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 교수
1. 시작하는 말
일반적으로
'선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고 볼 때 선교에 대한 전형적인 책은 신약이다. 왜냐하면 신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활동한 모습들을 증거하고 있으며3),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충만했던 제자들이 모인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는 오늘날 선교 운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행 2장 이하). 선교의 모습을 이런
관점에서 고찰할 때 구약은 선교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일부 학자들이 구약은 하나님이 만백성 중에서 고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반면에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유혹하는 악한 무리들로 묘사하고 있다고 오해한 탓도
있다4). 그러나 신약의 뿌리가 구약인 것처럼 신약이 보여주고 있는 선교와 선교 활동의 바탕은 바로 구약이다. 구약에는 신약에 비해서 선교와
관련된 책들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선교에 대한 전형적인 책으로 흔히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
요나에 대한 이야기인 요나서를 예로 들고 있다5). 그러나 구약에서 요나서 이외에도 선교와 관련된 본문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6). 이
글에서는 구약에서 예언자들과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날 선교 신학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주전 8세기의 네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을 중심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2. 예언자와 선교사 예언자와 선교사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면 먼저 예언자와 선교사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아야 한다.
2.1. 예언과 예언자
한편 '선견자'로 옮긴 <호제>와 <로에>의 기본형 동사는 모두 '보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선견자에게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다.11) 선견자는 주로 성전이나 왕궁에서 왕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을
환상을 통하여 보고 왕에게 전해 주었다.12)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해 주기도 한다. 예언자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언자는 미래의 일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일도 선포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은 실제로 현재에 관한
일이 가장 많으며, 주로 그 당시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현재의 죄악을 날카롭게
드러내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미래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전했다. 그러나 이 때도 대부분 현재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자란
미래에 생겨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뜻하는 예언자(豫言者)라는 단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한 사람을 가리키는
예언자(預言者)라는 낱말이 더 올바르다. 위의 세 히브리어 낱말의 뜻과 쓰임에 비추어 볼 때 구약의 예언자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보여주신 것을 맡아서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2. 선교와 선교사 우리말의 '선교'란
'종교를 널리 미치게 선전함'이란 뜻이며13), 한문의 宣敎는 '가르침을 베풂'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선교에 해당하는 영어(mission)와
라틴어(missio)는 '보냄', '파견함'(sending away/off)이란 뜻이다.14) 이 낱말은 정치적으로 정부가 외교관을 보낼 때
특별한 임무를 주어 보내는 경우에 사용하며, 종교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사명과 위임을 받은 사람을 보내는 것을 뜻한다. 한편
'선교'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다.15) 1) 고전적, 전통적, 복음주의적 해석.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타문화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키며, 복음적인 사업을 수행하는 것 등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활동을 말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주제로 하며,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런 입장의 선교는 성경에 대한 헌신과 복음 전파의 열정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개인의 신앙 고백을 통한 영혼 구원에 중점을 둔
반면에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는 소극적이다. 2) 에큐메니칼적 해석. 선교란 단순히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파하여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복음이 전파된 곳에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 등을 이루어 마침내 모든 인간이 참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샬롬>의 수립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복음이 교회 안에서만 한정되어서는 안되며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해야 한다. 이 때 선교의 출발점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선교의 주도권도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즉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따라서 이 입장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이런 해석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정의와 친교와 봉사 등이 강조되기 때문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 전파에는 소홀히 하게 된다. 3) 통전적 해석. 이
견해는 선교에 대한 위의 두 입장을 조화시킨 것이다. 이 해석은 선교란 단순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교육, 문화, 사회 봉사 등을 모두 선교 활동에 포함시킨다. 이 입장은 사람의 영혼의 구원보다는 영혼과 육체
전체의 구원 즉 전인적(全人的) 구원과 사회 전체의 구원에 대해서 모두 관심을 가진다. 결국 선교란 복음과 문화, 복음 전파와 사회 봉사, 개인
구원과 사회적 책임 등을 모두 포함시켜야 한다. 이때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만물과의 온전한 질서와 조화가 회복되고 유지될 수 있다. 한편
'선교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choosing), 부르시고(calling), 보내심을 받은(sending)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교를 수행하는 사람이다.16) 위의 '선교'와 '선교사'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선교사'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내심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을 얻게 할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를 변화시키도록 힘쓰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3. 예언자와 선교사의 관계 위의 예언자와 선교사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1. 예언자와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아모스는 남 유다의 드고아에서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었으나, '여호와께서 아모스를 데려다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하게
하셨다(암 1:1; 7:14-15). 호세아는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호 1:1후)을 받고 하나님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
이스라엘에서 예언하였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부르시는 전형적인 모습을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시고 이사야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곳에서 볼 수
있다(사 6:8). 하나님이 먼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가 아닌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고 물으심에는 이사야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하나님의 사역에 나섰다는 뜻이 들어 있다. 먼저 이사야를 부르시고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미가도
호세아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미가에게 임하여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미 1:1). 선교사들도 예언자들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어야 한다.
