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교회(現代 敎會史)

2006. 10. 7. 17:46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20세기의 교회(現代 敎會史)

L. Praamsma 저 / 박종철역 
 

1. 문화적 신교주의, 신 칼빈주의, 로마 카톨릭의 현대 주의를 설명 하시요.

아래에서 문화적 신교주의, 신칼빈주의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현대주의에 관하여 차례로 설명하고자 한다.

문화적 신교주의 -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자전거, 전화, 무선 전신, 비행기, 영화, X-ray등 많은 것들이 발명되었다.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문화적 예언자의 활동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죄로부터의 구원과 구원에 대한 감사와 관련 없이 기독교와 문화와 관계된 것이었다.

대표적인 모임으로 1903년 독일의 기독교 신우 협회(Association of Friends of the christian Word)가 결성되었다. 이 연맹에 속한 신학자 마틴 레이더(Martin Rade)였는데 이 연맹과 레이더가 목표하는 바는 "복음의 대의가 모든 계층의 주목을 끌게 되고 또한 이 복음의 대의가 복음의 빛 아래 있는 문화와 사회 전 영역에 미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복음의 대의'는 성경에 대한 비평을 받아들이고, 원죄와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하나님의 구속 교리와 관계없는 것이다. 즉, 레이더가 목표 한바는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기꺼이 공유하고 사회의 결점과 부족한 점을 열정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다.

이 문화적 선교 주의는 리츨(Ritschl), 하르낙(Harnack), 헤르만(Hermann)과 같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과 당시 분위기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독일, 영국, 미국, 카나다 등지에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신 칼빈주의(Neo-Calvinism) -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 카이프(Abraham Kuyper)를 꼽는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있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위에서부터 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세에서 왕국을 건설하는데 더욱 관심을 표명한다. 그는 특별 은총보다 일반 은총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네덜란드는 1909년 국제 기독교 무역 협회(Christian National Trade Union)를 창설했다. 이 협회를 통한 활동들이 칼빈주의에서 이탈하는 점에서 신 칼빈주의라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L. Praamsma는 No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16세기와 20세기라는 주변 상황만이 다를 뿐이다. 아브라함 카이프는 종교 개혁자들이 지녔던 신앙에 대한 지식을 보급, 전파하기 위해 주간지인 '헤럴더'를 적극 활용했다. 또 강조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칼빈 역시 일반 은총을 가르쳤기 때문에 아브라함 카이프를 신 칼빈 주의로 보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오히려 아브라함 카이프는 칼빈주의자로서 개혁 주의 신앙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로마 카톨릭의 현대 주의 - 어떤 조직적인 모습이 없었기에 '운동'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과거에 대한 반성, 비판, 진보,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의 분위기가 익어 있었다. 이때 현대 주의가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알프레드 로이지(Alfred Loisy)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성경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으며 '양식 비평'이란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교서에서 단호하게 이런 현대 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신앙을 재 천명하였다.

2. 세 신학자(디벨리우스, 칼바르트, 메이첸)를 비교, 설명 하시요.

아래에서 세 신학자에 대하여 비교 설명하고자 한다.

세 신학자는 모두 19세기말에 태어났다. 디벨리우스는(Otto Dibelius) 1880년에 독일에서, 칼 바르트는(Karl Barth) 1886년에 태어나 스위스에서 자랐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은 1881년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대 상황을 보고 체험하고 접하는 가운데 살았지만 이들 셋의 신학 사상은 서로 다르다. 성경 계시의 진실성을 부정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디벨리우스와 바르트는 같은 부류로 언급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 성경 계시의 진실성(동정녀 탄생, 예수의 부활 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첸은 그 반대다. 메이첸은 철저하게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다. 디벨리우스와 바르트가 넓은 의미에서 같은 부류라는 필자의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람으로서 신정통주의자이며 디벨리우스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트는 그가 한때는 그 신학에 폭 빠져 있었고 그 신학을 하는 사람들 즉, 하르낙, 군켈, 헤르만, 카프탄 등의 강의에 젖어 들었었지만, 세계 제 1차대전(1914-1918년)이후 자유주의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못함을 보며, 또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던 교수들의 무력함을 보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더 이상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바르트는 느꼈다. 한편 목회 현장에서(1909년 제네바에서 부목사로 사역) 자유주의 신학 이론에 따르다 보니 설교 거리가 없었다. 성경의 계시 대부분을 부인함으로 오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라서 바르트는 헤겔의 변증법을 적용해서 새로운 신학을 구성했는데 이것을 일컬어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정통과 자유 사이를 넘나들면서 변증법적 방법을 적용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통 주의자로 혹은 자유 주의자로 잘못 구분하기도 했다. 바르트는 역사 비평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칼빈의 예정 교리를 부인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결코 개혁 주의자가 아니다.

