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 갈릴리에 머물러 있지 말라 (요 21:14-17)

2006. 7. 16. 00:09목양자료/2.설교자료

청년부] 갈릴리에 머물러 있지 말라 (요 21:14-17)

1. 서 론

갈릴리는 베드로에게 도피의 장소였고, 침체의 장소였고 그리고 절망의 장소 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말씀에 갈릴리는 베드로에게 회복의 장소였기도 하고 소망의 장소였기도하고 도약의 장소였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비젼과 의욕을 얻은 장소가 바로 베드로에게 갈릴리 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급하고 어려울 때 예수님을 배반해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다시 먹고 살기 위해서 갈리리 바닷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한 가지 하신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일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키는 일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세상에 나같은 배신자를 아직도 기억하시고 이 갈릴리까지 찾아와주시다니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배신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을 했고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속성을 깨닫기 시작 합니다. 그런 베드로 였기에 베드로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베드로전서 4: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2. 본 론

우리가 때로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지치고 낙심될때도 있습니다. 앞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제대로 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낙심하고 지쳐있을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3절을 통해 “내가 너희 가운데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고린도 사역을 하면서 많은 두려움과 연약함 때문에 심히 초조해 하고 떨며 사역을 하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제가 카피하고 싶은 사도바울의 사역 속에는 사도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인생을 살 능력과 용기까지 잃어버렸던 사역 경험을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실패와 좌절의 갈릴리에 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런 갈릴리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신 했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잃어버렸다는 것,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감/ 허무감/ 꿈의 좌절/ 이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도 이런 상황이 다가올 때 정말 힘들고 괴롭지 않습니까?
밤잠이루지 못하고 눈물이루고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크고 아픈 갈릴리 같은 상황에서라도 내가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나의 마음이 순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다시 소망을 얻게 되구요 다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축복이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기에 베드로에게 이러한 회복과 치유가 가능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상황을 직면한 문제를 왜! 라고 묻기 보다는 덮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친히 세 번이나 나타나셔서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실수를 두려워 했습니다.

우리가 실수가 두려운 이유가 뭡니까? 실수를 하면 비난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잘못했을 때 다가오는 사람들의 비판 무서운거 아니예요 그것이 싫기 때문에 아예 실수 조차 꺼려하고 거부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의 실패 앞에서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수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볼때에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새로운 비젼이었지 비판이 아니 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교회 사역을 하면서 학생회나 청년부 사역을 했던 경험을 다소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양육을 할때 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 번째는, 때리고 상처내는 비판의 방법 즉 부정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 사람의 단점을
부각시켜서 자극시키고 고쳐나가는 방법
또 하나는 긍정적으로 격려하고 그 사람을 세워주고, 그 사람의 장점을 부각시켜 세워주는 방법입니다

실지로 우리가 양육해 보면 이두가지 방법을 잘 사용하고 적절히 쓸 때 성장하는 것 같고 변화되어지는 것과 같은 경험해 봅니다.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속도는 예리한 비판이라든지 부정적인 면을 지적해 주는 것이 효과가 있고 빠른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사역하고 지속적으로 사역을 하려면 속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답답하게 생각될때도 있습니다 왜! 저사람은 변화되지 않을까?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러는 것일까?
그러나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바라 보고 평가하는 나의 문제가 더 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두 개의 그림 화분을 가지고 왔습니다.
애는 도라지이고 그리고 애는 사루비아입니다.
애들은 보기에 둘 다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애들이 이정도 자라기 까지는 햇볕과 적절한 물을 주면서 많이 시간을 돌보아만 했습니다.
그리고 애와 애는 달란트가 다릅니다
도라지는 자라서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끔 해줍니다
그러나 사루비아는 사람들에 먹을 것을 제공하지 않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향기를 제공합니다. 사루비아를 꽂집에서 사다가 방안에서 흔들어 보십시오 온 방안에 향기가 순식간에 자욱히 퍼질것입니다.

