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음악사 *

2007. 7. 23. 00:29목양자료/2.설교자료

* 교회음악사 * 
                                                                       
음악사를 이해하기 위한 제언 :
교회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양식을 들라면  첫 번째가 서양음악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와 16세기 종교 개혁자인 루터에 의해 만들어진 코랄(Choral)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전례성가입니다. 이 성가는 한 선율로 된 단선율의 형태이며,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음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성가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유대교 성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며, 거기에 동방 여러 교회의 성가와 유럽 각 지방의 성가 등이 혼합되어 그레고리오 성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일·집대성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의 공헌을 기려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루터의 코랄은 교회 음악사에 있어서 매우 큰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코랄 형태의 음악은 루터가 코랄을 만들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코랄의 기원은 성경의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성서의 150편의 시편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찬가, 즉 라틴어의 힘누스(hymnus)에서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찬송가(hymn)입니다. 루터는 이 찬송가를 독일의 프로테스탄티즘에 입각하여 새로운 찬송가인 코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자국어로 만든 찬송가(독일 코랄)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관을 가지고 만든 찬송가는 몇 가지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첫 번째 변화가 찬송가 가사를 자국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성가는 라틴어로 되어있어 그 내용을 모르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 부르게 하여 모든 사람이 가사를 음미하며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의 변화는 부르기 쉬운 선율로 곡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루터는 곡을 새로이 창작하거나 전래의 가톨릭 성가곡, 종교민요 등 대체로 부르기 쉽고 선율적인 곡이 많이 모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왜? 루터의 코랄이 생겨나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루터의 코랄이 나올 수밖에 그 필연성이 살펴보는 것이 교회 음악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핵심이며 이 필연성은 교회 음악의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앞에서도 전술한바 있지만 그레고리오 성가와 루터의 코랄이 주는 교회 음악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니 이것은 단순히 교회 음악사의 흐름을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서양 음악사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심적인 음악 사상과 양식을 알아봄으로써  교회 음악사의 흐름과 그 방향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사에 있어서 고대 음악으로부터 이 그레고리오 성가가 나오기 이전의 음악을 찾아 감상해 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반 음악사에서 조차 성경에 나오는 음악에 대한 자료를 그대로 서양 음악사에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등 음악의 주체가 되는 작곡, 연주의 활동 무대가 모두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일반인들이 보는 백과사전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음악- 
「중세 유럽음악은 4~5세기 무렵부터 15세기 전반무렵까지 전개된 음악을 총칭하는 음악이다. 중세 유럽의 음악은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가운데 비롯되었다. 고대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교부(敎父)들은 ‘천사의 노래소리의 모방’‘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적’으로 노래할 것을 요구하였다. 중세 전반을 통해서 종교음악은 성악을 주체로 하고 음악의 자율적 발전보다도 가사의 내용을 바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도록 하였다. 이에 비해서 음유시인(吟遊詩人)의 노래와 가곡을 비롯한 세속음악은 현세적인 인간 감정을 솔직하게 노래하며 음악의 자율적인 발전을 존중하고 또 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12∼13세기 프랑스의 음유시인이 지은 사랑의 노래와 무훈시(武勳詩) 등이 그러하다. (중략)」<99 두산대백과사전 C.D에서 >

  이 같이 서양음악의 뿌리와 그 역사적 행보는 교회음악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등 음악의 역사를 이끌어 갔던 음악가, 즉 작곡가, 연주가들이 모두 교회음악가가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자랑스러운 사실입니다.

여기에 본 필자의 강의 과목 <교회음악사>의 강의 계획서에 썼던 '교.회.음.악.사의 목.적'과 그 '요.지'를 실어보겠습니다.

 * 교회음악사

교회음악사와 서양음악사는 서로 다른 학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구분 없이 가르치고 있다. 서양음악사를 연구하는 음악사학자들은 시대별, 작곡가별, 작품 등의 분석과 문헌적 고찰에 의한 음악사를 논한다. 그러나 교회음악사는 이 밖에 교회사의 흐름을 이해하여야만 그 음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체득할 수 있다. 서양음악사와 교회음악사의 구분이 모호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음악의 역사는 기독교 음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의 역사서인 그라우트(Donald j. Grout)가 저술한 <서양음악사>의 서문을 보면 "서양 예술 음악의 역사는 기독교 교회의 음악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음악사가 교회음악의 역사라는 보편적 사실이 망각되고, 오히려 일반 서양음악의 역사 속에 교회음악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에 서양음악이 어떤 경로로 교회음악사에서 분파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주객이 전도된 음악사의 관점을 재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음악사를 배워야 하는 목적은 '교회음악사야 말로 교회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 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 교회음악사의 요지

고대 음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는 성경뿐이다.  그래서 고대 음악의 역사는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 음악의 역사와 또 비교적 음악 이론적 체계를 갖추었던 그리스 음악의 체계를 연계하여 이해한다. 신약성경의 음악은 사도시대의 음악에서 서방음악의 암브로시우스(340-397?)에 이르는 음악까지를 이해한다.  중세 서양음악의 시작은 암브로시우스와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그레고리우스 성가로부터 다성 음악이 시작되는 11세기까지 중세 음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음악의 전환기인 르네상스 음악을 이해한다.

 교회음악사의 가장 큰 전환은 마틴 루터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신학적 문제의 개혁으로 머물르지 않으며 교회음악의 개혁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음악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음악적 파장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음악관이 나오게 된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근세 음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며, 그로 인해 서양음악사라는 새로운 음악의 장르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된다.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영향은 지극히 일반적인 음악시대인 '음악을 위한 음악'시대인 순수 고전음악파 음악시대를 파생시켰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개혁 이 후의 교회음악사는 일반 음악사에게 그 중심을 내주며 500년 이상의 휴지기에 들어간다. 다만 독일, 영국, 스위스, 프랑스 그리고 미국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운동을 주축으로 한 음악이 전개된다.