디벨리우스는 문화적 신교주의(위의 문제 1번 설명 참조)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고, 디벨리우스도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하르낙, 헤르만, 군켈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디벨리우스는 1900년에 독일 학생 연합회의 회원이 되었는데 이 연합회의 목적은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자유주의 사고, 마르크스주의, 유대인들과 싸우고 학생들 사이에서 애국심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디벨리우스는 당시 일어나고 있던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그러나 디벨리우스는 바르트 처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메이첸은 미국 프린스톤에서 공부한 후 유럽을 여러 번 방문했다. 1905년에는 말부르 대학(Marburg)에서 1906년에 괴팅겐(Gߧtingen)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인 헤르만의 강의에 매료를 당했으나 그는 마침내 그 신학 사상에 동조할 수 없음을 권위 있게 제시하였고 훌륭한 '변증서'를 지었다. 메이첸도 디벨리우스나, 바르트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가르침 하에 놓여 있었지만 메이첸은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을 분명히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반박 혹은 정통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신학을 옹호하는 변증서를 내었던 것이다. 메이첸은 철저한 칼빈주의 자가 되었으며 프린스톤 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물들자 그기서 나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강의 시간에 성경을 확신하였고 학생들에게 잘못된 성경 해석들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었다.

우리는 디벨리우스처럼 문화 신교 주의에 빠져도 안되고, 바르트처럼 신 정통 주의에 빠져서도 안되겠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그들은 성경 계시의 진실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메이첸과 같이 성경 계시를 믿어야 하겠다. 이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디벨리우스나 바르트도 '성경 계시를 부정하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진실된 것이다.

3. 위기 신학에 대하여 논술 하시요.

필자는 주어진 과제물을 읽고서도 왜 과제물 속에 있는 신학자들의 신학을 '위기 신학'이라고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책 내용 속에 '위기 신학'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 있지 않았고 단지 여러 신학자들에 관한 소개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위기 시대의 신학', 그리고 신학 사상 또한 정통 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위태롭다고 보여져서 '위태로운 신학'의 의미로 '위기 신학'이라고 했지 않을까 생각한다.

1차 세계대전(1914년 2월 - 1918년)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유주의 신학과 문화 신교 주의자들의 인간에 대한 큰 신뢰가 팽배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이 서구 문명을 초토화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또 그토록 당당했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전쟁시 동안 행한 말과 태도를 통해서 '그들의 신학 사상이 결코 인간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즉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바르트, 에밀브루너, 불트만 등이다. 이들의 신학은 또한 정통 신학과는 다른 신 정통 주의 신학이라 불리는 위태로운 신학을 형성하였다.

바르트부터 차례대로 아래에 각자의 신학을 언급하고 난 후 위기 신학을 이야기할까 한다.

바르트 

'로마서 주석'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을 맹렬히 비판하고 새로운 신학 사상을 제안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신 정통 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 사상과 일치하며 도스토에프스키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니그(Walter Nigg)와 바르트의 교의학을 번역한 미국인 브로밀리(G.W.Bromiley)가 바르트는 칼빈주의자라고 말한바 와는 달리 그는 분명 신 정통 주의자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신학은 역사 비평을 허용하며, 헤겔의 '변증법'을 사용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칼빈의 예정 교리를 강하게 부정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영원부터 알고 사랑하는 반면에 다른 이는 유기 시킨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렇다고 바르트가 만인 구원론자인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고 있다. 또 바르트는 유아 세례를 부인한다. 결국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이 신약 성경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밀브루너

바르트는 종교적 경험 신학자, 문화 신학자들과 더불어 투쟁하였고 화란 개혁 주의 신학의 대표자들인 스킬더, 벨까우어, 반틸 등과 논쟁을 하였다. 또한 처음에는 바르트를 지지하다 등을 돌린 고가르텐, 불트만, 부루너가 있다.

