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설교 모음

2006. 8. 25. 11:20목양자료/6.교회행사 자료

장례식에 대한 설교 모음 / 임종 /발인 /입관 / 하관 /

1.죽음이 문밖에서 있을 때 (살전 4 : 13-18) 165.168.289 



임종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엄숙하고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므로
조금도 낙심할 필요가 없이 조용히 그리고 확신 가운데 서서 그것을 맞이해야 한다.

1, 가장 위대한 순간.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중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어
낙심천만한 가운데 있고 또한 그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얼굴을 찡그리고 악을 쓰면서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믿는 우리는 복된 생애를 다 청산하고 천국에 간다는 확신으로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접을 받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2. 새 생활의 출발.
믿는 자의 임종은 임종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위대한 삶의 새로운 전기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임증 때 부를 찬송과 기도로 언제나 연습하고 준비해 두어야 한다.

3. 마귀 권세를 물리치 때 .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불투명해질 때 마귀의 유혹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그를 의지하는 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여서도
오히려 초연해 지며, 마귀의 권세를물리치고, 숭리와기쁨과구속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71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야 한다.
죽음은 약속된 하나님 나라 입성이므로 엄숙하고 확신있게 맞이해야 한다.


2. 사망율 이기는 능력 (고전 15 : 55-57) 152,222.289

인간에게 죽음이란 달갑지 않는 불청객이다.
이것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 찾아와 마음을 한껏 흔들어 놓곤 한다.
그러면 이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 죽음의 본질 .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증오하는데. 그러면 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인류 최대의 원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때문에 믿는 자에게 이 죽음은 더 이상 원수일 수가 없다.
오히려 이것은 평안한 안식의 길로 인도하는 앞잡이가 될 뿐이다.

2 . 죽음을 이기는 힘 .
이것은, "우리 주 라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음을 맛보셨지만.
죽음이 그를 억류할 수 없자.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죽음이 와도 당황하거나 떨지않고
담담히 그것을 기다리며 환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로버트 눈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나는 가노라,
저 영광의 세계로, 죄여, 이제는 안녕, 죽음이여, 이제는 안녕"이라고 외쳤다.
실로 죽음을 정복한 자만이 이 땅에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도의 부활이므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3. 선한 목자되신 주님 (시23:3-6) 444,453,476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정황 가운데서도 언제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신다.
그는 항상 우리를 푸른 목장. 잔잔한 시냈가로 인도하신다.

1, 사망의 음침한 곯짜기에서 보호하신다.
이 성도는 한 평생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능히 인도해 주실 것이다.
여기 참석한 우리 모두도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강한 능력의 팔은 어떠한 원수 마귀외 권세도 물리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신다.
그의 인도와 보호는 잠시 잠깐 동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에 오를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3, 영원히 거하게 하신다.
이 땅에 사는 나그네는 잠시 잠깐 거하다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한다.
돈이 많아 좋은 집을 소유했다 해도 그 집은 나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임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집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집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한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다.


4.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임종-4) (빌1:20-24) 231.471.474

바울은 네로의 죄수가 되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 모든 고퉁도 다 이기며 승리하였다.

1, 죽음은 현세의 모든 악을 제거해 준다.
세상에 얽매인 자들은 많은 갈등과 시련을 당하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세상의 유행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있는 보화를 사랑하며 이것을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에
주어진 삶을 값있게 살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도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된다.

2, 죽음은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 땅 위에는 언제나 슬픔과 고통의 한숨 소리가 그칠날이 없다.
음산한 거문고의 소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그러나 죽음 저 너머 저쪽 나라에 가면 밤도 없고 어둠도 없고 죄도 없다.

