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써야할 한국 기독사

2008. 1. 31. 23:18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다시 써야할 한국 기독사

1959년 44회 장로회 총회 분열후 통합측은 민족반역자 전필순(반민특위에 체포)을 용납하고 그를 총회장에 추대하였고 성결교회는 이명직을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하였다.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일꾼될 위대한 종들을 교육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기독교였다.  그로인해 신앙과 정의가 혼돈의 세상이 되었다. 본문중에서 발췌

일제 식민지시대 기독교에서는 성결교회 박봉진 목사 외 2,000여 명이 구속되어 50여 명의 목사님들이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고 그러한 많은 희생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일본을 패전하게 하셨다.
환난의 현장에서 몸소 환난을 당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환난을 해결하려는 믿음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만 살기 위하여 양을 버리고 도망쳐온 한경직 목사외 다수의 목사들이 또 도망쳐 고난에 동참하는 종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미군의 도움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도강파와 잔류파는 서로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사회는 어느 한 구석 썩지 않은 곳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목사들의 사명이 무엇인가 “악인에게 경고하여 악한길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겔 33:8).
전도와 사회참여는 기독교인의 의무요 하나님의 명령이며(마 5:13-14) 기독교인의 성결의 삶의 연장이고 웨슬레 신학사상이며 로잔언약이다. 1993년 3월 이선교

