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27. 22:41ㆍ사진·동영상 자료/2.성지순례 자료
이집트 카이로 북쪽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알렉산더대왕이 세운 도시다. 이곳에 마가의 교회가 있다. 마가교회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교회다. 교회 안에는 마가 시대 이후부터 그 교회를 대표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비석이 있고, 바로 그 자리 밑에는 마가가 묻혀있는 무덤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1~2세기 경의 카타콤은 이집트에서는 유일한 로마 시대의 부유한 개인의(가족) 무덤으로서 암반을 깍아 만든 수직 무덤인데 내부는 삼층으로 되어 있고 실내 장치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혼돈된 특이한 무덤 장치가 당시의 종교관을 짐작케하는 아주 이채로운 유산이다. 이 지하 무덤은 후일 로마의 기독교도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 기독교도들이 은신처로 사용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성 마가가 이집트에 들어와서 최초의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케한 유태인 신발수선공의 옛 집터에 세워진 마가 기념교회와 그 지하에 있는 성 마가의 머리가 묻혀 있는 지하 무덤은 현재 애굽 정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하 1층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는데 마가의 일생에 대해서 보여준다.
첫번째 그림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그림이다. 두번째 그림은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세번째 그림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물로 세례를 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는 그림이다. 네번째 그림은 콥틱에서 내려오는 구전에 대한 그림인데 마가가 구두 수선공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다. 다섯번째 그림은 마가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섯번째 그림은 마가가 순교하는 모습이다. 일곱번째 그림은 마가에게 복음을 전해들었던 구두 수선공은 마가의 순교 이후에 성경을 연구하는 학교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구두수선공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콥틱의 야사에는 과거 무슬림들의 박해를 받던 시절에 어느날 높은 지위에 있던 무슬림 사제가 콥틱교도들이 모여살던 카타콤에 왔다. 그 무슬림은 콥틱교 사제에게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진짜가 아니다. 만약 내가 다시 왔을 때 너희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곳을 없애겠다고 했다 한다. 콥틱 사제가 고민하며 기도하던 때에 천사가 사제에게 말하길 '지금 네가 나가서 길거리를 걷다보면 한쪽 눈이 없는 구두수선공을 만날 것인데, 그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라' 고 했다 한다. 그 말을 믿은 사제가 길거리를 걷는데 과연 한쪽 눈이 없는 거지같은 몰골을 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한 사제는 그 거지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기도 합시다. 기도하면 다 이루어집니다." 사제는 그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서 함께 열심으로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무슬림 사제가 온다던 바로 그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근처에 있던 큰 바위가 실제로 하늘로 붕 떠올랐다고 한다. 또한 바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 무슬림 사제는 그 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콥틱교도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무슬림들의 역사서를 들여다보면, 실제로 높은 지위에 있던 한 무슬림이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별다른 설명없이 미쳐서 그렇게 됐다고 적혀있다. 이 카타콤은 지금도 카이로에 있는데, 이곳은 굉장히 성스러운 성지로 알려져있고, 많은 콥틱교도들 찾아가고 있다.
얍복강(요르단)
얍복강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창세기 32장 22∼32절에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나루를 건널새”로 시작한다. 얍복강은 야곱과 천사와 씨름한 곳이다. 이곳에서 야곱은 자아가 깨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받게 되었다. 오늘날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굴곡이 심한 얍복강은 전장이 96㎞며 대부분 협곡을 이루어 자연경계를 만들고, 길르앗을 남북으로 나눈다.
호르산(시리아)
호르산
호르산(아론의 산, 자발 하룬)
가데스에서 광야로 들어간 출애굽 여정 38년간의 생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다만 출애굽 후 40년 5월 1일 에돔 국경 호르산에서 아론이 죽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 호르산은 오늘날 페트라의 꼭대기에 있는 해발 1,593m의 자발 하룬(아론의 산)에 해당한다. 페트라 내의 박물관 아래에 있는 제벨 하비스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페트라 꼭대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성경의 호르산으로 현지 지명으로는 '아론의 산' 이라는 의미의 '자발 하룬' 이라 불린다. 아론을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하룬으로 부른다. 산 꼭대기의 아론 무덤에는 비잔틴 시대에는 돔형의 건물과 오벨리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스크 형태의 건물이 남아 있다.
민수기 20장 아론의 죽음
22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에서 진행하여 호르산에 이르렀더니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가라사대
24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
25 너는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산에 오르니라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29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의 죽은 것을 보고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였더라
시내산과 성 카다린수도원
시내산
홍해 북쪽에 돌출한 시내 반도 안에 있는 산이다. 그 이름의 뜻은 "수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산에서 1년간 유하는 동안에 여호와가 모세를 불러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다(출20:1-17). (2)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한 일이 있다 (출32:4,행7:30,46). (3) 백성의 수를 조사한 것, 아비후가 거룩하지 못한 불로 분향하므로 멸망 받은 곳, 모세가 성막을 처음친 곳이 전부 이 산이다(민1:18,레10:1-2출26:30). (4) 엘리야 선지가 이세벨을 피해 40일만에 이 산에 이르렀다(왕상19:8). 1859년 독일 학자 디신딥이 이 산중 한 사원에서 고분 성경을 발견 하였는데 주후 300년경에 초한 것으로 현재에 전래하는 최고의 시내 사본인데 소련의 베드로그라드 헬라 교회당에 보관되어 있다. 홍해 북에 돌출한 시내 반도 안에 있는 산으로 모세가 출애굽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았던 바위산이다. 붉은빛이 감돌고 울퉁불퉁 골이 진 화강암으로 뒤엉긴 산줄기가 아침 햇살을 받으면 더욱 신비로운 생동감을 주는데, 시간에 따라 그 빛깔이 바뀐다. 시내산은 시내광야의 산악지대에 있는 한 산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날 가장 유력시 되는 견해는 시내산을 파이란 오아시스를 지나면 나오는 호렙산 줄기의 최고봉 무사산(아랍명 Jebel Musa(모세의 산), 2286m)과 그로부터 3.2km 서남쪽에 있는 카타린산(아랍명 Jeble Katarin; 2,621m)과 서북쪽에 있는 "라스 에스 사프사페"(Ras es-Safsafeh; 1993m) 사이의 세 정상중 한 곳으로 잡고 있다.
