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교회회의(교리 논쟁)

2008. 7. 3. 23:57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제 8장 교회회의(교리 논쟁)

신약교회 후 교부들 시대까지는 세계적인 기독교 회의가 없었다. 다만 한 지방에 국한된 종교회의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3세기에는 칼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 지방대회가 열렸고, 4세기 초까지 지방대회가 더 확산되었다.

그러나 AD313년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부터는 세계적인 교회회의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313년부터 580년 초대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할 때까지 교회 회의는 여러 차례 거듭된다.

그러면 이전까지는 기독교가 계속 박해와 핍박을 받아오다가 비로소 교회회의를 세계적으로 열 수 있게 되는 그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콘스탄틴 황제를 비롯한 모든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를 정치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저의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승인했으나 그야말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공적은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회의시대를 연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대대적인 박해 후에 온 승리

데키우스(AD249-251)와 발레리안(AD253-260, Valerian) 황제들의 박해 후 상당기간은 비교적 평온한 시대를 보낸다. 그런데 '디오클레티안'(AD303-311, Diocletian)황제 때에는 가장 극심한 박해가 발생한다.

이 시기의 박해는 기독교 최대최고의 박해기간이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제국을 재 정비하고 새로운 번영을 기할 목적으로 로마 전체를 4명의 황제가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그래서 동방에는 디오클레티안 자신이 맡고 서방에는 '막시미안'(Maximian)에게 맡겨서 이들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 하여 일종의 대제와 같은 책임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대제 밑에는 '시저'(Caesar)라 하여 부제의 일을 하였다. 그래서 동방의 디오클레티안 밑에는 '갈레리우스'(Galerius)가 부제였고, 서방 막시미안 밑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부제였다.

'디오클레티안'황제는 제국의 분열과 내란을 권력분할로 막아보려고 이 같은 일을 시도했으나 그의 소망은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 아내 '프리스카'(Prisca)와 딸 '발레리아'(Valeria)가 모두 기독교 신자였는 데도 자기 밑에 있는 '갈레리우스' 부제의 사주로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박해 명령을 내리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안'황제 칙령이 선포되어 교회 건물은 파괴되고, 기독교 서적들은 불탔으며, 기독교 신자들은 일체의 공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러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황제 명을 거부함으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된다. 이 무렵 황궁에서 두 차례의 화재가 발생한다. 이 불을 지른 범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운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안 황제로 하여금 더 큰 박해명령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안 자신도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이교 제사를 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압력에 굴복하는 배교자가 생겼고, 소수는 잔인한 고문과 악독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305년에는 디오클레티안과 막시미안이 퇴위하고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대제가 된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틴이 서방 부제가 되고, 또 갈레리우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동방 부제가 된다.

갈렐리우스가 AD311년에 죽자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 막센티우스의 대제와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부제에 의해 4등분으로 분할된다. 그런데 서로가 제국을 장악하려다가 결국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의 전쟁으로 압축된다.

두 사람은 312년 10월 28일에 이탈리아의 '밀비안'(Milvian) 다리 위에서 싸우다가 막센티우스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이로써 콘스탄틴이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된다.

막센티우스를 이긴 콘스탄틴은 라키니우스와 313년에 밀란(Milan)에서 만나 전쟁을 중지할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그 유명한 '밀란칙령'(Edict of Milan)을 AD313년에 내려 기독교 박해의 종식을 가져온다.

황제에 의한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AD64년에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수백년간 계속되었고 AD313년에 가서야 끝이 난다. 이로써 기독교는 더 이상 황제의 정치적 박해는 받지 않게 된다. 실로 총력적인 대 박해 후에 온 승리였다.

2. 콘스탄틴 대제의 인물

(1)인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콘스탄틴 황제는 어떤 인물인가?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는 앞서 언급한대로 서방 대제인 막시미안(Maximian) 밑의 부제였다.