브루너는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위한 하나의 접촉점이 있다고 봤다. 이때 바르트는 새로운 자연신학의 경향이 브루너에게 있다고 경고하였다. 또 브루너와 바르트는 서로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을 달리했다. 바르트는 일반 계시를 부정한 반면 브루너는 일반 계시를 인정하였다. 브루너의 영향은 앵글로 색슨계의 국가와 일본에 있어서 바르트의 영향보다 훨씬 지대하였다.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에 관하여는 아래 문제 4에서 언급하였다.

라인홀드 니브

니버는 연대기적인 죄의 개념 대신에 실존 철학의 수직적 질서의 용어로 죄를 특징짓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빛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의 화려한 상징으로서 비쳐진다. 근본적으로 니버는 역사적인 시작(인간의 타락 포함)과 과정(성육신)과 역사적인 종말을 믿지 않는다. 니버의 신학적 사상은 철학적인 전제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우리는 위기 신학자들의 신학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1차 세계 대전이 서구 문명을 초토화 시켰으며 이로 인해 모든 낙관주의적 성향, 즉 인간을 신뢰하는 문화 신교 주의의 자유주의의 무능을 실감하였다. 따라서 1차 세계 대전 후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바르트, 불트만, 니버 등의 신학자들이 위기 신학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신학을 우리는 신 정통 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들의 신학이 결코 정통 주의 신학이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위기 신학자들은 각자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정립한 신학이었다. 바르트는 헤겔의 '변증법'을 사용하였고 불트만과 라인홀드 니버 또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비록 위기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판하였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위기 신학자들간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두 부류의 신학자들이 전부 성경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 내용이 신화라고 하여 패기 처분 한 반면 위기 신학들은 성경 내용(특히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기적 등)을 비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패기 처분을 하지 않고 그것을 해석한다는 점(불트만처럼)이다.

우리는 이들의 잘못된 성경관 즉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동등히 여기지 않고 신화, 혹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라는 생각을 거부해야만 하겠다. 대신 우리는 더 철저히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며 성경 해석은 성경이 한다(계시 의존적 사색)'에 치중해야 하겠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위기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판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를 드러낸대 대한 공헌을 인정한다.

4.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 개요를 설명 하시요.

루돌프 불트만이 신 정통 주의 신학자란 것을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불트만은 변증법을 사용하여 신학을 한 바르트와 성경관에 있어서 일치한다. 불트만은 성경의 역사적 비평적 탐구를 하였으며 동시에 참되게 하나님의 증거라고 보았고 성경을 오류 있는 인간의 말로 간주하였다. 불트만은 양식 비평을 비중 있게 취급하였는데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철저하게 신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성경적 세계관이 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불트만은 이런 비 합리적인 것들(기적 등)이 신화라고 본다. 그렇다고 신화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또 그는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 불트만의 신학은 철저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트만의 저작 '신약성서 신학'에서도 끊임없이 '합리적이냐 비합리적이냐'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신약성서 신학'을 읽고 판단하는 바로는 불트만의 연구 태도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안 가졌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비합리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가 자의식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구절들은 모두 전설, 삽입, 신화, 전설 등으로 분류해서 그 구절이 진실 되지 못하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 불트만은 전승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이 전승보다 더 더 믿을 만한 못한 것인가?

불트만은 자기의 신학 이론을 전개하다가 어려움을 느끼면 Q자료설을 끄집어낸다. Q자료에 대해서 아무 증거가 없는데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또 다시 불트만의 비합리적인 신학 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5. 20세기 종교 박해의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설명 하시요(박해의 동기)

