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가교회, 마가무덤(이집트), 얍복강(요르단), 호르산(시리아), 시내산과 카다린수도원, 성프란시스코수도원(이탈리아), 베드로성당(로마)

2006. 12. 27. 22:41사진·동영상 자료/2.성지순례 자료

마가교회, 마가무덤(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마가교회(St. Mark)


이집트 카이로 북쪽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알렉산더대왕이 세운 도시다. 이곳에 마가의 교회가 있다. 마가교회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교회다. 교회 안에는 마가 시대 이후부터 그 교회를 대표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비석이 있고, 바로 그 자리 밑에는 마가가 묻혀있는 무덤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1~2세기 경의 카타콤은 이집트에서는 유일한 로마 시대의 부유한 개인의(가족) 무덤으로서 암반을 깍아 만든 수직 무덤인데 내부는 삼층으로 되어 있고 실내 장치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혼돈된 특이한 무덤 장치가 당시의 종교관을 짐작케하는 아주 이채로운 유산이다.  이 지하 무덤은 후일 로마의 기독교도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 기독교도들이 은신처로 사용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성 마가가 이집트에 들어와서 최초의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케한 유태인 신발수선공의 옛 집터에 세워진 마가 기념교회와 그 지하에 있는 성 마가의 머리가 묻혀 있는 지하 무덤은 현재 애굽 정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마가의 일생을 보여주는 벽화

 

지하 1층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는데 마가의 일생에 대해서 보여준다. 

첫번째 그림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그림이다. 두번째 그림은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세번째 그림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물로 세례를 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는 그림이다. 네번째 그림은 콥틱에서 내려오는 구전에 대한 그림인데 마가가 구두 수선공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다. 다섯번째 그림은 마가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섯번째 그림은 마가가 순교하는 모습이다. 일곱번째 그림은 마가에게 복음을 전해들었던 구두 수선공은 마가의 순교 이후에 성경을 연구하는 학교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구두수선공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콥틱의 야사에는 과거 무슬림들의 박해를 받던 시절에 어느날 높은 지위에 있던 무슬림 사제가 콥틱교도들이 모여살던 카타콤에 왔다.  그 무슬림은 콥틱교 사제에게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진짜가 아니다. 만약 내가 다시 왔을 때 너희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곳을 없애겠다고 했다 한다. 콥틱 사제가 고민하며 기도하던 때에 천사가 사제에게 말하길 '지금 네가 나가서 길거리를 걷다보면 한쪽 눈이 없는 구두수선공을 만날 것인데, 그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라' 고 했다 한다. 그 말을 믿은 사제가 길거리를 걷는데 과연 한쪽 눈이 없는 거지같은 몰골을 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한 사제는 그 거지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기도 합시다. 기도하면 다 이루어집니다."   사제는 그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서 함께 열심으로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무슬림 사제가 온다던 바로 그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근처에 있던 큰 바위가 실제로 하늘로 붕 떠올랐다고 한다. 또한 바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본 무슬림 사제는 그 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콥틱교도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무슬림들의 역사서를 들여다보면, 실제로 높은 지위에 있던 한 무슬림이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별다른 설명없이 미쳐서 그렇게 됐다고 적혀있다.   이 카타콤은 지금도 카이로에 있는데, 이곳은 굉장히 성스러운 성지로 알려져있고, 많은 콥틱교도들 찾아가고 있다.

 

얍복강(요르단)


얍복강

 


얍복강

 


얍복강가의 천사와 야곱의 싸움, 고갱, 1888

 


야곱과 천사의 싸움, 들르크로와, 1861

 


야곱과 천사의 싸움

 

 

얍복강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창세기 32장 22∼32절에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나루를 건널새”로 시작한다. 얍복강은 야곱과 천사와 씨름한 곳이다.  이곳에서 야곱은 자아가 깨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받게 되었다. 오늘날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굴곡이 심한 얍복강은 전장이 96㎞며 대부분 협곡을 이루어 자연경계를 만들고, 길르앗을 남북으로 나눈다.