클로루스는 헬라 여인이며 여관집 딸인 헬레나(Helena)와의 사이에서 아들 콘스탄틴(Constantin)을 AD272년에 얻게 된다.

콘스탄틴은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장성했을 때 아버지 클로루스는 정치적 목적으로 헬레나와 이혼을 한다. 그리고 클로루스는 대제 막시미안의 딸인 데오도렛(Theodoret)과 재혼한다. 그런데 그녀 역시 기독교 신자였다.

콘스탄틴 자신은 모친들의 신앙적 감화보다는 부친의 영향으로 막강한 군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차후에 대권을 장악하면 기독교를 통한 국가발전에 도움 받을 생각을 할 정도로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정직한 무리이고 균형잡힌 삶을 사는 이들이며,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강하므로 그것을 황제를 향한 충성심으로 선용하면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가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적장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즉, 콘스탄틴이 꿈 속에서 기독교 상징을 병사들이 방패와 군기에 부착하면 승리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콘스탄틴의 회심이 아니었을까 상상하지만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도 섬기고 기독교도 이용한 것을 보면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평생동안 침례를 받지 않다가 드디어 화급한 나머지 죽기 직전에 임종세례를 받게 된다(AD337). (비교 참고 : 카톨릭의 교권제도가 창설되었을 때에 그 통솔자가 되었던 「콘스탄틴」 그 자신은 당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마는 그와 함께 이 조직체 안에 들어온 그릇되고 정도를 벗어난 교회들이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 과오를 채택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이 「콘스탄틴」의 머리속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니 즉 「만약 내가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하게 될런지도 모르는 내 죄는 어떻게 될것인가?」 그는 후세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침례는 아직 범하지 않은 죄 까지라도 씻어 버릴수 있는 것인가 또는 침례받기 전에 범한 죄를 한가지 방법 즉 침례로써 씻어 버릴수 있으면 침례 받은 후에 범한 죄도 다른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씻어 버릴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일어나는 여러가지 의문을 원만히 해결할 수 없었음으로 「콘스탄틴」은 결국 기독교도들과 연합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침례만은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한꺼번에 씻어 버릴수 있다고 생각해서 죽기 직전에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다 - 피흘린 발자취, J. M. 캐롤 저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but, 전도서 9장 12절 말씀에는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장자를 죽이고 그의 처도 죽이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등 단점도 많았으나, 정치적 역량은 대단하여 놀라운 공적들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

(2)업적

콘스탄틴 황제가 과연 신앙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가 끼친 영향력이 너무 심대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로 그의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에 끼친 공헌

콘스탄틴 자신은 스스로 기독교 보호자로 자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평생동안 이교신을 버리지 않고 이교의 대사제로서 기능을 다 한 것을 보면 그가 꼭 기독신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를 갖고 기독교에 호의적 정책을 편 것은 사실이다.

콘스탄틴 입장에서 보면 크게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으나 기독교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큰 사건들이 많았다.

먼저 전에 디오클레티안 황제 때 교회 재산을 몰수했던 것을 다시 되돌려주도록 하였고, 스페인의 코르스도바(Corsdova) 감독인 '호시우스'(Hosius)를 황제 자문역으로 삼아 황제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모든 성직자들에게는 세금 감면과 군대 징집면제 등으로 우대하였다. 이 때문에 콘스탄틴은 원로원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다. 그러나 전능한 권위로 원로원을 억누르고 나갔다.

그리고 로마 화폐에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징하는 표시와 아울러 로마의 옛 신들의 상징을 함께 주화하였으며(320년), 태양숭배신이 '지존의 존재'(The Supreme)에게 경배하듯 일요일을 기독교의 예배일로 정하도록 했다. 전에는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일과 주일에 드리는 이중 관행을 콘스탄틴이 하나로 일원화시켰다(324년).