2. 예언자와 선교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유다의 드고아에서 부르신 후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보내어서 왕의 여름 궁전과 송아지 신전이 있는 벧엘에서 주로 예언하게 하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송아지 우상 숭배에 대하여 고발을 하였던 곳도 바로 벧엘이었다. 17) 하나님은 예언자를 부르실 때 대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내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신 후 말씀을 주셔서 보내시기 전에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을 명령하셨다(호
1:2). 이런 결혼은 하나님의 규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레 21:13-14) 예언 활동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나님은 왜 호세아에게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결혼을 요구하셨을까? 공의의 하나님은 우상 숭배하는 음란한 이스라엘을 버려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신 7:7-8)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다시 결혼을 약속하셨다(호 2:19-20). 하나님은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음란한
우상 숭배의 죄를 폭로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그들이 응답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사야는 이사야서의 표제(標題;
title; 1:1)와 소명 기사(6:1)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로 예루살렘에서
예언하였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여호와의 질문 속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여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미가는 유다의 모레셋에서 소명을 받고(미
1:1), 모레셋 주위와(미 1:8-16) 예루살렘으로 보내심을 받고(미 2-3장)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아모스는 남 유다의 드고아에서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에서, 호세아는 먼저 고멜과 결혼
후 고국 이스라엘에서, 이사야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미가는 고향 모레셋과 예루살렘에서 각각 예언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오늘날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는 달리 대개 자기 나라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구약의 선교는 예언자들이 주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등에서
활동한 것처럼 안으로 들어오는 구심적(centripetal: inward-moving) 선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신약의 사도들과 오늘날
선교사들의 선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밖으로 나아가는 원심적(centrifugal: outward-moving)
선교이다.18) 니느웨로 파송 받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는 두 선교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선교사들은 파송 받은 지역과 거리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19)
3. 예언자와
선교사는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서의 표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각 예언자에게 임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을 전하였다(암
1:1후). 하나님이 아모스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7:15)고 말씀했을 때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를
위험한 음모자라고 고소하였다(7:10).그러나 아모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3:8후)는
자신의 고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7:16-17). 호세아가 선포한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권면과
경고의 말씀으로써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호 1:1후). 호세아 1장 1절의 우리말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여호와의
말씀'(<데바르 아도나이>이란 어구가 1절 맨 끝에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1절 맨 앞에 나와서 1절의 나머지 말씀들이 이 어구와
연결되고 있다.20) 이 구조는 호세아서의 말씀은 모두 여호와의 말씀이며 호세아의 말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사 1:1후)와 여호와로부터 들은 말씀21)을 유다와 예루살렘에 전하였다. 미가도 호세아처럼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미 1:1후)를 받아 전하였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을
외쳐서 널리 알리는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에, 흔히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형태로 말했다.22) 예언자가 선포하는 내용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양식 즉 백성들의 죄의 고발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있다.23) 그러나
예언자는 이런 형태의 심판의 말씀이나 구원의 말씀이나 그대로 전하였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은 예언자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권위와 창조와 구원의 능력이 들어 있다. 예언자와 선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함께 살고,
기뻐하고, 말씀 때문에 고통과 부끄러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말씀의 종이어야 한다(렘 20:7-9 참조).