 

호르산(시리아)


호르산

 


호르산

 


호르산

 


호르산

 

호르산(아론의 산, 자발 하룬)


가데스에서 광야로 들어간 출애굽 여정 38년간의 생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다만 출애굽 후 40년 5월 1일 에돔 국경 호르산에서 아론이 죽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 호르산은 오늘날 페트라의 꼭대기에 있는 해발 1,593m의 자발 하룬(아론의 산)에 해당한다. 페트라 내의 박물관 아래에 있는 제벨 하비스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페트라 꼭대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성경의 호르산으로 현지 지명으로는 '아론의 산' 이라는 의미의 '자발 하룬' 이라 불린다. 아론을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하룬으로 부른다. 산 꼭대기의 아론 무덤에는 비잔틴 시대에는 돔형의 건물과 오벨리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스크 형태의 건물이 남아 있다.


 

민수기 20장  아론의 죽음


22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에서 진행하여 호르산에 이르렀더니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가라사대

24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

25 너는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산에 오르니라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29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의 죽은 것을 보고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였더라

 

시내산과 성 카다린수도원


시내산

 


시내산 정상 모세기념교회

 


시내산 정상 모세기념교회

 


시내산 아래 백성들이 진 쳤던곳

 


시내 광야

 


시내산 중턱의 모세 우물

 

시내산


홍해 북쪽에 돌출한 시내 반도 안에 있는 산이다. 그 이름의 뜻은 "수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산에서 1년간 유하는 동안에 여호와가 모세를 불러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다(출20:1-17). (2)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한 일이 있다 (출32:4,행7:30,46). (3) 백성의 수를 조사한 것, 아비후가 거룩하지 못한 불로 분향하므로 멸망 받은 곳, 모세가 성막을 처음친 곳이 전부 이 산이다(민1:18,레10:1-2출26:30). (4) 엘리야 선지가 이세벨을 피해 40일만에 이 산에 이르렀다(왕상19:8). 1859년 독일 학자 디신딥이 이 산중 한 사원에서 고분 성경을 발견 하였는데 주후 300년경에 초한 것으로 현재에 전래하는 최고의 시내 사본인데 소련의 베드로그라드 헬라 교회당에 보관되어 있다. 홍해 북에 돌출한 시내 반도 안에 있는 산으로 모세가 출애굽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았던 바위산이다. 붉은빛이 감돌고 울퉁불퉁 골이 진 화강암으로 뒤엉긴 산줄기가 아침 햇살을 받으면 더욱 신비로운 생동감을 주는데, 시간에 따라 그 빛깔이 바뀐다. 시내산은 시내광야의 산악지대에 있는 한 산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날 가장 유력시 되는 견해는 시내산을 파이란 오아시스를 지나면 나오는 호렙산 줄기의 최고봉 무사산(아랍명 Jebel Musa(모세의 산), 2286m)과 그로부터 3.2km 서남쪽에 있는 카타린산(아랍명 Jeble Katarin; 2,621m)과 서북쪽에 있는 "라스 에스 사프사페"(Ras es-Safsafeh; 1993m) 사이의 세 정상중 한 곳으로 잡고 있다.

전통적인 주장은 무사산이라고 생각된다. 이 "무사산" 동쪽 기슭에 있는 그리스정교의 성(聖)카타리나 수도원 서고에서 1844년 시나이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시나이 사본은 4세기에 만들어진 헤브라이어 성서 사본으로서 성경 원문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이 산은 일찍부터 성스러운 산(Holy Mountain)으로서, "야훼의 산"으로도 불렀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이 산에 올라 타지 않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리는 야훼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민족 해방의 소명을 받은 다음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고, 다시 이 산에 올라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성 카타린 수도원

 


성 캐더린 수도원

 


수도원 내 가시떨기나무

 


수도원 내 가시떨기나무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 내 모세 벽화

 


수도원 내 천정화

 