본 강의는 교회음악사의 영향으로 파생되는 서양음악사를 비교 조명하여 바른 음악의 역사를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교회음악사 전체를 이해하는 안목과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주도해 가는 음악의 역사를 다시 주도적으로 쓸 것인가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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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음악사 **

  차례

    1. 구약시대의 음악
      1) 음악의 시원(천지창조부터 바벨탑 이전 음악)
      2) 아브라함으로부터 사사시대 음악(BC 2166-1050년)
      3) 통일 왕국시대 음악(BC 1050-931년)
      4) 분열왕국시대 음악(BC 966-586년/ 남유다, 북이스라엘)
      5) 선지자시대 음악(BC 586-460년)
      6) 신·구약 중간시대의 음악(BC 440-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2. 신약시대 음악
      1) 예수그리스도시대 음악
      2) 사도시대 음악(AD 30-100년)
             
    3. 그리스·로마시대 음악의 영향
      1) 그리스 음악의 개요와 특징
          ① 피타고라스 음악관
          ② 플라톤의 ethos론
          ③ 아리스토크세노스의 Harmonia론(Harmonia의 개념, Tetrachord)
      2) 로마시대 음악

    4. 초대교회의 음악(1-6세기)
      1) 초대교회 음악의 특징(옥시린코스 찬가, 시편창, 찬가창)
      2) 동방정교회 음악(동로마 제국)
      3) 서로마 가톨릭 음악(서로마 제국)
      4) 암브로시우스 성가
               
    5. 중세음악 시대(590-르네상스전까지의 음악)
      1) 그레고리우스 성가
      2) 성가 학교
      3) 기보법
      4) 중세음악의 이론과 실제
      5) 다성음악의 발달

    6. 르네상스와 교회음악
      1) 르네상스 음악의 특징
      2) 르네상스 교회음악과 기악음악

    7. 종교개혁의 음악
      1) 독일 종교개혁의 음악
      2) 독일 밖에서의 개혁 교회음악
      3) 교회음악의 다른 양식
      4) 쉬츠와 바하의 교회음악
      5) 칼빈과 왓츠의 찬송

    8. 복음주의 교회음악
      1) 영국의 교회음악
      2) 미국의 교회음악
      3) 복음성가

    9. 20세기 이후의 교회음악
      1) 미국의 교회음악
      2) 우리나라 교회음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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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시대의 음악

  1) 음악의 시원(천지창조부터 바벨탑 이전 음악)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전부터 영광의 찬송을 받으셨으며 그것은 가히 인간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장면이다.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6:1)라고 주님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높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천사들이 보좌하였는데 그 보좌하는 천사가 바로 스랍(Seraphim)천사들이었다. 스랍천사의 모습은 이사야 6장 2절에서처럼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라 되어 있다. 천사의 사명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고 시중드는 일을 하였다. 특히 스랍천사는 인간을 하나님께 접근 시키며 예배를 수종드는 천사로 히브리어로 세라핌, 문자적으로는 '불타는 자들'로 '정결의 대행자들'이었다.(사 6:2, 3, 6)[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

 이사야는 보았던 하나님은 단지 환상으로 본 하나님이 아니라 시각과 청각을 통하여 만남 주님이었다.(사6;1 : 6:3, 요12:41 : 17:5) 이 장면은 건물의 기초가 요동할 정도의 엄청난 소리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노래하고 있는 스랍천사들의 노래이다. 스랍천사가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충만하도다"(사 6:3)로 되어있다. [천지창조 이전의 찬송]

  첫째 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육일째 되던 날에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창1:27)고  이 피조물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위함이라고 하셨다.(사 43:21) 이것은 곧 창조함을 받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 인간들은 영원히 찬송해야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된다.(시 102:18) [인간 창조의 목적]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102:18)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호흡인 생기가 인간에게 전달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 하나님의 호흡인 생기에는 찬양으로 영광 받으시길 즐겨하시던 하나님의 음악적 속성이 인간에게도 전달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생기를 받고 드디어 질료적인 흙 덩어리가 신적 생명력을 받은 생령, 즉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만이 하나님의 향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하나님의 호흡]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축복하시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셨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체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갈 낙원 에덴을 예비하셨는데 그 곳은 근심과 걱정이 없으며 주림과 추위도 없는 곳이었다. 에덴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성경은 "내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겔 28:13)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각가지 다양한 귀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사시사철 푸른 숲에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창 2:16)가 있어 배고품이 없는 에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물질적인 축복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악기를 예비하시고 그 위에 인간을 만드셨던 것이다. 에스겔 28장 13절을 보면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小鼓)와 비파(琵琶)가 예비되었었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는 환경적 조건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생령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귀중한 선물이요 확실한 사명인 것이다.[예비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아담에게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살게 하셨다. 아담은 여자 하와를 보고 얼마나 좋았던지 그 기쁨을 이렇게 노래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 취하였은즉 여자라…"(창 2:23) 이것이 인간이 부른 최초의 세속가요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가인이다. 가인을 낳아 좋아하던 아담과 하와의 기쁨도 잠시였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범죄를 하게 되었고, 드디어 '땅의 저주'와 어느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는 형벌을 받으며 살던 곳을 쫓겨나게 된다. [세속가요]

음악인이 가지는 고집, 방탕, 유리하는 자의 기질 등의 속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성경적으로 풀이해 논 『 무릎 꿇어야 사는 가인의 후손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음악교육신문(WWW. Musiced. co. kr)에 '이철구의 성경이야기'라는 제목으로 1999년 7월에 시작하여 2000녕 8월까지 1년간 성경에 나타난 음악의 시원(始原)과 그 시원이 세속음악의 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풀어가면 연재 되었던 글입니다. 이 글을 보시려면 본 홈페이지 '말씀을 묵상하며...'에 들어가셔서 '무릎을 꿇어야 사는 가인의 자손들'이라는 것을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세한 이 부분의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가인은 에덴 동쪽 놋 땅에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살아가게 된다. 이 가인의 후예들은 자기 나름대로 문화를 일구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자가 있었다. 라멕은 창 4장 23절에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

