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골로새, 터키 괴뢰메, 터키 갑바도기아(데린구유 지하동굴), 빌립보 루디아교회, 빌립보 감옥,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2006. 12. 27. 22:56사진·동영상 자료/2.성지순례 자료

골로새 | 성지순례
2005.04.10


골로새

 


골로새 전경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교회 터

 


골로새에서 찬 약수가 라오디게아로 가는 수로

 

현재명은 Honas이다.  바울 당시보다 수 백년 이전에, 골로새는 소아시아(현재의 터어키)의 주도적인 성읍이었다. 골로새는 루카스 강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에게해 해변이 에베소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동서의 큰 무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다.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골로새는 제 2류의 상업 도시로 축소되었으며, 그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3 참조)에게 세력이나 중요성에 있어서 오랫동안 눌려왔었다. 주요 산업은 직물업으로 '골로시누스(colossinus)'라는 직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해안에서 동쪽지방으로 이어주는 무역로는 이도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주변에 살고있었다(성전세를 낸 수치를 기준하면 약 7,500명의 유대 자유인이 이 주변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골로새가 중요시된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는 동안 에바브라가 회심하여 복음을 골로새에 전달한 사실 때문이었다(1:7,8; 행 19:10 참조). 이때 아직도 연륜이 오래 되지 않은 이 골로새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에바브라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에바브라나 바울에 의해 개종된 다른 어떤 신자의 노력 결과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 교회들 중의 어떤 것들은 가정 교회였다(4:15; 몬 2절 참조). 그런데 그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터키 괴뢰메 | 성지순례
2005.04.10


 



동굴교회들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으로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데린구유나 카이막카르 지하 도시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 되어 있다. 성화들이 많이 파괴된 곳도 있으나 토카트르 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 되어 있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회교인들과 어린이들의 장난으로 초기 성화들이 많이 파괴 되었으나 당시 비잔틴 예술을 이해하는데는 많은 도움을 준다. 어두운 교회의 천정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등이 그려져 있다. 사과교회, 집시교회, 토칼르교회, 성 바르바르 교회 등 수 많은 교회 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등을 주제로 성화가 그려져 있으며, 천정 모퉁이에는 성경 기록자들의 성화도 그려져 있다.

 


동굴교회

 


동굴교회

 


토칼러 동굴교회 안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벽화

 


동굴교회 내 벽화

 


벽화

 


벽화

 

괴레메


이곳 '괴레메'는 카파도키아의 중심도시로 카파도키아의 관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는 명소이다. 카파도키아 투어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인지 주변은 온통 여행사와 호텔이 많이 있다. 한편 괴레메는 비잔틴 시대의 예배당과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마을 외곽 2km에 자리한 괴뢰메 계곡에는 야외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예수의 생애를 묘사한 벽화가 있는 사과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성 헬레나의 초상화가 있는 뱀 교회, 최후의 만찬이 벽에 그려져 있 는 카란르코 교회, 그리고 괴레메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화려한 실 내장식과 뛰어난 보존상태로 사랑받고 있는 바클 교회가 있다.  교회입구에 사과나무가 있었다는 "사과교회", 벽화에 그려진 사람이 샌들을 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 "샌들교회", 그리고 특히 푸른색의 벽화가 아름다운, "토칼르 교회" 등, 수없이 많은 교회가 있다.


터키 갑바도기아(데린구유 지하동굴) | 성지순례
2005.04.10


데린구유 내부 설명도(초대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있던 지하 동굴 도시)

 


지하 동굴 공기 순환구

 


데린구유 수로관

 


동굴 안 신학교

 


동굴 안 교회

 


동굴안 교회

 


동굴 내부

 


동굴 내부

 


동굴 내부 모형도(지하 18층)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구유와 카이막카르 지하 도시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현재 6층까지만 개방하고 있었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의 넓이가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다. 지하 도시 안에는 평상시에 밖에서 사료를 날라다가 저장해 둘 뿐 아니라 추수한 곡식들이 서늘한 지하 도시에 보관되고, 비상시 음료수를 위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를 놓아둔 흔적들도 있다. 땅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또한 이것을 지하 공기를 맑게 해 주는 통풍 장치로 원용하였다. 동굴 중간 중간에는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둥근 맷돌 모양의 큰 석물도 놓여 있다.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허리를 굽혀야만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넓이이다. 20,000명 정도 수용되는 이 지하 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 부엌, 교회,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 성찬및 세례식을 갖는 장소, 신학교, 지하 매장지 등 도시 기능을 완전히 갖추었다. 또한 적이 쳐들어왔을 때, 긴급하게 타 지하도시로 피신 할 수 있는 지하 터널이 무려 9 Km 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같은 지하 도시가 이 지역에 36개 정도가 있다. 이 지하 도시에는 일체의 성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빌립보 루디아 기념교회 | 성지순례
2005.04.12


 

 


루디아 기념교회

 

바울이 루디아 여인을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한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매년 5월 20일 루디아의 축일로 지켜오고 있다.

