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 / 강종수

2008. 3. 30. 17:57참고자료/5,영성 자료

구원의 확신            / 강종수

 


1. 구원
구원(救援)이란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종교학적 정의는 다릅니다. 또한 종교마다 구원관의 차이가 많으므로 각양 그 삶의 질이 다릅니다. 한국에 전래한 불교처럼 탈사회적 종교가 있는가 하면 기독교처럼 생활참여 종교가 있고 이슬람교처럼 전쟁을 많이 일으키는 교도 있습니다.
그 외 사이비 종교가 사회에 이질적 문화 형태로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와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단(異端)들로 인하여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악한 종교 단체들도 있습니다. 종교관이나 구원관이 잘못되면 영혼과 육체적 모든 삶의 요소에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역사를 외면하고 이웃과 사회에 무관하거나 위해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주 큰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기왕에 내가 가질 종교는 역사와 문화에 객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야 좋지 않겠습니까?


1. 양심적인 구원의 개념

 

보통 사람들이 종교를 논할 때, '믿음은 다 같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종교를 갖지 않아도 의지가 강하기만 한다면 꼭 특정 종교를 가지고 의지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그래도(?) 종교를 가지면 좋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는데, 이는 종교관 혹은 구원관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리 중심적 사회의식 구조가 오랜 세월을 지배한 우리 한국의 경우는 양심적으로-도덕적으로 바로 살려고 하는 것은 종교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가진 것 중에 양심(良心)이란 인격의 좌소가 있습니다. 대개 우리 인간의 양심을 종교의 핵심 혹은 구원의 척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심이란 것도 유동성이 있어서 어디까지 바른 양심이고 종교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심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고 봅니다.

 

1)죽은 양심

 

 마치 컴퓨터의 손상 입은(Break) 하드의 부분과 같습니다. 인간의 양심이 파손되는 것은 여러 죄의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악해졌다든가 비양심적이라든가 하는 말들은 그 전에 양심을 상하게 할 죄를 지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살인 해놓고도 덤덤한 정신을 소유한다든가 상대에게 상당한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하고도 그 엄청난 언행에 반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람은 영성(靈性)이 있어서 윤리와 도덕적인 죄들이 거듭되면 양심에 해를 끼쳐 모든 일에 감성의 차질을 빚습니다. 결국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도 없어지고 역사 의식이 올바르지 않고 마음대로 되라는 식으로 질서가 깨어집니다. 기본적인 정서가 혼란스럽고 메마른 상태가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가 지구촌에 살아가면서 해를 입고 손상이 많이 된 상태의 이 양심으로 구원 얻을 도덕성을 쌓을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의지는 마치 하드가 손상된 컴퓨터에 중요한 문서를 입력하겠다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부도덕하고 온전치 못하여 신에 대해 그리고 자연 섭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관념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이 생겼고 아직도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로부터 이어져 오는 불가지론적인 회의(懷疑)가 남아서 인간의 실존과 그 양심의 도덕성에 대한 숙제를 계속 안고 있습니다. 양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신에 대하여 관찰의 한계를 느낍니다.
이 상황의 양심과 지식적 한계에 대해 신학에서는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와 허물로 타락하여 본래 가진 신기한 관찰력과 거룩한 사유가 죽어버린 상태가 되었다고 정의하여 전적타락설을 말합니다(칼빈주의의 인간론).

 

죽은 양심이란 하나님을 경외하기엔 스스로의 의지가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그 양심과 지성은 기능적으로 벌써 손상을 입어 쓸모가 없어진 기계처럼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컴퓨터의 하드가 손상을 입으면 켜봐야 사용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이제 그것을 기계라 하지 않고 고철(古鐵)이라고 합니다. 재활용으로 가야합니다. 더 이상은 기능을 발휘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살아가기에도 양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인을 한다든가 나 혼자 잘 되기 위해 타인을 못 살게 하면서도 마음에 갈등이나 뉘우침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이 죽어버린 상태입니다. 그 사람은 사실 중환자요 사회에 대단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를 짐승에 비유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2절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도 했습니다.

 

2)병든 양심

 

이는 양심의 작용이 원만치 못하고 바른 삶을 수행하는데 매우 위태롭고 본인 스스로 갈등의 연속으로 삶이 몹시 피로한 사람입니다. 힘들겠지만 그래도 회복하여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어버린 양심과는 달리 개량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유아기와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오면서 벌써 인생은 양심과 도덕성이 상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교육을 반듯하게 하려고 해도 세상이 다 교육적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깨어진 양심자들이 우글거리는 사회 속에서 바른 정서를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가운데 세상은 여러 구조적인 상황으로 인해 날마다 악해지면서 자라나는 청소년은 청년기와 성인으로 갈 때, 사악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의 정도를 비교해보면서 놀랍게 변해 가는 자신을 아파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교육이 잘되는 집안에서는 도덕성이나 사회성에 있어서 부드러운 정서를 키울 수 있겠지만 결손가정이나 부모와 형제의 가족 공동체를 벗어난 생활 패턴에서 자란 사람은 정서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교육되어지는 인격은 아무래도 가족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사회 교육에서 자라는 인격보다 가정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가족으로부터 분리가 되어지고 세상에 뛰어 들어 살아가는데 열중한 나머지 세속의 체인에 익숙해갑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양심에 착오를 일으키며  스스로 아파하고 예상치 못하던 불안 심리를 동반한 삶의 갈등을 얻게 됩니다.
오늘의 사회를 한 마디로 병든 양심의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여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양심적이며 부도덕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병든 사회적 양심의 회복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입니다. 모든 문화의 바른 건설은 양심의 회복을 기초로 해야 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비교적 활동이 잘 되는 살아 있는 양심

 

사회가 악한 것이냐, 사람이 악한 것이냐를 두고 논박을 할 문제는 아닙니다. 결국 인간이 만든 사회이고 보면 문화를 주도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결국 사람들이 원칙을 버리고 양심대로 살지 못한 결과로 오늘의 악한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교육이 잘 된 가정에서 자란 사람과 그런 사회는 비교적 윤리의식이 살아 있어서 기쁜 곳에 기뻐하고 아픈 곳에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살아 있는 양심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이라 하셨는데, 이는 손상 입지 않은 유아 상태의 양심을 천국형 양심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라고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완악한 인간의 죄성이 변하여 부드러운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양심의 온전한 회복은 사회 교육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죄에 대한 근심으로 양심의 상태-죄된 상태를 고백하고, 다음은 지은 죄의 구체적 내용에서 가능한 갚을 수 있는 것은 갚음으로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회개한다면서 훔친 것을 돌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비양심의 사람이 있는데 회개한다면서 갚지 않는 자들입니다.


한 가지의 구체적인 죄된 양심의 회복은 그 회개 작용으로 말미암아 다른 부분에 파손된 양심을 회복 받는데 큰 힘이 됩니다. 소위 시너지 효과를 입어서 여러 가지로 상하고 잃어버린 양심을 소생시키는데 좋은 기회가 됩니다.
성경신학적 용어로 성화(聖化;거룩한 영혼의 인격적 성장)는 결국 참된 인간의 성숙을 의미하는데 모든 삶의 분야에 양심의 건강을 말합니다.

성경은 속 사람도 성장한다고 말하며 영적으로 성숙해진 만큼 삶 자체가 영광스럽게 된다고 인격적 성숙을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머리로 다스릴 수 없고 선한 양심의 회복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양심의 회복과 선한 인격의 성숙은 참다운 행복의 정신을 체득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진정한 행복은 성경적으로 볼 때 속 사람의 성장 정도와 비례합니다. 물질과 명예로는 영혼 뿐아니라 육신적 삶의 모든 부분까지도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성화는 실로 그 기쁨이 시공(時空)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기쁨의 성질이 다릅니다. 잘 변하지 않으며 삶의 원동적(原動的) 힘으로 작용하고 행복을 지켜줍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본성의 양심은 스스로 구원 얻지 못하되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죄를 비우고 그 양심의 자리에 진리를 담으면 놀라운 기쁨과 위대한 힘을 얻게 되어 삶에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을 얻게 됩니다.


그 양심이라는 것이 인격을 가늠할 만큼이나 귀중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그 양심을 가지고 막연하나마 어떤 선한 일을 행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구원 얻기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어떤 숙제가 있는 듯 종교적 의무감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하나님을 만나려 한다면 선행의 의무부터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시던 때 유대인들도 그렇게 윤리주의적 종교관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짐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그런 뜻을 품고 질문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무슨 선행의 행위로 구원을 주시고자 함을 포기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구원 얻을만한 양심이나 선 자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흉악한 것과 선을 구분하는 어느 정도의 도덕적 가치야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죄성을 없이 하고 구원을 얻을만한 소질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주셔서 희생양으로 삼으시고 오직 그를 믿음으로 속죄를 허락 받는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2. 종교적인 구원의 개념

 

시대나 지역적 차이가 있을지라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종교를 생활 문화의 연장으로 볼뿐이지 종교를 갖는 다는 것을 인생의 매우 심각한 일로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종교 이름이 다를지라도 대체로 종교마다 선행(善行)이나 도덕 규범 같은 것은 거의 같은 목적으로 교리나 법도에 가르치게 되는데 이생의 복을 위주로 합니다.
혹 내세를 가정(假定)한 종교에는 사후(死後)에 복된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종교는 고급 종교에 속하는데 이런 종교에서는 특히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한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요한복음 6장 28절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한 질문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사람이 가진 구원관에는 윤리적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 세계 3대 종교라 일컫는 종교에는 경전이 있고 적절한 계명이 있습니다. 경전이 없는 종교는 불성문으로 그 종교의 특성을 알리는 구원의 교리를 교주가 직접 가르치거나 그 종교에서 전해져 오는 전통적인 일정한 규약들이 있습니다.


