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건 주 의

2007. 12. 17. 21:25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경 건 주 의

Ⅰ. 서   론
   A.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경건주의는 유대-기독교의 역사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갖지 못했던 운동 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경건주의가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여 미국의 교회사료 편집에 가장 큰 공백을 남기고 있다.  1 0세기 신학 용어로서의 경건주의는 도덕주의, 율법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 등 부정적 평가 일변도로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묘사들은 경건주의에 대한 초기 정통주의적 반대자들의 논쟁적 발언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운동은 개신교 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운동으로서 생활 방식, 성서적 주제, 초교파 운동, 선교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갱신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루터파 안에서 최초로 분명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다.  1546년 루터가 사망한 후 루터파 내에서는 많은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파들과 칼빈주의자들은 각기 자기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하여 정교한 신학적 방법론, 스콜라 주의,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odoxy)라고 알려진 학구적 신학의 특징을 묘사하는 어휘를 개발해 냈다.
경건주의는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와같은 개신교 정통주의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그 객관주의에 대한 종교적 주관성이 강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정통주의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나, 정통주의는 메마르고 논쟁적이며 편협하고 실질적인 경건 생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중생과 성화 및 종교 체험에 대한 강조로 교회에 갱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국 경건주의는 종교 개혁자들의 생동감과 개방성과는 거리가 먼 부패된 정통주의에 항거하여, 삶의 성화와 사회의 윤리적 실천을 도모하면서 교회에 갱신을 일으킨 것이다.
독일내의 경건주의자들의 개신운동은 교회안에 새롭게 퍼져나가 교회안에서 무기력한 신앙에 중생의 체험을 강조함으로 생동감을 주었고, 교회안의 작은 교회 (Ecclesiolue in Ecclesiu) 를 통해서 성경공부와 삶을 서로 나누면서 교회에 새롭게 갱신을 일으켰다.
따라서 본 논문은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경건 활동을 통해서 교회에 어떻게 갱신을 일으켰는지를 살펴보고, 경건주의자들의 갱신이 선교와 모라비안과 웨슬레와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끼친 영향을 통해서 경건주의자들이 갱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겠다.

   B. 연구 방법 및 범위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보다 화란에서 먼저 그 태동을 보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을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본 논문으로 너무 벅찬 작업이고 또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독일내에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세 사람 (Arndt, Spener, Franke) 이 신앙의 내적 체험을 강조하고 성경중심의 그룹모임을 통해서 교회내의 성도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교회가 갱신된 형태를 살펴 보겠다.
사회운동의 시각에서 살펴봄을 지양하고 성도들의 신앙의 내적 갱신을 중심으로 연구해 보고자 한다.
독일경건주의에 관한 자료가 빈약함을 인지하면서 본연구는 Snyder 가 쓴 "Signs of the spirit" 와 Brown 이 쓴 "경건주의 이해" 및 Erb 이 쓴 "경건주의자들과 그 사상" 을 참고하여 문헌연구방법에 의한 이론적 접근방법을 시도하겠다.
저술 방법은 Ⅱ장에서 경건주의 이해를 얻기 위하여 경건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경건주의가 17,18C에 어떤 배경 속에서 일어났는지를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제Ⅲ장에서는 독일의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Arndt, Spener, Franke의 생애와 경건 활동을 살펴보겠다.  특히 Arndt의 경건 활동 내용에서는 영적인 삶 안에서 새 삶을 향하기 위한 수단을 살펴보겠고, Spener에게서는 그의 저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를 중심으로 그의 경건을 살펴보겠고, Franke에게서는 그가 가장 크게 활동하였던 Halle 대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제Ⅳ장에서는 경건주의자의 경건 활동이 교회 갱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 보겠는데 갱신의 정의와 갱신의 본질과 갱신의 모델을 살펴보고,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갱신이 근대에 있어 선교에, 모라비안 교도에게 요한 웨슬레에게 19C미국 대각성 운동에 미친 영향을 통해서 그 내부의 갱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경건주의의 이해
   A. 경건주의의 정의
      1. 경건주의의 유래
서기1670년 독일 개신교 안에서 형성된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성과 교회의 철저한 갱신을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1690 - 1740년 사이 반백년 동안 절정에 이른 경건주의는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 예배의식에 대한 신학에서부터 각 개인의 경건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깊은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경건의 유래를 살펴보겠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말은 "유세베이아"(eusebeia)인데, 이것은 "공경"을 의미하며 때로는 "경건함"으로 번역된다.    "유세베이아"(eusebeia)를 라틴어로 "피에타스"(Pietas)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애정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파이어티"(Piety)이며 "불쌍히 여김"(pity)과 "동정"(compassion)을 의미한다.  독일어로는 "프롬"(fromm)인데 "경건하고 독실한"이나 "온화하고 순진하고, 소박한"을 의미한다.
이런 호의적인 해석들 말고도 이 단어는 오랫동안 부정적인 의미를 지녀 왔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5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경건한 사람은 예배와 행동에서의 독실함에 의하여 특징지워질 수 있으나, 경건이란 그 행동이 의식적인 덕행이나, 보이기 위한 종교 행위 또는 위선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사람에게 언급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경건주의는 경건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의해 후손에게 전해진 비난조의 별명이었다.  그 이름의 개념은,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스페너의 간절한 소망들을 수록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의 "교회 예전"(Church Postil)에다 스페너가 쓴 서문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유래된 것 같다.  1675년에 있었던 이 서문의 출판은 독일 경건주의의 탄생을 촉진시킨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의 개념은, 1669년에 스페너가 거짓된 의를 다룬 한 편의 설교를 한 데 이어 최초로 제안한 "경건 집회"라 불리는 집회들로부터 유래되었던 것 같다.
   2. 경건주의의 기원
역사적 운동으로서의 경건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있었던 독일의 스페너와 프랑케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이다.  경전주의의 기원은 신비주의(Mysticism)와 영국의 청교도주의(Puritanism)에서 찾는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교회가 본질을 잃고 영적각성을 소홀히 할 때에 기존 체제에 대한 개혁적 의지를 가지고 교회의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독일 경건주의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신비주의는 엑카르트(Meister Eckhart), 타울러(John Tauler), 수도(Henry Suso),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등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발전하였다.  이중 타울러는 루터와 종교개혁, 그리고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발생하는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타울러는 엑카르트의 제자이며 영력과 지력을 겸비한 설교가였는데, 그의 설교집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읽혀졌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성경, 어거스틴, 그레고리, 디오니시우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내적 생명력을 강조하여 외적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적 사상이 강했고, 실제적이며 은총과 회개를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신비주의와 관련된 두 개의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경건주의의 발생과 스페너의 이론적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비주의의 두 단체는 "하나님의 친구들"(the Friends of God)과 "공동생활 형제단"(the Brothers of the Common Life)이다.
'하나님의 친구들'은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이 단체는 교회에서 영적 고갈을 느껴 모여든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는데, 성경연구와 경건생활, 그리고 성별생활을 강조하였다.  이 단체에서 나온"독일신학"(German Theology)이라는 책은 프랑크프르트의 어느 사제가 14세기 후반에 쓴 글로서 독일교회의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책이 되었다.
또한 "공동생활 형제단"은 14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운동인데, 이들은 공동의 규칙 아래서 수도원 생활을 강조하였다.  왜냐면 이들은 타락한 교회의 개혁은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 형제단은 학교를 세워 성직자와 사회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교육내용은 복음주의와 경건주의 사상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15세기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건생활과 종교개혁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이 단체에 속해 있던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서 소박하고 신비한 교회적 경전을 주장하여 스페너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들 형제단은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평신도의 목회참여를 강조하였다.
신비주의의 신비적 요소는 종교개혁에 까지 계속되어 그 신학적 사상은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흡수되었다.  17세기 경건주의가 형성되기 전 몇몇 신비주의자들 중 뵈메(Jakob Boehme)는 깊은 영적 체험과 계시를 추구하여 프랑케(August Franke), 진젠돌프(Nikolaus Zinzendorf)에게 영향을 끼쳤고, 아른트(John Arndt)는 카톨릭의 신비주의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여 그의 "진정한 기독교"(Von Wahren Christentum)라는 책은 루터교의 대표적 경건서적이 되었으며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탄생하는데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모라비안 운동과 영국 웨슬레 부흥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한편 17세기 이전의 경건주의적 요소는 청교도 주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륙적 경건주의와 같이 청교도주의도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형식적 예배의식과 정치체제에 반대한 개신교 운동이었다.  청교도주의는 청교도운동의 지도자인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가 말한대로, 하나님께 의존하며 사는 성경적 생활이 기본이 되는 사상이다.
청교도의 종교적 배경은 유럽대륙의 프로테스탄티즘, 즉 루터와 칼빈의 신앙과 영국의 위클리프의 개척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청교도는 종교개혁자들이 해결치 못한 것을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루터나 칼빈은 중세 로마 카톨릭을 개혁한다고 하였지만 중세적 교회 문명(Church Civillization)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교도는 중세기 문화의 잔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교도는 목사의 복장 문제로 개혁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왕의 권위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또 이들은 형식적 교육대신 내적인 영적 체험을 강조하였고 지식인이 사회적 정의를 등한시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가정의 경건생활 실천, 청소년의 철저한 종교교육, 자기훈련 그리고 명상을 강조하였다.  이들 청교도의 대표자들로는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존 밀턴(John Milton), 존 번연(John Bunyon),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존 오엔(John Owen)등이 있는데, 박스터, 베일리, 번연의 저서가 번역되면서 대륙에 청교도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책중에서 박스터의 "이교도의 부르심"(A Call to the Unconberted), 베일리의 "경건의 훈련"(The Practice of Piety),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과 에임즈의 "거룩한 신학에 관한 수필"(Medalla Sacrae Theologiae)등이 경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페너는 그의 스승인 요한 단하우에르(Johann Dannhauer)로 부터 성실성, 성경주의 및 보다 민주적인 정책 등에 대한 칼빈주의의 강조는 경건주의의 원리가 되었다.
 
B. 경건주의 운동의 배경
   1. 역사적 배경
경건주의는 개신교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산물이었다.  그 근원은 16세기 말로부터 17세기에 일어난 경건의 실천에 대한 루터파 및 금욕적인 칼빈주의자들의 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운동들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네덜란드 개혁주의 진영들 속에서 최초로 나타났고, 아른트(Arndt), 스페너(Spener), 프랑케(Francke), 벵겔(Bengel), 진제도르프(Zinzendorf)등의 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루터 교회에서도 나타났으며,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에른스트 호크만(Ernst Hochmann), 요한 디펠(Johann K. Dippel) 및 페터젠파(Petersens)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개혁되었고, 모라비안파(Moravians)와 형제 교회(Church of the Brethren), 스웨덴 선교단(Swedish Mission Friends), 웨슬레주의 운동(Wesleyan move- ment)및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들로 말미암아 채택되었으며, 많은 기관, 협회들과 교파들의 기본적인 종교적 기풍으로 계속되고 있는 개신교의 주요한 운동들이다.