콘스탄틴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일을 12월 25일의 태양신 예배날로 정했다. 그 이전에는 주현절로 1월 6일을 지키던 것을 이교도의 축하날로 옮기자 이교도들 역시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 종교회의(The First Ecumenical Council)를 니케아에서 열도록 했으며, 그 회의는 황제에 의해서 소집된다. 또한 그는 그의 생모인 헬레나가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예수의 처형지를 발견했다고 하여 베들레헴에 '성탄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와 감람산 교회에 두 개의 기념교회를 국고금 지원하에 건립하기도 했다(AD325-329년).

그가 330년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그리이스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할 때 아내의 소유였던 로마의 '라테랑궁'(Lateran Palace)을 교회에 기증한다. 이것을 'Donation of Constantin'이라고 하는데 이 궁은 오늘날 교황청 바티칸 궁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황들에게 서방 전체를 다스리도록 권한도 부여했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기독교에게 여러 면으로 선심을 썼기 때문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 황제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교활한 정치가로 자기 정치적 야망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한 정치가였다. 그것은 그가 로마제국의 수장으로서 대사제의 칭호와 임무를 다했으며, 또한 그의 사후를 계숭할 세 아들들을 신(이교의 신)으로 선포한 원로원의 소행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콘스탄틴은 그가 대권을 장악한 후 이교도의 쇠퇴를 가져오고 기독교에 선심을 쓰는 황제이긴 했으나 콘스탄틴 그 자신이 로마제국 국교였던 이교(Paganism)도의 대 사제행위를 평생동안 수행한 것이나 그의 자식들에게 신의 호칭을 받게 한 것은 그가 기독 신자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2) 황제로서의 업적

콘스탄틴 황제는 여러 면에서 업적이 다양하다.

① 콘스탄티노플의 건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330년에 이탈리아 로마의 수도를 옮겨 그리스 비잔틴에다 '새로운 로마'(New Rome)인 '콘스탄틴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일이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가 될만한 곳이고,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해역의 요충지에다 그의 사령부를 설치할 필요를 느꼈다. 그 당시 상황은 이 같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에 너무 좁은 장소였다. 그렇지만 새 평야에 성벽을 쌓아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콘스탄틴은 새 수도를 장식할 자원과 물자조달을 위해 제국 산하의 전 지역을 뒤져서 모든 것들을 운반하였다. 아폴로상, 전차 경주장, 공동목욕장, 광장 등을 설치해놓고 이곳에 주민을 유치하기 위해 납세와 국방의무를 면제해 주고 콘스탄티노플 시민에게는 기름, 식량, 포도주를 무상으로 배급해 주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플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렇게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로마제국의 정치, 문화도시로 조성함으로 동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이라 불려지며, 1천여년 동안 동로마의 중심지가 된다.

그와 반대로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는 야만족들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약화되다가 드디어 476년에 망하고 만다.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는 정치적 핵심이 빠져나가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종교적 중심부가 되어 중세 카톨릭교회의 중심지로 발전된다.

② 각종 악법의 개정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십자가형 제도를 폐지하고 검투제도를 금하였다. 또 축첩과 간음을 엄금하고 이혼권을 제한시켰다. 또 부인에게도 재산소유권을 부여하며 각종 여성보호법도 제정했다. 그리고 죄인 이마에다 인두로 낙인하는 법을 없앴다.

③ 일요일의 제정

일요일을 정하여 농부 외에는 모든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일요일에는 군대훈련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교회재산 감리법을 정하여 교회에서의 기부금을 공인하도록 하였다.

④ 기독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도 박멸정책을 쓰지 않았다. 타 종교에서 실시하는 제사 중에 불결하거나 잔혹한 것은 금하였다. 그리고 우상들은 산당에서 옮겨다 박물관이나 공원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⑤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이거나 또는 자기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려고 독특하게 지은 교회 건물들이 남아있다. 소위 '바실리카'(Basilica)라 불리우는 직사각형 건물양식이 있었다. 이 바실리카 건물의 특징은 기독교 예술이라 할 수 있는 '모자이크'(Mosaic) 양식 등이 그것이다.

