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육과 목회학의 본질적 결함문제
2006. 7. 9. 00:00ㆍ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신학교육과 목회학의 본질적 결함문제
1. 자신의 결함을 인식해야 수정할 수 있다.
교회신학에서 본질적 결함(잘못)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다. 많은 경우에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본질적인 문제가 결과를 어둡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신학의 발전과 갱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본질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가 이곳에서 언급하려는 것은 완벽하고도 전인적 <예수님 학습>에 관한 문제다. 교회신학에서 예수님을 학습한다는 것은 그의 지성(사상)과 감성(감정)과 영성을 학습함을 뜻한다. 그런데 신학교나 교회 프로그램에서 예수님의 <지성과 영성적 과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최고도에 이르고 있는 반면 <감성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학문(신학)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그래서 <지성적 예수화>는 잘 되어 있으나 <감성적 예수화>내지 신앙화는 백지에 가깝다. 우리는 가슴(감성)이 없는 사람을 상상할 수 없으나 개신교 성서교육에서는 <가슴 없는 크리스찬>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의 감성문제는 가장 중요한 본질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성문제를 소홀하게 생각한다. 실은 이렇게 되게 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것이 바로<IQ 왕국>의 실존이다. 이 왕국이란 지성(IQ)만능주의 사상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성계발에만 몰두하게 하고 감성 계발과 학습에는 등을 돌리게 한다.
2. 감정문제의 중요성은 새로운 차원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1) 인간론에서도 감성의 중요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다.
동양철학에서 인간의 정신계를 [지, 정, 의]로 설명함으로 지성, 의지와 함께 감정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의지>는 독립된 기능이라고 하기보다는 지성과 감성의 합작으로 이루어내는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세계는 <지성과 감성>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의 절반은 감성에 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지성의 대변자격인 언어도 대부분 감성의 파도를 타고 나타난다. 이것은 지성보다는 감성의 우월성을 말해 줌이다. 그리고 기독교 전통에서도 내면세계를 [지성, 감성, 영성]으로 구분하고 있어서 [감성]은 지성, 영성과 함께 중요하고 독립적 기능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Origen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 감성, 영성]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감성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있다.
2) 심리학계에서는 새로운 감정관이 파도치고 있다.
현대 심리학의 결정판은 1995년에 Dr. Daniel Goleman이 편집한 "Emotional Intelligence" (한국판: 감성지능, 비전코리아, 1996)이라는 책이다. 1995년 이전100년을 <IQ왕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인간의 발전, 성공, 행복의 비결은 지능지수(IQ)계발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인간역사의 운명은 IQ(지성)계발여하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100년 간 지속했었고 왕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감성(EQ)문제에 대해서는 자동적으로 등한히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는 감성은 지성에 속해 있는 부수적인 정신기능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에 감성의 독립적인 학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했었다.
이러한 사상적 큰 세력인 IQ왕국사상을 정면에서 반기 들고 등장한 것이 EQ심리학이다. EQ심리학의 등장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주는 완전히 새로운 천지를 만나게 해준다. EQ심리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EQ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IQ(지성)가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100%가 아니고 2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EQ(감성)는 인간의 삶에 80%의 영향력을 제공한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IQ)계발과 감성(EQ)계발은 완전한 별개의 학습을 통해서 각각 독립적인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실험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폭탄선언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IQ(지성기능)가 100%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이 IQ기능의 영향력이 20%에 불과하다는 학문적 연구결과는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충격이 사실에 비해 아주 미약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의학계에서도 새로운 감정관이 등장하고 있다.
