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영상:한국행~ 조선족(첨부:중국조선족민족역사)

2006. 7. 21. 12:07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한국행 부푼꿈, 술렁이는 중국 조선족




[뉴스데스크]

● 앵커: 요즘 중국조선족 사회는 너도 나도 한국 갈 생각에 크게 술렁이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동포들이 5년 동안 자유롭게 한국을 방문해서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관계 법령이 이르면 오는 7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옌벤 분위기를 정형일 특파원이 보내왔습니다.

● 기자: 요즘 중국 연길의 조선족 동포들은 둘 이상 모였다 하면 한국에 가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 인터뷰: 모여 앉으면, 술좌석 앉으면 7월달에 풀린다, 어쩐다, 이런 말에 지금...

● 인터뷰: 지금 한국에 간다니까 좋아서 막 들떠 있는 거죠.

● 기자: 연변 용정시에 있는 이 농촌 마을은 마을 전체가 한국행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 인터뷰: 60집이면 60집 다 가자고 해요.

● 기자: 한국으로요?

● 인터뷰: 예...

● 기자: 북한과 바로 인접해 있는 도문시 동포들 역시 요즘에는 일손이 거의 잡히지 않습니다.

● 인터뷰: 지금 우리 도문에는 3만명 정도 되는 교포들이 살고 있는데요.

대부분 한국으로 갈 그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 기자: 이처럼 대부분의 연변 동포들이 한국행 꿈에 빠지는 바람에 현지 기업나 식당에서 조선족 직원 구하기가 벌써부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 인터뷰: 우리 식당에 하루에 열 명 정도 면접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 중에 조선족이 한 명 될까 말까 해요.

● 기자: 또 농촌 사람들이 거의 다 한국으로 몰려갈 경우에 정든 고향땅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 인터뷰: 한족들이나 외지에서 와서, 마을에 와서 전을 부친단 (농사를 짓는단) 말입니다.

● 기자: 한국행 열풍이 거세지면서 연변의 조선족 동포 사회는 한바탕 크게 요동칠 전망입니다.

지린성 연길에서 MBC뉴스 정형일입니다.

(정형일 특파원 cheonghi@imbc.com)

[MBC TV 2006-04-28 22:12]

[ 중국 조선족 민족 역 사 ]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중국경내에 이주해 왔다.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민들은 전쟁과 기아, 봉건통치자들의 폭정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육속 우리나라 동북변강지대에 이주하여 정착생활을 하였다. 금후 이들은 점차적으로 우리나라 경내 민족의 한갈래로 되었으며 중화민족의 공동체로 되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을 강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되었다. 이는 광대한 조선인민들의 강렬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제국주의는 수천수만의 항일의병과 애국문화운동 지식분자들에 대해 피비린 탄압을 진해하여였다. 수많은 항일의병과 반봉건통치하의 농민들은 나라잃은 울분을 안고 고향을 떠나 중국의 동북 3성에 이주해왔다. 1990년까지 연변에는 98,0000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으며 총인구의 76.6%를 차지하였다.

1906년 조선족항일투사 리상우는 룡정에 항일사립학교 "서전서당"을 세워 철저한 민족주의교육과 항일계몽교육을 진행하였다. 이후부터 연변대지에는 선후하여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항일사립학교가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항일사립학교는 항일인재를 배양하는 요람과 항일투쟁 중심지로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민족의 근 40년에 달하는 굴곡적인 고난의 력사가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 폭발한 조선의 "3.1"항일독립운동의 추동하에 상해와 로씨야 항일독립운동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연변의 항일투사들은 "3.1"운동에 즉시 호응하여 한차례의 대규모적인 항일대폭풍을 일으켰다. 3월 13일 연변각지에서 모여온 3만여명의 조선족농민과 사립학교 사생들은 일본 총사령관 소재지인 룡정에 모여 연변력사상 처음으로 되는 대규모적인 항일집회를 소집하였으며 항일독립선언을 선독하고 일본게국주의의 침략죄행을 폭로하였다. 지방당국에서는 일본측의 압력에 못이겨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당장에서 10명이 총에 맞아 죽고 40명이 부상당하고 7명의 중상자는 병원에서 사망되었다. 3월 17일 1500여명의 조선족군중이 수난자의 유체를 들고 항의시위행진을 진행하였다. 4월말까지 모두 86,670명의 조선족군중이 당지의 항일집회와 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

