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17. 17:19ㆍ목양자료/2.설교자료
더 높은 자로부터 의미부여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7-20)********************************아브라함이 불의의 세력을 응징하고 포로로 잡힌 자들과 재물들을 되찾아 올 때 승리에 마냥 기뻐만 할 수만은 없는 요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빛으로서 어둠을 응징한다는 명분이 확실한 전쟁이었지만 기습하여 사람을 죽이고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고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 이었다 해도 그것은 또 다른 복수이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 온다는 점을 생각 하면 승리 후에 삶을 어떻게 지속해 나갈 것인지가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게 됩니다. 우리가 의를 행한다는 것은 명분도 좋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일을 행한 것이기에 후회는 없겠지만 그 일을 행한 후에 후 폭풍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지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에 아브라함을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영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멜기세덱의 축복은 단순한 축복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전쟁을 수행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그 행위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수행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수행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 전쟁을 수행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하나님의 주권과 일치된 행위를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영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자로부터 영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질서를 존중하는 나라이고 그러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수행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목회는 단순히 말씀을 선포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아담이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평범한 일 속에 의미가 담긴 이름을 지어준다면 그것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행 할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느낄 수도 없고 신앙은 관념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질서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이 담긴 의미를 받아들이고 또 부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말입니다
13. 구원을 위한 작전 본부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창14:13-16)*******************************롯은 불의의 세력에 의해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뜻을 펼칠 자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에 이미 드려놓은 죄악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자신을 절제 할 수 없는 상태에 죄악에 깊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중독된 현상으로 도저히 자신을 절제 할 수 없을 때 불의의 세력에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아야합니다. 끌려가면 갈수록 그의 앞날은 더 비참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포로 된 자리에서 탈출 할 수 있도록 돕는 자 즉 구원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어둠과 맞서서 전쟁을 버리며 포로 된 자를 구원하는 일에 나설 수 있는 세력인 것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 자처하면서도 어둠과 맞서지 못하고 이름뿐인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포로 된 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싸워야 할 대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는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란 포로 된 잃어버린 양들을 찾고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우신 작전 본부이며 동시에 피난처로 세우신 것입니다.아브라함은 누군가로부터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포로로 끌어가고 있는 세력의 군사력은 막강하고 다섯 부족국가도 막지 못하여 패전할 정도로 막강한 자들이지만 불의의 세력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어둠의 세력은 아무리 무기의 성능이 뛰어나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늘을 등짐으로 인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늘의 도움을 받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군병들은 그 숫자와 관계없이 그들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존재로 말미암아 승전을 예약해 놓고 싸움을 벌이는 자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자로서 응당 행하여야 할 심판과 구원을 수행하는 일에 주저 하지 않았고 그 일은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항상 모든 사람이 숫자에 굴복하여도 그 숫자 이상의 의미를 나타 낼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숫자 그 위에 존재 하는 분이며 그 무엇에도 예속됨이 없으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무엇에도 굴복된 것 없이 영적 전투에 나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2.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십 이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년에 배반한지라 그 다섯 왕이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왕과 고모라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14:1-12)*********************************경제적인 풍요가 있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지역엔 항상 검은 손이 개입하고 검은 거래가 오고가게 마련입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엔 대부분 악이 점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근 바다 이야기로 떠들썩해 졌을 때 거기에 보이지 않는 실세들이 개입되었고 공공연한 비밀들이 드러날 때 예상 했던 대로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롯이 경제적인 풍요가 보이는 비옥한 땅을 바라보고 그곳으로 다가가 터전을 삼았을 때 그곳은 이미 악이 점령하고 있는 어둠의 지역으로 전락되어 있었습니다. 성을 상품화 하고 거래가 오고가는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이 쉽게 돈을 버는 것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패권을 장악하려는 세력이 몰려들고 그들의 안정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큰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명목으로 검은 거래가 오고 가고 그러다가 위로부터 더 많은 상납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것이 아까워 배신을 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깐 응징하는 차원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배신 할 때는 그만한 대비책을 세우고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 앞에 역청구더기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는데 그들은 예상을 뒤엎고 반대방향에서 공격해 오는 바람에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자기들이 빠지고 패전하여 롯도 포로로 잡히고 재물도 다 빼앗아 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이 있는 곳엔 독수리들이 모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왜 독수리들이 모이겠습니까? 