Dr .R. Williams(듀크의대 교수)의 책<Anger Kills>(한국판: 분노가 죽인다, 한.언출판사, 1996)라는 책에서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학적인 치료방법만으로는 인간의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사들의 임상실험에서 확인한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 책 내용을 간추린 말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가령 동일 환자 3인을 동일방법으로 치료하는데, A는 한 달에 완치가 되는데, B는 6개월-1년 후에나 완치가 된다. 그런데 C는 치료가 안되고 죽는다. 왜 그런가? 그 근본원인은 <감정관리 능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감정관리 능력이 부족하면 병 치료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 많은 전문가가 "병은 마음에서 온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교회가 감정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심리학계와 의학계의 변화가 우리 기독교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IQ왕국이 사라진지 10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IQ왕국의 틀과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성적 예수화 운동에 머물고 있다는 현상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교회가 주로 하고 있는 <지성적 예수화>운동이 그대로<감성적 예수 화>운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학교육과 목회학의 새로운 과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실시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성적 교육과 훈련만으로는 완벽한 기독교교육이라고 할 수 없고 기독교인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직도 상당수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감정문제]를 심리학의 연구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신앙적, 신학적 연구 대상에 포함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원인 중 하나가 역사적으로 [감정문제]는 심리학계에서 적극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 탐색하고 있었음으로 [심리학의 독점물]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존재사실을 연구 분석 실험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 학문성이나 사실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은 현실적인 인간심리 상태를 연구 분석하는 학문이기에 초인간적인 종교적인 관심사와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심리학은 <인간 예수>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 거름 더나가서 주로 무신론 진화론자들이 작성한 심리학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예수님 사상을 입증하고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험으로 심리학에서 감성의 중요성을 확인한 다음에 성경을 읽었을 때에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감성세계를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감성세계를 새롭게 깨우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경험한 사실이다.
필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신학계에서 <예수님의 감성세계>에 관한 내용을 신학적 연구 대상에서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풍토가 하루속히 형성되어야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예수의 삶>에도 그의 지성세계와는 완전히 독립된 감성세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탐색연구를 해야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리고 성경의 감정관이나 감정과 연관된 과제들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연구정리하고 학습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
1995년 이후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EQ심리학의 등장으로 전 세계인이 감성적 학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실상 95년 이후 교회 밖에서는 감성적 과제에 대해서 엄청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유치원이나 어린이 장난감까지 "EQ 중심교육 유치원"이니 "EQ에 도움이 되는 장난감" 등등의 광고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학교교육에서도 감성계발 교육에 엄청난 정성을 드리고 있는 것이 선진국 교육계가 크게 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교계에서는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에서 침묵하고 있다.
물론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마음의 문제>등등 부분적으로 감성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학에 대한 대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속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감정세계를 학문적으로 전부 다 추려내서 신학적으로 정리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성적 인식훈련과는 별도로 예수님의 감정세계에 대한<감성훈련>프로그램을 계발해서 전 교인에게 보급해야한다. 현재 우리에게는 <기독교 감정관>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에 있는 감정세계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으나 이것은 대단히 추상적인 용어다. 감정은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색깔>로 존재하고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로 감정문제를 대신할 수 없다. 또 교회가 하나님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엄청나게 많이 하고있으나 이 사랑은 하나님의 감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색다른 세 종류의 감정세계가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감정세계, 사람의 감정세계, 그리고 사탄의 감정세계다. 그리고 감정에는 엄청나게 많은 색깔로 구분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신학자)의 노력과 시간을 바쳐서 연구 탐색하는 작업이 요구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필자의 책이나 홈페이지에 적지 않는 수량의 글들이 있으나 이것은 성경의 감정세계에 관한 서론적 내용에 불과하다. 성경 속의 감정에 관한 내용을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세심한 분석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유능한 젊은 신학 도들이 이에 동참해서 하나님과 주님의 감정세계에 대한 연구서적이 조직신학 서적 정도만큼이나마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4. <기독교 감성학>이 신학교육에 추가되어야 한다.
감성문제는 신앙적 신학적인 과제이기에 신학교육에 새로운 항목으로 추가되어야한다.
.1) 조직신학이나 이론신학과 대등한 <성서적 감성학>이 설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적 기능이 <지성과 감성>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학에서도 그의 지성적 분야와 감성적 분야를 대등한 차원에서 연구 학습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감정세계를 무시하고 인간문제가 이야기 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감성문제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감성적 신앙화]를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①행복한 삶은 감정계발에 있다(마5:1-12), ②성령의 열매는 감정색깔이다(갈 5:22-23), ③마음(감성)밭은 옥토로 계발해야 한다(마 13:3-9), ④감정색깔은 하나님 체험의 중요도구다.(요일4:12 마5:8,요1:18), ⑤악성감정의 악마성을 강조한다(마 5:21-26, 요일 3:15)등*
이 성경 말씀들은 인간 감정은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한국교회는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감정관]을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로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고, 또 말씀 앞에서 깊은 명상과 기도, 그리고 새로운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숙제는 [감정의 예수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 운동이요, 이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참다운 예수화 운동이 결실을 거둘 수 있고 본래적인 기독교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동안 개신교가 추구해 온 [지성적 예수화] 운동에만 몰두하는 관습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전인적 예수화]운동의 새로운 지평선을 설정할 때가 왔음을 자각해야 한다.