일본의 기독교 박해
전덕기 목사는 1912년 105인 사건에 투옥되어 고문끝에 1914년 39세로 별세하였다.1905년 9월 길선주 장로가 제창하여 그해 11월 감사절부터 7일간 전국교회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1905년 11월 17일 전덕기, 정순만 목사 등이 주동하여 서울시내 교회가 연합으로 상동감리교회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일주일간 계속할 때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여 위기에 처한 국가를 보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을사5조약이 발표되자 양주군의 홍태순 목사와 정재홍 성도는 자결함으로써 하나님께 나라의 위기를 호소하였고, 최재학과 이시영은 조약철폐 주장을 밝힌 유인물을 뿌렸다.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은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때 한국의 학교는 2,088개였으며 기독교 학교는 755개였다.
장인환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찬양한 미국인 스티븐슨을 살해했으며 이재명은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여기에는 이학필, 전태선 목사 등도 가담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사람은 천주교 신자 안중근의사였으나 기독교인 우연준도 준비 하고 있었다.
일본은 항일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전국의 항일 지도자 700명을 체포, 구속하였다.  구속자 중 전덕기, 김근영, 정희순, 한필호 목사 등은 고문으로 사망하였고 최광옥 목사는 고문 끝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조덕찬 목사는 재판장에서 옷을 벗어 일본 경찰의 잔인한 고문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많은 이를 통곡하게 하였다.
123명 기소자중에 기독교인이 81명이며 신민회원은 57명이었다.  여기에 참여된 목사는 김창건, 안경록, 양순백, 조덕찬, 최성주 등이었고 기독교인은 이승훈, 유동열, 안태국 등 장로교인 79명 감리교 6명 기타 2명 계 81명이다.
1919년 3월 1일 약 5천여 명이 모여 33인 대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보성전문학생 대표 강기덕은 태화관에 도착 33인 대표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하였다.
강기덕은 33인 대표가 파고다공원으로 가지 않으면 권총으로 모조리 죽이겠다고 위협할 정도였다.  이 사실을 보고 있던 평양감리교 이규갑 전도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주교회 교사 정재용을 데리고 파고다공원에 도착 팔각정에서 정재용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3.1운동은 시작되었다.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29명의 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용운의 식사연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서울과 충청은 감리교가, 전국은 장로교가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종소리가 교회에서 울리자 평양시민과 기독교인은 숭덕학교에 모여 찬송과 기도를 한후 도인권이 “왜 우리는 독립을 해야하는가”라는 취지를 설명하고 강규찬이 연설을 하고 정일선 전도사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평양 시내의 10여만 명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를 불렀다.
이토록 3.1운동은 기독교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된 증거는 3.1운동 때 수감자 분포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경기 291명, 충청 39명, 강원 6명, 황해 212명, 평안 730명, 함경 123명, 전라 237명, 경상 389명, 계 2,032명으로 전체 수감자 9,059명의 22.4%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시 기독교의 피해는 피검자 3,426명 중 교역자가 244명이며 여성 신자가 309명이었다.
수원 제암리교회는 1919년 4월 15일 낮 14시경 일본군 아리다 중위가 제암리교회에 도착, 교인들을 교회당에 집합시키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교회를 포위케 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여기서 살아서 나오는 교인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교회 안에서 30여 명은 불에 타 죽었다.  이런 식으로 만행을 저지른 곳이 15곳이나 되었다.  일본의 조합교회(동지사대)에서는 조선총독에게 조선인에 대해서는 “정부가 더 강력한 무력으로 위압해야 한다.”라고 권고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일본군의 만주 독립군 토벌대 스즈모토 대위가 지휘하는 77명의 일본군이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인 기독교 마을인 간장암동을 포위하여 전주민을 교회에 집합시킨 후 40대 남자 33명을 포박하여 교회 안에 꿇어앉힌 다음 교회 안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사람이 타는 냄새가 천지에 진동하였고 묶어 놓은 끈이 타서 사력을 다해 교회에서 탈출하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교회 안의 조선인은 숯이 되고 재가 되었다.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돕기 위하여 기독교의 많은 단체가 조직되었다.
1919년 6월 임시정부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김인서, 박원혁 등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 지원단체를 조직하다 12월 경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연루자 47명도 함께 많은 고초와 옥고를 치렀다.
강우규는 장로교 전도사(당시 고령)로서 나라가 일본에 점령되자 국권회복에 대한 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가 1919년 6월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여 9월 20일 남대문 역에서 새로 부임한 사이또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수행원 37명을 죽였다.  그는 1920년 11월 29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1919년 4월 2일 대황구교회에서 약 3백여 명이 모여 총기 구입을 위하여 모금하였고, 통화현의 최봉석, 홍경현의 오대규 목사등도 무력으로 일제와 대항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량주의, 타협주의, 어용기회주의가 극성을 부리게 되자 3.1운동 때 용감했던 기독교정신이 사라지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사참배를 권유할 때 아무런 저항도 없이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하게 되어 기독교의 정신을 병들게 하였으며 이것이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 기독교는 반성과 새로운 각성운동으로 재건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각성없이 오늘에 이르게 되어 기독교정신은 현실도피주의 기복주의 어용주의로 전락하여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1925년 조선내 신궁이 150개였고, 면 이상에 1개씩 총 2,229개의 신사를 설립하여 전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들은 자연물, 역사적인 인물, 조상, 권력자들을 총칭하여 ‘가미’라 하였다.  일본에는 8백만 신이 있고 신사참배는 자연숭배와 조상숭배로 일종의 제사의식이다.  다시말하여 신궁이란 일본의 8백만 잡신과 역대 군왕과 무인들과 군상을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신사참배는 1931년 만주사변 후부터 본격적으로 강요되었고 내선일체, 내선동조론, 국체명칭 등의 미명아래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니 모든 국민이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이다.”라고 하면서 강요하였다.
1932년 9월 평양 서기산상에 전몰장병들의 해골과 제물을 가득히 쌓아놓고 충혼탑 앞에서 만주사변 1주년 전몰장병을 위한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도지사가 각급학교의 참석을 요구하였으나 숭실전문학교 등 10여 개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교리와 신앙에 위배되는 제례이므로 참석할 수 없다”고 거부하여 평남 도지사가 당황하였다.
1935년 11월 14일 야스다게 평남 도지사는 도내 전학교에 신사참배 명령을 내렸다.  이에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 선교사, 숭의여중학교 교장대리 정익성, 순안 의명중학교 교장 이 선교사 등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1936년 1월 20일 총독부는 윤산온 선교사를 교장직에서 해임시키고 1월 21일 숭의여중학교 교장 스느크도 해임시켰다.
1937년 9월 6일 전남북지사는 신사참배 반대를 하는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중학교, 목포의 영흥남중학교, 정명중학교, 순천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 기전학교, 군산영명학교 등을 폐교시켰다.
전 장로회 총회장이었고 봉천신학교 강사인 김선두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하려다 구속되었고, 출감 후 1938년 4월경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 요인들과 만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9월 4일 히비끼 장군 일행은 미나미 총독과 오노 정무총감과의 회담에서 미나미 총독은 9월 9일 평양에서 열리는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시키도록 경찰에 행정명령을 내린 것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철회는 끝내 하지 않았다.  히비끼 장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대의원전원이 검거가 되어도 신사참배 결의를 하지 않도록 제안을 하였고 검거가 되면 이것은 조선통치에 큰 차질을 가져오므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 중앙정부에서 이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도록 할 것이며 검속된 교역자들에 대해서는 10일 이내에 전원 석방토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약속을 총회 대의원들에게 알리려고 가는 도중 김선두 목사는 구금되었고 김두영 목사는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제지로 대의원들에게 전달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하고 말았다.
1938년 6월 주남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의해 거창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1938년 일본 경찰의 집요한 신사참배 강요를 요구받았으나 그는 결사적으로 반대하였고 전국 각 지역을 다니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다.  그는 1940년 7월 16일 거창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다음날 진주경찰서로 이송되었고, 부산경찰서를 거쳐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때 최상림, 한상동,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도 같이 이송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그런데 이책에 많이 언급되어 있는 한상동 목사님의 관계기사는 지금까지 여기저기 가끔씩 언급했으므로 대폭 생략)
1938년 4월 이인재 전도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는 1941년 3월 산정현교회에서 “벧엘로 가지 말라”는 제목의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하여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1941년 8월 평양형무소에 이감된 후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기선, 채정민,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된 수십 명의 교역자들은 6-7년의 긴 옥고를 겪으면서 미·일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패전하고 한국의 해방이 곧 올 것을 확신하며 서로 위로하였다.
일본이 패전하여 대한민국이 해방되고, 감옥에 있던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승리의 감격으로 교회에 왔을 때 교회에서는 그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거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환영은 커녕 회개하는 기색도 없이 자기 안일만을 위하여 강단과 교권에 집착하였다.  그리고 출옥파와 어용파로 분열이 되었다.  많은 성도들은 교역자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도오꾜오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극동군사재판소에서 1948년 4월 16일 전범자의 재판이 끝났다.  1948년 12월 23일 도오죠오, 도히하라, 마쓰이, 부또오, 이다가끼, 히로다, 기무라 등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973명은 사형, 358명은 종신형, 1,046명은 무기형, 3,075명은 유기형을 받았다.  이중 한국인은 사형 23명, 무기형 125명, 포로 129명이었으며, 사형 23명 중 홍사익 중장이 포함되었으며 그는 마지막 옥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늦게 믿은 것을 탄식하며 부관을 전도했다고 한다.  부관은 그때 예수를 믿고 일본에서 목사가 되었다.
일본의 앞잡이 교역자들은 이러한 정책에 협력하여 하나님을 배신하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역자를 배신하고 신사참배에 동조하였고 황국신민이 된 것을 감사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것을 깨끗이 씻고 천조대신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한강에서,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귀신대장 ‘미소기바라’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44년 9월 경성 상동교회에 황도 문화관을 설치하여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임명하고 류형기 목사 등은 교역자들에게 친일 교육사상을 교육시킨 후 이들을 한강에 끌고가 ‘미소기바라’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조선신궁까지 구보시켜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다.
(위 분들은 바로 몇해 전까지 LA 등지에서 ...하며...)
해주장로교 김응규 목사는 천황사진에게 배례하기를 건의하여 배례를 할 정도였다.  해주 강태동감리교회 관리자 박봉근은 신자 20여 명과 함께 아예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폐쇄해 버렸다.  경남 조평리성결교회 신도들도 교회 사상이 일본 정신과 상용될 수 없다고 하여 해산시켰다.
교인들은 가정에 ‘가미나다’라는 신사를 설치하고 거기에 ‘천조대신 지궁’이라는 팻말을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정든 교회와 고향을 떠나 멀리 이역의 땅 만주로 이사한 은기호 집사를 한국인 목사가 일본 경찰을 앞세워서 고발하여 옥고를 치르며 탄식하게 하였다.
1940년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원(한신대<기장측> 전신, 이사 교수 강사 등 진용에 김재준, 한경직, 유호준 목사 등)을 개설 담임목사인 차재명 목사는 ‘충량 유위한 황국의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수업한다’고 하였다.
조선 종교 전시보국회는 감리교에 갈홍기, 이동욱, 구세군의 황종률, 장로교 신삼일웅, 채필근, 천주교 김광한, 일본의 강본 등이 가담되어 조직되었다.
(갈홍기 목사는 1934년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을 받고, 채필근 목사는 일제하 유일의 제국대학 출신의 목사인데...  요사이 박사목사 좋아하는 교인들...  그 어려운... ...을 하고서 험난한 목회의 길로 들어섰으니 한점 더 주자...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희망사항일뿐이다.)
유형기, 정춘수, 정인과, 갈홍기 등은 ‘시국대응 전선 사상 보국연맹’과 ‘황도문화관’등의 단체에 적극 앞장섰다.  구자옥은 황도학회에 가입하여 일본을 찬양하였고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정춘수, 양주삼, 신흥우 등은 임전대책 협의회와 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김활란은 조선언론 보국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
정인과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을 ‘자국’이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는 ‘가미다나’가 설치되었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을 향해 머리숙여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괴씸하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렘 13:10)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이었다.
장로교 총회 교육부 사무실(피어선 성경학교 구내에 있음)에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데라스 오오카미의 사진을 걸었다.
(한마디로 이런 예배는 차라리 더 이상 안드리는 게 성경적이다)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빼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또한 찬송가 260장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1939년 성결교회 이명직 목사는 기독교가 서양종교가 아니라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지지하면서 일본은 로서아보다 기독교를 보호한다고 일본을 찬양하였다.  그는 1940년 9월 10일 성결교회 제9회 이사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였다.  즉 “우리는 성서교훈에 의하여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 난 줄을 믿으며...   국법을 순종한다”로 개정하였다.
(하나님의 법을 세상법 밑에 두는 것이 옳은가?  다니엘은 왜 왕의 명령에 순종하지 사자굴에 들어갔는가?  논리적인 사고능력이 부족하다.)
1941년 활천 9월호에 그는 “우리는 황국의 신민이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일등국민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만세일계 천황봉대에 천황의 적자이다...  이것은 실제로 영광이다”고 하였다.(활천은 지금도 있는 성결교의 1940년 5월 31일 성결교 산하 성서학원이 경성신학교로 승격되어 11월 5일 오후 2시 개교식 때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제송, 만세삼창 등을 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성결교총회에 대해서 굳이 신사참배를 결의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성결교는 맹렬히 항거하다가 교단해산을 당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맥없이 쓰러져 버린 것.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1938년 9월 9일 제27회 장로교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 기간중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 회원 전원에게 신사참배 즉시 실행하기를 특청하여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서기산 신사에 도착, 신사참배하였다.
  홍택기, 박응률, 박인현, 길인섭, 심익현, 김길창 목사 등은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겠는가?  어용 정치목사들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유리하면 하나님과 조국과 동역자를 배반할 사람들이다.
(양주삼 목사의 친일행각은 생략...  감리교에서는 아직까지도 원로 공로자로 숭앙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감리교는 양주삼 목사와 같은 사상으로 “신사참배는 정치적 국민의례이다.”라고 하면서 일본의 설득을 그대로 받아 신사참배를 하였다.
  1938년 12월 12일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목사 등은 전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를 하였다.  이때 홍병선 목사는 “황국신민으로서 신사참배는 당연하다”고 하였다. 
  1939년 10월 8일, 경성 성서학원 강당에서 일제의 앞잡이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 성결교회 연맹 결성식이 관계 당국자들의 축사와 함께 있었다.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규약선언, 묵도(황군장병과 동양평화 위해) 일제 내빈축사 일황을 위한 축포가 있었다.  규약에는 내선일체 거국일치 국민정신 동원이란 취지를 달성하고 전도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각 지방에도 연맹을 조직하였고 이사장에는 이명직 목사였다.(활천 204호 45쪽)
  1940년 12월 6일, 국민 총력 성결교회 연맹 이사장 이명직은 전국 성결교회 애국반에 다음과 같이 실시할 것을 요망하였다.
  1. 국방헌금  2. 교회내에 일본국기 게양  3. 황성요배  4. 무운 장구기도  5. 전몰영령위해 기도  6. 출전군인 환송에 적극 참여  7. 노무시간외 근로봉사 등이다.
  1941년부터 활천의 매호마다 성결교회 신도(神道) 실천보고가 실렸고 십일조헌금을 명하여 총독부에 바쳤다.  설교시간인데도 12시가 되면 전체가 일어나 일본국가를 위해 일분간 묵도를 하였다.  이명직 목사는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활천 219호 2-5쪽)
  1941년 6월 24일, 일본 기독교단 창립총회에 이명직 목사가 동의하여 성결교회도 참여할 의사였다.(활천 224호)  이명직 목사는 “기독교 신자는 악법이라도 국법으로 인정하고 허락된 자유내에서 신앙하고 전도하는 자세가 될때 신민이되고 보국하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2일 이명직 목사는 경성 성결교회 신도에게 전시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수요일 정기 연합기도회를 시달하면서 “일본 필승의 기도”를 시달하였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목사(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도 목회)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통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1937년 전영도 목사가 “중일전쟁은 성전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의 주지사, 시장, 상·하의원들에게 4,800여통을 송달하였다.(이건 뭐 문서 선교도 아니고...  많이도 철저히 보냈다.)
  1941년 8월 20일 조선 임전복구단에 윤치호, 구자옥, 정인과, 채필근, 정춘수, 양주삼 목사와 김활란, 신흥우 등이 앞장 섰다.
  1943년 11월 조선 전시 종교복구회가 조직되어 감리교 갈홍기, 장로교 채필근, 천주교 김한수 등이 앞장섰다.
  총독부 공안과에서는 전국 경찰서에 지령을 내려 전국 경찰서에서 1943년 5월 24일 일제히 검거하여 성결교 목사들의 재림신앙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성결교 재림신앙은 성결교회 4중복음의 하나로서 교역자들의 거의가 재림을 강조하자 1943년 12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성결교단을 해체시켜버렸다.
  구속된 성결교 철원교회 박봉진 목사와 군산성결교회 정태희 장로는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고, 김유연 목사 등 많은 목사들이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 1944년 4월 경 거의 석방되어 출옥되었다.
  혁신교단들은 예배시작 전 5분간 천황사진 또는 동방요배, 전몰용사들의 영혼을 위한 묵념, 출정장병의 무운장구 기원, 황국신민의 서사제송을 한 후 예배를 드렸다.  1943년부터는 밤예배는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성결교회는 1943년 12월 29일 등골이 오싹하는 해산성명서를 발표하고 교단이 해체되었다.


