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8. 18:53ㆍ교회사자료/2.초대교회사
기독교 교회사
Sidney M. Houghton저
1. 초대 교회로부터 이슬람 출현까지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시오.
1) 초대 교회로부터 이슬람의 출현까지
신약 성경의 서신들이 기록된 기간동안의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네로(Nero) 황제의 치세 중(A.D. 54-68년) 로마에 화재가 일어났다(64년). 네로는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1-2세기에 집권자들에 의해 박해가 있었으나 조직적인 박해는 없었다. 이 당시 '변증서'를 써서 기독교를 변호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져스틴(Justin)이다. 그는 165년경 순교 당했으나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서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속죄 염소가 되었다'고 함으로서 박해의 원인을 잘 규명하고 있다.
이런 박해서 그리스도인은 암호로 ICHTHUS(물고기)란 단어도 사용했는데 여기서 Isms 예수, CH는 그리스도, TH는 하나님, U는 아들, S는 구세주란 말에서 따온 것이다.
박해의 이유.
⑴ 로마의 황제들도 제국이 인정하지 않는 신(神)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반대하였다.
⑵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시라고 전파하였다. 이것은 다른 신들은 우상이라고 보며, 로마의 황제들은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⑶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예배나 국가의 우상 숭배 행사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⑷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계층의 로마 백성들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즉, 제사장들, 우상 제작자들, 우상 장사꾼들, 제사에 사용될 짐승 파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가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⑸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신들을 노엽게 한다고 믿었다.
최종적인 박해는 디오클레시안 황제 때이고 그의 후임 갈레리우스도 박해를 했는데 그는 충이 먹어 죽었던 네로로부터 시작되어 디오클레시안 때까지 박해가 있었다.
2) 순교자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를 당했다. 사도들의 뒤를 이은 속사도들(Apostolic Fathers) 중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헤르마스(Hermas),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 폴리캅(Polycorp)이다.
헤르마스는 '목자'란 책을 지었고,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쟌 황제 앞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맹수의 밥이 되었으며,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은 신앙을 지키다가 화형 당했다.
그 외에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수천의 남녀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초기 교회 역사가들 중의 한 사람은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했다.
3) 콘스탄틴 대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드디어 A. D. 331년에 끝나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했는지의 여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박해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듯이 콘스탄틴도 비슷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선호하였다.
콘스탄틴의 관용 정책은 위험도 뒤따랐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세상적 유익을 얻기 위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또 그리스도인 특유의 순박함 대신에 교만과 자랑이 들어왔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느껴진 것은 황제 자신이 교회를 다스리기로 결정했던 때였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신데 황제가 머리가 되는 것은 합당하지 못했다.
이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문제 삼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세우셨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성육신에 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리스도의 품격'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변호하였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는 배척되었으며 '니케아신경'으로 알려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조가 채택되었다(A. D.325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옹호 정책은 양면성, 즉. 예배의 자유를 주었다는 점과 세속적 물결이 휩쓸려 들어왔다는 점이 있다.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 왔는데 양적인 요소가 질적인 요소를 희생시켰다. 콘스탄틴 대제의 후계자인 쥴리안은 배교자였으며 저술로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4) 교부들
속사도들은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속사도 이후부터 교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교부들은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해서 말씀의 진리를 변호하였다. 그 중에 암브로스(Ambrose), 어그스틴(Augustine) 그리고 제롬(Jerome)이었다.
교부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354년에 태어났는데 암브로서를 만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어그스틴은 펠라기우스파(Pelagian)와의 논쟁에서 두드러졌다. 제롬은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아는 훌륭한 신학자였다.
제롬은 성경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부터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성경이 '벌게이트 역'이다. 제롬도 펠라기우스파의 이단을 아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5) 수도원 제도
수도원 제도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생활 방식을 가리킨다. 수도원 제도의 기원은 은둔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는 수도원 제도의 발상지였다.
수도원 제도의 실상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마 5:16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자들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고후 6:17). 그러나 물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불신자들에게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어디까지나 영적이다).
서유럽에서 수도원 제도는 베네딕트(Benedict)라는 수도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도승들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필수적인 도덕 항목은 수도원장 베네딕터가 제정한 것으로서 '청빈''자선''순종'이었다.
수도승들은 여러 방법으로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수도원들은 암흑시대에 교사를 양성하고 학교를 세우는 학문과 경건의 본거지가 되었다.
수도승 가운데 '영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데, 스코틀렌드 본토에 복음을 전하기 원했던 콜룸바가 유명하다.
6) 교황 제도의 발흥
그리스도의 모범과 교훈과는 반대로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교회 내에서 어떻게 싹트게 되었다.
마 23:8의 말씀에 의거해서 '교황'제도는 비 성경적이다. 로마의 교황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들 사이의 세력 다툼은 결국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동방에서는 헬라어, 서방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언어 상의 차이점이 존재 할뿐 아니라 교리상 차이도 있었다(성령론). 1053년 결국 동서가 양분되었다.
배교의 표로서 성직자들의 기세 등등함, 화려한 건물, 화려한 옷차림, 성자들에게 기도하며 우상을 예배하는 일이었다. 어스스틴 시대에는 죽은 성자들의 혼을 불러내기도 했다. 마리아가 부당하게 높임을 받았다.
