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하며 (눅 15:17~24)

2007. 12. 19. 21:22목양자료/6.교회행사 자료

[송구영신] 옛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이하며 (눅 15:17~24)


시인 괴테는 말하기를 “사람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더욱 귀중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할 짓 안할 짓, 갈 데 안 갈데 마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내가 누군지를 바로 알기 때문에 언제나 그 생활이 반듯할 수 있고 경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생각 많은 계절에 서 있습니다. “연말”- 자연히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때입니다. 잘했던 일도 생각나고 잘못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벽에 걸려있는 새 달력을 바라보면서 내년 한 해를 어떻게 살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많은 줄 압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송구영신(묵은 것을 어떻게 보내고 새 것을 어떻게 맞이할까?)의 진정한 방법을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성경이 다 사라져도 눅15장만 있으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있습니다’고 본장을 극구 칭찬 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내용이라서 분문은 생략하기로 하겠지만 결론은 아버지를 떠났더니 결국 돼지지기 밖에 안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탕자는 문득 마음의 눈이 뜨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쟎는가?” 현재 상황을 분석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찾는다. 그 다음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판단이 있었다. 그리고는 판단한대로 과감하게 새 출발을 했습니다. 필경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해 준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 아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상속의 가락지를 끼워주었다. “너는 거지가 아냐, 탕자가 아냐, 내 아들이야...”당당하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종들에게 “얘들아 신발을 신켜라” 상전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자신의 아들임이 변함없음을 온 동네에 선포했습니다.

이 연말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송구영신, 어떻게 우리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는가? 2005년과 함께 있었던 구질구질한 일들, 2005년에 상처받았던 일 들, 2005년에 수모스러웠었던 일 들, 2006년에 뒤돌아 볼 때 얼굴이 붉어지던 일들을 훌 훌 털어버리고 2006년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탕자의 송구영신은 자신이 누군가를 바로 깨닫는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우리는 먼저 자신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탕자는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는 한탄 속에서 “주려 죽을 지경에 있는 나는 누구냐?” “우리 아버지는 부자가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굶어 죽어야 하지? 우리 집에는 양식이 산더미처럼 쌓아 있는데 말야” “우리 집에는 종들도 배불리 먹고 있는데 나는 아들이라는 놈이 이게 무슨 꼴이지?” 비로소 탕자는 아들이라는 신분이 자각되었다. 호화롭게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살던 옛날을 생각해 봅니다. 종들에게 당당히 섬김을 받던 옛날을 회고해 봅니다.

아들이라는 신분이 자각되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을 자각할 때 자기 위치가 분명해 진다. 우리는 종종 내가 누구인가를 잊어 버릴때 천박하게 됩니다. 비굴하게 됩니다. 비열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신분을 잃어버릴 때 아버지로서 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머니로서의 신분을 잃어버릴 때 어머니로서 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신분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람 구실을 못하는가? 존귀한 사람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짐승같이 본능만을 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이 사회가 이렇게 짐승 같은 사회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는 한 가지의 신분이 또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이는 천사가 부러워하는 신분입니다. 우주 만물이 부러워하는 신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희생을 댓가로 얻어준 신분입니다. 땅의 신분은 기껏해야 100년도 못가서 끝나는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영원까지 계속되는 신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몰라서 지금도 마치 고아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2005년도의 어두웠던 사건들을 돌아보자. 그러면 분명히 내가 사람임을 잊어버렸을 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어버렸을 때 그런 사건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굶어도 자녀요, 배불러도 자녀입니다. 가난해도 자녀요 돈이 많아도 자녀입니다. 배웠어도 자녀요 못 배웠어도 자녀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따라서 당당하게 사라. 비록 굶거나 돈이 없어 가난해도 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버스 정류장 앞에서 어느 할머니가 군 고구마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를 도와줄 양으로 고구마 500원어치를 사고 1000원짜리 내면서 잔돈은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때 돌아서 가는 목사님께 그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이보슈 신사 양반, 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우? 이래뵈도 나는 하나님의 딸이요 딸! 옛수 여기 잔돈 가지고 가시우!”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주의 주재자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할 망정 하나님 얼굴에 먹칠을 해서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신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2. 그 다음에 탕자는 현재의 상황을 엄밀히 분석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인데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내가 주려 죽는구나!” 현재에 대해 엄밀하고도 정확한 판단을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송구영신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상태에 대한 엄밀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있느냐? 과연 하나님의 자녀다우냐?”

