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절 설교 모음

2007. 9. 23. 07:46목양자료/2.설교자료

의인의 가정(시 92:12-15)

 

석이라는 좋은 명절을 주셔서 우리 가족이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과 사람을 일컬어서 ‘의인’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뜻과 함께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 이라는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에 속한 사람들은 ‘의인다운 삶’을 사는 한,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을 받을 수 가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점을 강조 하신 말씀으로서 ‘의인’의 가정과 의인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럼 주신 본문 말씀을 보면서 의인 된 우리 들이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1.의인의 가정은 번성하고 발육하고 흥하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가르쳐 주신 말씀을 한 가지씩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먼저 ‘번성’ 할 것이란 말씀의 뜻은 ‘자손’이 번성 하게 해 주실 것을 약속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발육 할 것’이란 말씀의 뜻은 ‘재물이 늘어나게’ 해 주시겠다 것을 약속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흥한다.’ 는 말씀의 뜻은 ‘앞길이 형통’ 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약속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족 모두는 ‘의인답게 그 본분을 잘 지키고 살아서’ 여기 약속하신 귀한 복들을 풍성히 받고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2.의인은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게 하시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인 면에 있어서의 건강’을 복으로 주시겠다는 것을 약속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 의인으로 비유 된 종려나무는, 실제로 늙어서 고목이 되어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나무로서 생명을 마치는 그 순간 까지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험준한 산비탈이나 자갈밭에 심겨진다 할지라도 말라죽는 법이 없이 잘 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의인답게 사는 사람한데는 종려나무 같이 강하고, 든든하고, 또 늙어서 세상을 떠나는 그날 까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수 있게 하신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크고 귀한 복입니까? 모 조록 우리 가족 모두는 ‘의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끝까지 의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서 여기 약속하신 ‘건강의 복’을 풍성히 받고 사는 주인공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우리 가정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처럼 우리 가정은 ‘의인다운 삶을 살아서 약속해 주신 귀한 복들을 받고‘ 살 수 있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많이 생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추석설교 2.

추석
이스라엘 백성은 민족적 전통으로 3대 절기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초막절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소출을 수장한 후에
7일 동안 지킨 절기입니다. 우리는 추석을 초막절에 비교하여 고유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4계절을 만드시고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4계절을 주시어 섭리하시면서 그 안에서 살도록 하여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식주를 허락하셨던 것처
럼 우리나라에도 때를 따라 풍요로운 결실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영적인
결실도 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을 생각하며 청지기로서 충성할 뿐만 아니라 많은 영적 결실을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가 있는 추석(시편 50:23)

오늘 이 시간에는 "감사가 있는 추석",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추석은 우리나라 2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이틀 후면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입니다. 추석은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그 열매에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추석을 말하기를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추석은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그렇습니다. 추석은 수확을 많이 하는 겁니다. 또 수확을 한 후에 감사하는 겁니다. 또 감사한
후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추석이 수확이 없다면 쓸쓸하죠. 그런데 수확은 있는데, 감사가 없다면 또 마음이 메마르죠. 사회가
메마르죠. 또 우리가 감사는 하는데, 사랑이 없다면 이것도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진정한 추석은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없는 것에 더 불평을 합니다. 떨어진 과일 아깝죠. 그러나 아직 나무에 붙어있는
과일을 보고 감사 해야죠. 애써 농사지은 것이 태풍에 쓰러졌습니다. 참 아깝죠. 그러나 세울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가 많아서, 가진 것이 많아서 감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
라,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감사는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보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랬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랬습니다. 또 감사는 하나님의 복 받는 약속입니다.
{그 감사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를 잘 하라,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 감사는 하나님 제일 기뻐하시는 것,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할 것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개인으로 봐도, 가정으로 봐도,
사회로 봐도, 직장으로 봐도, 나라로 본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아요. 모두가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함으로 신앙을 회복하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여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감사가 회복되면, 신앙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문이 활짝 열
린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가족·친척·이웃에게 감사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가족, 친척, 친구에게 감사하자." 아멘 입니까? 그렇습니다.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 감사하자. 지난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가족의 귀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우리는 보았
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족, 친척, 이웃은 새의 날개와 같은 존재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새의 날개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울 수 있습니다. 새가 날아가지 않을 때는, 모이를 쪼아먹을 때는 새의 날개가 부담스러워요. 아주 거추장스러워요.
그러나 날아가야 할 때, 짐승이 와서 잡아먹으려고 할 때, 도망가려고 할 때는 날개가 없이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에 훨훨 날아갑니다. 공중을 나릅니다. 창공을 나릅니다. 다른 짐승이 아무리 좇아 와도 잡히지 않습니다. 지붕으로
날고, 산으로 날고, 나무 위로 날고, 다 나를 수 있습니다. 그 날개가 어떤 때는 거추장스럽지만, 그러나 필요한 때는 날개 때문
에 훨훨 날라 간다 그 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도, 이웃도, 친척도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이들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가족에게 감사하고, 친척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
들을 통해서 돕기도 하시며, 연단 시키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친척이, 이웃이, 나를 도와줄 때가 있고, 때로는 그 가
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을 통해서 내가 연단 받기도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
8:28).

인간적으로 보면 구약에 나오는 요셉은 그 형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찌 그 동생을
형 10명이 달려들어서 때렸습니다. 물 없는 우물에 빠지게 했습니다. 장사꾼들에게 팔아먹었습니다. 이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형들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그런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불과 나이 30세에 당시 세계 최고 강한 나라,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는 축복을 받았
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기 고향 땅, 가나안 땅이 가뭄이 들고 7년 동안 흉년이 들어서 먹을 수 없을 때,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자기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자기 형제들을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효도할 길을 얻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형제 우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될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19:19). "가족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친척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가슴 아플 일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이번 추석명절에 적당히 잡수세요. 배탈나지 마시고. 절대로 과속하지 마세요. 교통사고 나지 마세요. 났다 그러면 큰일나는
거예요. 왜? 병원에 가도 누가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치료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의료대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도 정말로 너도 나도 모두가 다 가족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또 가족에게 감사하고,
친척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런 일은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사와 약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와 약사는 서로서로 의사는 약사에게 감사하고, 약사는 의사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진찰은
의사가, 처방은 의사가 합니다. 약을 내주는 것은 약사가 합니다. 그러면, 서로서로 협력하면 이것이 좋은 거예요. 그러므로
의사는 약사에게 "참 고맙습니다." 약사는 의사에게 "참 감사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환자는 의사가, 약사가 있기 때문에,
병을 치료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의사나 약사에게 환자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야 돼요. 또 뒤집어 말하면 환자
가 없으면, 의사가 할 일이 뭐가 있으며, 약사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서로서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감사하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가족, 친척, 이웃을 향해서 어리석고 죽이는 말이 아니
라, 감사의 말을 하자, 그 말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이 아니라, 원망 불평하는 말이 아니라, 감사하는 말을 하자. 서로서
로 감사하자. 서로서로 감사하자. 그러므로 추석명절에 잃어버렸던 가족, 친척, 이웃끼리 감사 많이 하는 이런 명절이 되십시
다. 성경이 말을 합니다. 에베소서 5장 4절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그랬
습니다.