2) 성경해석과 하나님 언어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많은 감성적 내용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에 관한 항목이 구약에서 상당부분을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 <사람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어서 사람의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를 구분하기가 힘든다. 사실은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를 구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적어도 우리는 사람의 언어와 [하나님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적 언어와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람의 말로는 [하나님의 감정]등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깔멜의 산길](최민순 역, 성 바오로출판사,1988)에 있는 그의 신앙 고백적인 글에서 [하나님과 피조물간의 차이점]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그 차이점을 인식하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피조물의 모든 유(有)는 하나님의 무한유(無限有)에 비하면 무(無)일 따름이다--피조물의 모든 미(美)는 하나님의 무한미(無限美)와 견주어 볼 때, 더 없는 추물이니, 잠언의 말씀처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잠31:30)--이 세상 피조물의 온갖 선은 하나님의 무한선에 비하면, 악(惡)이라 부를 수 있다.(사람들이 칭찬하는 선(善)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선과 견주어 보면 하나의 악(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지혜 및 인간 재능을 하나님의 무량하신 예지와 견주면, 순수 지극한 무지(無知)이다. (이것은 바울의 말씀처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 어리석음'-이라는 그대로이다(고전3:19)--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무엇을 안답시고 내세우는 저들은, 너무나 무식한 자들이니,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지혜로운 자들로 자칭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다'(라는 것과 같다)(롬1:22)--이 세상의 모든 낙(樂), 모든 재미를-하나님의 그 낙(樂)에 비하면, 지극한 고통(苦痛)이다.--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지극한 빈곤과 비참함이다.--세속의 생각을 따라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에 스스로 추하고 비천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을 슬퍼하면서, 하나님의 예지, 잠언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신다.'사람들아-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아,(어린이들은 철이 들고)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자들아-슬기롭게 살아가거라-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을 모른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올곧음, 바로 그것뿐이다. 온갖 부귀영화가 나에게 있고-성공하는 것도 나 지혜가 없이는 어림도 없지.-나 지혜는 정의로운 길로만 움직이며 올곧은 길 한가운데로만 다닌다네.-나를 못 견디게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얻게 해주지. 그 사람의 금고가 가득가득 차게 해주지'(잠8:4-6,18-21).--하나님의 예지는 세상의 모든 이들, 마음과 정을 주는 사람들과 대화한다. 인간들이 사랑하는 부귀와 영화도, 사실은 예지 안에 그 참됨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뿐이다.(pp.44-48)"*
이상과 같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비교]는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실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에 대한 인식도 새 차원에서 고려할 것을 강요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완전한 [인간적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가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학설에 준하면,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최고선(最高善)보다도 [선한 감정] 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의 분노(심판)는 인간적 분노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감정에는 절대사랑]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정은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다. 이 말은 그의 감정은 [절대사랑]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며, [사랑의 파도요, 함성이며, 진동이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간적인 분노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감정에는 [인간적 미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사랑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무리하게 설명한다면 다음의 이야기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가게에서 사과 한 알을 훔쳐먹었다고 할 때, 정상적인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눈물의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다. 이 눈물의 회초리를 들고 아들의 종아리를 때릴 수밖에 없는 그 어머니의 가슴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 진노의 실체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철저하게 사랑의 감정의 색다른 표현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인간적 분노와 동일한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 같은 악성감정이 존재치 않는다. 우리가 [사람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동작과 사건을 설명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언어]를 연상하면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풍토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나 히부리 원어의 뜻 해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1. 자신의 결함을 인식해야 수정할 수 있다.