"독일 경건주의"(Der deutsche Pietismus)는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로부터 시작된 경건 운동(Frommigkeitsbewegung)과 개혁 운동에 뿌리를 두며, 30년 전쟁(der Dreissigjahrige Krieg)후 다시금 힘차게 활기를 띠었던 신비주의적 영성주의에서 분파되고, 지하로 들어간 물결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동시에, 하나의 총체적 유럽 경건 운동에도 근거를 두는데, 17세기 앵글로 색슨의 "청교도 주의"(Puritanismus), 네덜란드의 "엄정주의"(Prazisismus), 프랑스의 "얀센주의"(Jansenismus) 그리고 "정적주의"(Quietismus), 마지막으로 동구의 유대인의 "차씨드주의"(Chassidismus)를 들 수 있다.
경건주의가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30년 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경건주의의 시작은 스페너의 저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찾는다. 스 너는 1674년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의 재판에 나오는 서문을 부탁받아 그 책에서 경건주의를 피력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피아 데시데리아]이다.  이 책은 아주 대담한 개혁의 내용이 담긴 작은 책으로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아울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개혁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피아 데시데리아]는 3부로 편집되어 있는데, 제 1 부에서는 교회의 비참한 영적 빈곤과 통치자의 타락상, 성직자의 부패와 불신앙을 공격하였고, 제 2 부에서는 교회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제 3 부에서는 개혁을 이룩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 [피아 데시데리아]가 독일 경건주의의 시작인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에 경종을 고하는 중요한 책이 되었다.
   2. 사회적 배경
루터의 1517년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과 신교는 줄곧 크고 작은 종교전쟁을 치루었고 부분적으로 서로의 종교 자유를 허용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 지뢰밭을 밟으면 터질듯이 불안한 휴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시대상황이었다.  그렇다가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카톨릭 신자인 페르디난드가 카톨릭 정책을 노골적으로 내세우자 프로테스탄트들은 왕의 고문 두 명을 창 밖으로 집어던졌다.  흔히 "프라하 폭동"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었다.
이 30년 전쟁이 결국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발생케 한 원인이었다. 30 년 전쟁이 끝난 후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군주중심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으로 교회법 제정과 성직자 임명의 절대적 권한을 군주가 행사하고 있었고, 독일 궁궐생활은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프랑스의 화려한 생활에 못지 않을 정도로 생활하는 정치부재의 상태였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력이 심히 악화되어 어떤 곳에서는 돈의 가치가 떨어져 경제가 물물교환으로 까지 감축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교회는 불타 버리고, 음식창고는 바닥이 남으로 집없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구걸하러 몰려 다니면서 남의 것을 강탈하고 닥치는대로 파괴하였다. 이 의 경제적 심각성을 Christian Geber는 "농민들이 동물처럼 살았다"고 표현했다. 이  같은 경제적 손실은 국민의 도덕적 가치관의 타락을 가져왔다.  교회적 측면에서도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고, 목회자들은 국가의 관리가 되어 국가에 종속된 채 교회는 정치의 노예화 되었다. 이러한 스콜라적 기독교는 고립된 엄격한 교리해석을 전제로 하여 누구나가 다 여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성례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면서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생활 전부인 것처럼 교인들을 우민화시키고 있었다.  즉 '사멸된 정통'의 종교만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종교적 정열과 내면적 생활을 중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는 운동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다.
이와같은 경건주의 운동의 태동은 복잡한 정치, 종교적 전쟁이 빚어낸 경제적 불황으로 인한 사회와 도덕의 타락, 그리고 정치권력과 타협함으로써 오게된 교회의 세속주의화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지 못했던 성직자들의 타락과 무의미한 신학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종교적 배경
정치 상황이 이처럼 무척 비참한 상태이지만 성직계급들도 완전히 타락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성직자들이 도처에서 추문에 연루되며, 또한 기독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이 많음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그들의 생활은 세속적인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육체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과 교만한 행동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의 으뜸가는 실천 원리,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승진,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의 영전을 얼마나 간절히 추구하며, 온갖 종류의 권모술수에 몰두해 있는지 살펴보라!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생활과 그들 속에 신앙의 열매들이 없는 것은 바로 그들의 신앙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목회자들이 이 정도니 그의 신도들이 무엇이 필요한 지를 어찌 인식할 수 있겠는가?
이 당시 17C의 상황은 종교개혁의 신학은 점차 지엽적인 신학 논쟁으로 경쇄되고 교회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신앙의 열정은 식어가고 있었다. 당시의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성경을 교리와 생활의 표준으로 삼기 보다는 신조와 독단적 교리에 집착한 나머지 영적인 감정과 고결한 실제 생활을 소홀히 하였다.
목회자들의 교육에 있어서는 상호고백적인 논증법이 주요 위치를 점유하였다.  대학의 신학 교육의 매체로는 여전히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논쟁에 근거하여 주석을 한 신학의 내용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교회의 교훈의 계통적 서술이나 공적인 논쟁에서 학생들이 자신이 가르침을 받은 신학을 옹호하도록 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는 윤리학의 논법은 궤변적이었다.  성경의 내용들이 신조안에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고 주장되던 시대에는 독자적인 성서 주석이 교육과정에 거의 포함되지 못했다.  과거, 심지어는 종교개혁 시대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신학적 진술들을 영원한 진리로 간주하고, 기독교 신앙과 지적 명제들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라틴어로 교육받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신학을 백성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옮기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설교 중에 외래어로 된 인용문을 삽입하는데 대한 당시의 불평들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전반적으로 논쟁과 논쟁법만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교구민들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에 직면하였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당대의 비평가들이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당시 뚜렷이 구분된 계급사회에서 목회자들은 많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군주나 귀족들 앞에서 너무나 비굴하게 아첨하였으며, 또한 평민들 위에 군림하였다는 당대의 불평들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당시 많은 목회자들이 마술을 믿고 있었고 폭음과 폭식 등 당시 백성들이 행했던 악덕에 굴복했음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주일 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도와 찬양 도중에 잡담을 하거나 걸어다니지 못하도록 금지한 규정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가 설교 도중에 잠을 자는 것은 청취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러한 일은 매우 빈번하였으므로 유명한 신학자 게르하르트(John Gerhard)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가 교회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점을 찬양하였다.
백성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법에 의해 요구되었다는 데에도 있으며, 또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동적인 효과를 지니는 행위라고 간주되어 많은 사람들은 1년, 또는 계절마다, 때로는 1달마다 정규적으로 성찬에 참여했다.  교회가 이처럼 외적으로는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진정한 기독교인의 생활의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17C 정통주의는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들의 성경에 대한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기초로 해서 이룩되었다.  이들은 성경 맹신자라는 비난을 면키 위해서 그 당시의 성례전 신학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받아들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구별을 성경에도 적용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성경에 대한 과도한 신비화를 막아준다고 확신했다.  이처럼 17C의 신학은 루터의 위대한 발견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최악의 요소를 또 다시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을 체계화하려는 이들의 태도는 루터 자신이 그렇게도 배격했던 율법주의에 또다시 접근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또 다시 이용하는 것도 - 그래서 '스콜라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이지만 - 루터가 아주 혐오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Martin Schmidt의 해석에 의하면 Pia Desideria에  대표적으로 나타난 스페너의 교회개혁을 위한 강령의 현저한 특징은 스콜라적 전통을 배격하고, 그 대신에 신비적인 영성훈련이라는 전통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으로서, 이 영성운동의 근원은 중세 말기의 아른트, 타울러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통의 특색은 칭의(법률적인 개념)대신에 중생(생물학적인 개념)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결국 경건주의는 17C 정통주의가 가져온 여러 병패들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Ⅲ.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형성
 
   A. 아른트(John Arndt)
독일 경건주의는 John Arndt에서 이미 발판을 굳쳐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Arndt는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는 루터가 이해한 말씀의 교리를 윤리적 교리로 변형시킴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경험을 성화의 경험으로 변화 시켰다고 Friedman은 지적한다.  또한 Koepp도 이것을 주장한다.  알런데 Arndt가 일반적으로 성화의 경험으로 변화시켰다고 간주되고 있지 않은 것은 Ritschl이 경건주의를 정의 할 때 "경건주의는 비밀 집회가 동반해야 한다"고 한 언급속에서 볼 수 있듯이 Arndt는 비밀 집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Stoeffler는 분석한다.  이렇게 볼 때 Arndt는 비밀집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경건주의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Ritschl의 정의는 천박했다.  더 중요한 것은 Arndt와 스페너의 경건이 현저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에 주의 했어야 했다.  Stoeffler에 의하면, 그들의 목표와 강조는 근본적으로 같았고 스페너가 영적 선조로 느꼈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왔다고 한다.
      1. Arndt의 생애
Arndt의 안할트(Anhalt)의 발렌슈타트(Ballenstadt) 근처에 있는 에데릿츠라는 시골에서 그곳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6년 그는 의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헬름슈타트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거기서 심한 병을 앓고 그는 의학에서 성경과 신학 연구에로 방향을 바꾸었다.   신의 연구에 보충을 하기 위해 그는 빗텐베르그(Wittenberg), 스트라스버그(Strassburg), 바젤(Basel)대학에서 청강하였다.  1583년에 그는 안할트(Anhalt)의 바데본(Badeborn)에서 목사가 되었다.  그해 그는 Anna Wagner와 결혼했는데 죽을때까지 38년 동안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Arndt는 그의 주요 목적이 머리를 채우는데 있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교화하고 확신케하는데 있었다.  설교자는 양떼를 먹이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개발하는데 부지런해야하고 매일 기도하면서 하는 성경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정서적이었다.  꾸밈이나 가담이 없었다.  그의 설교는 듣기만 하는 사람을 만들기 보다 오히려 말씀을 행하게 하는 열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Arndt는 한 사람의 진실되고 위대한 루터교회 목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증오하고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미지근한 사람들을 고무하고, 그들의 의심을 조심스럽게 일깨우고, 낙심한자들을 격려하고, 슬픈자들을 명랑하게 하고, 무식한자들을 교육하고, 사악한자들을 견책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1611년에 Celle시의 수석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621년 Arndt 자신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있었다.  그의 목사의 일은 논쟁으로 얼룩지었고 세례 전에 귀신 쫓는 의식을 버릴 것을 거부한 부분에 대한 칼빈주의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저술 활동은 그를 폭 넓은 태도를 가지게 했다.