그들은 "양떼들에 대한 모범"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관할하는 주인"으로 행사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첫 번째의 영국 개신교의 대감독이 화형을 당하면서 "교황에 대해서는 나는 그의 모든 거짓 교리들을 볼 때에 그를 그리스도의 원수요 적그리스도로 간주한다"라고 했다.
7) 이슬람
모하메트는 570년에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622년 모하메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 메카로부터 메디나라는 도시로 도만 하였다. 이날이(622년 7월 16일) 모하메드 월력의 첫째 날이 된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중요한 신조는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과 모하메드가 알라의 선지자라는 것'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일 다섯번 기도하며 메카를 향하여 소원을 아뢴다' '구제를 한다' '모하메드 월력으로 아홉째 달인 라마 단에는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한다'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번은 메카로 순례할 것'등이다.
모하메드의 교훈들은 '코란'에 집성되었다.
코란의 교훈들이 성경의 교훈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을 명백하게 부인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완전히 배제한 구원의 방법을 말한다. 성경의 교훈들과 코란의 내용은 극과 극처럼 전혀 다르다.
632년 이후 모하메드를 계승한 지도자들을 '칼리프'라고 부르며 그들 중 4명이 모슬렘 제국을 창설하였다.
칼라크 오마르는 '코란 외에 다른 책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였고 많은 귀중한 문헌들, 성경의 초기 사본들을 없앴다.
700년 이상이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에 남아 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하메드를 채찍으로 사용하신 것과 북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어떻게 복음의 빛이 사라져 갔는지를 살펴보았다.
2. 유럽의 초기 선교사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7-8세기 어간에 활약한 유명한 선교사들로는 윌리브로드(Willibrod), 윈프리드 보니페이스(Winfred Boniface), 엘리지우스(Eligius), 앙스가르(Angsgar)등이다.
우리는 유럽 초기 선교사들의 특징을 더 잘 살피기 위해서는 세세하게 연구를 해야 하겠지만 위에 소개된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과 삶을 개괄함으로서도 상당한 정도의 정황 및 특징을 살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먼저 윌리브로드(Willbrod)에 관해 알아보자.
윌리브로드는 658년에 노덤브리아에서 출생했으며 7세 때에 부모에 의해 립포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20세 때에 아일랜드에 있는 엑버트가 학장으로 있던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33세 때야 이교와 죄악의 암흑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출 작업을 하였다.
그는 여러 명의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유럽, 특히 프리즐란드인들의 지역(오늘날의 네들란드)으로 가서 선교 사역을 하였다. 윌리브로드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온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진력하였으며 나중에 '네들란드의 사도'라고 불리어졌다.
그는 우상 숭배에 몰두하고 있던 사람들 앞에 가서 우상을 파괴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이교 제사장의 공격으로 몸을 상하기도 하였다.
선교 여행 중에 하일로(Heilo)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오랜 가뭄으로 그 곳에는 물이 없었고 복음 사역 자들은 지쳤었다. 이때 윌리브로드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였다. 그 후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고 결국 그기에 샘물이 솟아올랐다.
위대한 윌리브로드의 50여년에 걸친 사역에 대한 자료가 역사상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선교 방법과 중요한 사건들을 알 수 없다.
그는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저지대 남부 지방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주민들을 회심시켰다.
다음은 윈프리드 보니페이스(Winfred Boniface)관하여 알아보자.
그는 윌리브로드보다 20여년이나 더 젊으며 680년 영국 크레디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3년간(719-722) 윌리브로드의 동역자이자 조수였으며 독일 복음 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그는 독일 국민들을 위해 최초로 본격적인 교회 조직을 마련했던 인물로서 독일인들의 초대 대주교였고, 또한 그가 이룩한 과업과 중요성으로 볼 때 아마도 사도 바울 이후 가장 뛰어난 선교사라고 까지 평가 할 수 있겠다.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엑세터에 있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아주 어린 나이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초대 교회 성인들의 생애를 자기 행동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나중에 누르스링 수도원에 가서 학업을 계속했는데 이곳에서 문법, 수사학, 문장력, 성경 주해력을 개발 시켰다. 그는 너무나도 뛰어난 생도였기에 곧 교사로서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교실에서 그의 생도들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는데 이 겸손한 마음이 그의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보니페이스는 처음 브리지안인들에게 선교사로 갔으나 실패하였다. 그것은 프리지아 왕 라브보드가 이교도 선조들이 지옥에 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천국에 가서 연락을 누리기 보다 차라리 지옥에 가서 선조들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함으로 선교의 실패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선교 사역이 불가능함을 알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독일에 선교사로 가서 사역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보니페이스는 그가 가기 전에 이미 있던 교회들을 조직화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그 교회들을 로마 교회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가이스마르(Gaismar)에 있던 주피터 신의 거대한 참나무를 찍어 넘김으로 자연숭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의 사역 결과는 튜링기아 전역과 헤세 지방을 로마와 연결시켰을 뿐 아니라, 동방으로는 삭소니 국경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주로 라인 강 동부와 다뉴브 강 북부 독일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보니페이스가 남긴 서신들을 읽어보면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어떻게 활동하다가 죽었는가 하는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를 통해 작가의 인간성까지도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전도에 힘썼으나 동시에 시간을 쪼개 자상하게 수녀들을 위로하였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농노들을 돌보았다. 그는 또한 계속 공부할 시간을 만들었으며, 왕들에게 훈계할 만큼 용기와 담력이 있었고, 또한 한 친구에게는 두 마리의 매를 보내 주는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노년에도 쉬지 않고 초기에 실패했던 프리지아에 가서 사역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다음은 엘리지우스(Eligius)에 관한 것이다.