교회신학에서 본질적 결함(잘못)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다. 많은 경우에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본질적인 문제가 결과를 어둡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신학의 발전과 갱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본질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가 이곳에서 언급하려는 것은 완벽하고도 전인적 <예수님 학습>에 관한 문제다. 교회신학에서 예수님을 학습한다는 것은 그의 지성(사상)과 감성(감정)과 영성을 학습함을 뜻한다. 그런데 신학교나 교회 프로그램에서 예수님의 <지성과 영성적 과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최고도에 이르고 있는 반면 <감성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학문(신학)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그래서 <지성적 예수화>는 잘 되어 있으나 <감성적 예수화>내지 신앙화는 백지에 가깝다. 우리는 가슴(감성)이 없는 사람을 상상할 수 없으나 개신교 성서교육에서는 <가슴 없는 크리스찬>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의 감성문제는 가장 중요한 본질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성문제를 소홀하게 생각한다. 실은 이렇게 되게 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것이 바로<IQ 왕국>의 실존이다. 이 왕국이란 지성(IQ)만능주의 사상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성계발에만 몰두하게 하고 감성 계발과 학습에는 등을 돌리게 한다.
2. 감정문제의 중요성은 새로운 차원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1) 인간론에서도 감성의 중요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다.
동양철학에서 인간의 정신계를 [지, 정, 의]로 설명함으로 지성, 의지와 함께 감정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의지>는 독립된 기능이라고 하기보다는 지성과 감성의 합작으로 이루어내는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세계는 <지성과 감성>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의 절반은 감성에 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지성의 대변자격인 언어도 대부분 감성의 파도를 타고 나타난다. 이것은 지성보다는 감성의 우월성을 말해 줌이다. 그리고 기독교 전통에서도 내면세계를 [지성, 감성, 영성]으로 구분하고 있어서 [감성]은 지성, 영성과 함께 중요하고 독립적 기능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Origen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 감성, 영성]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감성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있다.
2) 심리학계에서는 새로운 감정관이 파도치고 있다.
현대 심리학의 결정판은 1995년에 Dr. Daniel Goleman이 편집한 "Emotional Intelligence" (한국판: 감성지능, 비전코리아, 1996)이라는 책이다. 1995년 이전100년을 <IQ왕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인간의 발전, 성공, 행복의 비결은 지능지수(IQ)계발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인간역사의 운명은 IQ(지성)계발여하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100년 간 지속했었고 왕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감성(EQ)문제에 대해서는 자동적으로 등한히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는 감성은 지성에 속해 있는 부수적인 정신기능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에 감성의 독립적인 학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했었다.
이러한 사상적 큰 세력인 IQ왕국사상을 정면에서 반기 들고 등장한 것이 EQ심리학이다. EQ심리학의 등장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주는 완전히 새로운 천지를 만나게 해준다. EQ심리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EQ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서 IQ(지성)가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100%가 아니고 2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EQ(감성)는 인간의 삶에 80%의 영향력을 제공한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IQ)계발과 감성(EQ)계발은 완전한 별개의 학습을 통해서 각각 독립적인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실험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폭탄선언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IQ(지성기능)가 100%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이 IQ기능의 영향력이 20%에 불과하다는 학문적 연구결과는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충격이 사실에 비해 아주 미약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의학계에서도 새로운 감정관이 등장하고 있다.
