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가 꼭 해야 하는 설교

2007. 7. 22. 23:32목양자료/2.설교자료

* 목사가 꼭 해야 하는 설교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 - 그런 설교를 하기 위한 방법

김청수 목사

(주: ) 여기 기록한 글은 제가 30여년 동안 설교를 하면서 설교에 대하여 갈등하고 고민했던 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언제나 하고 싶었던 설교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었다면 목회를 참으로 잘 했을 것이라는 꿈과 이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기록하면서 설교에 대한 다른 목사님들의 좋은 글들도 다수 참고했음을 알립니다.

보통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3번 이상의 완전한 설교를 해야 한다. 일년이면 156회의 설교를, 10년이면 1560회이고, 3,40년 목회의 기간동안 5,000회 이상의 설교를 해야 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 교회 성도들처럼 설교를 많이 듣고 있는 성도들이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설교의 홍수 속에서도 한국 교회 성도들의 삶은 그 다지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왜 그럴까? 문제가 무엇일까? 어쩌면 설교의 목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까? 성도들이 많은 설교를 듣지만 그 설교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혹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성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도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 생활을 지탱해 주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강단의 말씀 선포의 약화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누가 크게 염려하듯 기복 신앙이 되어 가고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타락해 가는 것은 아닐까?
데이빗 스미드(David Smith)는 말하기를 "설교는 행동으로 결론지어 주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결국 설교가 무엇인가를 성취시켜야 하는 것이라면, 설교는 정말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설교자는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왜 이 설교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는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목사의 설교에 있다.
몇 해전 '목회와 신학'라는 잡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교를 듣고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 38%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무엇 때문에 교회를 나오며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이 목적에서 벗어 난 성도들의 그렇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목사의 설교가 그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삶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 답이 맞는다면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추궁 들어야 하는 일들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눅12:48)
위에서 말한 38%의 통계 숫자는 단적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데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이며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가 있다. 간혹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 가운데 복음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에 설교라고 말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진리 안에서 성도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

설교의 내용 면에서 꼭 해야 하는 설교

1. 살아 있는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설교

기독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이며, 개인들과 사회와 나라들, 그리고 온 우주 속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실 수 있음을 선포하는 복된 소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용서의 복음, 부활의 복음, 새 생명의 복음을 그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의 설교는 이러한 복음의 선포이다.

어떤 내용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언제나 설교는 이 복음과 만나야 하며, 이 복음의 소식이 그 골격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탄생되었으며, 초기의 설교자들은 예수의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그들의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리챠드 리셔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오늘의 설교자가 계속해서"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기독교 설교의 원형은 케리그마였다고 말한 다드(C. H. Dodd)의 주장과 같이 현대 설교 역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생명의 소식이 그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초대 교회에 "복된 소식"(good news)이었던 것처럼 설교는 복된 소식의 선포여야 하며, 절망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치유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서 흔히 이해되는 "복된 소식"이라는 개념에는 많은 오해와 오류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 "복된 소식"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하나님의 응답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다. "복된 소식"의 진수가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구원의 부활임에도 불구하고 "복된 소식"의 부가 가치적인 요소들, 다시 말하면 신유, 치유, 기복, 성공 같은 것들이 감히 "복된 소식"의 자리에 앉아 "복된 소식"의 참 뜻과 "복된 소식"의 능력을 흐리게 하여 "복된 소식"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을 희석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설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설교에는 비 복음적인 요소가 많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도 설교되어야 하고 축복도 설교되어야 하며 치유와 인생살이의 지침들도 설교되어야 하지만, 율법적인 설교는 강압적인 요소가 설교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어서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희열과 위로, 감격을 가지고 가기보다는 부담감과 반발심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문제가 많은 사역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축복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구원의 기쁨보다는 자기들의 세속적인 욕구와 소망을 찾게 하는 요구를 수용하여 설교를 하는 이유로 설교의 가장 핵심인 "복된 소식"이 사라지고 말았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라 세상살이를 가르치는 處世訓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복음적이며, 복음의 골격을 가져야 한다. 이교 문화의 첨단을 걷고 있었던 로마를 변화시켰던 것은 복음이었고, 로마가 복음을 들었기에 그곳은 변화될 수 있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져야 하며, 변화하는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도 복음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지향하는 설교 신학은 어떻게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설교자들이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2. 성령님의 감동이 있는 설교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칼빈은 성령 님의 도우심과 그 역사 하심을 강조하면서 "성령님께서 설교자의 앞에 놓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 가르침의 멍에가 될 때에만 하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유용한 능력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의 설교자들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가르침이 동반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란 지극히 제한된 것임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님의 동행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능력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의 감각 기능과 교제하지 않는 한 눈과 귀는 본연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그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모든 능력은 결코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 님의 조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이어야 함을 말한다. 거기에 더하여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우리의 귀가 뚫어지고 눈이 열려져야 우리들이 주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오성이 지극히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의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기능이 최상의 것처럼 여기고 만족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지만 사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칼빈의 다음의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능력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의 감각 기능과 교제하지 않는 한 눈과 귀는 본연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그의 도움이 없이는 주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주장들을 종합하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전해야 할 본문을 앞에 놓고 그 말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얼마나 절박하게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는지에 대한 자성적인 관찰을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자신의 말을 도구로 삼아 운반해야 할 본문 말씀을 앞에 두고 취한 단계는 다음의 세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의 부류는 본문을 읽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본문의 뜻으로 정해 버리는 지극히 경망스러운 설교자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하여 거기에 맞는 본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류의 설교자들에게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필요성마저 느끼지 아니한다. 둘째의 부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주석을 겸한 성경 한 권으로 말씀의 뜻을 채우려는 단순한 노력형의 설교자들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석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대충 넘기는 경우이다. 셋째의 부류에 속한 사람은 설교의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형태이다. 먼저 칼빈의 말대로 성령님의 동행을 간구하고 자신의 오감을 깨우쳐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이 찾아 볼 수 있는 각각 달리 번역된 성경과 원어 사전과 성서 사전을 비롯한 각종 사전류를 펴고 오늘의 말씀의 뜻을 찾기에 골몰한다. 그리고 다수의 성경 주석을 가지고 남은 어떻게 이 말씀을 해석했는지를 찾아 땀을 흘린다. 여기에서 미래의 설교자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점검하게 된다.

3. 말씀의 해석이 분명한 설교
설교자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 성도들에게 전해 주는 이일 것이다. 설교자가 본문을 먼저 이해하는 과정은 하나님이 무엇을 이 말씀에서 의도하고 계시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출발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내가 율법을 모세가 쓴 것으로, 시편을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에 담겨진 것을 파악한다면, 이 사역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말씀의 사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또는 유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나는 죽을 운명의 사역 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과, 그리고 성경에 들어 있는 모든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신다면 이러한 핑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말이 교회에서 흔히 쓰여지는 용어라 하여 결코 공연한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청할 것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오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법률이나 신조 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라고 하여 성경의 권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그의 설교가 그것을 바탕으로 선포되기 때문에 동등한 권위가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 되고 순수한 주해"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