                    성결교 해산 성명서
  우리 조선야소교 동양선교 성결교회는... 적 미·영 사상의 포로가 되어 상금도기 잔재를 말살키 어려움은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다.  더구나 교리로서 신생·성결·신유·재림의 4중 복음을 고조하여 왔는데 취중 재림의 항은...  근본적으로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못할 뿐더러, 신관에 대하여도 성서의 해석에 기해 에호바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현재 아등의 심경으로 보면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일본 기독교 조선 성결교단)을 자발적으로 해체하게 되었다.


    우 해체에 제해 중의에 서명함.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일본 기독교 조선 성결교단)


         목야명직(이명직) 등 총 7명
                              소와 18년 12월 29일(1943년)


  1938년 5월 8일 부민관 강당에서 경성기독교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위원장: 니와(일본인)
  부위원장: 정춘수, 아끼즈끼(일본인)
  평의원: 김명선, 김창준, 김활란, 신흥우, 양주삼, 오긍선, 유억겸, 류형기, 윤치소, 윤치호, 이재형, 황종률, 이명직 등 수십명
                  위 단체의 낮뜨거운 선언문은 생략.


  1942년 5월 8일 육밀 제1147호 “조선에 징병제 시행 준비의 건”이 발표되었다.
  이 발표를 했을 때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영을 했다.
  윤치호, 최린, 박춘금, 백락준, 배상명, 현제명 등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일반인들만 환영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까지 환영을 하여 세인을 탄식케 하였다.
  1942년 5월 11일 저녘, 기독교 대표들은 “징병제 시행감사 전 경성 신도대회”를 열었다.
  국민의례를 마치고 화곡춘수 감독의 개회사에 뒤이어 전필순 목사로부터 징병제 시행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이날 밤 장내의 감격이 동포에 전하여지기를 기도한 후... 총독과 일본 수상 이하 관계 당국에 감사문 타전할 것을 결의 하였다.


                         성명서
  합방 이후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앙망하고 있었던가.  30여 년간 조선시정 중 최대의 획기적 업적이고 특히 남총독의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인 요소를 넣은 것이어서 실로 찬송할 말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황국신민이 되는 대도가 열린 것이다.  소집을 받은 청년제군!  제군은 폐하의 방폐가 되려는 어신임을 얻는 것이다.  울 수 있는 데까지 울어라, 울음을 그치거든 여하히 하여 감격에 답할까를 종용히 생각하라.  기실 아등은 아직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폐하의 적자라하여 부끄러운 것이다.
                       소화 17년(1942년) 5월 11일
                                  징병제 실행감사
                                전경성기독교대회
                           (기독신보 1942. 5. 18)


  1942년 10월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31회 총회에서 교회종 헌납이 1,540개였다.  다른 교단 것까지 합해서 2,500여 개를 헌납하여 교회는 군수물자 지원부대가 되었다.
  감리교는 교회를 매각하여 군납헌금도 하였다.
  1942년 7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본군 환자용 자동차 2대를 헌납하였다.  그리고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 비행기와 육군 비행기를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고 헌납하였으며 그들은 1942년 11월 17일 용산역 연병장 헌납식에서 기독교 예배가 아니라 일본의 신도의식으로 거행하였다.(기독교 예배가 아니라 다행이다)
  1944년 2월 2일 기독교신보 사설에서 “미·영을 토벌하기 위하여 하루라도 빨리 일선에 비행기를 보내자”라고 외쳤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가 된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한후 다시 개교가 된뒤 채필근 목사는 교장에 취임하였다.
(후평양신학교라고 하는데, 본인들도 특별히 여기출신임을 드러내지는 않고 하여서, 교회사에 많이 언급을 안한다고 평한 교회사 책이 있었다.  당시 평신재학중이던 출옥성도 이인재 등은 공부를 중단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며 지금도 통곡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한인여성 정신대는 약 20만 정도가 이런식으로 강제 및 유혹되어 동남아 각 사령부에 배치되었으며 사령부에서는 20-30명 단위로 부대배치하여 일본군이 짠 시간표에 따라 계급별 부대별로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위안부는 외출이 금지되고 허가 없이는 지정지역을 떠날 수 없다.  위안부는 아침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에 10-20 여명의 일본군을 상대하였다.  수입은 업자가 60% 위안부가 40%를 차지한다고 하였으나 업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 위안부의 수입을 착취하였다.
  요시다 세이지는 전남지역에서 일본인 경찰 4-5명과 조선인 경찰 30-50명의 협조로 7-8대의 트럭에 나눠타고 마을에 도착 마을을 완전 포위한후 모두 부녀자들은 길가로 끌어내고 젊고 건강한 여성은 모조리 트럭에 태워 강제로 끌고 갔다.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성들은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안고 오면 얘기를 잡아 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갔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는 때려 쓰러뜨린 후 끌고 갔다.
  그는 10-20만 정도가 정신대로 끌려갔고 이중 5천명 정도가 조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에 있으면서 이름을 바꾸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연합군은 이들을 포로로 취급하여 조사를 했기 때문에 이들의 명단은 지금도 있으며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에 도서관에 가면 누구든지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나 한국인들이 이 분야에 대해서 전혀 연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 있는 종군 위안부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고 오히려 조언까지 한다.
  그는 그의 잘못을 죽기전에 회개하려고 한국에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과 조선인 위안부」라는 두권의 책도 출판했다고 한다.
  위안부 생활이 곤욕스러워 탈출하다가 붙잡혀 모진 매를 맞았으며, 상처도 치료하지 못한 채 위안부 생활을 했다.
  현재 서울 강남구 일원동 영희국민학교 외 전국에 보관되어온 학적부에는 이께다씨가 담임하고 6학년 4반 여학생 70여명 중 5명이 1944년 7월 2일 일본 도미야마 불이월 정신대원으로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끌려갈 당시 나이는 12-14세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다씨는 자기가 맡았던 반 외에도 14-15 정도가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끌려간 학생의 수와 명단이 전국 국민학교에 보간된 학적부에서 현재 속속 발견되고 있다.
  1942년 12월 김활란은 <신시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썼다.(김활란 장례식 예화는 현재도 NO. 1 애용)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하라고 외쳤다.
  1941년 12월 모윤숙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조선임전 보국단이라는 친일 어용단체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리 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라고 권장하였다.  이런 여성에게 전두환 정부는 3·1문화상을 수상했고, 1990년 그녀가 죽은 후 노태우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으니 국민정신이 제대로 되겠는가?
(한마디로 가치관이 극도의 혼란상태에 있으며 분열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친일파 99인」에서)
  김동환, 노천명, 김동인, 주요한, 김상용, 서정주, 장덕조, 김소운 등은 일본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다음은 목사들의 주장을 요약하였다.


1.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황금만능주의 밑에서 운전되는 것이 미국입니다.  선전만 잘하면 전국적으로도 지위를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침략의 마수를 뻗어왔던 것입니다.  이 형세를 그대로 방임해 두면 동아공영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기보다 명백한 것입니다.
                  영원히 광만 뻗도록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 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적이 없었다.
                     (1943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기고)


  그는 해방 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까지 하였다.


2.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
  미국은 동양이나 우리 일본에 대해서 온갖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갖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는 후에 장로교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3. 정춘수 목사(조선감리교 총감독)
  기독교의 교훈이나 시범 안에서 이 세상은 장차 멸망할 것이라고 말해진 것은 한 번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옴으로써 조선 고유의 윤리, 도덕, 미풍양속이 파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시와 완전히 감리교 교회를 혁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명칭부터를 조선감리교단으로 고치고 일본정신에 합치하는 황도주의화된 일본적 기독감리교회로서 매진하게끔 된 것입니다.
  정의의 칼을 뽑아 대동아전쟁을 시작하고 불과 수일동안에 혁혁한 전과를 거둔 것은 진실로 감격을 금할 수 없는 바입니다.  어제 홍콩의 적군이 괴멸했습니다.  그 완전한 함락이 시간문제임을 믿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유쾌함과 감격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정춘수는 해방후 천주교로 개종, 평신도가 되어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죽었다.


7. 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
  이번의 대동아전쟁이야말로 황국의 흥폐가 아시아의 성쇄를 결정하는 성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황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할 결심이 있을 뿐입니다.


8. 윤치영(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
  대동아 성전을 위해서 정의의 칼을 뽑은 제국의 사명은 팔굉일우의 대 이상과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달성하고자 1억 1심으로 매진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그들의 모순을 제제하는 실물 교훈인 것입니다.