4. 예언자와 선교사는 자신의 나라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러 이방 나라들과의 교제를 금하시고, 심지어 이방 나라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구약에는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여지가 거의 없고, 결국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사상의 기초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대적하는
까닭은 그들의 우상 숭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과의 교류가 있을 때마다 이방 종교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경배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타락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고 그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의 책임에 대해서도 물으신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나 이웃 나라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심판하신다. 아모스는 스스로 교만에 빠졌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도 그들의 죄를 따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연약한 자들을 핍박하였던 불의한 이웃나라들에게도 정의로 심판하신다(암 1:3-2:3). 하나님은 만
백성들 모두가 정의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호세아는 고국인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하였으나 남 왕국 유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24) 이사야는 주로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서 예언했으나 이방 나라들에 대해서도 예언하였다(사 13-23장). 미가는
모레셋 주위와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서 예언하였으나 유다의 이웃에 대해서도 예언하였다.25) 예언자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도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을 외쳤다(렘 10:10 참조). 창조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신
7:6-8).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만 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게 하려는데 있었다(창 12:1-3).26)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제사장 나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열방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출 19:4-6).27)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주변의 우상 숭배하는
이방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지만 이방 나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거하는 땅의 거룩함은 이스라엘의 유산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가득한 시온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세계 모든 민족들이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성전으로 몰려갈 것이다(사 2:2-3).28) 미가도 이사야처럼 마지막 때 예루살렘과
시온 산이 우뚝 솟아 많은 이방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을 예언하였다(미 4:1-5). 하나님의 심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도
만민에게 해당된다.29)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셔서 이방인도 이스라엘처럼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열방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며, 열방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선하신 분이시다(시 67편).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종말에는 여호와를 다같이 섬기게 될
것이다.30) 이는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하나님 즉 우주적 구원의 하나님임을 증거 한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와 백성의 하나님이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주위의 나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은 세계의 주(主)이심을
드러내었다. 선교사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말씀을 땅 끝까지 전파해야 한다. 예언자들의 모습을 위의 선교에 대한 세
가지 신학적인 해석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정의와 공의와 사랑을 실천할 것을 촉구한 예언자들은 에큐메니칼적 해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지 않은 이방 나라에 대해서 예언한 것은 간접적인 고전적, 전통적, 복음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3. 예언자들의 선교 신학
3.1. 주전 8세기와 예언자들 주전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에는 강력한 왕인 여로보암 2세(주전 786-746년; 왕하 14:23-29)와 웃시야(주전 783-742년; 왕하
14:21-22; 15:1-7; 대하 26:1-23)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 두 왕이 다스린 40여년 동안 두 나라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때처럼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두 나라는 여호와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여호와를 떠나 이웃 나라들의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대신 이웃 강대국들과 조약을 맺고 그들을 의지하였다.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과 유다가 번성할 때 타락하기 쉽다는 하나님의 말씀(호
10:1; 13:6; 신 8:7-20)의 교훈을 저버린 결과 이스라엘은 721년에 앗수르에, 유다는 587년에 바벨론에 각각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처럼 풍요 속에서 타락하고 있었던 주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이 쇠퇴하고 멸망할 때 아모스와 호세아를, 남왕국 유다가 쇠잔하고
몰락할 때 이사야와 미가를 각각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예언자로 보내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극복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처럼 위대한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전하게 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전 8세기는 예언의 황금
시대로 불린다. 하나님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셨다(롬 5:20후).