독수리들은 썩은 시체를 치우는 청소부들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있는 곳에 검은 세력이 모여들고 그들의 거부 할 수 없는 유혹에 넘어가다 보면 영적인 황폐함이 찾아오고 그 황폐함은 곧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영적인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이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세계2차 대전을 거치며 패권을 장악한 국가가 제시하는 질서에 따라 평화를 유지하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이런 질서를 거부하는 세력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고 평화가 깨어질 위험은 언제나 존재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술전략가들의 견해는 무기의 성능이나 힘의 논리로 전쟁의 승패가 좌우 된다고 보고 있지만 거기엔 또 하나의 변수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경건함이 깨어지고 성적인 타락이 오고 그것이 상품화 되고 검은 거래가 오고가는 상황이 되면 무기의 성능과 관계없이 패망이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어둠을 심판하고 어둠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구출해내는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하나님나라백성들이 어둠에 참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필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도 아니고 그 어떤 불의한 세력도 아니고 하나님백성들의 타락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나라가 보이는 방향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13:11-18)******************************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질적인 풍요가 보이는 소돔성이 있는 방향으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아브라함은 굳이 방향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방향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가가 가야 할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갔던 만큼 다시 되돌아와야 하기에 소중한 인생을 방황하는 시간으로 허비 할 수 있습니다. 밤에 전등을 켜 놓으면 어디에서 왔는지 불나방들이 몰려들어 거기에서 수명을 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세상의 화려한 것에 미혹되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고 거기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대개가 물질을 추구하게 되어 있고 그 물질의 끝은 멸망인 것입니다. 이미 정답은 나와 있는데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불빛에 몰려드는 나방과 같이 되고 있습니다. 물질은 수단일 뿐이지 인생의 방향은 아닌 것입니다. 물질은 무지개와 같아서 가까이 가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무의미한 것에 인생만 허비하게 만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지만 물질도 따라오고 행복도 같이 따라 왔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나라와 지옥이 동시에 존재 하는 곳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면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면 멸망을 향해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과 롯은 내내 함께 같은 길을 동행해 온 것 같이 보입니다. 두 사람의 삶의 자리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둘은 서로 다른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앞에 물질의 풍요가 보여도 그것을 따라 가지는 마십시오. 눈앞에 행복이 보여도 그것을 쫒지는 마십시오. 그것들은 발이 어찌나 빠른지 여러분의 인생을 지치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들이 나를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에 풍요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10. 관대한 희망고문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5-10)**************************누구에게든지 비단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상대편이 아파할 말은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뒤 문맥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고 이 부분만을 놓고 보면 아브라함은 대단히 관대한 사람이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헤어져야 한다면 좀 더 냉정하게 진실을 밝혔어야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가운데 일가친척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신 사실과 롯이 가나안땅에서 정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했어야 합니다. 진실을 밝히지 않은 관대함은 희망고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 안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는데 수술이 아프다고 마냥 덮어두기만 한다면 암 덩어리는 계속 성장하여 마침내 그 몸 전체를 망치고야 말 것입니다. 아플 때 아프더라도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만 합니다. 멸망이 그 문 앞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면 너무나 늦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두려움 없이 평소에 한마디라도 던져 놓아야 합니다. 혈로 인연을 맺은 사이일수록 바른말 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아무 의식 없이 멸망으로 향하고 있다면 어찌 두고만 보겠습니까? 인정에 이끌리고 사정에 이끌리다 보면 하나님의 뜻은 실종되고 삶은 뒤엉켜 풀지 못할 상태까지 가게 됩니다. 도대체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기까지 얼마나 걸린 것일까요? 그래도 성경은 아브라함은 비교적 순종을 잘 한 사람으로 칭찬하고 있으니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삶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보며 주님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9. 하나님나라의 명령체계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13:5-10)**************************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아내를 잃을 번 한 후에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와 예배드린 후 그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일이 본문에 기록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은 혈육의 정으로 맺어진 사이었기에 서로 험한 세상에 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리에 있었고 롯은 그러한 명령체계와는 다른 구조에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명령체계에 있다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바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롯과 진작에 헤어져야 했고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나안땅은 아브라함 혼자서 상속받을 나라이지 롯과 함께 받을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롯의 목동과 아브라함의 목동과 목초지를 놓고 다툴 때 서로 다른 명령 체계에 있다는 사실과 함께 할 수 없는 본질을 알게 되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과오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몸의 신체는 모든 지체가 머리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머리의 명령체계를 따르지 않는 몸의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암이거나 인체에 전혀 이익을 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고 그것의 해를 받아 결국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이 머물러 있었고 그를 통해 이룰 하나님의 뜻은 하나의 명령체계를 요구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롯과 헤어져야 하고 롯은 소돔 땅이든지 다른 땅이든지 가나안땅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에 해가 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가 내 형제며 누이며 모친이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아니냐.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혈로 맺어진 인연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했습니다. 우리는 혈의 의미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명령의 체계 속에 흡수되어야 할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고 교단이 달라도 주님을 머리로 한 명령체계에 속하여야 하며 그러한 체계 속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도 시인해야만 합니다. 나라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자유의 발판은 그만큼 확장되게 될 것입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야 하고 가나안땅을 나가야만 하는 이유는 혈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명령체계에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8. 