Dr .R. Williams(듀크의대 교수)의 책<Anger Kills>(한국판: 분노가 죽인다, 한.언출판사, 1996)라는 책에서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학적인 치료방법만으로는 인간의 건강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사들의 임상실험에서 확인한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 책 내용을 간추린 말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가령 동일 환자 3인을 동일방법으로 치료하는데, A는 한 달에 완치가 되는데, B는 6개월-1년 후에나 완치가 된다. 그런데 C는 치료가 안되고 죽는다. 왜 그런가? 그 근본원인은 <감정관리 능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감정관리 능력이 부족하면 병 치료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 많은 전문가가 "병은 마음에서 온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교회가 감정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심리학계와 의학계의 변화가 우리 기독교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IQ왕국이 사라진지 10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IQ왕국의 틀과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성적 예수화 운동에 머물고 있다는 현상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교회가 주로 하고 있는 <지성적 예수화>운동이 그대로<감성적 예수 화>운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학교육과 목회학의 새로운 과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실시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성적 교육과 훈련만으로는 완벽한 기독교교육이라고 할 수 없고 기독교인이 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직도 상당수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감정문제]를 심리학의 연구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신앙적, 신학적 연구 대상에 포함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원인 중 하나가 역사적으로 [감정문제]는 심리학계에서 적극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 탐색하고 있었음으로 [심리학의 독점물]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존재사실을 연구 분석 실험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 학문성이나 사실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은 현실적인 인간심리 상태를 연구 분석하는 학문이기에 초인간적인 종교적인 관심사와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심리학은 <인간 예수>와 무관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 거름 더나가서 주로 무신론 진화론자들이 작성한 심리학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예수님 사상을 입증하고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경험으로 심리학에서 감성의 중요성을 확인한 다음에 성경을 읽었을 때에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감성세계를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감성세계를 새롭게 깨우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경험한 사실이다.
필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신학계에서 <예수님의 감성세계>에 관한 내용을 신학적 연구 대상에서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풍토가 하루속히 형성되어야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예수의 삶>에도 그의 지성세계와는 완전히 독립된 감성세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탐색연구를 해야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리고 성경의 감정관이나 감정과 연관된 과제들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연구정리하고 학습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
1995년 이후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EQ심리학의 등장으로 전 세계인이 감성적 학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실상 95년 이후 교회 밖에서는 감성적 과제에 대해서 엄청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유치원이나 어린이 장난감까지 "EQ 중심교육 유치원"이니 "EQ에 도움이 되는 장난감" 등등의 광고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학교교육에서도 감성계발 교육에 엄청난 정성을 드리고 있는 것이 선진국 교육계가 크게 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교계에서는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에서 침묵하고 있다.
물론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마음의 문제>등등 부분적으로 감성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학에 대한 대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속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감정세계를 학문적으로 전부 다 추려내서 신학적으로 정리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성적 인식훈련과는 별도로 예수님의 감정세계에 대한<감성훈련>프로그램을 계발해서 전 교인에게 보급해야한다. 현재 우리에게는 <기독교 감정관>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에 있는 감정세계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으나 이것은 대단히 추상적인 용어다. 감정은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색깔>로 존재하고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로 감정문제를 대신할 수 없다. 또 교회가 하나님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엄청나게 많이 하고있으나 이 사랑은 하나님의 감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색다른 세 종류의 감정세계가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감정세계, 사람의 감정세계, 그리고 사탄의 감정세계다. 그리고 감정에는 엄청나게 많은 색깔로 구분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신학자)의 노력과 시간을 바쳐서 연구 탐색하는 작업이 요구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필자의 책이나 홈페이지에 적지 않는 수량의 글들이 있으나 이것은 성경의 감정세계에 관한 서론적 내용에 불과하다. 성경 속의 감정에 관한 내용을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 세심한 분석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유능한 젊은 신학 도들이 이에 동참해서 하나님과 주님의 감정세계에 대한 연구서적이 조직신학 서적 정도만큼이나마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4. <기독교 감성학>이 신학교육에 추가되어야 한다.
감성문제는 신앙적 신학적인 과제이기에 신학교육에 새로운 항목으로 추가되어야한다.
.1) 조직신학이나 이론신학과 대등한 <성서적 감성학>이 설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신적 기능이 <지성과 감성>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학에서도 그의 지성적 분야와 감성적 분야를 대등한 차원에서 연구 학습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감정세계를 무시하고 인간문제가 이야기 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감성문제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감성적 신앙화]를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①행복한 삶은 감정계발에 있다(마5:1-12), ②성령의 열매는 감정색깔이다(갈 5:22-23), ③마음(감성)밭은 옥토로 계발해야 한다(마 13:3-9), ④감정색깔은 하나님 체험의 중요도구다.(요일4:12 마5:8,요1:18), ⑤악성감정의 악마성을 강조한다(마 5:21-26, 요일 3:15)등*
이 성경 말씀들은 인간 감정은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한국교회는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감정관]을 순수하고 겸손한 자세로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고, 또 말씀 앞에서 깊은 명상과 기도, 그리고 새로운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숙제는 [감정의 예수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 운동이요, 이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참다운 예수화 운동이 결실을 거둘 수 있고 본래적인 기독교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동안 개신교가 추구해 온 [지성적 예수화] 운동에만 몰두하는 관습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전인적 예수화]운동의 새로운 지평선을 설정할 때가 왔음을 자각해야 한다.