엘리지우스는 플란더스 지방에서 복음을 저하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장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재물을 전쟁으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데 사용하였다. 엘리지우스는 주교가 되어 플란더스의 이교도들과 저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다음은 앙스가르(Ansgar)에 관한 것이다.
그는 북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을 거쳐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선교사로 덴마크로 갔다. 당시 덴마크의 헤롤드 왕은 축출되어 프랑크 왕 루이1세의 궁전에 얹혀 살게 되었다. 이때 헤롤드 왕은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
전세가 호전되어 헤롤드 왕이 덴마크로 돌아갈 때 기독교 복음 전파 자들을 몇 명 대동하기 원했으며 그 중에 한 사람이 앙스가르였다.
그는 자기의 돈으로 노예로 있던 몇 명의 덴마크 젊은이들을 사다가 그들의 동족 가운데서 사역 할 수 있도록 교육 시켰다. 그는 스웨덴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각 선교사들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유럽 초기의 선교사들의 특징은 그들의 사역이 통치권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전략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 개개인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에 기초한 용감, 천국의 소망에 기초를 둔 생명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신앙, 담대함이 있었다. 그들은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고 일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붸아 끝까지 일하였다.
3. 교황권의 전성기의 특징은 무엇인가?
'교황권의 전성기'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교황권의 전성기라고 생각되는 시기의 교황들에 관한 연구를 하면 되겠다. 여기서는 교황권의 전성기 시절에 대표할 만한 몇몇 교황과 그의 행적 그리고 신학을 알아보고자 한다.
교황은 교회의 머리로서 영적 권세를 대표하고 황제는 제국의 머리로서 세상의 권세를 대표한다. 이 둘간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님께서 황제와 교황에게 각각 상호 독립적인 사명을 주셨다는 것, 황제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 세속적인 일까지도 영적 권위에 복종하도록 정하셨다는 것 등이다.
1073년 힐데브란드(그레고리 7세)가 교황이 되어서 교회에 대한 교황의 절대 우위권을 확보하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였다. 이러한 싸움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서방 교회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1073년)부터 갈릭스투스 교황의 사망(1124년) 까지는 파란만장하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3세와 프레데릭 황제 사이에 20년간 불화가 있었다. 그러다가 베니스 총독이 중재자로 나서서 성마가의 성당에서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프레데릭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후 3차 십자군 원정 기간동안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황제가 죽음으로 교황권이 급격히 신장되었다.
영국의 헨리 2세의 치세기에 왕과 켄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벡케트(Thomas Backet)사이에 있었던 불화 사건도 교회의 권세를 나타내 보여준다. 왕의 신하들이 벡케트를 죽였을 때 국가는 벡케트를 순교자로 간주했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더욱 힘을 얻었고 국가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벨케트가 살해된지 50여년이 지난 후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영국 국왕 죤에게 승리하였다.
인노센트 3세는 죤 왕을 파문시키고 결국에는 죤 왕이 일년에 1,000마르크씩 바치는 봉신이 되었다.
인노센트는 종교회의의 개회 연설에서 주님께서 교회 및 세상에 대한 수장권도 주셨다고 했다.
동시에 인노센트 3세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의 교리를 주창하였다. 종교회의는 이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우상 숭배를 합법화 시켰다.
인노센트 3세에 이르러 교화의 권세와 영광은 극에 달하였다. 교회와 세상이 다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글레르보의 베르나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제노아, 밀란, 라임 주교로 임명받았으나 거절했다. 베르나르의 추종자들이 유명해지고 그 중 한 명이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말한 분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중세 교회는 성경 연구보다는 교리와 교회의 전통들을 맹종하였다. 면죄부 교리가 받아들여짐으로 잘못된 속죄 관이 유포되었다. 로마 교회는 연옥 교리를 가르침으로 구원 문제에 관하여도 오도했다. 툴루즈 회의의 결정으로 이단들을 재판했고 관여된 자들의 재산을 몰 수 함으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개혁의 시도'를 제재한 것이었다.
우리는 위에서 교황권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교황권의 전성기 시의 특징은 교황이 세상 권력까지 가졌다는 사실이다. 전무후무한 영적, 세속적 권력을 가졌고 그 권력으로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즉 섬기는 삶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물질을 숭상하고 세속 권력을 탐닉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고, 이와 연계해서 화체설, 면죄부, 연옥 교리, 종교재판 등을 통해 신학적으로 계속 성경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마디로 영적 암흑시대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영적 불씨는(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 존재했었다. 암흑시대와 영적 불씨는 앞으로 있을 종교개혁 시대를 예상케 해준다고 하겠다.