"…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 4:28)

  라멕이 부른 노래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나의 창상(創傷)을 인하여……" 란  '내가 당했으니 내가 당한 것보다 더 큰 복수를 한다'는 정당방위(正當防衛)성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복수의 방법으로 자기가 한군데 상처를 받으면 그 자를 죽이고, 한번 손찌검을 받으면 한 아이를 죽이겠다는 것이며, 또 자신을 다치게 한 자에 대해서는 일곱 배로 복수하겠다는 잔인한 노래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칼의 노래'라고 한다. 이런 라멕의 노래는 그의 네 아들 중 동철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된 두발가인으로 하여금 날카로운 병기를 만들게 하여 자신의 힘과 잔인함을 과시하게 되고, 기악음악의 조상이 되는 유발이라는 아들을 통하여 자기의 노래를 연주케 했다. 여기서 나오는 자가 라멕의 아들이요 음악의 조상이 되는 유발이다. 이 구절은 창세기 4장 21절에 나온다.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킨노르,Kinnor)과 퉁소(우갑, Ugab)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구절이다.(창 4:21)

  이것을 통하여 세속적 기악음악의 조상과 세속음악의 기원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할 '다른 씨'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셋을 허락하신다. 이 씨가 바로 여인의 후손(창 3:15)인 "바라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구속사를 이어나갈 하나님의 자손인 것이다. 셋도 아들 에노스를 낳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여호와께 기도와 찬양 그리고 감사의 공동 예배를 드린다. 이때 비로소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부른 찬양이 우리게 된다.(창4:26)

  이 셋의 계보는 면면히 이어져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창6:9)인 노아에 이른다. 그러나 세상은 죄악이 관영해져 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노아의 식구와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씩만을 남기고 세상을 멸절하기에 이른다. 홍수의 사건으로 모든 죄악의 씨는 멸절하였다. 방주에 나온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였다. 포도 농사로 얻게 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노아는 장막에서 벌거벗은 체로 잠을 자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본 작은 아들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그 광경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두 형제의 행동은 달랐다. 우선 그들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질 치며 아버지에게로 가서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고 나왔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아들들을 축복하는 노래를 불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시기를 원하노라"(창9:26∼27)

  여기에서 셈은 영적 축복을 받는다. 그래서 이 자손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가게 되는 영광의 자손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구약성경은 여인의 후손 곧 구속사의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를 잇게 될 자손은 매우 특별한 조건과 신앙심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속사를 이어갈 자손으로 '다른 씨'인 셋을 택하신다. 셋은 그의 아들 에노스를 낳고 처음으로 공동 예배를 드렸다. 이 공동 예배에 역시 감사의 찬송이 울려 퍼졌으리라 짐작한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씨가 진멸하고 구속사의 씨를 선택하게 되면서 그의 아들 3명 중, 그리스도를 이어갈 자손이 필요했다. 이 때 노아가 그의 아들 셈을 향하여 부르는 축복의 노래가 이것이다. "셈의 하나님 찬송하리로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갈 씨를 선택할 때마다 늘 찬송을 통하여 그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씨를 선택할 때도 이러한 광경이 이어진는 것이다. 야곱이 노쇠하여 죽기 전에 자손을 축복하는 노래에서도 나타난다. 야곱의 아들 12명 중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갈 인물은 넷째 아들 유다였다. 이때 야곱이 부르는 축복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 의 찬송이 될지라…"(창 49:8)는 축복의 노래이다. 원래 유다라는 말의 어원이 '찬송'이라는 말로 하나님과 찬송은 떨어질 수 없는 불과 분의 관계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구속사를 이어갈 인물들을 선택할 때마다 찬송되시는 하나님, 찬송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구속의 씨와 찬송]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그 자식을 축복할 때 늘 찬송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찬송이 곧 축복을 의미하고 있다는 말이된다.

양해 하여 주시기 바라며...

이 후에 이어지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음악>은 원고가 정리되는데로 바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그리스도교의 확산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생전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한 기적을 체험한 사도들은 더욱더 결정적인 사건, 즉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사 오순절(사도행전 2 : 1∼13) 성령 강림의 사건을 통해 사도들은 더욱 신앙심이 굳어졌다. 이로 인하여 각지로 그리스도교가 세계적 종교의 첫 사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불타는 신앙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 47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절)….하나님을 찬미하며(47절)'라는 구절은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과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사도들의 신앙심이 늘 기쁨의 찬송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으로 그리스도교인 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배경들이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선교적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으며, 12사도 중 요한은 에베소에서 정착하여 초대교회를 이끌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특히 이방 선교의 주역인 사도 바울은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방인 선교시대를 열었고, 이 시기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고 하였으며,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던 때도 이때였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의 박해에도 불과하고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카타콤(Catacomb)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지하 묘실로 카타콤베라고도 한다. 1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이탈리아·에스파냐 등 광범위하게 산재하며,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피하여 예배나 집회 등을 이 곳에서 했으며, 그 구조는 갱도 양쪽에 묘실이 늘어서 있고 벽화로 장식이 되어있다. 유명한 곳으로 로마에 있는 산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카타콤이 있다.](Catacomb)을 통하여 그 조직을 이끌어나갔는데, 이 시기는 신약성서가 쓰여진 시기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확립하는 시기였다.