예기치 못한 곳에 주권적 역사가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12:17-22)***********************************아브라함이 잘못 처신함으로 아내가 바로의 손에 넘어갔음에도 하나님은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실수한 것이며 회개할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무 말씀도 없이 바로에게만 재앙을 내리신 것은 사라의 입장을 생각 하신 것이며 바로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더 큰 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의근원이 되는 권위를 주셨지만 그 권위는 아내 사라와 함께 누릴 복이며 혼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아내를 소홀히 여기고 여자로 인해서는 자기가 다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기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올 자리를 외면한 것이며 어리석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실수들이 그가 영적인 미성숙함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사라의 신변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지키심으로 자신을 돌아 볼 기회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아무 일 없이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주권의 권위 안에 있는 것처럼 사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키심 안에 있음이 입증된 것이며 말없이 이 사건의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아브라함은 그 아내를 바로에게 바친 대가로 얻은 소유도 포함 되었으며 그 소유는 복 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볼 아픔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부요함이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때 부요함이지 어떤 과정에서 모여진 것인지 상관없이 많이만 가지면 부요함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종들에게 가장 주의해야 할 문제는 내가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는 천한 신분 천한 자리 사람들이 외면한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 하실 수 있습니다 건축자들이 필요 없다고 버린 돌이 나중에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7. 이 땅에 임할 하나님나라의 운명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12:11-16)**************************당시 시대적인 상황은 부족사회로서 부족의 족장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이며 족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그 사회의 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자가 먼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후에 여성들은 남자의 손에 운명이 달려 있었고 여자가 선택할 권리는 별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상대의 부족을 칠 때 싸움을 하는 남자들만 죽이고 재물과 여자는 포로로 끌려가 정해준 남자의 아내나 시녀로 절락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자들의 경우엔 자기 부족의 사내들이 맘에 안 들면 전쟁이나 나서 누가 나 좀 데려가지 않나 하고 기대 할 수도 있었고 여자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전쟁을 피할 수도 있는 시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내가 여자로 인해 습격을 받거나 죽어서야 쓰겠느냐 누가 만약 너의 미모를 보고 탐하면 누이라 하고 넘겨 줄 수도 있으니 그리 알거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뒷걸음질 치다가 애굽에 이르러 바로 왕에게 자기 아내를 바쳐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바친 대가로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믿음의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이방 왕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재물을 받아가지고 돌아서려 할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니 그런 아브라함을 어찌 생각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아무리 그 시대의 풍습이 그러하다 해도 사라는 믿음의 어미이며 그의 몸에서 하나님의 후손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이로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후손이 나올 자리를 보존하거나 지켜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요구할 권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야 했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봐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약속이란 지키지 못한 쪽이 상대의 처분만을 바라며 그의 뜻에 따라 목숨이라도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약속이었기에 그의 실수는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만 바라고 그분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은혜입기를 기다리는 상황인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하나님의 약속과 기대에 멀어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끝까지 져버리지 않으시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이 땅에 임할 하나님나라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지켜보아야 합니다.그리고 세상의 풍습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주님의 손에 잡혀 인도를 받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이유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창12:5-10)******************************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이 내가 네게 주려는 땅이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지만 아브라함은 다음순간 그곳을 떠나 남방으로 자리를 계속 옮기다가 애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스스로 순종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때 세상 사람과 살아가는 원리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서 삶의 자리를 옮길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더 높은 이유 즉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에 마침 흉년이 들어있어서 목축업을 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그곳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양떼들과 소떼들에게 풀을 주기 위해서는 초원을 찾아가야 했고 그러다보니 남쪽 애굽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람에겐 어려운 장애물조차 그것에 맞서서 하나님의 뜻에 굴복 시켜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심을 쓰듯 한번쯤 순종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을 지속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죠 처음 만났을 때는 자기 몸을 불태워 줄 것처럼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차갑게 이별을 고하는 냉정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환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기대감을 주님을 따랐다면 언젠간 실망하고 돌아서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여 누군가 예수 잘 믿어 부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다 그렇게 되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자 자기가 맡은 사명에 따라 인도하는 내용이 다르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예수를 따르면 부자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따르려고 할 때 예수님이 그 기대는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로 주신 말씀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현대의 흐름이 황금만능주의로 흘러도 그것을 초월해서 하나님께 대답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나라로 가는 빠른 