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선교사 이야기

2006. 11. 7. 23:37선교자료/5.선교자료

이스라엘 선교사 이야기

 


                                                                                            - 베들레헴 강태윤 선교사 -

 성지에 심는 복음

“이스라엘군의 계속된 봉쇄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그야말로 유령의 도시가 됐어요.

1주일에 몇 시간씩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시간을 주지만 창살없는 감옥생활이죠.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있어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하나인 베들레헴에서 유치원 ‘조이하우스’와 ‘한국문화원’ 등을 통해 기독NGO 활동을 벌이고 있는 강태윤 선교사(43)는 성지가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지난해 9월부터 경제적인 이유로 유치원까지 휴원하게 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갈등을 넘어 폭력이 난무할 때도 선교 현장을 지키며 유치원에서 2명의 아랍인 선생들과 함께 25여명의 어린이들을 돌보던 강선교사에게 지금은 최대 위기이자 기도가 필요한 시기다.

그는 원래 농촌운동을 꿈꾸던 청년이었다. 1987년 친구의 도움으로 단돈 150달러를 들고 떠난 2년여간의 호주 유학생활 속에서 바닥생활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농촌운동을 위해선 좀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새로운 훈련을 받으며 팔레스타인 선교 사명을 깨닫게 됐다.

지난 89년 키부츠 생활 중 하루 휴가를 내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됐지만 당시 이스라엘군 점령지였던 나불루스(세겜)를 방문했을 때였다. “이곳저곳을 구경한 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물으려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다가가는데 마침 그때 이스라엘군 지프가 오자 청년들이 차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군은 이들을 향해 정조준을 하는 것이었어요. 골 깊은 갈등과 반목을 깨닫게 해준 처절한 장면이었어요. 제가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된다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됐죠.”

키부츠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90년 북한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이스라엘에 다시 갔다. 그때부터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떠난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걸프전의 여파가 이스라엘까지 확대될 때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충돌로 살던 집의 옆 건물이 파괴되고 집과 유치원의 유리창이 총탄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역 초기 예루살렘 성안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팔레스타인인의 삶과 선교사의 생활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아랍인들의 순박함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들 내면속 인정을 느꼈다. 게다가 성경속 기적을 삶속에서 그대로 체험한 기간이었다.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때 성안에 있는 아랍교회 사택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죠. 게다가 하루는 쌀이 다 떨어져 걱정하고 있는데 저의 집을 방문했던 손님이 돌아가시면서 화장실 변기 위에 미화 100달러를 놓고 가셨어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감사했는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전직 간호사 출신 아랍인 나디아는 강선교사 가족을 자신의 식구처럼 대해주었다. 식량이 떨어질 때면 어김없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아랍인 목회자는 강선교사에게 주일학교 사역까지 맡겨줘 신뢰감을 표시해줬다.

강선교사는 팔레스타인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93년엔 베들레헴으로 이주했다. 당시 그곳은 이스라엘군의 점령지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회가 되면 떠나려는 판국에 외국인이 들어와 살자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어요. 이스라엘 정부가 보낸 첩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언제 죽일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도 들었어요.”

사역지 정착은 의외의 방법으로 이뤄졌다. 그는 중풍으로 오른손이 불편했던 집주인 아부 이사를 수지침과 마사지를 통해 한달동안 정성껏 치료해줬다. 그러자 하나님의 기적으로 아부 아사의 손이 회복됐고 이를 본 동네 주민들의 마음이 열리게 됐다. 94년 예장 합동 총회 선교사로 재파송된 강선교사는 어린이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조이하우스를 처음엔 놀이방처럼 시작했다. 그후 자신감이 생긴 그는 조이하우스와 한국문화원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공식 등록,사역을 본격화했다. “한국은 교육을 통해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토대를 구축했다면서 자치정부 교육부 관계자들을 설득했죠.” 그는 유치원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곳이라고 천명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던 학부모들도 성심껏 교육을 시키자 스스로 원아 모집에 나설 정도가 됐다.

그러나 2000년 8월부터 시작된 제2차 인티파다는 베들레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과거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군을 향해 돌을 던지던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때부터는 소총으로 대항하는 등 상황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이스라엘군의 중화기사격 소리도 일상사가 돼버렸다. 강선교사를 무엇보다 어렵게 한 것은 자식들이 총격소리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이었다. “큰아들 시몬이 총소리에 방바닥에 엎드려 우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참 답답했어요. 갓난아이였던 사무엘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밤에도 불을 켜야 잠이 들곤 했죠.”

2001년 가을 이스라엘군이 탱크를 앞세워 베들레헴으로 진입하면서 양측간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자 조이하우스에서 살던 강선교사 가족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베들레헴을 잠시 떠나게 됐다. 10여일이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총소리 없는 곳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선교사는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뒤 다시 베들레헴으로 향할 때 처음으로 사역지에 대한 갈등을 하게 됐다고 한다. 사무엘은 다시는 안 가겠다고 하고 시몬은 예루살렘으로 이사하면 좋겠다고 하는 등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사모는 처음으로 그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현재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강선교사는 굳게 믿고 있다. 이 땅에 유치원을 통해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에게 복음이 심길 때만이 이스라엘 전역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음을. 그 믿음으로 강선교사는 외롭지만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이 기자의 귓전을 지금도 울리고 있다. “두 민족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더불어 살 수밖에 없어요. 제발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측을 바라봐주세요. 이들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백성들이니까요.”

 

2003.3.2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