성 카타린 수도원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시내산 기슭의 희랍 정교회에 속하는 성 카타린 수도원이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로마 제국 시대에 순교한 어느 귀족의 딸 이름을 딴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서가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유수티니아누스(Justinianus)황제의 명에 의해 건립된 후 지금까지 1,400년 이상 한 번도 파괴되거나 정복당한 일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시내산 자락을 지켜오고 있다. 과거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수도원의 문을 잠그고 밧줄로 연결된 광주리를 타고 오르내렸다고한다. 오늘날은 한 사람 정도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를 통해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1,400여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도사들이 하루에 두 번씩, 4시간 동안 장엄한 예배를 드려온 곳이다. 교회의 전면 벽은 예수와 모세, 엘리야 그리고 예언자들과 제자들을 나타낸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 작품가운데 하나는 세계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수도원의 경내에는 모세가 보았다는 것과 같은 종류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시나이 반도 남부에서만 자라는 독특한 종류로서 여러 차례 다른 곳에 이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수도원내의 도서관은 귀중한 성경 사본과 성경 희귀본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3,000점 이상의 고대 성경 사본과 5,000권 이상의 희귀한 성경들이 있다. 바티칸의 교황청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 사본과 희귀성경들을 많이 소장한 곳이다. 바로 이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19세기 중엽 독일의 티센돌프가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 수도원을 세 번 방문한 끝에 시내산 사본을 찾아냈다(1859). 서기 300년대 후반에 필사된 것으로 신약 성경 전체가 수록된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사본이다. 티센돌프는 이 귀중한 사본을 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당시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였던 제정 러시아 황제에게 기증하였다. 그는 수도원 측으로부터 사본을 기증 받았다고 했다. 그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제정 적으로 쪼들린 소련은 1933년 이 사본을 10만 파운드 받고 영국에 팔았다. 현재 이 귀중한 사본은 세계적인 보물로 대영 박물관에 깊숙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수도원 측에서는 티센돌프가 사본을 가지고 갈 때 "연구가 끝나는 대로 반환하겠다"는 각서를 써놓고 빌려간 뒤돌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독일어와 라틴어로 써놓은 각서는 지금도 수도원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975년 9월 이 수도원에서 또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퇴락한 방을 고치기 위해 벽을 헐었을 때벽과 벽사이의 공간에서 50상자 분의 수많은 성경 사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수도원 측에서는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으나 결국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극소수의 세계적인 학자들만이 30분간의 제약된 시간 안에 구경이나 했을 뿐이다. 독일의 마틴 헹겔은 "사해사본 발견이후 최대의 사본 발견"이라고 했다.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수도원


아씨시 전경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파노라마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의 돌 무덤

 


수도원 내 벽화

 


성 프란시스코가 새에게 설교하는 벽화

 


사막의 성프란체스코,  벨리니

 


 BON, Bartolomeo

 


자연과 함께하는 성 프란시스코

 


성흔을 받는 성 프란시스코, 지오토

 


성 프란시스코, 마타니 그림

 


성 프란시스코의 십자가

 


BERLINGHIERI, Bonaventura

 


성 프란시스코, 치마부에 그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San Francesco ; St. Francisco) 수도원 


아씨시는 이탈리아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도시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프란치스꼬 성인이 태어났고 또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1182년 아씨시에서 프랑스에까지 지점을 둘 정도의 큰 상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젊은 시절의 프란치시꼬는 아씨시 청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재산을 낭비하며 방종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프란치스꼬가 아씨시와 페루지아간에 벌어진 싸움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니, 단테의 말을 빌리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점진적으로 좀더 뚜렷한 양상을 띄어 마침내 그의 동료들은 프란치스꼬가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자문하던 중 뜻밖에 한 나병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환자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한다. 두 번째의 체험은 어느 날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주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으로부터 "프란치스꼬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말이 들려와, 그는 돌을 수집하여 몰탈을 만들어 소성당을 재건했다.  한번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해"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내적 부를 얻었다.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건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태오10, 9-10)하신 말씀을 듣고,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이런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게 수도원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의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꼬가 '알베나'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친히 양 손, 양 발, 그리고 늑방에다 오상(五傷)을 박아 주셨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오상은 주의 상처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는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1226년 10월 3일 죽을 때까지 이런 시련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쳤다. 44세의 짧은 일생 동안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여러 불가사의한 일과 사후에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임종한 지 3년 후인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프란치스꼬 수도원과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했는데 2층에 성당이 있고,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28개의 벽화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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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성당(로마)