3. 성경적인 구원의 개념

 

사실상 구원(救援)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량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혹은 경전에서는 이 단어를 성경만큼 흔하게 쓰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성경전서,聖經全書)은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는 말씀을 기록한 구원의 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즉 기독교의 구원관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예수 믿고 영생(永生) 얻는 것이라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목표는 곧 영생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영생이 없고 다른 문화적인 축복이 기독교의 중심으로 알려지는 것은 바른 교훈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생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영생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양심이 영생을 얻기에는 그 기능이 죽은 상태라서 인간의 양심으로는 구원을 스스로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며 본질적으로 인간 영혼의 상태는 죽은 자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런 죽은 영혼, 곧 죽어버린 양심 자체로서는 그 어떤 수행과 선행이라고 할만한 일로써도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 상태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과 행위의 정도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속죄와 영생을 얻도록 언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 자의(自意)로는 구원 얻을 존재가 못됨을 아시고 그 대책 마련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왜 필요한가를 물어야 할 것인데 우리는 의문조차 하지 못하는 영적 우둔함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먼저 중생함을 얻어서 지상에 살면서 영생을 맛보아야 하며 사후에 영원히 부활 영생해야 할 인생입니다.

 


2. 인간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존재 기원을 알기 전에는 인생관이 부정확한 관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구촌에 대칭해서 평가해볼 그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것이 인간 실존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과학적 관찰로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의 의의를 다 캐낼 수 없으며 종교의 다양한 철학으로도 알 길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간의 기원적인 것을 탐구한 문헌이나 고고학적 근거와 광범위한 역사적 삶의 정황을 펼쳐서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근사치를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철학의 존재론적인 합리적 변명보다 우리가 가진 영성(靈性)과 역사 속에 진행해온 행적들, 일반 문화와 종교 그리고 가치관의 흐름 속에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보유하고 있는 질문들, 이를테면 생명에 관하여 또는 사후에 대한 관찰 방식 등에서 인간의 존귀함에 대한 사고의 깊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밥 먹고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철학 없는 대답이 전부라면 삶의 다른 분야에도 그렇게 이성 없이 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성숙함과 진보하기 위한 사유의 철학이 있고 그 노력은 인간의 문화적 사명을 다하는데 필수적인 정신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찌해야 참다운 인간의 실존을 알게 되고 구원에 이를 것인가를 찾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죄인인 인간

 

죄와 죄인은 그 시작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죄는 인간보다 앞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지구촌에 죄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 인간이 만들어진 후 하나님이 금하신 동산 중앙의 실과를 사단이 먹도록 유혹할 때 그 실과를 먹음으로 무죄하던 인간은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불신하는 자들은 이런 원죄(原罪)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죄인이 된 후에 문화 속에서 많은 죄스러운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원죄는 부정할지라도 지구촌에 일어난 인간의 죄된 문화를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원죄와 죽음

 

성경이 말하는 죄인은 도덕적으로 혹은 사회적 죄를 짓고 양심으로 죄인 됨을 아는 그런 윤리의식의 바탕에서 죄인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인 됨은 사람이 죽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증거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을 과학적으로는 단지 세포가 파괴되고 노화되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하겠지만 성경은 보다 죽음의 근원이 죄라고 합니다. 매우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우리 인격 속에 죄가 함께 존립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인생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반드시 죄와 타락의 근원이 있었듯이 사망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속에 죄가 내재하여 알게 모르게 인간의 삶 깊은 곳에서 영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가 종래에는 육체의 사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생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요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이단교주도 있지만 결국 그도 죽었고 또 사람은 누구나 죽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생은 원죄인(原罪人)이라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죽음은 죄 때문에 가져오는 결과이므로 우리는 그 죄의 원인을 해결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종교 그리고 교육에서 인간의 인격과 도덕적 성숙을 통해 죄를 없이하려하나 불가능합니다.


2)원죄와 자범죄의 관계

 

일반 사회적으로 도덕이나 성문법인 규범 내지는 종교법들은 대개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 규례들로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공동 생활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규범을 만들지만 인간사는 전쟁사라 할 만큼 많은 전쟁과 형용조차 하기 어려운 숱한 범죄들이 지구촌의 역사를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악이요 인간 존엄을 헤치는 죄악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서 죄의 정체성과 그 시작을 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 지으신 후 여섯째 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시고 6일간 지으신 모든 것은 아름답고 풍요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으신 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잘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만물을 잘 다스리고 살 것인가를 시험하셨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으로서는 절대로 시험을 왜 하셨느냐고 반문할 어려운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인류 시조 아담으로서는 하나님을 친아버지 같이 여겼을 것이고 당연히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특별히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고 또 에덴동산에는 여러 과실들이 풍족한 관계로 배가 고파서 유혹 받을 본능적인 시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마귀가 뱀 속에서 말하면서 유혹했습니다. 인간은 그 시험에서 마귀를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첫 시험의 언약을 주시기는 아담에게 말씀하셨고 그 때 아내 하와는 아직 지음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아담이 아내에게 전해주었을 것으로 봅니다. 어떻게 전해들었는지 잘 모르지만 사단의 직접적인 시험을 받기는 아내 하와가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직접 들은 자 아담을 상대하지 않고 전해들은 아내 하와에게 접근한 사단의 선택에 대해 궁금한 점을 발견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직접 들려주신 아담보다는 남편으로부터 듣고 기억하는 아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의식과 의지가 약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기에서 또 한번의 아쉬운 점은 하와가 이미 시험을 받았고 그 시험을 남편에게까지 전염시킬 때 아담이 그 실과의 출처를 물어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의문 없이 아내를 믿고 그냥 먹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4절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죄를 짓기는 같은 결과입니다. 단지 먼저 여자가 사단의 꾀임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남편은 아내의 시험을 받아 같이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단은 직접으로 혹은 간접으로 죄를 번식시키고 전염시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되고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마귀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죄라고 정의됩니다. 우리는 이 태초의 죄를 신학적인 표현으로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원죄의 씨로 인하여 그 죄성이 개인적으로 사회적 죄를 지을 때는 이를 자범죄 혹은 본죄(本罪)라 합니다.


동시에 이 원죄는 최초 인간 하와와 아담이 지은 죄이지만  원죄는 모든 그 후손, 즉 인생으로 태어난 일반 사람들은 원죄를 안고 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지만 성경은 우리가 그와 같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되어 첫 사람 아담과 함께 죽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로마서 5장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첫 아담이 인류의 대표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시험을 받아 결국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원죄를 짓게 되고 우리는 자연히 그 아담 후손으로 원죄인(原罪人)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3)사단의 정체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를 지으신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영물들을 지으셨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유추하건대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지으셨고, 보이는 물질 세계를 지으시기 전에 보이지 않으나 영물인 천사들을 지으셨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성경에는 천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그 천사들의 무리를 이끄는 천사장도 나오는데, 

 

 미가엘
하늘 군대 천사장으로 전쟁과 의인의 싸움에 도우는 천사들의 대표입니다.
유다서 1장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세상 끝 날에 이 세상을 지배할 세계적 지도자가 나올 것인데 그가 곧 적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세상에 인정받을 만큼의 큰 힘을 갖게 되는데 그 속에 내재하는 능력은 곧 하늘에서 미가엘 군대와 싸우다 패배하고 땅에 떨어져 내려와 적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들어가서 마지막 세상 통치를 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사단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7절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요한계시록 12장 12절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다니엘서 10장 13절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가브리엘
소식을 알려주는 천사장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이 사실을 천사가 목동들에게 먼저 알려주었는데 그가 가브리엘 천사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그 가브리엘 천사의 임무는 지금도 계속되지만 말세가 되면 사람이 전도를 다 하지 못해도 그 천사가 공중을 날아다니면서 온 세상에게 복음을 단번에 전해주는 것으로 복음 전파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전도의 힘은 우리들의 한계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다음 불가능하게 보이는 전도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다니엘 8장 16절)

 

  사단
그리고 한 천사가 하나님께 대적하다가 버림받아 이 세상을 사망으로 지배하고 종말에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갈 마귀가 되어버린 천사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수하에 있던 천사들도 대장과 함께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단수로 표기되며 한 놈입니다. 그 아래 부하 격인 귀신들은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단(   , satan)은 '대적자' 라는 뜻이니 하나님께 대적한다는 뜻이요, 마귀(魔鬼)라 할 때에는 인간에 대하여 유혹(誘惑)하는 자라는 뜻이고 귀신들, 악귀들, 악령들 등은 그 부하들의 이름입니다.
혹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단의 별칭 루시퍼(Lucifer)라는 이름은 성경에 없습니다. 영어성경 번역에서 나온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그 사단의 본래 이름은 없으나 별칭으로 그 본래 타락하기 전의 이름이 밝은 새벽별이라고 하는 계명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헬렐(lleyhe)이란 단어입니다.