둘째,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

따라하시겠습니다.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하자."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하자고 말하면, '부모가 먼저 잘하고, 조상이 훌륭해야 고마워할 것 아닙니까? 부
모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조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찌 내가 감사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큰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 안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수지 안 맞으면 불평하고, 수지 맞으면 감사하고, 그게 아닌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또 그 뿐이 아닙니다. 내가 효를 행하지 아니하고,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이 내 탓이기보다는 부모 잘못 만나고, 조상 잘못 만나
서 그런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더더구나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현상유지하고 살기도
어려운 거예요. 현상유지도 안 하고, 퇴보하고 살 사람은 그렇게 사세요. 괜찮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수가 없어요. 오늘
보다 내일을 위해 삽니다. 지금은 없을지라도 내일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넘어졌을지라도 내일은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은
실패 만났다, 내일은 우리가 실패 당하지 아니하고, 성공의 자리로 옮겨져야 될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아도
내일은 존경받고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조상이 나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그랬으니까, 정말로 부모
에게 감사하고, 조상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삶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모도 감사를 받지 못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자녀들에게
교육을 바로 시켜주지 못한 책임. 효를 가르쳐주지 못한 책임. 어른 공경을 가르쳐주지 못한 책임. 성경적 효를 가르쳐주지 못
한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그뿐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훌륭한 유업과 업적을 자기 자손들에게 전수해주지 못하고, 알려주지 못한
것.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다 떠나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 그것 감사한 것 아닙니까? 부모님이
건강하신 것, 그것만 봐도 감사한 것 아닙니까? 나의 효를 받으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녀는 마땅히 감사해야 될 것 아닙니
까?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말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부모님께 효를 해드릴 기회가 있을 때, 감사해
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는 나를 피로 낳아주셨습니다. 눈물로 길러 주셨습니다. 땀흘려 교육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들어야
됩니다. 그런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에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자기를 피로 낳아주시고, 눈물로 길러
주시고, 땀 흘려 교육을 시켜준 그 부모님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 감사하더라도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유익이 오면 감사, 피해가 오면 불평, 원망, 시기. 그것만이 아니
라, 폭행. 그것만이 아니라, 살인.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
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행복하기 원하십니까?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고요, 평
화는 감사의 나무에서 피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평화는 감사의 나무에서 피는 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에 행복이 있고, 감사의
나무에 평화가 있다. 그러므로 감사 없이는 행복도 없고, 감사 없이는 평화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행복을 원하고,
평화를 원한다면, "감사, 감사"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그리고, 또 부모님은 자녀들을 보면서 "감동"이 있으면 돼요. 부모님은 자녀를 보면서 감동을 합니다. "이 놈이 벌써
키가 컸네. 벌써 서서 따로 따로 하네. 벌써 학교를 가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동하는 부모. 자식을 보고 감동하는 부모.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식이 컸는지, 학교를 가는지, 어떤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 딸이 몇 살인지도 생각해 봐야 안대. 이건
문제죠. 자기의 자식을 보고 시시때때로 감동하는 부모가 되어야 돼요. 자기 부모님을 보고 감사, 감사, 감사하는 자녀가 되었
을 때, 이런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가정이 다 그런 가정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국가에 감사

따라합시다. "국가에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국가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나라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나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있고,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고, 내 기업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가족, 친척, 이웃 그리고 부모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조국에 대한 감사가 없어요. 나라에 대한 감사가 없어요. 나라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이 적다 그 말인 것입니다.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해외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나라를 비판할지라도, 성도들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하고, 뿐만 아닙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그런 신자가 되어야 참다운 신자요, 참다운 국민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이 나라를 통치하
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보니까, 대한민국 사람이 되어서 대한민국 땅에 태어났습니다. 한국 사람에 의해서 한국 땅에 태어났습니다. 누가 그
렇게 했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이나 나를 이 땅에, 이 세상에, 이 우주에 태어나게 하실 때,
대한민국 사람을 통하여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해야 돼요. 왜요? 전쟁이 아닌 평화의 때에 태어났으니까.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
니처럼,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가난한 보릿고개 같은 어려울 때, 굶주릴 때, 태어나지 아니하고, 이 만큼이라도 먹고
있고 마실 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독재주의에 태어나지 아니
하고, 마음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 민주주의 나라에 태어난 것, 전도 받을 수 있으며, 전도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나라에서 산다는 것, 얼마나 얼마나 감사해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IMF를 극복하고, 이 만큼 회복되게 된 것도 감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땅에 전쟁이 없는 나라 만들자, 평화의 나라를 만들자, 전쟁 없이 통일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하고 노력하고
애쓰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격려해 주어야 돼요.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돼요. 그리고 감사하는 삶으로 살아
가야 할 것입니다.