그가 출판한 모든 것들은 영적과 실제 크리스챤 생활에 관계된 것이지만 신비적인 경향이 있다.  1597년 그는 루터가 출판했던 독일 신학의 신판을 편집하면서 긴 서론을 썼다.  그의 서론은 그 당시 많은 출판물의 논쟁이 되었던 것처럼 비판되었다.  독일 신학의 신판은 분명히 성공적이어서 1605, 1617, 1621년에 재 출판되었다.  이 일로 Arndt는 유명해지고 그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는 매우 선풍적이었다.  이것은 1605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607년 개정판이 나왔다.
Arndt는 추가로 그의 원래 원본에 세 권의 책들을 더하여 1610년 4권으로 된 [진정한 기독교]가 책으로 커다란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1621년 그가 죽기까지 약 20판이 재판되었고 18세기 말까지 125번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중세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신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루터처럼 그는 독일 도미니카 신비주의자인 요한 타울러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독일 신학의 작가와 같이 생각되었다.  Arndt는 [진정한 기독교]의 처음 세권의 책들에서는 타울러로부터 종종 인용하였다.  타울러의 영성은 실천적인 목사였고 이런 이유로 Arndt가 매우 밀접하게 따르게 되었다.  비록 Arndt가 신비적인 근거를 사용하였지만 그의 주제는 하나님의 신비적인 연합보다는 크리스챤의 새로운 생활이었다.
      2. Arndt의 경건
Arndt는 항상 그 자신을 순수한 루터교회 교훈을 가르치는 자로 생각했다.  이 사실은 그가 쓴 모든 책에 나와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Augusburg Cenfession"과 "Formula of Concord"를 지지하는 루터교인이 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가 그랬느냐는 보기에 따라 달려있으나 그의 강조는 역사적 루터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  Arndt의 경건은 세가지 주제 즉 영적 쇄신과 새로운 삶을 함양하기 위한 수단들로 토론될 수 있다.

        a. 영적 쇄신
Arndt는 인간의 영적 쇄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어떤 루터교도 못지않게 깊이 확신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한번에 모든 이를 위한다는데 강조점을 두는 대신에 그것은 기본적인 것이지만, 그는 개인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강조했다.  경험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구원 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영을 통하여 개인 안에 참된 신앙을 움직인다고 Arndt는 믿었고 거기서 새사람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이 새로워지는 과정을 비약하지 않는데 이 과정 속에 참된 회개가 있다고 한다.  이 회개에 대하여 그는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셨다.  참되고 바르고 진심으로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전향하도록 불렀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회개 없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도 영적 쇄신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요소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절대 신뢰하고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Stoeffler가 밝히는 대로, 최선의 신앙이 역사적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라는 그 당시인들과 많은 차이가 난다.  그의 신앙의 열정은 바로 이 실존적이고 주관적인데서 나오는 것이다.
Arndt는 새로운 삶에 대하여 그 일반과정이 거듭남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의하여 급격한 이동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b. 새로운 삶
Arndt는 세례적인 거듭남으로 완전하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일반적인 루터교회의 개념에 대하여 반대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됨과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데에 강조를 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  그런데 왜 거룩한 생활에 대해 염려하는가?"라고 어떤 유명한 설교자가 말하는데 대하여 Arndt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세례를 통해 완전하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데로 살아가자.
 Arndt에게 거듭남의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과의 일치였다.  여기서도 그 당시 루터교회 경건주의자들과 차이가 난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는데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인격적인 수준에서 연합된다고 주장하면서 때때로 신비주의의 경향을 나타낸다.   연합 속에 그리스도인이 이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인간성은 하나님의 조명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 하게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Arndt의 핵심 주제는 연합문제에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간구하옵나니 내가 새 삶을 위하여 세례를 받았음을 매일 기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c. 새 삶을 함양하기 위한 수단
Arndt는 그리스도인이 신앙과 덕있는 생활 속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형상에 이르도록 성장해 간다고 주장하는 한편 덕있는 생활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 죽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세상을 부인하기 보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Arndt는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이세상 일과 분리하고 그의 영적인 안락을 가지고 해야할 일들을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기도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연적인 삶이 정확하게 몸을 움직이듯이 그렇게 성령은 기도를 통해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는 믿는다.
Arndt의 저서들은 선풍적인 지지와 영향을 끼쳤으나 반면에 Lucas Osiander같은 사람들에 의해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Arndt가 이런 신학 논쟁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꿋꿋이 걸어 온 것은 그의 고난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모든 증거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증거들은 진리를 위해 고난 당하게 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었다.
   B. 스페너(P.J. Spener)
      1. 스페너의 생애
스페너는 1635년 1월 13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라폴트스타인의 알사티안(Alsatian)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라폴라스타인 공작의 청지기였으며, 후에는 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스페너는 일찌기 그의 어머니로부터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대모가 되었던 라폴트스타인가의 여인도 또한 그의 소년 시절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은 그가 전도사, 설교자, 그리고 상담역으로 활동하던 청년 시절에 그의 목사였던 요아힘 스톨(Joachim Stoll)이었다.
스페너는 청년 시절 어느 책이든지 닥치는대로 읽곤 하였으며, 그의 초기의 생애는 부친의 서재에서 읽은 책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성경 다음으로 아끼는 책은 요한 Arndt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ty)라는 경건 서적이었다.  Arndt는 기독교인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정통 교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중세 후반에 있었던 신비주의를 모방하고 그것을 옹호하였다.  Arndt는 독단적인 주지주의에 대항하여 엄격한 종교적,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였다.
Spener는 무도회 등 다른 학생들이 즐겨하는 것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여성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를 꺼렸으며 친구들도 많지 않았다.  후일 그의 매부가 된 스톨의 충고에 따라 주일에는 세속적인 오락은 물론 신학 연구도 삼갔다.
1659년 여름 신학 연구 과정을 마친 후 그는 스위스의 바젤, 베른, 로잔, 제네바, 그리고 프랑스의 리용, 몽베리알, 독일의 튀빙겐과 프라이 부르그 등을 여행하였다.  그는 제네바에서 프랑스 개혁파의 교회생활과 그 조직에 대하여 잘 관찰하였다.
여행 후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20세의 여인과 결혼했으며, 프랑크푸르트의 암 마인 교회의 수석 성직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으로서는 놀라운 정열로 일에 임했다.  그는 주일 오후에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여기서 그의 활동 중 보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장려한 것이다.  그는 교구민들의 요청으로 최초의 영성 개발을 위한 사적인 모임인 "경건회"(Collegia Pietatis)를 성립하였다.  그 모임은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에 스페너의 집에서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참석하였으며 각기 구별하여 앉았으며 발언권은 오직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모임은 기도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 주일의 설교에 대하여 토의하거나, 혹은 경건 서적을 읽었다.  후에는 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어 그는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를 지어 대답하고 완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는 하나의 강령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즉 신학 교육의 개혁, 스콜라 철학과 신학적 논증법에 대한 비평, 상호 신앙 고백적인 신앙의 자유에 대한 변호, 지성의 종교는 물론 심령의 종교에 대한 강조, 생활과 행위로 표현되는 신앙을 요구함, 완전론적인 경향을 지닌 것으로서 개인의 영성 배양, 평신도의 지위 향상, 경건 생활 함양을 위한 사적인 모임의 권장, 신자들의 영적 제사장직의 개발, 신비주의를 인정하는 것 등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20년간 사역을 한 후, 스페너는 삭소니에 있는 드레스 덴(Dresden)으로 임명되어갔다.  이는 여기서 A.H. Franke를 만났다.  이들 공동의 노력으로 모임은 점차 학구적인 연구에서 부터 내적 경건 생활의 배양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심한 반대자에 부딪혀 제대로 꿈을 달성하지 못하고, 1691년 베를린으로 가서 사망할 때 까지 14년 동안 지냈다.
그는 다정다감하고 민감하며 낙관적이었다.  그는 기독교 사상의 개혁가라기 보다는 기독교 생활의 개혁가였으며, 또한 기독교 교리사에서보다는 기독교 경건사에 합당한 인물로 평가되어진다.  그러나 비록 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실질적이었다고 해도 그가 신학적으로 무능하거나 발언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러한 면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며, 알지도 못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2. Spener의 경건
        a. 성경
스페너에 있어서 갱신 사상은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의 그릇된 성서 이해를 지적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기꺼이
    이해한다.  그것은 믿는 모든 이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듣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고 말씀이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손이기 때문
    에도 아니고 말씀 스스로 성령을 통해 그들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성서 자체를 성령의 내주 속에서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는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에게 알림으로써 Spener는 성서 자체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Spener는 모든 성도 스스로가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가 성경을 늘 읽어야 할 것이다.  특히 신약
   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가정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신의 성경을 또는
   최소한 신약을 손에 들고서  매일  약간씩 읽는다거나
   또는 그가 글을 보지 못할 경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낭독하게 하면 될 것이다.
고 하면서 늘 성경과 같이 하고 성경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매일의 삶 속에서 나에게 새롭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공부를 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한 바람직한 일은, 모든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성
   경을 읽는 시간을  갖는 그것이다.  가능할 수만 있다
   면, 모든 성도가 정한 시간에 공식적으로 교회에 모여
   서, 설명없이 순서에 따라 성경을 소리를 높여 한 사람
   씩 앞에 나와서 낭독하는 일이다.  물론, 이때에 중간
   중간 짤막한 요지를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성경을 잘 보지 못한다거나, 전혀 읽을 수 없다
   거나  또는 아직 성경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지
   못한 성도들의 경건을 위해서 매우 유익할 것이다.
고 보면서 Spener는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나 대화 가운데서 서로 연구하는 그것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
   구하는 것이 무언가를 개혁해 보려고 할 때, 가장 최선
   의 방책이라는 사실이다(설교를 청종하는 것 뿐만 아니
   라, 읽고, 연구하고, 그에  대해서 대화하는 그러한 태
   도를 여기에서 의미한다. - 시 1:2).  이러한 열심있는
   성경연구는 앞서 말씀 드린 이런저런 성도의 모임을 통
   해서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한  성도의 모임은, 그 모
   임을 통하여 모든 선한 것들이 우리 가운데서 성장해야
   만  좋은 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성도
   들이 열심을 내어 그러한 성경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생명의 책에서 그들이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협조
   하며, 영적인 삶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충만해져
   서, 그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공부 그룹을 통해서 Spener는 자기만의 독특한 생각을 여러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원하고 성경을 잘못 이해한 면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삼는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읽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성경은 특정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대상으로
   하며, 특정의  개인이 아니라 만민을 대상으로 하는 책
   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가능한한 그 말씀을
   독자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며, 또한 하나님께
   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시거나,  또는 말씀을 직접 받
   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야 한다.