  고(古)가톨릭교회에서의 활동은 신·구약을 경전으로 채택하고 로마가톨릭이 형성되기까지의 기반이 되는 발판을 이룩했으며, 3세기 이후 교회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더욱 심해졌는데, 그 이유로 그리스도교도 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려는 것과 이것을 완강이 거부하는 그리스도교인 들의 마찰로 박해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그 박해의 절정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에 이르러 아예 그리스도교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대규모 박해를 가했으며, 이로 인하여 무수한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리스도교인 들은 더욱 단결하여 믿음을 지켰으며, 이런 박해를 견딘 신앙의 결실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에 와서 밀라노칙령(Milan Edict)이라는 그리스도교를 승인하는 서한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다. 국교로 보호를 받게된 그리스도교는 교세가 더욱 급속히 확장되어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5대 교구 체제로 나누어 관리되었으며, 이중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의 3대 교구는 7세기에 사라센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로마·콘스탄티노플 두 교구가 동·서 양쪽의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동방과 서방으로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교황권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언어와 문화적인 갈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과 신학적 논쟁 등으로 인하여 서방은 로마가톨릭교회로, 동방은 동방정교회(그리스정교회)로 나뉘었으며,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황제를 최고의 우두머리로 하는 황제교황주의로 로마교회와 분리하여 11세기 그리스정교회(동방정교회 : Eastern Orthodoxy)로 독립하였다. 

  (3) 로마가톨릭의 교회음악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 중, 예수는 12명의 제자를 두어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전체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주었다.(마 16 : 18) 또한 이런 베드로의 권한은 전승되었는데, 이것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이라는 최고 지도자로 세우는 근거가 되었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파를 말할 때 가톨릭교회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사 오순절(행 2 : 1∼13)에 성령 강림의 사건을 보여주시고, 이로 인하여 사도들은 굳건해진 신앙심을 바탕으로 전도의 사명을 깨닫게 되어 각지로 흩어져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사도의 장(長)이였던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게 되었으며, 그후 로마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계기가 발판이 되어 그리스도교가 세계적 종교의 첫 사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사명적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 초대교회 시대를 거치고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53∼260)의 그리스도교 말살 정책과 대규모 박해에도 불과하고 무수한 순교자들의 신앙심으로 인하여 신앙의 결실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에 와서 밀라노칙령이라는 그리스도교를 승인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를 지키려는 순교의 역사로 확립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발판으로 그리스도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정착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세 계열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셈 문화권과 그리스문화권 그리고 라틴문화권으로 대별되며, 이 세 계열(系列)의 문화는 각 문화권 나름대로의 특색과 독특한 양식과 음악을 만들었고, 초대교회의 송가 및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세 문화권 중 셈 문화권의 교회(Oriental Church)는 초대교회 때 신학자들과 저술가 그리고 교회학교가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라틴문화권(Western, Latin, Roman Catholic Church)은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한 이후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라틴문화권교회와 그리스문화권교회(Eastern, Greek Orthodox Church)간에는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이유들과 교황의 자리싸움을 계기로 결국은 갈라지게 되었다.
  초기 교회는 히브리의 종교 문화에 젖어 있었다. 히브리 음악 또한, 단순 송가(plain chant)로 되어 있었으며, 동방이라는 오리엔트 헬라 문화의 영향권에서는 교회안에서 악기의 사용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헬라 문화는 로마의 동편에 위치한 문화로 지금의 동방 음악으로 발전되어 헬라 문화를 '동방 문화'라고 칭하며,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라틴 문화는 '서방 문화'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 당시 교회 예배의 의식 중 송영은 선택되어진 찬양대에 의해서 대치되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전혀 노래를 부를 수 없었으며 예배의 음악에 있어서도 부를 수 있는 것과 부를 수 없는 것에 관하여 굉장한 제한이 있었다. 로마 전례에서 고유의 노래로서는 그레고리우스 성가(Gregorian chant)가 인정되었으며 또한 찬양대를 위한 악기의 사용은 극단적으로 금지되었다.
  가톨릭교회음악은 엄격하게 전례에 직결되어 있어서, 원칙적으로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교회의 성가는 성가만을 전문적으로 훈련한 전문적 성가대에 의해 불리어졌으므로 그 음악적 수준이 음악적으로 최상의 예술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그 수준의 작곡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교회음악에 가장 지대한 공헌이라고 한다면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예전 음악인 단선율 성가집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40∼604)가 그리스도 이전의 유대음악, 동방 여러 교회의 성가, 유럽 각 지방의 성가, 그리고 교회의전을 집대성하여 교회 의전음악으로 완성하였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이 그레고리안 성가의 기록은 네우마(neuma)라는 기보법(musical notation)인 4선의 보표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선율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가톨릭교회의 음악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음악 의전의 다른 부분들은 보다 객관적이고 형식적이며 공공의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고, 서양의 모든 음악을 기보하는데 사용되었다.
 고대의 음악은 유대인의 시편창이나 헬레니즘 문화권의 음악을 받아들였으며 미사나 성무일과의 노래가 형성되었다. 중세 초기(9세기)에는 로마의 모든 범위에 그레고리안 성가라 불리는 통일적인 단성 전례성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313년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의 밀라노칙령 발표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후에 가장 큰 발전이라고 한다면 교황 권의 확대를 들 수 있다. 4세기말에는 로마의 공식언어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바뀌게 되었고, 교황들은 의식음악을 개정하였으며, 동방에서는 529년에 베네딕트 교단을 설립하고 헤브라이(Hebrew) 교회에서 시작되었던 칸토르(cantor)라는 수석 독창자를 공식적으로 세우게 되었다. 또한 5세기초에는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었던 소년 합창단이 서방에 소개되면서, 로마에 노래학교(schoia cantrum)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그 대상은 소년들과 성인 남자들로 제한하였다. 이런 교회 성가대 발전의 절정은 서방 로마가톨릭의 그레고리우스 대제 1세로서 그의 업적은 중세교회음악에 사용되는 모든 선율들을 비둘기 같은 성령을 받아 그가 스스로 작곡하였을 것이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14년 동안 그토록 방대한 일을 완성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그의 작곡한 작품과 방대한 수집과 채집을 통하여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업적은 교회의식을 재편하였으며, 전문적인 음악 기관인 노래학교를 재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다양한 예배 의전 속에 예배에 쓰일 곡목들의 순서를 결정하도록 하여 동·서방이 나뉘어지는 11세기 로마가톨릭 이후에도 16세기까지 그의 예배 의전이 바꾸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큰 업적을 남겼고, 어느 나라의 교회에도 사용할 수 있는 통일된 성가 형식을 확립한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중세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를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西)유럽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고,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교세를 가지고 가게 되었다. 이 시기가 11세기에 일어나는 가톨릭의 동·서 분파가 일어나는 사건이 되었다. 초기 단선율의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시작하여 기원 후 천 년에서 천백 년은 전 유럽의 경제적 부흥과 인구의 증가, 그리고 도시국가들이 건설되었고 음악에 있어서도 여러 개의 선율이 교차되는 다성음악이 자리잡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그레고리안 성가의 단선율은 12세기에 이르러 다성음악(多聲音樂, polyphony)으로 발전하면서 진일보되게 되었다.