전통적인 주장은 무사산이라고 생각된다. 이 "무사산" 동쪽 기슭에 있는 그리스정교의 성(聖)카타리나 수도원 서고에서 1844년 시나이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시나이 사본은 4세기에 만들어진 헤브라이어 성서 사본으로서 성경 원문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이 산은 일찍부터 성스러운 산(Holy Mountain)으로서, "야훼의 산"으로도 불렀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이 산에 올라 타지 않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리는 야훼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민족 해방의 소명을 받은 다음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고, 다시 이 산에 올라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성 카타린 수도원
성 카타린 수도원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시내산 기슭의 희랍 정교회에 속하는 성 카타린 수도원이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로마 제국 시대에 순교한 어느 귀족의 딸 이름을 딴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서가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유수티니아누스(Justinianus)황제의 명에 의해 건립된 후 지금까지 1,400년 이상 한 번도 파괴되거나 정복당한 일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시내산 자락을 지켜오고 있다. 과거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수도원의 문을 잠그고 밧줄로 연결된 광주리를 타고 오르내렸다고한다. 오늘날은 한 사람 정도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를 통해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1,400여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도사들이 하루에 두 번씩, 4시간 동안 장엄한 예배를 드려온 곳이다. 교회의 전면 벽은 예수와 모세,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들과 제자들을 나타낸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 작품가운데 하나는 세계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수도원의 경내에는 모세가 보았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시나이 반도 남부에서만 자라는 독특한 종류로서 여러 차례 다른 곳에 이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수도원내의 도서관은 귀중한 성경 사본과 성경 희귀본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3,000점 이상의 고대 성경 사본과 5,000권 이상의 희귀한 성경들이 있다. 바티칸의 교황청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 사본과 희귀성경들을 많이 소장한 곳이다. 바로 이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19세기 중엽 독일의 티센돌프가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수도원을 세 번 방문한 끝에 시내산 사본을 찾아냈다(1859). 서기 300년대 후반에 필사된 것으로 신약 성경 전체가 수록된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사본이다. 티센돌프는 이 귀중한 사본을 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당시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였던 제정 러시아 황제에게 기증하였다. 그는 수도원 측으로부터 사본을 기증 받았다고 했다. 그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제정 적으로 쪼들린 소련은 1933년 이 사본을 10만 파운드 받고 영국에 팔았다. 현재 이 귀중한 사본은 세계적인 보물로 대영 박물관에 깊숙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수도원 측에서는 티센돌프가 사본을 가지고 갈 때 "연구가 끝나는 대로 반환하겠다"는 각서를 써놓고 빌려간 뒤돌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독일어와 라틴어로 써놓은 각서는 지금도 수도원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975년 9월 이 수도원에서 또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퇴락한 방을 고치기 위해 벽을 헐었을 때벽과 벽사이의 공간에서 50상자 분의 수많은 성경 사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수도원 측에서는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으나 결국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극소수의 세계적인 학자들만이 30분간의 제약된 시간 안에 구경이나 했을 뿐이다. 독일의 마틴 헹겔은 "사해사본 발견이후 최대의 사본 발견"이라고 했다.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수도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San Francesco ; St. Francisco) 수도원
아씨시는 이탈리아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도시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프란치스꼬 성인이 태어났고 또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1182년 아씨시에서 프랑스에까지 지점을 둘 정도의 큰 상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젊은 시절의 프란치시꼬는 아씨시 청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재산을 낭비하며 방종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프란치스꼬가 아씨시와 페루지아간에 벌어진 싸움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니, 단테의 말을 빌리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점진적으로 좀더 뚜렷한 양상을 띄어 마침내 그의 동료들은 프란치스꼬가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자문하던 중 뜻밖에 한 나병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환자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한다. 두 번째의 체험은 어느 날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주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으로부터 "프란치스꼬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말이 들려와, 그는 돌을 수집하여 몰탈을 만들어 소성당을 재건했다. 한번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해"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내적 부를 얻었다.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건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태오10, 9-10)하신 말씀을 듣고,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이런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게 수도원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의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꼬가 '알베나'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친히 양 손, 양 발, 그리고 늑방에다 오상(五傷)을 박아 주셨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오상은 주의 상처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는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1226년 10월 3일 죽을 때까지 이런 시련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쳤다. 44세의 짧은 일생 동안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여러 불가사의한 일과 사후에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임종한 지 3년 후인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프란치스꼬 수도원과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했는데 2층에 성당이 있고,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28개의 벽화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베드로성당(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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