베드로 성당 전경

 


성베드로 대광장

 


대광장

 


대광장

 


베드로 성당 광장

 

베드로광장은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을 포함하여 세운 것이다. 흔히 바로크 예술하면 복잡하면서도 장식적인 것으로만 연상되는데, 사실 그 시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대광장의 양쪽에 위치 해 있는 회랑을 살펴보면, 단순한 균형미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시대의 예술가로서 그 시대의 유행이나 사조(思潮)에 예속되지 않고, 항상 더 나은 이상을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대상을 항상 교회를 중심 테마로 잡은 베르니니의 예술 세계를 이 회랑을 통해 볼 수 있다. 광장은 그 폭이 246미터, 광장의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여 미터나 되며,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는 그 높이가 16미터나 된다. 그 위에 140개의 대리석상(주로 그 당시까지의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미터임)이 세워져 있다. 이렇듯 거대한 회랑을 광장 양 옆에 나란히 세운 까닭은,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의 양 팔을 상징한 것이다. 베르니니는 양 팔을 벌리고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종교나 종족, 언어, 관습 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집에 초대한다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성당 정면

 



이 정면의 규모를 수치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높이 45.44미터, 넓이 114.69제곱미터라는 전체적인 규모에, 높이 27미터, 지름 약 3미터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8개가 세워져 있다. 그 정면 바로 윗 부분의 중앙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열한 제자의 대리석상이 있는데, 그 석상의 높이는 6미터에 달하고 있다. 베드로와 사도바울은 광장 양면에 있다. 정면을 바라보면서 가장 오른쪽 끝에는 유다 대신에 제자로 뽑힌 사도 마티아의 석상이 서있다.

 

 


 

 

 

 


대성당 내부

 


2층에서 보는 내부

 


대성당 내부

 


 

우리는 먼저 성당의 규모에 의해 압도를 당한다. 대성당이 세워진 대지는 모두 25.616제곱미터(약85,000평)에 달하며, 중앙 통로의 길이는 187미터, 폭은 140미터, 높이는 46미터이며, 중앙 제대 위에 있는 돔까지의 높이는 137미터이다. 또한 대성당 내부에는 모두 44개의 크고 작은 제대가 있으며, 395개의 조각과 135개의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 내벽과 돔 안쪽에 장식되어 있다. 1700년대의 건축 비평가였던 밀리치아가 대성전에 대해 평한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처음 대성당에 들어오면서 외부에서 받았던 성전의 거대함으로 인한 위압감이, 내부의 잘 조화된 모습들로 인해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제대

 


성 베드로의 무덤


중앙 제대 아래쪽의 작은 벽감 안에 은으로 장식된 작은 상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1740-1758)가 봉헌한 것인데, 그 안에는 교황 리노(제2대 교황으로 사도 베드로 다음의 후계자임)가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오는 영대(카톨릭 교회에서 미사 전례 때에 사제가 장백의 위에 걸치는 것으로, 이는 사제의 직분을 나타낸다. 그 위에 6개의 검은 십자가가 수 놓여져 있다)가 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선정된 주교나,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각국의 주교단들이,사도의 대리자로써 자신들에게 맡겨진 목자의 직분을 충실히 하며, 교계 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거나 갱신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6세기경부터 생긴 교회의 전통으로서, 전세계 그리스도인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성직자, 수도자 등 모두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과 함께 하나의 교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성좌


로마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을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5세기경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흰 상아로 장식하여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것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가 베르니니를 시켜 다시 그 위를 청동으로 장식케 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쨌든 고고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과연 이 의자에 앉았었느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초세기 때부터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그 위에 세웠던 기념비와 함께 내려온 사도의 유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해 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이 청동 의자의 위쪽을 보면, 천연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마치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 안의 중심에 비둘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 비둘기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의미한다. 타원형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또한 타원형의 둥근 모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은 삼위일체, 즉 3이라는 숫자의 종교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모든 숫자 중 가장 완벽한 수를 3이라고 한다. 이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잡고 있는 청동상들을 보면, 앞쪽으로 미트라(Mitra:카톨릭 교회에서 주교들이 미사 중에 쓰는 모자)를 쓰고 있는 청동상은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표적 4대 교부(일명, 교회박사라고도 함)에 속하는 분들이다. 뒤쪽으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아타나시우스로서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4대 교부에 속한다.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들고 있는 교부들의 모습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들이 표명하였던 그들의 교부학 이론이 바로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이는 다시 사도 베드로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의 사실들은 변경되거나 바뀔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의미로는 갈라진 두 교회(동방과 서방)가 일치를 이루어야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니니의 신앙을 기초로 한 예술적 표현은 세기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새롭게 조명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성녀 헬레나               성 안드레아              성녀 베로니카          성 론지노               