3.2. 아모스 아모스가 예언
활동했던 여로보암 2세 시대(주전 760년 경)의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왕실 재정으로 벧엘 성전을 지원하고(암 7:4), 종교적 절기를 화려하고
철저하게 지켰다(암 4:4-5; 5:22-23). 이 때 아모스는 이처럼 외식적인 성대한 예배와 요란스러운 제사는 자신을 속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의한 짓이라고 비난하고 공의와 정의를 외쳤다(암 5:21-24).31)
'정의'와 '공의'가 한 쌍을 이루어
오경에서는 창세기 18장 19절에만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명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함으로
여호와의 길을 지키게 하는데 있었다(창 18:19). 아브라함의 정의와 공의는 이 본문에 이어서 19장 26절까지 계속되는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불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모스는 '정의'와 '공의'란 두 단어의 쌍을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그 당시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암 5:7; 5:24; 6:12).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주요한 범죄는 그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탓이라고 하였다. 즉 법정에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할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므로 정의를 쓴 쑥처럼 만들고 공의를 땅에
팽개쳤다(5:7). 말과 소는 바위 위에서 쓸모가 없는 것처럼, 정치 지도자들과 부자들은 공의와 정의를 악용하여 정의를 생명을 파괴하는 쓸개로,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어 버렸다(6: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는 형식적이고 화려하고 요란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모스는
생명의 원천인 물이 흘러 넘침 같이 이스라엘 사회에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흘러서 그들의 생명이 보존될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해지기를 촉구하고 있다(5:24). 아모스의 이런 외침은 그 사회가 '정의와 공의'와는 거리가 먼 불의로 가득찬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모스는 그의 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정의'와 '공의'란 이 두 낱말들을 이스라엘의 올바른 사회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3.3. 호세아 호세아 시대(주전 750-721년)의 이스라엘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 Ⅰ세의 송아지
우상 숭배가 아모스 때보다 더욱 심하여서 여호와 종교와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풍요(豊饒; fertility)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는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에 깊이 빠져 있었다.33) 백성들은 출애굽과 시내산 계약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기 보다는 바알을 섬기는 의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가나안 신들을 통해서 풍요로움을 얻으려고 하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가 아닌 바알과 아세라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삶을 부유하게 하는 신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호세아는 여호와가 참된 풍요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에 응답하여 계약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 어구가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자연 종교의 신들을 섬기는데서 떠나서 출애굽의 구원과 시내산 계약의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계약의 요구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4:2전). 계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를 파괴하는 이런 다섯 범죄는 단순히 일반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닌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이런 범죄는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백성답지 못하게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불의하고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 속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이런 모습을 약 1세기 후 유다 나라에서도 보게 된다(렘 7:9 참조). 여호와와 맺은 계약을 어기면 계약에 규정된 저주의 형벌로
이웃의 피를 흘리게 될 뿐만 아니라(호 4:2후) 자연 만물이 저주를 받아서 파괴되고 신음하게 된다.38) 그러나 계약에 충성할 때 자연은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호 2:18-23; 14:4-8).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도
계약의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다.
3.4. 이사야 이사야 시대(주전 740년경-701년)의 유다는 사회적으로 가진 자가
없는 자를 학대하고, 과부나 고아와 같은 약한 자의 송사는 듣지 않고, 뇌물을 주고 받으며, 사치 풍조가 가득 찼고, 부도덕하였으며, 종교적으로
희생을 드리고 화려한 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이사야는 그 당시 사회의 불의(3:13-15; 5:8-24; 10:1-4)를 비난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불의한 생활과 함께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1:10-17). 이사야서에서 특히 선교와 연관된 말씀으로
이사야의 소명 기사(6장)와 애굽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말씀(19:16-25)을 살펴 볼 수 있다.
