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5. 15. 22:47ㆍ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어떻게 목회(牧會)할까하는 고통 ㅡ이윤근목사
렘23: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하였다.
이는 주께서 직접 부르지 아니하였는데 스스로 자신이 목회자의 사명이 있다고 판단하고 목회자의 길로 나선 경우를
말하고 또 자신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권하여 사명감도 없이 목회자가 된
경우를 말하며 그 외에 어떤 예언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다든지 아니면 꿈에 지시를 받았다든지 해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면 끝내는 그 길이
괴로운 길이 되고 고통의 길이 되어 낙심하고 주저앉아 울고 말 것이다.
요즘 같이 명문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신학교(神學校)를
택하였다면 이는 더욱 문제가 있는데 신학은 머리가 나빠서 배움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구제하는 수용소가 아니고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서
인류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의 체험을 하고 주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해서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13)하는
심정으로 구원의 즐거움을 맛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불타는 마음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시편 저자는 기록하기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 오리이다"하였다(시 51:12-13).
'구원의 즐거움'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심령의 기쁨인데 바로 이것은 다윗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원동력이었고 한편 '회복시키고'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행동을
가리킨다(창 18:33 룻 1:15 삼상 5:11). 따라서 본 단어는 다윗이 이전에 '구원의 즐거움'을 맛본 경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하였는데 이는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렘 24:7. 31:33. 32:39 겔 36:25-27).
이와 같은 소명감(召命感)이 있어 주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목회자가
된 사람은 주변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괴로운 일이 많아도 그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그 고통과 슬픔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하였다(골1:24). 이는 바울이 주의 종이 되어 성도들을 위하여 일하는 과정에서 그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낙심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기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구원의 확신과 소명감에 불탔기 때문인데 소명감
없이 목회자가 되면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견디지 못하고 낙심하고 괴로워하며 결국 양떼를 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유효적(有效的)인 부름이 아니고 일시적인 부름이라 그는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마는 불행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였기에 주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시며 탄식하신 적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도 아니하였고 주를 팔아먹을 마귀라고 하였는데(요 6:64-71)그는 마귀에 종노릇만 하다가 최후를 마쳤으니(요 13:2 행
1:17-18)정말 소명감 없이 부름을 받은 자가 얼마나 불쌍한 가를 알게 될 때 자신이 초라하고 불쌍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심적인 갈등은
물론이고 말로 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많은 목회자들 중에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목회를 시작했지만
목회자가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어 자신도 구원의 즐거움을 체험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회 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이 늘어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절차를 밟자니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목회자라고 하면서
소명감 결여로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아 평소에 해보지 아니한 기도를 하는데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간구 해 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뒤늦게 남몰래 피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는 그 고통 누구도 몰라주고 목회를 해야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기로에
서서 고민하는 그 모습 상상해 보라 얼마나 비참한가 말이다.
다급해진 목회자는 밤이 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는
처음에는 목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들어서서 하다보니 이는 힘으로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능으로도 할 수 없으며 오직 주의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안된 다는 것을 깨달았아오니 내게도 능력을 주옵소서(슥 4:6)그리하여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충성된 종으로 써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소명감 없이 들어섰다가 해보니 장난이 아님을 깨닫고 그 때부터 새롭게
하려고 혼자서 몸부림치는 것은 사람은 누구라도 어떤 일도 억지로 할 수 없고 만약에 한다고 해도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목회자의 방향전환(方向轉換)을 위하여 고민하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밥벌이하기 위하여 목회자가 되었으니 삯군목자라는
말을 쉽게 하여 듣는 목회자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데 당해보지 아니한 사람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탁인데 목회자가 어떤 목적에서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든 간에 일단 목사가 되었으면 그를 위하여 기도부터 해주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셔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도록 협력해야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위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하였다(수1:16-18).
그렇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지만 그는 모세의 후계자이기에 그의 사명은 매우 커서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걱정이 되지 아니할 수 없고 두렵지 아니할 수 없지만 그러나 백성들은 그에게 용기를 주는데 우리가 당신에게 순종하겠고
만약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가 있다면 죽임을 당해도 좋다는 표시를 하고 다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모세와 함께 하시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랄 뿐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는 처음에 시작은 소명감도 없이 시작하여 매우 큰 고통을 당했지만 깨닫고 난
후에 다시 주의 손에 이끌리어 사명감에 불타서 영력(靈力)이 충만한 주의 종이 되었다면 이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므로 목회자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먼저 욕하고 비방하기 전에 그를 위하여 피 땀 흘리는 기도의 성원이 있을 때 그 목회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빌 4:13)자신감이 생겨서 순교까지 각오하며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교회에 유익을 주는 목회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목회를 시작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소명감 없이 누가 시킨다고 할 일도 아니고 꿈에 지시를 받았다는
것도 안되고 다만 이사야 선지자처럼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자원해서 주의 일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정도로 사명감에 불타서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주의 일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잎에 가리라는 마음에서부터 울어 나오는 소명의식에서 해야할 것이다(사 6:5-8).
곽안련
박사는 말하기를 "허울 좋은 변명과 이유로 신학교에 들어와 교역자가 되려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교회에 대하여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사람이다. 교역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면
애당초부터 목사직을 택하지 않는 것이 좋다(목회학 곽안련 저 기독교서회발행 1981. P.24)
2.목회자 되기로
결심(決心)하기까지 고통
출 4:12-14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하였다.