중앙 제대 주변의 4개의 대리석상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네군데에 커다란 대리석상들이 있다. 이 대리석상들은 성녀 헬레나, 성녀 베로니카, 성안드레아, 성론지노등의 석상이다. 이 4개의 대리석 위쪽을 보면 사도와 성인들의 상징인 십자가, 베일, 창들을 천사들이 잡고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그 안에는 예루살렘에서 성녀 헬레나가 직접 가져온, 예수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의 일부분과, 성녀 베로니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 준 베일의 일부분,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신 다음 사망 확인을 위해서 당시의 검시관이었던 론지노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전해 오는 원래의 창이 각각 그 속에 넣어져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었던 사도 안드레아의 두 개골은 1400년 그리스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이 두 개골은 1966년 다시 그리스의 파트레에 있는 성안드레아 성당에 보내졌다. 이는 교회의 일치를 원했던 교황 바오로 6세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순 마지막 시기인 성주간 동안에는, 현재 베로니카 성녀상 위쪽에 있는 소성당에서 앞서 말한 십자가, 창, 베일 등의 유품이 일반 신자들에게 특별히 공개되기도 한다.

 


성당 내 돔 천장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미켈란젤로(1475-1564)는 그의 나이 25살 때에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보관중인 다비드상, 그리고 로마 성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서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들어간다. (피에타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임). 이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그의 서명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릎에 안은 성모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들 예수님의 나이에 비해 너무나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성모님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이유를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아스카니오 카우디비가 그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스카니오,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정결한 여자들은 무릇 그 정결함을 고귀하게 유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동정녀로서 잉태하신 성모님의 정결함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젊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분의 처절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그분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양심의 성찰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 바로 나의 의도이다." 우리는 한 예술가를 재조명해 보면서 르네상스의 마지막 대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그저 조각가나 건축설계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의 깊은 신앙심의 바탕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러기에 몇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이적인 찬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베르니니의 천개


이 천개야말로 베르니니의 작품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이것은, 그 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천개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은 이탈리아에서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지방에서 많은 양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금속의 양은 211,427파운드에 달하였다. 그런데도 양이 부족하자, 마침내는 로마에 있는 기원전 1세기 때의 신전인 판테온의 내부 천장의 청동을 떼어서 충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소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것은 바르바리(야만인이라는 뜻)가 한 게 아니라, 바르베리니(교황의 가문)가 한 일이다."라는 말로써 교황을 비꼬기도 하였다. 이 천개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베르니니는, 후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에서 착안되었다고 했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네 명의 천사가 화관(花冠)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 그리고 복음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 삼중관과 열쇠는 사도 베드로를 상징하며, 칼과 복음은 사도 바울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 베드로의 청동상


이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현재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성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5세기경으로 추정)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특히 이 청동상의 발에 입맞추며 기도를 바치는 전통 때문에, 현재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그 원 모양이 없어지고, 이제는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이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제대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變形)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草幕)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忽然)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마태 17, 1-6) 이곳에 있는 모자이크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였던 라파엘로(1483-1520)가 다볼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소재로 1517년에 작업하여, 그가 죽던 해인 1520년에 완성한 마지막 유화 작품(원화는 바티칸 박물관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음)을 본 떠서 모자이크로 제작한 것이다.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와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그려진 부분은 환상적인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성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되어 있고, 중간 부분은 제자들이 놀라는 모습과 경탄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마지막인 아래 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눈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있다. 단지 어린아이 한명만이 옆눈으로 보고 있는데,이는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던 그 당시 사회상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작가는 무릎 꿇은 여인을 그려 넣음으로써 교회를 나타냈고, 죄악에 물든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와 신뢰, 그리고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

