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괴레메 젤브계곡과 비둘기 골짜기, 네압볼리, 안디옥, 라오디게아, 비시디아 안디옥, 메테오라, 밧모섬

2006. 12. 27. 22:56사진·동영상 자료/2.성지순례 자료

괴레메 젤브계곡(우치사르)과 비둘기 골짜기 | 성지순례
2005.04.10


비둘기 골짜기

 


젤베계곡 전경

 


젤베 계곡의 모형들

 


 


 


 


 


 


 


 


 

'카파도키아'라는 명칭은 괴뢰메, 젤베, 위르굽, 오타히사르 등의 도시와 마을로 이루어진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실제 행정지역상에는 없는 이름이다. 따라서 흔히들 알고 있는 카파도키아는 그 중에서 괴레메를 지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서 기독교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그 의미는 "You can not see here." 즉, 볼 수 없는 곳, 찾을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기원전 1271년 동방여행을 떠났던 마르코 폴로는 카파도키아의 특이 한 자연을 극찬하면서 이곳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동방견문록에 소개했다. 카파도키아는 돌아보는 데 최소한 3일이 걸릴 만큼 볼거리가 많은 곳 이다.  그중 유명한 유적지는 모두 윌기프(Urgup)와 괴레메(Goreme), 아바노스(Avanos)지역으로 연결되는 작은 삼각지대 안에 있다. 그 중 에서 흥미있는 곳은 초대형 바위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우치사르(Uchisar), 프레스코 성화가 벽에 그려져 있는 동굴 교회가 있는 괴레메(Goreme), 붉은 원추형 바위 속에 수도원이 자리한 젤브(Ze lve), 거대한 지하도시 데린쿠유(Derinkuyu)와 카이마크르(Kaymakl) 등이다.


괴레메


이곳 '괴레메'는 카파도키아의 중심도시로 카파도키아의 관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는 명소이다. 카파도키아 투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인지 주변은 온통 여행사와 호텔이 많이 있다. 한편 괴레메는 비잔틴 시대의 예배당과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마을 외곽 2km에 자리한 괴뢰메 계곡에는 야외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예수의 생애를 묘사한 벽화가 있는 사과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성 헬레나의 초상화가 있는 뱀 교회,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 는 카란르코 교회, 그리고 괴레메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화려한 실 내장식과 뛰어난 보존상태로 사랑받고 있는 바클 교회가 있다.  교회입구에 사과나무가 있었다는 "사과교회", 벽화에 그려진 사람이 샌들을 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 "샌들교회", 그리고 특히 푸른색의 벽화가 아름다운, "토칼르 교회" 등, 수없이 많은 교회가 있다.


우치사르

 

높이 30m가 넘는 기암괴석이 있는 우치사르는 '은둔자의 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바위산 중턱에는 아직도 작은 마을이 있다. 적지 않 은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 전성기에는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우치사르 정상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지만 길이 험하므로 조심해 야한다. 정상에서는 괴레메 계곡과 괴레메 야외박물관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노을이 질 무렵에 내려다보 는 우치사르의 전망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13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한 '우치사르'는 황량하고 기괴한 주변풍경이 어딘가 매우 묘해 보이는 곳이다.  그 이유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수 없이 뚫려있는 비둘기 집 때문이다. 한때 비둘기들이 거주했던 이곳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 그들과 공생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성화를 그리기 위해 비둘기 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둘기 알에서 염료를 얻어 석굴 예배당의 성화를 채색했다고 한다. 그 대가로 비둘기들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 먹었다. 왠지 불합리해 보이는 이러한 공생의 관계는 결국 스스로 그러했던 자연에 인위적인 힘을 가함으로써 점차 인간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우치사르'의 서쪽 계곡은 화산재가 굳어진 응회암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진기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얀 바위들이 마치 낙타의 등처럼 울퉁불퉁 솟아나 있어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파스텔톤의 옅은 하늘을 살짝 가리운 구름처럼 하얀 석회암들이 햇빛을 듬쁙 머금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질 무렵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환상 그 자체라고 한다. 매끄러운 표면 아래로 시선이 미끄러지자 군데군데 조그맣게 뚫린 구멍들이 보였다. 11세기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교회가 남아있는 터라고 한다