4.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의 신학적 주장과 특징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일반적으로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곽 교회'의 문에다 '면죄부'에 대한 반박의 95개 조항을 붙인 것으로 본다(p. 148)
그러면 종교개혁 전에는 아무 조짐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 선구자들로 우리는 죤 위클리프, 요한 후스, 사보나 롤라를 들 수 있겠다.
죤 위클리프
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출신으로서 명석한 두뇌, 굽히지 않는 용기, 그리고 달변의 재능을 가진 자였다.
위클리프는 영국의 왕이 교황에게 세를 바치기를 거부한 주장과 관련하여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그는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영국 교회의 돈을 모아 로마로 보내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 행위 그리고 종교적 진리를 왜곡하는 사실 등을 들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우상과 유품들을 숭배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였으며 면죄부 판매, 죽은 자를 위한 미사, 행진과 순례 등을 부정하였다. 그는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화체설을 배격하고 화채설을 믿는 로마 교황을 공격하였다.
위클리프의 개혁에 대하여 시드니 휴튼은 "그가 좀더 심사 숙고하고 인내를 보이는 가운데 일을 추진시켰더라면 교회 내부의 상태를 보다 더 개선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교 회의 거짓된 교훈을 일격에 타도하여 순수하고 변질되지 않는 복음을 재확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혁이란 단 시일 내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위클리프는 전도 단을 조직하여 전도하기도 하였다. 위클리프가 이루어 놓은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당시 기존 교회의 교리, 조직, 치리 등에 관한 영국의 죤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죤 후스 등이 발한 비판들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위클리프의 성경관에 대하여 알아보자.
위클리프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종교적 권위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경만이 교회와 국가를 통치하는 유일한 규범이라고 하였다.
그의 성경관에 대하여 윌리암 R. 케논은 '겸손과 기도 그리고 성령의 인도 아래 그 내용을 읽음으로써 얻어진 성경 지식이야말로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다. 난해한 구절들은 보다 확실하고 명료한 구절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성경 지식 없이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말씀의 연구와 설교는 어떠한 성례들보다도 중요하다. 성경은 미사나 금식이나 성자들에 대한 기도나 전통 기타 교황들의 칙령 없이 그 효력을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위클리프의 '교회관'은 어그스틴과 거의 같다.
위클리프의 '구원관'에 대해 케논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구원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성유물 숭배, 순례, 성자들을 향한 기도, 면죄부등 모든 교회의 자질구레한 제도와 습속들은 구원을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라고 했다.
위클리프는 "교황 제도"자체도 부정 비판하였다. 교회는 교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에 의해 다스려 졌음을 명백히 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도 부정, 비판하였다.
죤 후스
보헤미아인인 죤 후스(1373-1415)는 교황 죤 23세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팔자 이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후스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였다. 후스는 공식적으로 교회와 그 조직에 관한 위클리프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후스가 주장한 교리들은 '모라비아 형제 교회'가 탄생하게 했다. 후스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망하는 모든 이들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역사가 증명하는 데로 무오하지 않다'고 했다.
후스는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
죤 위클리프는 영국인, 죤 후스는 보헤미아인, 사보나롤라는 이태리 인이었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잘못된 교리에 대한 비판을 했지만 사보나롤라는 교리보다도 이태리 인들의 부도덕한 습관과 악한 생활을 공격하였다. 그는 성직자뿐 아니라 평신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상을 책망하였다. 1498년 5월 그는 화형 당했다.
종교개혁 선구자들은 비록 출신 국가는 다르지만 다 주님을 만난 자들이었다. 또 종교개혁 선구자들은 자기들 보다 연수가 앞선 인물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들이 쓴 저술들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래 문제 5번에서 설명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종교개혁 선구자들 이외에 종교개혁에 도움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그는 바로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에라스무스이다. 에라스무스는 '우신 예찬'을 통해 교회의 부패를 폭로했고 둘째 1516년에 헬라어 신약 성경 초판을 발행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자들이 필요로 하는 믿음의 능력과 경건을 소유하지 못했다.
5. 쯔빙글리, 칼빈, 루터 3인을 비교 설명하고 각 신학적 배경 주장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쯔빙글리는 스위스인(人), 칼빈은 프랑스인, 루트는 독일인이다. 이들은 각자 종교개혁의 중앙에 서 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쯔빙글리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북부 지역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주도하였다.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바젤에서 교육을 받고 비엔나 대학에서 공부하엿다.
그는 로마교 회의 가르침과 의식들과 성경 교훈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그는 초기 교부들의 저술들과 후스와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었다. 1506년에 사제가 되어 1519년 쮜리히에서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금식'에 대하여 솔직한 견해를 밝힘으로써 콘스탄스의 주교와 불화 하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금식'관습에 대한 반론을 펴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고 인내 할 것을 부탁하였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경의 많은 교리들에 대하여 일치하였으나 성찬등 일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일치시켰다.
스위스 형제들은 '개혁 교회'(The Reformed Church)라는 종교단체를 만들었다.
쯔빙글리는 또 용병제도의 죄악성을 직시하고 비판하였다.
