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3. 12. 23:01ㆍ참고자료/4,예화자료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은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벗어나려는 항일 애국운동으로서 지난 2월 21일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와 을사조약을 통해 한반도에서 정치 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한국경제를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차관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통감부를 설치한 후 한국의 묵은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1905년 6월 200만원의 빚을 일본에서 멋대로 빌려와 1906년에는 빚이 1,300만원이나 되었습니다. 통감부는 이 돈으로 우리를 탄압하기 위한 경찰관계시설이나 인건비 혹은 일본인들을 위한 일에 썼던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씌워준 1,300만원의 빚을 전체 국민의 의연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인쇄소를 운영했던 대구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은 국채를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며 800원(당시 쌀80kg들이 한 가마에 70원)을 내놓는 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담배를 끊어 그 돈으로 갚으려 했습니다. 2천만 국민이 20전짜리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피우지 않으면 6개월 안에 다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고 이 운동에 동참했고 정부관리, 양반들, 상인, 농민, 학생, 부녀자, 기생, 승려들이 참가해 돈을 모았습니다. 여성들은 장롱에 넣어둔 금비녀와 금가락지, 은장도를 내 놓고 해외 유학생과 동포들도 의연금을 보내는 데까지 번져 나갔습니다.
운동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1908년에 들어서자 모인 금액은 18만 8천원(혹 23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사에 의연금을 맡아보던 양기탁을 의연금 횡령이란 죄목으로 구속하면서 탄압하는 한편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시켜 온갖 방법으로 이 운동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이 운동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경제적인 침략에 대항하여 우리 힘으로 우리 경제를 일으켜 지키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이때 한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 이라고 감탄했다합니다.
우리가 오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에서 보는 바와 같은 나라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 봅니다. 라면으로 허기를 이겨가며 허리띠를 매고 일한 우리들의 어버이 탓에 우리가 오늘의 부를 누리고 있다 행각합니다. 그 정신이 오늘날 어디가 있는지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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