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준비에 필요한 요소(2)
2006. 8. 16. 23:35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설교준비에 필요한 요소(2) 빛깔 나는 언어
간혹 영성이 깊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목회자의 설교를 “저 설교에는 예수가 없어! 구원 얘기를 없고 윤리적인 내용뿐이다!”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에 ‘예수’나 ‘구원’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해야 예수 중심적이고 복음 중심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너무 많이 들은 표현은 사람들에게 식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얼마든지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설교를 아름다운 말로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흔히 많이 들은 식상한 말과 식상한 표현으로 설교하는 것을 탈피하려는 노력은 힘써 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인 연설입니다. 그러므로 단어와 표현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노력하고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같은 진리를 뛰어난 표현과 다양한 표현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매번 식상한 표현으로 전할 때보다 청중들의 설교 수용성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현학적인 표현보다는 맛깔 나는 표현을 하고, 대구(對句) 활용을 잘 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을 하고, 예화를 길이를 가급적 짧게 꼭 표현해서 꼭 있어야 할 말과 단어만 집어넣고, 은은한 감동과 천박하지 않은 유머가 말씀 속에 스며 있어야 하고,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고, 표현이 생생해야 하고, 호소력과 친근감이 있어야 합니다.
위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훈련하다 보면 나아질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이 작성한 말씀 원고를 압축시키고, 어떤 글과 소설과 다른 분들의 설교를 압축시켜서 요약하는 훈련을 하다 보면 점차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설교 언어를 선택함에 있어서 명령조, 훈계조, 설교조의 언어는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수준이 높아진 현대 성도들에게 설교는 훈계하는 방식보다는 설득하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요새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일방적인 논리 주입보다는 아이가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해를 시키는 추세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는 것이라도 설교조의 언어는 최대한 자제하고, 청중을 무식하고 어린 죄인 다루듯이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자기가 영성이 아주 높은 사람인 것처럼 교만한 느낌이 들게 하는 어투는 피해야 하고, 설교자 자신은 모든 문제를 초월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투와 태도와 표정도 피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그런 어투가 통했습니다. 요새는 교육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 어투를 들으면 거부감부터 가집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예배 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도 혼났지요? 왜 목사님은 매번 설교하시면서 화를 내시고 야단을 치세요?” 평소에 존경하는 아빠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야단을 맞고, 기가 죽고, 씁쓸한 표정이 되는 것이 아이의 눈에는 너무 이상하게 보인 것입니다.
사실 야단치는 설교를 하면 설교자 본인은 “이번 설교는 파워가 있었다!”고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듣는 청중들에게는 심령을 변화시키는 파워가 거의 없습니다. 자녀는 야단칠 때보다 잘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할 때 더 삶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성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설교자 중에 성도들에게 변화된 삶과 헌신적인 삶을 도전하기 위해서 충격 요법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을 심어주는 얘기, 헌신을 하지 않아서 벌 받은 얘기, 순종하지 않아서 저주받는 얘기 등을 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성도의 영혼은 점차 영적 정서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서 듣는 청중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어둡고 부정적인 표현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써야 합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자녀보다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자녀가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런 예와 통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특별히 설교자는 때리는 설교를 삼가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강단을 한풀이 장소로 생각하고 때리는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듣는 청중은 그 설교를 듣고 변화되기보다는 대개 반감을 가집니다. 그렇게 반감을 가지면 설교자는 자신이 치유설교를 하지 않고 상처를 도지게 하는 설교를 해서 반감을 가지게 해놓고는 듣는 청중보고 “말씀 듣는 태도가 나쁘다!”고만 하고 “내가 말씀 전하는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니었는가?”하고 반성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때리는 설교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표현을 다듬고, 어떤 경우에도 강단에서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완전원고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말, 극단적으로 치우친 말, 비속어, 절제가 없는 말, 한 풀이의 말 등을 잘 여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강단에 탁 서면 성령님이 말씀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보면 자신이 이전에 알고 있던 말, 이전에 했던 말의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이미 익숙한 말을 전하기 때문에 전할 때는 더 익숙하게 전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처럼 파워가 있는 설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면 오래 들은 청중들은 그 설교자를 리바이벌의 천재로 여기게 되고, 점차 설교로부터 얻는 감동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강단에 섰을 때 즉시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하기보다는 말씀을 빚어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렇게 하면 실수도 줄어들고, 자신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때리는 설교로 들리지 않도록 설교 표현을 잘 가다듬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험에 든 성도가 있을 때에는 더욱 설교가 때리는 설교로 들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든 성도에게는 일반적인 설교도 때리는 설교로 들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무서워서 설교 중에 꼭 전해야 할 말을 억지로 뺄 필요는 없지만 성도들은 때리는 설교라는 혐의를 가지게 되면 감정적 동란을 겪으면서 막무가내로 목회자에 대한 반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큰 시험이 생기는 경우를 보면 목회자의 때리는 설교가 시험과 혼란의 기폭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성도의 연약함과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하고 때리는 설교로 들리지 않도록 목회자는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훈계조의 말도 조심해야 하지만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말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유일한 대언자인 것처럼 자신의 설교를 절대 진리인 양 성도들에게 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3계명을 위반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듣는 청중에게 가장 큰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설교는 듣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그들의 상처를 어루 만져주고, 긍정적인 소망을 주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을 잘 하려고 애쓰는 것은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잘 빚어진 언어의 힘은 놀랍습니다. 어떤 말씀은 겉으로는 위로와 평강과 소망을 주는 말인데 그 속에는 강한 도전과 질책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 고사성어에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촌철살인의 말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조금씩 신경을 쓰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무엇보다 그쪽으로 달란트가 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작성한 좋은 설교를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간혹 영성이 깊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목회자의 설교를 “저 설교에는 예수가 없어! 구원 얘기를 없고 윤리적인 내용뿐이다!”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에 ‘예수’나 ‘구원’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해야 예수 중심적이고 복음 중심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너무 많이 들은 표현은 사람들에게 식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얼마든지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설교를 아름다운 말로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흔히 많이 들은 식상한 말과 식상한 표현으로 설교하는 것을 탈피하려는 노력은 힘써 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적인 연설입니다. 그러므로 단어와 표현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노력하고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같은 진리를 뛰어난 표현과 다양한 표현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매번 식상한 표현으로 전할 때보다 청중들의 설교 수용성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현학적인 표현보다는 맛깔 나는 표현을 하고, 대구(對句) 활용을 잘 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을 하고, 예화를 길이를 가급적 짧게 꼭 표현해서 꼭 있어야 할 말과 단어만 집어넣고, 은은한 감동과 천박하지 않은 유머가 말씀 속에 스며 있어야 하고,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고, 표현이 생생해야 하고, 호소력과 친근감이 있어야 합니다.