고 하면서 Spener는 성경에 대한 관심과 성경의 중요성을 알림으로 갱신의 시발점을 삼았다.
        2) 신생
신생(Wiedergeburt)의 주제는 스페너 교회학의 기초열쇠가 된다.  그의 교회학은 최근 몇년동안 점차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스페너가 분명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정통 교리를 고수하는 반면 신생에 대한 어원적인 개념은 기독교 경험에 대한 그의 이해에 역동적인 요소였다.
스페너는 종종 신생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그의 저작으로서 특별히 1696년 발간된 "신생에 대한 중대한 소고"(Hockwichtige Articul von der Wiedergeburt)는 신생이 스페너에게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Martin Schmidt에 따르면 Wiedergeburt가 스페너의 사상의 내면의 의미이고 경건주의 신학의 근원적인 주제이다.
스페너의 신생의 개념은 단순하게 그의 신학에 있어 한 기초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영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 과정을 보게되는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우선적으로 법적 용어나 은유보다는 유기적인 사용이 루터와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Thomas Kuhn의 의식 가운데서 전형적 변천(Paradigm Shift)인  이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이다.
스페너에 따르면 신생은 세개의 단계를 수반한다.  즉, 믿음의 시작, 칭의와 양자,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온전해짐 등이다.  혁신의 개념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즉 순간적이거나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단계와  분기점에 의해 표시되는 효과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다.  스페너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그리고 갱신된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함에 근거한 교회를 위한 더 좋은 때(besserer Zeiten)를 위한 희망을 끝까지 붙잡았다.  그는 교회 스스로 다시 태어나고 갱신되는 것을 보기를 고대했다.  그의 완전에 대한 강조는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관계적 완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영적 제사장직(The Spiritual Priesthood)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스페너는 또다른 제안을 하는데 "영적 제사장직의 확립과 부지런한 실행"이다.   모든 영적인 기능들은 예외 없이 모두 공개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들의 규칙적이며 공적인 실행이 이런 목적을 위해 임명된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할지라도, 그 기능은 비상시인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행되어야 한다.  특히 공적인 행위와 관계없는 일들은 집에서나 매일의 삶 속에서 모든 이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행해져야만 된다.  스페너는 다음과 같이 영적인 제사장직을 정의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그가 성령으로
   모든 믿는자에게 기름붙기 위해 값을 지불하고 사신 권
   리이며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제물을 가져오고
   가져와야 되는 것으로 인해서 그들 자신들과 다른 사람
   들을 위해 기도하는  권리이며 각자가 자신들과 그들의
   이웃을 교화하는 권리이다.
스페너는 영적 제사장직은 세례에 있어 신생과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그 개념은 고차원의 기독론이다.  즉, 만인 제사장설을 예수의 대제사장직으로 부터 연유된다.  스페너는 베드로전서 2:9에서 구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갈라디아서 3:28에서 늙으나 젊으나, 남자나 여자나, 구속자나 자유자나 영적인 제사장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제사장의 이름은 모든 크리스챤들을 위한 보편적인 이름이다.  즉, 그들의 직무에 따른 적절하지 않은 제사장들인 목사들을 위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스페너는 영적 제사장들의 직무를 1)제사  2)기도 및 축도 3) 말씀 선포 등으로 세분하였다.  공적인 사역이 사역의 직무로 지정되어 있고 특별한 소명을 요구하는 반면, 모든 신자들은 이런 제사장적인 기능을 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들 사이에서 행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신자들은 자신들에게서나 그들 사이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된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설교자들의 가르침을 시험하게 될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야만 한다.
영적 경건주의에 대한 스페너의 강조에 있어 하나의 흥미있고 교회학적으로 많은 면들이 그가 성찬식에 대해 만든 연결장치이다.  세례는 영적 경건주의에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리고 영성체, 그것은 사람의 축제이며 우리 모두 하나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우리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는데 참여한다.  제물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에 근거한, 영적 제사장은 성만찬적 친교이다.
영적 경건에 대한 이러한 강조에 있어 스페너는 개신교 교리에서 새로운 강조점을 둘 뿐만 아니라 사실상 제도적인 언어가 훨씬 덜하게 하여 더욱 생명력 있게 교회학을 개선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와 그의 신생에 대한 강조로 계속 주장되었다.  하나의 특유한 교회학이 스페너에게 교회의 갱신된 삶(실질적인 목회개선)을 위한 관심으로 출현한다.  신자들의 제사장적 교회는 그리고 그것이 성례전과 함께한 것으로 스페너의 교회학적인 사고 가운데 이 전형적 변형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개척되고 주어졌다.
        4) 경건회(Collegia Pietatis)
스페너는 경건회를 교회구조에 대한 뚜렷한 강조점의 맥락 가운데에 두었다.  스페너에게 그런 경건회는 단순히 목회전략(비록 명백히 그것이 있었다 해도)만은 아니었다.  즉 그는 확고하게 그 개혁자들의 근본적인 교회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너의 경건단체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의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결국 소그룹으로 활성화 되었다.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스페너는 교회에 대한 호감을 두고 그처럼 가정에 모이는 것에 대한 그의 제안을 소개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사도적인 일종의 가정회합을 다시 소개하기 위한 제안이다.  고린도전서 14:16 - 20은 모델로서 보여주고 있다.  스페너의 견해에 있어 교회갱신의 가장 훌륭한 소망은 영적 제사장직에 대해 모아진 표현들의 맥락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선포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토의하는 일(시편 1:2)은 어떤 일을 개혁하기 위해 중요한 방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안에 좋은 모든 것으로 부터 씨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야만 한다.  비록 열심히 성실하게 함께 성서를 연구한다해도 신자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Stoeffler는 세포그룹을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경건회는 교회를 통해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
   교회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기 위하여
   다시 가져와야만 되는 것이다.... (그들은)다른 이들로
   부터  진실한  크리스챤들을 분리 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새로
   운 개혁의 중요한 면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
   다.  그들을 통하여 목사와 헌신된 집사들은 삶의 개혁
   에 대한 교리의 개혁에  부언하기 위한 협의에 있어 작
   업을 하기 위해 시도되어졌다.... 그 제도는 너무도 혹
   독하게 스페너의 적들에 의해 이 개혁안의 함축성 때문
   에 거부 되어졌다.
이상이 언급되었을 때 스페너는 그들의 훈련 사역에 있어 목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그리고 신자들의 제사직을 기능적인 실제로 돌리기 위한 교회 안에서의 지방 장로회의 형성을 옹호하였다.  스페너의 견해에 있어서 경건회는 그와같은 장로 의회의 직접적인 하나의 진전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내적인 회중 교회조직이다.  본질에 있어 경건회 조직이 장로들의 의회에 의해 길러지고 통합되어졌다.  그런데 그 구조는 많은 새로운 기독교교회를 성장시키었고 과거 15년에 20년까지 북미에서 기획된 공동체를 성장시켰다.
결론적으로 스페너의 저작은 그가 신자들의 내면적인 영적 경험뿐 아니라 전체 교회의 갱신을 가지고 관심을 쏟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는 그와같은 일반적인 갱신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학과 초보적인 전략을 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적인 영적경험을 스페너의 제 1 차적인 관심의 촛점이었다.
   C. 프랑케 (A.H. Franke)
프랑케는 스페너와 마찬가지로 요한 Arndt의 경건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개신교회 내에서 경건주의의 결정적 관철을 이룬 사람이었다.  여기 이 경건주의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케의 생애와 할레 대학과 그의 경건 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프랑케(Franke)의 생애
프랑케는(1663 - 1727)는 스페너보다 연하였다.  그는 스페너의 제자로서 1690년 이후에 경건주의의 유력한 인물 즉 그의 후계자로 간주 되었다.  그는 1663년 3월 22일 Hamburg에서 북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인구 35,000명의 매우 전통적인 자유주의 도시인 Lubeck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다소 안정된 생활을 하는 법률가였다.  그의 가정은 진보적인 정통 루터파의 하나였다.
그는 16살때 근처의 Erfurt대학에 진학하여 논리학과 순수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학기 후 그의 숙부가 그를 위해 장학금을 마련하였을 때에 그는 Kiel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영향력 있는 역사 신학자이며 스페너의 친구이고 교회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신앙심이 깊은 K. Korthold의 집에 머물렀다.
프랑케는 Kiel에서 신학, 역사학, 철학, 물리학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3년동안 공부하였다.  그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를 공부하면서 몇달을 보냈다.  그는 총명한 학생이었으며 특히 언어학에 뛰어났다.  1684년 봄에 그는 정통 루터교의 중심부로 인정되던 이름난 대학인 Leipzig에 가서 J.B. Carpzov, J. Dornfeld,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밑에서 1687년까지 공부하였다.  그는 1658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무급강사 - 공식적으로 대학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학생수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강사 - 로서 Leipzig에서 강의했다.  1691년 스페너의 소개로 새로이 설립된 Halle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동양어 교수로 임명되어 36년 후 그가 죽기까지 그곳에서 있었다.
Kiel과 Leipzig대학에 있는 동안 프랑케는 공부에 전념했으나 그의 신학적 흥미는 영적이기 보다는 학구적이었다.  나의 신학은 나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라기 보다는 죽은 과학이었다."  Leipzig에서 강의하는 동안 1686년 7월 18일 Otto Mencken교수 집에서 처음으로 접한  "성경 연구 그룹"(a collegium philobiblicum)이라는 성경공부를 위한 소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8명의 젊은 학자들의 모임은 Carpzov교수의 시사아래 얼마간 모임을 시작하였으며 프랑케는 일찍 리더가 되었다.  학생들은 원어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프랑케가 그의 공부에 있어서 체계적인 신학보다는 오히려 주석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후 "성경연구그룹"(Collegium Philobiblicum)은 인기있게 되었다.  1687년 10월 프랑케는 Luneberg에 돌아가기 전 Hamburg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스페너의 경건주의 [Speneriun Pietism]에 점점 감화되었다.
