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을 이기는 비결(박순오 목사 / 막4:35-41)

2007. 8. 1. 21:23참고자료/4,예화자료

풍랑을 이기는 비결(박순오 목사 / 막4:35-41)
오직 예수!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잔잔케 하신 놀라운 이적의 현장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작고 조용한 호수이지만, 때로는 광풍이 몰아치는 곳입니다.
본문의 사건 속에서 우리는 세가지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특히 제자들이 풍랑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풍랑을 이기는 비결’을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바다의 두가지 면에 대처해야 함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갈릴리 바다는 사실 바다가 아니고 작은 호수입니다. 그런데 호수면은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약 200m정도 낮습니다. 호수 주위는 산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따라서 가끔씩 무서운 돌풍이 불기도 합니다. 호수의 어부들은 그러므로 항상 돌풍에 대비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 인생살이와도 같습니다. 평소 조용하고 편리한 삶을 살다가도, 일단 삶의 균형이 깨어지면 무섭게 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닙니까!
바다가 좋을 때 삶의 터전이 되기는 하지만, 일단 바다가 한번 어려워져 버리면 그 바다는 삶의 터전이 아니고 죽음의 곳, 흉흉한 곳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돌풍에 대처한다는 것은 인생 풍랑에 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8장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24절)라고 했습니다. 여기 ‘놀’(세이스모스)은 큰 지진에 의해 소동이 일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냥 바다 표면이 바람에 의해 일렁이는 정도가 아니고, 저 바다 밑바닥에서부터 땅이 움직여서 물이 위로 끓어 올라온다는 표현입니다. 마치 몇 년 전 태평양 전역을 강타한 쓰나미를 연상케 합니다.
큰 광풍입니다. 거대한 회리바람입니다. 적어도 시속 120km나 되는 엄청난 돌풍입니다. 작은 배에 타고 가던 제자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큰 놀입니다.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작은 파도도 많지만, 인생 생활을 밑바닥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엄청난 풍랑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놀’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의 6.25 동란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죽을 병에 걸리거나, 큰 교통사고, 사업의 실패 등등 우리 앞에 언제 무슨 ‘놀’이 밀려올지 알 수 없습니다.
이번 아프카니스탄 인질사태 또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피랍된 우리의 믿음의 젊은이들은 무사귀환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인생 노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인생의 위기는 언제 어느 때 찾아올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성도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죄로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과 수하 졸개들이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으로 대비해야 합니다. 미리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의례 우리 앞에 풍랑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밤에 갈릴리 호수를 건너자고 하신 분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35절,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주님이 친히 계획을 세우셨고, 주님이 친히 그 배에 타셨습니다. 그럼에도 매서운 광풍은 사정없이 불어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비록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잘 살고 있다하더라도 인생의 풍랑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 가지 세상과 다른 것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간다면 어떤 어려움이 온다할지라도 결코 좌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러므로 항상 인생 풍랑을 대비하는 믿음을 키우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함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놀라운 장면입니다. 큰 광풍을 맞아 배는 흔들리고 있고, 물이 배에 가득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데,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선미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장면 직전에 예수께서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우리 주님은 온종일 일하시고도 머리두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흔들리는 배 속에서 겨우 고물에 머리를 두시고 깊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주님 안에 평안이 충만함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주님의 모습은 인생 풍랑 속에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제자들은 바람과 물결에 혼비백산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시고, 육신이 말할 수 없이 피곤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음날의 사역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평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풍랑을 이기는 비결은 평안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외적인 조건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돈에서 오는 평안, 지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건강이나 친구들에게서 찾는 평안입니다.
이런 것들은 밖에서 주고 밖에서 빼앗아 가버리는 것들입니다. 돈이나 건강, 친구들은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성령을 통한 평안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주시는 내적인 평안입니다. 밖의 조건이나 사정과는 관계없는 평안입니다.
모든 조건에서 나올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안의 근원이 됩니다.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안의 근원이신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헤롯에 의해 잡혀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군사 네명씩 네 패에 맡겨두고 죄수를 감시했다고 했습니다. 손발은 착고에 채워졌고, 감시병들은 겹겹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다음날 그는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절대절명의 환경 속에서도 베드로는 깊이 잠들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아이 앞에서 쩔쩔매며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맹세하며 부인하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착고에 채인 채 깊이 잠들 수 있는 베드로입니다.
저기는 예수님 없는 공포입니다. 여기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평안입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지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겨우 잠이 깨어났을 정도로 깊은 잠에 들어 있는 거룩한 평안입니다.