9. 윤일선 목사(세브란스의전 교수)
  루즈벨트 그가 미국의 국책을 그르친 장본인이긴 하지만 임기 4년 중에 그의 이름으로 아주 미국을 망쳐먹게 되든가 다행히 반성해서 강화를 청해 오든가 혹은 장기전이라는 이름만을 걸어놓고서 임기가 끝나면 실제는 패군지장으로 하야를 하거나의 어느 하나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11.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
  오늘날 조선의 기독교회는 재출발이 요구되고 있다.  도대체 신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다고 하는 자가 인간답지 않은 생활을 해서 된단 말인가.  미·영인의 식객 노릇을 하면서 선량한 신자로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신을 그따위로 믿느냐 말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것을 서양인에게서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를 자기 손으로 운영하고 그 교리를 제 머리로 고쳐 생각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 봄직도 한 일인 것이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일본 국가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  우리는 일본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그가 얼마나 천황숭배자요 일본애국자인 내촌감삼의 영향을 깊이 받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가 사사한 내촌이 궁성요배<宮城搖拜>를 “무상의 영광”으로 여겼던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내촌의 언어, 걸음걸이, 심지어 몸짓까지 철저히 닮아가려고 노력했다. 한마디로 그는 반민족적, 반기독교적, 매국적 행위를 열렬히 한 친일파이다.
  ‘복음교회 50년 약사''''의 편찬위원들은 여러 교단들의 기독교 배신행위를 지적하면서 복음교회를 비롯한 몇몇 군소교단이 교단결합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점만 보아도 복음교회는 친일적 기독교 혁신교단과는 다르게 철저히 반일적 민족적기독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끝까지 신앙정절을 지켰으며, 애국적 입장을 철저히 고수했던 민족교회, 조선인 자신의 교회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사가 김양선 교수는 “당시 교파 합동회의에는 신도 만명 이상인 교파들만 합동하도록 제안되어 있었으므로 기독교 조선복음교회 처럼 당시 교세가 약했던 교파들은 참여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다른 교단을 친일부역 교단으로 비판 매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태용이 순수 한국적 신학을 창출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최태용이 한국적 신학, 즉 토착화 신학을 역설하며 “조선의 교회”,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갈파하며, 일생과업을 삼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최태용이 말하는 “우리 자신의 교회”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을 위의 인용문에서 깊이 음미할 것을 권하고 싶다.
  황실존중, 국체신도, 천조대신 숭배, 신사참배를 합리화하는 일본적 기독교가 기독교 본질을 올바로 수용한 기독교인가라는 기독교 본질론에 관한 논의는 일단 접어두고라고도, 이렇게 우상숭배로 이질화된 신앙유형을 조선적 기독교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최태용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는 이들은 대체로 그의 밝은 면만을 부각시켜 강조해왔다.  고의로 최태용의 반민족적, 반기독교적, 친일적 행각은 은폐되었고, 오히려 그의 행실이 완전히 민족주의자인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지금까지의 최태용이 그의 참모습을 들어내게 된 마당에 우리는 전기(傳記)의 허구성이나 편향편집성을 통한 인간이해에서 직접 그의 총체적 이해를 하게 된 것을 큰 의미로 생각하게 된다.<위는 목회와 신학 1992년 6월호에 실린 한숭홍교수의 최태용의 신학사상(II) 발췌>
  <위와 같은 글이 바르고 참된 진리운동을 위해 매우 필요한 상황에, 한국교회는, 처해 있다, 요약자>
** 최태용(1897-1950): 함남 영흥, ‘천래지성’, ‘영과 진리’ 발행, 수원 농림 졸업, 연희전문학교 농학과, 내촌감삼에게 감화.  2대감독 백남용(1897-1950) 취임.   3대감독 지동식(1910-1977,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역임) 목사 추대.
** KNCC 가입교단: 기장, 통합, 기감,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1939년 박희도는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반도 2천만 동포는 일본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황도를 앙양해야 한다.  또한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현재의 내지인 조선인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지방적 호칭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라고 하였다.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미국과 소련을 규탄할 수 있는가!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진실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대로는 절대 안된다.
  웨슬레는 “우리는 사람의 잘못된 행실을 징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얼마동안은 그를 참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우리 가운데 계속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범죄하거든 권고하고 듣지 않거든 증인을 세워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다(마 18:17).
  친일파 그들은 반드시 처벌받아 강단과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해방과 함께 기독교는 범 회개운동이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회개운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유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는 친일파들 때문이며 그들은 반성은 커녕 변명으로 일관하여 분열과 분단을 추래하였다.  그들은 이승만 OOO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와 한국정신을 부패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무 쉽게 용서해주고 잊어버리고 있다.  현재 기독교 목사들의 사고방식은 거의가 어용 사상이 지배적으로 어용목사가 훌륭한 목사요 국가를 사랑하는 목사로 인식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로 우리는 혼돈가운데 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비겁한 마음과 자기를 위한 어용기회주의 사상을 전염시켜 사회 어느 한 곳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여 마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암적존재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토록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해 주고 덮어 주고 변호하고 찬양하는 것이 기독교 사랑인 것처럼 기독교 사상을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과 정의가 실현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어용사상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땅에 도덕성 회복은 요원하다.


  오다나리치는 1908년 일본 오사카에 태어났다.   광주 일본교회 담임목사 다나가에게 오다가 질문하기를 “왜 일본인에게만 전도하고 조선인에게는 전도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다나가 대답하기를 “정복자 일본인이 피정복자 조선인에게 회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강도가 물건을 도둑해 가지고 물건 주인에게 용서하기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937년 12월 숭실학교 강당에서 5일간에 걸쳐 신사참배 반대 강연을 하다 구속되었으나 잠시후 석방되었다.
  1938년 1월 수원경찰서에 투옥되어 5개월간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일본경찰의 끈질긴 추격에 그는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피하여 일본신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1942년 1월 재일 조선인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후 재일 대한 기독교회 후쿠오카와 교토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1980년 9월 27일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니시다 목사도 오다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한국교회를 도왔으며 특히 성결교회를 도왔다.  그는 진주성결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1985년 2월 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김승태 엮음 한국 기독교와 신사참배 문제 88쪽)


  한경직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여의도 63빌딩에서 뎀 풀턴상 수상 축하식 인사말에서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라고 47년만에 회개를 하였으나 그는 회개할 일이 너무 많은 목사이다.
  친일 어용들과 그 후예들(!!)은 첫째로 일본의 탄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며, 둘째로 양심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주위의 강권에 못이겨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명예와 출세욕에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과 조국을 배반한 것이다.
  이러한 친일 어용들을 숙청하지 못하여 현재 대한민국 교과서에 16명의 친일어용 작가 19개 작품이 실려 학생들에게 어용사상을 교육시키고 있다.
  정신대를 폭로한 일본의 이케다씨는 지금도 한국의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으며 그 죄책 때문에 결혼까지 포기하였다고 한다.  자기 국민도 아닌 다른 국민이요,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찬양한 일도 없지만 단 한가지 담임선생이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부패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 우리 민족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의 심판은 준비되어 있었다(렘 1:16-17).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잠 14:34)


