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구출을 위한 통곡 기도대회 (폄)

2006. 7. 4. 21:02목양자료/4.기도자료

 
탈북자 구출을 위한 통곡 기도대회

 

 탈북자를 위한 통곡 기도 대회가 Los Angels Convention Center에서 열린다고 크게 신문에 광고가 났습니다. 

  신문 한 지면을 꽉 차게 사진과 함께 강사 이름과 강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통곡 기도회가 이벤트 행사가 된 것을 보고 마음이 찹찹합니다.  이 기도회에 참가 하여야 하나 마는가하는 문제부터 생깁니다.

  통곡하며 기도하여서 탈북하여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이 그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을 받는다면 서슴 없이 참석 하여야겠지만 탈북자의 고통을 직접 보고 들은 자로서 이벤트 행사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하는 의문도 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연변지역이 탈북자 문제가 가장 심한 곳입니다.

필자가 중국에 선교사로 현장에 있을 때에, 가장 기근이 극심하여 가장 많이 굶어 죽고 있을 때에 필자가 탈북자 문제를 이야기를 꺼내면 들은 척도 안하고 오히려 필자가 붉은 물이 든 사람으로 취급하고 북한 동포가 굶어 죽고 있다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도 중국 선교헌금을 해달라면 적극적으로 나서던 사람들이 이제 한참 많은 사람들이 일을 당한 후에 통곡 기도회를 한다니 서운하면서도 늦었지만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중국을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따끈 따끈한 탈북자 현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연변에서 탈북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숨어들어 갔기 때문에 탈북자는 없다고 말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숨어 있는 탈북자는 상상외로 많이 있습니다.   외진 산골짜기 농촌에는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손이 딸리기 때문에 탈북자를 머슴같이 많이 부리고 있습니다.

  필자가 아는 탈북자는 1년 기간에 중국돈 1,000위엔을 받기로 하고 머슴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계약한대로 1년 후에는 먹을 것 해결하고 북한 돈으로 따지면 거금을 받습니다.

북한 노동자의 월급이 북한 돈으로 2,000입니다.  이것은 딸라로 2 딸라 정도입니다. 

  이것도 제대로 월급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돈 2,000원이 북한 사람 한달 월급입니다.

   중국 돈 1,000원은 보통 직장인들이 받는 한달 월급에 속합니다.  한달 월급을 주고 1년을 부려   먹는 착취를 탈북자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계약한대로 돈을 받는 사람은 상당히 운이 좋은 탈북자입니다.  계약이 끝나 갈 때쯤, 일을 실컷 부려먹고는 공안 당국에 신고하여 여기 탈북자가 있다고 신고하면 탈북자를 잡으려오면 도망치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고 아니면, 공안 당국에 붙잡혀서 강제로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북한에 가서 조사를 받을 때에 연변에서 만일 선교사와 접촉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 사람은 풀려나지 못하고 수용소로 가거나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탈북자를 만나서 선교를 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고 북한 탈북자로서는 생명을 걸고 선교사를 만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필자의 먼 친척 처녀 아이가 탈북을 하여 6개월을 숨겨두고 있었지만 단속이 심하여 다시 북한으로 한 짐 잘 챙겨 주며 몇 년 일안해도 먹을 돈을 챙겨서 북한으로 돌려보냈는데 6개월 후에 다시 탈북하여 강을 건너 왔습니다. 

  자유의 물을 먹은 터라 북한에서는 도저히 살지 못하여 죽어도 중국에서 죽겠다고 하는 전화를 하여 만날 장소로 가서 만나서 돈을 주며 물건을 주면서 다시 돌아가라고 설득하여도 안 가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연길로 오다가 검문소에서 붙잡혔습니다.

  몇 시간을 심문을 받고 중국 현지인은 벌금을 물고 풀려났지만 이 처녀 아이는 다음날 도문을 거쳐 남양으로 송환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노동 교화소에서 3개월을 죽을 고생을 하며 견디어 내어 풀려 난 후에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였다고 연락이 왔고 어려우니 출산비를 보조하여 달라고 하여 출산비를 전하여 주었습니다.

  일반적인 일이지만 조선족 공안 경찰들과 관계 기관원들이 탈북자를 더 열심히 색출하여 내고 있습니다.  한족들은 신고가 들어오면 마지못하여,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라 보아 주는데 조선족들이 동포를 더 붙잡아서 송환시키는 일을 앞장섭니다.

  마치 일제 때에 조선 순사가 더 악질 이었던 것 같이 -

통곡 기도를 할 때에 “동포를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을 줍소서“ 하는 기도를 빼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느 농촌의 당간부께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계셔서 탈북자를 두둔하고 보호하여 주는 곳이 있습니다.  중국 농촌은 여자들은 다 한국으로 시집을 간다하고 다 빠져 나가고 청년들은 도시로 나가서 청년이 없고 농사일을 하는 일손이 없는데 탈북자들이 싼 임금으로 열심히 일하여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면서 탈북자를 적극 보호하는 곳이 있습니다.

  단속이 나오면 미리 알려주어 산속으로 피신하게 하면 단속 나온 사람들도 알면서도 없다고 보고하는 서로 좋게 돕는  고장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을이 많이 생길 때에 탈북자가 살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위장 탈북자들이 있어서 중국 양민을 학살하는 일이 신문에 가끔 보도 됩니다.