3) 콘스탄틴 황제의 후계자

콘스탄틴이 AD337년에 65세로 세상을 떠나자 콘스탄티노플에 안장되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후 로마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해 3등분으로 분배된다. 큰 아들 '콘스탄틴 2세'(AD337-340)는 전사하고, 둘째 아들 '콘스탄스'(AD337-350, Constance)는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그래서 셋째인 '콘스탄티우스'(AD337-361, Constantius)가 천하를 다 소유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그의 사촌 아우 '쥴리아누스'(AD361-363, Julianus)가, 그 다음에는 '주비아누스'(AD363-364, Juvianus)가 계승한다.

3. 교회회의

(1) 니케아회의(AD325, Nicea)

1) 니케아 회의가 소집된 원인

니케아대회는 기독교 세계대회의 효시가 된다. 이 대회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되는 대회이다. 그러면 니케아회의는 왜 열리게 되었는가?

교회 안에서 생겨진 교리적 논쟁이 크게 확대되어서 이 문제 수습을 위한 것이 그 원인이 된다.

최초의 문제는 기독론에 관한 문제였다. 과거 교부들 때에 이미 기독론에 관한 문제성있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저스틴(Justin)은 말하기를 '성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며 성자인 로고스(Logos)는 단지 제2계급에 속하는 신적 존재'라고 하여 성부와 성자간에 차별이 있다고 했다.

그후 터툴리안(Tertullian)도 '3위는 본질이 셋이 아니라 양식이 셋이며, 능력이 셋이 아니라 표현이 셋'이라는 기묘한 법적 용어로 설명했으나 이 주장 역시 불분명한 설명이었다.

다음에 오리겐(Origen)은 아들은 '성부로부터 산출된 제2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성자는 성부에게 산출되었으나 계속하여 성부를 지원한다고 해서 종속설(Subordinationism)을 설명해왔었다.

이와 같은 교부들 주장은 안디옥의 신학자요 감독인 '사모사타의 바울'(AD260-272, Samosata)의 영향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장로가 된 '아리우스'(Arius)에게서 비롯된다.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사모사타의 바울과 유명한 신학자인 루시아누스(Lucianus)에게서 배운 대로 자기 주장을 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가 다른 선지자보다 강력하게 작용하여 로고스가 되었다고 보고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였다고 했다. 바울의 이 같은 주장으로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런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바울의 주장을 답습하였다.

아리우스는 키가 육척이 되고 변설이 명쾌하여 논리가 정연하였고, 또 정열적인데다가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였다. 즉, 예수는 본래 신의 본질로 처음부터 있는 분이 아니고 창조함을 받은 장자이므로 영원치 못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나 아들은 시작이 있음으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제2의 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는 인간의 육체는 가졌으나 인간의 영혼은 갖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들의 영혼이 아닌 로고스를 가졌다. 따라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인 '알렉산더'(Alexander)의 예수의 신성 주장에 반대되므로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 대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을 정죄하였다(AD320-321). 그리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도 함께 파문하였다.

그렇지만 아리우스와 같은 안디옥 학교 동문인 니코메디아(Nicomedia)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가 동방교회에서 막강한 힘으로 아리우스를 지원하였다. 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 황제의 측근자로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여기에 힘입은 아리우스는 「탈리아」(Thalia ; 잔치라는 뜻)라는 책을 통해 대중노래로 자기 주장을 보급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통신앙을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자유로운 새 사상을 주장하는 안디옥 교회 출신자들 사이에 심한 논쟁과 함께 반목이 증폭되어 갔다.