1920년 여름 연변조선족항일부대인 "독립군"은 2900명의 병사와 2600여자들이 총을 갖고있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와 최명록이 지휘한 항일부대는 봉오동에서 일본군 19사의 150여며으이 적을 섬멸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조선항일무자잉 동북에서 대랴으이 일본군을 소멸한 첫번째 전투이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침략자는 연벼느이 조선족 항일부대를 소멸하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을 빚어냄으로써 일본군 2만여명을 조식하여 2285명의 조선족을 살해하고 2507호에 달하는 주택을 불살랐다. 10월 하순 홍범도와 김좌진이 령솔한 두갈래의 항일부대는 화룡현 성산리, 이도구, 어랑촌, 874고지에서 일본군과 련속 작전하여 천여명에 달하는 적을 소멸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이는 연변지구 조선족들의 항일민족해방투쟁정신과 영웅적기개를 충분히 반영하였다.

1931년 일본침략자들은 "9.18"사변을 발동하여 무력으로 동북3성을 점령하였다. "9.18"사변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족들의 리익과 념원을 반영한 조선족에 대한 기본정책을 제정하여 조선족당원간부와 군중의 항일투쟁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안도 등지의 현위 및 각급 서기들은 기본상 조선족들이 담임하였다.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한차례 또 한차례의 항일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 1932년 봄의 "춘황투쟁"은 이후의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군중기초를 닦아놓았다. 항일투쟁중에서 연변조선족 인민들과 형제민족인민들은 어깨 곁고 싸우면서 조국에 몸까지 바치면서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거대한 대가를 치렀으며 불후의 공헌을 하였다. 항일투쟁중에서 2726며으이 렬사가 용솟음쳐 나옸는데 그중 조선족이 2560명이다.

1945년 8월 8일, 쏘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고하였다. 8월 14일 쏘련홍군은 왕청, 훈춘으로부터 연변에 진입하여 8월 18일 연길을 해방하였다. 19일 연변 여러민족 인민들은 룡정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쏘련홍군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항일전재으이 승리를 열렬히 경축하였다. 1945년 9월 18일 중공 동북위원회 연변공작위원회 즉 동북항일련군연변분대가 연길에 두둔하였다. 뒤이어 중공연변지위, 연변군분구가 성립되었으며 이는 동만근거지의 건립을 위하여 공고한 정치적 기초와 조직기초를 닦아놓았다.

1945년 11월 미국의 추동과 부추김하에 장개석은 내전을 발동하여 국민당군대는 대폭적으로 동북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선후하여 금주, 심양, 사평, 장춘, 교하를 점령하였으며 "1주일내에 두만강을 뒤엎는다" 고 떠들어댔다. 연변의 용사들은 교하-라법-신역일선에서 국민당군대와 완강한 전투를 벌려 그들의 진공을 물리침으로써 연변대지를 보위하였다.

1946년 7월부터 1948년 4월까지 연변여러민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들끓는 혁명열정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조선족농민은 토지의 주인으로 되었고 각급 정권을 장악한 연변조선족인민들은 참군열정으로 들끓었다. 가는곳마다 부자, 부부, 형제지간에 앞다투어 참군하는 감동적인 장면들이였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연변의 52,000여명 청년들이 용약 참군하였는데 그중 85%가 조선족이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동만독립군, 동붑민주련군 제 10종대 제 28사,29사,30사에 편입되였다. 그들은 선후하여 동북해방전쟁, 평진전역, 도강전역에 참가하였으며 후에는 광서 해남도 전역에도 참가하였다. 이중에서 3350명의 렬사가 용솟음쳐 나왔으며 그중 3041명이 조선족이다. 그리고 "김성범모범전투련", "강팔련", "공농영웅련" 등 영웅집체와 "1급 인민영웅" 김천덕 등 290명의 전투영웅이 나타났다.

연변 여러민족들은 적극적으로 전선을 지원하는 길에 나섰다. 담가 3720개, 소마차 19,000대를 동원하였고 전선지원민공이 302,300명에 달하였다. 이중에서 3434명이 공을 세웠으며 해방전재으이 승리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연변 여러민족 인민들은 당과 정부의 영도하에 농업, 공업, 교통운수, 우전, 상업, 무역, 교육, 문화 등 각항사업을 회복하였으며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1950년 6월 조선내전이 폭발하였다. 미군을 위수로 한 "련합국군대"는 인천에서 등륙하여 조선내전에 간섭하였으며 북으로 돌진하였다. 연변 여러민족인민들은 중앙인민정부의 호조에 응하여 전국인민들과 함께 "항미원조,보가위국"리라는 기치하에 적극적으로 참군하였다.