 


기념교회안의 세례대

 


교회안 돔에 그려져있는 모자이크 그림

 

루디아의 회심과 세례를 기념하여 지은 그리이스 동방정교 교회의 주요 돔의 모자이크로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의 형상이다. 하늘로부터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도 있다

 


바울이 세례주던 곳(루디아의 기도처)

 

빌립보의 광장의 서쪽면에 있는바울이 기도하고자 모인 여인을 만난 전통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Krenides강과 현재 만들어 놓은 세례처이다. 사도행전에서는 회당이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빌립보(로마의 식민지)에서의 유대인 사회는 매우 작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룹으로부터  Thyatira(아시아/터어키)에서 자주장사였던 루디아는 개종을 하였다(행 16:14-15).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가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기념교회안의 바울

 


 바울과 루디아

 


 기념교회안의 루디아 성화

 


루디아

 

루디아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 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다. 바울 일행은 문밖 강가, 즉 오늘도 흐르고 있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두아디라(오늘의 터키 지역으로써 터키의 명으로는 아키사르(Akhisar)로 카페트의 산지로 유명하다.)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다. 루디아 여인이 히브리 사람들이나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문밖 강가에 있었던 것도 필시 루디아 여인은 두아디라성에 장사를 하러 자주 왕래하는 연고로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또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이미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Thyatir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의 염색공업의 중심지이다. 자주장사는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했던 것이다.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당시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다. 바울 사도는 루디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바울과 빌립보 전도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누가와 동행하여이곳에 교회를 세웠다.(행 16) 빌립보에서 바울은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자주 장사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렀다(행 16: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뒤 치안관들의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행 16:16-40)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 이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3차 전도여행 때도 두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바울은 다른 지역의 선교 활동 중에도 빌립보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행 16:12-40, 살전 2:2, 고전 7:5-7, 빌 4:15-16). 그런데 바울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비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을 도우러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은 그를 보내며 빌립보서를 썼다. 사도 바울은 빌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행 17:1)현재 빌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교회, 바울이 갇혔던 감옥등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아볼로니아(그리스) | 성지순례
2005.04.12



아볼로니아 옛 성

 


바울이 설교하던 곳

 


바울이 설교하던 언덕

 

아볼로니아 및 데살로니가 전도(사도행전 17:1-9)

 

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루러 복음을 전합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전합니다. 헬라인의 무리들은 바울의 권면을 받고 그들을 좇았지만 유대인들은 깡패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괴롭히고 매도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야손의 집에 거하였던 바울과 실라는 다른곳으로 그들을 피해 있었습니다. 야손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붙잡혀갔다가 보석으로 석방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그리스) | 성지순례
2005.04.12


 


데오도시우스 교회

 

데살로니카는 기원전 315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동생 카스텔이 대왕의 누이동생이며, 지기 아내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다. 당시 데살로니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이스인이었고, 상당수의 유대인,로마인, 그 외 다른 민족들이 있었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와 로마의 교차지이며, 군사 지역, 상업도시, 그리고 그리이스 철학이 뿌리를 깊게 내린 곳이다. 7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은 후 데살로니카는 동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다음가는 대도시로 번창했다. 1430년 이후 거의 500년 동안이나 터어키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에 와서야 그리이스인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인구 100만 정도의 그리이스 제2의 도시이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카에 간 것은 50-51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였다. 바울은 이곳에서 적어도 몇달을 머물렀으며,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돌리자 하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몇몇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으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 들은 바울이 유대교를 배신한 변절자로 단죄하고 바울을 고소하여 내 쫓을 기회만 노리다가 바울이 유숙하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때 바울은 실라와 같이 간신히 탈출하여 베레아로 갔다.

 


데오도시우스 교회 내부

 


데오도시우스 교회 분수대

 


성 에카테리니 성당, 13세기

 


성 니콜라스 오르파노스 성당

 


성 소피아 성당, 8세기

 


갈레리우스 황제 개선문 부조

 


성 디미트리오 성당 아이콘

 


데살로니카 시내

 


데살로니가 해변

 


데살로니가 하얀성

 


하얀성 공원 알렉산더 대왕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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