3.4.1. 이사야 6장
(separation)'는 뜻이다. 하나님은 주(主)이시고 왕이시며 주권을 지니신 자유로우신 통치자이시며, 만물을 초월해 계셔서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거룩한 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40) 그러나 그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들을 의지하고(30:1-2; 31:1 등),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 거룩한 자이신 하나님 앞에는 부정한 것은 하나도 설 수
없다(6:3-5). 인간은 심판과 정의의 하나님(5:10)을 대면할 때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6:5)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죄악에 대한 재난 예고에 이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41) 이사야는 그들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개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 어떤 위기에 빠져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3.4.2. 이사야 19장
16-25절 이 본문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13-23장)의 일부이며, 이방 나라인 애굽도 구원을 받고 여호와께 경배할 것을
약속하는 말씀이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중에 복이 되리니'(24절)라는 약속에서 절정을 이루는 이 본문은
구약에서 가장 '보편적인'(universalistic) 예언 가운데 하나이다.42) 이 본문에 나타난 선교 사상을 다음과 같이 알아볼 수
있다.43) 1. 그 날에 애굽 안에 가나안 말을 쓰는 성읍이 생기고 만군의 여호와께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18절).
애굽의 다섯 성읍에 사는 애굽 사람들이 주전 6세기 이후에 애굽으로 간 상당한 수의 유대인들44)에 합류할 것과 가나안 말을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에 '가나안 말'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가리킨다고 본다. 애굽의 네 성읍-믹돌, 다흐반헤스, 멤피스, 바드롯-에는 일찌기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며(렘 44:1), 장망성은 '헬리오폴리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2. 애굽 중앙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제단이 세워지고,
변경에는 여호와에게 드린 돌기둥이 세워질 것이다(19절).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도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억눌림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긴 그들의 상처를 고쳐주실 것이다(20, 22절). 애굽 사람들은 위의 다섯 성읍에서 여호와께 예배드릴 것이다(21절). 3.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대로가 생겨서 두 나라 백성이 서로 왕래하고 함께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23절). 두 나라는 오랫동안 서로 패권을 다툰
강대국이지만 서로 교제하며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이 될 것이다. 4. 서로 화해한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함께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의
복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며(24절; 창 12:3 참조), 애굽을 '나의 백성', 앗수르를 '나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사 64:8),
이스라엘을 '나의 소유'(신 32:9; 미 7:14)라고 각각 부름으로 여호와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25절). 이는 여호와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시고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5. 본문은 애굽과 앗수르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오늘날 새 이스라엘인 교회도 세계 선교의
도구로써 추구해야할 새로운 선교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3.5. 미가 미가 시대(주전 약 725-701년)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연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 불의한 시대였다. 미가는 특히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정의를
왜곡한 사람들로 책망하였다(2:1-11; 3:8; 6:9-16). 제사장들도 통치자들과 함께 연약한 백성들을 희생시키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으며, 예언자들도 많은 돈을 받고 거짓 예언을 하였다(3:5-7). 미가는 다른 참된 예언자들처럼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2:6-11) 자신은
정의로 충만하여서(3:8),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불의를 규탄하고 정의를 외친 것처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불의에 분노하고, 그들에게 정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3:1).45)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사회적 상황 속에 있었으나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사야와는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였다. 미가는 이사야의 시온의 거룩함과 불가침성을 강조하는 시온 전승 대신에 아모스처럼 시온의 타락 때문에 출애굽의 공동체 속에 들어 있는
해방과 평등 사상과 정의로운 사회를 담은 출애굽 전승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미가는 시온을 백성의 피로 세운 예루살렘의 왕과 신하들과 지도자들의
불의를 강하게 비난하였다(3:10). 미가는 결국 지도자들의 불의 때문에 시온 성읍과 예루살렘 성전이 망하리라고 예언하였다(3:12).46)