1952년 9월 3일 중국공산당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족의 다년가느이 숙원이 끝내 새중국에서 실현되었다. 1955년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는 1954년 9월 반포한 "중화인민공화국헌법"규정에 근거하여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쳤다.

100년래 줄곧 민족압박을 받아오던 조선민족은 끝내 중국소수민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자치주의 주체민족으로 되었으며 진정으로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다.

 

 

중국조선족의 이주력사는 몇개 단계로 나눌수 있는가?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09월 29일
이주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의 이주사는 6개 단계로 나눌수 있다.

제1단계: 1620년부터 1677년의 명말청초시기

이 단계를 청조통치세력에 의한 '강제이민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비록 다른 원인으로 하여 동북으로 이주한 조선인도 있었지만 절대다수의 이주민들은 1619년에 명조를 원조하여 후금의 누르하치군대를 치기 위해 파견된 1만 2,000여명의 조선 리조군대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실패한후 살아남은 수천명에 달하는 군사들과 1627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2차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청조군인들이 랍치하여온 수만명의 조선군대와 백성들이다. 이들의 일부분은 강제로 청조 팔기군에 편입되고 대부분은 청조 왕공귀족들의 전리품으로 되여 농노 혹은 뽀이(包衣, 가내노예)로 전락되였다.

제2단계: 1677년부터 1881년까지의 시기

이 단계를 '범월잠입(犯越潛入)시기'라고 한다. 당시 동북에 대한 청조의 '봉금정책'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에서 백성들의 거주, 경작은 일률로 엄금되였다. 그러나 기아에 허덕이는 관내의 한족파산농민들이 가만히 동북에 들어오는외 빈궁에 시달리던 조선북부의 농민들도 살길을 찾아 청조의 봉금이나 조선왕조의 '쇄국령'을 위반하고 비법적으로 월경하여 깊은 산속에 숨어서 부대기농사를 하거나 만족이나 한족 부자들 집에서 끼살이를 하면서 점차 정착하였다. 1840년 이후 청조의 봉금이 해이해지고 또한 조선북부에 자연재해가 심하게 들어 살아가기 어렵게 된 빈곤한 농민들은 비법월경하여 압록강, 두만강 북안에 자리잡았고 많은 촌락을 이루었다.

제3단계: 1882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

이 단계를 '이민초간시기'라고 한다. 1875년 청조는 동변도지역의 간황지에서 이미 수십만 한족이민들이 정착한 기정사실을 승인한 동시에 일찍부터 이곳에 이주하여 온 조선빈민들이 거주하고 경작하는것도 묵인하였다. 이리하여 조선북부의 새 이주민들이 동변도지역에 앞다투어 모여들었다. 1897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동변도일대의 조선이주민수는 이미 3만 7,000여명으로 증가되였다. 다른 한편 청조정부는 짜리로씨야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하여 1881년에 두만강북안 즉 지금의 연변지대에 대한 봉금정책을 취소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조정부는 연변을 개간하고 지방재정수입을 늘여 군대의 량식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훈춘에 초간총국을 세우고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특히 1885년에 연변을 조선족의 '전문개간지역'으로 확정함으로써 많은 조선이주민들이 연변으로 오게 하여 연변이 조선족집거지역으로 되게 하였다. 1894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두만강북안 4개 보에만 하여도 5,990세대의 조선족이 정착하여 살았다.

제4단계: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시기

이 단계를 '자유이민시기'라고 한다. 1910년에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후 일제의 '환위이민(換位移民)'정책으로 말미암아 파산된 조선농민과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않는 조선인들이 대량적으로 동북에 들어왔다. 통계에 따르면 1922년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도합 51만 5,865명으로 증가되였다.

제5단계: 1921년부터 1931년 '9·18'사변전까지의 시기

이 단계를 '이민제한시기'라고 한다. 1915년에 일제의 핍박밑에 '21개 조약'이 체결된후 일제는 동북의 조선족에 대해 '통제-리용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족에 대한 '치외법권'을 떠들어댔다. 이리하여 중국정부에서는 일제가 '조선인보호'를 구실로 령토주권을 침범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족들에게 귀화입적할것을 강요하는 동시에 일제의 압박을 받는 조선족에 대해 '박해-구축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이주민을 제한하고 이미 정착한 조선족들에게는 박해를 가하고 구축하였다. 중국정부의 이런 정책의 실시는 1927년에 고조를 이루어 수많은 조선족들이 이미 개척한 땅을 버리고 조선으로 돌아가거나 북만지역으로 이사하여 갔다. 통계에 따르면 1931년 동북조선족인구는 63만 982명으로서 그 증가폭도가 크게 감소되였다.

