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920년대의 미국교회와 신학

2007. 8. 20. 00:30교회사자료/1.기독교회사

1920년대의 미국교회와 신학  

<사진설명: 뉴욕 하반에 이르는 허드슨 강변에 있는 엘리스 섬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지난 1세기 동안 유럽에서 건너오는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불꽃을 들고 있다. 이 상은 미국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독립 1백 주년을 맞아 프랑스의 조작가들이 만들어 미국에 보내와 미국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자유 가 미국의 건국 정신임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여신상은 오늘도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20세기에 들어와서 세계 교회가 보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교회 일치운동 또는 교회 연합운동이 활발해진 일이다. 이러한 운동을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이라 한다. 사실 이 운동은 어떤 특수한 운동을 가리키기보다는 교조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지키면서도 교회의 일치를 향해 모든 기지와 정력을 동원하는 모든 영역의 운동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이미 16세기에 시작되었으나 19세기에 초교파적인 여러 조직이 만들어지고 20세기에 이르러 기구적인 교회 재일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떨어져 나간 교파들이 본래 교회로 되돌아오는 것이 교회일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개신교와 동방정교회가 이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맡고 나섰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기원에 있어서 개신교 안에서 나타난 운동에 동방교회가 참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시작된 것은 선교 분야에서였다. 왜냐하면 선교지역에서는 각 교파의 정당성 같은 것으로 피차 경쟁을 벌일 형편이 못 되었고 다만 서로 협조하면서 사업을 추진할 도리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세계적 차원에서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협력의 방안을 두고 모인 것이 1854년 뉴욕과 런던에서였고, 1910년 제 8차로 에딘버러에서 모였는데 이 모임을 세계 선교회의(World Missionary Conference)라 불렀다. 미국인 선교사 모트(J.R. Mott, 1865-1955년)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세계선교회의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선교제국의 단체 대표들만 아니라 피선교 여러 나라의 대표들까지 함께 참석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회의는 그 결과의 계속적인 보존을 위해 연속위원회를 두어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틀을 마련한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여러 피선교국에 국가기독교협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를 조직하도록 결정된 것도 이 모임에서였다. 이로써 선교활동에 있어서 토착교회의 참여와 발언권이 책임과 함께 강화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1928년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선교협의회에는 피선교나라 교회 대표들이 모든 회원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선교분야에서 시작된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활동의 영역을 청년사업과 기독교 교육, 사회 봉사와 노동, 신앙과 생활로 넓혀가게 되었으며 마침내 교리나 교파를 넘어서 전혀 다른 교파가 합쳐서 한 교회가 되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가장 좋은 예가 1925년의 카나다 연합교회의 등장이다. 카나다에 있는 모든 교파들이 합쳐서 카나다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가 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19세기에 이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과학의 발달과 노동자들의 증가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거세가고 있었다. 지적인 면에서 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역사의 진전은 기독교와 성서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가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으로는 세계적 규모의 도시화와 산업화 경향은 종교생활에서 벗어나는 소시민들과 노동자들을 무수히 배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종래의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자유 신학의 영향으로 객관적 진리가 주관적 경험 또는 감정으로 떨어졌다는 비판이 그 내용이었다. 자유주의적 개신 교회의 사상은 독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F.D.E. Schleiermacher, 1768-1834년)가 근대 과학의 도전을 받고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주장하고 나선 데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는 이상주의 철학의 형태로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한 헤겔(G.W.F. Hegel, 1770-1831년)의 생각을 거부한 알브레히트 리츨(Albercht Ritschl, 1822-89년)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쉬라이어마허가 종교에 있어서 감정을 중시한 데 반해 리츨은 지적 요소와 의지를 중요시하였다. 그의 신약 연구로 형성된 기독교의 도덕적 영향을 강조하는 리츨 학파에 의해 1870년부터 1918년까지 세계 개신교회의 주도적인 신학 사조를 이끌어갔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의 강렬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영국의 초기 옥스퍼드 운동 회원들과 복음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서의 무오설을 주장해온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뒤에 와서는 근본주의자들로 불리게 되었다. 과학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현대주의(Modernism)가 크게 발흥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전통 신앙을 보전하려는 근본주의자와 복음주의자 조직에서는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12권으로 된 작은 책자인 [진리의 증거로서의 근본(The Fundamentals : a Testimony)]을 출판해 배포하였다. 이 책자는 성서의 교훈을 그대로 수호하려고 쓴 저술이었다.