8,000명의 무장한 카톨릭 군대들이 쮜리히를 공격했을 때 쯔빙글리파에서는 2,700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대항했고 이때 쯔빙글리는 군목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요한 칼빈
1509년 7월에 프랑스의 노용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파리 대학에서 잠시 고전을 공부하였고 후에 오를레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칼빈은 고대 로마 시대의 저술가인 세네카가 쓴 책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여 최초의 작품을 출판하였다. 이때 벌써 독일 개혁자들의 교리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들은 칼빈의 마음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칼빈은 책을 좋아했고 강직하고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칼빈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으며 결코 흥분이나 과장된 기분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감정보다는 지성에 순종하였다.
1535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고 해를 거듭 할 수록 증보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파렐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고 엄격한 권징을 실행하였다. 칼빈은 과부 이들레트 드뷔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제네바에서 사역하면서 칼빈은 1년에 500플로린을 받았는데 손님들을 대접하는데 적절한 것이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자유 사상가들에 의해 쫓겨갔다가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것은 1541년 9월이었다. 이것은 종교 개혁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이로써 그는 루터가 기초를 놓는 종교 개혁의 일을 더 공개적으로 광역화하는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칼빈의 저술을 통한 영향력이 서부 유럽 각지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칼빈은 설교하지 않을 때는 주석을 쓰고 주석도 쓰지 않을 때는 편지를 썼다. 54세에 칼빈은 숨을 거두었다.
루터
독일의 삭소니에 있는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학문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냈다. 어느 날 루터는 성경 한 권을 얻었다. 성경을 읽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루터는 수도승이 되고자 어그스틴파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다. 수도원에서 그는 평안을 찾고자 했다. 루터는 롬 4:5의 말씀을 통해 구원은 선행으로써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종교개혁이 기초적인 진리가 된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리고 여기서 루터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로마교황청의 부패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고 면죄부 판매, 직분의 매매 등을 보면서 분노했다.
루터는 면죄부의 죄악성을 간결하게 열거한 95개조의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었으며 그 기념일은 10월 31일이 되었다.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자로 루터를 정죄하고 그의 저술들을 불태우라는 로마의 교서를 발송하고 파문하였다.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였다. 루터는 필립 멜랑톤이라는 동역자와 함께 일하였다.
이제는 쯔빙글리, 루터, 칼빈의 신학에 대하여 살펴볼까 한다.
쯔빙글리는 1516년 아이지델른(Einsiedeln)에 있는 수도원 교회에 부임하였고 여기에서 순례자에게 부여되는 '속죄부'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쯔빙글리는 인간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서 마태복음을 주해,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교황의 령에 의해 사순절 기간동안에 고기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쯔빙글리는 이는 복음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외형적 교회 법을 비판하면서 구교와 실제적으로 단절되었다.
또 계시의 바른 이해와 전달은 성령님만이 필요한 것이지 교회, 교황, 종교회의가 정의하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으며 정당하지도 않다고 했다.
쯔빙글리는 교회 내에서 행해지던 각종 인위적 규칙들, 즉 교황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의무적인 금식, 순례, 기념으로서가 아니라 희생으로서의 미사, 성자들의 중보를 요청하는 기도들, 의무적인 금식, 순례, 수도 규칙, 신부들의 독신 강요, 파문의 오용, 면죄부 판매, 고행 및 연옥에 관한 교리, 사제 제도, 성상 숭배, 종교 내에서 국가의 역할 및 기타 구교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에 대해 반박했다.
이러한 주장을 쯔빙글리는 철저하게 성경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그 반대자들이 교회의 전통 교부들, 중세 스콜라 학자들, 종교회의의 훈령들, 교회법등 비 성경적 자료들에서 취한 것들이었다.
미사시 가지는 '성찬식'을 1215년 제 4차 레이터란 종교회의에서 '화체설'을 공식 인정했었다. 쯔빙글리는 이에 대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성찬식은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의 영적인 고통을 갖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루터와 의견을 같이하여 화체설을 반대하였다. 성찬식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념으로서 주님과 신자들간의 영적 교제를 갖는 의미로서, 방과 포도주를 양쪽 다 사용하여 거행되었다. 성체 축일에 행해지는 성상 숭배도 배격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한번으로 유효하다. 그래서 화체 및 제사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가 쯔빙글리의 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쯔빙글리는 다른 어떤 주요 개혁가들보다도 훨씬 극단적인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고 가르쳤다. 그는 영의 법과 율법, 혹은 육체의 법을 강력하게 대비 시켰다.
1529년 10월 루터와 쯔빙글리가 '헤세의 랜드 그래이브 필립'에서 대면하였다. 이 대면에서 이들의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났다.
쯔빙글리와 루터는 '성찬식'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쯔빙글리의 '성찬식'에 대한 견해는 '상징' '기념'및 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영적임재의 은혜가 있음을 이야기한 반면 루터는 '말씀이 예품에 임하여 이를 성찬으로 만든다'고 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성찬 속에 함께 하시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무소 부재 성뿐 아니라 성찬 예식 시 보여주는 약속에 근거한다'고 했다. 루터의 이러한 견해를 우리는 공제설이라고 부른다.
쯔빙글리와 루터는 성례 논쟁을 통해 서로간의 차이가 드러났으며 이로 인해 카톨릭의 박해에 능동적으로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점이 있다.