2) 성경해석과 하나님 언어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많은 감성적 내용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에 관한 항목이 구약에서 상당부분을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 <사람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어서 사람의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를 구분하기가 힘든다. 사실은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으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를 구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적어도 우리는 사람의 언어와 [하나님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적 언어와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람의 말로는 [하나님의 감정]등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깔멜의 산길](최민순 역, 성 바오로출판사,1988)에 있는 그의 신앙 고백적인 글에서 [하나님과 피조물간의 차이점]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그 차이점을 인식하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피조물의 모든 유(有)는 하나님의 무한유(無限有)에 비하면 무(無)일 따름이다--피조물의 모든 미(美)는 하나님의 무한미(無限美)와 견주어 볼 때, 더 없는 추물이니, 잠언의 말씀처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잠31:30)--이 세상 피조물의 온갖 선은 하나님의 무한선에 비하면, 악(惡)이라 부를 수 있다.(사람들이 칭찬하는 선(善)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선과 견주어 보면 하나의 악(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지혜 및 인간 재능을 하나님의 무량하신 예지와 견주면, 순수 지극한 무지(無知)이다. (이것은 바울의 말씀처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 어리석음'-이라는 그대로이다(고전3:19)--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무엇을 안답시고 내세우는 저들은, 너무나 무식한 자들이니,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지혜로운 자들로 자칭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다'(라는 것과 같다)(롬1:22)--이 세상의 모든 낙(樂), 모든 재미를-하나님의 그 낙(樂)에 비하면, 지극한 고통(苦痛)이다.--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지극한 빈곤과 비참함이다.--세속의 생각을 따라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에 스스로 추하고 비천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을 슬퍼하면서, 하나님의 예지, 잠언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신다.'사람들아-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아,(어린이들은 철이 들고)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자들아-슬기롭게 살아가거라-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을 모른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올곧음, 바로 그것뿐이다. 온갖 부귀영화가 나에게 있고-성공하는 것도 나 지혜가 없이는 어림도 없지.-나 지혜는 정의로운 길로만 움직이며 올곧은 길 한가운데로만 다닌다네.-나를 못 견디게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얻게 해주지. 그 사람의 금고가 가득가득 차게 해주지'(잠8:4-6,18-21).--하나님의 예지는 세상의 모든 이들, 마음과 정을 주는 사람들과 대화한다. 인간들이 사랑하는 부귀와 영화도, 사실은 예지 안에 그 참됨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뿐이다.(pp.44-48)"*
이상과 같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비교]는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실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에 대한 인식도 새 차원에서 고려할 것을 강요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완전한 [인간적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가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학설에 준하면,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최고선(最高善)보다도 [선한 감정] 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의 분노(심판)는 인간적 분노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감정에는 절대사랑]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정은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다. 이 말은 그의 감정은 [절대사랑]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며, [사랑의 파도요, 함성이며, 진동이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간적인 분노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감정에는 [인간적 미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사랑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무리하게 설명한다면 다음의 이야기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가게에서 사과 한 알을 훔쳐먹었다고 할 때, 정상적인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눈물의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다. 이 눈물의 회초리를 들고 아들의 종아리를 때릴 수밖에 없는 그 어머니의 가슴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 진노의 실체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철저하게 사랑의 감정의 색다른 표현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인간적 분노와 동일한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 같은 악성감정이 존재치 않는다. 우리가 [사람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동작과 사건을 설명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언어]를 연상하면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풍토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나 히부리 원어의 뜻 해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신학자료 > 8.목회학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 성장을 시키는 제직 (0) | 2006.07.09 |
---|---|
감정관리는 이루어진다 (0) | 2006.07.09 |
셀 목회와 현대 목회전략 (0) | 2006.07.08 |
파워포인트 목회자료 (0) | 2006.06.29 |
목회 자료집 (0) | 2006.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