 

사단은 본래 아름다운 존재였음을 반영해주는 낱말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여기 계명성은 직접적으로는 바벨론 왕을 뜻하는 말씀인데 바벨론 왕은 교만함으로 인하여 멸망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에서 사단의 출처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원인을 유추하게 됩니다. 아름답고 존귀하고 영광스런 자리에서 교만하여 떨어져나간 사단처럼 바벨론 왕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한 뜻에서 우리는 한 천사장이 사단이 되기 전에 매우 영화로웠던 것을 짐작합니다.

 

성경에 이 죄의 정체인 사단(마귀)은 여러 가지 다른 명칭이 있는데 이 세상을 사망으로 역사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 온 천하를 꾀는 자라는 뜻은 세속주의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주변에 있다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버림을 받고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서 떨어져 이 세속의 자리로 추락했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지구 출현은 창세기 3장에서 원죄를 짓게 할 때부터 사람과 죄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세속화의 거듭되는 속된 문화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마귀적인 타락 문화에 익숙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세속의 역사 속에 인생은 이제 창조주가 기억이 나지 않게 되자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고 오히려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영향권 아래서 배운 세속적 가치관으로 참된 신을 반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그 본래 하나님을 경외하던 영이 되살아나면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기원을 알게 되고 삶의 방식을 새롭게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세상에 재림하시면 먼저 그 사단을 잡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활동을 막으실 것이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천국을 입성하게 되는 날에 사단을 잡아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2절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옛 뱀은 곧 원죄를 짓게 하던 창세기 3장의 그 뱀 속에 말하던 마귀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을 잘못하기 전부터 죄의 정체인 사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첫 아담이 영감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시험을 받을 때 죄의 정체를 놀라거나 시험자를 의심하는 바가 없는 것을 보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4)사단의 약력


결론적으로 사단은 영적으로 사악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세속에 빠지게 하며 사람 스스로가 마귀를 닮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게도 하는 정신을 주며 마귀 자신은 하나님처럼 어느 정도의 기적을 인간에게 주는 존재입니다. 그의 최종 목적은 물론 인간을 사망케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인생은 마귀에게 반항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결국 마귀의 의지를 따르게 되었고 용꿈 꾸면 복되다고까지 하며 마귀에게 구속되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지로는 상대하여 이길 수 없는 영물의 무서운 존재이며 그 어떤 자라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접신자들이 병마를 쫓는다거나 생활 형통을 위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들은 사실 알고 보면 마귀의 술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그보다 더 큰 귀신을 데리고 와서 잠시 편한 듯이 안주하게 하는 술책인데 그것을 모르고 인간은 귀신들의 놀음에 속고 있습니다.

 

이 영적 세계의 난처한 인간의 실존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마음 속에 성령을 충만히 갖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를 대적할 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 속에서 나타나는 죄란 무서운 힘을 가진 마귀란 놈이 행사하는 의지입니다. 마귀는 영적 존재이므로 사람이 볼 수 없어 더욱 그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을 시험하고 멸망시키기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인간의 죄된 문화 속에서 마귀는 예사롭게 다방면으로 사람을 타락하게 하며 사람들은 이런 처지를 감각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 인간은 자신만의 책임으로만 알고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의(義)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과연 시대는 변하였고 정신 문화가 발전했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하여는 특별한 방도가 없음을 봅니다. 죄의 정체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교육과 수도의 생활로도 불가능합니다. 죄의 정체인 마귀의 출처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를 이길 길은 하나님의 방편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방도를 들어야 하고 찾아서 적용해야 합니다.

 


2. 인간의 실존

 

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조직되어 있고 그 실체는 어떤 것일까요? 아직도 인간은 실존적 그 가치에 대한 바른 확신이 없습니다. 지구촌의 모든 과학 문명은 인간을 향한 목적적 삶을 지향해 왔고 현재도 계속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의 기원을 알 수 없고 존재의 가치에 대한 바른 판단이 없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그 영감적 차이가 있어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논함에 몇 가지 거론되는 설(說)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기원적 존재의 이해는 성경을 근거로 할 때만이 가장 사실적이고 빠른 시간에 타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영육(靈肉)의 존재

 

(1) 3분설
먼저 성경에서는 인간의 존재를 말할 때 영혼의 존재를 특이하게 말해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서 인간의 존엄한 인격적 가치를 함께 증거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과 그리고 육체의 조직 속에 또 하나의 정신을 더하여 3분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인간을 영과 혼과 육체의 조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인격 3분설에 의존한 학설로 육신과 함께 인간의 정신을 2분화하여 영과 혼 그리고 육체로 인간의 존재를 3분설로 보는 것입니다.


이 학설의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3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말씀에서는 4가지로 표현해줍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을 인간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성구라 봐야 하는지는 본문에 대한 성경 해석 문제가 주석학적으로 먼저 선결되어야 합니다. 본래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인간의 실체를 말하기보다 온갖 정신과 인간의 인격 전부를 뜻하고자 해서 표현한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 3분설로 토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성도의 정신 세계를 교묘하게 오해시키는 자들이 있어서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이성적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찬송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활동하게 될 때 잘 하는 것으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신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평가할 때 너무 영적이니 혼적이니 하면서 분리하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혼적인 생각은 일반적인 인간적 생각이라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정해버리면 일상의 이성적인 활동이 모두 무효가 됩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의 정신 활동이란 하나님의 성령이 친히 역사하실 경우도 있고 단순히 성령의 감화로 인한 변화 받은 이성의 활동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후자가 현실 생활에 많이 적응되는 바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여기 말씀에서도 보듯이 영으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영적인 것과 일반 정신적인 것을 대조하여 영지주의자처럼 신령성에만 치중하면 곤란합니다. 주로 이단들이 그렇게들 주장하며 자신들만이 바른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편협된 주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 혼 육

 


위와 같이 인간의 구조를 3 부분으로 이해하는 학설입니다. 각각 기능을 설명할 때,

 영 : 히브리어로는 루아흐(j'Wr, ruach)이고 헬라어로는 프뉴마(      )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관계를 가지는 곳으로 보통 성경에는 성령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인간 됨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는 인격의 본질입니다.


예레미야 10장 14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여기 '생기'란 단어는 루아흐로 사람에게 주신 영을 말합니다. 우상에는 그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12장 1절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는데 곧 루아흐, 곧 영을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욥기 12장 10절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생물들에게는 혼으로 인생에게는 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혼은 히브리어 네페쉬(vp,n,)이며 영은 루아흐(j'Wr)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구절에는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을 같은 단어 루아흐(j'Wr)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에게도 사람의 영혼과 같은 영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짐승은 죽어 없어지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동물에게는 영이 존재한다는 뜻아 아니고 다만 생명의 본능적 기능으로서 동물 나름대로의 감정 좌소가 있음을 뜻합니다. 성경에 죽은 동물의 영이 돌아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혼 : 히브리어 네페쉬 (vp,n,)이며 헬라어는 푸쉬케(yuchv)입니다.
동물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생기는 네페쉬((vp,n,)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헬라어 푸쉬케(yuchv)로 보통 3분설자들이 혼이라 번역하기 원하는 단어입니다.
혼이라 번역하는 네페쉬가 때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을 뜻할 때도 사용하셨고 혹은 사람의 시체를 말 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51장 1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로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황충같이 네게 가득히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리라 하시도다'
'자기'라는 단어가 네페쉬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22장 4절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시체'라는 단어가 네페쉬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체로 혼은 인간의 정신적 면을 고려할 때 사용되어지는 낱말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이미 그 혼의 상태가 영적 활동으로 하나님께는 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은 하나이나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는 인간적 사고에 머물지만 그것이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얻게 될 때는 하나님의 영으로 사유하고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직적으로는 하나님이 본래 흙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완성하신 바 기원적으로 인간은 2가지로 창조되었습니다.
원죄를 지은 후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영감에 감염되고 훈련되어 육체와 함께 영적 사유가 죽게 되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인격 전체를 논하려 할 때 3가지의 본질로 조직된 것처럼 오해하는 것뿐이며 영적으로 정신의 가치를 높일 것을 권면하려 할 때 생기는 한 질적 요소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정신의 세계를 이원화해서 영과 혼을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분별 세계입니다. 3분설은 대개 신비주의자 혹은 철학가들의 관념에 충실한 사상입니다. 영감주의에 너무 심취하면 사람의 일상적 정서와 생각과 종교적 감정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비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육 : 히브리어는 바사르(rc;B, basar)이고 헬라는 살커스(savrx, sarx)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 2분설
성경적으로 인간의 조직에 있어서 그 질적 요소로는 2분설이 합당한 이론입니다. 인간은 육(흙)과 영(혼)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은 영과 혼을 번갈아 가며 육과 함께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 영혼이라 번역한 원어는 3분설자가 말하는 인간의 정신, 혼을 뜻하는 헬라어 푸쉬케(    )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결국 여기 사용된 혼은 영과 다름없는 인간의 본질적 요소인 그 영이기 때문에 국역은 영혼이라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여기에 '영혼'의 원어는 역시 푸쉬케로 기록되었고 결국 인간의 영을 말하는 프뉴마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 '영혼'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뉴마입니다. 그러므로 국역에는 영혼이란 말로서 영과 혼을 함께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의 영혼도 원어는 프뉴마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인간의 본질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영 혹은 혼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2분설이 성경적이라 봅니다. 물론 두 가지의 학설은 신학자들이 모두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분설이 정통적으로 바른 견해입니다.