제6단계: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

이 단계를 일제에 의한 '강제집단이민시기'라고 한다. 이 단계를 3개 시기로 나눌수 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는 '이민통제시기'이다. '9·18'사변후 일제는 동북에서의 저들의 식민통치가 아직 온정되지 못한 상황에 비추어 기주 조선족들에게 '통제-안정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집단이민'사업준비를 다그치면서 새 이주민은 조선총독부의 '이주민증'을 휴대하게 하고 이주후에는 집단부락에 집중시키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1936년에 이르러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85만 4,411명에 달하였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집단이민'시기이다. 동북에서의 저들의 식민통치가 비교적 튼튼히 확립되였다고 인정한 일제는 동북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건설하기 위하여 이민정책을 '3대국책'의 하나로 삼았다. 일제는 20년동안에 일본이민 100만 세대를 중국에 이주시키되 그 보조적수단으로 해마다 조선인이민 1만 세대를 이주시킴으로써 동북의 '토지개발'에 투입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정책의 실시밑에 연변과 동변도, 길장 및 북만지역의 39개 현에 대량의 조선인을 이주시켜 1939년에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06만 5,528명이나 되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개척이민'시기이다. 일제는 날로 승격하는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새 농지조성계획을 실시하면서 조선이주민도 '개척단이민'으로 북만과 서만지역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리하여 1945년 광복직전까지의 중국조선족 인구는 도합 215만명에 달하였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일부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새 중국이 창건될 때이던 1949년에 중국조선족의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감소되였다.

 

                           <력사자료>왜 동북에는 조선족이 많은가?

