실수할 수 없는 절대무오한 교회이다.

절대무오한 로마교회 감독은 모든 우주적 교회의 아버지(Universal Father)이며, 로마교회 감독 역시 절대무오하다.

④ 절대무오한 로마교회 감독은 다른 교회의 감독들을 임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왕들도 임면할 수 있다. 그는 교황의 절대무오권 주장을 위해 유명한 '태양과 달의 원리'(Sun-Moon Theory)를 주창했다.

"하나님이 하늘에 두 빛 곧 해와 달을 달아두심으로써 만물을 비치게 하시는 것처럼 땅에는 두 큰 세력을 세우심으로 만민을 다스려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신다. 이 두 세력은 교황과 국왕이다. 교황은 큰 빛(해)이고, 국왕은 작은 빛(달)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도의 권력이 국왕의 권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⑤ 사제는 반드시 독신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제는 타인(비 성직자)에 비해 항상 초월적 힘이 있어야 한다. 또 사제는 모든 규율과 사회 속인들(아내, 자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 사제는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해야지 가족에 국한시킬 수가 없다.

3) 그레고리 7세의 공적

① 지금까지 묵인해오던 성직매매를 엄금하고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을 엄수케 하는 결의를 하는가 하면, 1075년 라테랑(Lateran)대회를 결정했다.

② 그레고리 7세와 헨리 4세 독일 황제간의 충돌이 생겼다.

독일 황제 헨리 4세(Henry IV)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스페인의 억압을 계속 당해 황제까지 스페인 사람임으로 독일 국민들과 봉건영주들이 헨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는 이 같은 위기를 모면하고 교황의 호감을 사려고 교황의 사절 앞에서 고해와 순종을 약속하였다. 이때 그레고리 7세는 1075년 부활절에 세속권세가 성직을 임명할 수 없음은 물론 세속권이 감독직에 관여할 수 없도록 선포하였다.

그런데 헨리 4세는 1075년 6월에 반란을 진압한 후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북하게 여기고 '밀란'(Milan)의 대 감독을 자신이 임명하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 7세는 1075년 12월에 황제에게 엄중한 항의를 보냈다. 그러자 헨리 4세는 1076년 1월 26일에 '웜스'(Worms)에서 회의를 열고 교황의 독재를 규탄하며 황제의 권리를 옹호하는 결의를 한다.

이때 대부분의 독일 감독들은 헨리 4세에 동조하여 교황의 폐위를 결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헨리 4세는 교황의 폐위 결정 통고서에 '지금은 교황이 아니고 거짓 수도사인 힐데브란트에게'라고 하였다.

이 같은 수모를 당한 그레고리 7세는 1076년 2월 22일에 즉각적으로 로마 종교회의를 열고 헨리 4세의 파문을 결정하고 동시에 폐위를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헨리 4세의 신하와 노복들의 해방을 선언하고 국민들에게는 헨리에게 더 이상 충성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독일 국민들이 헨리에게 충성하지 않고 교황편을 들기 시작하자 황제의 입장이 불리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 귀족들은 회의를 열고 "만일 황제가 1년 이내에 교황으로부터 파문해제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한다(1076년 10월 Tribur회의에서의 결정).

헨리 4세는 화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헨리는 제후들의 제의로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한다. 이때 교황은 터스카니아 백작의 과부 마틸다(Matilda)의 별장인 알프스의 산중 '카노싸'(Canossa)성에서 쉬고 있었다. 헨리는 겨울날 알프스산을 넘어 카노싸로 교황을 찾아갔으나 교황은 3일 동안을 만나주지 않았다.

황제는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밤 3일을 맨발로 떨면서 기다린 효험이 있어 나흘째 되는 날 면회가 허락되었다. 황제는 교황의 발 앞에 엎드려 애원했고, 교황은 황제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파문 철회를 선언한다. 이로써 헨리는 위기에서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헨리의 완전 몰락을 바라던 독일의 귀족들과 감독들은 크게 당황하게 된다. 궁지에 몰린 헨리의 정적들은 국회를 열고 '스와비아'(Swabia)의 공작 '루돌프'(Rudolf)를 택하여 헨리의 자리에 앉게 한다.

그리하여 독일에는 헨리와 루돌프 두 황제가 있게 되었다. 여기서 교황이 누구를 황제로 인준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이때 교황은 헨리를 인준하느냐, 독일 국민들이 바라는 루돌프를 선택하느냐 하는 갈등을 겪게 된다. 그동안에 독일은 내란과 혼란이 계속되었다.

1080년 3월,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로마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두번째로 헨리를 파문하고 루돌프를 인준함으로 실리를 택하였다. 두번째로 종교회의를 열고 두번째로 헨리를 파문하고 루돌프를 인준함으로 실리를 택하였다. 두번째로 파문을 당한 헨리는 차츰 독일 민족의 동정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1080년 6월에 헨리가 소집하는 종교회의를 열고 교황 그레고리 7세를 파면하고 '비벨트'(Wibert)를 택하여 '클레멘트 3세'(ClementIII)로 호칭하였다.