         영혼 육


여기서 2분화, 3분화의 두 견해가 성립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영적 존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인간이 지음을 받을 때는 3분화 된 존재가 아니었는데 원죄로 인해 타락한 후 3분화 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새로운 영혼의 상태와 그 의지, 그리고 본성에서 성화(聖化)되어 가는 중인 인격적 갈등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정신을 혼이라 일컫지만 결코 인간의 조직이 3가지 구조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두 요소로 만드셨고 그 후 타락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성의 합리주의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비신앙인으로 소위 본성 자체로만 살 때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영적이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목표와 형식이 바뀐 사람에게 순간 순간마다 삶의 정신이 영적이야 혼적이냐를 따지는 것은 쓸데없이 혼란을 가져올 뿐입니다.


2)살았으나 죽은 존재

 

죄인된 인간은 사실상 육신이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에서 생명과 사망에 관한 표현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뜻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영혼의 상태로 사는 인간은 살았으나 이미 꺾어진 꽃나무처럼 죽은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즉 사형선고를 받은 자의 기다림처럼 삶의 그 마지막은 멸망이 정해진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허물'은 탈선을 뜻하고 죄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법을 탈선하여 옳지 않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고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영생에 관한 감각이 없어졌고 그 기능을 잃은 상태로서 사후의 세계에 대한 사유가 옳지 못하며 대책도 없으며 지상 문화의 삶에 대한 거룩함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로 방황하는 영혼의 존재는 끝내 죄로 죽고 말 것이며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세상의 짧은 삶에도 진정한 행복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불안과 불행의 연속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 믿어 중생함을 받아서 영이 살았으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순간에  부활의 몸을 입어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3)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종교심

 

비록 하나님을 떠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정신이라도 그 영혼의 본질적인 성격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입김을 받은 바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동물과 달리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이 있고 또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영의 성질 때문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그러한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 때문에 종교가 생기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줄 믿습니다. 죄인이라도 기질은 영생의 사고가 있어서 완전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영생을 바라는 심정입니다. 다만 그 방법을 스스로 알 수 없을 뿐이지 사람은 영원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영이 존재하여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택자이면 반응할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성의 기능을 성령께서 살리시면 그제야 잊고 살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놀라운 회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는 불신자도 부활을 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변할 것이며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영혼이 육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영과 육이 분리가 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혹 하나님이 그 영혼을 도로 불어넣으시면 육신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물론 죽은 지 며칠씩 지나도 상관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실례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어도 영혼을 다시 부르시니 살아났습니다(요한복음 11장). 본래 영혼은 하나님의 숨이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십니다(인명재천,人命在天).
때문에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고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지구촌에 왔던 모든 사람은 부활을 입게 되고 영원한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영혼과 육신이 서로 분리된 죽음의 사람이 그 때는 다시 합쳐져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시 육체에 넣으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계시면 죽지 않고 아무리 살려고 해도 뜻이 없으면 죽음을 받습니다. 이것은 운명론적인 사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하심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정신은 결국 많은 종교를 창안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죄에서 해방되고(속죄) 구원 혹은 영생을 얻고자 함에 기인합니다. 이런 속죄와 영원을 사모하는 구원의 영적 생각 때문에 생겨나게 된 여러 종교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미개인의 종교
천체, 나무, 동식물, 무생물 등 자연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스피노자(1632-1677, 화란 합리주의 철학자)는 "인간이 행복하려면 신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자연을 아는 것과 같고 자연의 법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연 숭배를 언제부터 해 왔을까요? 성경에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에덴동산 중앙의 실과를 먹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연을 신으로-구원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0절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한 것은 범죄하므로 이제 부끄러워졌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두려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무서워하여 자연을 의지하고 숨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인생이 의지하고 신처럼 섬기려는 자연들도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바는 자연이 아닙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산물에 영혼의 불안을 의탁하는 어리석은 사고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것보다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잘못된 판단이며 그것은 사단의 조종입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인간을 신격화하는 종교들
카톨릭의 교황 신성화, 여러 이단들의 교주, 석가나 마호� 등 인간을 신격화하여 그 교주를 신처럼 모시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란 죄와 허물로 죽은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신성시 할 대상이 아님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인생은 태어나면서 범죄한 아담 후손으로 죄를 안고 태어나며 거짓된 마귀의 정신을 받아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교황무오설은 근본적으로 성경을 무시하는 억지 주장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불의한 존재이며 아무라도 무흠할 수가 없습니다. 교황도 평범한 한 부모에게서 나온 인간이기에 그가 실수 할 수 있고 죄를 의도적으로 지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 보면 교황무오설의 허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세카톨릭의 암흑시대만 보아도 우리는 교황의 잘못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천주교는 교황무오설을 계속 주장합니다.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라든가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것 등 인간을 신성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사이비종교에서 교주가 신성시되는 것과 마리아가 찬양을 받는 것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실 경배이지 사람이 받을 수 없습니다. 이단에게 매료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됨과 그 한계를 알았다면 아무라도 사람을 신처럼 믿을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존경스러운 스승이라도 신성시(神聖視)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에 위험하고 긍휼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다만 스승된 자는 일반인보다 좀더 성숙한 인격과 도리를 가지고 가르치는 자의 덕을 쌓아야 할 것이며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에 인격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절대시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권위주의라는 말과 신성시한다는 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권위는 있어도 신성시는 할 수 없습니다.

 

(3)윤리적 종교
대개 종교에는 일정한 규범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선해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느 시대의 사람에게나 안고 있는 신에게의 부담감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시편 14장 2-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선한 것같아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선치 않으며 도리어 악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우리 인간이 행한 일들이 선한 것일까요? 물론 사소한 일에 대한 덕행(德行)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람은 흉악한 범죄의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라고 한 선지자는 위대한 인물임에도 부패한 인간으로 고백합니다. 그 한 사람의 무슨 범죄적 사실이 있어서 고한 말이 아닙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고 큰 부자로 자식들을 건전하게 키우고자 했으며 이웃에게 잘 하였던 욥이란 사람도 인생을 논하기를, 욥기 25장 5-6절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는 인간에게 의로움이란 하나도 없으며 예수 믿고 겸손하게 자신을 깊이 돌이켜 보게 될 때, 참으로 벌레같은 존재요 그 삶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얼마나 많은 죄악상이 드러나는지 우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어느 정도의 도덕과 선행이면 신의 분노가 풀어지고 구원의 혜택이 있으리라고 여깁니다. 일반적인 종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무엇이 선(善)이며 악(惡)인지 그 척도가 없습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악을 구분하기 어렵고 지역마다 풍속과 사회적 문화에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윤리주의적 구원관은 세계적이고 보편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윤리주의 구원관은 사회의 도덕적 보편성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 얻을 윤리관을 정할 수 없습니다.

 

(4)물질만능, 과학만능주의
인간은 결국 물질과 과학만능주의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려 하는 아주 가당찮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해일처럼 일어난 물질주의의 거대한 유물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은 공산주의 뿐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 빈부의 양극 현상을 만들어 내었고 국제사회도 부국의 힘이 어떤 원칙보다 현실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의 첨단과학은 문화의 테크닉이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케 하는 부작용이 많이 생겼습니다. 너무 과학화를 지향하다가 인간미를 잃고 자연적인 정서가 매말라버린 것이 많습니다.
물질을 신으로 여기던 유물사관의 공산주의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참된 행복을 주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가정과 교육을 무시하고 돈만 벌겠다는 사람의 정신 속에는 물질주의라는 관념의 신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런 정신 가운데 과연 가족이나 개인의 영혼이 온전할까요?

 

(5)적그리스도를 신으로 믿을 때가 옵니다
온 세계는 말세가 되면 결국 적그리스도라는 세계적 정치자를 신으로 모시게 될 때 세상의 종말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 세계 지도자인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그를 위한 종교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그의 능력은 공중에 있던 사단(마귀)이 직접 땅에 내려와 세상을 지배하게 되니 얼마나 지혜롭게 보이며 능력이 대단하겠는가를 상상하면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30절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한계시록 13장 8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 때가 되면 사회적 구조가 그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정체, 경제, 종교는 그를 위해 이용되고 주도될 것입니다. 마침내 인간의 인본주의 역사가 최고조에 이를 것이나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면서 그들과 불신자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삶의 문화는 죄로 충만할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종교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논하고 그 구원의 체험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그 구원의 객관적 가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고 기독교 구원의 그 본질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 구원의 확신


인간은 이론만으로 진리를 깨우치는데 부족합니다.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특별한 신앙 간증이나 우리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경험으로 미루어봐도 체험 없는 신앙은 지속되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알고 입으로 시인한다 하여도 그 말씀을 좀더 인격과 생활 속에 체질화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경험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입으로 주님이라 말은 하지만 속으로 다 믿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종교적으로 단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의 문화적인 도움을 받는 정도로 생각하는 보통의 종교인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 중생 받지 못한 자요 영적으로 완전한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자로서 아직 영적으로 영생을 체득한 자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외적으로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인치는 것이면 확인이 쉬우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인지를 외형적으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2천여년 전에 이 땅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내 죄를 위한 속죄로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구약 성경에서 계속적으로 예언되어졌고 신약에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그 약속들에 대한 말씀을 사람들에게 직접 이해시키시고 자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친히 증거 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 발췌하여 우리가 전하는 바 복음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이 놀라운 속죄의 길과 내세의 길을 2천년 동안 계속 증거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소위 선교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요소를 가지고 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이 언약의 복음을 확신하지 않으면 교회를 다녀도 단순한 종교인일 뿐이지 구원을 책임질 수 없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는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1. 비체험적인 것

 

구원의 확신이라면 마음 속 어떤 경험의 분야이지만 그 구원의 섭리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경험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경험은 사람마다 정서가 달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 생긴 속 사람의 발견은 확실해야 합니다. 확신하는 것은 영적 경험의 정도야 어떻든 신뢰하는 바에 대한 공적인 고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합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은 성경의 원리에 대한 개인적인 적용의 심정적 이해와 아울러 약간의 객관성을 표출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체험적인 것과 비체험적인 것을 구분하여 논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예정(豫定, 선택)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어떻게 운영하실 것에 대한 모든 섭리의 청사진을 미리 예정하셨고 그 예정의 뜻대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특히 인간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 예정하심을 자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정하시는 것은 미리 정하셨다는 뜻인데, 특별히 구원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를 구분하여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합리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워집니다.


