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의 전개

2007. 6. 15. 21:41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청교도 혁명의 전개


 

초기에는 Prince Rupert가 인솔하는 왕당군의 전력이 우세했지만 전쟁을 지속할 만한 재정이 조달되지 못했고 무기와 탄약의 보급이 어려워 그에 따라 군인 급료가 중지되는 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하원의원 Oliver Cromwell(1599-1658)이 이끄는 기병대인 철기군이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고 무력한 의회군을 철기군을 중심으로 개편하여 2만에 이르는 신형군(New Model Army)으로 조직하여 왕당군과의 전투를 승리하여 내란을 끝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의회파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군대는 독립파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의회 세력은 장로파가 우세했고 이런 극한 대립의 중간에 수평파도 있었다.

장로파는 온건파로서 왕과 타협하기를 주장했다. 여기에는 지주 귀족과 대상인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생활 필수품에 소비세를 부과하고 스스로 정부에 차관을 주어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었으며 왕당파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소유하고 독점권까지 행사했다. 이와 반대로 독립파는 급진파로서 공화제(군주제 폐지), 국교회 폐지, 왕의 처벌을 주장했다. 산업 자본가, 일반 상인, 근대적 지주로서 군대 상층부를 지배하였다. 정권 장악에 목적을 두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서 장로파와 수평파를 제거하여 국왕을 처형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했다.

소작인, 수공업자 중심의 수평파는 주로 군대 병사층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17세기 초부터 종획운동을 반대하고 토지 균등 분배를 주장하였다. 계급 구성이 변하면서 토지를 조금씩은 소유하게 되었지만 종획운동으로 정리된 토지를 농촌 공동체에 환원하도록 주장하며 보통선거권, 왕정 폐지, 단원제(單院制) 등을 John Liburne(1614-1675)을 중심으로 주장했다.

장로파는 군대 유지를 위한 재정 부담을 들어 군대 해산을 끝까지 주장했고 Cromwell은 결국 병사들과 제휴하여 런던을 점거하고 장로파를 추방하였다. 이 때 독립파와 수평파가 독자적인 헌법 개정안은 제출했다. 독립파의 건의요목(Heads of the Proposals)에서는 왕과 의회가 공동으로 군대를 운영하고 신앙의 자유와 독점 폐지와 선거의 재산 자격을 두는 선거법 등 신흥 소유자 계급의 이익을 고려한 정책을 제시했다. 한편 수평파의 인민협정(Agreement of the People)은 매우 급진적이어서 '권력의 근원이 모든 인민에게 있기 때문에 그들의 대표자에 의한 정치만이 정의롭다'는 가치에서 보통선거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주장했다.

Charles가 스코틀랜드와의 교섭을 통해 스코틀랜드 군이 영국에 들어왔을 때, 갈등 중이었던 의회파가 단결하여 이를 격파하고 왕당파의 최고 지휘자를 처형했으며 왕을 다시 체포하였다. 이어서 런던에서 국왕과 비밀 교섭을 하던 왕당파 의원을 체포하고 상원을 폐쇄시키는 Pride's Purge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원은 최고재판소를 조직하여 '국민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1649년 1월에 Charles 1세를 처형했다.

의회파의 승리로 내란은 종결되고, 민주화가 진행되어 상원을 폐지하고 하원에서 공화제(Commonwealth)의 성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행정권은 장로파 위원이 없는 하원의원들이 국무회의(Council of State)로서 맡게 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장로파가 아들 Charles를 지지하며 봉기했고,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륙으로 피신한 절대왕정은 세력 회복을 꿈꾸었지만 도움을 줄 만한 프랑스도 스페인과의 전쟁 상황하에서 도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영국은 무역 경쟁국인 네덜란드에 항해조례(Navigation Act)를 발포하고 전쟁을 시작했지만, 결국 승리하여 영국 자본주의 발달에 유익이 되었다.

정부 초기에는 전쟁에 의한 산업 황폐화와 흉작, 계속되는 질병 등의 문제가 일어났고, 정부 재정도 어려웠기 때문에 정부는 화폐 소유자인 상업자본가와 지주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왕당파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군 간부와 신 귀족, 부유 시민에게 매각했는데 이 정책은 대중의 경제적 부담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여파로 하층민의 급진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독립파는 이 기회를 통해 수평파와의 협력을 끊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Cromwell에 의해 영국사상 최초로 공화정 시대(1646-1660)가 열렸다. 국내적인 혼란과 반항이 심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강력한 권력을 얻기 위해 Cromwell은 무기력한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1653. 4.)시키고 지명으로 신의회(잔부(殘部)의회, Barebone)를 세웠다가 다시 해산시키고 자신이 독재권을 갖는 신국가를 수립하게 되었다. 군 내부 지지자들을 통해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 1653) 을 만들어서 자신은 종신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었다.

통치장전을 통해 선거구가 개선되는데 독립파는 국민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다수파는 장로파가 점유하여 Cromwell과 호국경 권한의 다툼이 일어났다. 결국 의회와 군대와의 갈등으로 발전되어 Cromwell은 1655년 1월, 의회를 해산시키고 완전한 군사 독재를 하게 되었다. 스페인과의 전비 조달을 위해 제3의회를 소집(1656. 9.)하면서 의회의 ⅓에 이르는 급진파 의원의 출석을 금지시켰으나 국민의 반감이 심해 군정장관제는 폐지되었다.

Cromwell의 정책은 상업 자본가의 이익도 존중하여 독점권으로 공격받던 대무역회사가 면세 특권으로 국채와 토지 투자로 거대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현대화된 지주는 토지를 봉건적 속박 없이 자유롭게 소유하게 되었다. 결국 Cromwell은 1658년 9월 병상에서 죽었고 비록 정치적으로는 많은 성공을 했지만 입헌정치는 실패했다. 종교적으로 관용정책을 내세웠지만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세우지 못했는데 청교도적 엄숙주의의 강제는 국민에게 거리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Cromwell의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된 아들 Richard는 군대와 의회의 통제력도 잃어버리고 민심만 더욱 혼란해졌다.

'교회사자료 > 5.근세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세교회사  (0) 2007.06.17
Mayflower호의 간단한 역사  (0) 2007.06.15
청교도의 역사  (0) 2007.06.15
近 世 史 (근세사)  (0) 2007.04.28
20세기의 교회(現代 敎會史)  (0) 200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