칼빈
칼빈은 루터와 의견을 같이하여 오직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식만을 인정하였고 이것은 상징적인 행위인 동시에 은혜의 수단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성찬에 함께 하시는데 이는 주님께의 진정한 교제이며 화체된 빵과 포도주의 제물도 아니며 단순히 상징적 기념도 아니다. 그는 카톨릭의 성례, 성직 체제를 비판하고 당시의 교직 계급 체계가 비 성경 적임을 공격하였다. 신약 교회의 설교자들 및 지도자들은 회중들의 동의하에 성직을 감당하였다고 했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서는 루터의 견해를 따랐다. 칼빈의 신학을 재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초적 전제들로부터 시작된 논리의 귀결 과정을 일관성 있게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가 관심의 초점이었고 칼빈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영광을 선포하는데 있다. 칼빈은 교회를 보다 동적인 측면에서 파악하였으니 단순한 기관이나 개개 신자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이들을 통하여 이들을 위하여 실현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로 보았다.
성어그스틴도, 쯔빙글리도, 칼빈은 이중 예정론자였다. 그러나 루터는 "주는 아무도 멸망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모두가 다 회개에 이르시기를 바라신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고양하고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에게 의지하도록 하는 논리적 해결을 꽤 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쯔빙글리, 루터, 칼빈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신학적 주장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들에 관한 글 특히 쯔빙글리와 루터와의 성례 논쟁 시 보여주는 이들의 태도를 통해 '논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진리를 전하거나 주장하는데 있어서 '논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점에서 실패하였다고 생각된다.
6. 제 6부 249-334페이지까지를 요약하시오.
1). 독일의 30년 전쟁(1618-1648)
1555년의 '아우그스부르크의 강화'가 독일에서의 종교적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 강화안은 로마 카톨릭교와 루터 교도들에게만 맡겨져 있었다. 이 강화 안에 칼빈주의 자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개신 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1618년에 두개의 군사 동맹이 결성되었다. 하나는 '칼빈주의자 연합'혹은 '복음주의 연합'과 로마 카톨릭의 '신성 동맹'이다.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드 2세는 열렬한 카톨릭 인이었고 보헤미아 국민의 90%가 개신교인 들이었다. 보헤미아 인들은 페르디난드의 대표자들을 창문을 통해 던져 버렸다. 이로 인해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백성의 3/4이 죽었고 1/4는 다른 나라에 노예로 달려갔으며 그 이후 보헤미아는 200년 동안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개신교도들이 독일에서 어려움을 겪던 중 스웨덴왕 구스타푸스아돌푸스에 의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마그데 부르그에서 황제의 군대가 대학살을 감행함으로써 개신교도들에게 단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구스타푸스와 독일의 개신교도들이 틸리(황제의 장군)의 군사들을 무찔렀다. 1648년 '베스트팔리아 강화'가 성립되어 칼빈 주의자들도 루터 교도나 로마 카톨릭과 같은 동일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으로 종교전쟁이 종식되었다.
이 30년 전쟁의 결과로 종교적 자유가 크게 신장되었다.
2). 엘리자베스 치세 시의 영국의 청교도 신앙.
청교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엘리자베스 치세기이다. 청교도 신앙은 영국 국교회 안에서 급속히 대단히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청교도들과 여왕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성경 연구 모임인 '예언 모임'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여왕은 개혁을 확산시키려는 의도로 파악하고 탄압하였다. 이런 탄압 하에서 청교도들은 장로교 적 교회 정치형태를 지지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치세 기간 중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교회가 좀더 개혁되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영국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위해 스페인 왕 필립이 침략했으나 바다를 건널 때 엘리자베스가 죽고 그 후임으로 제임스 1세가 왕이 되었고 이 때 성직자들이 '1,000명의 청원서'를 내어 '교황의 두드기'를 제거할 것을 요구했다. 교황의 두더기란 종교개혁 이후에도 남아 있던 로마교 회의 의식들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의 결산 중 하나는 왕이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제안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성경이 '흠정역'이다. 이 흠정역은 영어로 나온 영본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인정된다.
3). 초기 스튜어트 왕조 하의 영국의 청교도 신앙
캠브리지 시에서는 청교도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것은 월터경이 켐브리지에다 임마누엘 대학을 세웠기 때문이다. 윌리엄 퍼킨스, 리차드 십스, 토마스 구드윈 등이 크게 활약한 청교도 지도자들이다.
찰스 1세와 의회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마침내 양자간에 전쟁이 붙었다. 이 때 의회의 자도 자이자 청교도 신앙을 가진 죤 핌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스코틀란드와 회의를 가졌고 그 회의 결과 대.소요리 문답과 유명한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스코틀란드가 의회와 합세해서 찰스1세를 제거하게 되었다. 리차드 백스터는 '사도 시대이래 돌트회의와 웨스트민스트 회의보다 더 거룩한 회의는 없다'고 했다.
이 대.소요리 문답,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은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후기 스투어트 왕조 하의 영국의 청교도 신앙
스튜어트 왕조의 회복은 1660년에 이루어졌다. 신민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등극한 찰스 2세는 잠시 후 청교도 사역 자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통일령, 비밀집회법, 5 마일법등의 악법을 제정하여 청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죤번연이 양심의 문제로 고통 당했고 핍박받았다. 죤 번연의 '천로역정'은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찰스 2세의 통치 기간 중에 스코틀랜드의 계약파들은 무서운 박해를 받았다. 이 때 제임스 거쓰리, 제임스 레윅 등이 순교 당했다.