친히 주께서 말씀도 하셨지만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예정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를 설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예정하실 때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에 이루어 놓은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단독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의 의지 안에서 정하신 예정이어서 피조물인 우리는 그 의지의 결정을 경험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정에 대한 대표되는 구절을 보면,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하면서 구원 결정이 세상 만들기 전(창세 전)에 이미 택정하셨고 그 택정한 자들이 때가 되어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9장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렇게 하여 구원이라는 작업은 순전히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에서 계획되었고 실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고 노력을 하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지무용론이 나올법한 예정론입니다.

 

이 예정의 결정에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믿어지고 확신이 들 때, 이런 사실이 깨달아진다는 정도입니다.

우리 사람은 소위 형평성 논란으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오해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에 대해 반감으로 합리적인 이성에 기초하여 자유의지론적 구원관을 주장하게 됩니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감리교(성결교)의 신학(웨슬레신학)이나 카톨릭 신학이 합리주의 구원관입니다.


교리의 역사는 일찍부터 구원의 확증이 인간 의지의 산물인가, 신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 결탁인가, 아니면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입각하여 오직 하나님의 예정된 자들만의 구원인가 하는 문제는 수 차례 진행되어 오고 있으며 아직도 구원론에 관련하여 예정론은 계속되는 신학적 논제이기도 합니다.

누구는 구원 얻게 되어 있고 또는 유기된 자로 구원 얻을 수 없는 자로 양분되어졌다면 우리들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으로는 불만의 여지를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신의 성품에 어찌 그런 기회 불균등의 논리가 성립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선택적 구원에 대한 교시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6-18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위에서 보는 성경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심인 소위 기회 균등의 법칙으로 하나님이 만약에 선택을 해서 구원을 한다면 분명히 그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사도 바울이 애굽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놓고 선택 구원설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애굽이라는 나라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내용의 요점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오래 동안(400년) 압제 당하고 살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지도자 모세를 준비하여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을 보이시려고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더욱 악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으로는 탈출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모세를 통하여 계시하신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므로 애굽을 탈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체험하게끔 애굽을 악하게 만들었다는 상대적 역할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지나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적으로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보게 하셨습니다.
순전히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위해 애굽은 상대역이 되었고 홍해의 기적적 움직임마저 소제가 될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선택받은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사실을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에 대하여 무조건 의문시한다면 우리는 사실 정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기 위해 그 하나님의 의지에 대하여 불만보다 차라리 그 구원의 기회를 얻겠다는 바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의지가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부족한 판단력의 인생이 신의 의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이 과연 타당이나 한지 의심해볼 필요도 있고, 우리들의 관측이라는 것이 언제라도 유동성이 있고 변화무쌍해서 하나님의 의지를 판단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작정이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 중에서 개인적으로 부르실 때만이 구원의 성취가 가능하게 됨을 시사합니다.

 

마태복음 22장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는 말씀대로 구원의 초청에 응할 수는 있지만 구원을 얻는 결과는 하나님의 택자들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6장 64-65절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팔게 된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유다는 부름을 받아 외적으로는 사도라는 인명에 가담되었지만 그는 진정한 택자가 아니었기에 자살로 생애를 마무리한 비운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그러므로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같이 사단의 시험을 받았으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하는 사단은 쫓아내어 주시고 가룟·유다에게 역사할 때는 그 사단을 쫓아내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유다에게는 절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이 기막힌 인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원죄인으로서는 누구나 태어난 자체가 죄인이요 고통의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될 유다는 참으로 악의 도구로만 쓰이다가 버림을 받게 될 운명의 사람으로 났음이 두렵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이 유다 속에 역사하는 사단을 쫓아내실 수 있는 능력은 있어서 베드로에게 있던 사단을 물러가게 하셨으나 가룟·유다 속에 역사하는 사단은 그냥 방치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 내부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원 얻지 못할 사람도 함께 종교생활자가 되어 교인 형세를 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해도 구원과 상관없이 능력을 행하고 기적을 보여주기까지 해도 그는 마지막 날에 버림을 받는 기가 막힌 사람도 있음을 봅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때 구원 얻지 못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말씀을 볼 수 있는데,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함께 버림받게 되겠지요? 구원 얻지 못할 사람으로 예정된 무리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런 숨은 하나님의 예정이 교회 역사의 구원사적 내용에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를 영접하고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우리가 택정됨이 무엇보다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같은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 믿어 구원을 얻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결과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우리가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근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며 그분의 의지대로 가능합니다. 우리의 양심적 작용이 구원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우리의 도덕이나 노력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성경기자들은 자신의 구원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확신한 자들이 같이 고백할 수 있는 깊은 영혼의 인식입니다.
시편 139장 16절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욥기 14장 5절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2)중생(重生)

 

불교에서 말하는 일반 사람을 뜻하는 중생(衆生)이 아니고 기독교에서 사용할 때 쓰는 이 낱말(重生)은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거듭남에 대한 체험 문제는 분분한데 결코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란 그리 쉬운 성질의 내용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극히 추상적인 개념에 가까우나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남은 매우 신비로운 인격적인 체험에 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으로 거듭나는 것을 형식으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다른 증거들로 거듭남을 증명 해 나가는 것뿐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중생의 신비에 대하여 성경은 직접적으로 그 결과에 대한 개인의 체험을 물어, "거듭났습니까?"라고 추궁하는 어떤 교단의 잘못된 질문은 성경에 없습니다. 혹시 중생한 어느 시기라는 점은 고려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해낼 수는 없고 그렇게 알아내야 구원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거듭난 자의 새롭게 나타나는 성경적인 신앙 행위를 통하여 거듭남의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가령,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한다든가 통회하는 태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교회 생활의 변화 등을 보면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고 여길 뿐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기본적인 변화의 모습은 신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인적인 인지도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자아를 파악하고 확신하라고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사실이 불확실하다면 그는 성경적인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러나 성경에는 교회 지도자나 혹은 전도자가 일반 신자에게 너희가 거듭났느뇨? 라고 하는 질문 형식은 찾을 수 없는데 모 교단에는  중생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그리고 그 지도 목사의 가르침 안에서 확증할 수 있는 것인 냥 이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생은 영적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출생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출생하게 되는 본인은 그 유아 때를 확신하거나 그 출생한 날짜까지 처음부터 기억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중생으로 거듭 출생하는 성령의 영적 거듭남도 그처럼 처음부터 곧바로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영적 출생에 대한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가령, 야고보서 1장 18절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할 때, 말씀을 듣고 감동 받아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내용을 영적으로 감화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면 성령으로 중생하게 된 자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혹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주께서 그 고백의 지식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지만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지식이 어디서 왔는지 영적 지식의 출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중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신비스런 하나님의 역사에 속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17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고 고백은 했지만 그 지식의 출처를 베드로 자신이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 마음에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오는데 이것이 쉬운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예정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신비로운 결정이요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중생의 신비는 하나님의 역사로 주변 사람이나 본인이 객관적으로 그 형식을 보여주거나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로운 일은 생애에 단 한 번만에 이루어지고 두 번 거듭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것을 목욕하는 것에 비유하셨고 또한 매일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회개하라는 뜻으로 발을 씻는 것으로 교훈하셨습니다. 중생의 신비는 단회적으로 끝나며 유지됩니다.