3, 죽음은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여 영광스런 낙원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그를 믿는 성도는 현세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다 당하였지만
장차 낙원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히려 찬송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자녀는 부름을 받아 갈곳이 천국이므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감사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5. 두 종류의 집 (입관-1) (고후 5 : 1-10) 272,541,545

신자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장차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자이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집과 하나님 나라의 집 즉 두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1, 장막집 .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땅의 삶이
'장막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다.
이 장막집은 야외에 다 치는 천막집을 가리킨다.
이것은 언제든지 이동하기 쉽게 만든 간이 집이다.
이것은 언제든지 거두기 쉽게 지은 집이므로 내구성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학위에 소유하고 있는 집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이것은 역시 장막집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이것은 모두 없어지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 영원한 집 .
이 땅 위의 장막집과 반대되는 집은 곧 영원한 집이다.
그것은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덧입게 하는 것이다.
고인은 한평생을 살면서 이 하늘 나라에 있는 집을 사모하고 열망했다.
그는 이제 그토록 사모하던 집을 가기 위해 이 장막집을 떠나려 하고 있다.
잠시 후면 그는 그곳을 가기 위해 조용히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지켜보는 우리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그가 거주할 영원한 집이 있음을 확신하자.
성도는 약속된 천국의 집이 있으므로 사모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6. 주 안에서 자는 자의 복 (입관-2) (살전 4 : 13-18) 165,291,545
본문에 자는 자리는 표현이 세 번, 쓱은 자라는 표현이 한번 나오는데,
특히 주 안에서 잠자는 자의 누릴 복락에 대해 강조되고 있다.

1, 영원히 깨는 복
주 안에서 자는 자만이 영원히 깨는 복락에 참여할 수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에 심취해 있을지라도 주님을 모르면
영원히 어두움 가운데 헤메일 것이며
사망과 흑암이 지배하는 곳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영원허 깨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부촬에 침메하는 복.
본문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성도는 예수넘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는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게 될 것이다.

3, 위로힘을 받게 되는 복.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소망 없는 다른 이아 같이 슬퍼하지 않게"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영광과 안위를 보기 때문에 멸망당할 자와 같이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늘 고인의 영광을 마응 속에 그려보며 우리 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성도의 죽음은 영원히 사는 부딸의 복이므로 큰 위로와 소망을 갖게한다.


7. 그리스도의 인의 죽음 (입관-3) (롬 14 ; 7-9) 293.531,534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하여 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선포하였다.

1. 이웃을 섬기는 삶.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웃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라면 거기에 따르는 회생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감내해야만 한다.
성령에서는 사도들에게 역사하셔서 굻주린 백성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게 하기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행을 하게 하셨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앎.
그리스도인외 목적은 그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적인 생활에서 분만 아니라 공적인 생활에서도 밝히 표명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하나닙의 영광을 가리기도 한다.

3. 죽을을 예비한 삶.
신자의 삶은 죽음을 잘 예비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고인된 OOO 성도는 죽음을 잘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살았을 때 이웃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초지일관하였다.
이제 그는 펀안히 예비된 천국의 복락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이웃과 주님을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8. 성도가 얻을 안식 (입관-4) (시7 : 13-17) 222,225,476

성도가 이 땅 위의 삶을 살 때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삶을 살므로써 받는 복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겠지만. 본문에서는 안식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1,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
하나님의 장막 속에 있는 성도는 펀안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가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현생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 가운대서 방황했던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안식의 장악을 두르심으로서 위로와 안식을 공급해 주신다.
여기에서 성도는 영원한 안7과 위로를 얻게 된다.

2, 그들의 목자장이 되신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성도들의 대 목자장이 되선서,
그들을 영원한 생명 강가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공급하신다.
이 EKd 위에 있는 지도자는 한결같이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주님만은 의로우시고 완전하셔서 결단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는 또한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고통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위로와 안위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분 안에 참 평화와 기쁨이 있다.

현생의 삶을 사는 성도는 언제나
찬바람이 휘몰아 치고 흔들리는 불안한 세상 가운데 처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 속떼서도 고인은 믿음을 지키고
천국의 빛나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충성,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고인이 누릴 천국의 영광과 안위는 지극히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9. 길이 살겠네 (발인-1) 고전 IS : 50-58 f 221,289.364