 


오벨리스크


광장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1세기 때의 로마 황제 가이오와 네로의 경기장 가운데에 장식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초기에 기념 교회를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남겨 두었다. 이를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6년 4월 30일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약 130여 일 후 같은 해인 9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만 해도 25미터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탑들 중 두 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00톤이나 된다. 이 거대한 탑을 옮기기 위해 그 당시 건축 설계자였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그의 지휘로 900여 명의 인부와, 말 140여 마리 그리고 47대의 권선기를 동원하여 이 어려운 이전 작업을 해냈다고 한다. 이렇게 옮겨 놓은 오벨리스크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음으로써 이 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에 첫 박해를 시작했던 네로가 권력의 상징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이 오벨리스크 탑을 이곳 광장의 중심에 옮겨 놓은 이유는 광장을 장식하거나 해시계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보다는, 더욱 심층적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이곳에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두 개의 분수


오벨리스크 탑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된 두 개의 분수대가 있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오른쪽의 분수대는 카를로 마데르노(현재의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사람)의 작품이며, 왼쪽의 것은 도메니코 폰타나(오벨리스크 탑 이전 공사의 책임자)의 것이다. 이 두 분수대 역시 광장의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위해 세워졌는데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로써 죄를 깨끗이 씻어야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크다. 실제로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순례왔던 모든 사람들이 이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자신의 머리 위에 뿌린 후 성당 안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대성당 입구, 오른편에 성문이 있다

 


성문

 

이 입구의 내부에는 5개의 청동문이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다. 제일 오른쪽의 청동문은 성문(聖門)이라고 불린다. 이 문은 카톨릭 교회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대잔치인 정기 또는 임시 성년의 개막 미사 전에, 교황에 의해 1년간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현재의 이 성문은 1950년 정기 성년식 선포를 기념하기 위해 스위스의 카톨릭 신자들이 기증했으며, 비코 콘소르티가 청동으로 제작하였다. 이 성문은 성년의 중심인 전대자가 전체의 큰 주제를 이루며, 이를 위해 성문 표면의 16군데 패널 위에 성서 이야기를 각각 소주제로 부조해 놓았다.

 


중앙문

 

다섯 개의 문 중 가운데 있는 중앙 정문이 유일하게 옛 성당 때부터 있었던 청동문으로 피렌체 사람 안토니오 아베룰리노가 1455년에 제작한 것이다. 이 중앙 정문의 표면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위쪽에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에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 이 부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강복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성모 마리아는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우뚝 선 모습은 거룩한 교회 안에 양 기둥이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왼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모습이 성서 안에, 즉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지 의문을 가진다. 그 이유는 세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도의 순교를 의미하며, 두 번째는 사도가 되기 전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 지도층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녔을 때의 신분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신자답게 성령으로 무장하여 영적 투쟁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성사의 문

 

이 성문의 바로 왼쪽에 위치한 문은 '성사(聖事)의 문'이라고 불린다. 이 문 역시 1950년 정기 성년식 선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선악의 문

이 중앙 정문의 바로 왼쪽에 있는 문은 '선과 악의 문'이라고 불린다. 이 문은 1977년 9월 2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의 8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봉헌된 것이다. 이 문에 부조된 조각은 그리스도의 이성론(二性論)에 의한 선과 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청동문의 오른쪽 면에는 선(善)을, 왼쪽 면에는 악(惡)을 상징하는 것들이 부조되어 있다.