네압볼리 | 성지순례
2005.04.10


네압볼리 항구

 


네압볼리 전경

 


네압볼리 바울 도착 기념교회

 


교회 밖 바울 도착 벽화

 


사도 바울

 


바울 교회 내부

 

에게해의 북쪽에 있는 해변도시로 당시 유럽의 첫성 빌립보에서 남동쪽 14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바울이 환상을 보고가서 그의 동역자와 처음 도착한 유럽의 땅이다 (행 16:11) 터키의 드로아에서 사도바울의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은 그리스의 섬인 사모드라게를 지나 유럽전도의 시발점인 네압볼리 항구에 도착했다. 네압볼리는 당시 빌립보 시를 위한 항구 도시였으며 현재는 '까발라'라고 부른다. 바울이 3차 여행을 마치고 네압볼리에서 드로아로 돌아갈때에는 5일이나 걸렸다(행20:6). 네압볼리는 “새로운 성읍”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드라게 지방에 속했으나 나중에 제1,2 아테네 동맹국의 한부분이 되었고 결국 로마령의 마케도냐 영지에 속하게 되었다. 오늘날 네압볼리는 그리스 마케도냐 지방의 현재적인 항구이며 데살로니가 다음가는 제2의 도시로 전체인구는 약 20만명 쯤된다

 

안디옥 | 성지순례
2005.04.10


 


안디옥 지도

 

안디옥


현재명은 안타키아이다.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 오론테스강가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졌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셀류시드왕조 때 수도로, 로마시대에 아시아 수도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와 같은 로마도시로 집정관이 다스린 로마시대 동쪽 제1의 도시이다.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이다(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익나티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407년 사망)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526, 528, 529, 540년에 있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페르시아에게 넘어갔으나 유스티안 비잔틴 황제에의하여 탈환되었다가 636년 아랍인에게 넘어갔다. 그후 셀쥭, 십자군, 아르메니안에의해 침공을 받았으나 이 중에서도 그 중요성은 유지되어 실크, 유리세공, 비누, 고리가공등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마물국 술탄이 1268년 황폐화시킨 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1516년 터키가 차지했을 때는 작은 도시로 남았다. 주전 300년 5월 22일 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많은 신전과 공공건물이 장식되었고 아폴로신전에서 열린 경기와 연회의 화려함과 극치는 동쪽 모두에 잘 알려졌다. 안디옥 고고학 박물관에는 로마모자이크 바닥이 남아있고 실피우스(Silpius) 산 정상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망대가 위치하고 그 망대는 몇 번 재건되었다. 산 기슭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은 초대 안디옥 성도들이 모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동굴 안에는 매우 낡은 아마 비잔틴 시대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가 있다.

 


안디옥 시내 전경

 


안디옥 베드로 교회 기도굴

 


베드로 기념교회

 


베드로교회 내부

 


베드로교회 안내문

 


교회 안 베드로 동상

 


안디옥개신교회(광림교회에서 개척)

 

스테반 집사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 정착하여 안디옥 교회를 형성하였다. 누가에 의하면 안디옥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행11:25-26),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 할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안디옥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하였는데 바나바는 먼저 고향인 다소에 피신해 있는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1년간 안디옥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다. 그 후 이곳은 이방인 선교사인 바울의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AD 45-47년 팔레스티나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 지자 안디옥 교회는 성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한다.

 


안디옥 개신교회

 


안디옥 개신교회 내부


라오디게아 | 성지순례
2005.04.12


옛 라오디게아 도시 복원 중

 


라오디게아에서 보이는 히에라볼리 파묵칼레(온천수)

 


라오디게아의 양떼(모피가 유명한 곳)

 


온천수를 공급하던 수로(오는 도중 미지근해졌다)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 교회 추정

 


 라오디게아 교회 안내판

 