동북은 북으로 기나긴 흑룡강, 동으로 우쑤리강,남으로는 압록강 황해,서로는 대흥안령산맥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한반도의 4배쯤 되는 넓은 땅이다. 료하와 송화강이 동북의 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이 강가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이 펼쳐져 있다.이곳 동북의 들판과 산악 곳곳에는 일제에 맞서 싸웠던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의 발자취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이 동북에 조선족들은 언제부터, 왜 와서, 어떻게 살았는가.
  청나라는 동북를 청조의 발상지라하여 신성시하고 오랫동안 한족과 조선족이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그런데 1870년경 북부 조선 일대에 흉년이 들었다.이곳 농민들은 앉아서 굶어죽으나 동북가서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동북 땅에 들어가 땅을 일구었다. 이들이야말로 맨 처음 동북에 옮겨 산 사람들이었다.
  그뒤 동북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났는데 한일합방을 계기로 그 모습이 이전과는 달랐다.일제시대 때 조선족이 이주하는 까닭은 크게 보아 일제가 심하게 착취해서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조선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한답시고 마구 토지를 빼앗아가 소작지마져 구하기 어려운 처지였다.몰락한 농민들에게 땅이 넓고 기름지며,인구가 적은 동북는 희망의 땅으로 비췄다.
  동북으로 가는 이주민은 대개 늦가을에 고향을 떠났다. 그 이유는 곡식을 키울때는 날품이나마 팔아 끼니를 때울 수 있었지만 늦가을에는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주민들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주는대로 받고 팔아 생긴 돈으로 기차나 배로 고향을 떠나 동북으로 갔다.동북에 내릴 때부터 이들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영하 40도나 되는 매서운 추위속에서 10-50명씩 떼를 지어 산비탈을 기어 넘어가는 흰옷 입은 말없는 군중,바지를 걷어올리고 맨발로 어름장 섞인 강물을 건너가 저편 언덕에서 바지를 나리우고 신을 신는 조선족 남자,이곳 저곳 몸을 드러낸 채 아기를 등에 엎고 걸어 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조선족 여인의 모습은 동북 어디서나 흔했다.
  먼저 와 있는 조선족 집단 거주지에 가서 얹혀 살게 되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이주민은 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이 되거나 농장 노동자가 되었던 것이다.처음부터 "당신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계약을 맺어 고통도 클 수 밖에 없었다.이들은 중국인 불모지 땅을 괭이질 호미질하여 옥토로 가꾸었으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댓가는 너무 적어 살아가기 어렵기는 조선에서나 마찬가지였다.이주민 가운데 많은 사람이 얼어죽고 굶어죽구 병에 걸려 죽었다.
일제가 동북 침략할 때 동북에 사는 조선사람을 동원하자 이들은 더욱 힘든 처지가 되었다.일제는 자신들이 쫓아낸 것과 다름없는 이주민을 동북에까지 따라와 이제는 '일본 신민'이라고 우기고 돌보겠다고 하며 조선족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간섭하고 나섰다. 그들은 '일본 신민'인 재만 조선족을 자기들이 다스릴테니 이들에 관한 치외법권을 인정하라고 중국 정부에 강요하였다.이러한 협박은 중국에게는 커다란 주권침해였으며 중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깎았다. 중국인은 조선족을 점차 귀찮게 생각했다.심지어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는데 조선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고 조선사람에게는 조선족에게는 토지 소유권을 허가하지 않는 등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탄압하고 나섰다.조선족 중국인 민중간에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두 민족의 갈등은 길림성 장춘 부근 조선 농민을 중국인들이 습격한 만보산 사건(1931.5)으로 폭발되었다. 만보산 사건에 자극받은 국내 조선족들은 중국인 교포들을 습격하여 72명이나 때려죽였다. 조-중 민중 사이의 대결은 일제가 손꼽아 기다려 왔던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족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적극 간섭하고 나서 1931년 9월 18일 마침내 군대를 풀어 전 동북를 점령하였다.
  일제는 동북을 식민지로 확고히 굳히려고 이곳에 조선족들을 집단이주시키고자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선만척식회사를 세워 조선족 동북 이주 사업을 맡겼다.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이민 사업을 더 다그쳐 총독부는 해마다 5만명씩 20년에 걸쳐,100만명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이를 실현하려고 총독부는 각 도 군에 강제로 할당하여 이민을 모집하였으며 동북 풍요한 들판을 담은 무성영화를 전국 방방곡곡에 상영하여 동북이주를 충동하였다.그럴싸한 꾀임에 빠져 이주하는 조선족은 늘어 1933년에 67만여명이었던 조선족 수가 1939년에는 116만,1941년에는 150만이 되었다.
  속아서 동북으로 이주해온 조선족들은 북동북의 외딴 곳에 배치되었다. 그들이 당하는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학교도 병원도 없고 심지어 살 집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곳에 버려진 이주민들은 속았다고 뉘우쳐봐야 소용이 없었다.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도,돌아갈 여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조선족들에게 자못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이 조선족들이 황야를 개척하여 논으로 만들어 쌀을 생산하여 100만 재중국 일본군의 식량을 대주길 바랬다. 또 소련과 전쟁이 터지면 현지에서 소련군에 맞서 총알받이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였다.그러자면 조선족들을 '황국신민'으로 세뇌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제는 먼저 이주민이라는 용어를 금지하고 대신 개척민이라는 딱지를 붙여주어 이주민들에게 쓸모없는 자부심을 부추기고,국내에서 이름을 날리던 문인,연예인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개척인의 밤'을 열어 달래기도 하였다. 일제는 특히 이주민을 이끌 지도층의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지도층으로는 '동북 개척민 지도자'.'중견분자'.'청년의용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일제가 뜻하는대로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도처에서 일제에 맞서 저항하였다. 더구나 일제가 망한뒤 이들은 동북에 깊이 뿌리내린 일제 잔재 척결에 앞장섰다.
국내로 돌아 온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현재까지 동북 각지에 머물러 중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1954년에는 두만강 맞은편 북간도 지역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이 자치주의 공용어는 조선어이며 연길시에 설립되어 있는 연변대학은 이 자치주의 교육의 중심지이자 재만 조선족의 문화 교육의 구심 역할을 다해오고 있다. 따라서 현재도 재만 조선족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과 언어를 지켜오고 있다.

모이자 사이트에서 ---

조선족대중운동이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게 된 이유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2월 02일
1905년부터 1920년 사이에 조선족인민들은 주로 본 민족 민족주의단체의 영도밑에서 반일투쟁을 벌렸다. 그러나 민족주의단체 지도성원들의 계급적제한성으로 말미암아 민족주의단체들은 반봉건투쟁구호를 제기할수 없었다. 하여 그들은 봉건적 억압과 착취에서 시달리는 조선족인민들의 대다수를 리탈하게 되었으며 철저한 반일투쟁을 벌려나갈수 없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체의 협애성으로 하여 민족주의단체들은 중국땅에서 반일투쟁을 하면서도 중국의 여러 민족 인민들과 단결할줄 몰랐다. 역사는 민족주의단체들이 조선족대중운동을 승리에로 이끌수 없다는 것을 립증하였다.