                   기독교의 분열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평양 감옥에 있던 많은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집에도 가지 않고 평양시내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있으면서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5가지를 1945년 9월 20일에 발표하였다.
  출옥한 이기선 목사는 5가지 원칙을 지지하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30여교회를 합쳐 1949년 5월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분은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67세, 독노회), 고흥봉 목사(51세, 처음에는 재건신학교 교장이었으나 나중 高神졸), 채정민 목사(74세), 한상동 목사(45세, 高神 설립자), 주남선 목사(57세, 거창, 高神 설립자), 오윤선 장로(75세, 산정현 교회 오윤선 장로와 동명이인), 김인희 전도사(38세, 재건교회), 김화준 전도사(37세), 서정환 전도사(40세), 조수옥 전도사(32세, 생존, 高神교단 권사, 마산 인애원장), 이현숙 전도사(46세), 최덕지 전도사(45세, 재건교회), 손명복 전도사(35세, 高神졸, 1973년 高神 총회장, 1993년 8월 소천), 이주원 전도사(40세, 高神 졸, 현재의 이인재 목사, 필라델피아에 생존, 1970년대말 미주합동총회 초대총회장), 방계성 장로(58세), 박신근 집사(37세, 재건교회), 장두희 집사(35세), 양대록 집사(32세), 이광록 집사(39세), 김형락 선생, 안이숙 선생(38세, 생존, 현 남침례교).
(한편 손양원 목사<高神 초대 총무>는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위분들과 달리 청주 감옥에서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1945년 11월 14일 평북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평북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있었다.  강사는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박사였고 참석한 교역자는 200여명이었다.
  여기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5원칙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이상의 5가지 원칙에 신사참배 결의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등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괴변을 토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여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개정판 “한국기독교회사”, 著作賞 수상, 前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민경배 著, 22장 해방된 교회에서 “... 인효론적 화살로 그 참회의 상징을 요구했다” 하는가 하면 “...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각인이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의 말에는 반박 못할 정연한 논리와 신학이 있었다” 하기도 하였다.)
  1946년 1월 초순 평북 차령관교회에서 김인희 전도사가 심령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에 북한과 만주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성도들이 모여들어 회개와 감격의 울음바다가 되었고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부흥회를 끝내고 그속에 모인 교역자들이 재건교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북한 전교회에 취지문을 발송하기로 하고 산회하였다.
  1946년 4월 평북 선천읍 황금동 창고에서 김정희 전도사가 중심되어 55명이 재건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49년 북한 정부에서는 1946년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모든 교회 재산을 정부에 헌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교회는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작업은 기독교연맹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교회당 몰수에 항거한 목사는 김길수, 신현교회 이유택 목사와 정일선 목사, 유계준 장로 등 극소수였다.  이들은 끝까지 공산정부에 항거하였으나 결국 몰수당하였다.  유계준 장로는 1950년 6월 24일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총살당하였다.
  산정현교회 정일선 목사, 남산현교회 송정훈 목사, 김철훈 목사 등은 “어떻게 목사가 자기만 살기 위해서 교회를 버리고 남으로 탈출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탈출을 반대하다 북한에서 순교당하고 말았다.
  조만식 장로는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50여 만명의 당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단체가 되었다.
  많은 동지들은 조만식 장로의 신변이 걱정이 되어 월남을 권유하였으나 조만식 장로는 “이 가엾은 백성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월남할 수는 없다.  나는 살아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월남 권유를 거절하였다.  조장로 여동생 조신여와 아들 조자홍은 월남하였다.
  1950년 10월 13일 국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하자 김일성이 평양에서 북쪽으로 이송을 권유하였으나 조만식 장로는 “평양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거절하자 내무서원에 의해 총살당하게 되었다.
  1946년 김일성 비서인 강량욱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다.  기독교도연맹위원장 박상순, 회장 김익두 등이었다.
  1947년 신사참배를 한 강양욱은 이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황해도 신천교회 김익두 목사를 회장으로 추천하고 부회장 김응순, 서기 조택수 목사를 선임하였고, 전산동 목사를 설득하여 이 조직에 가입시켰다.  또한 김익두 목사가 회장이 되자 북한의 교역자가 거의 이 연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천 서부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기독교연맹 회장인 김익두 목사는 1950년 8월 8일 비행기 전차의 군납헌금 10만원을 헌납한 후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평양에서 기독교인 전쟁 승리 총 궐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 9월 8일 감리교는 탈퇴 즉시 변홍규, 이규갑, 이윤영 목사 등이 동대문교회에서 모여 재건중앙위원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하였으나 별 호응이 없었다.
  감리교는 신학교를 재건 변홍규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감리교 부흥파는 계속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가면서 친일파 교역자들의 즉시 사퇴를 권고하자 정춘수, 이동욱 목사등이 사퇴하였다.
  1946년 4월 7일 재건파는 수표교회에 모여 강태희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일로 재건파와 부흥파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감리교 부흥파의 목표는 일제의 잔재와 부역 교역자들의 완전퇴진을 주장했고, 재건파측은 죄가 많고 적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죄를 통회하는 신앙부흥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부흥파에서는 첫째로 신사참배한 교역자는 임원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둘째로 임원은 양파에서 동일하게 선출하여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재건파에서는 이것을 수락하여 극적으로 합동을 하게 되었다.
  1947년 1월 7일 종교교회에서 연합총회가 개회되었을 때 강태희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임원이 재건파에서 많이 선출되자 부흥파는 이탈하여 단독총회를 하여 다시 분열이 시작되었다.
  1947년 1월 11일 연합회의에서 감독을 의장으로 고치고 강태희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총회는 친일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반역자들이 감리사로 출세하게 되었다.
  1947년 2월 3일 홍현설, 변홍규 등 40여 명 목사와 문창모, 박현숙 등 평신도 56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내용은 “교권을 잡은 재건파가 교회 장정을 유린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연합을 가로막고 친일파를 두호하고 있다.  특히 친일교역자 19명은 감리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서모독죄: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배척하였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거부하려 하였고 김진철 학생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읽었다고 출교시켰다.
2) 신사참배찬양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 가미나다를 설치케하고 상동교회를 신사로 만들고 교역자들을 미소기바라에 참여케하였다.
3) 재산매매비리죄: 감리교 37개의 교회건물과 31개의 목사관을 매각처분하였고 공주 영명학교 농지 18,360평과 은퇴교역자를 위한 땅도 매각처분한 돈 40만원 중 절반은 일본군을 위하여 비행기 헌납금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총리원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은퇴교역자 농지매각은 1945년 9월에 하였다.  사용처를 밝혀라.
4) 배신교역자: 친미적인 교역자 40여명을 해직 강등 자격취소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 정부당국과 야합하여 그들을 투옥, 고문하게 하였다.
  1947년 11월 17일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이규갑, 변홍규 등은 부흥파를 재조직하여 의장에 이윤영, 서기에 김진호, 감독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을 선출하였다.  많은 성도들은 재건파에서 부흥파로 옮겼다.  정춘수는 천주교회로 강태희는 교회에서 사임하였다.
  1949년 4월 20일 다시 합동총회가 개회되어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니 양파에서는 서로가 환영하여 합동이 성공하였다.
  1954년 3월 16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다시 분열되었다가 1958년 8월 다시 재통합이 되었다.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10일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원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 대표로 이성봉, 조기함, 조한수, 이용선, 최학철 목사 등이 38선을 넘어 참석하였다.
  재건의장에는 60만세 사건 때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혼자서 만세를 부른 천세광 목사가 되었다.  교단명칭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라고 변경하였다.  이때 총회장에 박현명 목사가 추대되었고, 신학교도 개교가 되어 이건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박현명 목사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분이요, 이건 목사는 징병제를 찬양한 분이었으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출옥성도가 많은 경남노회는 서둘러서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신사참배교역자들에게
1) 목사 전도사 등은 일제히 자숙한 후 일반 교회를 시작할 것.
2)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실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1946년 7월 9일 제47회 정기노회에서 임원진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이에 친일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 양심적이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출옥성도를 비양심적이라고 매도하면서 교묘히 자숙안을 삭제하고 피하였다.  그로 인해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자들의 뻔뻔스런 태도에 한심할 지경이었다.
  1946년 4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담임하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친일목사들과의 갈등으로 견디지 못하고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박사와 만나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을 협의하였다.
  1946년 6월부터 8월까지 진해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힘이 되어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47년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학생추천 취소 결의를 하였다.  그 이유는 극단 보수주의 선교사를 영입했다는 것이다.
(극단이 아니라 북장로교는 성경유오설을 주장하는 오번확인서에 1천여명의 목사들이 서명하고 무오설을 주장하는 메이쳔 교수를 축출하였다.  여기에 속한 한부선 선교사<1903-1992, 고신교수>를 메이천파라고 공격한 것이다.  한부선 선교사는 평양태생으로 만주에서 신사 참배반대 운동을 주도하였고 2차세계대 직전 귀국을 거부하고 감옥행을 택한 바 있는 진짜배기 선교사이다.   1938년 장로교 총회시에도 신사참배 결의를 할 때 반대를 외치다 일경에 의해 총회장 밖으로 끌려 나가기도 했다.  축출당한건데 어떤 한국의 교회사가는 “극단의 보수주의로 분열을 일삼던 자”라고 평하였다.  그리고도 여기에 속한 목사들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할 때는 한국교인들은 대부분이 보수이니 감히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과 달리 거짓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심판받는다.)
  이에 1946년 12월 3일 한상동 목사는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라고 선언하고 신사참배 교역자들과 결별하였다.
  경남노회 67개 교회도 제48회 노회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경남노회는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947년 3월 10일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노회장 김길창 목사와 임원 전원이 사임하고 신사참배에 대해 통회하고 출옥 성도들의 마음을 상치 않게 하여 수습하였다.  한상동 목사도 제49회 경남노회에서 탈퇴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4선교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메첸이 가장 건전한 신앙노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떠난 것이다.  12년 후 승동측<박박사측>과 연동측<4선교부 측, 통합측>이 갈릴 때 박형룡 박사는 이를 몹시 후회하였다.  그리고 신사참배 처리문제에 대한 한상동 목사의 견해가 옳았다고 술회하였다.  한편 이때 충격을 받은 한상동 목사는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으나 나중에 친일 자유주의성 편의주의자들에 박박사가 위기에 몰렸을 때 은혜로 크게 갚은 셈이다.)
  이 기회를 틈타 신사참배 교역자들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고신초대총무로 고신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교회사 책에 고신측을 ‘교회분열주의자’ ‘독선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을 ‘성자’로 호칭하고 있는데 6.25중 순교하셨으므로 착각을 한 것이다.  고신은 교단 이름에서도 나타난 바 신학교를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됨.)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49회 임시노회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취소하였다.  이렇게 되어 경남노회는 출옥 성도 지지파와 적극반대파 중간파로 갈리어졌다.