이 책에 제시된 근본주의의 5대 교리는
첫째, 모든 성서 말씀을 그대로 신앙의 근본으로 삼을 것.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고수.
셋째, 예수의 십자가 상의 죽음은 대속의 사역임.
넷째, 예수의 육체적 부활,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등이었다.

한편 이들 개신교 보수주의자들 이외에 자유주의 신학계 안에서도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신정통주의(Neo Orthodoxy)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년)와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1889-1966년)에 의해 제창되었다. 성서의 참된 주권을 주장하는 이들의 유럽 신정통주의는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년)에 의해 미국 신학계에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사상과 신학의 소용돌이치는 20세기 초에 낙관주의와 경제적 풍요에 힘입어 미국의 주류 개신교 교단들 - 개혁교파, 루터란파, 성공회파, 회중파, 감리파, 침례파 -은 자유주의 신학과 과학적인 사회문화에 매우 관용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를 비롯해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선교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개신교의 좌파에 속하는 성결교단과 오순절 교파가 급속히 성장되었다. 이들 작은 교파들은 미국 주류 교파에 잠재되어있는 현대주의에 대항하는 숨은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대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미국 신학계의 동향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 이 대립은 성서 연구방법을 둘러싼 논쟁과 공립학교에서 과학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대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과 대립에는 미국 장로교의 신학자인 찰스 브리그스(Charles A. Briggs)와 윌리엄 J. 브라이언(William J. Bryan)이 무대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로교 목사이자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브리그스는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관한 연구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이 칼빈이나 웨스트민스터와 무관한 로마가톨릭 교회의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의 신학이라고 밝힌 것이 화근이 되어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 많았던 당시 뉴욕 장로교 총회에서 교수직과 목사직을 파면당하게 되었다.

그 뒤 1910년 미국 장로교 총회는 목사 후보로 안수를 받으려면 다섯 가지 근본적인 교리를 선언해야 한다는 것을 채택했는데 곤 (1) 성서의 무오성 (2)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성서의 기적의 확신이었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의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이 그의 신성으로 그리고 성서의 기적의 확신 대신 그리스도의 재림이 포함되기도 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의 고등 비평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배격하고 나섰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찰스 호지(Charles Hodge)는 1874년에 쓴 <무엇이 다윈주의인가?>(What is Darwinism?)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진화론은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사회복음운동은 자유주의 신학과 관련된다고 보았으며 이 운동과 제 1차 세계대전은 진화론과 관련된 사건으로 보았다. 왈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h)는 종교적 도덕이야말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유일한 일이라고 본데 반해서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바른 신앙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1919년 근본주의 전천년왕국설 주창자들은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자 협회(the 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를 결성하고 성서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전천년왕국 재림이 중심적인 교리라고 주장하면서 진화론과 현대주의야말로 종교와 사회에 대한 공통적인 위협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장로교의 장로로서 우드로우 윌슨 정부의 국무부 장관을 지낸 윌리암 J. 브라이언은 고등비평과 진화론 교육을 반대하고 나선 근본주의에 영향을 받아 다윈의 적자생존교육이 독일의 군국주의를 촉진시켰다고 믿고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두 가지 가치를 위해 진화론을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에 이어 1923년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교수인 그레샴 매첸(J. Gresham Machen)은 자유주의를 비교육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1924년에 이르러 미국 장로교 목회자 20%가 전년에 이 교단에서 재확인한 5가지 기본교리는 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다짐한 사실을 넘어서는 이론이라는 내용을 담은 "오번 선언"(Auburn Affermation)에 서명하게 되었다. 결국 이 것은 미국 장로교 안에 세 정치적 그룹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포괄적 교회를 믿는 신학적 자유주의자들과 5가지 기본교리를 신봉하는 배타적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자이지만 평화와 교회 일치 그리고 선교를 위해 포괄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최대 그룹이 그것이다.