천하의 영웅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됐습니다.
“지난 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예수 그리스도의 집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5세기 탕자같이 방황했던 어거스틴도 주님 품에 안긴 후에야 참된 평안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시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거센 풍랑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평안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내 마음에 확실히 모셔야 합니다.
어려움이 올 때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랑을 이기는 성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풍랑 속에서 주님을 깨워야 함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우리는 인생 바다의 두 가지 면을 보았고, 고물에 주무시는 예수님에게서 평안의 근원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제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어둠 속에서 풍랑과 더불어 싸우며 노를 젓던 제자들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고물에서 편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는 것은 겸손히 주님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인생 풍랑을 극복하려면 자신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 누구를 깨울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어부 출신들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목수 출신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자존심과 자신들의 경험들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매어달렸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겸손히 간청했습니다.
인생의 풍랑을 이기는 비결은 주님께 겸손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온통 불신의 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배가 가라 앉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소리 쳤습니다.
“누구 기도 할 줄 아는 사람 없나?”
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제가 기도할 줄 압니다.”
“좋아 그렇다면 기도를 해 주게.” 하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구명조끼를 입어라.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여러분, 구명조끼를 입고 서둘 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 무서운 광풍이 몰아쳐 오게 되면, 이들 또한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평안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관할하시는 권위자 이십니다.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주님은 바람과 풍랑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귀신을 향해서(1:25, 9:25), 열병에 대해서(눅 4:39), 그리고 각색 병든 자들의 질병을 꾸짖어 제압하셨습니다. 완전한 통제권이 주님께 있습니다.
이교도들은 풍랑이나 귀신을 향해 희생제사를 드리며 달래거나 반대로 겁을 주지만, 주님은 권위가 있는 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신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삼키고 죽이려 하는 바다를 굴복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극복하는 비결은 능력의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초가집을 부수어야 합니다. 거룩한 건설을 위해서는 때로 거룩한 파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예비하신 큰 것을 세우기 위해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은 것들을 무너뜨릴 때가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에 큰 장로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은 제임스 케네디라는 분인데, 이 분의 원래 직업은 댄스 교습소 강사였습니다. 교습소가 한창 번창하던 중에 갑자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교습소를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께 맞은 다음 가고 싶지 않던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완전히 변화 받고 헌신하기 시작하여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댄스 강사가 바로 ‘전도폭발’이라는 세계적인 전도교재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왜 그의 교습소가 망했을까? 이유는 한 가지,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시겠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길에 가시떨기를 놓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더 큰 것을 이루시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거룩한 파괴와 방해가 있음을 명심합시다. 삶에 시험이 닥칠 때마다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붙들고 견디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감추인 권위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자의 권위입니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도가 이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천하고 무식한 부류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딤전 6:15).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 세상 임금인 마귀도 우리가 대적하기만 하면 우리 앞에서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우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이길 수 있습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인생의 풍랑을 이기는 비결은 바로 이 예수님께 겸손히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믿음으로 간청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바다는 잔잔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해일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장애물들 앞에서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절망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인생 풍랑을 이길 것입니까? 우리와 한 배를 타고가시는 예수님,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평안의 근원이신 주님을 깨우십시오. 믿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성도는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주님께는 간단한 문제일 뿐입니다.

평안의 근원이신 주님께 겸손히 간구하여, 풍랑을 이기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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