위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훈련하다 보면 나아질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이 작성한 말씀 원고를 압축시키고, 어떤 글과 소설과 다른 분들의 설교를 압축시켜서 요약하는 훈련을 하다 보면 점차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설교 언어를 선택함에 있어서 명령조, 훈계조, 설교조의 언어는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수준이 높아진 현대 성도들에게 설교는 훈계하는 방식보다는 설득하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요새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일방적인 논리 주입보다는 아이가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해를 시키는 추세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는 것이라도 설교조의 언어는 최대한 자제하고, 청중을 무식하고 어린 죄인 다루듯이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자기가 영성이 아주 높은 사람인 것처럼 교만한 느낌이 들게 하는 어투는 피해야 하고, 설교자 자신은 모든 문제를 초월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투와 태도와 표정도 피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그런 어투가 통했습니다. 요새는 교육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 어투를 들으면 거부감부터 가집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예배 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오늘도 혼났지요? 왜 목사님은 매번 설교하시면서 화를 내시고 야단을 치세요?” 평소에 존경하는 아빠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야단을 맞고, 기가 죽고, 씁쓸한 표정이 되는 것이 아이의 눈에는 너무 이상하게 보인 것입니다.
사실 야단치는 설교를 하면 설교자 본인은 “이번 설교는 파워가 있었다!”고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듣는 청중들에게는 심령을 변화시키는 파워가 거의 없습니다. 자녀는 야단칠 때보다 잘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할 때 더 삶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성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설교자 중에 성도들에게 변화된 삶과 헌신적인 삶을 도전하기 위해서 충격 요법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을 심어주는 얘기, 헌신을 하지 않아서 벌 받은 얘기, 순종하지 않아서 저주받는 얘기 등을 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성도의 영혼은 점차 영적 정서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서 듣는 청중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어둡고 부정적인 표현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써야 합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자녀보다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듣고 자란 자녀가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런 예와 통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특별히 설교자는 때리는 설교를 삼가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강단을 한풀이 장소로 생각하고 때리는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듣는 청중은 그 설교를 듣고 변화되기보다는 대개 반감을 가집니다. 그렇게 반감을 가지면 설교자는 자신이 치유설교를 하지 않고 상처를 도지게 하는 설교를 해서 반감을 가지게 해놓고는 듣는 청중보고 “말씀 듣는 태도가 나쁘다!”고만 하고 “내가 말씀 전하는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니었는가?”하고 반성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때리는 설교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표현을 다듬고, 어떤 경우에도 강단에서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완전원고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말, 극단적으로 치우친 말, 비속어, 절제가 없는 말, 한 풀이의 말 등을 잘 여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강단에 탁 서면 성령님이 말씀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보면 자신이 이전에 알고 있던 말, 이전에 했던 말의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이미 익숙한 말을 전하기 때문에 전할 때는 더 익숙하게 전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처럼 파워가 있는 설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면 오래 들은 청중들은 그 설교자를 리바이벌의 천재로 여기게 되고, 점차 설교로부터 얻는 감동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강단에 섰을 때 즉시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하기보다는 말씀을 빚어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렇게 하면 실수도 줄어들고, 자신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때리는 설교로 들리지 않도록 설교 표현을 잘 가다듬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험에 든 성도가 있을 때에는 더욱 설교가 때리는 설교로 들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든 성도에게는 일반적인 설교도 때리는 설교로 들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무서워서 설교 중에 꼭 전해야 할 말을 억지로 뺄 필요는 없지만 성도들은 때리는 설교라는 혐의를 가지게 되면 감정적 동란을 겪으면서 막무가내로 목회자에 대한 반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큰 시험이 생기는 경우를 보면 목회자의 때리는 설교가 시험과 혼란의 기폭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성도의 연약함과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하고 때리는 설교로 들리지 않도록 목회자는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훈계조의 말도 조심해야 하지만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말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유일한 대언자인 것처럼 자신의 설교를 절대 진리인 양 성도들에게 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3계명을 위반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듣는 청중에게 가장 큰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설교는 듣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그들의 상처를 어루 만져주고, 긍정적인 소망을 주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을 잘 하려고 애쓰는 것은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잘 빚어진 언어의 힘은 놀랍습니다. 어떤 말씀은 겉으로는 위로와 평강과 소망을 주는 말인데 그 속에는 강한 도전과 질책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 고사성어에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촌철살인의 말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조금씩 신경을 쓰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무엇보다 그쪽으로 달란트가 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작성한 좋은 설교를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anqy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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