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3. 23:53ㆍ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제7장 신자들의 생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라는 것들은 대체로 교회 지도자들의 생애와 사상들을 배우게 되거나 혹은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나 관리들과의 대결관계 등을 취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그 당시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좀 더 공정한 사실을 알려고 하면 지도자는 물론이고 그 밑에서 지도를 받던 일반 신자들 전체의 상황도 동시에 알아야 한다. 물론 그 같은 상황을 모두 알려고 하면 정보가 매우 제한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능한한 모든 자료를 동원해서 이들도 아는 것이 정당한 역사이해의 바탕이 될 것이다.
1. 예배
기독교는 유대교 배경에서 새롭게 탄생되었기 때문에 처음 3세기까지에는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최초의 예배일은 유대교의 안식일을 사용했다(행13:14,42,44, 16:13, 17:2 참조).
그러다 사도들이 안식후 첫날(행20:7)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행습은 고린도 교회에서 지켜진다(고전16:2). 그리고 사도 요한은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계1:10)이라고 부르고 그 뒤로는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면 주일예배의 내용은 어떠했는가? 초대교회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설교에다 예배의 초점을 맞추는 것하고 전혀 달랐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다같이 기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행2:43-47에 나타난 것처럼 즐거운 만찬을 통해서 예배의 정수를 찾았다. 이 초대교회의 만찬은 슬프고 우울하고 회개를 유도하는 그런 만찬이 아니었다. 저들에게 그 시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을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함께 나누려는 기쁨과 감사의 시간이었다.
처음 1세기 때는 만찬이 보통 식사의 일부분이었다. 신자들은 자기들 성의껏 음식을 교회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공동식사를 하였다(고전11:21 참조). 그러나 제2세기 때부터는 공동식사가 폐지된다. 그 이유는, 기독교도들은 주의 피를 먹고 마시는 식인종들이며 또한 매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방탕자들이라는 로마인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제2세기 때부터 예배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별된다.
제1부 : 성경봉독과 간단한 해석(설교 형식), 그리고 기도와 찬양으로 제1부를 이룬다. 이 당시에는 신자들 개인이 성경을 소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므로 신자들의 성경지식은 여기서 얻게 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시간이 두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제2부 : 평화의 입맞춤으로 시작되는 주의 만찬이 시작된다. 이 주의 만찬의 참석자는 반드시 침례받은 자라야만 했다. 그래서 침례를 받지 않는 자는 1부 순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평화의 키스가 끝나면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사회자 앞으로 가지고 나갔다.
그러면 사회자는 빵과 포도주를 위해서 축복기도를 한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주신 은총을 감사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지고 나온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 후 빵을 쪼개어 분배하였고, 포도주는 한 그릇에 담은 채 돌려가면서 마셨다.
현대교회가 성찬기라는 돌 깍쟁이 같은 플라스틱 컵에다 담아 돌리는 것은 중세 카톨릭교회의 잔재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의 만찬을 다 마치면 축도로써 그날 예배가 끝이 났다. 이 같은 예배내용이 좀 더 치밀해지는 것은 후대의 일이다. 적어도 4세기 이전(니케아회의 이전) 까지는 시편과 찬송 제창, (신·구약) 성경낭독과 기도(회중이 기립하여), 그리고 감독의 설교를 실시했다.
찬송의 주 내용은 구약의 시편이 위주였고, 그 외에도 성경에서(사6장, 눅1:46-2:29, 마21:9, 계1:6 등) 사용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Alexandria의 Clement가 만든 가장 오래된 찬송이 있고(우리 찬송가 103장에 수록됨) 교호창(Antiphony)을 사용한 이는 이그나티우스였다.
2. 절기와 행사
(1) 부활절(Easter)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Easter란 말은 게르만족이 만든 말이고, 본래는 Pascha(파스카)라고 했다. 그리고 부활절을 언제로 하느냐 하는 것이 AD325년 니케아회의 전까지는 통일되지 않았다.
즉,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을 유월절로 지키는 동방교회와 주일을 지키는 서방교회가 각기 다르게 지켰다. 그러다가 니케아회의에서부터 춘분이 지난 다음 주일을 부활절로 지켜오고 있다.
(2) 사순절(Lent)
오늘날 사순절의 기원은 부활절 전 1주일 동안을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하는 뜻으로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서 발전하여 부활절 전 40일을 쿠아드라게시마(Quadragesima)라고 해서 일정기간 동안 고행과 금식을 하며 침례를 준비하던 것이 사순절이 되었다.
(3) 주현절(Epiphany)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지키던 축일이 1월 6일이었다. Epiphania란 말은 주의 출현이란 뜻이다. 그 후 라틴계 서방교회에서 이교도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Christmas라고 대체한 것이 콘스탄틴 황제 때였다.
(4) 승천일과 오순절(Pentecost)
부활 후 40일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날이며, 또 50일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오순절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 날을 환희의 만찬으로 기념하였다.
(5) 예배 장소
초대교회 때는 개인의 집(롬16:5, 고전1:16), 셋 집(행28:30), 회당(행15:21, 18:4)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뒤 박해 때는 무덤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자기들이 존경하던 신앙 선배들의 무덤(Catacomb)에서 예배드림으로 고인들도 함께 예배에 참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후 교인들의 증가로 주택에서의 예배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3세기경(AD256년경)에는 개인주택이 교회 전용건물로 사용되게 된다.