20세기의 종교 박해를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과 적자생존이라는 것이다. 처음 다윈은 단순히 같은 종에 속하는 완두콩 실험을 통해서 '진화'를 언급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것을 지나치고 부당하게 식물계와 동물계에 적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이론이 인간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인간 또한 진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더 과학적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진화에 대한 관념은 인간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신학도 이것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20세기 종교 박해는 정치, 경제까지에도 이런 것이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화론'의 입장에 서게 되면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논의될 여지가 없게 된다. 신, 죄, 도덕 등에 대한 의식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직 무신론적 사상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는 것이다. '무신론'은 자동적으로 '유물사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 존엄성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의 진화된 고등동물에 불과하며 존재, 발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적자생존'의 원칙에만 충실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거짓말, 폭력, 무력 사용 등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1903년에 레닌이 사회주의를 제창한 이래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급격한 팽창을 구가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런 팽창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사회경제적 측면을, 교회 지도자들의 의식에서, 그리고 영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17년은 러시아 공산 혁명이 성공한 해이다. 이때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겠다. 세계 제 1차 세계대전은(1914-1918)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지쳐 있었고, 궁핍에 떨었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것에 대한 기대가 강한 반면 현실 정치와 지배자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공산주의이며 이들은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이용하였다. "혁명기간 동안에는 토지가 농민들에게 주어졌지만 곧 국가 소유 제로 바뀌고 말았다(1922). 노동자들에게는 공장이 약속되었지만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중앙 행정 체제로 전환되고 말았다"란 말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험을 제대로 예단 하지 못했다. 일례로 바르트는 "조셉 스탈린과 같은 인물이 히틀러...중략...스드라이헬등과 같은 계열의 돌팔이는 아니다"고 함으로써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기까지 한 것을 들 수 있다.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종교 특히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공존 할 수 없음을 명백히 알았다. 1929년의 한 정당 신문에 "종교적 이념은 국가의 사회주의적 재건 방향에 중요한 방해물 중의 하나이다. 종교와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단지 개인적으로 무신론자가 되는 것과 그들 자신의 사상을 다름 사람에게 허용한다는 것은 막스-레닌주의 무산계급 볼세비키주의자의 방법과 조화 될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마르크스는 종교란 없다라고 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모든 종교를 뿌리 뽑고자 그처럼 가혹한 박해를 하였던 것이다.

영적으로는 명백히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사탄의 역사였다고 하겠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그들의 지도자를 우상으로 삼아 신격화하는 죄를 범했다.

프람스마 교수는 20세기의 박해를 언급하고 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는데 이 말에 유념하여야 하겠다.

"우리가 이 모든 박해들을 살펴볼 때 교회의 죄를 말해야 하며 경제적 정의, 사회적 자비의 결핍과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지상적 권력과의 연합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해서 교회의 진정한 복음을 설교하는데 실패한 것을 지적할 수가 있다.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메시지를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켰다. 우리는 개혁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적용되는 것 같은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덧붙인다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모든 무신론적 사상, 자유주의 신학 사상 등을 극복하고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성경 의존적 사색과 삶을 실천하여야 하겠다. 프람스마는 이러한 박해들도 결국 계시록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임을 암시하고 있다(계시록 성경 구절을 인용함으로서).

6.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에 대한 투쟁의 예를 설명 하시요.

박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선배들의 용기를 엿볼 수 있겠다. 아울러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많은 나라와 국민들을 괴롭힌 독일인들에 대한 생각을 재고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우리는 흑백 논리로 모든 독일 사람들은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킴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흑백 논리로 모든 독일인들을 죄인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래에서 그 투쟁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1차 세계 대전 후 삶의 맛이 없어진 당시에 국가 사회주의는 좋게 생각되었고 히틀러의 계획은 새로운 앞날의 희망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무정부 상태, 부도덕의 상태를 막아냈고 교회를 존경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빛의 천사로 나타났다. 그러던 중에 1933년에 히틀러는 정권을 잡게 된다. 처음에는 독일 신자들이 나치 당에 가입하며 기독교와 국가 사회주의와 결합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바르트는 출발부터 국가 사회주의가 교회에 가공할 만한 피해를 가져다 줄 것임을 깨달았다.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 실존'이라는 조그마한 소책자를 내어 '국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했다. 바르트는 민족주의적인 교회 즉 아리안족 우월 주의를 교회에 강요할 때 적극 반대하였다.

마틴 니뮐러 또한 교역자 비상 협의회를 통해 민족 사관에 입각한 교회 관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문제는 신자들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서로 충돌하는 듯한데서 오는 딜레마도 있었다.

1934년 5월에 있었던 바르멘 총회를 통해서 '사탄의 어두움의 세력이 침투해 온 것에 대해 그들의 소리를 높여 반대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녔다'할 수 있다. 바르트는 히틀러에 대해 충성하겠다는 선서를 거절하자 즉각적으로 본에서 그의 교수직이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바젤에서 히틀러 정권에 대해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고백 교회들의 저항은 효력이 없었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수용소로 가서 죽었다.