죽음의 문

 

마지막으로 이 선과 악의 문 왼쪽에 있는 다섯 번째 문에 대해 알아보자. 이 문은 '죽음의 문'으로 불린다. 교황 요한 23세(1959-1963)의 요청으로 금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조각였던 자코모 만추가 제작, 설계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란, 곧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초세기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르쳐왔던 진리 중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문의 중심 내용은 죽음의 성화(聖化)에 대한 것이다. 이 문의 안쪽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그 내용으로 하여 부조되어 있다. 그러나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할 경우, 죽은 이들의 관이 이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새로 이 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 중심 내용을 죽음에 맞추었고, 이 문의 이름도 '죽음의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 베드로 성당

 

베드로 대성당은 처음 완공되던 34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기독교의 성지순례장소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십자가와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 그리고 그리스도를 찌른 창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의 봉헌으로 이루어진 이 대성당은 410년 비스고티족의 로마 침략을 시점으로 455년에는 반달족, 846년에는 사라센족, 그리고 1084년에는 노르만족 등, 이민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당했으며, 그 결과 초대교회의 중요한 보물은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15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원래의 대성당은 1100여 년의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와 확장 등으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대성당의 신축을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명한다. 수차례에 걸쳐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도를 모집한 결과, 브라만테의 설계도가 채택되었다. 그의 첫 번째 설계도에 따르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판테온(Panteon)의 돔 형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성전 구조는 그리스식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1506년 4월 18일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초석이 놓이면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후 4년간은 4개의 거대한 주 기둥을 받쳐 줄 받침대를 세우는 데 모두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브라만테는 성당 내부에 세울 주 기둥들의 모델을 판테온의 내부에 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참조하여 설계하였다. 특별히 성당 내부 벽의 기둥 형태는 우아한 도리스식으로 설계함으로써, 단순하고도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설계는 후에 미켈란젤로가 다시 도입하며, 현재의 대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한 왼쪽 윗부분은 첫 번째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 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1514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교황 레오 10세는 브라만테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후계자로 천거한 라파엘로를 대성당 신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가 아직 건축 설계의 경험이 적을뿐더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보완책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가 많은 두 건축 설계자를 파견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였다. 교황은 새로이 구성된 새 성당 건축 책임자인 세 사람에게 앞으로 신축될 대성당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가능한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범위 내에서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하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브라만테가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설계했던 성당을 다시 원래의 모습인 라틴형 십자가형태로 바꾸고, 돔의 위치도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하여 세우도록 설계를 수정했다. 바로 이 시기에 커다란 두 사건으로 인하여 성당공사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주교좌 성당문에 95개의 조문을 내걸고 로마 교황의 교도권에 항의했던 일과, 두 번째는 1527년 란치케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의 로마 침입으로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가 많은 피해를 입은 일이다. 그 후 1534년, 바오로 3세가 교황에 즉위하면서 공사를 재개(再開)하였다. 상갈로의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조수로는 야고보 멜레기노가 임명되었다. 1538년까지는 대성당을 받쳐줄 벽면 기둥들을 세우는 데만 주력하였다. 공사는 계속 활발히 진행되었고 1546년 8월3일, 공사 감독인 안토니오가 죽기 전까지는 눈에 뛸 정도로 공정이 진척되어 있었다.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한 살로 고향인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사해 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이탈리아 전체에 나 있었고,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를 공사 총감독으로 임명하면서 '신이 보내 준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였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임자였던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나무로 만들어 놓은 돔의 조형과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설계도를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임자 안토니오의 모든 설계를 비판하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설계대로라면 불필요한 내부, 외부 기둥이 너무 많고, 건축에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그의 설계대로 공사를 계속할 경우엔 앞으로 50년 이상은 더 걸려야 했으며, 공사 비용 역시 엄청나게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미켈란젤로는 자기 자신의 이상대로 설계하게 된다. 그의 설계에 따르면 대성당의 규모가 다시 축소되고, 돔을 중심으로 한 부분에서는 브라만테의 설계도로 되돌아가 대성당의 돔은 나무로 그 모형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토니오의 설계에 따라 이미 건축된 건물의 3분의 2에 가까운 부분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데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교황 바오로 3세의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그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지게 된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서거로 강력한 후원자를 잃게 된 미켈란젤로는 잠시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게 되나, 새 교황 줄리오3세가 전임 교황의 신축 대공사에 관한 특별 담화문을 재확인하는 배려로,그의 남은 여생을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공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어쨌든, 미켈란젤로의 건축 설계도는 브라만테의 설계, 즉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와 아주 가깝게 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성당 건축물 중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돔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1557년 탐부로를 세우면서 1558년과 1561년 사이에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1564년 2월, 아흔이 다 된 노장 미켈란젤로가 운명하기 직전, 탐부로는 완성되었으며 이제는 그 위에 이미 설계를 마치고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던 돔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미켈란젤로의 사후(死後), 이 역사적인 대공사는 잠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85년, 훗날 역사가들에게 도시 계획 전문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교황 식스투스 5세(1585-1590)가 즉위하면서 공사는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어 갔다. 미켈란젤로의 후계자였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그의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의 지휘 감독 아래, 600여 명의 인부들이 밤낮으로 공사를 계속한 결과, 1588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한지 22개월 만인 1590년 6월, 이 거대한 돔은 완공되었다. 공사의 지휘 감독이었던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미켈란젤로의 설계 모형 그대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다만 그 높이를 몇 미터 정도 더 높게 수정하였다.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가 새 교황에 오르면서 대성당의 역사는 또 한 번 바뀌게 된다. 교황 바오로 5세는 이전의 교황 레오 10세가 원했던 것처럼 새로 짓는 대성당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이 위치해 있던 전 지역을 포괄하여 신축되기를 원했으며, 이에 따라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도를 다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원래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한 성당 크기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게 확장하도록 결정하였고, 1606년 3월 29일 수요일, 이와 같은 결정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성당의 골격들은 모두 헐리고 만다. 그리하여 대성당의 모습은 다시 라틴형 십자가의 모양으로 변화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확장을 위한 새로운 설계도는 카를로 마데르노의 것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확장 공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새로운 설계도에 대한 많은 비판이 주변에서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설계자 마데르노에 의해 1607년 11월 5일 시공되었고, 1608년 2월 10일에는 대성당의 정면에 사용될 초석이 축성되었으며, 1614년에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이 완공되었다. 이렇듯 과감하게 확장된 부분의 내부 설계에서, 마데르노는 전임자 미켈란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설계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미켈란젤로의 풍으로 설계했다. 그 결과, 현재의 대성당에 들어가 보면 어느 한 구석도 조화를 이루지 않은 부분이 없으며, 한 사람의 설계로 이루어진 느낌을 강하게 받는 것이 사실이다.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죽자 그 뒤를 바로크 예술의 대가 잔 로렌조 베르니니가 이으면서, 신축 대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베르니니가 해야 될 일은 전임자들의 설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대성당의 내부를 좀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즉 전임자들, 돔을 중심으로 한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마데르노의 확장된 설계를 가지고 어떻게 잘 조화시키면서 내부 장식을 하느냐에 그 중심 문제가 달려 있었다.