  1948년 5월 총회에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3대통리, 해방후 KNCC 초대회장)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다.
  1950년 4월 11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권영호 목사 사회로 개회되었고, 고신파 문제로 난항이 거듭되어 유회를 거듭하였다.
  김재준 목사는 축자 영감설을 부인하였다.  이에 보수진영에서는 성경 오류설에 대한 해명과 취소와 사과를 요구하였다.  이일로 총회는 수라장이 되어 기마경찰대가 동원되어 총회는 해산되었다.
(신사참배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보수를 주장하야...)
  6.25 두 달 전 일이다.
  1947년 4월 대구에서 제33회 총회시 51명의 연서로 김재준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새벽예배 시간에 학생끼리도 서로 싸움하여 수라장이 되었고 특히 정규오, 이노수, 손치호, 이성권, 이치복, 손두환 학생들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를 해명하라고 요구하고 나왔다.  진정서 내용은
1)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다”라는 학교 이념을 이해할 수 없다.
2) 근대주의와 고등비평 성서해석법 도입
3) 김재준 교수의 문서설과 성서 권위부정, 정통교회 공박,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 찾을 수 없다.  칼빈 예정론은 숙명론이다.
4) 송창근 교수의 공관복음 금과 돌 설명
5) 정대위 교수의 속죄론이 이해할 수 없다.  등의 내용이다.
  1948년 김재준 교수를 1년간 유학을 시키고 박형룡, 명신홍, 김진홍, 심문태, 서고도, 로라복 등의 교수가 보강되었다.
  장로회 신학교 설립위원들은 1948년 5월 20일 서울 창동교회에서 개교하기로 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1948년 6월 서울에서 제35회총회시 장로회 신학교 직영으로 할 것을 가결하였다.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조선신학교측은 장로회 신학교측의 대의원을 총대로 인정하지 않자 서로가 인정하지 않아 조선신학교측이 강단에 올라가 총회장을 끌어내리고 기물을 파괴하는 대 소동이 벌어져 기마경찰이 출동되어 총회는 해산되었고 특별위원의 수습방안에 따라 정회하고 회의는 9월로 연기되었으나 6.25의 난리로 9월에도 속회되지 못하였다.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속회되어 총회 직영 새 신학교를 대구서 개교하기로 하였다.  이때 총회 서기는 유호준 목사였다.
  이렇게 되어 총회신학교는 19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개교가 되었고 교장에 김부열 선교사, 교수에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계일승, 명신홍, 김치선 등이었고 1953년 9월 2일 박형룡 박사가 교장이 되었다.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37회 총회때 김재준 목사는 교수의 면직, 목사직 박탈, 조선신학교 졸업생 교역자 불채용으로 처벌하자 1953년 4월 25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제38회 총회시 한국 기독교장로회로 되었다.
  1951년 5월 24일 남북이 치열한 전쟁중에 있을 때 기독교 대표들은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하지 않고 장로교 36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담임 노진현 목사, 1957년 장로교총회장, 합동신학원 이사장)에서 개회되어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신앙을 지켜온 고려파를 정죄하고 출옥성도가 제외된 가운데 경남노회가 조직되었다.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고신측이 되었다.
  1948년 조선신학교에서 정통을 자랑하던 51명의 학생과 그외 10여명으로 복음동지회를 구성하여 김재준 교수를 몰아내고 1952년 7월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조직하고 12월에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운동의 고문이 바로 박형룡박사이다.  이들은 단순한 신앙운동이 아니라 43회 총회 때는 총회 임원이 이들의 일색이었다.  이들은 박형룡 박사의 3,000만환 사건이 터지자 박형룡 교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 하였다.(학교부지 구입하는데 박호근이라는 자에게 속아 3,000만환을 사기당함)
  1959년 9월 24일 대한 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다음날 이환수 목사가 경기노회 총대 선출 내용을 가지고 계속 되풀이 발언을 하자 박희몽, 김자경 장로 등이 “독사의 자식들아 에큐메니칼은 용공단체요 신신학이다”라는 폭언과 함께 회의를 방해하였다.  경기노회는 총대를 다시 선출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포하였다.  이렇게 되자 총회장을 지지하는 N.A.E.측 목사들은 회의장에서 빠져나가고 노진현 목사 처세가 부당하다고 한 회원들이 회의를 계속해야 한다고 회의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전중앙교회 교인들이 회의장에 나타나 교회의자를 뒤엎으면서 회원 목사들을 고무신짝으로 두들겨 패나 목사들은 얻어 맞으면서도 이리저리 피하며 150여 명의 회원이 남아 회의장을 떠나려 하지 않자 대전중앙교회 목사요 부총회장인 양화석 목사가 나타나 “더이상 장소를 제공할 수 없으니 회원들은 나가달라”고 하며 강제 추방시켰다.  제44회 총회는 1950년 4월 대구총회와 같이 너무도 처참하였다.  4.19와 5.16 얼마전 일로서 한심한 일이었다.
  대전중앙교회에서 �겨난 149명 총대들은 1959년 9월 28일 오후 1시 대전 미락식당에 모여 전필순 목사(친일 어용, 해방후 반민족행위특조위에 체포됨)를 회장,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선정하고 총회 속개 준비를 구성하고 29일 오전 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회장 이창규, 부회장, 김석진, 서기 김광현, 부 김성칠을 선출하니 통합측이 되었다.
  합동측은 1962년 11월 19일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로 분열되었고 다시 김치선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장로회(오늘날 17만 교인의 예장<대신측>)로 분열하였고 다시 1963년 9월 17일,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분열하였다.
  다시 대한 예수교장로교 합동측은 개혁파, 개혁2파, 개혁3파, 개혁보수, 개혁정통, 근본1, 근본2, 독노회1, 독노회2, 로고스공의회, 보수, 보수개혁, 보수재건, 보수측, 법통, 보수합동, 사당동측, 보수합동, 홍은동측, 성합, 성합측, 순장, 연합측, 장신, 재건, 정립, 정통, 종합, 중립, 중앙, 합동개혁, 합동보수1, 합동보수, 합동장신, 합동정통, 합동중앙, 합동총신, 합동총연, 합동총회, 합동환원, 혁신, 협동, 호헌1, 호헌2, 호헌3, 합동총회측 등 헤아릴 수가 없다.
(수없이 나뉘어졌어도 합동이 제일 큰 교단인데 문제는 나누인 교단들이 신학교가 대부분은 부실하다는 데 있다.)
  사도바울은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하였다(고전 3:3-4).  여기 성서대로 한다면 그들은 목사는 그만두고 사람도 아니다.
  감리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예수교대한감리회, 예수교대한감리회(ICCC 탈퇴측) 등이며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혁신측) 등이다.
  이동휘 전도사는 12월 3일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피어슨 선교사가 임명하여 전도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볼세비키를 만나 사회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후 볼세비키의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6월 볼세비키의 도움으로 하바로브스크에서 한국 최초로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되었는데 이것은 모택동보다 4년 앞선 것이다.  이동휘는 독립을 하기 위하여는 유력한 정부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소련정부와 손을 잡았지 그는 공산주의의 ABC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운형의 본적은 경남 함양으로 1907년 크라크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25세 때인 191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마치고 서울 승동교회 전도사로 봉사하였다.  1914년 9월 중국 남경 금능대학 영문과에 입학 3년을 수료하였다.  상해에서 김규식, 장덕수 등 30여명과 함께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3.1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2월 27일 동경 국제호텔에서 500여명이 모인 세계 기자들 앞에서 1시간 30분동안 연설을 하였다.  연설 내용은 “왜 조선은 독립해야 하는가 한일합병은 강제결혼이며 조선은 독립해야 하며 독립할 것이다.  이길이 극동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가 온다”라고 선언하여 박수를 받았다.
  일본의 총리 하라다카시이와 육군대신 다나까 등 일본 각료들은 심히 당황하였다.  그의 대담한 선언에 조선의 온 백성은 만세를 불렀다.  이때부터 여운형은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미국의 예일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한 이대위 목사와 숭실학교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과 개렛 신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한 김창준 목사, 최문식, 이재복, 신흥우, 윤치호, 갈홍기 이들은 모두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다.
  1945년 9월 윤하영과 한경직등은 신의주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1947년 2월 24일 남한에서 기독교도 민주동맹이 결성되었다.  기독교도 민주동맹 조직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창준(감리교 신학교 교수.  북한에서 조선인민회 부의장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장 역임)
  총무: 박성산 목사   고문: 신흥우 목사  
  강령기초위원: 갈홍기 목사
  기독교 민주동맹에서는 성명서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우리 조국을 아메리카 제국주의에 예속시키기 위한 식민지 정책에 무조건 복종케 한 이승만 도당은 진정한 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북반부에는 종교인과 종교단체가 어떤 간섭도 없이 자유로이 종교 사업과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최문식 목사(대구폭동 주동)
  1946년 10월 1일 대구의전 학생들과 시민들은 분노하여 대구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시위대들은 총을 들게 되었다.
  경찰 부상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요청했을 때 거절하여 병원에서도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것은 경찰에 친일파들이 많은데 대한 감정이었다.
  10월 3일 최문식 목사, 윤장혁, 김인식 등도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나 인민군의 서울 입성시 출옥하여 기독교와 목사들에게 온갖 박해를 저질렀고 철수시에는 납북인사를 끌고 갔다.  이재복 목사와 OOO는 14연대 반란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이재복 목사는 남로당 군사부 조직책이었으며 OOO는 육군안의 조직책이었다.
  쌍O그룹 전회장 김O곤씨는 경북인민위원회 재정부장으로 대구폭동에 가담하였고 유정회 국회의원 홍순만도 가담하였다.  공화당 당의장 서리 백O억씨는 부산철도노조 파업지도자로서 대구폭동에 가담하여 대한민국에서는 출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재복 목사(14연대 반란 조종)
  일본을 찬양했던 친일파 목사들은 일본이 망하여 해방되었으면 자숙하고 근신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는 커녕 교권을 유지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이에 반발, 이만규, 최문식 이재복 등 일부 목사들과 일부 신학생들이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였다.
(여기서 잠시 출옥성도 손양원 목사의 어록을 보자.  6.25 이후 서울에 있던 목사님들이 남하했다는 말씀을 듣고 어느 누구에게 하신 말씀 중에,
“아-- 큰일 났다.  이 민족의 죄값으로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셨는데 수도 서울에서 죄를 외치다가, 그리고 회개를 전하다가 제물이 되어야 할 선지자들이 모두 내려왔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라도 대신 올라가야 되겠다.” 고 하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상경할 길을 알아보시기 까지 했으나 애양원에서도 말릴 뿐 아니라 길이 열리지 않아서 못 가셨다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생각날 때에 ‘과연 손 목사님이시로구나''''.
  “그 역시 안됩니다.  지도급들이 자진해서 먼저 피한다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일반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몰라도 그들을 못데리고 갈 바에야 자진해서 먼저 간다는 말은 절대로 안됩니다.  차라리 일반 교인들은 자유로 피신케 하고 우리 24 제직들만은 함께 순교(殉敎)합시다.” 하시며 殉敎하자는 결론으로 돌리시는 것이었다.
  손 목사님께서는 책상을 치시면서,
  “배은 망덕도 분수가 있지 않소?  신앙상으로 무신론자를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8.15 해방 이후 이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하루 3홉씩 배급을 받아서 배불리 살아 온 우리들이 몇날쯤 굶게 되었다 하여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도의상으로도 할 수 없어.  깨끗이 살다가 깨끗이 죽어야 할 것이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붉은기는 절대로 달지 못합니다.”
                          하시고 큰소리로 책망하신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종로1가 기독교서회 2층에서 교역자들 약 40여 명이 모였다.
  장로교: 한경직, 김종대, 김린서, 강원용
  감리교: 김유순, 박만춘
  성결교: 김유연
  이때 1946년 교회를 버리고 월남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의 말에 교역자들은 서울사수를 결의하였고 그 후 제일 먼저 도망친 분은 한경직 목사였다.  입으로야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기독교민주동맹 위원장 김창준 목사(독립선언서 서명자)는 교단별로 환영대회 대표를 선정하였다.
  고문: 신흥우 목사
  총무: 박성산 목사
  장로교: 유호준, 김종대, 최문식
  감리교: 박만춘, 심명섭, 최택
  성결교: 1명
  구세군: 황종률(시대는 바뀌어도 그 이름이 그 이름인 경우가 많다)
  이상의 대표들은 처음에는 인민군 환영대회를 거부하였으나 서울시 종교를 담당하고 있는 경동교회 신자인 김욱이 강력히 권고하여 환영대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7월 10일 종로2가 YMCA강당에서 환영대회를 가졌다.
  사회: 유호준 목사
  환영사: 김종대 목사
  사회를 보기로 결정한 유호준 목사가 신병으로 불참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사회를 보았으며 설교 김종대 환영문 낭독은 임영빈 목사가 하였다  내용은 “김일성 장군!...”
  심명섭은 일본 식민지 때는 일본의 앞잡이었다가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공산당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교역자들은 도강파 목사들이 치안대에 다시 고발하여 경찰에서도 골치가 아플 정도였다.
  1950년 10월 25일 장로교 한경직 목사, 선교사 아담스 목사, 권세열, 윤하영, 친일파 전필순 목사 등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3,0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위의 교역자와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황은균 목사가 설교를 하였다.