프랑케는 1689년 2월 Leipzig에 돌아와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그의 강의는 매우 인기있게 되었고 몇개의 "성경 연구 그룹" (Colleregium Philobiblicum)이 조직되었다.  곧 영적 자각이 학생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좋은 반응도 많았지만 배타성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와 대학 동료인 Loscher교수는 "학생 모임이 교회의 예배 의식을 모독하였고 영적 자부심과 배타성을 조장하였고, 신학적 과학을 낮추었으며 주관적인 접근을 통해 영존을 낙담시켰다"고 호소하기 까지 하였다.   경건주의자 [anti-pietist]의 반대로 인해 1년 후 그의 교수직을 잃었다.  그는 그후 1692년 1월 Halle에서 교수와 목사로서 그의 착무를 시작하기 전에 Spener와 여러날을 보냈다.
Halle에서 프랑케는 저급한 대학에서 처음으로 보수 없이 강의하면서 Halle의 작은 교회인 Clalucha에서의 목사직을 통해 생활하였다.  그는 그의 목사 생활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그의 영향력 아래서 다소 세속적인 Glancha의 마을 - "Halle의 저급한 나이트 클럽" - 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라우하에서 그는 청소년들의 바른 지도를 위해, 부족한 자본에도 불구하고, 1695년 빈민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다.  할레의 그 고아원은 매우 보잘것 없는 시작이었지만, 몇년이 지나자 교육 기관, 경영 기관 그리고 기업체로 번성하게 되었다.  독일 땅에서 개신교의 거대한, 유일무이한 기관의 총체로서 성장하였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란케가 이 할레의 교육 도시에서 추구하였던 목적은 가장 먼저 '대학 강연'(Seminarium Universale)의 계획과 더불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세미나로부터 매년 수백명이 경건주의적으로 교육을 받는 능력있는 사람들로서, 독일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신분의 사람들, 물론 유럽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실질적 개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 할레(Halle) 대학
할레 대학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경건주의 운동의 본산이었다.  할레 대학의 정책이 주로 스페너의 주장과 교육방침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었지만 실지로 행정적인 면에서 이를 실천한 사람은 프랑케였다.  그는 이 학교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에게 목사가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을 시키는 데 전념했다.  할레에서 그는, 새로운 교육 제도로 인해 유명해진 학교들을 세웠는데, 이 제도들은 경건주의에 젖은 분위기에서 실천됐다.
할레 대학에서 그의 업적은 선교 기관을 통한 가난과 부도덕의 생활에 빠져 있던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뻗친 것이었다.  고아원, 학교, 과부의 집, 여자방, 교사 양성학원, 화학 실험실, 약국, 책방, 인쇄소, 무료 숙박소, 빈민 수용소 등등의 기관들을 세워 내지 선교에 힘썼다.  이러한 기관들은 경건주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내지 선교 사업의 계획은 독일 교회에 새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생명이 없는 하나의 전통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실제의 종교가 되게 하였다.
한편 내지 선교 뿐 아니라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외지 선교에도 힘써서  개신교 선교가 첫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같은 할레 대학의 교수들의 비난 속에서도 프랑케를 중심한 경건주의는 18C의 선교사업의 산실의 역할을 했다.  모이어(Moyer)는 '할레의 경건주의자들이 성공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교도인 백성들을 위한 선교 사업을 시작한 일이다'고 말한다.  할레 대학은 18C 동안에 60명 이상의 선교사를 배출하였으며, 창설된 지 3,40년 만에 약 6,000명 이상의 경건주의 목사를 배출하여 독일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일꾼을 보냈다.  특히 모라미안 선교의 중심 인물인 진젠도르프도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례를 받을 때, 스페너가 그의 대부가 되었으며 프랑케에 큰 영향을 받았다.
   3. 프랑케(Franke)의 경건
독일 경건주의의 지도적 인물로서 스페너의 영적 아들이며 궁극적으로 그의 상속자인 프랑케는 본질에 있어 그의 지도자의 신학을 신봉하였다.  스페너처럼 루터-Arndt의 전통에서 자란 프랑케는 스페너적인 기질이 있는 경건주의 자였다.
프랑케의 경건주의는 세가지 강조점에 의해서 특별히 나타난다.  1) 회심의 경험에 특별히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경험에 있어 심리학이라 불리는 것에 더욱 일반적인 강조점을 두었다.  2) 기독교 양육, 특히 제자라는 말에 있어서, 훈련과 생활을 위한 규칙을 강조하였다.  3)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선을 행하기 위한 의무 등이다.  이러한 강조점들은 일반적으로 경건주의에서 마땅히 발견되어져야 한다.
프랑케 신학의 중심 주제는 회심과 빈번하게 그것에 수반하는 특히 참회의 투쟁이었다고 종종 말해왔다.  이점에 있어 프랑케와 스페너 사이의 비교는 스페너의 Pia Desideria와 널리 유포되었던 Nicodemus(1701)로 비교될 수 있다.  Pia Desideria처럼 Nncidenus는 종교적인 사역을 위해 의도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을 사용한다.  하지만 개혁을 제안하기 보다는 프랑케는 교회의 커다란 문제로서 인간의 두려움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두려움은 참기독교 신앙의 반대를 만들게 되었다고 Sdchmidt는 지적한다.  그리고 분열된 마음의 치료가 하나님의 깊은 경험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 문제에대한 이 심리학적 공식화는 사상의 전체 방향을 결정한다.
Manfred Kohl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스페너의 신생(Wiedergeburt)이 더욱 수동적인 의미의 말인 반면에 프랑케의 개념  현인 회심(Bekehrung)은 능동적인 언어이다. 계 해서 프랑케는 "참회"(Busskampf)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것은 영혼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구습의 사람과 싸우는 것이다.  즉, 그는 오직 아주 강한 출생의 고통만이 다시 말하면 Busskampf와 Rene(참회의 형태)가 새로운 사람을 그 낙원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몇몇의 작가들은 프랑케의 심리학적인 경향에 대해 주의력을 끌어 내렸다.  즉 그의 회심에 따르고 수반되는 과정과 내적 경험에 대한 촛점등에 대해서이다.
프랑케는 기독교에 있어 신생의 교리보다 더 중요한 교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란 진실로 새롭게 되어진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개인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의 진실된 갱신, 비록 그 갱신에 대한 관심이 한번도 그의 전 삶에 나타나지 않았다 해도 그러한 단계에 있어서 사람들은 서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회심에 부여하는 뛰어나고 영적이며 심리학적인 해석에 있어 아마도 그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프랑케는 다소 스페너와 다르다.  Brown이 언급하기를 프랑케의 극적인 회심의 경험과 그의 죄책, 불안, 근심, 그리고 기쁨에 대한 내면적인 분석은 스페너의 신학에서 보다는 그의 경험신학의 더욱 커다란 감정주의와 주관주의에 기인 되었다.  교회론적으로 이것은 스페너에게 있어 친교와 협력과 제자화에 강조를 두는 것과 동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보다 더 주관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프랑케는 특별히 제자훈련, 교육, 그리고 생활을 위한 규칙등을 강조점을 둔다.  경건주의가 기반을 잡았을 때 Halle는 점차로 경건주의자의 요새가 되었고 프랑케는 교회를 개혁하고 세우는 자라기보다는 조직운동과 교육 개혁자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프랑케의 신학과 사역사이의 내적 일관성을 주목한다.  이는 프랑케가 모든 일들을 교육과 제자화(물론 신생에 의해 가능한)로 전환 시켰고, 프랑케의 개혁의 노력은 일차적으로 훈련과 교육에 관계된 것이었다.  Kohl은 언급하기를 젊은이에 대한 잘못된 양육, 그것은 그가 모든 타락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으로 단순히 고아들의 궁핍만이 아닌 그의 유명한 고아원의 설립의 이유였다.  프랑케는 적어도 경건주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젊은 세대가 일어나도록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가 신학, 교육이론, 실질적인 모델 제도, 그리고 매우 실질적으로 효과적인 선전 조직망(멀리 떨어진 할레그룹의 동기들에게 제시간에)을 개발한 이유이다.  Kohl은 언급하기를 프랑케는 깊은 기독교적인 영향가운데 연장된 성직서임을 통하여 더 훌륭한 시대가 닥쳐올 것을 희망 하였다.  프랑케와 그의 동료들은 이와 같은 목표를 향해서 일을 하였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엄격한 훈련을 요구 하면서 말이다.
프랑케는 교회에서 학교로, 즉 교회학에서 교육학으로의 `변환을 주목한다.  우리는 또한 프랑케가 오랜 세월동안(비록 목사이지만) 교육자였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교회에 대하여 그의 초기적으로 형성된 경험이 교구화에 있어서 경건주의적인 신학교이기 보다는 성경 연구적인 종합 신학교의 형태였다.  일반적으로 프랑케가 갱신을 교육개혁을 통해서 오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에 스페너는 교회개혁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들 두가지 접근 방식이 사실상 서로 보완적으로 있어 오는 동안에 그들은 또한 심각하게 차이가 나는 교회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선을 행하기 위한 의무수행을 강조하였다.
프랑케는 무한한 정력가요 조직에 천재였다.  그의 글라우카 교회는 목회 충성의 표본이었다.  그의 강의는 해석과 실험으로 교실 - 교회의 연결은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었다.  1965년 '누더기 학교'란 빈민 아동학원을 세운 것이 굉장히 인기여서 그의 유명한 "정규학교"(Paedagogium)로 발전되었다.  상급의 라틴 학교도 세우고 고아원도 세웠는데 모두 다 경건주의적으로 운영했고, 그가 죽었을 때 학생 수가 2,200명, 고아원 재적이 134명이었다.  후년 진료소와 인쇄소를 부설했다.  이상 모든 기관은 자금 없이 시작해 믿음으로 운영했는데, 귀족, 평민이 다 같이 사방에서 도왔다.  또 한 가지 그의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친구 칸슈타인 백작(Karl Hildebrand)이 1710년에 세운 성서 협회(Bible Institute)로 성서의 대량 인쇄, 염가 배부를 목적으로 했는데 오늘까지 고귀한 봉사를 한다.