1939년 본 회퍼는 미국에서 라인홀더니버의 요청에 따라 가르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여 돌아왔다. 그는 전국적으로 히틀러에 대항했고 마침내 포로수용소에서 1945년 5월 7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런 시기에 로마 카톨릭도 같이 고통을 나누고 저항하는데 가담했다. 1937년 3월 교황의 칙령에는 '종족 주의 교리와 피와 영토의 신비적 주장의 죄악됨'을 발표하였다. 수많은 카톨릭 사제들도 체포되어 갔다.

히틀러는 광적으로 '권력에 의지'하였다.

1918년에 칼 바르트는 이것에 대하여 대항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사람들(교회 목회자들 포함)이 강제적으로 군입대하였으며 수많은 양심적인 군인들이 처형되었다.

1944-1945년 사이에 5,000여명의 저항 가들이 처형되었다. 히틀러 정부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예외 없이 전 독일 국민에게 지우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고백 교회(전체 교회, 전체 교인들이 아님)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체들과 대조하여 나치의 죄에 대항하고 또 계속 대항하고 있는 유일한 교제였음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하다.

독일이 전 유럽을 점령하였을 때 모든 점령 국가에서 저항이 있었다.

덴마크의 뭉크란 사람은 '유대인 박해'에 대한 저항하는 설교를 하였으며 독일 교회의 느슨한 태도를 질책함으로 체포되어 사형 당하였다.

노르웨이의 저항운동 지도자는 베르그라브(Berggrav)였다. 그는 여러 교파 출신의 목회자들과 주교와 함께 '기독교 협의회'를 조직하여 저항하였다(설교를 통해).

네덜란드의 개혁 교회들은 1940년 이미 국가 사회주의의 비 기독교적 성격을 간파하고 이에 저항할 사람들이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자기 나라가 전체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치 주의와 국가 사회주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거나 굴복하지 않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었다.

저항 운동 중 꼭 언급할 필요가 있는 3가지가 있다.

첫째, 최초의 그룹 조직 저항체였던 스테이컬 그룹이다. 스테이컬 박사는 네덜란드 군대가 해체되었을 때 즉시 지하 저항운동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배반으로 체포되어 1943년에 총살되었다.

둘째, 기독교 학교들에 의한 저항자 안헴의 오버데인이다. 설교시 독일 케슈타프(비밀경찰)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데 겁내지 않았다. 그 주간에 그는 체포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다.

셋째, 로마 카톨릭 사제인 더투스 부란스마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 신문들이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다른 나치 조직체를 선호하는 광고를 싣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하였고 이로 인해 체포되었다.

점령지 교회들은 저항과 아울러 기도하는 교회들이었다.

7. 반 유대주의를 설명 하시요.

우리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히틀러 치하에서 6백만 여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란다. 반 유대주의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궁금해한다. 아래에서 역사상에서 나타난 반 유대주의의 실상을 언급함으로써 '반 유대주의'가 제2차 대전 당시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며 동시에 '반 유대주의'의 원인을 한번 살펴 볼까 한다.

역사에 나타난 반 유대주의의

성경에서는 모세 시대에 애굽 왕 바로의 유대인들의 유아 말살 정책, 파사제국 시대에 하만에 의한 유대인 살상 계획이 나타난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을 제거하려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했으나 유대교에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였다.

315년에는 공식적으로 불경건한 집단으로 낙인찍혔고 이때부터 포그롬(방화, 약탈, 살인에 의한 박해)이 행해졌다.

11세기에는 겟토(집단생활)란 유대인 특별 구역이 설정되었고 유대인들은 여기에만 살아야 했다.

117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유대인들을 노예화하고 기독교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게 하였다.

1215년 제 4회 바티칸 종교회의에서는 불경의 표시로 유대인들의 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고 다니게 하였다.

1299년 마인츠 사교 회의에서는 유대인에게 특수 복을 강요하여 전 유럽에서 실시하였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렸으나 여전히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은 강했다. 칼막스는 "유대인 없는 세계"라는 글을 썼으며 유대인을 고리대금 업자, 배금주의자로 설명하고 유대인이 없는 사회를 바랬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함으로 유태계 정치 지도자들의 패배를 가져왔고 이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의 패배였다. 그 후 러시아에는 반 유대주의가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반 유대주의'의 역사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면 왜 이런 '반 유대주의'가 나타났을까? 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나와 있다. 우리는 아래에서 그 원인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1) 경제적 동기

위에서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을 고리대금 업자요 배금주의자들로 판단하였다. 정말 유대인들은 돈의 중요성을 알았고 돈을 사랑했다. 19세기에 모든 나라가 유대인이자 세계적인 갑부인 로스차일드에게서 전쟁 자금을 빌려쓸 정도였다. 이와같이 돈에 대한 강한 집착이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2) 종족 이론

유대인을 우수하다고 하는 부류와 열등하다고 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며 그 예로써 노벨상 수장자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열등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볼테르와 와그너가 있다. 와그너는 유대인에게 대하여 표현하기를 "나는 유대인을 더럽혀진 온 인류의 당연한 적이요 인류 가운데서 존귀한 자들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독일인은 유대인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했다. 히틀러가 와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했다고 한다.

