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6. 01:10ㆍ참고자료/4,예화자료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시오." 이 글은 1919년 3?1운동의'34번째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W
스코필드(Francis William Schofield: 1889-1970, 한국명 석호필) 박사가 묻혀있는 국립묘지 묘비에 새겨져 있는 그의
유언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캐나다로 이주하여 소아마비라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
대학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16년 세균학 전문 의료선교사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및 위생학을 가르치면서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1919년 3.1 운동 때부터 한국의 독립투쟁을 담은 문서 및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고 있는 민중과 일제에 항거하다 마을주민 23명이 학살당한‘제암리
사건’현장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폭로하고 일제의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자신이 쓴 기사들을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바깥으로 비밀리에 가지고 나가
국제사회에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알렸습니다. 유관순 등이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강제 추방되어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거기서 그는 한국 상황을 세계에 알리며 1955년까지 토론토병원에서 일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한국에 다시 돌아와 한국에
정착한 그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일깨우고 자신의 학문을 한국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서울대학교에서 병리학을 가르쳤습니다. 12년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고아원 두 곳을 도왔고 사비를 장학금으로 쾌척했습니다. 그는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고 부모 잃은 아이를 돌보고 독재 정권에도
항거했습니다. 1970년 그는 지갑과 여권만을 유품으로 남긴 채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수양 손녀딸인 최춘자 할머니(62)는
"할아버지는 1960년 문화훈장을 받으실 때 겨울인데 여름 양복에 내의도 없어 신문지로 몸을 둘둘 말아서 가셨어요" 라고 말하며 "가진 돈이
있거나 월급을 받으면 늘 봉은양육원에 갖다 주거나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올 때 다 주셨다"고 회고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의 제2의 조국에
대한 업적과 정열을 기리는 의미에서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과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추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개정 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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