Ⅳ. 경건주의의 갱신
 
   A. 교회와 갱신
      1. 교회 갱신의 개념
갱신이란 말의 어원은 '일신', '부활', '재생'의 뜻이었으며 일반적으로는 '다시 새로와진다'는 변화가 그 의미이다.  이 말과 유사한 언어로는 개혁이란 용어가 있는데, '다시 모양을 갖춘다', '다시 새롭게 뜯어 고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갱신이란 말이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구조와 제도를 그리고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리는 혁명과 혼돈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해 둘 것은 교회 갱신은 이 모든 체제를 뒤집어 엎는 혁명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새롭게 하여 본래적인 교회, 성서에서 보여주고  제시하는 교회다운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인 것이다.  갱신이란 말은 개인적으로는 중생을 생각하게 되고, 중생을 기초로 하는 영적인 힘의 회복을 상기시킨다.  즉, 한 개인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 가므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가르킨다.  한편으로 교회적 시각으로 보면 갱신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따라서 갱신된 사람에서 부터 교회 갱신은 시작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사람을 갱신시킬 수 있는 체제와 구조를 도모하는 것이 갱신 운동의 구체화라고 볼 수 있겠다.  교회 갱신이 개인적 회심에만 집중이 되면 갱신 운동이 지속될 수가 없다.  반면에 갱신을 위한 구조적 개혁 체제의 변화에만 주목할 경우에는 소리만 크지 실제적으로는 갱신과는 거리가 먼 과격한 구호로만 끝날 공산이 크다.  이런 점에서 갱신은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하며 성서 속에서 그 모델을 발견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신약성서가 보여 준 교회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공동체에 속하고 계속적으로 확산되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 본질에 기초한 갱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교회 본질에 기초한 갱신
교회 갱신의 기본 형태는 성서의 원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 신앙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화되지 않는 것이 라면 무엇이든지 교회로부터 물리치고 없애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교회 갱신 운동은 먼저 자기 시대의 교회가 성서에서 이탈되어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갱신의 욕구가 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교회의 상황을 성서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갱신되어야 할 당위성을 밝혀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새 이스라엘이다.  옛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  옛 이스라엘은 계약 백성으로서 계약에 충실치 못하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였는데 반해 새 이스라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였다.  새로운 이스라엘에 참예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계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한다.
명목상의 신자가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더 이상 구속의 희열이 두드러지게 체험되지 않는 상태라면 교회의 갱신은 필연적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면, 본질적으로 교회는 갱신되야 한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 각기 성령을 통하여 받은 은사를 다양성 있게 발휘하며 한편, 전체의 교회의 몸과 일체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교회가 극히 소수의 교역자나 몇몇 신자들만이 자기의 역할을 할 뿐, 대다수의 평신도가 교회의 객체가 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생명력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 모두는 머리 되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있다.  이 소명을 위해 성령은 각자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어 몸의 지체로 기능을 다하게 하시지만 평신도들 대부분이 교회 조직상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통상적인 봉사 활동을 하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는 그들 혼자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원하다.  교회 갱신은 바로 이들을 깨워 그리스도의 참 지체로서 활동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그 안에 성령이 임재해 계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기서 성전의 개념은 건물이나 장소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로서 성전인 것이다.  이런 교회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현재의 교회는 날로 건물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모임과 건물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건물 자체에 거룩성을 부여할 수 없다.  건물 중심의 교회는 활동성이 없고 융통성이 없이 경직되어 있으며, 친교가 부족하고 또한 자만심과 계급의식에 가득차 있는 것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굳이 거룩성을 건물에 부여하려 하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이해함을 통해 생동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건물이란 수단이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지, 맹목적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건물 우상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보라, 얼마나 많은 교회가 건물에 치중함으로 교회가 해야할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 ?  이제 교회 건물도 교회의 사명을 저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건축되어야 할 것이며, 그 건물 구조도 기능적으로 설계를 함으로 교회의 본질을 세우며, 그 사명을 지지해 주는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본질은 교제 공동체이다.  이 교제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로 하늘나라에서 맛볼 교제의 모형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이 친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단지 비인격적인 기구처럼 보일 뿐이다.  일주일에 몇번씩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리지만, 교제를 나누고 사랑의 입맞춤을 할 수 없는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앞을 향해 도열된 의자에 앉아 예배 참석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 뿐이다.  17C, 18C 경건주의자들이 가졌던 뜨거운 교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사랑'이란 개념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  '사랑'에 대해 아무리 주장하고 외쳐도, 그것을 듣는 성도가 어쩔 수 없는 비인격적인 구조에 얽매여 있는 한, 대 그룹 모임 속에서 방관자가 되어 있는 한, "코이노니아"(        )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갱신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목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될 대, 교회의 갱신은 온전한 갱신이 될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이란 기능이 뿌려지고 녹아지는 것처럼 교회는 모였으면 반드시 흩어져 증인이 되야 하는 것이다.  뭉쳐진 소금, 녹기를 거부하는 소금, 맛을 내지 않는 소금기둥은 아무 쓸모없어 밟힌다.  오늘날 신자들은 혹 뿌려지기를 두려워 하거나 몇 푼의 선교금을 집어주는 정도에서 뿌려졌다고 자부하고 있진 않는가 ? 이름은 여전도회, 남전도회인데, 그들의 모임이 전도와 전혀 상관 없는 사업만을 계획한다든지, 탁상공론만 하고 있진 않는가?  그래서 다시 사명감 없이 세속의 일원으로 돌아가 전도는 고사하고, 세속의 물결에 빠져 세상에 파송되어진 교회로서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면 교회는 증거 공동체로서의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 갱신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3. 갱신의 모델
이러한 교회 본질에 비추어서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의 갱신 모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경건주의자들의 갱신은 첫째 복음을 재 발견한다.  먼저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그들이 느끼는 것으로 기독교 믿음 안에서 새로운 활력이 되는 것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발견한다.  이 경험은 믿음의 특질 혹은 믿음의 본질적인 핵심에 관한 그들의 사상을 바꾼다.  따라서 복음은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이끌어 낸다.  갱신의 시작은 체험을 얻고 믿음의 확신을 얻은 사람들로 단순하게 구성된다.
둘째 갱신운동은 "교회중심주의"(ecclesiola)로서 존재한다.  즉 이것은 교회 안에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 좀 더 작고 좀 더 친밀한 표현이다.  이것은 배타적인 의미에서의 진실한 교회로서가 아니라 좀더 큰 전체의 생활 속에 있는 교회의 형태를 나타낸다.
세째 갱신운동은 작은 집단 구조의 몇몇 형태를 이용한다.  이것은 단지 막연한 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ecclesiola"가 아니라 지방집회에서의 특별한 소집단 형태를 담당한다.  이것은 전체로서 그리스도교 교회에서의 집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방 집회에서의 특정한 소규모 공동체에서 그것 자체를 나타내 주는 좀 더 제한된 소그룹 운동이다.  이 소집단의 크기와 구조가 다양할지라도,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규적으로  만나는 열 명 내외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네째 갱신 구조는 선교 지향적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갱신으로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증거로서 특별한 목적과 선교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을 결합하는 그리고 매일의 생활에서 믿음과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실제적인 윤리를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서 연구된 운동에서 선교의 의미와 정의는 다소 다양하다.  그러나 세 그룹 모두는 선교의 의미와 정의는 다소 다양하다.  그러나 세 그룹 모두는 선교에 관해서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운동들은 선교를 복음전도, 교회연합, 혹은 사회개혁으로 이해하는 반면에 어떤 갱신운동은 그들의 설교를 갱신 자체의 장려 혹은 연장으로 단순하게 본다.  아마 이러한 갱신운동은 선교를 영적 갱신의 단순한 확장보다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한 대부분 사회적 변환이다.  그러나 만약 갱신의 중심 활동력이 타협되거나 통찰력을 잃어버린다면, 사회적 변화의 역할을 뒷받침하는 바로 그 힘은 반드시 잃게 될 것이다.
다섯째 갱신운동은 특별히 독특하고 계약에 기초한 공동체이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교회의 불완전한 일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가시적 형태로서 이해해야 한다.  계약에 기초한 공동체는 교회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 자발적으로 맡겨진 사람의 제한된 공동체이다.  잘 이해된 계약에 기초함으로써 이것은 제자훈련, 심지어는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서 배제될 수 있는 위험도 내포된다.  공동체로서의 갱신은 일대일의 관계, 성숙, 그리고 상호 의존을 존중한다.  이것은 단체내에서의 koinonia, 상호 격려, 그리고 훈계를 말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특별히 강조하고 자신은 교회에서의 이러한 특징을 경험하기 위한 중요한 구조로서 이해한다.
여섯째 갱신운동은 목회와 지도의 새로운 형태에 있어서의 부흥, 훈련, 그리고 연단을 위한 내용을 제공한다.  공동체의 경험으로부터 성령의 선물과 성도들의 성직에 관한 실제적인 강조가 나타난다.  이런 의식은 운동 내에서의 지도를 위한 자연적 필요와 증거의 외부적인 추진을 결합하고 목회의 새로운 형태를 위한 기회와 가능한 한 내용을 제공한다.  같은 모양으로, 이것은 더 많이 제한되고 설립된 교회론적 통로(전형적으로 남자들에게 대해 제한된 교육, 안수)를 통제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과 그룹을 공유한 삶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지도자를 만들어 낸다.
갱신그룹은 지도를 위한 기회와 봉사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훈련하기 위한 자연적, 실제적 환경을 제공한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만약 기존의 교회에서부터 끊어지지 않는다면 어울리지 않는 많은 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종종 갱신운동의 일원으로써 나타난다(사람들은 종교적인 지위에서 나타난 갱신지도자들을 여기에서 생각한다).
일곱째 갱신운동의 구성원은 매일 밀접하게 사회와 접촉하고 특별히 가난한 자와 접촉한다.  교회갱신운동은 경건주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점에서 사실 매우 주목할 만하다.  어떤 갱신 운동은 명백하게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직접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4. 경건주의의 갱신점
제Ⅲ장에서 경건주의자들의 경건 활동과 사상을 살펴 보았지만 본장에서는 그들의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각 개인의 독특한 사상보다는 독일 경건주의의 인물이라 볼 수 있는 세 사람의 사상을 바탕으로 그들의 무엇을 중심으로하여 갱신을 일으켰는가를 살펴보겠다.
갱신주의의 갱신운동은 무엇보다도 그 성경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가 저술한 Pia Desideria에서 그가 참 종교의 회복을 위하여 제시한 여섯 가지 제안들 중에서 세가지가 성경에 관한 것들이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스페너의 첫째 제안은 교역자의 설교 가운데서 성경의 내용이 더 많이 그리고 풍부하게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제안은 성경공부를 위한 여러 모임들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셋째는 말씀의 강도로서의 설교는 이론적이거나 웅병을 과시하기 보다는 일상 생활과 관련되어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가들이 성경을 교리적인 관점에서 읽고 그것에 신앙고백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과는 반대로 경건주의는 성경을 경건하게 읽고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기대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으로서 우리의 바른 지식과 신학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바른 삶과 행실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정통은 정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둘째로 독일 경건주의의 갱신운동은 중생의 강조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신앙과 칭의의 교리보다는 중생과 성화의 교리를 강조함이 그 특징이다.  루터가 회개는 신자의 전 생애에 걸쳐서 진행해야 한다는 발언에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스페너는 정통 신학의 선포적인 칭의관에서 벗어나서 "칭의된 상태"(condition of justification)를 강조하는 칭의관으로 전향함으로써 칭의의 개념에 성화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이 되고 말았다.