요한복음 13장 10-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다는 아니니라'고 하신 사람은 예수를 판 유다인데 목욕한 자, 즉 중생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고 다른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한 자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대조해 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이란 성령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신비로운 영적 소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룟·유다의 경우는 죄가 남달리 크기 때문에 자살하여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 곧 중생의 영이 없기 때문에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얻을 기회가 없었기에 좌절 그 자체에서 양심이 하나님이 언약하신 구원의 기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한 그 자리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으로도 표현되는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영으로서 성도와 영원히 함께 하실 영이시며 그 영으로 인하여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얼마나 다니고 사회 봉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웠느냐가 아니라 구원은 성령의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그 사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몸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교회 교양교육이 잘된 사람의 인격적 교감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이 자연스레 고백되어지는 영적 고백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적어도 윤리적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중생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마치 유아가 아버지를 부르듯이 그런 관계가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두려우신 신이 아니라 미쁘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관계용어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2. 체험적인 것

 

중생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확신되어지는 것으로 그 중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기에 체험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중생한 자로서 고백하고 생활의 변화와 의지를 통해서 그의 중생을 확신케 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객관적 체험을 보여줄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유한된 인간은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의 구원에 대해 바른 견해와 증거를 위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믿습니다, 믿습니다는 말만 한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없다하여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정보를 듣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와 같은 온전한 신앙인이 되려는 것은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하게 모르거나 혹은 예수 믿는다는 자신의 정체성이 불투명하게 살아간다든가 하는 것은 변화 받은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대체로 예수 믿는 이는 삶의 요소마다 중생하여 거듭난 영혼의 실체를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르는 노래가 다르며 목적이 다르고 방법이 다릅니다.


1)소명(召命)

 

소명에는 외적으로 부르시는 소명과 내적 부르심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구원의 초청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통하여 경험되는 것입니다. 전도 집회나 예배에 초청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까지는 하나님이 그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고는 볼 수 있어도 완전한 구원의 대상임을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활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집회 초청에 응하는 것까지는 구원의 단계로 적극적인 성질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대개 이성적으로 응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확실한 예정 가운데서 구원받을 사람으로 초청되었다는 확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용어로 그런 부름을 외적 부름이라 하고 영적으로 부름을 입어 구원을 확실히 얻게 될 때 내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구원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그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새로운 경험과 그 환경적 변화에 대한 감각이 특별하고도 감동적으로 체험될 것입니다.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던 때 일어난 현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면서 전혀 새로운 경험의 순간임을 고백합니다.


전도와 설교를 들을 때에도 보통 연설을 듣듯이 하지 않고 매우 심도 있게 영적인 귀를 열게되고 구원의 메시지를 또박또박 잘 알아듣게 하사 믿을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메시지를 통하여 응답하게되는 신비로운 내적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먼저 택하셨기 때문에 또한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페인트공이 교회당 천장에 페인트칠을 하던 날 목사님이 돌아오는 주일에 하실 설교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 내용 가운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외치는 순간 페인트칠하던 사람 자신의 귀에 깊이 그리고 뜨겁게 감동적으로 들려져서 그 순간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곧 내적으로 소명의 체험이 되는 순간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사람 중에는 사도 바울의 경우가 아주 특별한데, 예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시고 땅 위에서 40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신 후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을 잡아 가두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다메섹 도상으로 걸어가던 중에 하늘로부터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게 빛나시는 주님을 뵙게되고 그 도상에서 엎드려진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자신은 이방인을 위해 전도할 준비된 그릇,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명을 받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내용은 믿음과 사명을 함께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라 보통 사람들의 경험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어떻든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필수 사항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며 구원에 대한 증언자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고 물으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도 그들에게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한 말씀이며 그 질문에 대한 고백을 하게 함으로써 구원 얻은 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실 의도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예수께서 가이시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사람이 마음에 없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심중에 없는 말을 한다면 지어내기 위하여 하거나 무의식에 잠재한 말이 나왔거나 소위 헛소리입니다. 그러나 양심으로 하는 말은 그의 의지에서 나온 말로 그의 인격을 반영합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8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
그러므로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억지로 말로만 고한다고 구원이 확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할 수도 없는 사람에게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식을 통하여 공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려면 먼저 믿음의 양심적 고백을 위한 몇 가지의 기본 교리를 묻고 고백하게 하는 입교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답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공히 믿음의 사람임을 확증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2)회개(悔改)

 

회개는 일반적으로 반성(反省)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종교 상식으로 회개를 일종의 반성으로 보기 쉬운데 성경에 일컫는 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가룟·유다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그가 예수를 은 30량에 팔고 나중에 반성이 되어 양심이 아파서 자살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후회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동정을 느끼게 되지만 영생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유다의 자살에 대해 해석을 조금씩 달리 합니다. 그가 본래 예수를 팔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돈 받고 팔았지만 예수는 능력이 있으므로 살아나게 될 것을 알고 재주를 부렸다고도 합니다. 혹은 과연 유대인의 왕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시는지 시험삼아 팔게 되었는데 진짜 돌아가시게 되어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자살했다는 해석 등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의 배신행위는 결국 화를 불렀고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데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후회가 일반적인 양심의 반성이었지 구원에 직결되지 못했다는데 문제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반성이 따르고 양심적으로 후회함이 생기면 하나님을 찾아 용서를 구할 것 같은데 그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어떤 것일까요? 그 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회개하는 것과 후회하는 것은 벌써 여자적 의미가 다르지만 회개는 하나님이 감동케 하시는 신앙적 반성이고 후회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라는 점이 다릅니다.

회개라는 단어 메타노이아(metavnoi)는 하나님을 반드시 찾아서 해결하고자 하는 희망 있는 좌절이지만 메타멜로마이(metamevlloma)라는 후회함은 전혀 신에게의 솔직함과는 무관한 사람의 의지로서 나타나는 반성입니다.


이런 차이점은 있으나 그 나타나는 현상은 통곡이라든가 눈물로 양심의 변화를 밖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은 비슷합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반성이 있고 소위 회개한 사람들의 부드러운 모습과 같은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와 후회는 하나님께로 향해 죄를 회개하느냐 혹은 인간 스스로의 반성이냐 하는 차이점으로 구분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통곡과 가룟·유다의 후회의 차이에서 그 양심의 결과에 대해 취하는 행위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새벽에 그도 잡혀갈 지경이 되었을 때,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계속적인 추궁에 두려워 예수를 욕하기까지 하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배신했습니다.


그리하고 나니 주님의 예언대로 새벽닭이 울게 되었고 그는 예수님의 예고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밖에서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유다처럼 단순히 죄송하고 마음이 아파서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자결을 한다면 양심적(?)인지는 몰라도 구원 얻을 기회는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의 회개와 가룟·유다의 후회를 비교 분석해봅시다.


예수님을 배반하였다가 통곡하며 회개한 베드로는 다시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복음의 말씀을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38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할 때에도 회개하는 사람의 눈물이나 통회하는 태도의 차이는 개인적으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성격이 감성적인 사람은 의지적인 사람보다 더 많은 통곡이 있겠지요. 대개 죄인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속죄의 기쁨과 영생을 맛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주 격정적일 수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혹 어떤 이는 쓰러져서 감히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까지 가는가 하면, 혹 어떤 이는 행동의 큰 변화는 없으나  역시 그도 눈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죄 사함 받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설교와 같은 양심을 두드리는 메시지를 듣고도 전혀 감동이 없거나 겨우, 옳은 이치로고... 하는 정도로 지식에서 머무는 심령이 굳은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하나님의 택정인이라면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이르게 되면 그도 통곡의 시간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 얻은 회개를 하고 나면 어떻게 변할까요?

(1)찬송하게 됩니다
찬송은 곡조에 맞춘 기도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가장 귀한 영적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써 드리고자 하는 인간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신의 흥겨움을 위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입니다.
회개하고 나면 사람의 영적 성향이 첫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후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임을 성경에서 볼 수 있으며 모든 성도들의 체험이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나 애굽에서 구원을 얻고 애굽의 군인들은 그 홍수에 수장된 현장 앞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출애굽기 15장).
출애굽기 15장 1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주께서 재림하시고 세상에 악한 자를 심판하시며 성도에게 승리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요한계시록 19장에는 연이어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요한계시록 19장 5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대개 처음 교회 나가면 찬송을 많이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구원에 대한 표현력도 약하고 신앙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양심으로 새롭게 생겨진 영적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에 적절한 자신의 구원 경험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작시자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자기 신앙 고백처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찬송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아직 구원의 감동이 없는 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송하기를 즐겨하고 시간도 공간의 제한도 없을 정도로 찬송하기를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광신도가 아니라 절제하기에는 너무도 기쁨이 충만해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기쁨을 얻은 사람이 노래가 없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찬송소리도 크게 부르고 싶은 희열을 감출 수 없습니다. 찬송은 때와 시간도 없이 터져 나옵니다.

 

(2)감사
하나님께 죄된 영혼의 씻음으로 인한 평안함과 가벼워진 기쁜 마음을 감사함에 있어 먼저는 찬송이 있고 이어 물질적으로 가능하다면 표시하게 됩니다. 물론 물질이 없으면 주의 전에서 봉사할 일도 찾아 구원의 감격을 행동으로 보이고자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감사할 생각이 든다는 것만큼 귀중한 자산이 없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마음이 생겨야 하겠지요. 그것은 회개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새로 거듭난 존재가 된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으나 또한 회개할 때마다 감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구약 성경에 야곱의 회개는 우리에게 회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됩니다. 그는 일생을 속임수로 살아갔습니다. 아버지와 형님과 삼촌을 속이는 아주 나쁜 기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그가 물질의 풍요를 얻기는 했지만 나이 들어 고향의 형님을 뵈러 귀향하는 중에 얍복강가에서 고향 떠날 때 지었던 거짓 죄가 양심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형의 낯을 뵙기가 너무도 두려워 모든 식구들을 앞서 보내고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 천사와 씨름하면서 좋은 말로 축복해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날 밤 죽도록 회개하고 기도에 간절한 나머지 환도 뼈가 위골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니 아침 햇살이 그의 즐거운 마음과 소망의 정신을 반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두려워했던 형님을 만나서 고백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창세기 33장 10-11절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에서 보면 한번도 그렇게 말하고 살아오지 않았던 야곱의 아주 특별한 언어가 입에서 계속 적으로 나오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것이라 고하는 점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면 무슨 일에나 감사가 넘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내 힘으로 살았고 내 자랑이 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로 보면서 나의 자랑은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3)편한 얼굴
얼굴은 마음의 상태를 빛으로 연출하는데 소위 오라의 빛이 각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한 후 하나님의 용서함을 얻게 된 얼굴빛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봅니다. 현대인의 얼굴은 성형수술로 외모를 가꾸는 기술이 발달했지만 순수함과 진실한 영성 회복으로 나타내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은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외모보다 정신이 아름다워야 외모가 돋보이는 법입니다.