시대적으로는 이미 바로크 양식이 절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 데 반해, 대성당의 거의 대부분은 브라만테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어 있어, 이 두 양식을 조화시키면서도 접목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였다고 훗날 베르니니는 그의 전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대성당 내부에서 잘 볼 수 있는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세운 4개의 청동 기둥과 그 천정 덮개,그리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의 중심이 바로 제대 밑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과 돔의 중심에 일직선으로 이어지도록 고안한 점, 또한 십자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점은 베르니니의 위대한 예술적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대성당의 중앙 통로와 그 바닥은 모두 대리석을 사용했고, 대성당 내부의 양쪽 통로들 사이에 마련된 소제대들의 장식은 붉은색이 드러나는 천연 대리석을 사용하는 등, 현재 우리가 대성당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대부분의 것들이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42년부터는 그의 전임자 마데르노에 의해 완공되었던 성당의 거대한 정면이 본체가 되는 대성당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이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면 양쪽에 새로운 종탑을 세우면서, 전체적인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세워진 대성당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처음으로 성당(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을 세우고 축성한지 1300여 년 만인 1625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새롭게 축성된 것이다. 그러니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506년에 시공한지 꼭 120년 만에 축성하게 된 셈이다. 1656년에서 1667년까지 대성당 정면에 자리한 거대한 규모의 광장 역시 베르니니가 구상하고 완공하게 된다. 그 이 광장을 구상할 때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광장의 양 옆에 있는 같은 모양의 타원형 회랑은 그리스도가 팔을 벌려서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감싸 안아 주는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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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성화사랑 글쓴이 : bae sung soo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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