고인은 그동안 고통도 많았고 수고도 많았던 이 세상의 삶이었지만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복락의 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1, 발인식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환송의이다.
김활난 박사는 죽으면서 내 죽는 장례식은 환송의 의식이 되게 해 달라고 유언했다.
그는 세상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라고 믿음의 찬송을 불렀다.
여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도 주님이 오라 부르실 때
이 찬송을 힘 있게 부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발인식은 경건해야만 한다.
오늘 고인은 장지고 향하여 거기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거룩하고 경건해야 한다.
유족들은 혈육의 정으로는 섭섭한 마음 금할 수가 없겠지만
그 고인이 얻을 영윈한 생명의 면류관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위로를 받고
오히려 찬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이 파속됐기 때문이다

3 . 발인식은 소망을 주어야 한다 .
발인식에 참여한 모든 조객은 고인의 발인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이땅의 생은
유한하여서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지만 그러나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깨닫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천국의 영원한 생의 시작이다.
우리가 장차 갈 그곳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다.
축복과 기쁨이 언제나 넘치는 그곳이다.


10. 죽음 저 너머의 삶 (발인-2) (욥 14 : 13-17) f 168,791,545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는가 ?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답변을 얻을 수 있다.

1 . 철학적인 논증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껏들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의 생명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도 만족을 주기 위해
그것을 예비해 놓으셨다.
인간은 거의 대부분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다.
문명인이든 야만인이든 그것이 모든 인류들 가운데
실제적으 로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
인간 이성과 자연의 빗이 내세에 대한 실제성을 증거해주고 있지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확실허 볼수 없고 다만 회미하게 볼 뿐이다.
이것은 주로 인간의 전적타락에 의해. 고 실체는 볼 수 없고
또 보려고 해도 다른 것으로 비취는데 근거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 : 25).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내세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인간이 죽는 것을 볼 때 죄인이나 예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
다만 영생의 질이 다를 뿐이다.
죄인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영벌을 받으면서 영생하는 것이요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세계에서 기쁨의 영생을 얻는 것이다.


11.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발인-3) (신 12:9-10) f 232.292,541

우리는 안식을 기대하기 쉬우며, 잠시 후에 썩어 없어질 것에서
만족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요단강 저펀, 천상에 영원한 가나찬이 있다.

1, 여기에는 진정한 만족이 없다
여기에 있는 인생들은 모든 면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진토에 앉은 거지도, 백만장자도, 평민도, 주권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며
보다 더 나은 것을 얻고자 분주하게 허등대고 있다.
그렇기 때문 에 이 땅에는 참 만족이 없다.

2, 이 땅은 멸망되어가고 있다.
전능자께서는 목적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목적이 끝났을 때
보다 새로운 목적을 위하여 새 창조를 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지구는 불에 타 없어지고 하늘은 큰 소리를 내며 떠나갈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의 영원한 안식은 분명히 여기가 될 수 없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3, 하나님은 천국에 살도록 요구하신다
우리가 세상적인 즐거움에 도취되어 제멋대로 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슬퍼하신다.
우리는 분명히 여기가 아니라 천국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삶은 보다 고상해지고 거룩해지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고인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가기 위해 출발을 하려 하고 있다.
우리들도 고인과 같이 천국으로 떳떳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12.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열정 (발인-4) (시91 : 16) f 220,221.543

불안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에 사는 인생이지만.
이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고 그것을 향한 열정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엄다.

1, 유한한 인생.
세상일은. 공적인 일이든사적인 일이든, 모두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인간과 인간의 행하는 일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음을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썰명하고 있다.
이와같이 시간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발버등치며
애써 노력해 보지만 역시 인간은 나약하다.

2, 영원하신 하나님
하지만 히니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조금도 받지 않으신다.
그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어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분으로서 시간 세계에 오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3,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불안한 인생을 사는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
그런데 인간이 현생에 급급함으로 이것을 바라보지 못하여
더욱 불안한 삶을 살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계상황의 지배를 받고있는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영원하신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게 된다.

죄를 깨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사모하도록 은혜를 주셨다.


13. 흙 속에 잠들 무렵 (하관-1) (고전 10 : 1-4) 188,226,291

하나님은 인간의 시조 아담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빛어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생동안을 흙과 더붙어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다시 흙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

1, 슬픔의 시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은 때가 되면 흙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는 자들은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2, 부활을 기약함.
주를 믿는 신자으 죽음이 복된 이유는 부활의 새 아침을 기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죽는다'는 표현은 '잠잔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온당하다.
불신자들은 육체의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하고야 말지만,
신자는 육신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오히려 새로운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3, 영원한 생명세계로의 전이
신자의 죽음은 삶의 종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로 들어가는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청산할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간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라고 찬송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땅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슬픈 일이지만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을 감사하자.