미가는 유다의 불의에 대해서 책망하고 여호와의 심판만 예언하지 않았다. 미가는 유다 백성들이 큰 재난을 겪은 후 장차 더욱 큰 복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미가는 베들레헴에서 다스릴 자가 나오리라고 하였다. 이 예언은 다윗 왕권의 갱신과 결부되어 있다(5:2-4). 미가의 이
예언은 다윗의 참된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로 여겨졌다(마 2:6). 미가는 여호와의 계약의 말씀을 어기는 불의한 나라나
성전이나 종교 의식 같은 제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가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정의와 인애와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였다(6:6-8).47) 이 말씀은 아모스와 호세아와 이사야의 중심 사상을 요약한 것이다.48)
4. 선교적 메시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고국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에도 전파하였다. 새 이스라엘인 오늘날 교회도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와 사회와 세계를 향해서 전파하는 선교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위의 예언자들의 신학을 이 시대에 다음과 같이 선교적 메시지로 적용할 수 있다. 1. 우리 사회는 특히 지도층의 부정과 비리와 도덕
불감증 등 온갖 불의로 가득히 차있다.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특권 의식 대신에 여호와의 그 은혜로우신 행위에 대해서 책임적인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고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면서 아모스와
미가처럼 정의와 공의를 외쳐야 한다(암 5:24; 미 6:8). 2.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물질과 정신의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번영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더욱 타락한 것처럼,
우리 시대도 풍요 속에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과 같은 이웃의 생명을 파괴하는 범죄가 더욱 깊어 가고 있다. 이런
범죄는 이웃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자연 환경까지 상하게 한다. 교회가 인애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때(호 4:1; 6:6). 온
세상에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있을 수 있다.49) 3. 성전에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체험한 이사야는 유다 왕과 백성들에게
구원 얻는 길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에 있음을 증거 하였다(사 7:8-9; 20:6;
30:12). 교회는 만 백성에게 강대국과 같은 세상 세력이나 우상을 의지하고 숭배하는 것은 헛될 것뿐이며 그들을 구원하고 다스리시는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전파하고 그들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야 한다. 4. 고대 이스라엘의 주전 8세기는 풍요 속에 죄악이
많은 시대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만 전하지 않고 심판을 넘어선 구원의 역사를 보고 그 시대에 회개를 촉구하였다.50) 오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교회와 사회는 세상 죄악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먼저 교회가 불의를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징계와
사랑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5. 하나님 앞에서 아모스의 정의와 호세아의 인애와 이사야의 믿음과 미가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신앙의 삶의 목표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이른바 보수교단에서는 하나님의 인애를 강조하면서 정의를 소홀히 하는
반면에, 진보교단에서는 정의에 치중하기 때문에 인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이런 두 가지 자세를 선교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앞의 것은
선교를 복음 전파에 중점을 둔 고전적, 전통적, 복음주의적 입장에, 뒤의 것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칼적 해석에 각각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선교는 위의 두 입장을 조화시킨 통전적 해석으로써 복음 전파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도 구원하여 새롭게 하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 예언자처럼 정의와 인애를 함께
행하면서 이를 전파해야 한다.
5. 마치는 말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와 이사야는 '정의'와 '인애'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실한 믿음'을 각각 그들의 중심 사상으로 삼고(암 5:24; 호 6:6; 사 6), 미가는 이 사상을 구약의 중심 메시지로
요약하였다(미 6:8). 예수님도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실 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행하는 일이 올바른 신앙 생활임을
강조하셨다(마 23:23; 눅 11:42). 정의와 인애와 믿음은 모든 교회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항상 추구해야
하는 바람직한 삶의 목표이며 동시에 자신을 살펴보아야 하는 신앙의 지침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과 신약 시대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파송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인 선교사들을 통해서 예언자들이 외친 정의와 인애와 믿음의 말씀이 그대로 땅 끝까지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예언자들의 외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기 위해서 세상 끝날 까지 선교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주석>............................................................................