지금까지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성경에 나타난 음악에서부터 그레고리안 성가와 중세음악, 그리고 모든 음악사(音樂史)의 흐름(主流)은 기독교 교회음악의 역사를 살펴 본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앞으로의 서양음악의 발자취 역시 교회음악의 역사라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다.

  (4)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y) 음악
  동방교회의 정식 명칭은 동방가톨릭교회이며 그리스 정교회라고도 한다. 사도들의 성령강림 사건 이후 성령의 뜨거운 체험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전파를 사명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이집트·인도·그리스·동유럽·러시아 방면으로 발전하여 전파되었으며, 오리엔트의 헬라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교를 말하게 된다. 또한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로마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확산과 또 다른 사도들의 그리스도교의 전도 지역이 동유럽과 러시아에 이르는 방향으로 전파되면서 종교적 예배형식과 문화, 그리고 교회음악 역시 그 지역의 특성과 지역 사람들의 문화와 융합되면서 발전되었던 것이다.
 기원 후 1세기경 사도인 안드레는 한 예루살렘 북동쪽 대륙의 선교와 시노페에서 코르순 지역에 이르기까지 선교하였으며, 그것이 러시아에 정착하면서 동방정교회가 러시아정교회로 정착하게 되는 선교적 경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했던 동방교회의 음악은 오히려 서방교회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동방의 요소가 서방교회음악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 의식에 주된 골격을 제공하였고, 서로 주고받는 형식의 대구(對句)형식과 응답 시편송과 답창 시편송·낭송 형식들, 그리고 찬미가 외에 헤브라이 교회에서의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은 후렴을 사용한 노래의 일종이 모두 동방음악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세음악 중 동방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은 대표적으로 시리아 성가와 그리스, 그리고 헤브라이와 비잔틴 성가가 있으며, 이 음악들은 서방교회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비잔틴의 음악은 발칸 반도와 근대 희랍 정교, 러시아 정교, 그 밖의 동방정교회의 음악의 원천이 되었다. 비잔틴의 음악가로 로마노스(Romanos : 6세기)와 세르기오스(Sergios : 7세기)가 있다.
  동방 음악의 발생지인 고대 이집트에서 현존하는 기독교 음악으로 삼위일체를 찬송한 찬미가로 옥시린크스(Oxyshynchos)라는 그리스 가사와 그리스 성악 기보법으로 된 파피루스가 발견되었으며, 이것으로 보아 동방의 교회음악인 찬미가와 교회예식의 대창, 그리고 시편송 등의 음악이 서방의 교회음악에 영향을 주었던 흔적들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앞에서 자세한 언급이 있었던 성 암브로시우스의 성가가 동방 교회의 음악이었으며, 성 베네딕 수도원에서 불려지던 음악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 베네딕 수도원에서 5세기 무렵부터 노래 학교가 생겼으며 이것은 전문적인 성가학교였다.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는 11세기(1054)에 이르러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의 완전한 독립으로 인하여 서로의 음악에 영향을 주던 음악들이 더욱더 성격을 달리하며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동로마의 운명도 던스타블이 죽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터어키에 함락 당하며, 도시국가로 시작하여 대 로마제국('B.C 600에 건설되었다'라고 봄. 또는 B.C 753년이라는 설도 있음)을 건설하여 빛나고 화려했던 로마가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5) 교황권의 몰락과 다성음악의 시작
  그리스도교의 절정은 교황권의 신장으로 볼 수 있는데, 313년 로마의 그리스도교의 국교 제정이후 중세 유럽의 큰 세력인 프랑크족이 5세기에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교황의 지지를 얻어 이탈리아의 랑고 바르드 왕국을 정벌하여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헌납하였다. 이렇듯 정치적·경제적 입지가 확실해진 교황은 인노켄우스 3세(재위 1198∼1216)때 교황권이 서유럽의 전 군주 위에 군림하게 되기까지 그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였다. 이런 교황권의 상승은 이슬람 세력과의 종교적 세력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교황과 봉건영주가 힘을 합해 십자군(十字軍) 전쟁(1096∼1270)을 일으키게 된다. 이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회복을 꾀하기 위해 시작했으나, 그 의미를 점차 상실해 가면서 세속적인 목적으로 변질하게 되고, 끝내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황권은 서서히 약화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십자군 전쟁의 영향은 우선 문화적으로 한 발 앞서있는 이슬람 문화에 접촉함으로써 르네상스(Renaissance)의 실마리를 제공하였고, 경제적인 면에서 북이태리아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도시가 발달하였다. 종교적으로는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기사와 봉건 영주 계급이 몰락하여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방 이슬람 세계와의 대립이 낳은 중세 최대 사건으로서 교황의 권위와 그리스도교도의 정열을 나타냈으나, 결과적으로는 중세의 해체를 촉진하고 근대를 향한 하나의 발판이 되었다.
  이런 중세시대의 배경 속에서 교회음악의 발달은 11세기에 이르러 다성음악이라는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1세기 동방정교회와 서방정교회의 양분이 일어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음악의 형태는 단선율의 제창성가(Unison Chant)양식이었다. 이런 단선율의 형식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11세기에 이르러 2성부나 그 이상의 선율이 동시에 움직이는 다성음악으로 그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이런 최초의 다성음악의 시작은 아주 간단한 형태의 병행 오르가눔(Parallel organum)으로, 병행 오르가눔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음악이 시작하여 끝나기까지 8도로 병진행하는 형태여서, 전혀 독립적이거나 창의적이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한 성부의 노래가 8도로 병진행하여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다성음악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태였지만, 어쨌든 두 성부로 나누어 불려졌다는 의미에서 다성음악의 소중한 시작의 의미를 갖고있다고 하겠다.
  이런 다성음악의 발전은 고대로부터 11세기에 이르는 음악의 발전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13세기에 이르러서는 2성과 3성의 모테트(Motet)로 발전하여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것을 클라우술라(Clausula)라고 했다.
  한편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음악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하였고 특히 로마는 무정부 상태에 이른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다른 나라에 비하여 이탈리아의 음악은 14세기까지 단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다성음악은 대개 즉흥적인 음악이었으며 복잡한 음악을 싫어해서 흐르는 듯한 선율과 짜임새도 단순한 것을 원했다. 14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최초의 다성음악은 마드리갈(madrigal)로 보통 2성부로 되어있다. 이런 다성음악의 발달은 14세기의 정치 경제적 분위기와 같이하며 종교적 음악의 발달보다는 세속음악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고 이것은 르네상스시대를 예견하는 신호가 되었다.