미소는 배워서 미소를 짓는 것보다 미소지을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를 속에 채워야 합니다. 기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속에 충만하면 자연히 기쁨이 밖으로 노출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안한 자기 얼굴 모습이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얼굴은 전도지와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얼굴빛은 곧 주님의 얼굴을 대신할 만큼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자신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과거 일본에 예수 잘 믿는 하천풍원 선생이 있었는데 소문이 천황에게까지 갔습니다. 천황이 보고자 하여 그를 불러 묻기를 '예수는 어떤 사람이요?' 하니 그 선생의 답이, '예수는 나 같은 사람이요'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천황의 대답이 더 걸작인 것이, '하천풍원 선생 당신 얼굴만 보아도 예수라는 사람이 참 좋겠소'라고 했답니다.
요한복음 12장 45절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신뢰를 얻고 예수님의 형상을 엿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인정하여 믿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현실적인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4)시간 충실
성도가 되면 여러 부분에서 생활 태도가 변합니다. 그 중에 시간을 아주 충실히 사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지키려 합니다. 시간의 개념은 곧 하나님의 뜻이 운행되어지는 과정으로 알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회개하면 나태한 사람이 성실한 인간형으로 바뀝니다. 삶에 대한 의욕이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자연히 시간에 대해 충실해지기 마련입니다. 나태함이 얼마나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게으름의 죄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노동의 의무는 처음부터 주어졌습니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의무 중에 문화에 충실할 사람으로 명하심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범사에 충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새로운 심령이 문화생활에도 성실케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5)사명감
무슨 일에나 사명감이 있어야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데 충성된 사명감은 모든 성도들이 가진 새로운 정신입니다.
회개하고 역사관이 달라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본 자세입니다. 바울이 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주님께 질문한 말은 구원을 얻은 자들이 던져야 할 귀중한 물음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사람들이 사명감을 무슨 특별계시로 아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감은 회개한 자가 위로부터 받는 새로운 의지입니다. 교회에 직분을 받아 충성을 하든지 아니면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는 것은 진정으로 변화 받은 성도의 태도입니다. 기독교인이 무슨 일을 하든지 태만할 수 없고 오직 근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성도의 생활은 칼빈주의에서 말하듯 모든 문화 활동에서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전도의 일을 하는 것만 충성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일과 공익에 몸바쳐 사회에 안정과 발전에 동참하는 것은 성도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지상 문화에 성경대로 충실하게 활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 분야는 세속적인 타락문화가 아니라면 열심을 다해서 사회에 귀감이 될 만큼 혼신을 다해 그 일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달란트를 주셨고 그에 대한 활동을 기대하십니다.


전에는 대략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면 스스로 공의와 열심을 다해 직분을 수행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게으름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생활에 비난을 받지 않도록 열심을 다하는 활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맡은 일에 사명감을 고취하며 일하고자 할 때 열심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성경 읽는 생활
회개하고 나면 반드시 성경 읽는 생활이 충실해집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단순히 종교의 한 경전으로 보던 것을 이제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현실 생활 속에 간섭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읽고 듣는데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생활의 장소마다 놓게 되고 손 가까이 두기를 기뻐하게 됩니다. 일반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사무실이나 자동차 안에나 보기 쉬운 곳에 성경을 두면 자신이 교인임을 알리는 표시로 알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곁에 두고 자주 읽고 보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 때문입니다.

 

행 17:11-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는 말씀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예수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날마다 성경을 읽으므로 믿음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역대에 모든 지혜로운 지도자나 은혜 체험이 많은 성도들의 특징이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지만 또한 회개한 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충만합니다.
당장에 효력을 발생하는 말씀이 아니라도 세상의 처세에 후회함이 없고 성경대로 살면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겠다는 언약들이 있으므로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새로운 처세가 생겼기 때문에 회개자는 반드시 성경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16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삶의 양식을 생각하게 하고 무슨 일에나 옳은 것을 나타내게 지혜를 줍니다. 영적으로 구원을 얻고 삶의 양식을 바르게 해주므로 성경은 인생의 교과서이자 삶을 축복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언약서입니다.

 

(7)순종과 경건
기독교의 미덕이 순종입니다. 이것은 공자의 인륜사상과는 다른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지도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교회는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지식이 있어도 지도자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나면 지도자와 성도간에 부정적이며 화합치 못하던 자가 사랑 가운데서 협력하는 자가 되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 겸손을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표나게 됩니다.


중생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순종이 얼마나 귀한가를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을 잘 하기 원합니다. 순종을 잘하는 성도를 곁에서 보면 부럽습니다. 세상의 인격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하는 것만큼 귀중한 것이 없는 줄 압니다.

너무 식견을 가지고 세상의 인격적 차원에서 교회 일을 도모하려면 소란이 생깁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비록 아는 바가 많아도 그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치 못하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후서 10장 5절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이렇게 모든 주장들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서 복종하고 순복함으로 쓰임을 받아야지 개인 주장으로 나서면 하나님이 새롭게 역사하시려는 의지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의지를 나타내시도록 우리가 그 역사하실 길을 비워둬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안다 할 때 또 모르는 바가 있을까 하고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8장 2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아무리 성경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 하여도 체험이 아직 되지 않았을 때는 완벽하게 그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항상 기도하고 조심하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기까지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로소 확신이 들었을 때 강력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경대로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3)신앙(信仰)

 

소명과 회개와 함께 신앙이 또한 체험적으로 고백되어지고 객관화되어야 합니다. 생활의식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기적을 믿고 의지하므로 기도하고 그래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철학이 아니라 새로운 의지의 세계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현실적인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관념만 말하고 현실에 체험적인 간증꺼리도 없이 신앙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를 사회 속에서 시작하시고 역사 속에서 진행해 오신 것처럼 성도의 삶은 현실 속에 참여하며 그 영광스러운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비록 환난이 생길지라도 그것이 도리어 예수의 사상을 가진 자로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은 현실 속에 투영되어야 합니다.
전에는 자신이 없고 인내를 할 수 없던 자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삶을 이해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으로서는 가끔 사람들에게 기적적이라 할 만큼 대단하고 신기한 결과를 나타내어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신자라는 자가 현실 생활은 성경적이지 못하고 세상의 경험을 따라 살아가고 교회만 다닌다면 그 사람은 이원론적인 교인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은총과는 무관한 종교인일 뿐입니다. 교회 출석을 한다고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마음에 모시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교훈과 그 약속하신 진리의 언약들을 실현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도(道)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 없이 살아가려는 철학이나 청빈주의나 금욕사상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명하신 뜻을 따라 증거하고 실천하며 체험하여 공개적이며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상자로 살아가는 종교입니다.
야고보서 2장 18절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기독교의 믿음은 참된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실행하는 새로운 의지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영적으로 인식되어지고 현실에서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고 삶을 의탁하는 체험적인 생활입니다.
믿음은 고백과 아울러 우리 마음 속에 확신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새롭게 생긴 의지의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확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심을 믿을 수 있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진리의 신앙이 주는 진정한 효과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4)칭의(稱義)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단체로 보여주시거나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내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천국을 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구원은 이미 지상에서 영적으로 체험한 자들이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칭해주시고자 한 언약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 언약의 체험은 감성의 차이와 무관하며 죄짐에서 매우 홀가분해지는 영혼의 가벼움을 느껴 기뻐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영혼의 상태를 해방 혹은 자유의 상태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하시겠다는 것이 신약에서 새롭게 정하신 새 언약이자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믿어지고 확신되어지는 것은 온 세상을 얻은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6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만 의로우실 뿐아니라 의로우신 주님을 믿는 자도 주와 같이 의로운 사람처럼 인정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조약이며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까? 이미 주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시어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의 행위는 2천년 전에 치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공로를 의지만 한다면 죄와 사망에서 헤어나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리입니까? 확실히 복음(福音)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됨의 저주스런 마음에서 해방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함을 얻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사실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협의할 사항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신 절대적인 확신이요 계시를 얻은 자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인격이 부족하고 실수가 많아서 언제라도 온전치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제 죄인이라도 주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끝까지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실 때 이미 우리의 지난 죄와 현재와 미래에 연약해서 지을 죄들을 다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4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유다서 1장 3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단번에 주신 믿음의 그 시작으로 모든 우리의 부족함이 다 속량함을 얻을 수 있게 하신 이 말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면 아직도 우리의 선행이나 수양적(修養的) 구원의 윤리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구원의 시작이 우리의 도덕성에 연유하지 않았음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우리 본성에 대한 부족함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로써 영원히 죄사함이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회개하며 다시 회복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자를 용서하신다 함이 아니요 오직 매일의 죄를 회개하는 백성의 죄를 사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8-9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렇게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의지하는 백성으로서 의지와 인격적으로 당당해지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죄 사함 받은 자의 솔직함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그 칭의에 대한 보람이 감추어지거나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못할 바가 아니요 우리를 용서하신 은혜를 체험한 자는 고백할 줄 알아야 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그래서 속죄의 찬송을 짓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사함과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은총의 확신만큼 이 세상에 또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5)성화(聖化)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라는 속 사람의 신앙 인격입니다. 결국 성경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며 예수를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신비적 품위를 갖춘다는 말로 오해하기 쉬운데 꼭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거룩한 모습을 회복해간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옳습니다. 이러므로 매우 사회적이고 관계 속에서 인격으로 나타내 보이는 체험적인 단계입니다. 거룩이란 말 자체가 세속과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세속에 물들어 익숙해진 죄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무죄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참다운 인성과 거룩한 신성을 닮아 가는 것을 성화(聖化)되어 간다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변하여 가는 것은 기독교인의 영적 존재에 대한 최고의 가치관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거룩에 힘쓰라고 명하셨고 세속적인 것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간 본연의 거룩함에 대한 분별이 생겨서 하나님의 명을 따라 거룩에 힘쓰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가 된 후 즉시로 나타나는 새로운 자아의 의지이며 소망기도 합니다.