(3) 선민 사상

바르트가 '반 유대주의'의 원인을 선민 사상과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이점은 우리가 동의한다. 하지만 바르트의 변증법적인 설명을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예로 바르트는 "유대인들은 모든 택한 자들의 거울이며 항구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끊을 수 없는 증인이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어지는데 우리가 그런 은혜를 원치 않기 때문에 반 유태적인 형상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성경과 관련하여 선민 사상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겠다(암3:2)

(4)종교적 동기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가 보편화하여 교황이 군림하던 시대에 유대인을 지목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은 살인자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신약은 반 유대주의를 지원하지 않는다(롬 11:25-26)

프람스마는 위의 4가지를 주요 원인으로 말하였다. 필자는 한가지 덧붙인다면 정치적 동기이다.

(5) 정치적 동기

위에서 러시아의 상황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유대인들이 러시아의 정치에 깊이 관여한 사실을 우리는 살펴 볼 수 있었다. 스탈린에 패한 유대인계 정치인들이 대거 살해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러시아에서는 계속 핍박을 받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기 직전에 영국은 아랍인들을 견재할 목적으로, 유대인들 회유책으로, 정치적 동기로 대한 예가 있었다.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반 유대주의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성경의 약속대로 마지막에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께로 나아 올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다.

8. 20세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들, 마리아 숭배, 신 신학을 설명 하시요.

교황들 

신 신학이 로마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 당시의 교황들에 대하여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교황 파이우스 10세는 현대 주의 상부 조직에서는 금지되었지만 하부 조직의 실생활에서는 영향력을 미쳤다.

파이우스 10세를 계승한 베네딕트 15세(Benedict ⅩⅤ, 1914-1922)는 로마교회의 교우들이 양측에서 싸우고 있는 1차 대전에서 엄격한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평화를 유지 하고자 애썼다. 베네딕트는 현대 주의에 관한 비난에 대해서는 파이우스 10세와 일치했고 5경의 모세 저작을 명백한말로 표현했다.

베네딕트의 계승자인 교황 파이우스 11세의 업무는 매우 어려웠는데 그것은 전후의 불경기, 그리고 당시 독재자들(뭇솔리니, 히틀러, 프랑코, 페론 등)이 카톨릭의 영세를 받은 데 있다. 파이우스는 여러 나라와 조약을 협정하며 그 조약을 신뢰하였다. 그가 이탈리아의 파시스를 정권과 협조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뭇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 하는 것은 "선교 계획"의 일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황 칙령을 통해 자유방임적 자유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를 다 비난하였다. 그는 집단 임금 계약과 경영에 의해 얻어진 이익을 노동자들이 분배해야 한다는 사상을 지지했다.

파이우스 12세는 중립을 지키려고 애쓴 인물이며 유대인의 극심한 곤경에 처했을 때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칙령을 통해 감독들이 성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오스카쿨만은 이 칙령이 '모종의 자유'를 성경 주석 가들에게 허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자유란 반 현대 주의자의 맹세의 멍에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칙령 이후 주석 가들은 대담해졌다.

파이우스 12세의 계승자인 요한 23세의 선언은 파이우스 칙령의 정신과 현저히 대조를 이룬다. 그는 "좋은 교황"이라 불릴 만큼 모든 이에게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교황 보오르 6세기 계승되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폭풍들과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산적한 문제들을 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무거운 짐을 떠맡았다.

마리아 숭배

파이우스 12세는 1854년 '성모의 무죄 잉태'를 발표했고 1950년에는 여기에 '마리아의 승천 교리'를 부가하여 무오 교리로 발표했다. 성경에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 승천 교리 등이 나타나지 않음에도 왜 이렇게 하는가? 그것은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새 하와', '그리스도의 어머니', '신자의 어머니', '사랑의 어머니', '세계의 여왕'등으로 불린다.