1921년부터 1930년 사이에 조선족인민들은 주로 조선공산주의단체들의 영도밑에 보다 기세높은 반일투쟁을 일으켜 많은 희생을 내면서 영용히 싸웠다. 그러나 조선공산주의단체들은 중국땅에서 조선족인민에 의거하여 반일투쟁을 하면서도 《조선혁명연장론》만 견지한데서 맑스주의를 중국조선족실제에 결부시킬수 없었다. 우선 조선족인민들에게 반봉건투쟁구호를 내놓지 못하였으며 《1차혁명론》의 영향밑에 반일폭동에만 정력을 기울이다보니 조선족대중운동은 거듭되는 실패를 보게 되었다. 역사는 조선공산주의단체들도 중국조선족대중운동을 승리에로 인도할수 없다는것을 실증해주었다.

장기적이며 곡절적인 투쟁을 거쳐 조선족인민들은 본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세계약소민족 특히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과 밀접히 부합되어야 한다는 도리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조선족인민의 철저한 해방은 일제를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만을 전취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동북에서 자기들을 통치하고 압박하며 지어는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여러 민족인민들을 압박착취하는 중국의 봉건주의와 봉건착취제도를 뒤엎어야 하며 반제반봉건투쟁의 승리는 반드시 중국의 여러민족 인민들과 련합하여야만 실현될수 있는것이였다. 이리하여 1930년 3월부터 중국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조직원칙에 따라 원래의 조직들을 해산하고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밑에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여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를 때려엎는 투쟁에 적극 뛰여들었다.
조선족집거지역에서 중국공산조직의 건립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2월 02일
1928년초에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에서는 민중토대가 좋은 연변에 중공당원인 주동교를 파견하여 지하공작을 하게하였다. 같은 해 2월, 주동교는 중공룡정촌지부를 건립하였다. 이는 연변조선족지역에서 첫번째로 건립된 중국공산당 기층조직이였다. 같은 해에 북경 향산자유원 졸업생들이 연변에 와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 가운데는 17명의 당원과 단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동교와 련계를 달고 당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토대우에서 1928년 8월에 중공동만구위원회가 건립되고 그 산하에 9개 지부, 22명의 당원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당사업은 지식계층에만 국한되고 로농대중속에서 심입하지 못했다. 1929년초, 구위원회서기 주동교를 비롯한 당의 간부들이 체포되거나 관내로 피신한데다가 또 지방군경들이 엄밀히 감시하는 바람에 중공동만구위원회는 파괴되고 각지 기층당조직의 활동도 중지되었다.

1930년 1월과 3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조직원칙에 따라 중공만주성위원회와 조선공산당 각파의 대표들은 련석회의를 열고 조선공산당조직을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문제를 토의하였다. 1930년 4월, 중공만주성위원회에서는 《전만주농민투쟁강령》과 《재만조선인로농군중운동》에 관한 결의초안을 발표하고 7월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족인민들의 철저한 해방은 《오직 광범한 중국 여러 민족 근로인민들과 공동으로 반제, 반봉건투쟁을 진행하여 승리를 취득하여야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조선족선진분자들에게 《파벌관념을 청산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을 위하여 노력》할것을 호소하였다. 각지의 당조직들에서는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조선족선진분자들을 흡수하여 입당시켰다. 하여 조선족집거지역에서의 중국공산당조직은 신속히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 1월, 중공만주성위원회에서 파견한 조선족당원 왕경은 화룡현립제2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연변의 당조직회복사업을 벌려나갔다. 그는 중공연변특별지부를 건립하고 산하에 4개 지부를 두었는데 15명 당원이 있었다. 같은 해 봄부터《일국일당》의 원칙밑에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함으로 하여 당조직은 신속히 발전하였다. 8월 13일, 화룡현 평강에서 연변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소집되어 중공연화중심현위원회가 정식으로 건립되었다. 이어 중공왕청현위원회와 훈춘현위원회가 건립되고 10월에는 중공두만특위가 건립되었다. 동만특위 산하에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 현위원회에 19개 구위원회가 망라되어 전 연변의 반제, 반봉건투쟁을 영도하였다.