중생은 스페너에게 마치 칭의가 루터에 대하여 차지했던 중요성을 차지하였다.  "거듭남" 또는 "중생"(Wiedergeburt)의 경험을 절대시 하는 현금의 개신교 내에서의 사조는 그 뿌리를 독일의 경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을 중생인과 비중생인으로 분류하는 사고는 믿음의 교환을 자초하기 쉬웠고 칭의의 확실성의 기준을 성화의 삶에 둔 것도 문제였다.
프랑케는 성화의 교리를 [그리스도를 모방]의 삶으로 표현하였고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범을 항상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도모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갈파하였다.
셋째로 독일 경건주의의 갱신 운동을 살펴 본다면 그것은 성령의 내주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성령의 내주는 "신적 광명"(das gottliche Licht)이라는 추가적인 개념 때문에 정통 신학에서 말하는 성령의 내주와 사상을 달리하게 된다.  "신적 광명"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시작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이 "신적 광명"의 개념을 갖고서 신자가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등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바 신비로운 일들을 설명하였다.  경건주의 저술들은 "내주하는 그리스도"라든가 "내면적 기독교"라는 표현들로 가득차 있다.  스페너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내면적 인간"을 존재하는 종교임을 서슴치 않고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으로 충분치 못
   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가슴 속
   깊숙히 들어오도록 하여 성령님이 말씀하는 것을 큰 감
   동과 위안 중에 들어야 한다.
Spener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가슴 속에 파고들어 오도록 함으로 마음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는 "내면적", "내적", "체험적" 종교임을 말한다.
다섯째로, 독일 경건주의의 갱신을 위한 교회관을 고찰한다면 그것은 경건한 소수의 교인들로 구성된 지상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 되고 있다.  경건하고 중생한 신자들이 누구인가를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무형교회를 거론했지만 경건과 신앙의 열정으로서 모범적인 크리스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확인 될 때에는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시적인 유형교회의 존재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를 기성교회로부터 분리한 소수의 가시적인 신도의 집단들과 동일시하는 재세례파의 과오를 범한다는 비평을 듣기도 하였다.
스페너는 루터의 "평신도의 제사직"의 개념을 "정신적인 제사장직"(Spiritual Priesthood)의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스페너를 따르면 정신적인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신도들을 위하여 획득케 하신 권리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케 하신 것인데 이는 신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제를 드리고 자신들과 타인을 위하여 간구의 기도를 하고 형제 자매와 이웃들을 위로.권고하는 직분"을 의미한다.  스페너는 강조하기를 "정신적 제사직"은 교역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신도들에게 주어진 직분이며 권리라고 하였다.  프랑케도 이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스페너는 평신도의 "영적인 제사장직"을 강조하면서도 평신도가 세례를 줄 수는 있어도 성찬식을 집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하였다.
여섯째로, 독일 경건주의의 종말론 속에서 본 갱신을 살펴보면 천년기의 존재를 긍정하나 문자주의적 해석함을 기피하는 것이 그 특징인 듯 보였다.  스페너는 전천년재림론을 거절하였고 이중 부활의 교리에 대하여서도 회의하였다.  그러나 영생복락이 아니면 영원한 멸망이 뒤따르는 최종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고 지옥의 존재를 의심하기에는 성경의 증언이 너무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스페너의 종말론은 현세 부정적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성격을 띤 것이 확실하였다.  그는 종말론을 미래의 역사의 차원으로 유도하였고 그 결과 20세기에 등장한 "구원 사회파"에 대하여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미래에 성취되지만 그 시작은 현재의 역사 가운데서 태동한다는 생각은 교회의 갱신을 도모하며 복음전파와 선교의 열정을 북돋아주며 자선사업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힘쓰도록 경건주의자들을 이끌어 주었다.
일곱째로, 독일 경건주의의 윤리를 통한 갱신은 사회 윤리보다는 개인 윤리의 영역에 치중하였고 선한 삶을 믿음의 열매로 보기 보다는 믿음의 증명으로서 절대시하는 준법주의적인 사고의 작용이 그 특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행위 규범들을 지키는 것과 동일시하였으며, 기독교를 미니 윤리(Mini-ethics)로 축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격을 몇 가지 "하지 말라"(주초를 하지 말라, 사교춤을 주지 말라, 도박을 하지 말라)의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획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금의 보편적인 경건주의적 윤리관의 씨앗이 이미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윤리사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페너의 윤리를 통한 갱신은 자선 사업에 있었고 사회적, 경제적 현실의 구조적 개선에는 쏠리지 않았다고 하는 해석이 꽤 유력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스페너의 생애의 활동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프랑크프르트와 베르린에 있으면서 30년 전쟁의 결과로서 최악의 경제적 상황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독일인들을 위하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수립하기 위하여 힘을 경주한 것은 그 반증이 될만한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독일 경건주의는 영미의 청교도주의(Puritanism)처럼 "거룩한 공화국"의 건설을 위한 정치 참여와 사회적 활동을 하는 일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지기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성 교회인 루터파 교회보다 훨씬 강도 높은 사회적 관심을 보였고 그들(독일 경건주의자들)의 도덕주의적인 고행적 삶의 경향이 자선 사업과 국내외 선교 활동의 열기로서 시정, 보완되었다.  그들의 보편적, 문화적 무관심은 미래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으로 말미암아 점차적으로 개선되어 갔다.  그리고 기독교적 문화 갱신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발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각종 쾌락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취하면서 엄격한 규율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들과 도덕적 교훈들을 읽을 때는 금욕주의자라는 인상을 강력히 받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건대, 프랑케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주초와 무도회에 가는 일과 도박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은 몰론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에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일을 삼갈 것과 웃음을 웃을 때에도 어리석은 농담이나 부질없는 일로 웃는 것은 잘못이며, 책을 읽을 때에도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쓸모없는 책들을 읽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 경건 생활을 통한 갱신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B. 독일 경건주의의 갱신이 대륙에 미친 영향
독일의 경건주의는 그들만이 갱신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 내부의 갱신 뿐만이 아니라 각 분야에 갱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갱신 운동은 대륙에로 확산되었다.
      1. 선교에 미친 갱신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 직접적이고 가장 큰 소산이라고 하다면 그것은 선교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생활에 깊이 들어간 경건주의 지도자들이 흑암에 사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려는 열성이 생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경건주의는 각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뿌리 박은 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이었다.  그리하여 노르웨이에서는 그린랜드로 초대 선교사 한스 에게데(Hans Egede)와 노르웨이의 위대한 부흥가 한스 닐슨 하우게(Hans Nielson Hauge)를 배출하였다.  특히 에게데는 그린랜드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1721년에 46명을 거느리고 그린랜드로 떠났다.  그러나 거기 사는 사람들은 에스키모인들이었고 자 의 동포들은 다 죽고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용기를 헤쳐나가 먼저 글자도 없는 에스키모어를 배워 4복음서를 번역하여 출판하였으며 1760년에는 에스키모어의 문법책을, 그리고 1776년에는 마침내 신약성경 전부를 출판하였다.  이와같이 그린랜드의 선교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에게데 부자(父子)에 의해서 선교되었으며 수세대 후에는 에스키모족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덴마크에서는 그 나라 왕이 할레 대학의 프랑케에게 인도에 있는 자기 나라 식민지로 보낼 선교사를 요청하였다.  할레 대학에서는 서슴치 않고 이를 수락하여, 할레의 두 선교사를 덴마크가 인도로 파송하게 하였는데 곧 바올로매우 치겐발크(Batholomew Ziegenbalg)와 헨리 플루차오(Henry Pluschau)가 1705년에 인도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덴마크 할레 합동 선교사업의 시초이었다.  그 후에 여러 다른 선교사들이 인도로 파송되었다.  그리하여 18C 할레대학은 60명의 선교사를 인도에 공급하였던 것이다.  특히 B. Ziegenbalg의 언어 솜씨는 놀랍게 발전해 3년만에 신약성서를 인도 안에서 쓰는 언어 중 어떤 언어로도 변역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타밀어로 첫 번역을 하였으며 1 14년에 완결된 신약성경이 나왔다.
이들의 선교 원칙을 보면 첫째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어 교회와 학교의 병행을 강조했으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면, 그들이 글자로 기록된 말씀이 있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느끼어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세째로는 복음은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네째로는 선교의 목적은 명확히 개인적인 개심이어야 한다.  다섯째로는 가급적이면 속한 시일내에 인도인 교역자를 가진 인도교회를 출현시켜야 한다는 등의 원칙을 나름대로 세우고 일하였다.
그리고 다른 지방으로 간 선교사들도 많았다.  그래서 경건주의 운동의 가장 획기적인 공헌은 역시 이들의 해외 선교, 곧 현대선교를 이들이 착수하여 진행시킨 사실이다.  이것은 아무리 높이 칭송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Moyer가 "경건주의가 성행된 기간은 비교적 길지 못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생긴 전도 정신과 선교 정신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 연대기는 나열할 수 없지만 이 선교의 여파는 언더우드나 아펜셀러를 통하여 우리 나라까지도 밀려 온 것이다.
      2. N.V. Zinzendorf의 모라비안 운동에 끼친 영향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심오한 신앙적 확신에 가득 찬 사람으로서 할레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할레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그는 경건주의에 큰 감화를 받았으며, 항상 경건주의의 빛 아래서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였다.  1 722년 박해를 겪고 있던 보헤미아의 형제회가 그의 초청을 받고서 삭소니에 있는 그의 영지 내에 정착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처음부터 이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신앙심과 그의 천부적인 성격이 결합하여 급기야는 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 말았다.  이에 진젠돌프의 영토 내에 있는 헤른후트(Herrnhut) 마을에 그들의 정착촌이 성립되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건주의자와 비슷하게 진젠도르프는 루터파의 신앙 정통을 따랐으나, 때로는 루터파 정통주의의 딱딱한 기질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모라비안들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그들의 신앙선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신학적인 이론 정립보다는 헌신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최우선적으로 고수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은 자연적이거나 혹은 철학적인 수단으로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학의 최종적인 총화를 보았다.
모라비안이 갖는 의의는 숫자적 열세와 족히 비교될 수 없다.  그들의 선교에 대한 관심은 세계 각 곳에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큰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것이 선교하는 곳곳마다 감화를 많이 주어 영적 후손들을 성장시켰다.  이들과 나란히 선교하던 다른 개신교 교회들까지도 이들의 영적 감화를 받았다.