 (6) 르네상스(Renaissance)시대와 새로운 교회음악
  르네상스는 고대 문화의 부흥을 뜻하며 대체적으로 1450년부터 1600년에 이르는 시대의 유럽음악을 말한다. 교회사적 입장으로 본다면 르네상스의 정신의 하나인 인본주의적인 예술 창작 태도의 성향은 매우 불편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음악에 있어서 르네상스시대의 탄생은 세속음악의 발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을 정리해 본다면 인문주의적인 예술 창작태도와 음악의 구조와 조화, 상당히 논리적인 음악의 접근, 정확한 표현 등으로 음악의 주체적인 배경이 절대자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르네상스 음악의 특징은 음역이 확대되고, 인쇄술과 기보법의 발달이 가속화된 것으로도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중에도 르네상스의 영향은 교회음악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아카펠라(a capella)였다. 아카펠라라는 말은 이태리어로 '예배당 또는 성당식으로'의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반주 합창곡의 형태로 16세기이전의 거의 모든 음악은 이 아카펠라의 형태로 노래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으며, 이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는 이탈리아 출신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1525?∼1594)를 꼽을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는 다성음악의 기법을 발전시킨 오케켐, 오브레히트, 르네상스 음악의 전형적인 미사곡을 작곡한 조스캥 데프레,  16세기 후반의 데 몽테와 라수스의 작품은 그 강렬한 표출 의욕면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탈리아에서는 페스타, 팔레스트리나, 루차스키 그리고 마렌치오, 제수알도, 몬테베르디 등에 의한 마드리갈과 같은 뛰어난 세속음악과 로아의 팔레스트리나에 의한 미사곡, 모테트 등의 교회음악이 나왔다. 영국에서는 15세기말에서 16세기에 페어픽스, 태버너, 탤리스 등이 다성적인 교회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을 위하여 버드는 작곡을 하였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1453년 터어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고대의 잔재는 세기와의 결별을 완전히 이루게 되었다. 또한 중세의 거대한 두 주류였던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은 모두 분열하고 새로운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를 맞이 하게되는 것이다. 이로써 다시 그리스도교는 커다란 두 주류의 새로운 교회의 갈래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기존의 가톨릭과 새로운 개신교의 등장이 시작되었다.