라오디케아는 현재명도 라오디케아 이다. 라오디게아는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이며,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셀레우시드 왕가의 안티오쿠스 2세가 그의 부인 라오디세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 불렀다고 한다. 300m 언덕 위에 위치한 도시인 이 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목욕탕 등의 유적이 있으나 고고학적 발굴은 신통치 않다. 라오디게아 교회 터는 유적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교회라 추정되는 이유는 교회에서 사용되었을 만한 십자가 문양이 있는 돌들이 늘려있기 때문이다. 성경(계 3:14)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 때 완전히 파괴되었으며,이곳에서 운동장과 원형극장 터가 발견되었다. 당시 라오디케아는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으므로 재물의 유혹과 생활의 편안함으로 미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다. 특히 라오디케아 지역은 물이 좋지않아 멀리 히에라볼리 파묵칼레로 부터 관을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또한 골로새로부터는 냉수를 공급받았으나 오는 도중 물이 식어 미지근 하게 되었다


비시디아 안디옥 | 성지순례
2005.04.12


비시디아 안디옥 바울 기념교회 터(비잔틴시대)

 


바울 기념교회

 


바울 기념교회 강단 부분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 올라가는 도로

 


유적지

 


유적지 야외 음악당

 

비시디아 안디옥


현재명은 Yalobatch 이다.  BC 25년경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재정비되고 티베리우스 황제하에서 꾸준한 발전을 이룩한 안디옥 도시는 사도바울 당시 비시디아 지방의 수도로서 그곳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 이방인들도 대거 거주하는 대도시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아나톨리아 지역의 선교센터지역으로서 비시디아 안디옥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이곳에서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의 문을 열게되고 또 열정을 바치게된다.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곳으로(11:27)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메테오라(그리스 중세기 수도원) | 성지순례
2005.04.12


바위위의 수도원

 

 

 

 


마을에서 본 바위들

 


바실 수도원안의 성화

 


바실 수도원 내부

 


바실 수도원 내 성화

 

 

 


절벽위에 세워진 수도원

 


 메타모르포시스 수도원, 해발 500m

 

아타나시오스에 의해 세워진 메테오라의 첫번째 수도원으로, 1382년이전부터 건립되어 수도사 요하사프에 의해 완공되었습니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은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가장 크고 높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가장 오래된 수도원입니다.   이곳에는 14세기 중반에 세워진 24M 높이의 둥근 천정의 교회(Katholikon)가 있습니다. 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본당이 있으며, 천정에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기간 중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형, 십자가에 못박힘과 부활, 그리고 참혹한 죽음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본당 맞은편에는 이곳에서 사망한 수도사들의 해골과 뼈로 가득찬 방이 있습니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에는 이곳의 설립자인 수도사 아타나시오스와 요아사프의 검은 턱수염을 한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그리스도의 삶을 비롯해 불가리아를 침략할 때 사용하던 고대의 성 데미트리우스의 창등 비잔틴 후기의 뛰어난 성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에 사용된 돔으로 된 식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상과 필사본, 판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 니콜라오스 수도원

카스트리키에서 메테오라로 가는 중에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수도원으로, 아나파프사로도 불리우는 성 니콜라스를 기리는 수도원입니다. 1388년에 세워져 1628년에 확장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상태가 악화되어 더 이상 일반에게는 개방되지 않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세워진 돔으로 된 작은 교회에는 크레타 화가 테오파네스가 1527년에 그린 '최후의 심판'과 '천국'을 묘사한 가장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성 루사누 수도원

수녀로 개종한 성 바바라를 기리기 위해 14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입니다. 1545년경 이오안니나에서 온 두 수도사 요하사프와 막시모스에 의해 확장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계곡 아래로 메테오라의 경관을 내려다 보기에 그만인 곳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한 포스터나 가이드북 등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위 위에 직접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그 벽이 약화되면서 루사노는 1980년에 황폐화되었습니다.  성 바바라를 기리는 16세기에 세워진 작은 십자형 교회가 있으며, 이곳에는 크레타인들이 그린 교회의 무자비한 수난을 묘사한 뛰어난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성 바를라암 수도원

 