넷째, 자연에 감사

따라합시다. "자연에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자연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연을 신격화해서 숭배하라, 그런 말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터전으
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존귀를 돌리면서, 우리
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삶의 터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연을 우리는 육성시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인들은 뜨거운 태양과 휘몰아치는 태풍을 견디어가면서 생산된 자연의 소산물과 아름다움을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은 과일 하나, 쌀 한 톨, 김 한 장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농부나 어부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들을 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사소한 풀 하나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창
조하신 귀중한 생명입니다. 심각한 환경오염에 직면해 있는 이 때에, 생명에 대한 귀중함을 가지고 자연과 그 소산물을 대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감사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해를 보고도 마음 속으로 감사해야 돼요. 달을 보고도 감사하고, 들을 보고도 감사하고, 마실 수 있는 공기가 깨끗
한 것도 감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것도 감사. 흙, 땅이 있는 것도 감사하고, 곡식이 자란 것도 감사.
이 자연을 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악하지 않습니다. 자연에 감사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살인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절대로 폭행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다섯째,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

따라 하시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감사의 결론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롯해서 가족, 친척, 이웃, 조상, 국가, 자연이 이 땅에 존
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니라}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
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의 지위, 자기의 환경, 자기의 명예, 자기의 성공, 자기의 재산만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서
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조건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환경이 바뀌면 감사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항상 감사하라"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감옥에 가도 감사, 매를 맞아도 감사, 핍박을 받아도 감사, 그저 사도 바울은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하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성도들에게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감사를 가르쳐 줄 수 있었
던 것은 무엇이냐? 그의 감사의 조건은 환경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만드시고, 환경을 지배하
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얼마나 범사에 감사한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그러므로 진실된 사도 바울의 감사의 조건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조건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아들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가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범사에 형통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로마
서 7장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랬습니다.

예수로 인해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찬양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 있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와 사도 바울과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박국서 3장 17절로 18절 말씀이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
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범사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의 구원을 맛보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이십니다. 시편 50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치의 질병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가난과 저주가 축복을 받아 부요할 수 있습니다. 없는 자가 있는 자가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이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 모두
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최대의 감사는 무엇일까요? 예배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 이것이 하나님께 향한 최대의 감사. 최대의 감사가 예배다,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감사는 또 무엇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주의 말씀을 우리가 늘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성취되도록 하는 것, 이것인 것입니다.

결 론

우리의 신앙 회복, 인간성 회복, 삶의 회복은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면, 신앙이
회복되고, 인간성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된다, 그 말입니다. 이는 힘으로 안 됩니다. 능으로 안 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 성령
으로만 가능한 것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여서 성령세례 받
고, 성령충만 받아서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우리들.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부모님, 가족, 친척, 이웃, 더 나아가서 민족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구원
받게 하는 데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그래서 어느 해 보다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명절, 더 즐겁고 더 기쁘
고,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해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도 좋고, 하나님도 좋으신 추석이 되게 합시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사랑하시는 주님,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명절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수확하고, 또 감사하고, 또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추수의 법칙(갈라디아서 6:7-10)

도시에 살던 어떤 사람이 희뿌연 하늘과 끊임없는 자동차 소음에 진력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팔고 시골에 아름다운 집이
딸린 농장을 샀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농촌의 상쾌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며 "그래! 이것이 사는 거야!" 하면서 만족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그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십리 밖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 농부였습니다. "안녕하
십니까? 이사 왔다는 소식을 막 듣고 인사차 들렀습니다" 하면서 어깨에서 다 낡아빠진 부대자루 하나를 "쿵" 하고 내려놓습니
다. "마땅히 드릴 것도 없고 해서..." 그리고는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 그는 떠나갔습니다.

그가 떠난 후, 이 도시 사람이 선물로 준 부대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깡마른 옥수수와 밀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매일 아름다
운 포장지에 싼 선물만 받아보던 이 도시인은 "별 이상한 선물도 다 있군!" 하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니 창고 구석
에 처박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닭과 가축에게 그것을 사료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가을날, 이 도시인은 이웃 농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는 생전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온 밭에는 누런 밀이 자라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어요. 마치
황금빛 비단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옆에는 어른 키만큼 자란 옥수수 줄기에, 팔뚝만한 옥수수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
습니다. 너무나 부러웠어요.

그래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의 옆에 가서 "아! 정말 좋네요. 너무 좋습니다. 저도 이런 농장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
농장에는 지금 잡초밖에 없거든요" 그 말을 듣고 일하던 농부가 일어서며 의아한 눈빛으로 그 도시인을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니, 잡초라니요? 제가 지난번에 드렸던 그 씨앗은 다 어떻게 하고요?" "어, 씨앗이라고요? 그것이 씨였습니까? 사료인줄
알고 다 모이로 주고 말았는데..."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러자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 그 농부가 그 도시 사람을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더니, 급기야 파안대소했습니다. 너무나 우습다
는 듯이. "아니, 그게 사료인줄 알고 다 모이로 줬단 말입니까? 내가 농사지은 것 가운데 가장 좋은 씨앗만을 뽑아서 선물로
드린 건데요. 도시에서 이사오셨다고 해서 잘 심으라고요" 잠시 후 겸연쩍어 하며 돌아서는 그에게 농부는 얘기합니다. "선생
님, 농부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거두기 위해서는 심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거두기 위해서는 심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인생의 교훈입니다. 도시에 살든, 농촌에 살든, 어떤 환경에서
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교훈은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경제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젊어서 투
자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었을 때,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습니다. 교육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 후에 원하는 직업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대각성 전도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
지런히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대각성 전도 날,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이 자리에 참석해야만 합니다.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거두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추수의 법칙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
씀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추수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인생의 법칙에 대한 몇 가지를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추수의 법칙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먼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1. 심은 대로 거둔다