14, 축복된 죽음 (하관-3) (계14:13) f 233.289.474

고인은 세상의 온갖 모진 풍파와 환난을 당하면서도
맡은 바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된 삶을 실아왔다.

1, 모든 수고플 그쳤다
인간은 이 땅에 올 때 수고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난 이후 인간의 수고에는 고통이 뒤따랐고 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성도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은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있는 곳이다.
성도는 그곳에서 모든 수고를 다 바치고 주님의 위로를 받을 때
지나간 고통을 꿈에 본듯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2, 안식을 한다.
이 땅에 안식이란 있을 수 없다. 돈이 많아 세상을 즐기며 산다 해도
마음의 초조와 불안과 고통은 그칠 날이 얼다.
하지만 성도가 그곳에서 얻게될 안식은 가장 완전한 안식이며,
영원한 안식이다. 때문에 성도의 현실의 삶은
영원한 안식의 처소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3, 축복된 삶을 산다.
성도의 죽음이 귀한 것은 이 죽음의 현장에 많은 화환이
둘러쌓여 있기 때문이 아니요 조객이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성도가 믿음을 갖고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주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이야말로 저주가 아닌 복된 죽음이며
이후 천국에서 새로운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성도의 죽음은 모든 수고를 다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감으로 축복인 것이다.


15.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하관-4) (약 4 : 13-17) 294,531,532

인간은 변화무쌍한 세상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으토 인해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또 어떤 때는 인생이 무엇인가라고 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1, 안개와 같은 인생.
안개는 잠깐 있다가 아침 해가 돋을 때 사라지는 순간적인 것이다.
우리 인생이 바로 이와 같다.
천년만년 살고 지는 것 같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늙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이다.
안개와 같은 우리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된다.

2, 인생의 목적
인생이 안개와 같다 할지라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을때 그 인생은 야름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목적의식을 정립할 수 있는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같은 거룩한 목적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때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3, 인생의 의무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영혼은
이 땅에서 거룩한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고 OOO 성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과하여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자.
안개와 같은 인생이지만 예수를 영접한 자는 영원한 삶을 약속받았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다


16 영생에 대한 열정 (하관-4) (고후 5 : 4-7) 225,540,544

모든 인생들은 태어나서 각각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미리 알 수가 없으며,
두려움이 깔린 산골짜기의 길을 추측할 수가 없다.

1, 하나의 길.
이 세상에서 인생이 걸어가는 길은 각자가 상이하지만
마침내는 모두가 하나의 길에 귀착된다.
빈부귀천 동서고금 장유노소 모두가 이 한 길로 내려가고 있는 것다.
이 길은 바로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이 죽음이라는 길이다.
이 길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없고, 두려워하지 않을 순도 없다.

2, 영생의 길 .
인생이 거부 할수 없는 죽음이라 해도, 죽음 이후의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모할 때, 죽음이 그의 원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영생의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이 길은 간절히 믿음으로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3,사모하는 자의 열정
미지의 인생길을 걸어가지만 나그네의 삶을 사는 자들이 지만 영생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은 그 생애가 아름답고 귀하다.
그는 이 땅에서 부귀영화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영생에 초점을 두고 살기 때문에.
다소 손해가 있을지라도 이를 즐겁게 감내하여 찬양 부르며 전진해 나간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예수를 믿으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17. 죽음의 근원 『삼상 20 : 1-3] f 289,290.292

모든 인생들은 나민은 이 땅 위에 천년 만년 살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 위에 임한다.

1, 죽음의 때 .
인간의 죽음의 때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오늘 건강하게 집을 나갔던 자가 저녁에는 시체가 되어
병원영안실로 직행하는 예가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옛날 다욋이 체험했던 한 예이기도 하다.
그는 위기일발의 순간순간을 살면서 항상 죽음을 직감하였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 인생의 생애이다.