 성 바를라암 수도원 예수 프레스코화, 16세기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

다른 수도원들과 비교해 작은 편이지만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다른 수도원들에 비하면 쉽게 도달할수 있어서인지 현재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행자들에게도 가장 인기가 높은 편입니다. 내부는 밝게 빛나고 대 메테오른이나 발람 수도원보다도 더 넓습니다. 이곳에는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1개의 작은 본당이 있는 성 스테파노스 교회가 있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는 아름다운 황금 잎새 조각상과 벽화, 오래된 성상들을 볼수 있습니다. 또한 역병을 피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녔던 것으로 보이는 성 카랄람보스의 성스러운 두상이 은그릇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메테오라(Meteora)는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라는 뜻으로, 바다속의 기암군이 형성되어 만들어진 지역입니다.  11세기이후로 중세의 수도사들은 일반인이 쉽게 근접할수 없는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이 곳 메테오라의 바위산 정상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숱한 어려움속에서도 15세기에 은둔의 극치를 보여주며 고립된 암벽 위에 24개나 되는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속세와의 차단을 위해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해 끌어올리는 방법 뿐이었습니다.
메테오라의 고립된 수도원들은 그리스 정교가 중세의 오토만 투르크의 그리스 점령(1453~1829)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종교적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를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곳의 16세기 프레스코화들은 비잔틴 후기 회화의 발전상을 살펴볼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치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은 천년의 풍상을 견뎌내고 지금도 바위 산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관은 1980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 수도원들은 터는 비좁았지만 수도사의 개인 기도실과 물 탱크, 교회당, 휴게실 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수도사들의 식당(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이 흥미를 끌고 있으며, 아기오스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1510년 세워졌으며 내부에 잘 보존된 프레스코화가 있음)과 아기아 모니 수도원(1315년경 세워짐)에는 수많은 필사본과 희귀본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도 있습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한곳 만이 남아있으며, 대부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25년부터 바위를 깎아 진입도로를 만들기 시작해 지금은 쉽게 출입할수 있게 되었으며, 특이하게도 여자들의 경우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치마를 입어야만 관람이 허용됩니다

 
밧모섬(그리스 지역) | 성지순례
2005.04.12


요한이 기도하던 동굴교회

 

항구 스칼라에서 코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계시의 동굴이 있는데 현재는 계시 수도원으로 덮혀이다. 이 동굴은 또한 정교회와 천주교간의 우호적 대화가 있었던 장소이다. 동굴로 내려가다보면 내부 정원을 통과하여 몇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때 만나는 오른쪽에 만나는 예배소가 성 알테미오스(18세기) 예배소이다. 계속 내려가다 교회 앞 넓은 홀(나르텍스)의 오른 쪽 돔과 성 안나 종탑을 왼쪽에 보게된다. 더 내려가면 성안나 교회 입구와 동굴에 이른다. 입구에 있는 비문은 인상적이다. "이 장소가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전이다" 앞으로 곧장 들어가면 성 안나 교회에 이른다. 전통에 따르면 11세기에 이곳에 호시우스 크리스토둘로스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할 뿐아니라 어머니 마리아, 또 자기를 밧모를 가도록 도와 준 당시 황제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한 것이라한다. 교회 오른 쪽에 고대 동굴의 경사진 천장이 있는데 시작하는 천장 부근에 3가닥으로 갈라진 틈이 있다. 이것은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이 방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1:10) 계시를 들을 때 요한은 동굴이 좁아지는 쪽 한 홈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한의 초상화를 보면 이마에 굳은 살이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기도후 일어설 때 짚었다는 홈이 머리를 두던 홈 오른 쪽에 남아있다(요한은 분명히 오른 손잡이였을 것이다!). 오른 쪽을 쳐다보면 사람이 서서 책을 둘 만한 천연 장소가 있는데 전통에 따르면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 프로코로스가 그의 선생이 지시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고한다.

 


동굴교회 입구

 


동굴 입구

 


계시 동굴 내부

 


동굴 내부(계시가 임할 때 갈라진 바위)

 


동굴 내부

 


동굴 내부

 


요한이 제자 브로고로 집사에게 계시를 대필시키고 있다

 


사도 요한

 