7절을 보세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모든 추수는 씨앗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을 얼마나 심었느냐에 따라 추수가 결정되는 겁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서
무언가를 거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수박을 심은 곳에서 수박을 거두고, 땅콩을 심은 곳에서 땅콩을 거두고, 감자를 심은 밭에
서 감자를 추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은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만일, 정직과 깨끗함을 심는다면, 나중에 아름다운 인격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심은 것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수년동안 그들
은 교만과 부정직과 성냄과 무절제의 씨를 마음대로 뿌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쓰디쓴 열매를 거두기 시작할 때, 그들
은 무척이나 당황해 합니다. 동업이 깨지고 고소장이 날아들고, 친구간의 관계가 깨지고 결혼은 파국을 맞고, 가정이 흔들리고
자녀가 탈선하게 되면, 그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자신이 심은 것을 전혀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의 충고자는 욥기 4장 7~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8절을 보세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왜 썩어진 것을 거둡니까? 왜 파탄된 가정을 거둡니까? 왜 비뚤어진 자녀를 거둡니까? 그 이유를 하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
썩어질 것을 심었기 때문이라고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썩어진 것을 심고 영생을 거두려고 하면, 여러
분을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의 시대에 산다고 이 법칙이 변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심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믿으면 구원받지만, 구원받고 난 후에도 이 하나님의 법칙은 변치 않는 겁니다. 우리가 심는 것에 따라 거두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원리는 긍정적인 면에도 적용됩니다.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로서, 이 원리를 가정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어릴 적에, 적은 믿음을 부모가 아이에게 뿌립니
다. 주일학교를 보내고 찬송을 가르치고, 기도의 모본을 보이고 예배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예배당에 데리고 나가, 하나님
이 누구신지 가르칩니다. 그들이 훗날 자라서 믿음의 재목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가 이 세상에 있었습니까? 그는 학문적으로 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참으로 탁월
한 지도자였어요.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가 존경하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애굽 왕의 후계자가 되어서 얻게 될
모든 권력과 재물을 다 뿌리치고 자기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했던 그 위대함! 이런 모세가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요? 성경은, 그의 부모가 모세의 마음에 믿음을 심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높게
들어 쓰실 것을 발견하고' 이 말씀을 '아름다운 아이임을 발견하고'로 표현했어요. 하나님의 계획을 본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여자들은 아이를 잘 낳고 건강합니다. 그래서
바로가 걱정이 되어 법령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하라!" 모든 부모가 왕의
명령이 무서워서, 자기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고 다 하숫가에 던질 때,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히브리
서 기자는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아이를 숨겨서 키웁니다. 백일이 되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더 이상 감추어
키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제가 이 아이를 당신의 계획대로 키우기 원합니다" 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어요. 바로에게 공주가 하나 있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고민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녀가 목욕
하는 강가를 알고, 누이를 시켜 모세를 광주리에 넣어 갈대 숲 근처에 남겨둡니다. 모세가 웁니다. 그러자, 하녀가 모세를 발견
하고 공주에게 데려갔습니다. 그 아이는 공주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요.

그때 그것을 지켜본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뛰어가서, "우리 동네에 젖먹이는 아주머니를 아는데 제가 데려올까요?" 하고 말합
니다. "데려 오라!"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를 데려다 줍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오늘날의 하버드 대학에
해당하는 곳에 아들을 유학 보냈던 겁니다. 자신까지 공짜로 먹고살면서요. 낮에는 모든 애굽의 좋은 학문을 다 익히고, 밤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성경을 얘기해 줍니다. 그 마음 밭에 믿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철학, 그리고 천국의 가치관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이 세상에 탄생했어요.

디모데를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얘기하며,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믿
음을 얘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라고 말합니다. 디모데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
라는 겁니다. 디모데의 어머니가 그의 마음 밭에 어려서부터 믿음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 생활할 때, 우리 부모님을 잠시 원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학 생활할 때 가장 부러운 사람이, 본국에서 한 달에
2000불씩 딱딱 붙여 주어서 일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릅니다. 저는 한 푼도 못 받았거든요.
저는 부모로부터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유산을 많이 받은 사람을 보면 은근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
나, 제가 철이 든 지금에 와서 그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왜요? 저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부모님으로부터 귀한 유산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물려받은 것이 없지만, 아주 아름답고 귀한 믿음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늘 저를 안으시고 찬송을 부르셔서,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찬송가의 대부분을 다
암기했어요. 제가 잠들 때, 눈을 뜨고 일어날 때, 어머니는 항상 기도하셨어요. 제 앞에서 누구를 욕하시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내심이 많으셨고 깨끗하게 사셨습니다. 어머님은 제 마음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
입니다. 저는 자녀에게 돈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부부의 기도제목은, 광진이와 호진이에게 어머니께서 나에
게 심으신, 이 믿음의 씨앗을 심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소원의 모든 것입니다.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오늘 잘 심어야 합니다. 오늘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서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
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으로 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깨끗함을 심으십니까? 정직함을 심고 계신가요? 자녀의 마
음에 믿음의 가치관을 심고 있습니까? 입으로는 믿음을 심는다고 하면서, 돈이 최고라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을, 자녀의 마음
에 뿌리고 계시지는 않는가요?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만, 생활 속에서 쾌락과 게으름과 잘못됨을 자녀의 마음
에 뿌리고 계시지는 않는가요?
하나님의 법칙 첫 번째는, 당신이 오늘 뿌린 그것을 반드시 훗날 거둘 것입니다. 심은 그대로 거둡니다.

2. 심은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열매는 씨앗보다 수십, 수백 배 더 많이 거두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 자루의 씨앗이 곡간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모두 적용됩니다. 악을 뿌리면, 단순히 악을 거두는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은
악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작은 악의 씨앗을 뿌립니다. 부하들이 모두 전장(戰場)에 나갔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부하들을 위해
기도하며 애를 써야 마땅했습니다. 아니, 같이 전쟁터에 나가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날도 늦잠을 잔 것 같습니다. 다 싸움터에 나가고 혼자 왕궁에 있자니 따분했습니다. 잠은 잘 대로 자고 초저녁에 기지개를
켜며 어슬렁어슬렁 왕궁을 배회했어요. 그 때 목욕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때 눈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그
때 방으로 뛰어들어가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자리에서 죄악의 씨앗을 심기 시작합니다. 그 여인을 자세히 들여
다보고 있다가 부하를 시켜 데려오게 합니다. 그 여인을 왜 데리고 오라 했는지 아는 지혜로운 신하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여
인의 신분을 밝혀줍니다. "왕이여! 이 여인은 왕이 목숨보다 아끼는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건드리
면 안 된다는 이 신하의 충고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그 날 밤 동침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습니다. 고민하던 다윗은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불려들
여, 잔뜩 칭찬을 하고 포상금을 내리며, 집에 가서 아내와 동침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야는, "내 동료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나 혼자서 어떻게 아내를 품고 잘 수 있습니까?"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당황한 다윗은 그를 전쟁터에 보내
암살시킵니다. 살인을 저질러요. 불행과 죄악의 씨앗을 그의 가정에 심은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의 집안에는 이날 이후 칼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왕이기 때문에 아내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후궁이 있었어요. 한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압논'입니다. 또 다른 아내에게
서 '다말'이라는 딸을 낳았어요. 그러니까 이 압논과 다말은 이복형제지간입니다. 그런데 압논이 다말을 강간합니다. 이것을
알게 된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화가 나서, 그의 동생 압논을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왕위
를 찬탈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를 쫓아 버립니다. 다윗은 궁에서 쫓겨나 피해 다니고 있는데, 압살롬은 백성이 다 보
는 앞에서 아버지가 데리고 살았던 첩들과 같이 대낮에 동침합니다. "이제는 내가 왕이다!"라고 하면서요.