2. 죽음의 정의 .
인간은 죽음을 육체적인 생명의 종지로만 생각하지만 성경은
세 가지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즉 겉육체적인 죽음, 건영흔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죽음,
길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생애.
이로 보건데 인간의 죽음은 그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멸절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로의 삶의 변이를 뜻한다.

3,. 죽음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
죽음은 빈부귀천 동서고금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들에게 임하는 가장 공굉한 손넘이기도 하다.
이 엄연한 사실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인간은 죽음을 잘 예비하여야 한다.
실아 생전에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그 분 뜻대로 행하므로
복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죽음의 때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준비하는 자들이 되자.


18. 바울의 인생관 (입광-1) 딤후 4 : 6-8 231,402,544

우리 인생은 이 땅에 잠시 잠깐의 생애를 살다가 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언겐가는 모두다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울의 생애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과거의 생애 .
바울은 인생을 투쟁하는 전쟁터로 보았다.
그는 을바른 인생. 후회없는 생애를 살기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했다.
싸움이란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생의 정욕. 육신의 정욕.세상의 자랑이다.
이것들은 우리의한펑생을 괴롭게 하다가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다.

2, 현재의 생애
바울은 지상 사역을 부7런씻 다 필하였다고,갈 준비를 온전히 갖추었노라고 확신했다.
이와같이 고백자 확신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나도 과연 숨을거둘 때 이와같은 아름다운 확신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부에 처할 줄로 알고 가난 속에서 자족할줄 알며
오직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살았던 바울이다.

3, 미래의 생애 .
바울은 죽음을 예상하고서,"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딘로'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미래에 받을 상급을 사모함으로 죽음에서도 오히려 위안과 용기를 받았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움으로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바울은 진리를 위해 싸왔으며 복음을 위해 생애를 다바쳤다.
그리고 본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


19. 죽음을 위한 준비 (임종-2) 사 38 : 1-3 f 294,295,296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두지 않고 공평하게 임한다.
그리고 이 죽음은 어김얼이 숨김없이 조금도 오차 없이 사람의 생명을 잇아간다.
이 죽음으로 인하여 사람은 그가 생전에 행했던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

1, 우리는 죽은 자의 영흔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장례예식의 목적은 죽은 자의 상태를 진척시키기 위해 집행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영흔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성경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어느 곳에도 엄다.
우리는 친지들이나 이웃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영흔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해야 하지
그들이 이미 죽은 이후에 기도 한다는 것은 아무런 효능이 없다.

2, 유족들에 대한 권면의 말씀.
장례식의 중요한 목적은 남아있는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게하기 위함에 있다.
비록 장례식이 우리 영혼의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지 못하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자의 죽은 시신을 짐숭과 같이 아무렇게나 매장할 수는 없다.
장메식 의 또 하나의 목적은 죽음에 대한 교훈을 심어주기 위합에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엄연한 진리를 망각하기 쉽다.
시간과 감각에 속한 것들에 열중하는 동안 세상 재리에 빼앗겼던 마음을
영원한 것들로 되돌아 오게 함은 중요한 일이다.


20. 인간들의 행진 (입관-1) 욥 30 : 23 225.467,532

욥은 극한적인 고통과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자녀들과 아내가 떠나갔다. 소유도 모두 떠나 갔고 종들도 떠나갔다.
절친한 친구들은 그를 위선자 사기꾼으로 몰아 붙였다.

1,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죽어 무덤에 묻히는 것은 우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위대한 조성자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히9 : 27) 그러므로 인간이 죽어 묻히는 무덤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처소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가장 공평한 장소인 것이다.

2, 죽음은 심각한 것을 깨닫게 힌다.
인간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보고서 자신의 올바른 인생관을 정립하는 기회로 삼는다.
우리는 시간을 영원처림 생각하거나 영원을 시간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가
죽음을 목격하고서 이를 시정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야 말로 우리의 위대한 스숭이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3,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붙잡도록 고무시킨다.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는 자는 영생을 사모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에게 매 순간 순간은 가치있고 보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죽을때 영혼을 생각하게 하고 영생을 사모하게 하신다.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고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죽음은 인생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므로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


21. 영원히 멸한 사망 (발인-1) (사 25 : 8) 290.532,544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죽음위에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본문은 인간 최대의 원수인 사망을 이기시고 숭리하신 그분을 바라보게 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승리 .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와 결탁하여 그리스도를 죽이고 무덤 속에 넣은 후
군병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가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리스도를 더 이상
그 착고에 매어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망을 이기겼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인생들에게까지 사망에서 부활을 맛보게 하셨다.