  1950년 11월 말경 평양시내 교회는 연합으로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약 5,000여 명의 성도들은 첫 시간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세쨋날이 지나고 네쨋날이 돌아왔을 때 강사와 교역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성도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강사와 교역자들은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다.  알고보니 미 고위 장성으로부터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듣고 강사 이대영 목사와 다른 목사들이 부흥회를 마치지도 않고, 또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양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남궁혁 목사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2년 미국에 유학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925년 귀국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국내에 있기 어려워 1938년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1946년 많은 한국인들을 인솔하고 한국에 도착하였다.  귀국한 남궁혁 목사는 세관국장까지 하다가 1948년 사임하고 기독교협의회 총무로 일하였다.
  1950년 8월 23일 남궁혁 목사는 인민군에 협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인민군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갔다.  정치보위부에서는 그에게 기독교 대표로 남한을 향해 방송을 해주면 석방해 주겠다고 설득했지만 끝내 거절하였다.  그는 금식을 하다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을 돕기 위하여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를 도왔다.
  1960년 2월 18일 반도호텔에서 열린 교계 지도자 초청모임에서 목사들은 이승만 장로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였다.
  특히 친일 반역자를 처치하지 못한 것과 분단을 가져온 것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일로 천추만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목사들은 이승만이 장로이기 때문에 이승만 장로에게 부정을 철저히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하고 법을 지키도록 권고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대대적으로 찬성하여 이승만 장로와 한국을 비참하게 하고 많은 학생을 희생시키는데 동조하였다.
  목사들은 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성명서 한장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부정부패의 이승만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기독교 목사들에게 연세대학교 학생회에서는 “독재자에게 아부하여 성직을 버렸던 종교인들은 침묵으로 자숙하라.”고 외치며 회개와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철면피같이 감각이 없었다.
  이승만 장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만주와 상해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냉대하고 일본의 앞잡이들인 친일파들에 대해서는 보호와 우대를 하여 민족정기의 싹을 잘라버렸다.  이승만은 1925년 독직사건으로 탄핵이 되었고 미국에서도 독립자금 운영에 대해서 규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이 자기의 잘못을 폭로할까봐 천대한 것이 민족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설곳이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누가 정의롭게 살 것이며 누가 국가를 위해 목숨걸고 애국을 하겠는가?  이승만은 정절이나 지조나 정의나 애국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국민이 해바라기처럼 이리 붙어 살고 저리 붙어 살게 하는 썩은 정신을 심어놓았다.
  이승만은 장로요, 최인규는 장로교 집사이며 이기붕은 감리교 권사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해서 기독교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이러기에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종교는 가장 무서운 사회악으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될 암적 존재들이다.
  기독교는 해방이 되어 신앙과 정의에 사는 분이 심히도 적어 하나님과 조국을 배신한 무리들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민족의 반역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기독교였다.  그로인해 신앙과 정의가 혼돈의 세상이 되었다.
  어용 그들이 교권을 잡고 있어 정치제도를 개선할 수 없어 교회나 지방회(노회) 총회는 수라장이되어 고등종교가 하등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1959년 44회 장로회 총회 분열후 통합측은 민족반역자 전필순(반민특위에 체포)을 용납하고 그를 총회장에 추대하였고 성결교회는 이명직을 서울신대 학장으로 추대하였다.  어떻게 이들이 하나님의 일꾼될 위대한 종들을 교육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한편 에큐메니칼 성분을 제거한 승동측<나중 합동측>은 고신측이 주장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고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를 총회장으로 추대<2년 연임>함으로 말미암아 신사참배문제를 일단 공적으로는 완결 지었다.)
  기독교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단체가 되었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지금도 기독교 목사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오직 자기 과시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  이러고서야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겠는가.
  기독교가 역사의식을 상실하게 되면 역사도 언젠가는 기독교를 상실하게 된다.  이유는 윤리를 떠난 기독교는 존재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암 5:21)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의 윤리의식도 성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윤리의식은 가면 갈수록 추락하여 기독교의 윤리가 없는지는 오래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마 7:21) 일반 친목단체이다.  그들은 개인구원에 집착하여 오직 자기 환상에 도취되어 있다.
  식민지시대와 이승만 장로의 독재시대 때 얼마나 많은 교역자들이 로마서 13장 1절을 악용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순종하라.”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왜곡했던가?
(1939년 9월 11일 신의주<신의주 제2교회, 담임 한경직 목사>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에서 일제가 바라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耶蘇敎長老會聯盟)이란 기구가 결성되었다.  결성식 순서를 보면 사회에 곽진근, 성경봉독<롬 13:1-7>에 한경직(韓景職), 취지 설명에 윤하영, 규약 낭독에 조승제, 선언 낭독에 김길창(金吉昌), 축전 피로에 강신명(姜信明), 기도에 최지화 등 실로 장로교의 기라성 같은 거물 목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여기서도 로마서 13:1을 악용!)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의가 실현될 수 없으며 그런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어용으로 뒤덮인 우리 사회는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  아무리 교회가 많고 기독교인이 많다 해도 능욕을 질 용기가 없는 어용사상을 가지고는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
  OOO가 불법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장면 정부를 몰아냈는 데도 기독교 일부에서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기는 커녕 환영하는 추세였다.
  1961년 반란을 일으킨지 35일만인 6월 21일, 반란정부를 강력히 반대하는 미국정부에게 반란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기독교대표 한경직 목사와 최두선, 김활란, 정일권 등이 미국에 도착 애원을 할 정도였다.
  1969년 9월 4일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 김장환 목사등의 보수교파라고 하는 242명의 목사들은 대한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김윤찬 목사를 선출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선개헌 지지와 양심자유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 일동’으로 발표하고 또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체제를 바란다.“고 하며 더욱더 강력한 독재를 요구하였다.
  대한기독교연합회는 1972년 “유신개헌과 유신헌법을 지지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대한기독교연합회 회장인 김윤찬 목사가 이중국적인 미국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어 미국으로 가버리자 대한기독교연합회는 해체되고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1975년 지원상과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 홍현설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기독교연합회를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로 다시 발족하고 “서울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전북 김제군 백구면 소재의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가 1976년 신·구교 월요기도회에서 기도한 내용과 강희남 목사가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부정부패의 근원인 유신정권의 뿌리를 뽑는 길이다.”라고 하자 이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과 반공법 위반이라고 하며 구속하였다.  강희남 목사는 “OOO 정부는 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하여 합법정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라고 하며 신청을 거부하였다.  그는 일생을 농촌에서 목회하였다.
  1977년 11월 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의 선고를 받은 강희남 목사는 OOO의 죽음으로 복역중 석방되었다.
  1977년 11월 26일 전남노회 주최 ‘농민을 위한 기도회’에서 행한 설교와 기도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고영근 목사는 또 강진경찰서에 연행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설교내용은 OOO는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법을 파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고목사는 장흥지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6차례 걸쳐 금식하였다.  고영근 목사도 OOO의 죽음으로 석방되었다.
  여기 국보위 종교담당은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이며 입법에는 조향록 목사가 관여하였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국보위 종교담당 정진경 목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입법부 조향록 목사, 김지길 목사 등 20명의 기독교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OOO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호화찬란하게 열렸다.
  사회 문만필 목사로 시작된 예배에 조향록 목사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 김지길 목사의 ‘한국 기독교를 위한 기도’가 이어졌고 국보위 종교담당 정진경 목사는 ‘OOO 상임위원장을 위한 기도’에서 “구석구석 악을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김인득 장로의 ‘군 장병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있었다.  배후 주선은 보안사령부 군목 문만필 성결교 목사였다.
  이 조찬기도회는 문화방송, 중앙방송에서 여러 번 반복 방영하였고, 일간·중앙신문은 머리기사로 다루어 OOO소장을 국민들에게 부각시켰다.
  더욱 기막힌 것은 OOO 집단의 죄를 지적하기는 커녕 찬양을 하고도 그들은 지금껏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인지 선한 일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교인들을 가르치겠는가?(렘 5:30-31)  그들이 가르친다고 교인들이 감화를 받겠는가?  그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허공에 외치고 있지 않은가?
  김수환 추기경은 70년대 부활절 강론에서 “박정희는 비 민주적이다”하면서 유신을 반대하고 도덕적 잘못과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하여 박정희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그러면 교회 사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세계 복음주의자들은 1974년 7월 16일 세계복음화 국제대회를 스위스 로잔에서 가졌다.  이 모임의 중요 목적은 전도와 사회책임이다.  이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전도와 사회적, 정치적 참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의 두부분인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우리가 믿는 신관, 인간관의 표현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우리의 신앙의 필연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지금까지 사회문제에 대하여 등한시 했던 것과 때로는 전도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서로 배타적인 것인양 생각했던 일에 뉘우침을 표명하고”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로잔에 모여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로잔언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제자로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 경제 또는 정치적 불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는 대분부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을 등한히 한다면 이 역시 계명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와 사회참여를 언제나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전도와 사회참여를 양극화하는 것은 반대지만 일의 전문화를 반대해서는 안된다.
  사회봉사는 교회에서 제자를 만드는 사역없이 이루어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제자를 만드는 사역은 결국 사회 정치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전도가 우위성을 갖게 된다.
  사람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확실히 믿는다.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의 위임으로 절대 권력이 있을 수 없다.  권력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만일 권력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백성을 탄압하는 일이나 권력자가 자신을 위하여 악하게 휘두르는 경우 기독인은 불복으로 항거해야 한다.  워싱턴의 독립전쟁 크롬웰의 혁명등은 법과 정의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권력자에게 저항한 좋은 예이다.