교회가 이렇게 대립되어 가는 것을 콘스탄틴 황제가 크게 염려하여 국가통일의 성업을 위해서는 국론이 하나되어야 한다고 믿고 두 파간의 분쟁을 종식하도록 노 감독 호시우스(Hosius)로 하여금 칙서를 내려 조정을 시도했으나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콘스탄틴 황제는 최후 수단으로 전 로마제국 안에 있는 모든 감독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교회가 다 하나라는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세계 교회대회에서 결정하도록 국가가 그 힘을 미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AD325년 5월 20일에 전 로마제국 안의 감독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된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서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왕복 여비와 체재비를 부담하여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때 모인 감독의 수는 약 300명 정도였고, 서방교회에서는 겨우 6명만 왔다. 그 이유는 먼 길에다 헬라어를 몰랐고, 또 박해 때 불구가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교회는 감독이 연로하여 2명의 장로로 대리케 하였다.

2) 회의 결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자들이 모였다. 먼저 알렉산드리아 교회파의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알렉산더 감독이고, 수행자 대표로 아다나시우스, 그리고 아리우스파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 수행자 대표는 아리우스, 또 거의 대다수였던 중간파 중 수석 책임자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유명한 역사가였고, 어용신학자라고 혹평을 받던 자였다.

개회날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 회의의 의사진행은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가 하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비슷할 뿐(Homo ousious= like substance) 본질이 동일한 것(Homo ousion= like substance)은 아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Arius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히고 회의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절충안을 제출하였다. 이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분쟁으로 싸우기 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제의하고 적당한 절충안을 제출한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니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졌을 뿐이다'(Homoiouisos)고 했다.

회의가 한창일 무렵 정통신학의 수호자인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로 '아다나시우스'(Athnasius)가 책임을 계승하게 된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이며,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만일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신과 인이 결합되는 '성육신'(Incarnation)한 분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이 회의의 대세를 판정하였다. 그래서 결국 아다나시우스의 동질론이 다수의 동조로 가결된다. 그 결과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을 수정하여 니케아신조가 채택된다. 이 신조에 참석한 회원들이 전부 서명을 하는데 아리우스와 애굽의 두 감독이 서명을 거부함으로 그들은 일루기아 지방으로 유형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니케아회의는 교회정치에 관한 22개조를 결정하고 또 부활절을 아다나시우스가 주장한 대로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일요일로 정한다. 그리하여 7월 29일, 황제 즉위 20주년 기념축연을 갖고 폐회된다.

그런데 그후, 대회를 승리로 이끈 아다나시우스는 체구가 왜소하고 젊은 대집사(27세)여서 황제의 번의로 계속 핍박을 받았다. 그는 황제에 의해 다섯 번에 걸친 추방이 있은 후 아다나시우스의 정통입장은 전체적 지지를 얻게 된다.

(2) 콘스탄티노플회의(AD381, Constantinople)

1) 회의가 소집된 원인

역사의 흐름은 항상 양 극단에서 오가게 된다. 앞서 니케아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질이라는 것을 확정하였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진실한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 언급을 못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까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무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여기에 대표자는 라오디게아(Laodicea) 감독인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였다. 나폴리나리우스는 그 부친이 정통 신학자로 아다나시우스가 감독으로 있던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장로였다.

아폴리나리우스도 아다나시우스 못지않는 유명한 신학자요 신앙인이었다. 그는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 아래 인간이면서 범죄할 수 없는 인간 예수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폴리나리우스는 살전5:23을 인용하여 인간의 구성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 속에 죄가 들어가 있는 죄인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구성이 로고스와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 카파도키아(Cappadocians) 교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즉, 사람의 영을 갖지 못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죄가 담겨 있는 영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느냐? 또,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해 오심으로 그는 인간적 행위와 감정의 인격체를 이루셨는데 그가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게 할 수 있느냐고 반론하였다.

이와 같은 양대 진영의 엇갈린 주장이 오가는 것을 본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동서 로마제국의 통일과 국론통일과 선친이 건설한 콘스탄티노플을 과시하려고 회의를 소집한다. 실로 모든 회의는 황제들의 정치놀음에 교회아 놀아나는 정치판이 되고 만다.