코스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7: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12:4-5)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복의 근원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얻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갈대우르를 떠날 때 갈 바를 갈지 못한 채 떠났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가 중간에 하란성에 수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게 될 때 그의 조카 롯과 함께 하란 성을 빠져나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아비 데라는 아들이 사명의 자리로 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다가 아비가 세상을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길을 재촉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동안 혈육의 정에 묶여 순종하지 못하다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고서야 순종의 의미를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체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영적인 손실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며 앞길을 더욱 험란 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주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하고 세상에 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잠시만이라는 기간이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명한 후에 지체하는 숫자만큼 우리의 앞길에 험란한 연단으로 처방을 내리실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그 땅을 속히 유업으로 받지 못하였고 그 후손들이 세상에 방황하다가 4대만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을 정탐한 40일 후에 순종하지 못하자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연단의 기간으로 다시 처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의미를 많이 받은 자 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 일수록 그 기대와 책임은 더 큰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모든 이들이 그를 통해서 복을 받게 되기도 하지만 그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일에 차질이 빚어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수형을 받게 되었는데 왕이 특사를 보내서 처형하지 말라는 어명을 보냈을 때 특사가 늦어지면 교수형은 진행 되었고 왕의 어명은 공중에 날려지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우리에겐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시119:60)신속한 순종이야 말로 주님을 향한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며하나님나라가 실현 되는 그 길에 있어서빠른 코스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 하나님의 주권이 머문 곳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12:2-3) 아브라함은 참으로 놀라운 복의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듣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남달리 특별한 장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믿음이 좋았기 때문도 아니고 착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원인은 아브라함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나라를 이루고 그 나라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을 탄생 시킬 계획을 가지고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택이란 말은 참으로 어렵고도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선택은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설정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고 삽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돈으로도 노력으로도 안 되는 그 무엇에게도 영향 받지 않는 하나님의 고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선택을 통해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고자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은 그 곳이 하나님의 선택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삶의 이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주권으로 결정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땅을 많이 가진 주인이 있는데 그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에 대해서 종들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봐야 그것은 주인이 결정 할 문제이고 주인이 어떤 결정을 했을 때 비로소 그 결정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신 후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의 주인이고 주인이시기에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씀은 다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 나라와 족속들이 다 자기 땅이라고 영역을 표시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지만 그 모든 땅의 주인은 여전히 천지를 창조한 주님이시기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브라함에게 머물러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을 수밖에 없고 아브라함을 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갖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지시한 땅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 집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났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 그 건물이 무너질 것을 알았다면 왜 건물 안에 들어가 있을까요? 여객기가 추락 할 줄 알았다면 누가 그 사고기에 탑승하겠습니까? 버스가 뒤집어질 줄 알았다면 누가 그 버스에 타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늘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안정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미지의 세계는 위험 부담이 있기 때문에 자기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본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미래였음에도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이 나타나고 실수도 있었던 것이 보여 집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브라함이 불확실한 미래로 나갈 때 믿음을 가지고 나갔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세계로 나가고자 할 때 우리에게 요구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어쩌면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뜻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인도를 받을 때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기대감을 가지고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의 기대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들어갔을 때 마침 그 땅엔 흉년이 찾아 왔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 길에 있어서도 수 없이 많은 변수가 있고 우리의 기대치가 빗나가기가 일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망해서는 안 되며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과정을 통해 가든지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나라에 도착 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우리가 도착 할 최종 목적지가 하나님나라로 되어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더 나은 본향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 본향은 하나님나라를 의미하며 우리가 도착 할 최종 목적지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요구 되는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당황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며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나라가 임한 출발점창세기 12장은 이렇게 