 (7) 종교개혁과 교회음악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며 신학 교수였던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해 주도  되었다. 그는 면죄부에 관한 95개조의 논제의 항의문을 비덴베르크 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다. 이 사건의 발단은 마인츠의 대주교 교회의 알프레히트가 제정적인 타개책으로 면죄부를 판매한 것에 대하여 루터가 그 성경적인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면죄부의 신학적 문제의 제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복음의 신앙에서 종교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대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근본적인 정신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프로테스탄티즘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solfida)’또는‘오직 은혜에 의하여’의(義)로 인정됨을 강조하며, 여기서의 의(義)란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이 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용서받는다.<가톨릭교에서도‘은혜에 의하여’를 주장하지만, 거기서는 은혜에 의하여 의(義)로운 화(化)가 더해져 성화(聖化)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말은 선업(善業)이 있어야 하며, 선업이란 먼저 착한 일을 많이 쌓아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구제(救濟)과정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성서 원리(聖書 原理)는 성서에만 한정하며, 교회는 성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가톨릭에서는 권위의 통로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傳統)을 중요시한다.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교회가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사제(司祭)의 성격은 제사를 담당하는 성격보다도 설교자·목회자(牧會者)의 성격을 갖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며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를 말한다.<가톨릭에서는 설교보다도 전례(典禮)를 중요시하며, 이것은 담당하는 사제의 권위가 사도 베드로에서부터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도 종교개혁의 조짐은 자연스럽게 결속되고 있었으며, 스위스에서 츠빙글리(Ulrich Zwingli : 1484∼1531), 그리고 프랑스의 칼빈(Calvin : 1509∼1564) 등이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나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그 내용이 성직자의 결혼, 육식의 자유, 화상(畵像)의 철거 등 다소 휴머니즘적인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서른 여섯 곡의 개신교 찬송가를 작곡할 정도로 교회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 이 세 사람은 종교개혁에 대한 업적도 크게 인정받고 있지만 종교음악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의 종교음악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몇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배에 음악을 도입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이함을 보이고 있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달라진 교회음악의 특징으로는 첫 번째, 교회에서 사용할 새로운 교회의 찬송가를 필요로 했다. 이로 인하여 가장 시급했던 일이 그때까지 라틴어로 된 성경과 찬송가의 가사를 라틴어 대신, 자국(自國)의 언어인 독일어의 가사로 바꿈으로써, 가사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며 부를 수 있도록 하여 누구나 성경이나 찬송가의 내용을 이해하며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번째, 지금까지의 교회음악은 전문성을 지니고 있어서 아무나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던 것을 단순하고 노래부르기 쉬운 멜로디로 바꾸는 일이었다.
  세 번째,  교회내의 전문적인 성가대도 해체되었으며 이 공백은 일반 성도를 중심으로 성가대를 조직하여 대체되었고, 지금까지 교회내에서는 금지되었던 일반 찬송도 허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종교개혁 이후 전체적인 교회음악 개혁의 특징들은 같은 생각으로 적용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 세 사람의 음악관에 따라 교회음악을 적용하는 생각의 범위가 달랐는데, 우선 독일의 루터의 음악관은 모든 형태의 음악을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스위스의 츠빙글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음악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를 이었던 칼빈은 츠빙글리 보다는 좀더 유연한 음악관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음악과 더불어 서양음악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오히려 체계적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바흐나 헨델 등의 음악가들이 작곡한 종교적 내용을 가진 오라토리오(oratorio)나 칸타타(cantata) 등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런 음악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경건과 지나친 교리의 강조에 대한 회의(懷疑)적 반응으로 교회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 예술성이 강조되어 세속적인 연주회용 음악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교회음악이 교회 안에서 소홀해지면서 교회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음악이 교회가 아닌 교회 밖의 연주회장이나 상류계급의 개인적인 저택 등을 통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음악의 방향 전환은 음악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하던 음악에서 세상 음악에 더욱 관심과 열의를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종교개혁 이전에는 모든 교회음악의 역사나 일반적인 서양음악사의 방향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향한 음악에서 발전되었지만,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이 일반 성도를 중심으로 발전되면서 교회음악가들이 교회 안에서 설자리가 축소되면서 지금까지 오히려 교회 안에서 보호받으며 활동하던 음악가들이 교회에서 벗어나 세상 음악에 몰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는 교회음악의 역사나 서양 음악의 역사가 거의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서서히 교회음악의 역사와 서양음악의 역사가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나누어지는 교회음악의 역사와 일반 음악의 역사는 그 이전의 고대·중세·르네상스·바로크 등의 일반 음악의 역사와 교회음악사 사이에 그 시대의 명칭은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음악 내용의 대부분이 그리스도교를 소재로 하는 작품과 작곡가를 중심으로 것이었으나, 일반 음악사는 고전파(古典派) 음악시대에 들어오면서 고전파의 중심적인 정신인 '음악은 음악 자체로 순수해야 하며, 음악을 위한 음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절대음악'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것에 반해 교회음악은 개신교(改新敎)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음악의 형태로 그 방향이 전환되게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음악의 역사와 일반 음악의 역사가 두 갈래의 방향을 가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8) 영국 국교회음악과 개신교 음악
  영국의 교회음악은 그레고리우스 1세 생전에 초대 켄터베리의 대사교 켄트의 아우구스티누스성인에 의하여 소개됨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교회음악은 성공회인 영국의 국교회를 중심으로하는 음악과 후에 종교개혁과 더불어 이루어진 칼빈주의 음악 등 많은 부류의 음악이 공존하게 되었다.
  영국 교회 자체는 가톨릭을 모체로 하는 국교회를 중심으로 삼았고, 이 국교회는 16세기 헨리8세의 결혼 문제로 인한 영국 국민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계기로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분리되었다. 영국은 교회음악에 있어서 크게 부각되는 작곡가가 드물었으나 대표적 음악가로 토마스탈리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영국의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 음악인 앤섬(Anthem)을 주로 작곡했으며, 이 앤섬은 예배용 음악으로 로마가톨릭의 모테트와 같은 형태의 음악으로, 그리스 또는 라틴어의 안티폰(Antiphona)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은 종교개혁 이후 일반인들이 부를 수 있는 찬송이 18세기에 와서야 일어나기 시작되었는데, 그 주역이 아이작 와츠(Isaac Watts : 1674∼1748)이다. 이 아이작 와츠가 나오기 전의 영국의 찬송은 시편가(Psalmody)였으며, 이 아이작 와츠의 출현으로 찬송가(Hymnody)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이작 와츠는 젊은 목사로서 영국 교회의 찬송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성구를 곡의 운율에 맞도록 번역하고, 그 번역 과정에 있어서 원문 자체를 바꾸는 개혁을 시도했다. 이런 작업은 그의 순수한 신학적 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하여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신자들까지도 찬송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대중 예배에 찬송을 도입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에 일어나는 영국의 교회 부흥운동이 복음운동(福音運動)이다. 영국에서 복음의 내용을 담은 찬송은 웨슬레 형제로부터 일어나게 되며 이들은 영국 교회의 목사들로, 형인 존 웨슬레(John Wesley : 1703 출생)는 부흥 인도자로, 동생인 찰스 웨슬레(Charles Wesley : 1707 출생)는 찬송가의 작사자로 활약했다. 찰스의 작사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영적 체험과 자서전적인 성격의 가사를 썼는데, 그의 가사는 쉬우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6천 편이 넘는 가사를 작사했다. 이들의 최초의 찬송가집은 1737년에 '시와 찬송의 모음(Collection of Psalms and Hymn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그 내용은 전래적으로 찬송의 정리된 운율과 선율의 틀에서 벗어나 생기가 넘치고 열정적인 찬송의 형태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현대 복음성가(福音聖歌)의 효시를 이루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웨슬레 형제의 교회 부흥운동은 18세기 영국을 휩쓸면서 감리교회의 창립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런 부흥운동은 미국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시편이나 찬송, 그리고 송영 등의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성격을 가지고 불리어 지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새로운 복음찬송의 성격은 지금까지의 내용과는 다른, 다소 도전적인 진취성을 가진 노래들로 작곡되었다. 더 자세히 말해서 이 노래는 전도의 내용으로 된 가사를 가진 것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내용이라든지 또는 회개를 소재로 하는 가사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한 증거를 가사에 담는 등, 기존의 가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한다면, 복음 찬송의 가사는 기존의 가사와 성격을 달리하는 그야말로 전도와 체험에 의한 간증을 담은 가사로 그 방향을 가졌던 것이다.