다윗은 그 날부터 죽는 날까지 그의 집안에서 칼이 떠나지 아니함을 경험하며 살았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다윗은 적은 악을
심고 많은 악을 거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죄악을 심으면 하나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악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게 심고, 심은 것보다 더 많이 거두는 이 하나님의 법칙은 긍정적인 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것이 하나
님의 은혜이겠지요.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사람이 그것을 심
어 자라서 나무가 되면, 그곳에 많은 새들이 와서 거하느니라' 그 당시 가장 작은 씨앗은 겨자씨였습니다. 이 작은 겨자씨를
심으면 그것이 어느 날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겁니다. 나무가 되면 새들이 와서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쉼을 얻는다
고 얘기합니다. 이 말은, 성령의 음성에 따라 작은 선행을 행하고, 자녀의 마음 밭에 작은 것을 심으면, 훗날 그 작은 것을 그대
로 거두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몇 백 배가 되는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녀의
마음 밭에 심은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나서,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내가 오늘 행한 이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나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되는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무엇으로 심겠습니까? 당신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것보다 몇 갑절 많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선(善)을 심으십시오. 과거는 잊어버리시고 오늘부터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심었건 하나님께 맡기시고,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는 성령으로 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실 때, 수 백 배, 수 천
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추수의 법칙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또한 심은 것보다 많이 거둡니다. 마지막 세 번째, 심은 다음
오랜 시간 후에 거둡니다.

3. 심은 다음 오랜 시간 후에 거둔다
9절을 보세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는 착한 일을 행한 후 금방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금방 효과가 나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가장이 생전 안 하다
가 아이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가정 예배드리자" 고 해서 일주일하고 자녀가 달라지기를 기대하는데, 아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컴퓨터 여전히 하고, TV 여전히 다 봅니다. 일주일 가정 예배드리고 "이놈아!"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마술 같은 씨앗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씨앗도 하룻밤 사이에 자라나는 법은 없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씨앗
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결과가 금방 나타나면 왜 낙심하겠습니까? 심어놓고 결
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니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권면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농부들은 이 원리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봄에 심고 다른 계절에 거둡니다. 봄에 심고 봄에 거두려는 농부는
없습니다. 봄에 심고 다른 계절에 거두기 때문에 그 계절 사이에 여름이 존재합니다. 가뭄과 홍수가 찾아옵니다. 수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농부들은 씨앗을 심어놓고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인내가 없는 농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내가 없는 사람은 결
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믿음의 열매는 이 땅보다 저 세상에서 거두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는 이 세상에서 다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심으면, 이 땅에서 복과 건강, 물질이 찾아온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이 땅에서 거둘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심는 씨앗의
많은 부분들은, 저 천국의 다른 계절에서 거둔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은 이 땅에서 열매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
요. 그래서 우리가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와 쟁기에서 우리의 손을 뗄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뭐하냐? 손
에 굳은살 박히게 일한다고 뭐가 나오느냐?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뭐하냐? 이제는 됐다. 이제는 주일날 가족과 소풍도 가고,
해수욕도 가고, 골프도 치러 가거라" 고 속삭입니다. 이제는 너의 인생을 보상받아야 하고, 이제는 즐기라고요. 그러면서 사탄
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이 땅에 무언가를 심지 못하게 합니다. 썩어진 것을 위해 심도록 유혹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밭을 보십시오. 때로 우리가 심는 씨앗은 싹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요. 사탄이 속삭이면 우리는 유혹에 빠집
니다. "내가 이렇게 심어서 뭐하는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정직하게 사업을 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저 사람은 속이며 사업하는데, 나보다 복을 받지 않는가? 물질을 많이 가지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런 시험에 빠집
니다. 그러나 오늘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쓴 이 모든 것은 반드시 거둘 날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면 천국에 들어가는 날, 두 팔 가득 열매를 안고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해 주십니다.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중에 토마스 카알라일 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평생 소원은 프랑스 혁명사를 쓰는 것이었어요. 그는
전쟁의 참상을 보고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잔혹한가를, 그리고 우리가 왜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하는가를 알리기 위해
서 역사책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펜을 잡고 10년에 걸쳐 프랑스 혁명사를 씁니다. 드디어 10년이 다 된 그 어느
날, 그는 그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출판하기 전에,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에게 그 원고를 검토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존 스튜어트가 카알라일의 원고를 살펴봅니다. 페이지마다 꼼꼼히 살핍니다. 교정은 쉬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존 스튜어트가 원고를 책상 앞에 잔뜩 늘어놓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하녀가 와서 보니, 책상 위에 고치고
수정한 원고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어요. "주인님이 종이를 이렇게 흩어놨구나" 하면서 그 원고들을 모아서 벽난로에 집어넣
고 불을 때어 버렸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카알라일은 낙담합니다. 약 넉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절망 속에 빠집니다. 모든
의욕이 다 사라져 버렸어요. 10년에 걸쳐 쓴 작품인데,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린 겁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어요. 창밖에 보이는 이웃집은 새 집을 공사하고 있었
어요. 비가 약간 내리는데 벽돌공이 왔어요. 줄을 놓고 그 줄에 맞추어서 벽돌을 쌓아 갑니다. 조금 쌓다가 뭐가 안 맞는지 쌓은
것을 확 밀어 버립니다. 다 무너뜨리고 또 다시 쌓습니다. 또 무너뜨리고 다시 쌓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카알라일이 자신의 무
릎을 쳤습니다. '그래, 한 채의 집을 짓기 위해서도 저렇게 몇 번씩 작업을 하는데, 세계의 역사를 바꾸기 위한 일을 한번에
이루려고 하다니!' 그는 용기를 내어 그 날부터 다시 프랑스 혁명사를 썼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첫 번째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불후의 명작을 우리의 손에 남겨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따라 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참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 믿음으로 살고 그
것을 내 삶으로 보이는 일, 직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업하는 일, 세상의 수많은 이성의 유혹들을 물리치는 일, 이 모든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썩을 것을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한 삶을 매일 심어나가면, 언젠가 반드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삶을 믿음으로 심읍시다. 그렇게 살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어떤 반대
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십시오. 부정과 속임수, 정직과 부정직 사이에서, 어떤 반대가 오더라도 언제나 올바른 결정
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어떤 유혹이 찾아와도 올바른 행동을 택하십시오. 올바르게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일은 결코
저지르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도자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
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신입니다.

