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부흥의 주역들

2007. 12. 17. 21:22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한국교회 부흥의 주역들 -"복음 전파 평생의 사명" 길선주 이성봉 이용도


길선주목사
한국 장로교회 첫 목사 중의 한 사람인 길선주목사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 후장동에서 길봉순과 노복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4살 때부터 가정에서 모친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 7살 때부터 향리의 선비 정씨 문하에서 한학을 배우며 유학에 정진해 12살 때는 장원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관습대로 그는 10살때 당시 5살 위인 선행양과 결혼했다.

부친의 축첩과 모친의 정신적 고통, 사업의 실패, 시대적 혼란 등을 경험하며 삶의 회의를 가졌던 길선주는 19살 때부터 염세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종교적인 수행을 하기 시작한 그는 관성교를 비롯해 선도, 차력, 불도를 닦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결국 28세에 김종섭의 인도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평양 널다리골(장대현)교회 신자가 된 그는 1897년 8월 15일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29세인 1898년에는 장대현교회 영수로 임명됐다. 그는 32세가 되던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가 됐다. 1903년 그는 평양신학교 입학했고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로서 교회를 섬기게 됐다� 1903년 원산에서 부흥,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그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중심에 서게 됐다. 1905년 어간에 사경회 강사로 초빙돼 부흥의 인물로 인정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성경읽기와 기도에 몰두했다. 기도생활에도 열중했으며 아침 5시 혹은 밤 10시 등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기도했고 정오기도와 철야 기도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특히 1906년 공개적으로 시작한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기도관행이 됐다. 일반적으로 길선주에 의해 1906년부터 새벽기도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6월 10일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9월 17일 장대현교회에서 동료 6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됐으며 동시에 장대현교회의 청빙을 받고 위임목사가 됐다. 이 때로부터 1927년까지 20년간 장대현교회 목회자로 일했다. 장대현교회에서 목회 중인 1910년, 그는 제4회 독노회 부회장, 장로회 제1회 총회 부회장으로 선출됐고 1909년에는 '백반인구령운동'을 제안해 이를 실행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가담했고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0월 출옥했다. 그에게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함께 민족의 현실에 대해서도 동일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897년 안창호와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하고 사법부장으로 이했으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가담했다. 그는 목회활동과 함께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예수학당'을 열었는데 이것이 후일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로 발전했다. 그 외에도 남여성경학교와 여러 야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가 출옥한 후인 1926년 장대현교회 청년층인 박윤근과 그 동료들이 조직한 '유지회'가 길선주와 당회를 배척하는 일로 분규가 일어났고 결국 길선주는 1933년 그를 따르는 5백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장대현교회를 나와 이향리교회를 설립했다. 이 때의 분규는 사회주의적인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보수적 신앙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 길선주는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던 중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잉차면 고창동에서 평서노회 부흥회 마지막 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향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성봉목사
1900년 평남 강동군의 간리에서 출생한 이성봉목사는 6,7세 때 중화로 이사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4세에 대동군 시족면 건지리로 이주해 비교적 오래동안 거주했다. 1927년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3월 18일 이사회로부터 수원교회 개척을 임명받았다. 수원에 셋집을 얻어 4월 8일 부활주일에 첫 예배를 드린 그는 2년 8개월 만인 1930년 12월 25일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다. 교세는 장년 1백60여 명과 주일학생 2백여 명이었고 3개월 뒤인 1931년 3월 22일 연회에서 이사회로부터 목포교회로 파송받았다.

목포교회는 자그마한 셋방에 성도 40여 명이 있었다. 그는 목포교회에 부임한 지, 1년 뒤에 제4회 연회에서 목사안수 투표에 당선됐다. 이듬해 8월 헌당식을 갖고 호남지방회에서 회계, 인사부원, 교육부장 그리고 총회 대의원 목사대표를 역임했으며 제4회 호남지방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6년 4월에 신의주로 파송돼 신의주 동부교회에 부임한 그는 이듬해 연건평 2백평의 2층 기와집으로 당시 성결교회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는 12월 19일 헌당예배를 드리고 9년 9개월 동안 3곳의 목회를 마치고 부흥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37년 12월 22일 신수정교회 집회부터 1939년 7월 11일 마지막 부흥회까지 1년 7개월 동안 4백일 이상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타교파에도 집회를 나가면서 1939년 이사회가 그의 집회를 성결교회에 국한하여 가을부터 영남지방으로 제한시켰다. 그리고 그를 휴직케 하고 일본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보다 부흥집회에 열중하다가 귀국해 또 다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결국 공부는 안하고 부흥회만 다닌다는 이유로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든지 아니면 교단에서 나가서 자유롭게 부흥회를 인도하라며 권고 사직장이 날아오기도했다.