시작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주님께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혈통을 배제하고 약속으로 성취 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혈통을 배제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혈은 이미 죄로 물들어 있고 혈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목표도 하나님나라와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 구성원이 될 그 나라 백성을 어떻게 창출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데 그 나라는 하나님나라 왕을 탄생시킬 모체이며 그 왕을 잉태하고 있는 그 나라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만 반응하기 위함이며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의미하고 구별됨이란 혈통이나 학연 지연 등등 그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아야 함을 의미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반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심으로 세상의 가치나 세상의 방법 세상의 잣대로 평가 할 수 없고 그러한 것들에게서는 감추어져 있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순간 비밀을 하나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비밀은 간직하는 순간부터 그 비밀의 내용으로는 무한한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세상으로 부터는 외롭고 고독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임하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때 그런 사정을 누구에게 설명하며 누구에게 이해해 달라고 부탁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소중한 인연마저 다 털어버리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까워 졌지만 세상에게는 등을 돌 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29-30)
1. 하나님 나라 강론 서론성경에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있습니다. 약속 구원 신유 부활 승천 재림 영생 등등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성경전체 중에서 한 부분에 속한 주제는 될지 몰라도 성경 전체를 총괄하는 단일 주제는 될 수 없습니다. 성경전체를 총괄하여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나라입니다. 필자는 하나님나라라는 주제에 깊이 매료되어 언젠가는 이런 주제로 강론을 쓰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성경을 강론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필자로서는 삽과 곡괭이만 가지고 보석 광산을 정복하겠다는 심정으로 도전을 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우선 창세기 12장에 주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에서 문을 열어 보려합니다 우리는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에 주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체적인 설계도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 설계도를 하나님의 예정 이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정 속에서 아브라함을 선택 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나라라는 단어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나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왕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며 그 왕께서 어떤 과정에서 태어나며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당신의 나라를 이룰 구체적인 의도를 드러낸 장면이며 여기에서부터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의 태동과 더불어 하나님나라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왕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출발점이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앞으로 다가 올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러한 상징적 의미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요구받게 되는 것입니다
15. 십일조의 기원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7-20)********************************아브라함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머무르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영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그분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영적 지위는 하나님이 쓰시는 순서와 비중을 말합니다. 그것은 나이와도 상관없이 세상의 가치를 뒤엎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한참 후배나 동생이 하나님의 주권이 머물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그런 사정을 봐주면서 주권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이삭의 두 아들 중에 동생인 야곱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났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엔 네 번째 아들인 유다에게 나타났고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인 다윗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것이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패망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일조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증거로 자기보다 더 높은 영적지위를 가진 분에게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드림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십일조를 받는 사람은 드린 사람에 대한 영적인 책임을 가지고 기도해주고 말씀으로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관계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면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16. 은혜의 향기를 남겨두는 법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창14:21-24)****************************아브라함이 복 받은 자가 된 것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복 있는 자가 된 것은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물질을 초월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나가서 포로와 재물을 되찾아 왔기에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내게 보내고 재물은 네가 취하라는 소돔왕의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어떤 재물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소돔 왕 덕분에 부자 되었다는 소릴 듣기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만 양식을 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살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모든 부정한 돈을 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 한다면 하나님이 아닌 어둠의 것들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정체성을 무너지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이 세상에 대해서 은혜 하는 의미를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누구든지 빚을 진자는 빚을 준 자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선행을 통해서 항상 은혜의 빚을 남겨 두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빚진 자가 빚을 갚으려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여지를 남겨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계산법인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치료하고도 선물을 거절 한 것은 그에게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려는 자들은 거지 근성부터 버려야 합니다. 호의를 거절 할 줄 아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선행을 은혜의 의미로 남겨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그렇게 살 수 있을 때 성도들도 모든 부정에서 벗어나 빛을 발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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