북만의 조선족지역에서는 1929년 10월에 중공중앙의 지시를 받고 파견되어 온 상해한인지부의 리국화(홍남표)와 김명시(김희성)가 중공북만특위의 지도밑에 당조직건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성현 해구, 황산주자와 이층전자 등 조선족지역들에서 당조직을 건립한 토대우에서 1930년 5월 17일에 중공아성현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이는 북만조선족지역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당조직이였다. 이어 녕안, 주하, 밀산, 탕원, 요하 등지의 조선족집거지들에서도 당의 현위원회와 그 기층조직들을 선후하여 건립하였다.

남만지역에서는 1929년 하반년에 반석현에서 박운파, 리동광 등 조선족선진분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초에는 1927년의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오성륜, 진공목, 마천목 등이 반석, 청원 등지의 조선공산당조직속에서 사업하면서 중공당원을 발전시켰다. 이 토대우에서 1930년 6월에 중공반석현림시위원회가 건립되고 8월하순에는 정식으로 중공만주성위원회에 직속된 반석현위원회로 되었다. 7월, 중공청원중심현위원회와 류하중심현위원회가 건립되었고 9월에는 중공화전현지부가 건립되었다. 이리하여 1928년부터 1930년 가을까지 동만, 남만과 북만의 조선족집거지역들에는 중국공산당조직이 보편적으로 건립되었다.

일제가 실시한 《집단이민정책》이란 무엇인가?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2월 23일
일제는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동북에서의 자기들의 식민통치질서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자 조선에서의 식민통치를 유지하고 동북의 농업자원을 한층 더 약탈하기 위하여 조선의 파산 농민들을 대량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1936년 8월 일본관동군은 괴뢰만주국정부를 사촉하여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제정하고 해마다 1만 세대, 5만 여명의 조선파산 농민들을 《치안》이 비교적 《안정》된 연변 및 동변도의 23개 현에 이주 시킨다고 규정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서울과 괴뢰만주국의 신경(장 춘)에 각각 조선이민경영 기구인 《선만척식주식회사》와 《만석척식유한주식회사》를 세웠다.

1937년, 서울 《선만척》은 조선남부에서 2,500여세대의 농민을 선정하여 동북의 《만석척》을 통하여 괴뢰간도성과 괴뢰봉천성에 이주시켰다. 100세대를 단위로 이루어진 이민부락은 집단부락의 형식으로 조직되고 이른바 《자작농창정》이 실시되었다. 1939년까지 조선인집단부락수는 147개로, 이민수는 9,600세대, 4만 9,600명으로 늘어났다.

1937년 《7.7》사변후 일제는 이민분야를 포함한 제반 경제를 전시체제로 개변시켰다. 1938년 7월, 일본관동군은 조선인이민범위를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인농민처리요강》을 반포하였다. 그 주요내용은 조선인이민을 의연히 해마다 1만세 대씩 받아 들이되 이민지역을 중쏘국경지대와 특정지역외의 전 동북의 39개 현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이민형태를 집단이민, 집합이민, 분산이민 등 3개 부류로 획분한다는것이였다. 새로 설립된 집합이민은 집단이민에 비하여 규모가 작을뿐만아니라 이민모집형식에서도 《선만척》이 이민신청자들을 상대로 각기 이주자들을 집합시켜 이주시켰기에 일본적으로 이민들의 성분이 비교적 복잡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폭발한후 일제는 군내의 군수산업의 토대로 되고있는 광산업에 필요한 로동력을 조선에서 강제련행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기에 동북으로의 조선인이민수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41년 6월에 반포된 《만주개척정책기본요강》에 따르면 집단이민, 집합이민은 해마다 1만세대의 절반을 점하여야 하였는바 새로운 규정에 따라 재래의 집단이민은 집합이민으로 취급되고 새로운 집단이민은 《일본개척단법》에 따라 조직되는 《개척단이민》이 되었다. 이는 일제가 송화강하류와 동료하일대에서 긴급경작지건설에 조선족이민을 내몰아 수전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리하여 1941년부터 1944년사이에 6만 4,887명의 조선족농민들이 동북에 강제적으로 이주되었다.