찰스 2세가 1685년에 죽자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2세는 카톨릭 교인이었다.
1688년 화란의 윌리엄이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 인해 제임스 2세는 망명하였고 '권리장전'을 선포함으로 교황 주의자는 영원히 영국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고 했다.
5). 17세기 북아메리카의 신앙(1)
16세기 후반에 북 아메리카에 기독교 신앙이 심어졌다. 1565년에 스페인 사람들이 플로리다에 정착하였고, 1583년에 최초로 북아메리카에 영국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롤리는 유언을 통하여 북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도록 재산을 기증하였다. 프랑스 인들이 세인트 로렌스 지역에 관심을 보였고, 화란과 스웨덴이 북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스웨덴은 곧 경쟁에서 밀렸다. 화란인들도 1665년-1667년간의 전쟁을 통해 영국에게 빼앗겼다.
아메리타의 영국 식민지들의 종교 형태가 모국의 종교적 분열 상에 일치하는 것을 살펴보면 흥미 있다.
1620년에 시작된 '필그림 파더스'에 의한 뉴잉글랜드 정착이 유명하다. 죤 스미스 목사를 주축으로 해서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 아메리카로 왔다. 그들은 그 이전에 영국이 아닌 이국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혹심한 가난, 스페인과의 전쟁에 관한 두려움, 자녀들에 대한 걱정, 복음을 널리 전하고 싶은 소원, 영국 왕에 대한 충성 등의 이유로 이국 생활(화란)을 청산하고 북 아메리카를 찾았다.
6). 17세기 북아메리카의 신앙(2)
1619년에 필그림들이 대서양을 건너기로 결정하고 1620년 8월에 사우댐프턴 항을 출발했다.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1월 중순에 북 아메리카에 도착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계속 청교도들이 모여들었고 마침내 1629년에는 북 아메리카를 관장하는 사람은 영국인이 아닌 북 아메리카에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1636년에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하바드 대학이 세워졌다.
죤 엘리오트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인디언들의 언어 중 하나를 습득하였고 성경 전체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였고 1644년에 캠브리지에서 출판되었다.
17세기 전반의 영국의 불안한 정세는 아메리카로의 종교적 이주를 부채질하였다. 제임스 1세가 청교도들을 박해함으로 청교도들이 북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17세기 후반에는 케이커 교도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북 아메리카에서 케이커 교도들은 급성장 하였다.
영국인들 외에도 독일, 화란,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도 이주해 왔다. 이렇게 하여 아메리카는 인종 전시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17세기는 서부 유럽의 개신교 교회들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판도의 확장 시기가 되었다.
7). 경건 주의자: 스패너, 프랑케, 진젠도르프.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영적 생활은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때 야콥 스패너와 그의 추종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경건 주의자'라고 한다. 스패너는 젊은이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695년에 할레 대학이 세워졌고 이곳이 경건 주의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신비주의가 아니었다. 겸손을 실천하고 여러 가지 유용한 일들을 실천하기에 힘썼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도 유명한 경건 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프랑케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것이다. 프랑케에게는 이러한 기관을 세울 만한 능력이나 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지원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 될 수 있었다.
죤 웨슬레와 죠지 휫필드는 프랑케의 모범을 얻어 고아들을 돌보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죤 후스의 추종자들인 모라비아 형제 단들이 박해를 피해 진센돌프에게 갔다. 그리하여 1727년 처음으로 '새로운 모라비안 교회'가 결성되었다. 진센돌프가 이 교회의 설교자였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최초의 선교사가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 섬으로 갔다. 모라비안 교회의 특징은 그 모든 회원들이 국내에서나 또는 해외에서 이러한 선교 사역에 헌신적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 열심은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에게 선교에 관한 열정을 안겨 주었다.
8). 18세기 북아메리카의 신앙.
여기에서 18세기의 교회 발전을 살펴본다. 북 아메리카에는 3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는 원주민(인디언), 흑인, 백인이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경우 교파로 보면 루터교, 칼빈주의자, 메노나이트파, 장로교파, 독립파..등등 많았었다.
인디언 사역 자들로는 죤 엘리오트, 그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브래이너드 등이 있는데 이들은 언어의 상이 성, 인디언들이 유목민인점등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흑인들을 위하여 사역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엘리아스노(Elias Neau)라는 프랑스 인이었다.
제임스 오글리토프(James Oglethorpe)는 종교적 박해를 받는 자들을 위해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말씀의 봉사자로 죤 웨슬레, 찰스 웨슬레, 죠지 휫필드 등이 있었다.
죠나단 에드워즈, 죠지 휫필드 등이 대각성 운동(1740-1741)과 관련이 있다.
9). 감리교와 웨슬레 형제(1)
감리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에 찬송가를 도입시킨 장본인들이다. 아이삭 와츠와 찰스 웨슬레의 공로로 인하여 찬송가가 불려졌다. 이것은 찰스 웨슬레가 7,000여편의 찬송 시를 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시편만 노래했었다.
감리교(Mehtodist)의 기원을 알아보자.