1) 이 글은 필자가 2002년 2학기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개강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원고를 조금 다듬은 것이다. 2)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이며, 영국 Edinburgh 대학교에서 구약학 전공으로 Ph. D. 학위를 취득하였다. 3) 막
16:14-18; 눅 24:36-49; 요 20:19-23; 행 1:6-8 참조. 4) 이병수, '구약에서 본 선교', 『선교학 개론』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30-32쪽 참조. 5) 요나서와 선교에 대해서 김중은, '요나의 신학과
하나님의 신학', <빛과 소금> 30호 (1987년 9월) 44-47쪽; 이광순, '요나서를 통해 본 선교', <선교와
신학> 1집 (1998년) 45-70쪽; 이동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선교-요나 4장 2절 후반절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선교』(서정운 명예총장 은퇴기념 논문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3-40쪽; Hans Walter Wolff, Jonah the
Messenger = 문희석 역, ≪선교자 요나-요나서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8); Robert Martin-Achard, A
Light to the Nations: A Study of the Old Testament Conception of Israel's
Mission to the World (a translation of Israel et les nations: la perspective
missionnaire de l' Ancien Testament, 1959; Edinburgh and London: Oliver and
Boyd, 1962) 49-54; M. E. W. Thompson, 'The Mission of Jonah', The Expository
Times 105 (1993-1994) 233-236; Walter C. Kaiser, Jr., Mission in the Old
Testament: Israel as a Light to the Nations (Grand Rapids: Baker, 2000) 65-71 등
참조. 6)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통전적 이해에 대해서, 김중은, '구약의 선교에 관한 기초적인 고찰', <敎會와 神學> 28
(1996) 35-49쪽; 구약의 오경과 선교에 대해서, 성주진, '오경의 선교: 선교의 계약신학적 이해', <선교와 신학> 1집
(1998) 25-44; Martin-Achard (1962:54-59); Kaiser (2000:29-38); 구약의 성문서와 선교에 대해서,
시 67; 96; 102:12-22; 117 등 참조.
13) '선교3', ≪우리말 큰 사전≫ (한글학회 지음; 서울: 어문각,
1992) 2273쪽. 14) 장성배, '선교와 전도', 『선교학 개론』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68-170쪽 참조. 15) 장성배 (2001:172-177); 이후천, '복음주의 선교 신학', 『선교학 개론』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11-220쪽; 황순환,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 『선교학 개론』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221-236쪽; 손윤탁, '성경적 선교 신학과 통전적 선교관', <선교와 신학> 7집 (2001)
15-49쪽 참조. 16) 이광순, '요나서를 통해 본 선교', <선교와 신학> 1집 (1998) 53쪽. 17) 암
3:14; 4:4; 5:5-6; 7:10, 13 참조. 18) 손윤탁 (2001:31-35); Kaiser (2000:9, 83) 참조.
19) 박창현, '신약에서 본 선교', 『선교학 개론』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49-51쪽 참조.
20)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미 1:1; 욜 1:1; 습 1:1의 표제에서도 가장 먼저 나타난다. 욘 1:1; 렘
1:2; 겔 1:3 참조.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사 6:9; 7:4-5 등.
23) Claus
Westermann, Basic Forms of Prophetic Speech (Philadelphia: Westminster, 1967)
참조. 24) 호세아서에는 표제에서 호세아 시대를 특히 유다 임금들과 관련시켜 연대를 표기하고 있으며(1:1), 유다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1:7, 11; 4:15; 5:5, 10, 13-14; 6:4, 11; 10:11; 11:12; 12:2). 일부 주석가들은 호세아의
유다에 대한 말들이 이스라엘이 망한 뒤에 유다의 상황에 비추어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여긴다. Grace I. Emmerson, Hosea: An
Israelite Prophet in Judean Perspective (JSOTSup 28; Sheffield: JSOT Press,
1984) 참조. 25) 미 1:5-6; 4:1-5 참조. 26) 이병수 (2001:40-45); Martin-Achard
(1962:33-37); Kaiser (2000:17-21) 참조. 27) Martin-Achard (1962:37-40); Kaiser
(2000:22-24) 참조. 28) 사 24-27; 32-35. Martin-Achard (1962:61-75) 참조. 29)
사 2:1-4; 25:6-9; 60; 암 1:3-2:3; 렘 3:17; 슥 8:20-23 등. Kaiser (2000:71-74) 참조.