2) 회의 결과

이 제2차 세계 기독교대회에서는 전에 있었던 니케아신조에 대한 재 확인과 함께 아폴리나리우스 주장은 인성을 부인한 것으로 정죄받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석의 양성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다음에 두 격(신격, 인격)이 어떻게 조화되느냐 하는 문제로 또다시 논쟁이 생기게 된다.

(3) 에베소회의(AD431, Ephesus)

1) 회의가 소집된 원인

문제의 시발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게서 시작이 된다. 그는 수리아의 게르마니에서 출생한 후 안디옥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생활과 열심있는 신앙으로 제2의 크리소스톰이라는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가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어 신인양성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양성의 교통을 부인하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신인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고 신을 운반하는 것(Theo-phorus)인 로고스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수난당한 것은 인성뿐이고 신성은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가 수난당한 것이 단지 인성뿐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도사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AD376-444, Cyril)이 극렬히 반대하였다. 시릴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 양성이 연합되었으며,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은 마리아가 사람이신 신을 낳은 것이라고 하였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 것을 질투하는 감정과 함께 사적 감정이 얽혀 상호 저주하는 악폐로까지 치달려 갔다. 이에 데오도시우스 2세가 431년에 에베소에서 3차 세계대회를 소집하게 된다.

2) 회의 결과

시릴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출교 결정을 내린다.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는 그들 대로 대회를 따로 소집하고 시릴을 이단으로 결정한다.

양쪽이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자 황제는 시릴의 결정을 인준한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는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그를 따르는 네스토리안들은 황제의 핍박을 받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쪽으로 옮겨갔다.

이들 네스토리안들은 계속 동양 중국까지 옮겨와서 7세기 경에는 중국에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크게 활약한다. 이 경교 교인이 나당연합군으로 신라에 와서 활약했던 흔적이 최근 경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4) 칼케돈 회의(AD451, Chalcedon)

1) 회의 소집 원인

에베소회의가 끝난 후에도 계속하여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것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배척한 시릴당 중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케스(Eutyches)가 신인양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즉, 유티케스에 의하면 성육신 때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은 하나의 신인단성(Monophysitism)으로 연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단성론은 쉽게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즉, 무소부재한 것이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무소부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른 신체를 가졌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티케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 인성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이 주장 때문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충동하여 449년에 에베소대회를 열고 심한 몸싸움을 하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플라비안'(Flavian)이 맞아 죽는다.

이같은 극렬한 싸움을 중재하려고 로마 감독으로 있던 '레오'(Leo I)의 주선으로 451년에 데오도시우스 후임인 매제 '마크리누스'(Macrinus)의 명으로 '칼케돈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칼케돈회의에는 630명의 감독이 참석했다.

2) 회의 결과

이 칼케돈회의에서는 레오가 보낸 서한(Leo of Tome)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공히 인정한 소위 말하는 '칼케돈신조'(Chalcedon Creed)가 채택된다. 이 칼케돈신조는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위한 결정적 신조로 전해지고 있다.

칼케돈신조의 전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도 완정하시어 참 신이시고 참 사람이시며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를 구비하셨고 신성은 아버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며 죄를 제외하고는 전혀 우리와 같으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후세에 와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모 마리아에게서 인성으로 나셨다'고 했다.