마리아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켄트베리와 요크의 대감독들은 "새 교의는 성경과 역사에 대한 호소를 결여하고 있으며 선험적인 것 위에, 즉 증명될 수 없는 가정 위에 세워졌다"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신 신학

신 신학이란 이름은 신 현대 주의 보다 무해한 것 같으나 로이시(Loisy)나 티렐(Tyrell)같은 사람에게서 계승되어 온 사상이다.

1940년대에 알려진 Lyon-Fourvievre 신학교의 예수 회원들도 이 신 신학의 무리에 속한다. 그들 중에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F. Bouillard, J. Danielou, Hide Lubac 그리고 Y. Congar이다. 또 스위스의 H. Urs Von Balthasar, 독일의 H. King, 독일 신학자 K. Rahner, P.Schonberg, E. Schillebeekx등과 영. 미 신학자들이 이 무리에 속해 있다.

신 신학자들은 교회와 문화를 접근시키려고 했었다. 신 신학의 사람들은 당대의 변증법적, 자유주의적, 신교 신학자들과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이념을 나누려는 생각이나 그 이념에 동참하고자 한다.

또 다른 동기는 양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점령당했을 때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왜냐하면 프랑스 인구의 1/3이 비 기독교화 되어 있는 실제적 무신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 신학은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이야기로 듣고자 했던 것이다. 신 신학자들의 신학의 밑바탕에 있는 공통적인 원리는 실존주의적인 원리를 채택하여 체제 수립을 과거에 속한 것이며 인간의 사고방식은 자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인격적인 경험만을 강조하였다.

신 신학의 특징은 '성경에로의 복구'였다. 그러나 이 '복귀'는 실망 스러운 것으로서 성경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초기 15세기의 교부들에게로 복귀한다. 그러나 교부들의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권 주의에 혐오하며 평신도에 대해 강조한다.

신교 주석 가들 중에서 양식 비평의 추세와 버금가는 정교한 성경 비평이 있었다. 신 신학자들은 성경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레페브레(Lefebre)는 "이제는 누구도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아니한다"며 비탄하였다.

신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우월성과 덕과 관용이었다. 신 신학은 미묘한 방법으로 교황의 무오성을 비판한다. 신 신학자들은 성경, 교회, 공회, 교황 등 모든 형태의 무오성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구 카톨릭의 배타주의를 비난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교황들, 마리아 숭배, 신 신학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교황들의 처세는 매우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성경 진리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성경이 지원하지 않는 마리아 숭배는 우상 숭배로서 빨리 버려야 할 악한 교리이다. 약속을 따라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무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성경은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마리아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죄 있는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피로써 정결함을 받아야 할 자이며, 승천하지도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나 신 신학 모두가 성경에 대한 '불신앙'의 모습들이다.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신 신학은 우리가 받아 들여서는 안될 악한 사상이다.

9. 세계 교회 연합 운동에 대하여 설명 하시오..

교회 연합 운동을 고찰해 봄으로써 우리는 현대 교회의 동향을 알 수 있겠다. 아래에서 교회 연합 운동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세계 교회 연합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존.알.모트(John R. Mott, 1865-1955)이다. 그는 세계 대회 연합 운동의 선구자로서 세계 동포 주의 자였다. 그는 법학 학위를 받았으나 회심 후(무디의 집회에서) 선교의 길로 나갔다. 그는 에딘버러(1910년), 예루살렘(1928년), 탐바람(1938년)에서의 세계 대회 의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세 가지의 세계적 대회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데 첫째, 세계 선교 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둘째, 생활과 사업 협의회(The conference on Life and Work), 셋째, 신앙과 직제 협의회(The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이다.

I.M.C 는 복음주의 자들로 구성되었으며 1921년에 미국의 몬크 호수 근처에서 제 1차, 1928년에 예루살렘에서 제 2차, 1938년 탐바람에서 제3차 회의를 가졌다.

생활과 사업 회의는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1937년에 옥스포드에서 열렸었다.

1948년 8월에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주제로 W. C. C회의가 1차로 열렸다. 1954년에 에반스톤에서, 1961년에 뉴델리에서, 1968년에 웁살라에서, 1975년에 나이로비에서 열렸다.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W. C. C 회의시 I.M.C와 통합했는데 사실상 W.C.C가 I.M.C를 흡수한 것이다. 많은 복음 주의자들이 I.M.C가 W. C. C내에서 복음주의 적인 역할을 잘 감당하길 바랬는데 기대에 어긋난 것이다. W. C. C에서는 신앙의 문제, 교리의 문제는 뒤로 접어 두고 예배의 문제와 세계인의 필요를 위해서만 논의하였고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팽배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르트가 경고하기도 하였다.