2, 사람의 공포를 물리친 승리 .
사망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그의 영과 혼과 감정에까지 스며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공포의 도가니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을 향해 담대히,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3, 면류관으로 말미암은 승리 .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림으로
그 숭리를 온전하게 확증시킬 수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숭리로 사탄을 멸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땅위에 살고 있지만 이미 승리한 자로서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 아래서 믿음으로 길를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촬로 사망을 멸하고
영원한 승리를 얻었으딜로 사망을 두려워 말자.


22. 인생에 대한 평가 (발인-2) (시 90 : 9-10) 289.297.536

인생은 원래가 가치있는 존재이며 가치있는 사역을 하다가
전능자를 만나 뵈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어야 할 자이다.

1, 인간 연수에 의한 평가
오늘 본문은 인생이 살았던 연수게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상에 태어났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70, 80의 생애를 살다가 죽어야만 한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유년시절과 어린이 시절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하지만 연수의 길고 짧7이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다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2, 행위에 의한 평가
인간의 생명은 연수에 의해 평가되기 보다
그 행위에 의해 평가된다고 봄이 더 합당하다.
현대 문명의 이기는 이전에 여러 해 걸리던 것을 짧은 시간에 깨끗이 해결 지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보다 중요하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목표로 그 영광을 기대하떠 살아야 한다.

3, 내세 준비에 의한 귐가.
현재의 생애를 잘 사는 방법은 내세의 생애를 잘 준비하는데 있다고 봄이 옮다.
그러므로 인생은 초기부터 진정한 기반을 잘 선택하여 합당한 재료로써
맹렬한 불에도 견딜만한 집을 지어야만 할 것이다.
성도의 진정한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23.그리스도인의 승리 (하관-1) (고전 15 : 57-58) f 384,396,397

사망의 세력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망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1, 죽음에서의 승리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음에 대해 숭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죽음의 위협 앞에 수 없이 처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부촬의 신앙으로 인해 담대히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이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죽음의 현장에서도 부활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승리
현 세상에서는 부귀 영화의 척도에 따라 인간을 판단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이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누릴 자들은 그러한 승리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들이다.
승리하신 아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므로 영원한 승리를 얻은 것이다.

3, 승리 연율 자들의 자세 .
우리는 멸망 당할 자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무쌍한 풍조에 쉽사리 혼들리거나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소심하고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부활세계를 바라봄으로 힘과 용기를 공급받아야 하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확신하는 자들은 영생을 소유한 하나텀의 백성들이다.


24. 그리스도인의 잠 (하관-2) (시127 : 2) f 418,464.474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믿는 성도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모든 샘애 가운데 구체적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

1, 하나님외 사랑하시는 자들.
하나님은 죄악의 쇠사슬에 묶여있던 자들을
당신의 피값으로 구속하시고 자녀로 삼으셨다.
자녀이면 그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충의 대상이될 수 있다.
그들은 장차 하늘의 신령한 유업에 참여자가 된다.
그들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위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살고 있다.

2,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신령한 은사들은 물론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신다.
그는 그들에게 잠. 안식 만족을 주신다.
그가 공급하시는 만족은 모든 선한 것에 충만히 역사하고.
또 창세 전에 택하시고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3,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심 .
현세의 생애를 잘 사는 방법은 내세의 생애를 잘 준비하는데 있다고 봄이 옳다.
그러므로 인생은 초기부터 진정한 기반을 잘 선택하여 합당한 재료로써
맹렬한 불에도 견딜만한 집을 지어야만 할 것이.
성도의 진정한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죄를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잠깐이므로 자랑할 것 없는 약한 존재로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천국시민이 되어야 한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 박봉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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