요한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주님께서 요한을 부른 뒤 그는 베드로, 야고보과 함께 제자들 중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중요한 사건(야이로의 딸을 살림, 변화산, 겟세마네 기도)이 있을 때마다예수님으로부터 선별된 인물로 대접받았다.물에 익숙하였던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 주변을 옮겨다니며 전도하실 때 유능한 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통수단인 배를 수배하고 운전하였을 것다. 그래서인지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점과 아버지가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였다는 것을 보면 요한이 어느정도 유력한 집안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5) 그러나 그의 성격은 매우 과격하여 형제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하루에 5,000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할 만큼 큰 능력을 얻었으나 그는 곧 슬픈 소식을 접한다. 그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이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한 조가 된 요한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확고히 하는 등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베드로와 따로 행동하던 요한은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후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데려와 모시고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1-3서)를 기록하였다. 주후 81-96년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기간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요한은 그의 제자 프로코로스와 함께 '계시의 동굴'에서 있을 때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썼다. 또한 요한의 가르침으로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9) 96년 도미티안 박해가 끝나 새 황제 네르바에의해 풀려난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99세까지 장수하다가 104년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에베소 요한교회에 남아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5월 8일에 그를 기념하고 9월 26일 그의 변화(metastasis)를 축하한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이후 순례지가 된 밧모는 7세기 비잔틴과 사라센의 갈등 속에 약탈당하기도 했다. 주후 6-9세기까지 밧모섬은 다른 주변 섬들과 마찬가지로 해적들의 침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동굴 교회에 그려진 요한, 세계적인 초상화

 


스카라항에서 본 밧모섬 전경

 


밧모섬 항구

 


동굴교회에서 본 밧모섬 항구 지역

 

섬 정상의 요한 기념교회

 


기념교회 안 성화(사도요한이 물에 빠진 섬 책임자의 아들을 살려냈다)

 


사도 요한의 장사

 


기념교회 성화

 


사도요한이 세례주던 곳(항구)

 

 


계시록의 내용 성화

 

밧모섬은 그리스의 영토이다. 터키 해안에서는 불과 60㎞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아테네에서는 250㎞나 떨어져 있다. 밧모섬의 크기는 남북이 약 16㎞,동서로는 넓은 곳이 약 10㎞이며 중간 부분은 너비가 불과 1㎞정도밖에 안된다. 해안 굴곡이 심하여 주위 둘레는 약 60㎞에 이르나 면적은 34㎢이다. 주민은 2700여명인데 반 이상이 섬 중앙의 산언덕에 있는 호라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곳의 집들은 대부분 백색이어서 매우 깨끗하게 느껴진다. 이곳의 교통수단은 굴곡이 심한 지형상 특징 때문에 승용차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이 이용된다. 관광객들 역시 오토바이를 빌려 사용한다. 로마제국 시대에 밧모섬은 정치·종교 중범자들의 유배처였는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다. 예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됐다가(주후 95년께·계1:9)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96년 에베소로 귀향하였다. 이곳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곳 채석장에서는 돌을 생산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유배생활 중에 계시를 받았다는 산 중턱의 요한 계시동굴 안에는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갈라졌다고 하는 바위가 있고 바위벽 1m 높이에는 요한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마다 손을 짚어 파였다는 손자국이 있다. 계시 동굴 입구에는 눈이 어두운 요한 대신에 계시의 내용을 대서한 요한의 제자 브로고로 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 6장 5절에 따르면 브로고로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산정상에 요한 수도원이 있다. 요한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성으로 섬을 압도할 듯 버티고 서 있다. 이 수도원은 1088년 수도자 성 크리스둘툴러스가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세웠고 이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요새화된 것이었다. 원래 이 장소는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수도원에는 값진 보물과 희귀한 성경이 많은데 특별히 500년대에 기록한 마가복음은 매장 첫 글자를 순금으로 썼고 나머지는 은으로 썼다. 그리고 해상무역으로 큰 돈을 번 상인들이 안전 항해를 기원하며 많은 보물을 기증,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 있는 계시록의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요한의 초상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화이다. 밧모섬에 기독교가 정착하게 된 것은 바로 요한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이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다른 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이 속속 세워졌고 수도사들의 학문 연구를 위해서 도서관도 세워졌다. 1453년 이후 터키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6세기에는 터키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12년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47년 그리스에 양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뜨거운 태양과 물이 귀한 기후 때문에 약간의 곡식과 채소,포도가 재배될 뿐이다. 요한수도원을 내려와 남쪽길로 항구에 내려오면 엘리야 기념교회가 산 중턱에 자리해 있으며 오른쪽에는 요한신학교가 있다. 요한신학교는 1713년에 창건되었고 그리스정교회 신학교 중 뛰어난 사제들을 배출한 우수한 신학교다.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던 어두운 시기에 사도 요한은 이곳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술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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