탕자는 자기 옷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구나!” 자기가 먹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쥐엄 열매를 먹고 있구나!” 누워있는 자리를 생각했을 때 “내가 돼지 우리에 누워있구나!” 내 친구가 누군가를 생각했을 때 “돼지밖에 친구가 남지 않았구나!” “이거 뭔가 잘못되었구나!” 현재 자기 모습을 엄밀히 분석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철저한 건설은 철저한 파괴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2006년도의 철저한 건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2005년도의 철저한 파괴가 필요하다. 내 모습을 부숴야 합니다. 그래서 적나라하게 엄밀하게 분석을 해서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2005년 한 해 동안 내 속에 얼마나 인격이 있었느냐? 신앙이 있었느냐? 열매가 있었느냐? 진실이 있었느냐? 우리 교회 집사님과 어떤 관계로 있었느냐? 목사님과 어떤 관계로 있었느냐?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있었느냐? 분석이 필요하다. 내 모습을 솔직하고 진실하고 진지하고 예리하게 분석, 파악해야 낡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바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그럼 이 상태가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3가지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아버지의 간섭을 귀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앉아라, 서라, 가라, 와라, 해라, 말아라, 일찍 들어와라, 친구를 잘 사귀라... 등등, 탕자는 이것이 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잔소리를 안들었으면 좋겠다고 착각한 것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는 언제나 일정한 제한안에 보장되는 것입니다. 제한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길거리를 나왔다. 신나게 달리고 싶은데 신호등이 걸리적 거린다. 그래서 귀챦다고 그냥 달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못가서 더 이상 한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좀 부자유스럽지만 신호등의 제한을 받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노아 이후로 물을 떠나서 배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팔공산에 가면 아직 배가 있기는 하지만, 태풍작약할지라도 배는 물 속에 있을때 비로소 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기의 자유는 물이라는 제한 속에, 제비의 자유는 공기라는 제한 속에, 자식의 자유는 어버이의 간섭 속에, 학생의 자유는 스승의 간섭 속에, 국민의 자유는 국법과 사회 관습의 간섭 속에,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비로소 이 아들은 탕자가 된 후에라야 “아---하, 그 간섭이 바로 내 자유의 보장이었구나! 진작 순종했더라면 이 꼴이 안되었을 걸...”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2) 내가 나를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현명하고, 나는 젊었고, 나는 명석하고, 나는 판단력이 예리하고..., 아버지를 떠나면 보란듯이 성공할 줄 알았는데 실패뿐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옷을 입을 줄 알았는데 결국 누더기뿐이었습니다.. 아주 기름진 음식을 먹을 줄 알았는데 결국 돼지죽이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많이 얻을 줄 알았는데 돼지 친구뿐이었습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멋들어지게 살려고 했는데 결국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함께 한 백년 살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결국 나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나보다 아버지가 옳았어, 내 경험보다 아버지의 경험이 더 옳았어!” 탕자는 비로소 자기가 자기를 너무 믿었음의 결과가 비참함인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명석한들 한 발자욱 앞을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혜로운들 1분 후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지한 존재가 사람이요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어제도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 영안실에서 들려 나갔을 텐데 그 사람들이 몇 날 몇 시 몇 분에 영안실에서 들려 나갈 것을 알았겠습니까? 내 힘으로 죽음의 날을 연기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 힘으로 생로병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내 힘으로 운명을 변경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잘난체하고 거들먹거리다가 이 꼴이 되었다고 둘째 아들은 탄식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3) 돈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돈만 있으면 호화로울 줄 알았는데 그 돈에 한계가 있는 줄 몰랐구나! 그 돈 믿고 날뛰다가 내 이 모양 이 꼴 되었지.” 탄식하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 쓰다보면 주먹속의 모래같이 쑥---빠져나가는 것이 돈입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아버지를 떠나서면서 까지 돈을 �아 갔습니다만 그 끝은 돼지지기였습니다. 명예가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아버지를 떠나서면서 까지 명예를 �아 갔습니다만 그 끝은 돼지지기였다. 출세가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아버지를 떠나서면서 까지 출세를 �아 갔습니다만 그 끝은 돼지지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가면서까지 �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탕자는 그 결과는 고백하기를 “돼지지기 뿐이었노라” 고 했습니다.

(4) 그가 이렇게 비참함을 발견한 후 끝난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끊어 버리고 용감하게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배짱 좋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기다리시던 아버지, 맨발로 뛰어나와 책임추궁하지 아니하시고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것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후회는 잠깐이면 족합니다. 오래 끌면 오히려 송구영신에 방해만 됩니다. 과감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각해 보라. 아버지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기어이 떠나더니...잘 되서 돌아와도 얼굴을 못 들판인데 그 재산 다 탕진하고 거지 중에도 상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니 무슨 염치로 돌아오겠는가? 염치 생각하면 못 돌아갑니다. 체면 생각하면 못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간에 무슨 염치고 체면입니까?

고기가 물로 돌아가는데 무슨 염치가 필요하고 자식이 어버이께 돌아가는데 무슨 체면이 필요합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데 무슨 염치며 무슨 체면입니까?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용서가 천번 만번 제한이 없듯이, 우리 아버지 또한 그리하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는 “노란 손수건”이라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 혹한 추위 속에 감나무 가지가지마다 매여 있는 노란 손수건, 바람에 나부끼는 그 손수건들이 의미하는 소리, “내 아들아, 네가 돌아온다면 너를 용서하는 내 마음 어찌 손수건 하나뿐이겠느냐? 열인들 못 걸고, 백인들 못 걸고 천인들 못 걸겠느냐?”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잘못을 뇌우치고 돌아갈 때, 염치불구하고 돌아갈 때,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알아보시고 달려오셔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어서 오라고 환영하시기 위해 이미 기다리신지 오래다.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아버지는 과거를 따지지 않고 “빨리 나와 바른 관계 속에서 너의 행복을 보고 싶구나” 입 맞추어 영접해 주시고 새 옷 입혀 주시고 가락지 끼워 주시고, 소 잡아 잔치해 주시려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5년도를 어떻게 보내고 2006년도를 어떻게 맞이하십니까? 2006년도를 최고의 해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2005년도를 잘 보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바로 압시다. 그리고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현재의 상태를 엄밀히 분석하고 고백합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추궁하여 밝힙시다. 그리고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기도하면서 돌아갑시다. 찬송 부르면서 돌아갑시다. 교회생활 열심히 하면서 돌아갑시다. 그러면 2006년이 여러분에게 광명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찬송의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기쁨의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당당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차고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