반대로
도라지에게 향기내라고 하면 도라지는 어떻게 됩니다. 돌아버립니다.
사루비아에게 너의 뿌리를 먹겠다고 하면
그래 실컷 먹어봐라! 맛이 없을걸...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루비아 뿌리로 반찬해 먹는 사람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면 않되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문제시 하면 않되고
그 사람의 장점을 살려주고 그 사람의 달란트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라기 까지는 햇볕과 적절한 물을 주면서 많이 시간을 돌보아만 한다라는 원리입니다.

사람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처음에는 좋게 보였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사람이 단점이 보이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기 때문에 사랑할려고 해도 사랑할 수가 없게되고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버립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사랑에 반대말을 깊이 찾아 들어가보면 부정적인 평가가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살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법이 무엇입니까? 폭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내서 막 파해치고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 알면서도 덮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산불이라는 영화을 보니까 산불이났습니다 산에서 불이나자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게되고 사람들은 삽을 흙을 퍼서 불을끄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불을끄고 옷을 벗어서 불을끄고 그런데 않되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헬리콥터가 나타나서 하늘에서 물을 몇 번 뿌리고 나니까 그 크던 산불이 삽시간에 꺼지는 걸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현대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왜! 라는 질문보다 분석보다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치료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것처럼 무조건적인 수용이 더 큰 상처의 치료제가 아닌가 그런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들은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보통 우왕좌앙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왜! 왜! 질문하고 분석하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석의 방법보다 더 큰 방법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분석을 하다보면 문제가 닥쳤을 때, 장애물이 있을 때, 부흥을 해야 하는데 쉽게 도약하지 못한 이유가 뭔줄 아세요
그것은 너무 분석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실제로 출구가 좁아집니다. 사람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버리구요 그나마 보이던 통로도 봉쇄해 버리고 분석이 반복되면 영적인 장님을 만들어 버릴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만 분석하고 어느 정도에서 문제를 덮여버려야만 제대로 덮어버려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적으로 문제만을 분석하다보면 그 분석의 방법이 자신의 삶의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익숙해진 습관에 따라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니까 아무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경험과 습관으로는 예수님이 떠나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밤이라는 것은 그런것같습니다.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가 있을 때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고 풀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밤에 있어서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파괴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보면은 가정도 사소한 말 실수로 가족 관계가 힘들어질때가 있고 사소한 비판으로 친구를 잃어버릴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과 등을 돌릴때도 있습니다. 밤이라는 것은 보통 어떤 시간입니까?
지혜의 시간이고 안식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생의 밤을 축복으로 주셨는데 안식으로 주셨는데 우리가 잘 못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판의 시간이요 그리고 홀로있는 시간이 되고 문제와 격렬히 싸우는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밤이 고독의 시간이 되고 고통의 시간으로 자신을 파괴하는데 남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특별히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없을 때 자신의 삶의 과거의 문제를 계속 분석하면서 생각하고 힘없이 그물질하고 있을 때 아무런 삶의 도약이 없는 것을 봅니다. 계속적으로 인생의 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 뭘 요구하십니까?
문제를 분석하셨습니까? 너희들 잘못이뭐야? 이렇게 지적 하십니까?
예수님은 아무말도 않하시고 그냥 덮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는 그 컷던 문제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떠나고 그것 때문에 낙망하고 지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고 예수님이 나타나니깐 그 큰 문제들이 너무나도 사소해 져 버립니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덮어주시는 은혜가 비판보다 분석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과거의 것을 계속 분석하다 보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를 분석하기 보다는 그 순간 주님의 입혀주시고 덮어주시는 새올운 은혜가 있다면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큰 교훈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게 약점을 가진 사람에게 찾아가셔서 그 약점을 폭로하고 그 사람을 매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셔서 회복하시고 그사람에게 먹이시고 격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문제에 있어서 외면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가 기도하고 때론 오랜 시간 문제에 얽메어 있다 보면은 그 기도가 해결되지 않고 문제 때문에 절망할때가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문제를 뛰어넘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 우리의 문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것인가?