일제의 조선이집단이민정책은 조선에서의 자기들의 식민지통치를 공고히 하는 한편 조선족농민들의 수전농사기술을 이용하여 동북에서의 렴가농산물을 략탈하여 식민지리익을 얻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때문에 일제의 조선인집단이민정책은 파쑈적강제와 기만적인 선전을 토대로 하여 감행되었다. 하지만 장시기동안 식민통치를 받아 온 조선족농민들은 가족을 데리고 도주하여 동북으로 이주할지언정 이민단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매년 1만세대, 5만명이라는 일제의 이민계획은 종래로 완수되어 본적이 없었다. 1945년 일제가 망하자 그들의 집단이민정책도 종말을 고하였다.

             

20세기 20년대 조선족들의 민족공상업발전 상황은?

중국조선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 2001년 11월 18일
20세기 20년대 조선족들의 민족공상업발전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조선족은 자본주의발전이 미약할 때 중국에 이주하여 온 농경민족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엽부터 그 인구의 급속한 증장과 농업생산의 발전으로 하여 점차 잉여생산물과 가정수공업품이 많아짐에 따라 무역이 시작되었고 동북 각지의 자본주의공상업의 발전과 영향으로 하여 자체의 공상업도 산생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되어 있었던 연변의 룡정, 회경가, 남양평, 구산창, 두도구, 국자가, 동불사, 로도구 등 지에는 조선족거리가 생기기 시작하여 림시시장이 설치되고 야장간, 정미소 등 수공업제작소가 서기 시작했으며 잡화점, 포목점, 해산물, 육포, 려관, 음식점 등 여러가지 봉사업체들도 나타났다. 그리고 일부 조선족들은 한족들이 집거한 도시에 가서 특산물을 교역하고 잡화상점을 꾸리거나 주변조선족농촌을 대상으로 정미소, 철공소, 려인숙, 음식점 등을 경영하였다.

1909년에 《간도협약》이 체결된후 일제의 상부지로 된 연변의 몇몇 지방과 일제가 경영하는 남만철도연선 및 그 부속지내의 조선족지역은 일본자본주의의 렴가상품시장으로, 농산물원료시장으로 전락되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당지 조선족의 공상업발전에 일정한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1924년에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중국조선족집거지와 조선, 일본과의 무역이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조선족의 민족공상업은 일정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924년부터 1925년 사이에 연변에는 31개 곳에 시장이 설치되었는데 1년의 교역총액은 270만 1,808원이였다. 이밖에 해산물, 여러가지 면방직품, 축산물 무역과 기타 잡화무역의 총액은 371만 9,606원이였다. 당시 상업중심지였던 룡정에는 여러가지 점포 308개소가 있었고 봉사업에 222세대, 양주업에 2세대가 종사했다. 국자가에는 기계수리, 농기계제조, 소수레제조, 도자기업, 벽돌공장과 양주업 등 소규모적인 공장이 14개소가 있었다. 그리고 남만지역에는 1926년에 조선족상점이 674개소가 있었고 어업에 5개소, 정미업에 55개소, 가마니와 새끼꼬기업에 162개소가 종사하였으며 려관, 음식점, 양복점과 여러가지 수공업수리소 등 봉사업에 157세대가 종사하고있었다.

상술한 정황을 놓고 보면 20세기 20년대 조선족의 공상업은 상업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잡화점과 봉사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공업은 소규모의 수공업뿐이고 대기계업, 광산업등은 찾아보기 매우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그 형태를 놓고 보아도 자금이 적고 규모가 작았으며 설비가 락후하였다. 당시 연변에는 자본이 5만원이상, 10만원이하가 되는 집이 15세대, 1만원이상 되는 집이 100세대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몇천원밖에 안되었다. 기업들의 규모도 매우 작았는데 대부분 정미업의 설비는 10~20마력짜리 전동기 한두대에 몇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정도였다. 이밖에 당시 민족공상업자들의 경영대상은 거개가 조선족이였으며 그 범위와 판로가 매우 협소하였으며 또한 분산적이였다. 그리고 자금래원도 매우 어려워 봉건지주나 일본자본에 의존해야 했으며 상업자의 대부분은 일본자본의 중계상이였다.

이상의 상황들은 20세기 20년대에 조선족 민족공상업이 비록 일정한 발전을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그 천연적인 취약성으로 하여 일본독점자본이나 국내대자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을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여나 살아남는다하여도 일본자본의 예속자본으로 전락되는 길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1929년부터 세계적인 자본주의경제공황이 파급되자 20년대에 간신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던 조선족민족공상업은 대부분이 파산되거나 불경기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출처 :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글쓴이 : 영혼의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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