이런 중에 루돌프가 1084년에 횡사를 당한다.

헨리는 과거 카노싸의 치욕을 복수하려고 로마의 그레고리 정벌에 나선다. 3년 후 로마는 헨리에 의해 함락당한다. 그러자 천하를 호령하던 그레고리 7세인 힐데브란트는 로마에서 도망하여 슬픈 방랑길을 떠났다가 1085년 6월 25일에 객사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의를 사모하고 악을 미워한 고로 이곳에 정배와서 죽는다"고 하였다.

과연 그가 그러한 사람이었을까? 그레고리 7세는 교황이 절대무오하다는 무오성을 주장하고 강조하며 그렇게 살다가 많은 유호함과 유오성을 남기고 죽었다.

(5) 이노센트 3세(AD1198-1216, InnocentIII)

교황권의 최고의 권세를 누린 사람이 이노센트 3세이다. 그의 지략과 신념은 그레고리 7세 못지 않았다. 이노센트 3세는 교황권이 최고 절정에 오른 권한 행사를 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이만한 사람이 나지 않았다.

1) 이노센트 3세의 신앙

그는 독특한 주장을 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 7세보다는 농도짙은 주장을 하였다.

①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그의 통치권은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고, 왕중의 왕인 까닭에 군왕의 심판자의 지위에 서야 한다.

②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하나님보다는 낮으나 사람보다는 높다.

③ 교회는 태양이며, 제국은 그 빛을 받아 되비취는 달이다.

2) 이노센트 3세의 공적

① 프랑스의 왕 필립 3세(AD1180-1223, PhilipIII)가 본처와 이혼을 하고 다른 부인을 취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처와 다시 결합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엄포함으로 필립은 다시 본처와 회복한다.

② 영국왕 요한이 교황이 임명한 캔터버리 대 감독 '스데반 랭톤'(Stephen Langton)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이노센트 교황은 영국왕 요한을 파문하고 모든 영국의 교회들에게 성례와 혼배의식을 집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국 국민들에게는 프랑스 왕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영국왕 요한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황은 영국이 매년 2차씩 1,000마르크(700마르크는 영국, 300마르크는 아일랜드)를 공납하겠다는 조건으로 요한을 풀어준다. 이때 영국의 귀족과 승려들은 요한 왕을 강요해서 '마그나카르타'대헌장(Magnacharta)을 제정한다(1215년).

3) 종교재판(Inquisition)을 만들어 시행한다.

이것은 이노센트의 가장 큰 오점이다. 이노센트는 남부 프랑스에서 일어난 '알비젠스'(Albigenses)운동을 이단으로 몰아 동리 사람들을 모아놓고 몇 마디의 증언 끝에 군중들의 군중심리로 돌을 던져 죽여버리는 종교재판을 시행하였다. 공산당들이 소위 말하는 '인민재판'의 아이디어는 바로 이 종교재판 제도에서 본받은 것이다. 이노센트의 치욕스런 오점이다.

4) 제4차 라테랑 종교회의 소집(1215. 11. 11)

앞서 우리는 교회회의를 배울 때에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까지를 배웠었다. 그 뒤로 제7차 787년에 니케아에서, 제8차 대회는 869년과 879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다. 그리고 제9차부터는 서방교회에서만 회의가 열린다.

즉, 제9차는 1123년에 라테랑에서, 10차는 1139년에 라테랑에서 이노센트 2세가, 11차는 1179년에 라테랑에서 알렉산더 3세가, 그리고 12차는 1215년에 이노센트 3세가 대회를 연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이 대 감독 77명, 감독 412명, 수도원장 800여명, 그리고 기타 참예자까지 합하여 2,283명이나 되는 최대 회의였다. 여기서 '화체설 교리'(Transubstantation)를 확정하고, 성찬식 때 평신도에게 잔을 줄 수 없다는 것과 교황은 전 세계의 최고 통치자(Supermacy)임을 공포했는가 하면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시작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고해는 모든 신자가 1년 1회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며 성인, 순교자의 유물, 기념품을 예배하고 모든 이교도들을 정죄한다고 했다. 또한 제왕들은 힘을 모아서 자국 영토 안에서 이단을 소탕할 것을 서약하도록 훈령하였다.

오늘날의 교황권 제도는 이렇게 하여 발전되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 자신은 과연 오늘날과 같은 교황권 사용의 기초 인물이 되기를 바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도 베드로는 오늘날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부패와 변질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인들은 베드로와 아무 상관없는 역사를 꾸며놓았고, 베드로가 바라지도 않는 독선적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분명 교황제도는 성서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교회가 변천해오는 역사 발전의 과정 속에서 인간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자기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베드로도 이용하고, 성경도 이용하고, 역사가들의 말도 이용해서 오늘의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 큰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저 엄청난 제도적 세력 앞에 그 누가 올바른 증언을 할 것인가? 역사의 흐름은 항상 진리의 편에서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나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한 증언자의 메아리 역할을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