일반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처참하게 중국 양민을 학살하고 빼앗은 일이 보도됩니다.

북한에서 일부러 탈북자를 경원시하게 하는 공작입니다.

  중국 군인이 휴가 나와서 하는 말이 요새는 밤마다 보초 서느라고 죽을 지경이라고 말하여 사연을 들어보니 북한 인민군인 6명이 총을 들고 와서 중국 군인을 죽이고 갔다 하면서 밤에는 무장하고 빈틈없이 두만강을 감시하고 있다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양순하여 굶어 죽기 싫어서 강을 건너 온 사람을 원수로 여기게 하여 탈북자가 중국 땅에 발을 못 붙이게 하는 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탈북자가 선교사를 만났던 사실이 알려지면 살아남지 못함을 알고 탈북자를 돕는 일도 지혜롭게 점조직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한국에서오신 선교사님이 탈북 청년 20여명을 농촌에서 먹이고 재우며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양육을 하였지만 그 대부분은 혹시나 한국에 갈 기회가 있을 까하여 딸아 다니며 열심히 예수를 믿는 척하지만 그중에 하나, 둘은 성령을 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북한에 가면 고생하고 배고픈데 어떠하겠는가 하고 물으니 나도 같이 굶으면서 같이 고난에 동참하면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면서 돌아갑니다.

   한국에서 와서 탈북 청년을 돌아보던 선교사님은 밀고가 들어가서 공안 당국에 붙잡힌 후 감옥에 있다가 벌금 5만 위엔을 물고 추방 되었고 양육 받던 북한 청년 몽땅 붙잡혀서 북한으로 갔습니다.   붙잡혀간 청년들은 선교사와 오랫동안 함께 있었음으로 매를 실컨 맞고 수용소에 갔거나 총살 당하였을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굶어 죽으나 총살 당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이니, 예수 믿다가 천국 가면서 죽겠다는 청년들을 볼 때에 참으로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일은 이러한 주의 일꾼이 많아지도록 기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탈북 청년이 저에게 던지고 간 글을 소개합니다.



                              이름모를 청년이 던져준 쪽지

    오늘도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실 회장님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나의 안타까운 마음을 서면으로 간단히 전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북에서 정규 교육을 마치고 군사복무 13년을 전연 초소에서 마치고 2001년 제대 되였다.

회장님은 조국이란 무엇인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와, 행복이 담보 될 수 있는 그런곳, 이것이 조국이라고 ...


  나는 이 조국을 위해 18살부터 30살까지 제일 금같은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도 비참하고 그 13년이 너무도 허왕합니다. 

90년대 초부터 휩쓴 경제위기에 도덕과, 국정 가격은 다 없어지고, 사람들은 빈궁에로 몰아갔습니다.

경제위기의 파도는 우리 집에도 세차게 쓸어들었습니다.

  집에 와보니 벌써 몇년전부터 집식구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벌자고 해도 벌데가 없고 집의 외아들로서 아버지, 어머니는 나이에 비하여 너무도 늙고 뼈만 앙상해서 차마 그대로는 ,,,,,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함경북도 XX군만 놓고 봐도 가만히 앉아 있기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계속 들복아대니, 이제는 악에 받쳐서 막 항거해 나서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자주성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대로 언제까지 참아야만 한단 말입니까?

  결심 끝에 나는 행복한 세상을 찾아 떠났습니다.

아무런 신변보호의 담보도 없이 무작정 떠나야만 했다.

그 때 나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


  중국 땅의 현실은 우리들을 시시각각으로 위협하고 운이 좋게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돈을 받지 못하는 .....  받는다하여도 보잘 것 없는 그런 것이다.

고난과 시련은 만복의 어머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위안 하군 한다.

  지금은 좋은 사람 김짚사를 만나 의탁하고 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이지만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높고 높은 친절성으로 나를 돌봐 주고 있으니. 고맙고 감사 할뿐이다.

  손에 쇠고랑이를 채운다해도 북한지원사업이라면 제일선으로 나서는 이런 사람들 ....

이번 해에도 라진-선봉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된 경제 후원을 하였습니다.

나도 언제면 자유로운 몸이 되여 살수 있을까?


  지금은 바깥 출입을 극력 줄이고 숨어서 지내고 있다.

중국 연변 땅, 그 어데가도, 전설 같은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다.

이 짤막한 글속에 나의 모든 것을 다 쓸 수도 없고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내 앞으로 족 살아서, 잘돼서, 감사의 인사를 꼭 올리겠습니다.

생면부지의 사이지만 단 한가지 한민족이라는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저는 어려움을 잊고 이렇게 구원의 손길을 뻘치니, 나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상봉을 바라면서

      

                                                        2005. 9. 4.

             * (옮길 때 편지에 적힌 철자를 그대로 옮겼고 다만 고향만 X X 표로하였음)


 

검열대에 오른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일성주석의 거폭 초상화가

기수대의 호위가운데 지나갔다.

 

 

 

 

 

 

김일성광장을 지나는 열병대오.

 

 

각 병종.

 

 

열병식 전경.

 

 

 

 

 

 

 

여병.

 

 

 

 

 

 

각 병종.

 

 

 

 

 

 

노전사와 길 양켠의 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