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11. 18:24ㆍ교회사자료/9.이스라엘 역사
팔레스타인 분쟁은 유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강경한 저항으로 4번의 주요 전쟁과 수 없는 충돌을 거치면서 중동의 화약고로 불렸다. 그러나,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1990년 대 부터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는 있으나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외향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으로 보이나 중동지역 대부분의 국가가 직ㆍ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미국도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그 어떠한 분쟁보다도 국제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례로 1973년 소위 '10월 전쟁'시 러시아의 개입 위협을 미국이 핵억지 전력을 가동시키면서까지 막은 바 있다. 또한,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등 국제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분쟁은 중동 전체의 안전과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에 있어서 핵심적 관건이 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아랍민족과 유태인들 모두에게 독립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이율배반적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 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편입하고 동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고 아랍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반유태인 운동을 확산시켰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키는 안을 채택하였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고 그 결과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올렸고, 팔레스타인인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1956년 10월에는 이른바 '시나이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동 전쟁은 이집트의 낫세르의 군비 증강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를 점령하게 되었다.
1967년 6월 5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연합세력과 이스라엘간에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1966년 10월 군사동맹을 맺고 주변 아랍국가들과도 협력체제를 강화하면서 대이스라엘 군사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6일만에 종결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 등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서 이른바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으로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고 골란고원에서 일방적으로 승리를 확보한 후 시나이반도의 이집트군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82년 5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시리아와 소위 '2일 전쟁'을 벌였다. 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85대 이상의 시리아 전투기를 격추한데 비해 이스라엘 측 전투기는 단 한 대만이 격추되는 전과를 올렸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유엔은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는 1977년 11월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이다. 미국의 주선으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평화적 관계를 정착시키는 한편 잃었던 시나이반도를 되찾게 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원적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어렵게 조성된 중동지역의 평화 분위기를 외면하고 1967년과 1973년 전쟁에서 점령한 동예루살렘과 가자지구 및 골란고원을 1980∼1981년 기간동안 자신의 영토로 공식 합병시켰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분쟁은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오슬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1994년 5월 '카이로 협정'을 체결하여 이스라엘 점령지 내 가자지구 및 예리코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8년 10월 25일 '와이 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함으로써 양측의 핵심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 동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8년 12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 1단계 철수를 마쳤으나 1999년 초 요르단강 서안에서 폭력사태가 잇따르자 철군을 중단하였다. 1999년 5월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 건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상회담이 재게되고 양측은 9월 와이협정의 후속조치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일부 영토에 대한 추가 이양에 합의하였다. 2000년 3월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요르단강 서안의 땅 6.1%에서 철군하는 계획을 승인한 바 있다. 철군이 완전히 이루어질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요르단 강 서안 40% 지역에 대한 부분 또는 완전 통제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가장 큰 걸림돌인 동 예루살렘의 지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의 성지로 1967년 제3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에 의해 합병되었으나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동 예루살렘'을 원하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에 이주한 유태인이 이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내세우고 있어서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내부 문제도 평화 정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인 요르단강 서안의 이양을 반대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 원리주의자와 이스라엘 정부에 퍼져 있는 강경주의자들의 반발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도 PLO안에 독립국가의 즉각적인 선포를 주장하는 강경세력과 이스라엘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하마스 등의 급진ㆍ테러 단체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국가간에는 상호 실체 인정과 공존을 사실상 원치 않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이는 2000년 가까이 지속된 양측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반목과 종교적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진정국면은 양측간의 진정한 화해보다는 탈냉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와 힘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중동지역 세력균형의 변화에 따라 분쟁이 재연될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반미를 표방하며 아랍권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과 이라크,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시리아 등이 중동 지역의 세력 균형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연합할 경우, 이들 국가의 공통된 공격 대상인 이스라엘과의 분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 예로 1999년 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투쟁을 천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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