대각성 전도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700명의 태신자를 적어 내었어요. 오늘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태
신자 등록 카드를 적어 내셔야 합니다. 이 얘기는 교인 가운데 아직도 태신자를 적어 내지 않은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등록
교인에 비하면 반밖에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간 더 시간을 드립니다. 성령을 따라
심으십시오. 왜 태신자가 없는가? 그 이유는 여러분이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고 하
나님이 약속하셨어요. 심은 대로 거두는 겁니다.

며칠 전, 호산나 교회는 대각성 전도 집회를 다 마쳤습니다. 저는 한 장로님의 얘기를 듣고 감동 받았어요. 그 장로님이 대각성
전도 집회 때 80명을 데리고 왔어요. 이 장로님은 전도대회 몇 달 전부터 태신자들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대각성
전도 집회가 있는 날, 교회 옆에 있는 뷔페식당에 예약을 해놓고 사람들을 초대했어요. 식사를 한 다음, "우리 가십시다" 했더
니, 80명 중에 40명은 먹기만 하고 사라졌어요. 놀라운 것은 돌아간 40명 가운데, 밥만 먹고 간 것이 마음에 찔려서 그 다음
날 나온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태신자들에게 밥만 사 준 것이 아니고, 집회 마치고 돌아갈 때 선물도 푸짐하게 안겨 주었어
요. 230만원의 예산을 들였다고 합니다.

어떤 교인은 대각성 전도를 위해 1년 전부터 적금을 붓는 교인이 있답니다. 한 달에 만 원, 이만 원씩 모아놓는 것입니다. 그리
고 그 돈을 가지고 전도하는 겁니다. 전도가 안 된다고요? 한 사람당 50만원만 뿌려 보세요. 하루 정도 교회에 안 나와 주겠습
니까? 전도 대상자들이 교회에 왜 안 옵니까? 뿌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추수의 법칙에 대해 들었습니다. 남은 인생 하나님의 법칙대로 성령에 따라 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민족적 감사절(시편 21:1-12)

추석은 수 천년간 지켜온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이 즐거운 날에 무덤을 찾아가 죽은 조상에게 절하며 감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도리어 이 날은 우리를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구하여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민족적으로 감사 드려야 할 절
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1. 현재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에 처할 때에 기도하기는 하나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기도하며 응답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
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루드 야트 키플링이라는 유명한 시인은 영국 여왕 취임 기념 헌시에서, 여왕 찬가가 아니
라, 옛날부터 계시는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일로 그는 결국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러나 그의 찬양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음력 8월 명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감사의 절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왜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여 살아 있는 자기 식구들에 대하여 부탁합니까? 죽은 자와 산 자는
대화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귀신이 산 자와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
다.

2. 과거의 승리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 주심을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승리한 것, 내가 성취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전능으로 승리함을 고백하며 기도 응답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구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셨기에(2절), 공로 없는 자에게 베푸신 복인 아름다운 복을 주셨기에(3절) 영원한 장수
까지(4절) 주셨기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영생을 얻게 되며, 이것은 곧 메시아의 왕국, 천국을 의미합니다. 우리
가 얻은 영광, 존귀, 위엄, 이 모든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극한 복(6절)을 주셨기에 어찌 감사치 않겠습니까?

3. 미래의 복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완전 승리에 대해 감사합니다. 완전 승리는 계속적인 승리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원수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친구를 원수로 알고 대적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곧 우리의 원수입니다.
아벨에게는 가인이, 바울에게는 유대인이, 존 낙스(John Knox)에게는 영국의 메리(Mary) 여왕이 원수였습니다. 원수는 가
까이 있는 법인데, 우리의 원수는 바로 자기 자신에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되지 않는 것 그것이 원수입니다. 신령한 싸움에는
휴전이 없습니다. 반승은 완승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이기기까지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니,
왕이 싸우기 전에 하나님이 대신하여 싸우심을 암시합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오해, 천대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
다. 미래는 승리뿐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주의 능력으로 높임 받으소서라고 다윗은 기도합니다. 조상 또는 사람의 힘으로 이런 결실을 이뤄낸 것이 아니라, 주의 능력으
로 이룬 것입니다. 햇곡이 들판에 가득하게 된 것은 죽은 조상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때를 따라 햇빛과 비를 주셨
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추석은 민족적으로 감사의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안식하는 삶(창세기 2:1-3)