여기 칼케돈회의에서 교리논쟁을 하나의 신조로 채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로마교회 감독인 '레오'(Leo)의 힘이었다. 그동안 동방 교회들끼리 교리 논쟁으로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하는 동안 서방교회인 로마교회가 조용히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칼케돈신조가 완전한 문제 해결책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로마교회의 힘을 크게 드러내는 데 큰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5)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AD553, IIConstantinople)

1) 회의 소집 원인

앞서 칼케돈회의에서 교리논쟁이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칼케돈신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팔레스틴과 애굽에 있었다. 이 무렵 '유스티니아누스'(AD527-565, Justinianus) 황제가 처음에는 칼케돈신조를 옹호하고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핍박하였다. 그런데 황후가 반대파를 선대하므로 황제의 입장이 난처했다. 그래서 황제는 양 파를 화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 소위 '3장령'(Three Chapters)이 등장하게 된다. 이 3장령이란 안디옥 파에서 존경을 받던 세 신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칼케돈신조에 반대되는 주장이다.

그 세 신학자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몹수에스타의 데오도어(Theodore of Mopsuesta), 시릴의 반대파(anti Cyrillian)였던 데오도렛(Theodoret of Cyrus), 그리고 Nestorian 입장으로 그리스도는 신도 인간도 아닌 단지 구세주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에뎃사의 이바(Ibas of Edessa)를 말한다.

이 같은 세 신학자의 입장은 모두가 칼케돈신조에 위배되는 반대 입장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3장령으로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교회는 계속 분란이 거듭된다는 것을 깨닫고 제5차 세계대회를 55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게 된다.

2) 회의 결과

이 대회에서 3장령을 발표한 세 신학자 모두를 정죄한다. 그리고 칼케돈신조를 재 확인한다. 그러나 대회 후 후유증은 더 크게 번져진다. 전에 칼케돈 신조를 반대하던 애굽과 수리아 지방의 교회들은 끝내 분리하여 독립교회를 이룬다.

그래서 애굽에 있는 콥트교회(Coptic Church), 애굽교회, 동방의 알미니아교회, 마로나잇교회, 그리고 수리아교회 등으로 분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실로 교회 문제를 교회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정치권력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 그 결과는 너무도 엉뚱한 결과들을 낳게되는 것을 보게 된다.

(6) 제3차 콘스탄티노플회의(AD680, IIIConstantinople)

1) 회의 소집 원인

앞서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가 열려 '단성론'(Monophysitism)을 더 이상 언급하지 못하도록 논쟁이 종식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곧이어 '단의론'(Monothelitism)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단의론이란 예수께서 한 의지가 있었느냐 아니면 두 개의 의지가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이 같은 논쟁이 시작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두 의지, 즉 인간적 의지와 신적 의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인간적 의지로 인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되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의지, 곧 신적 의지만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로마감독 '호노리우스'(Honorius)와 콘스탄티노플 감독 '세르기우스'(Sergius)에 의해 창도되었다.

단의론 주창자들은 칼케돈신조를 단성론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성(性)은 둘이나 의지는 하나라고 하였다. 여기에 단의론을 반대하는 양의론(兩意論)파가 격렬하게 반대를 하고 일어났다.

이 같은 분쟁을 막아보려고 '헤라클리어스'(Heraclius) 황제가 638년에, 콘스탄스 2세가 648년에 힘을 썼으나 양론은 도무지 수습되지 않았다(단의론, 양의론을 금지시켜 봄). 그리하여 680년에 '콘스탄틴 4세'(AD668-685)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6차 세계대회를 소집하게 된다.

2) 회의 결과

여기서 단의론(그리스도는 신적 의지만 가졌다)은 거부되고, 양의론(그리스도는 신적, 인적 의지가 복합되어 있다)이 채택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을 붙여놓았다.

이렇게 하여 칼케돈신조에서 채택된 그리스도의 양성론과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정된 양의론으로 기독론 논쟁은 종식된다. 기독론 논쟁은 AD325년 니케아회의에서 시작하여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결되기까지 수백년 동안 처절한 싸움 끝에 막을 내렸다.

그 후에도 787년의 니케아회의, 869, 879년의 콘스탄티노플회의 등 교회회의는 계속되면서 교회의 중대한 문제를 회의에서 결정하는 관행이 중세교회까지 계속되게 된다.

과연 교회회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성산지기(holyhill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