또 어떤 전기 작자가 말한대로 "그의 정렬 곧 예수께 향하는 뜨거운 사랑과 사랑의 단체로서의 그의 형제단을 확립하려는 정렬은 그의 형제단을 믿음의 단체라기보다도 경건주의의 단체라 할 수 있다.  이 경건주의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내적이며 개인적인 성격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3. J. Wesley의 감리교 운동에 끼친 영향
경건주의가  영국에 전래된 것은 모라비안들에 의해서 된 것이지만 그것이 영국 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데에는 웨슬레의 힘이 매우 컸었다.
웨슬레는 1703년 6월 17일에 영국교회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와 어머니 수산나 사이에서, 런던에서 북으로 약 400리 떨어진 엡워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건의 훈련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이 경건의 훈련은 후에 그가 위대한 영국의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성결클럽(Holy Club)을 만들어 경건훈련을 하였다.  그의 동생 찰스 웨슬레(Chales Wesley)와 휫필드(White field)도 이 클럽의 회원이었다.   클럽은 내적으로는 경건연습과 영적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외적으로는 복음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럴 즈음에 이 단체로부터 북미 개척 선교사 선발 청원에 있어서 웨슬레 형제가 파견되게 되었다.  마침 그들이 타고가는 배에는 모라비안파 선교사 26명이 감독 데이빗 니취만(David Nitschmann)의 인도를 받아 역시 죠지아로 가고 있었다.  웨슬레는 그들에게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고 또한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평화롭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모라비안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죠지아에 있는 동안에도 스팡겐버그(Spangenberg)와 모라비안교도들과 접촉하게 되어 그들의 순전한 믿음과 개인적인 경건과 기쁨에 찬 마음을 보면서 자신과 대조해 보는 계기도 가질 수 있었다.   국에 돌아오자 웨슬레는 모라비안들을 찾아가서, 때마침 영국에 와 있던 Peter Bohler를 소개받았다.  Bohler는 웨슬레의 신학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온전한 성결과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선행이나 인격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앙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이상의 모든 체험은 순간에 얻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던 중 "올더스케이트"(Aldersgate)에서 열린 모라비안파의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로마인서 서문을 읽을 때 홀연히 회심하여 거듭나는 경험을 얻게 된 것이었다.  웨슬레의 일기에는 그때의 경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상스럽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구원을 위하여서는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
   지해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나같은 사람의  죄까지도 다  처리하셨다는 것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두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첫째는 회심의 정서적 경험으로서의 '신생'이었고, 둘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성화이었다.  또한 지금 실제로 죄를 벗고 성결한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웨슬레는 올더스게잇 경험을 한지 3주일이 채 못되어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을 좀 더 이해하고자 Herrnhut를 방문하여 Zinzendorf와 두 주일을 지냈다.  이 후 Herrnhut를 떠나 영국에 돌아오면서부터 웨슬레는 그의 위대한 전도사역을 시작하였다.  웨슬레의 복음운동은 인간 내심의 혁신운동이요, 둘째는 교회혁신의 복음운동이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죽을 때까지 국교 곧 성공회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과 관계를 계속 보존하려 하였지만 다만 그의 후계자들이 역사적 형편의 요청에 못이겨 감리교라는 새 교파를 파생케 했던 것이다.  결국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도 경건주의의 맥 하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4.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끼친 영향
서기 18C 동안에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는 유럽에서 얼마 전에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개인 경건에 관한 각성이 여러 면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 두 곳의 운동에는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었다.  조지 휘트필드는 신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가였으며 프란시스 에스베리(Francis Asbury)와 다른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가서 웨슬레의 가르침을 들여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식민지에는 경건주의자 모라비안, 감리교 주의자들이 보였던 것과 유사한 경건을 불러일으킬 만한 많은 조건들이 잠재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도 신앙은 교회와 정통성의 틀 안에 갇혀서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유럽의 신앙인들이 개인의 경건과 신앙을 주장하였던 운동과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유럽의 운동과 다른 점은 이러한 각성이 모든 교파를 초월함으로써 미합중국을 형성하기에까지 이르게 될 개신교 기독교를 형성하게 된 사실이다.
그들의 신학에서 "대각성"이라는 공통적인 주제 아래 포괄적으로 모든 의견들을 다 포섭하였다.  그렇지만 실제적인 면에서는 회심, 개인적 체험, 성경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 열광적인 에배에 대한 갈망 등을 강조하는 점에서 다같이 유사하였다.
죠나단 에드워드, 죠지 휘필드 및 그 밖의 위대한 설교자들에 의하여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종교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회의주의와 불신앙 사상과 더불어 교회가 큰 싸움을 하는 중에 일어난 것으로서, 당시에는 독일에서는 진젠돌프 백작의 지도 밑에 "헤른후트"(Herrnhut)부흥운동이 일어 났었고, 영국에서는 웨슬레 지도 밑에 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이 대각성은 처음에는 1730년 쯤 펜실바니아에 있던 메노나이트파, 퀘커파 및 모라비안파에서 나타났는데, 그 다음에 화란 개척 교회의 Theodore Frelingheusen의 부흥 설교와 장로교인인 Gilbert Tennant의 부흥설교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그후 1734년 메사츄세츠주 노담론에 사는 백성들이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지도를 받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1717년 예일의 학생이었다.  그는 록크(Lock)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서 알 수 있다.  수년 후에 그는 웨슬레의 체험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의 경험을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광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동시에 그의 교육은 그로 하여금 확고한 칼빈주의자가 되게 했으며, 특히 선택론에서 더욱 그러했다.  동시에 대각성 운동의 가장 웅변적인 연설가로서 그는 기독교인의 삶을 가장 정당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설교하였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인간의 사고나 전통 또는 습관적인 것들을 신학의 우선순위로 두는 것을 단호히 배격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사고는 당시의 교인의 자격문제를 강조하는데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타락과 도덕적인 무질서를 그대로 방치하면서 선조들의 신앙을 지켜주기 위한 방관적이면서도 피동적인 신앙형태가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에드워드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얻어지는 종교적 체험이 없는 교인은 정상적인 교인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하면서 "신앙의 차이란 오직 체험적 신앙의 유무에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러면서도 이러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출석은 허용할 수 있으나 성례전의 참여는 허락할 수 없다는 강경한 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러면서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심을 기울였고 회개의 필연성과 그 운동을 일으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유명한 "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gry God)이라는 설교를 하여 대각성운동의 선구적 폭탄을 터뜨리게 되였다.
이와 같이 회개와 중생체험을 강조하는 에드워드를 중심한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나, 18C 말 19C초에 일어난 두번째의 대각성 곧 대부흥운동은 모두 그 뿌리를 경건주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 대각성 운동의 특징인 성경말씀의 설교, 개인의 기도 및 단체적으로 모이는 기도회 강조, 중생의 필요 및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경건주의의 특징과 일치하며 이들이 벌린 박애사업, 교육사업, 선교에 대한 열정등은 Halle대학의 활약과 비슷한 것이다.  따라서 경건주의는 부흥운동의 저변에서 확고한 뿌리로 지금까지도 늘 남아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Ⅴ. 결   론
 
   A. 내용 요약
본 논문을 통하여 17 - 18C 독일 경건주의가 교회 갱신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역사적 운동으로서의 경건주의는 17C 후반부터 18C 전반 50년 동안에 있었던 독일의 Arndt에서 시작하여 스페너와 프랑케를 중심으로 한 갱신 운동이다.
경건주의가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30년 전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0년 전쟁으로 독일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불안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회와 도덕이 타락하였고 성직자들까지도 타락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성경을 교리와 생활의 표준으로 삼기보다는 신조와 독단적 교리에 집착한 나머지 영적인 감정과 고결한 실제 생활을 소홀히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느끼고 Arndt와 Spener와 Franke가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Arndt는, 설교자는 양떼를 먹이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개발하는데 부지런해야 하고 매일 기도하면서 성경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을 펴내 종교의 부패성에 대해 갱신을 일으켰다.  그는 경건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구원 체험을 강조함으로 갱신을 일으킨 것이다.
스페너는 Arndt의 "진정한 기독교"라는 경건 서적으로 읽기 시작해서부터 그의 경건운동이 시작하였고 그는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을 장려한 "경건회"(Collegia-Pietatis)를 설립하여 거기에서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음으로 경건 운동을 시작, 갱신에 앞장섰고, 그는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을 지어 대담하고 완전한 갱신 program을 제시하였다.  그는 PIA DESIDERIA에서 성경 읽기를 강조하였고 신생(New Birth)과 영적 제사장직을 강조하여 갱신을 일으켰다.
Franke는 스페너와 마찬가지로 Arndt의 경건 분위기에서 경건 활동을 하였다.  Franke는 전 유럽의 경건 운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할레(Halle) 대학에서 가난하고 부도덕의 생활에 빠져있던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뻗쳤다.  그리하여 독일 교회에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생명이 없는 하나의 전통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실제의 종교가 되게 하였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복음을 재 발견하여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을 도입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하여 적은 수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에게 성경 읽기를 강조하였고 중생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여 생명력 있는 삶을 하게 함으로 교회에 갱신을 일으킨 것이다.  경건주의의 갱신이 선교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Zinzendorf의 모라비안 운동과 Wesley의 감리교 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갱신을 일으킨 것이다.
   B. 제 언
독일의 경건주의는 독일이 30년 전 정치, 경제, 종교,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들을 종교, 사회적으로 안정을 일으킨 것은 몇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한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갱신 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에 있는 바와 같이 성경 말씀이 그들의 심령에 파고 들어 변화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둘째, 신생의 강조이다.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체험이 없이 살 때 무기력하고 생동감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 속에서 그들이 생명을 소유했을 때 진정한 갱신이 이루어졌다.
셋째, 영적 제사장직이다.  성도들을 위하여 규칙적이며 공적인 실행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임�된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할지라도 그러한 일은 평신도들에게도 수행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평신도들로 제사장으로써 직무가 수행된다고 할 때 더욱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일할 것이다.
넷째, 경건주의자들은 사회의 상황을 무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사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 내부의 경건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의 노인 문제, 기아 문제, 청소년 문제, 기타 여러 부분에 걸쳐서 관심을 기울였다.
이상을 고려해 볼 때 교회의 갱신은 외적인 교회의 확장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내부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 속에서 말씀에 대한 확신과 그들의 체험이 있어야 교회는 갱신 된다고 하는 것이다.  교회의 행사나 program에 대한 집착에서 이젠 성경 공부 그룹의 활성화와 성경의 깊이 있는 묵상 훈련 말씀의 경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한국 교회가 내적 갱신에 신경을 쓸 때에 비로소 진정한 교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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