(6) 침례식
침례는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번 부활절날에 행해졌다. 그 뒤 3세기 초부터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한 후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각인 주일아침에 침례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침례는 남녀가 구분되어서 완전 나체 위에 새 생명을 상징하는 흰 옷(골3:9-12, 계3:4)을 걸쳤다.
이들에게는 마실 물이 주어지는데 그 물은 겉과 속이 정화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침례 후에는 기름을 발라 제사장 신분이 되었음을 표시했고, 또 우유와 꿀을 발라 약속의 땅(Promised land)에 들어갔음을 표하였다.
그리고 4세기 이전까지는 유아세례를 실시한 일이 전혀 없고, 4세기가 지난 5세기 때부터 유아세례를 실시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참고 - 역사적인 자료로 보아 2세기 말 이전에 일부 교회들에서는 "침례를 통한 거듭남(중생)"의 사상이 고정적으로 주장되기 시작하였으며, 5세기 초에 유아 침례가 법령으로 제정되었다.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침례", 이 두 가지 오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암흑시대 12-13세기 동안의 기간만 하더라도 5천만명 이상의 아나-밥티스트들(지금은 밥티스트/침례교인이라 불리운다)이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
3. 교회의 정치
신약교회 때 교회직분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즉 감독(장로, 목사)과 집사뿐이었다(딤전3:1-13). 그런데 제2세기부터는 세 가지 지도자 직분이 생긴다. 그것은 감독, 장로, 그리고 집사이다.
그러면 왜 2세기 때 감독직이 더 우위에 오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앞서 교부들을 설명하는 중에 나온 것처럼 키프리안(Cyprian)이 교회는 감독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니 감독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고 한 것이 시발이 되었다. 이 같은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 내에 이방인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단의 위험을 방어하고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전문적 책임자가 필요했다.
그 책임이 감독이었으며, 장로는 보좌역을 맡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변화가 세 가지 직분으로 나눠진다. 감독은 30세를 넘어야 했으며, 교회정치의 수반이고 교회재정을 관리하며, 집례와 설교를 하고 종교회의에 참석하였다.
장로는 통상적인 예배 때 관리를 하고 안수례와 신도교육을 맡았고, 종교회의때도 감독의 상담역할을 하였다.
목사라는 호칭은 AD200년 이후부터 사용된다. 목사는 집사 위에 있는 직분자로 안수례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리는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집사는 성직이 아니라 교회재정과 성찬식 때 보좌역할을 했다. 그리고 2세기 말까지는 모든 직분을 남자들만 하였다.
4. 기독교인의 일반 생활
(1) 가정생활
독신생활을 거룩히 여기고 존중하였다. 그래서 이혼은 반대하였고, 재혼도 기피하였다. 죽은 후 망인을 위해 과도히 통곡하지 않았고 깨끗한 묘지는 잠자는 곳으로 알아 묘지관리와 단장을 열심하였다. 노예제도가 개선되긴 했으나 아직은 완전히 폐쇄되지 않고 있었다.
(2) 사회생활
신자들끼리는 가능한 인접하여 살려고 했다. 그리고 극장, 곡예장, 검투, 종교제전 등엔 참여하지 않았고, 우상과 관계된 일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또 전쟁과 사형을 반대(비교 참고 - 롬13:1, 창9:6, 민35:16-21)하였다.
(3) 학교와 교육
기독교주의적 학교는 없었고, 이교도 학교만 있었다. 교회 안에는 교리문답학교 같은 것이 있었다.
(4) 종교 훈련
주일예배 외에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을 하였다. 매일 기도하는 것, 밤에 기도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행위 등을 하였다. 침례를 받게 하기 위해서는 대개 3년 동안 교육을 시켰다.
침례 준비기간을 카테규멘(Catechumenate)라고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침례 준비자들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교훈을 받았으며 교육중 자기들의 신앙을 생활 속에서 증명해야만 하였다.
침례 지원자들을 3등분해서, 청자(Audtentet)는 성경과목과 설교만 듣는 것, 궤자(Genuflectentes)는 기도할 능력이 있는 자, 진자(Competentes)는 주의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자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시험을 통과한 후 침례를 받고 침례자는 침례자 명부에다 그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침례받는 자는 침례와 함께 모든 죄가 제거된다고 하였다.
침례 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는 사할 수 있는 죄(회개, 감독의 안수), 사할 수 없는 죄(살인, 배신, 간통, 이단, 분파)가 있다고 했다. 또 죄에 따라 1년, 혹은 15-20년 동안 회개를 거듭함으로 죄가 사해지는 죄도 있고,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자는 영원히 회복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신약교회 이후의 신자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인간들의 규제에 의해 점차 얽매이게 되었다.
'교회사자료 > 1.기독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장 신약교회 사상 고수주의자들 (0) | 2008.07.03 |
---|---|
제 8장 교회회의(교리 논쟁) (0) | 2008.07.03 |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 2 (0) | 2008.07.03 |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교회사 (0) | 2008.07.03 |
제1차 세계대전과 교회 (0) | 2008.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