1729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몇몇 학생 중심으로 '신성화�'이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들은 매일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에게 '감리교도'(Mothodist-직역하면 '규율 주의자')였다. 이 말은 "짜여진 계획에 따라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0). 감리교와 웨슬레 형제(2)
웨슬레 형제가 회심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 이것이 감리교 운동에 크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인해 회심의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감리교도가 될 수 없었다. 중생, 성화, 용서, 칭의 등이 주요 교리였다.
웨슬레는 5개 국어에 대한 문법책을 저술하고, 성경 주석을 쓰고, 50여권 되는 총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웨슬레의 활동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일기'이다.
감리교회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전혀 분리될 의도가 없이 시작된 운동이었으나 주교들이나 성직자들로부터 적대적 대접을 받았다. 감리교회는 영국 국교회 내의 교회였다.
1795년 웨슬레가 세상을 떠나자 영국 국교회와 결별하게 되었다.
미국의 볼티모어는 미국 감리교회의 총 본거지이다.
감리교가 국가적으론 영국에서 혁명을 방지하는데 공헌함과 동시에 교회 적으로는 영국 국 교회 내에서 참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1), 감리교와 죠지 휫필드.
휫필드는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 휫필드는 미국의 13개 식민지를 다니며 놀라운 사역을 펼쳐 나갔다. 처음에는 웨슬레와 동역 하였으나 나중에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휫필드의 신학은 칼빈주의 적이었고 웨슬레는 알미니우스 적이었다. 휫필드는 야외 집회를 자주 인도하였다. 휫필드의 설교에는 회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승천하신 그리스도 등 복음의 본질과 전체를 선포하였다.
그는 1770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7. 19세기의 교회 부흥의 특징은 무엇인가?
영국, 북 아메리카의 형편을 설명하시오
19세기 교회 부흥의 특징은 한마디로 '선교'에 의한 부흥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상 종교개혁 자체도 위대한 선교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선교사들로는 인도로간 윌리암케리, 버마로 간 져드슨, 아프리카로 간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모파트, 요한 반 더 켐프 등이 있다. 또 식인종들이었던 태평양 섬 원주민들에게 죤 페이턴, 죤 게디 등이 선교사로 갔다. 또 중국으로는 윌리엄 챔머스 번즈, 로버트 모리슨, 허드슨 테일러 등이 있다.
19세기는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다고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20세기말에 사는 우리의 사명도 선교인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고 잠시 후 닥칠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사명은 선교라 할 수 있겠다.
영국의 형편
교회에 나가지 않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일학교를 최초로 개설하였다. 당시 가장 복음 적인 영국 국교회 단체 가운데는 소위 '클래팜파'가 있었다. 그의 샤프츠베리, 모리스, 킹슬리 등이 있다. 영국 국교회의 복음 적인 기운을 19세기 동안에 걸쳐 유능한 설교자들을 계속 배출해 내었다. 이들 중 라일(Ryle)이 대표적 인물이다.
19세기 초 1804년 '영국 및 해외 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창립된지 119년만에 삼억삼천육백만부의 성경이 판매되었다.
19세기는 영국 교회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였다. 연맹, 연합회와 같은 단체들이 교회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위하여 생겨났다.
'복음주의 연맹', '기독교 청년 연합회', '고아원'등이 생겨났다.. 19세기 동안 수많은 그리스 도인들이 갖가지 형태의 자선 사업에 참여하였다. 넓은 안목으로 보면 19세기는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다.
19세기 영국의 가장 훌륭한 설교자는 찰스 에이든 스펄젼이다. 스펄젼은 설교뿐 아니라 월간 잡지'칼과 흙손', 주석 등을 간행했다. 스펄젼은 교리 적으로는 칼빈주의 적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진화론', '고등 비평'이 교회를 좀먹었다. 진화론과 고등 비평이 초래한 한가지 결과는 '다운그레이드 논쟁'이었는데 이것은 스펄젼과 관계된 것이며 스펄젼 사망 후 그의 지지자들은 '성경 연맹을 결성했다'.
19세기에 '플리머 형제단', '구세군'이 생겨났으며 초기 형제단 가운데 죠지뮬러도 포함되어 있다.
19세기말에 '크리스찬 사이언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그리스도 형제단'등의 이단들이 출현했다.
북 아메리카
북 아메리카에 있어서 종교적 발전은 영국과 서 유럽의 교회들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교파들은 새로운 지역에로 꾸준한 확장과 발전을 보였다.
이때 인디안 원주민 사역도 있었다. 원주민 목사들이 그들의 언어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모든 교회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노예제도였다. 교회 내에서도 노예제도에 대한 대응 자세가 다양했다. 죠지 휫필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였고 죤 웨슬레는 반대하였다.(P. 372)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이단들이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말일 성도 교회(몰몬교)', '안식교'등이 있다.
19세기 미국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주일학교가 굳게 성장 하였다는 것이다. 주일학교는 이제 교회의 필수 적인 기관 중 하나가 되었다. 미국은 부흥사 찰스피니, 신학자 찰스핫지, 알렉산드 핫지,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를 배출해 냈다.
'교회사자료 > 2.초대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들 (0) | 2007.11.08 |
---|---|
3세기 교부 (0) | 2007.11.08 |
헬레니즘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형성 (0) | 2007.11.08 |
초대교회 신앙문서 (0) | 2007.07.22 |
초대교회사 (0) | 2007.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