그는 사직하지 않고 만주 목회를 선택했다. 그의 만주행은 일제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이었다. 그는 굴종하거나 순응했던 교회 지도부와는 달리 도피를 택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지만 소극적이나마 피신이라는 형태적 저항이었다. 그는 1941년 만주 봉천 중앙교회에 임명됐다. 그는 매일 새벽에 1백여 명의 성도와 기도하면서 건축을 마무리했다.

해방을 맞아 9월 15일 귀국한 그는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 있는 18개 교회를 찾아다니며 무너진 예배당 수리비를 내어놓기도 했다. 1946년 38선을 남하해 초교파적으로 집회를 가졌으며 1만여 명이 모이기도 했고 때로는 10여 명이 모이는 등 한 교회에서 하루 세 번의 집회를 3∼5일 인도했다.

6.25전쟁은 그를 더욱 쉴 수 없게 했다. 그동안 초교파적으로 활동한 그는 성결교회 재건을 위해 전력했다. 1955년 4월 27일부터 1956년 3월 18일까지 11개월 동안 66개 교회에서 집회일수만 2백81일이었다. 성결교회 희년인 1957년 5월 15일에서 12월 29일까지 2백31일 동안 성결교회를 순회하면서 집회했으며 1958년 여름에는 제주도에서 초교파적으로 그리고 1959년 4월 2일부터 12월 7일까지 8개월 동안 미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인도했다. 1961년 9월 23일부터 1963년 2월 17일까지 1일 1교회를 목표로 5백13일 동안 4백80교회에서 집회했다. 이후, 집필에 몰두한 그는 1965년 7월 23일 성결교회 합동총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 뒤, 8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용도목사
1901년 4월 황해도 금천군 시변리에서 태어나 1914년 시변리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용도목사는 1915년 송도한영서원에 입학한 후 민족현실에 눈뜨고 독립사상을 키워나갔다. 그는 양주삼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의 상관성, 그리고 새로운 근대세계의 인식과 동양전통 활용의 방향을 배웠다. 여기에 역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김동성과 이강래 선생의 가르침도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런 가운데 이용도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일으킨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3·1운동의 발발과 그 운동에 참여였다. 3·1운동 참여를 계기로 그는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의 방향을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성공에서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삶의 성취로 나아가게 하는데, 여기에 합류했던 것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는 개성소년형무소에서 2개월간의 유치장 생활을 경험하게 됐다. 석방된 그는 다시 1920년 2월 기원절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후, 조선독립주비단에 입단했다. 이 주비단은 황해도 황주에 여단사령부를 설치하고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독립결사대, 독립청년단, 비밀청년단과 연계돼 있었다. 이로 인해 이용도는 1920년 12월 28일 황해도 신계경찰서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21년 송도고보에 재입학한 그는 태평양회의사건으로 개성경찰서에 체포됐다. 1차대전 후, 베르사이유체제를 워싱턴체제로 바꾸려고할 시기에 국내외에서는 조선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천명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졌을 때 그는 송도고보에서 11월 11일을 동맹휴교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그는 1922년 4월 24일 고등법원에 형이 확정돼 같은 해 8월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어야 했다.

1919년 이후 4년여 동안 그는 감옥을 들락거리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으며 이런 고생은 이후 그의 몸이 폐병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감옥 속에서 쌓은 독립지사들과의 만남과 교분은 그의 민족의식의 지평을 넓혀줬다. 1923년 송도고보에 삼차 입학해 개성생활을 마친 그는 1924년 봄에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인간의 본래적인 삶의 길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좀 더 본질적으로 깊은 차원에서 인간 본연의 생과 민족독립의 길을 가기 위해 신학공부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협성신학교 4년 동안 그는 자살까지 기도할 정도로 처절한 절망과 방황을 거쳐 자신만의 새로운 생의 지평을 찾았다. 그의 인격과 생명이 이성적인 단계 혹은 역사적인 단계에서 영적 단계 혹은 종말론적인 단계로 차원 변화를 겪기 위해 치열한 모색 과정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미 가난 경험과 독립운동과 옥중체험을 통해 민족의식과 인격이 성숙한 상태에서 비판적인 지성을 지닌 그였기에 그는 신학공부 과정에서 성찰적인 자세로 접근했다. 그런데 그는 이 시기에 그의 아시아적 영성 혹은 동양적 영성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동양전통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을 토착적으로 해석해 서구 근대기독교 모형에서 배우면서도 한국적인 기독교의 지평을 터 닦고 있었던 최병헌의 한학강의와 아시아적 영성에 접하게 된 것이다.

한학과 동양전통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었던 최병헌의 강의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한학을 공부할 수 없었던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서구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실상을 인식하고 민족 자주의식과 동양적인 주체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한학공부를 통해 동양전통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통찰해내어 자신의 동양적 영성의 형성에 활용회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