요즘에 사람들은 옛날보다 많이 살기가 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피곤하다는 말이라든지, 지쳤다고 하는 얘기
를 많이 합니다. 그런 이유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삶이 좀 자연스럽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서
그렇지 않을까? 예를 든다면 잠자는 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요즘엔 대부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그러니 몸이 견딜 수가 있겠습니다. 생리학적으로 얘기를 하면 밤 10시서부터 3시
사이에 숙면을 해야 가장 건강하다고 얘기하고 밤에 자야 키가 자란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성장호르몬이 나오지를 않는다고 그럽니다. 해가 뜸과 동시에 성장 호르몬은 나오지 않아서 잠을 밤에 많이
자야 키가 자란다. 이런 얘기도 합니다. 근데 요즘 우리의 삶이 이런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습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비닐 하우스 재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여름에 먹을 걸 겨울에도 먹고 겨울에 먹을 걸 여름에도
먹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딸기에 언제 나나요?” 그랬더니 "사철에 납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더래요.
옛날에는 보통 딸기가 어느 철에 납니까? 5월 달에 납니다. 요즘에는 뭐 시도 때도 없이 포도가 나오죠. 포도는 주로 가을에
나오는데 시품이 있어서 여름에도 포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삶이 뒤죽박죽이고 철이 없는 것은 다 철 따
라 먹지를 않기 때문에 철이 없어졌다고 이런 우스운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 옛날에는 흔히 말해서 잘 살지 못했고 가난했
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옛 어른들은 삶의 절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식음유절”
먹고 마시는데 절도가 있었다. "기고유상”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했다. 그리고 "불망작로” 쓸 데 없는 일에 힘을 소비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 옛 어른들께서 살아가셨던 삶의 모습이고 그래서 건강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술
을 꿀물 마시듯 마신다고 그럽니다. 삶에 절제가 없습니다. 마음 내키는 데로 힘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에 피폐해 집
니다. 마음이 피폐해집니다. 거기에 고단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곤함이 있게 됐습니다. 결국 자연을 무시했다고 하는 것은
천륜을 무시한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삶의 무시하게 되는 그래서 우리의 삶에 진정한 안식이
없는, 피곤함, 지침, 짜증 이런 것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안식을 말씀하고 있습니
다. 우리가 안식이라고 하는 말을 쓸 때 꼭 안식일이라든지, 우리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안식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안식이라고
하는 말을 쓰면 그 말속에는 무언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있습니다. 무언가 깊은 분위기를 갖게 하는 그런 느낌이 이 말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 안식처, 영원한 안식, 이런 말을 합니다. 또 안식이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될 때 그 말속에는 이 안식이
나하고 가까이 있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는 느낌보다는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안식이 내게 오고 있고, 그리고
어디엔가를 가면은 내가 좀 안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좀 아득하다고 하는 느낌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정한 안식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을 이런 느낌 속에서 시사해 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속에서 주어진 복과 거룩함을 갖는 삶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하는 삶이라고 얘기할 때 그 안식
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서는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 만물이 다 이룬 후에 지으시던 일이 마치니 창조하시며 만드시
던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그러니깐 우리들이 말하는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의 역사와 그 창조한 것이 완성된 것과 깊
은 연관을 가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연주를 많이 하는 분입니다. 밤에 집에 들어왔습니
다. 이제는 쉬어야 할 시간인데, 쉬지 않고 계속해서 피아노를 혼자 연주합니다. 그래서 "아 이제 피곤하실텐데, 좀 쉬시죠.”
"아니요 나는 이게 쉬는 것입니다.” 자신이 연주하고 연주한 것에 만족하고 그리고 또 그 연주한 것을 위해서 다시 피아노를
치면서 "나는 이것이 쉬는 것입니다.” 우리가 쉰다고 할 때 안식이라고 할 때 이제는 일을 다 해서 지치고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서, 어찌 할 수 없어서 드러눕는 것은 쉬는 게 아닙니다. 병든 것이죠. 근데 사람들은 병들어 누워있으면서 이제 그 때서야 겨우
뭐라고 말하냐 하면 "하나님이, 하도 안 쉬니까는 이렇게라도 쉬게 하시나 보다고,”

여러분 그러다가 아주 쉬는 수가 있으니깐 조심해야 합니다. 쉰다고 하는 것이 내가 약하고 지쳐서 병들어서 쓰러져서 그리고
그 다음에서야 "아이고, 좀 쉬어야 되겠구나.”여러분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제가 목사로서 이렇게 말씀드리면 오해
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의 선배목사님이 저 강남에 아주 큰 교회 목사님이 목회 한 10년쯤 계속 하시다가 그만 무력
증에 빠져서 쉬게 되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주 유명하신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일년동안
을 하와이에 가서 쉬었습니다. 그리고도 몸이 회복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쉴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죽으면 죽으리
라. 죽더라도 이제는 교회에 가서 강단에서 죽어야지.” 그리고 오셔서 다시 또 목회를 하시면서 힘을 얻으셔 가지고 지금 또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시는데, 그분이 후배들을 모아논 가운데서 후배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강의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약
간 표현이 좋지 않으니깐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사람이 안식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병신년을 지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병신년을 지내게 되면, 아내는 등신년을 지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남편이 제대로
쉬지 못해서 병들면 남편이 병들었고, 그 다음에 남편이 병들면 아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아내가
제대로 쉬지 못해서 병들면 남편이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러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갑갑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와 그 창조를 마친 것, 특별히 해야 할 일을 다하고 그 일이 선하고 그것이 목적에 맞아서
만족해서 이제는 됐다. 거기에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할 일 없이 드러누워서 쉬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 하루 놀고 하루 쉽니다.”

여러분 이건 축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고 그러면 이제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하루 놀고
하루 쉬는 것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해야 되는데 쉬고 있다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이 무엇이냐, 지옥은 일이 없는 곳이다.” 지옥에 가면 일이 없대요. 천당에는 일이 많대요. 사람이
일이 있어야 힘이 나고 그리고 그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이 인간 될 때에 안식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거기 안식이 있습니다. 인간이 서로 섬기면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교제와 봉사와 사랑 이것은
모두 안식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안식 속에는 노동의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을 바라보는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우리에게 의미화
해 주셨는가?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어떻케 해서 안식을 우리들에게 구별해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 주셨다. 안식일을 복 주셨다. 하나님께서 안식하는데, 그 안식에 복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모든 생애의 바퀴 속에서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복을
빌면서 살아라. 이것은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우리는 상호간에 인격의 존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사이
에는 존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우리도 존중히 여겨야 됩니다. 이것은 얽어 매임에서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착취나 노예적인 삶이 금지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기적인 삶이 포기되어야 거기 복이 있고 안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
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공동체 내에서 서로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려면 모든
관계에서 복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안식이 있는 것, 안식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서로에게 복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복된데 저 사람은 복되지 못하면 이것은 안식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좋은데 나는 행복
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니가 나를 무시했으니, 언젠가는 눈물 날 적이 있겠지.”
눈물만 나면 괜찮죠. "피눈물 날 때가 있으리라.”

여러분 그러면은 행복해 지겠습니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 안식은 복이 될 때 서로에게 복이 될 때 안식
이 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 안식의 복을 가르치는 데 7일, 7년, 49년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일 한 주에 하루를
안식해라. 그래도 우리에게 복이 있다. 쉬라. 일반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7년에는 쉬라. 땅을
쉬게 하라.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니라 땅까지 쉬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땅까지 쉬게 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
다. 땅도 쉬게 하라. 짐승들도 쉬게 하라. 다 쉬게 하라. 이 7년이 일곱 번 지나가서 49년이 되면, 그 다음엔 노예들을 돌려보
내라. 어떤 이유에서 왔던지 네 집에 종으로 있거나 자유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다 풀어서 해방시켜라. 그 다음에 남의 땅을
산 것도 돌려보내라.