근본주의자 집단의 패배는 1925년 테네시 주 데이톤 법원에서 이미 주의회에서 통과되고 주지사의 서명을 받은 공립학교 진화론교육 금지법의 위헌성을 다루면서 명백해졌다. 이 재판에서 근본주의자 브라이언이 검사 측에 서서 이기기는 했지만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강변으로 주장했던 그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대다수 크리스천들의 핀잔을 사고 말았다. 그 결과 미국 장로교 총회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재조직안을 승인함으로써 배타적이었던 매첸과 다른 세 교수들이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따로 세우게 됨으로써 근본주의자들은 미국 장로교계에서 소수파로 밀려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계관

본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이어 미국 대륙을 개척한 미국인들은 영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일하다가 하나님의 선택하신 땅인 신대륙에 와 하나님의 통치를 건설하려는 신앙으로 살았던 퓨리탄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지니고 성서의 권위를 받아들이며 이러한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신대륙의 청교도들은 영국의 지배와 영국 교회의 관할에서 분리되어 신대륙을 하나님에게서 선택하신 백성인 그들에게 주신 언약의 땅으로 여겨서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의 공동체를 세우도록 허락하신 것으로 믿었다.
1720년대에서 1740년대 사이의 대각성 운동은 영국의 청교도주의를 끝장내고 미국의 복음주의적 개신교주의를 일으켜 국교(國敎)가 아닌 교파 중심으로 평신도들의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미국혁명의 기반을 넓혔다. 이 같은 신앙의 부흥운동으로 개인의 생활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초창기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노예로 들여온 흑인들과 여성들에게는 이러한 청교도들의 세계관이 공유되지 않았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에의 의존에서 인간 이성(理性)의 신뢰로 전환하면서 국가는 천부적 기구가 아니라 상호이익을 위한 인간집단의 사회적 계약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 또한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영역을 넘어 초대 교회와 성서의 원자료에 근거해 성서의 내용을 재건하고 분석하게 되었다. 미국의 크리스천들 역시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들의 청교도주의가 계몽주의에 용해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의 청교도들의 세계관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도덕률에 모든 인간이 일치하도록 사회를 선하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도덕주의와 종말론적 신앙에 바탕을 두고 성령의 역사로 인간 문화를 기독교화함으로써 이 세계를 그리스도가 재림할 만큼 발전시킬 수 있다는 후천년왕국사상이 첨가되었다.

또한 초기 미국 대학에서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현실주의(Scottish Realism)를 받아들였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인간의 5관(五管)을 통해 얻는 정보와 지식에 의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 토마스 레이드(Thomas Reid)는 5관이 사물의 기본적 실재를 마음에 가져옴으로써 상식, 곧 영감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스코틀랜드의 상식 철학(Common Sense Philosophy)이 만인이 평등하다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민주주의를 낳은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미국인들의 신앙과 세계관에 관한 합의가 계속되다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붕괴되었다. 그 결과 한쪽에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 세력이 대두되고 다른 한쪽에는 극단적인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들을 적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두 세력 사이에서 대다수 미국인들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지키면서 문화적 태도와 가치관을 그들의 신앙에 조화시키게 되었다. 예컨대 이들은 진화론을 유효한 과학이론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성서의 창조론을 지질학이 아닌 신학으로 다룬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복음주의 입장의 교조적 기본 사상을 유지하면서 문화적 제한에 전적으로 얽매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중용주의자 또는 복음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남북전쟁 이후 1930년대까지 미국 주류교단의 다수 세력이 되었다.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지키면서 문화, 정치, 사회적으로는 극단주의를 배격하는 온건하고 포용적인 입장에서 융통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교회의 지도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출처 : 행복 충전소(大名*大明*大命)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