 

세속주의에 습관화되어 있는 본성의 자아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한 속 사람의 구별된 존재에 대한 애착이 없다면 그를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범종교처럼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려는 영적 성화가 매우 중요함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화되어 가는 인격은 사회적이며 체험적인 것으로 충분히 다른 이로 하여금 확인되게 합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서 거룩한 인격으로 성숙해나가려는 자신의 인격과 의지를 타인들마저 의식할 수 있습니다.
성화의 인격이 성숙해 가는 과정은 본래 가진 죄성으로 다져진 인격이 새롭게 변하는 것이므로 매우 힘듭니다. 존재의 자아가 바뀌고 이제 인격의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의 모습에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도 본연의 모습을 잃을 수 있으나 계속적으로 경건에 힘쓸 때 거룩함은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의 성장 과정은 강하다가 혹은 약해질 수 있어서 성화의 인격은 늘 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아 성숙해가려는 새로운 속 사람의 의지는 날마다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6)견인(堅忍)

 

한 번 부르심을 얻은 성도는 그의 인격이나 신앙의 충성스런 생활과 무관하게 영생 부활을 얻을 때까지 그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구원이란 자체가 인간의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시고 시도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변하시지 않으시므로 그의 작정하시고 시도하신 구원의 일이 변질되지 않는다 함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여 옳은 이치가 됩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견인의 교리를 부정하는 의지론자, 소위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교단의 교리는 구원의 궁극적인 책임을 인간의 의지로 돌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사람마다 환경적 요소와 복합적인 원인들로 각양 조금씩 다른데 만약 구원의 결정이 인간 의지의 책임 혹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선행이나 인내의 정신이 합작하여 완성된다면 오히려 구원이 더욱 힘들게 되고 도리어 구원 얻을 사람에 대한 기준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시작하셨고 작정대로 이루어주신다고 하면 간단하고 판단하는 일이 쉽지만 사람의 의지에 그 결과적인 책임을 가하면 결국 의지가 강한 자들만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되었고 마무리되어 온전히 구원 얻게 하실 은혜의 구원이라는 성도의 견인설은 구원의 효력 면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중요하고 바른 해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3. 미래의 체험


1)영화(榮化)

 

장차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부활을 말합니다. 현재의 감각으로는 그 영화로운 부활의 영광을 감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몸이 어떠할 것인지를 제자 몇에게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 장면은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변하신 모습이 아니라 아직 부활의 몸을 입으시기 전에 특별한 변신으로 제자들에게 그 영화로운 몸을 보이신 아주 특이한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변화하신 주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확신될 만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진작 주께서 죽으시고 사흘 후 부활하사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약속대로 부활하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몸은 이제 시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과 핍박자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모여 있었으나 공간의 제한 없이 부활의 주께서는 벽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었으며(요한복음 20장) 승천하실 때 대기권의 압력이나 아무런 과학적 조건을 방해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와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이라 약속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의 몸을 보고도 영으로 생각하고 의심할 때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는 것을 돕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음식을 드시며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눅 24:39-43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사도바울이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는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공중에 나타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주께서 이미 부활 승천하신 이후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 때 사도바울의 경험 후로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고리도전서 15장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기 때문에 승천 이후에 주님을 직면했다는 사람들은 모두 불건전한 간증입니다.


사도바울이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장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후로는 승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는 경우가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사도요한이 성령에 충만하여 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말세에 대한 묵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행전 22장 11절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성도의 소망에 대하여 사도 요한도 중요하게 교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소망은 내세에 영화로운 몸을 얻는 것입니다. 이 영화로운 부활의 몸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았던 개인적인 영적 상태를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더욱 빛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천국에서 얻을 영광의 기본이 되는 빛을 발 할 것입니다. 물론 그 기본적인 빛도 천국에 적합한 아름다운 영광의 빛으로 영생의 빛입니다.
영광된 부활의 빛은 성경에 여러 번 말씀하고 있는 천국의 상급입니다. 천국에서 얻을 상급은 물질이나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는 거룩한 빛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빛이 됩니다.

 

요한1서 3장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구에 오신 목적, 곧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죄인이 속죄함 받아 영생 부활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이요 인생으로서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부활을 얻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주신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은 다른 성현들과 다른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천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부활하시므로 부활의 가능성과 현실화를 보여주셨습니다. 가상의 이론들이야 세상이 무수히 많습니다. 극락이니 뭐니 하는 상상의 그 무엇들은 사실 신빙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사람을 살리시므로 생명의 주가 되심과 자신이 부활하사 승천까지 하시므로 부활을 입증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속에 성령께서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되어서 그 날의 영광스런 부활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산다고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도의 진정한 소망은 장차 있을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떠한 행복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순교를 달게 받는 것도 이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도이면 누구나 부활은 모두 받게 되겠지만 그 부활의 몸에서 나타날 영광스런 빛은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세에 주실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하는 것인데 영화로운 빛의 정도입니다.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어 천국에 갈 때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충성한 대가로 영광의 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정도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42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은 참고만 될 뿐이지 성경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천상의 모습을 보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가끔 있으며 간증을 통해 영생의 나라 천국에 대한 설명은 각양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영감의 차이가 있어도 성경을 완전히 벗어나는 표현이 아니라면 참고가 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한 계시록 21장에서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성경의 표현들은 사실상 문자 그대로 그런 장소와 문화라기 보다 그러한 가치와 아름다운 느낌이 충만한 장소라는 것을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또는 어떤 이들은 천국에 대해 장소성을 빼고 단지 추상적이고 영적인 뜻으로만 천국을 해석하려 하나 주께서는 천국의 장소성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말세론에 해당되는 천년설기에서 후천년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천국화 하여 주님이 교회를 통하여 주장하실 천국 같은 기독교적 통치시대를 염원하고 이론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미래는 사악해져서 심판을 자처하는 것으로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이 지구촌이 새롭게 변할 천국의 장소인가 하는 문제는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우리들이 지금 의식하는 우주관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지대가 되는 천국은 지금의 과학적인 공간의식으로 예상할 수 없는 곳이 되리라고 봅니다.

 

성경은 지금의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는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이미 예비하사 가져오실 것으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후천년설자들의 비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면 불의 심판으로 지구는 떠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는 꼭 이 지구촌만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별도 있고 현재 지으신 우주보다 더 아름답게 새로 지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미리 이 지구촌이 천국의 지대일 것이라 예상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인생은 삶의 과정적인 철학에 머물 수가 없고 사후의 세계를 동경하는 구원론적 역사관이 정립되어야 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삶의 본질적인 원동력이 되는 삶의 이유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여 확증할만한 구원론적 인생관이야말로 참된 삶의 가치를 발휘하게 합니다.
아침의 태양이 있으므로 하루가 시작되듯이 인생이 살아갈 이유는 곧 그리스도를 발견한 시점에서 얻어진 구원이 있을 때만이 참된 인생관이 정립됩니다.


이 영생의 구원이 없는 자들로서는 삶의 본질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문화를 사용하는 고등동물에 지나지 않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온갖 전쟁과 비리와 허망한 일들 그리고 지구촌의 끊이지 않는 범죄와 혼돈스러운 변화 무쌍한 지식의 가치 변동은 우리들의 삶 자체를 계속적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 지구촌은 사단의 영이 지배하는 혼돈과 어둠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5장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송이 끊이지 않는 자가 되어 지구촌의 삶의 의미가 충만해야 합니다. 성도가 되면 역사관의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얼마나 큰 기쁨을 체득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영혼에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우리들도 남은 세월에 주와 같이 세상에 헌신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목숨을 다하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부활의 영광스러운 빛을 크게 발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시다. 아멘

[출처] 구원의 확신|작성자 늘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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