여러분, 요즘에 무슨 일이 있냐면 벌써 북한에 대한 부동산 투기가 일고 있데요. 고향을 떠난 지 50년이 됐는데도, 옛날에 내
고향 땅 문서 가지고 가서 땅 찾겠다는 것이죠. 그런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아야 되겠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땅을 산
지 50년이 되면 50년이 지나면, 주인에게 돌려보내라. 이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서로 서로에게 복되게 하라. 이것
이야말로, 사회의 정의요, 분배의 균등이요, 그리고 복지의 보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평생 자기 부를
갖고 그것도 모자라서 계계승승이 이어 갈려고 하는 욕심을 부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부나, 우리의
소유를 무시하고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의 문제가 아니고,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복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해방과 자유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끼
리 관계된 모든 것을 복 되게 하는데, 그것을 나누는데 안식하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했다. 안식은 거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안
식하는 삶을 함께 누리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들
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한다고 할 때 그냥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
은 분명하게 세상의 가치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친
히 먼저 지키신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복 받게 하는데, 쓰일 수 있는 유용성이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
다. 그래서 구별된 것입니다. 이 안식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조심성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무심
결에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충실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 주의력을 갖는 것이며, 그 은혜에 대한 보유하는 힘을 갖는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
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주의력이 무엇일까요? 내 삶을 정성을 다해서 정성을 드리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
렇게나 멋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안식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을 하나님
이 부어주신 그 복을 내가 지키는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 번 안식의 차원을 달리 합시다. 안식의 차원을 달리 합시다. 그냥 먹고 즐기고 놀아버리는 소비문화의
그러한 형식이 아니라, 사람끼리 서로 서로 복 주는 복의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구별된 삶을 사
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좀 큰 교회인데, 아마 그래도 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잘 산다고 생각할
까요. 어떤 사람이 이제 자동차를 타고 내렸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에서 내리신 분은 교회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분을 모시고 온 기사는 저 쪽에 있는 기사 대기실에 가서 다른 기사들하고 어울려 놉니다. 안에서는 주인께서 예배를 드리는
데 밖에서는 이 사람들끼리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놉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고스톱을 치면서 이렇게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그래 너는 천당 가라, 나는 지옥 간다.” 사장이 안 들으니깐. 예. 여러분 나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면서 은혜 받는다
고 하면서 자기 기사 일주일에 한 번 놀게도 못하면 되겠습니까? 이건 한 부분적인 얘기에 불과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지만 서로에게 복되고 그리고 거룩하고 깨끗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
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예배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가치도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단계 더 넘어서서. 안식한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는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 최종적인 길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힐난했습니다. 그런데 주
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일만 안 하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착각
하고 있는데 여기에다가 사람들을 묶어놓고 있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보라. 안식일에 환자가 있는데, 고쳐야 되겠냐
안 고쳐야 되겠냐. 선한 일을 해야 되겠냐, 안 해야 되겠냐. 양이 웅덩이에 빠졌는데, 건져내야 되겠느냐, 안 건져내야 되겠느
냐. 그러면 생명을 구해야 되겠느냐, 구하지 않아야 되겠느냐.” 주님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이 안식하는 일은 사
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가 착각하지 마십시다. 내가 안식을 지킨다고 그래서,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이 안식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거룩
함을 위해서 우리가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하는 이 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바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생
명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안식의 뜻, 사랑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영생의
안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모든 사람에게 이 생명의 안식을 주기 위해서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것
의 복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바로 이 안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안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쉬지 못하는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 이 안식의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천국 생활의 한 부분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지옥의 한 부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주일이 지났는데도 교회에 마당에 와서
또 서성이고, 또 그 다음날도 교회 마당에 와서 서성이고 그러시더래요. 할머니께서 별로 하실 일이 없으시니깐 이렇게 교회
마당에 와서 서성이는가보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이렇게 교회 마당에서 서성이고 계세요?"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래요. "목사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안식하는게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하루를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래
서 오늘도 또 안식하겠지. 오늘도 또 안식하면 좋겠지 그러고 제가 왔다가 갑니다. 목사님 이 안식하는 일은 영원하겠죠?" 목사
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그럽니다. "그럼요. 태양이 기울고, 달이 져도, 태양도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태양이 없고, 달이 없고, 돈이 없고 ,명예가 없고 이 세상이 더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런 거 없는 것이
필요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40대에 간암이 걸린 한 중년 되시는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습니다. 한 병원에서
는 3개월, 또 한 병원에서는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친구의 권유를 받아서 첨 나왔습니다. 창피해서
저 구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옆에 친구가 머리를 숙이니깐 자기도 따라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가 기도를 알았겠습니
까? 뭘 알았겠습니까? 그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그럽니다. "그래 이렇게 될라고 일주일에 하루
도 쉬지 않았나. 이 꼴 될라고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했나?" 그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후회했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안식 결코 이 안식이 우리를 억울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손해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미국이 처음에 개척할 때 처음에 사람들은 동부로 왔습니다. 잘 아시는데로 보스톤에 프리모스 항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부로
왔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들리기를 서부에 가면 살기도 좋고 기후도 좋고 서부에 가면 금광도 많다고 아 그래서 사람들이 서부
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서부에 처음 도착해 가지고 금광을 발견할 사람은 사업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입니
다. 왜 그러냐? 나중에 알아봤더니 보통 사람들은 빨리 가서 금광 먼저 찾으려고 그냥 서부로, 서부로 쉬지도 않고 달려가다가
말도 쓰러지고 사람도 쓰러지고 지져 쓰러졌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가다가 일주일 되면 하루 쉬고, 또 가다가 일주일 되면
하루 쉬고, 또 쉬고 이렇게 가다보니깐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달려가서 금광도 발견하고 그랬답니다. 주일날 하루 쉰다
고 돈 못 번다고 여러분, 내가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분명히 앞서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롱펠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일은 일주일간을 묶는 황금고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뜻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은 내 생애의 황금고리를 가지고 거기에 모든 것들을 엮어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참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고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구정과 추석에 큰 명절을 당하죠. 이 명절이 정말 안식을 누리는 명절인지, 아니면 고통 당하는 명절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이 기회에 정말 안식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고, 하나님의 사람으
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되어지고 이런 놀라운 은혜가 충만해져서 오히려 복을 나누고 복을 키우고 복에 근원으로
사는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에 주인 되시는 주님의 은혜, 안식일을 예비하신 주님의 사랑,
우리가 안식할 영원한 장소를 마련해 주신, 그 주님의 준비, 그리고 안식을 주시는 주님의 긍휼, 이것이 넘친다면 기쁨도 넘칩
니다. 평강도 넘칩니다. 자유도 넘치고 해방도 넘치게 됩니다. 오늘 바로 이 마음으로 이 축복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
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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