예수님은 문제를 겉 할기 식으로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해결을 통해서 문제를 보시고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우리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에 올랐던 고은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시를 쓰지 않을 때에는 폐인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아주 멍청해져 버린다 그러다가 시 한 편이 나오면 눈이 번쩍거리고 뭔가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차오른다. 제가 왜 고은씨의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근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조미료를 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방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인 방법이 바로 깨어진 신뢰관계의 회복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님과의 신뢰관계의 회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 그분과의 깊은 관계 올바른 관계 순결한 관계 이런 것들이 있으면 새로운 변화가 생기고 눈이 번쩍거리고 이제는 뭔가를 해봐야 겠다라는 소망이 차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다보면 참 더 가지고 싶고 더 입고 싶고 더 소유하고 싶은 것들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많이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가지고 소유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막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제가 티코를 타고 다니는데요 저는 티코를 타고 다니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할때가 있습니다. 이제 이 티코를 타고 다니다가 더 좋은 차로 바꿔야지/ 티코를 타고 다니면서 티코로 만족을 못하고 더 좋은 차를 원하는 것같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것은 티코라는 차를 가지고 때문에 더 좋은 차를 가지고 싶어하는 더 좋은 차를 가지고 싶어하는 소유욕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죠 저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욕심을 더 부추길때가 많다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를들면 여러분들 중에서 티코 없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허다한 무리가 차가 없더라”
티코 없는 사람은 이제 나도 이 티코를 타고다니다가 더 좋은 차로 바꿔야지 이런생각 없이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저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는 티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티코가 더 좋은 것을 가지도록 자꾸 욕심을 부추길때가 많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필요없는 욕심들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깎을때가 많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거가 훌륭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도 존귀하신 예수님이 그의 곁에 떠나고 현재 예수님보다 더 다른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될 때는 그것이 바로 위기의 사람이고 비천한 존재가 시작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치유했던 방법은 깨어진 신뢰관계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나와 너희들의 관계 다시 맺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뢰관계 예배가 바로 회복되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좋은 대학에 나왔느냐? 얼마나 인기가 있고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예수님안에 거하고 얼마나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 내가 예수님의 사랑안에 얼마나 거하고 있으며 내가 정말 예수님을 얼마나 확실하게 믿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어 하나님 나라에게가서 하나님앞에 결산할 때 얼마큼 부끄러움이 없는가?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때로 엉뚱한거 가지고 싸울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에 제자들이 엉뚱한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부활하신후 제자들을 찾아오는 장면인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 번째 찾아오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중요한 우선순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답을 항상 아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세 종류의 신앙의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경험 때문에 죽어있는 신앙이 있고
현재 신경쓸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대충 현재의 신앙의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마치 활화산같이 지금 타오오르는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찾아가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주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온천이 나와서 주위가 부유했고 염료가 나와서 환경이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안약이 발달해서 다른 지역보다 건강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가 무엇이였습니까?
너희의 그 가난한것과 그 벌거벗은것과 눈먼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평가는 전혀 다른 평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더 위기가 될 수 있고 너희가 생각하고 있는 부유가 너희를 위협하는 풍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것들 때문에 실은 예수님보다는 자기를 의지하고 예수님을 멀리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예수님 평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시간 예수님께 예수님 정말 이시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백들이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시간 기도하실 때 반주해시구요 함께 뜨겁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 청년회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청년회에 부흥의 전성기를 주옵소서
청년회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옵소서
예수님 내 문제를 덮어주시옵소서
내가 너무 분석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낭비하고 내 아픔이 많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과거의 아픔 과거의 분석에 메어있지 않고 이제는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도약하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이제 예수님 은혜 때문에 부흥하는 청년회가 되게 해달라고 이시간 함께 기도하도로 하겟습니다. -부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