 맺음말
  기독교 목사들이 징병제를 찬양할 때 조선의 젊은이 26만 명이 개끌려 가듯 징병에 끌려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징용으로 50여만 명이, 정신대로 20여만 명이 끌려갔다.  그들은 짐승같은 대접을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현재도 그들은 얼마나 많은 비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친일파 목사들은 죽음의 길로 가는 동족을 찬양하였으니 살인 협조자들이 아닌가!  그들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이 패전하여 해방되었을 때 회개와 반성은 고사하고 그들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처벌받기는 커녕 오히려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과연 이래서야 되겠는가?(똘마니가 있으니까 왕초가 있는거 아녀!  K 목사)
  1944년 8월 24일 드골 장군 휘하 쟈크리클레르 장군 전차 부대는 최선발부대로 제일 먼저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들은 4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로써 나치스를 위해 협력한 자들을 처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1만 1천여 명을 즉결처형하였고, 정기 재판소가 설치된 뒤에도 767명이 사형되었으며, 3만 9천여 명이 투옥되었고 4만여 명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독일군에게 부역한 자들도 여생을 시민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숨져가도록 하였다.  1차대전의 영웅 패당 원수는 나치스와 협력하여 비시 괴뢰정권을 이끌었다고 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섬 유배지에서 복역중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묻지 못하게 하였다.
(반민족행위특조위에 체포된 목사를 심지어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장로교총회장으로 선출하였으니...  불란서라면 이경우...)
  독일에서는 현재까지도 나치스 범법자들을 추적하고 있어 형사처벌에 시효가 없다.  나치스에 협력한 목사들도 가차없이 처단하여 교회와 공직에서 축출했으며 현상학의 거두 하이데거도 나치스에 협력하였다고 하여 일생을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신사참배에 항거한 출옥성도들을 제민족들이 장로교총회에서 축출하였는데 우리가 어떻게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을 탓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후예들이 교회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1948년 8월 17일 해방후 3년을 끌어오던 반민법 초안이 국회 의사 일정에 상정되어 9월 7일 제36차 본 회의에서 141명중 찬성 103표, 반대 6표로 절대적 다수로 통과되었다.
  이승만 장로는 친일파 숙청에 가장 앞장을 서야 할 분이 반민법은 비민주적이라고 반대하고 나왔다.
  반민특위는 7,000여명의 친일 반역자를 파악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목사들은 장로교 정인과, 김길창, 차재명, 홍병선, 정남영, 신흥우, 박희도, 윤치호, 김활란, 감리교 정춘수, 김인선, 양주삼, 김동안 등이 검거되어 친일 반역자 검거에 한창이었다.
  반민특위활동을 강력히 저지하는 단체는 이승만 장로를 중심해서 친일반역자들과 일경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었다.
  반민특위는 영장 408건 발부, 305명 체포, 221건을 기소, 사형 1명, 무기 1명, 유기징역 10명의 판결을 내렸으나 1950년 봄 전원 석방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국가를 팔아먹고 자기민족을 박해한 친일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처단하지 못하여 우리 민족의 자존을 스스로 포기하고 일본침략을 합법화시켜 1910년 국치일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이승만 장로 12년 동안 친일 반역자 장관 전체 96명 20명으로 31%나 되었다.
  장면 정부의 제2공화국은 60%가 친일 반역자였고 박정희 정부의 제3공화국은 본인이 일본 육사출신으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이므로 더 설명이 필요없는 정부였다.  조국을 위해 몸바친 독립운동가들과 그의 자손들은 불행한 유산을 그대로 상속받아 살기가 어려운 곳이 대한민국이다.  이런 속에서 어떻게 도덕성이 회복되며 인간미가 넘치며 법을 지키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겠는가!
  우리의 골수까지 사무친 친일 반역자들을 철저히 숙청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어용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국가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방된지 42년이 지난 오늘까지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하고 어용 천국을 만들었다.  또한 OOO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OOO, OOO을 지지하여 어용들을 애국자로 혼동하는 세상이 되어 대한민국은 부패할대로 부패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급하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용을 처단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친일 반역 교역자들이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산정현교회 목사관에서 몰아 내고도 서울에서 버젓이 목회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장로교단, 양주삼 목사가 아직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감리교단 등 기독교는 어용의 온상으로 민족정기를 좀먹는 단체로 오늘의 현실문제를 낳았다.  기독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면키 어렵다.
(목회와 신학 11월호에서, 「양주삼의 생애와 신학사상」을 장신대의 한숭홍교수가 공정히 잘 집필하였는데, 감리회 본부의 역사자료실 김진형 목사가 강력히 반발하였다.  위 말에 잘 맞는다.)
  징병제를 찬양하고 신사참배를 권고하고 황국신민된 것을 감사하고 성경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이명직 목사가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되어 학생을 가르쳤으니 그의 제자들의 사상이 어떠하겠는가!  그러기에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에서 출판한 성결교회 인물전을 보면 이들을 대대적으로 칭찬하기를 ‘사부요 교부’라고 하기까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으며 성결교가의 작사자가 이명직 목사인데도 누구 한 사람 말하는 목사들이 없다.  이러한 이명직 목사를 칭찬하면 출세하고 나쁘다고 하면 고립되는 교단 풍토가 되었다.(오래전 모교수에게 이OO 목사를 물으니 자신 때는 아니고 부친이 배웠을 거라며 자랑스레 꾀나 흠모하는 눈치였다.  교육이 잘 된 것이다.)
  어용 목사들은 독재자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과 같은 인간들로서 독재자의 죄를 지적하여 바른 길을 가도록 할 용기가 없다면 목회나 할 일이지 범죄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범죄의 협조자가 되어 이땅을 범죄의 소굴이 되게 하고 있다.
(교회가 사회부패를 막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키고 있다.
                                   연세신대 학장 김중기 교수)
  어용을 몰아내지 않고는 교회의 화평이나 법의 회복, 질서 회복, 도덕성 회복을 절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법과 질서와 도덕성이 마비된지 오래다.
  기독교 목사들은 독재자를 축복해 주고 부자를 우대하고 정직한 생활과 용기 있는 생활 예수님 고난에 동참하는 생활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처벌로 인식되었고 시민 대중과 근로자의 고통을 믿음이 적은 결과로 돌려버리고 관심조차 없었다.  특히 조O기 목사와 일부 부흥강사라는 자들은 한국 기독교정신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진정 기독교 지금과 같이 어용사상을 몰아내지 못하고 어용사상이 기독교 안에서 춤춘다면 기독교와 한국의 장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궁금하다.
  그들은 출세를 위한 것이라면 사탄의 앞잡이도 주저하지 않는다(왕상 22: 6, 20-23)
  어용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도 도덕성 회복도 절대 불가능하다.



* 참고 문헌 30여개와 각주 문헌 63개가 나와 있는데 모두 생략.
* 한편 이책에서는 카토릭은 지시에 의하여 신사참배만 하고 다른 적극적인 반역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금도 덜하지 않는 신인공노할 친일행각을 1994년 3월에 나온 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청산하지 못한 역사 2”의 ‘호교위해 신을 판 성직자 노기남’(주교)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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