30) 사 45:20-21; 습 2:11; 3:9-10; 시 47:9 등 참조. 31)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조그마한 성읍인 드고아의 목자 출신이다. 아모스는 예언자의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다(암 7:14-20). 그러나 아모스는 여호와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불의한 사회에 대해서 놀랍게도 '정의와 공의'를 외친 정의의 예언자가 되었다. 32) 이동수, '미가서에 나타난
정의와 공의', 『장신논단』제15집 (1999) 57-58쪽; Moshe Weinfeld, Social Justice in Ancient
Israel and in the Ancient Near East (Minneapolis, Minn.: Fortress Press;
Jerusalem: Magnes, 1995) 참조. 33) 호 1:2; 4:11-14, 18; 10:1; 13:6; 신 8:7-20;
왕상 18:21 등 참조.
36) 이동수 (2001:26-27). 37) 출 34:6; 삼하 15:20; 시 36:7;
89:14; 렘 9:23 참조. 38) 창 3:17-18; 8:21; 사 24:4-7; 33:8-9; 렘 4:23-28; 9:9;
12:4; 14:2-6; 학 1:6-11; 2:16-17; 습 1:3; 롬 8:19-22 참조. 39) 이사야는 여호와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는 명칭을 31번이나 쓰고 있으며, 이 명칭은 구약에서 이사야서 이외에는 7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 1:4,
5:19, 24, 10:17, 20, 12:6, 17:7, 29:19, 23('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으로 나타남); 30:11, 12,
15, 31:1, 37:23; 40:25('거룩하신 자'로 나타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요약형으로 본다) 41:14, 16, 20;
43:3, 14, 15; 45:11, 47:4; 48:17; 49:7(2번); 54:5; 55:5; 57:15('거룩하다 이름하는 자'는
40:25처럼 요약형으로 본다); 60:9, 14. 이 명칭이 이사야 이외에는 7번만 나타난다: 왕하 19:22; 시 71:22; 78:41;
89:18; 렘 50:29; 51:5; 겔 39:7. 40) 사 10:20; 30:15; 31:1 참조. 41) 사 1:5,
16-20; 7:9; 28:11-12, 16 참조. 42) John Barton, Isaiah 1-39 (Old Testament
Guide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35. 43) Martin-Achard
(1962:46-49); Otto Kaiser, Isaiah 13-39: A Commentary (London: SCM, 1974)
104-112; John D. W. Watts, Isaiah 1-33 (WBC 24; Waco, Texas: Word Books, 1985)
258-262 참조. 44) 렘 24:8; 43:4-7 참조. 45) 미가는 예루살렘의 상류층 출신인 이사야가 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모스처럼 시골 모레셋 출신이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예루살렘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반면에,
미가의 예언에서는 아모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약한 사람들의 힘든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미가와 아모스 모두 시골의 작은 마을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레셋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25마일, 그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라기스에서 북동쪽으로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일반적으로 모레셋 가드와 같은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1:14). 모레셋은 주전 8세기경 남서쪽으로부터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키는
요새지였다. '모레셋 사람 미가'란 명칭에 비추어 볼 때 미가는 예루살렘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으로 본다. 46) 미가의 예언(미
3:12) 이후 백 여년 뒤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 사람들에 대한 멸망을 예언했을 때 거짓 제사장들과 예언자들로부터 처형을 당할뻔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몇몇 장로들이 미가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렘 26:18). 47) 신 16:12-13
참조. 48) 이동수,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미가 6:1-8', <敎會와 神學> 41집 (2000년 여름)
112-123쪽 참조. 49) 사 11:9후; 민 14:21; 시 72:19후; 암 5:24; 합 2:14; 마 4:1-11; 엡
6:17 참조. 50) 암 5:14; 호 12:6; 14:1-3; 사 1:16-20; 미 6:8; 7:18-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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