 (9) 미국의 교회음악
  155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반발하고 국교회의 로마가톨릭적인 제도와 의식 등을 배척하며 칼빈주의(Calvinism)에 투철한 개혁을 준행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Church)개혁파들은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네널란드와 기타 지역으로까지 피했다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정착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음악은 대체적으로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1620년에서 1800년까지로 유럽의 교회음악이 신대륙에 들어온 시기를 말하며, 제2기는 1800년에서 1860년에 이르는 유럽과 독일의 이민으로 미국 음악문화의 기초를 세운 시기이고, 제3기는 1860년 이후 지금까지로 미국 태생의 음악인들이 주도하는 음악시기로 볼 수 있다.
  미국의 찬송가는 역시 영국의 형태를 본뜬 것으로 초기 미국의 찬송가는 시편 찬송만을 불렀다. 미국 찬송가의 형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의 영향이 계속 지속되었으며, 미국 찬송가의 독자적인 특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백인의 문화와 더불어 오히려 흑인들의 민요와 그들의 영가(靈歌, spirituals song)였다. 이런 흑인들의 음악 속에는 아프리카 고향의 대한 그리움과 노예 생활의 고달픔, 그리고 정신적으로 노예라는 정신적·육체적 속박의 한이 서려 있었고, 그들의 울분은 하나님을 영접하면서 더욱 절실하고도 절박한 마음을 담은 음악으로 표출되면서 새로운 흑인영가라는 음악의 장르를 만들게 되었다.
  흑인영가(黑人靈歌, Negro spirituals)는 주로 강열한 니그로(Negro)적인 당김음(syncopation)의 리듬을 사용하고 있으며, 음계에 있어서도 단순한 5음음계(五音音階)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다성적(多聲的) 선율들이 얽혀 있는 형태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런 흑인들의 강렬한 리듬감이 미국의 교회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흑인영가의 제재는 구약성서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 많으며 이것은 그들이 처해있는 처지와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대개는 암울한 현실로부터의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과 해방에 대한 절실하고도 강렬한 소망을 노래하고 노예생활의 고통과 비참함에서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절규(絶叫)에 가까운 간구(懇求)의 노래였다.
  흑인영가의 시작은 19세기초부터 발생하여 처음에는 주로 흑인들을 중심으로 불리어졌으나, 그후 이 노래는 민스트럴쇼에서 자주 불리게 되었고 점차로 이런 노래들로 구성된 흑인학교 연주단체의 활동으로 발전되면서 이 노래는 미국 전역에 이어 더 나아가 유럽 각지에까지도 널리 애창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한 단체로는 테네시주 네시빌에 있는 흑인대학인 피스크대학의‘피스크 주빌리 싱어즈'로 그들의 활약은 흑인영가라는 한 장르를 정착시켰으며 미국 교회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영국의 부흥운동의 영향은 미국의 복음찬송 운동에 영향을 주어 대 붐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이런 심령 대 부흥운동의 영향은 영국의 웨슬레파와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한 세기 전 영국에서 성황리에 일어났던 것처럼 미국은 심령부흥 운동으로 미대륙을 휩쓸기에 충분했다. 이 부흥운동의 부흥사들은 복음 찬송가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찬송가를 이끌어갈 동역자들과 함께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
  1870년 초 미국의 부흥가로는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 1837∼1899)를 들 수 있으며, 그는 그의 찬양의 동역자인 아이라 데이비드 샌키(Ira D. Sankey, 1840∼1908, 찬송가 191장, 342장, 349장, 391장, 397장, 412장, 535장의 작곡자)와 함께 부흥 집회를 수없이 다녔다. 이런 두 사람의 말씀과 찬양의 사역은 부흥운동의 모범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들의 성공적인 사역은 미국만이 아닌 영국에까지도 대 성공을 이룩하게 되었고, 이런 복음운동이 정립되고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와이 엠 씨 에이(Y.M.C.A)라고 하는 기독교 청년운동연합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음악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으로의 음악활동으로 그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20세기 음악을 주도해 가는 모든 음악인들이 미국에서의 활동을 동경하였고, 이로 인하여 20세기 음악의 주도적 장르인 12음 기법을 만든 쇤베르크(Arnold Sch nberg, 1874∼1951)와 그의 제자들도 미국으로 영주하여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 활동의 경제적 발판을 이전까지는 작곡이나 연주회를 통하여 얻을 수 있던 것들이 대학이라는 기관에 정착하면서 경제적인 뒷받침이 확실해 지게 되면서 새로운 창작의욕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하던 음악활동의 무대가 20세기 이후에 와서는 음악의 주도국에 미국이 당당히 발돋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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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어 주신 이 글은 이철구저 『성가대원 핸드북』의 '교회음악사' 부분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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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저    자              도  서  명                출  판  사

 하나님 말씀    톰슨 Ⅱ 주석 성경          기독지혜사, 1988.
 이철구              성가대원 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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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M.Miller            음악사              삼호출판사, 1977.
 Ulrich Michels(홍정수, 조선우 편역)  음악은이  음악춘추사, 1977.
 홍세원      교회음악의 역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9.
 津川主一 저, 장대덕 옮김  서양교회음악사    신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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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자외 4인  들으며 배우는 서양음악사    심설당, 1993
 한국순교복자수도회  그레고리안 성가(이론)  태림출판사, 1972
 노주하    음악과 신학    요단, 1997.
 Donald Jay Grout 저, 서우석 문호근 번역  서양음악사    수문당,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