아래에서 W. C. C와 교회, W. C. C와 성경, W. C. C와 사회적인 삶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W. C. C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W. C. C와 교회

W. C. C에서는 교회에 대한 개혁 주의 적이고 정통적인 해석을 따라 반드시 있어야 할 교회의 특징을 명시하지 않는다. 그 특징이란 순수한 복음 선포, 순수한 성례의 집행, 교회 권징의 실시이다. W. C. C는 구성은 포괄적인 반면 신앙은 보편적이고 체제는 과두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W. C. C와 성경

뉴델리(1961)에서는 "성경에 따라"라는 말이 덧붙임으로서 W. C. C의 기초가 보다 확장되었다. 그러나 W. C. C의 모든 회원들이 오늘날 성경의 의미와 권위에 관해서 똑같은 견해를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자들과, 신 정통 주의, 신학 자유 주의자들 즉 후기(1961년)의 정통 주의 교회가 초대 교회의 가르침 위에서 그들의 견해를 W. C. C에 합해 버렸다.

W. C. C와 사회적인 삶

행동 신학이 '교회와 사회'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1966년에 W. C. C에 의해 개최된 제네바 회의에서 분명하게 되었다. 이들은 인권을 강조하였다.

교회 연합 운동은 20세기에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자들도 이의 필요성을 느꼈다.

19세기에도 세계 연합 운동들이(예, 세계 학생 기독 연합 등)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48년의 기독교 교회 국제회의인데 여기에서는 W. C. C, 현대 주의, 공산주의,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투쟁적인 입장을 취했다.

1951년 미국에서 전국 복음주의 연합(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이 결성되어 세계로 확대되었다. 세계 복음주의 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가 되었는데 이것은 교회들의 연방 회의(Federal Council of Churches)에 불만족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혁 주의 교회 연합 대회(The Reformed Ecumenical Synod)가 1946년에 생겼다. 이 연합회의 추구는 외형적, 양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W. C. C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W. C. C 성경에서 얼마나 이탈했는지도 알아보았다. 고무적인 것은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와 개혁 주의 교회 연합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 모임이 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하여야 하겠다.

10. 현대 미국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 설명 하시요.

필자가 현대 미국 교회 부분(p. 239-260)일 읽고서 느낀 것은 미국 교회 상황이나 세계 교회 상황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대주의, 사회 복음주의와 세속 주의, 오순절 주의와 은사 주의 등의 신학적 문제점들이 미국에 있다.

세계 교회도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고통 당하고 있는데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자유주의 신학이 계속 뿌리를 내리고 독버섯처럼 자라서 결국 복음 적이던 프린스톤 신학교를 자유주의 신학교로 만들기까지 하였다. 놀라운 것은 신학교보다도 총회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물들고 그후 신학교를 자유주의 신학교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교회들이(총회) 정통을 유지하고 신학교가 곁길로 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미국의 경우 그 반대였던 것 같다.

또 사회 복음 주의자들의 인간에 대한 신뢰와 낙관주의는 인간의 타락성을 무시한 잘못을 범하였다.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세대 주의는 스코필드 성경의 출판을 통해 기반을 얻었다. 스코필드는 7개 이상의 세대를 구분했는데 그 중 6번째가 교회의 세대였다. 이 세대주의 신학은 종교개혁 주의의 역사적 고백에 일치하지 않는다. 이들은 교회들이 소홀히 했던 최후의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을 너무 여자 적으로 성경 원문과 아주 다르게 인용했다(특히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오순절 주의자들은 교회들로 하여금 '성령'에 관하여 연구케 한 공이 있다. 하지만 '제2의 세례'를 말하는 문제가 있으며 '순복음'을 십자가나 칭의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고 교인들을 제 1신자와 제2신자로 나누는 경향이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우리는 위에서 미국 교회 신학의 문제점을 간략하게 보았다. 이런 문제점이 있는 반면에 또한 많은 건전한 개혁 주의 신학교(웨스터 민스터 등)를 중심 한 교단들이 형성되어 성장하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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