모세가 지도자가 무엇인가 모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해보려고
스스로 나섰지만 실제로 진정한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는 쉽게 예 하고 응답하지 못하고 계속하여 사양하는 모습을 보게되는데 이는 지도자가
가야할 길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태도인 것이다.
본 구절은 '보냄을 받을 만한 능력지닌 자'로 풀이되는데 혹자는
이를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을 염두에 둔 말이라 주장하나 별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한편 모세는 이전까지 네 번(출 3:11, 13. 4:1,
10)에 걸쳐 사양의 뜻을 표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다섯 번째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진노하시며 그에게
또 다른 해결책으로서 그의 형 아론을 대변자로 삼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심지어 당신의 백성이 믿음이 없어 당신을 화내게
만드는 경우에도) 당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이 성취하고야 마신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이다.
그런데도 모세는 선뜻 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를 발하시고 하였는데 이는(아프...이하르)'아프'는
'코를 씨근거리다', '진노하다'란 뜻인 '아나프'에서 유래하였고, '이하르'는 '불태우다', '진노하다'란 뜻인 '하라'의 미 완료 3인칭
남성 단수이다. 물론 이는 신인동형 동성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강렬한 진노를 함축하고 있지만, 이 분노는 멸망 받을 자들에 대할 진노와는 달리
당신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뜨거운 연민과 사랑을 내포한 진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한번
쓰시겠다고 계획하시면 아무리 인간이 빠져나가려고 해도 소용이 없고 필경은 주님의 뜻대로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고집하는데 이는 매를
자초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에 아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순순히 응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과 같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결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것이라는 것인데 목회는 쉬운 것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단해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부르실 때는 강력하게 역사하사 그의 결단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시기
때문에 두 말 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모세와 같은 경우에는 그의 경험이 그를 망설이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나섰다가 백성들에게 봉변만 당하고 말았다.
출애굽기 저자는 기록하기를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 되었도다"하였다(출2:14). 이는 백성들이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인데 주재로 삼았느냐고 하였는데 그 말의 뜻은'주권을 소유하다', '통치하다'란 뜻의 동사 '쇠라르'에서 유래한
말로 일국의 통치자나 고급 관료 등을 의미한다. 그러한 견지에서 후일 유다서 기자가 언급한대로 궁극적 의미에서의 주재는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유 1:4).
한편 본 절 전반부에 나타난 바 모세를 향한 그른 자(악한 자)의 악의에 찬 비난은 개인적 울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모세의 애정 어린 설복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인자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모세를 곤경에 빠뜨릴 의향마저 드러내었다.
이것은 이후에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자로서 그가 가장 우려했던 한가지 요인이
되었다. 하여튼 동족에 대해서 인간적 접근을 시도했던 모세의 방법은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이 사건 후 수많은 연단 과정을
겪으면서 동족에 대한 구원은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공의로우신 방법에 의해서라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시 66:3 행 4:33).
또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언제 너를 우리의 법관으로 삼았느냐고 하였는데 법관(쇼페트) 이라는
뜻은 '재판하다', '심판하다' '지명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지명하여 부른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 말이지만(사 43:1)
백성들은 모세를 거부하였고 모세는 강압적으로 그들의 지도자라고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라는 명령은 수용하기 쉽지 아니하고 그를 고민에 빠지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특히
지금의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위도 높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자들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아픔을 겪어야 하기 때문인데 직접 목회 하실 분은 각오가 되어 있지만 부인들의 반대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교회 초창기 목회자들은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라 경제적으로 이만저만 고생을 하지 아니하였고 설상가상 격으로
일제치하 신사참배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6.25사변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많은 희생을 하였으며 오늘의 목회는 경제적으로는 대 도시나
웬만한 교회는 자립을 하지만 목사 장로의 갈등과 세속적 문화가 교회 침투하여 정통적인 신학사상을 가지고 보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목회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그래서 목회를 하겠다는 것은 범죄와 전쟁을 선포해야하고 세속주의와 전쟁을
선포해야하며 부귀영화와 전쟁을 선포하고 오직 복음으로만 이 한 몸을 주를 위하여 바치겠다는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앞으로는
목회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안타깝다는 것인데 그러나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셔서
목회자가 넘쳐나 과잉배출이라는 지적까지 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의 부르심에 어긋나지 않게 목회 하기는 그리 쉽지 아니하다는데서
생각해보면 목회자로 나서기가 그리 쉽지만은 아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께서 12사도를 부르실 때는 그들은 두 말하지 아니하고
부르심에 응답하였는데 직업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편단심 주님만 섬기고 따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주와 같이 일하다가
거의가 주를 위하여 순교의 제물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당시 사도들과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는 목회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의도에서 나서는 이들도 있어 종종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무튼 목회자로 나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주의
부르심에 응하려고 고민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밥벌이하려고 목회 한다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 얼마나 마음의 고통을 겪고 주의 부르심에 선뜻 응할지
정말 고민하는 목회자들의 고통을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생각해 본다.
'신학자료 > 8.목회학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회자의 10가지 자격 (0) | 2006.05.15 |
---|---|
목사의 심장 (0) | 2006.05.15 |
목사(牧師)의 이성문제로 휘말릴 때의 고통 (0) | 2006.05.15 |
목사(牧師)가 배척(排斥)받았을 때의 고통 (0) | 2006.05.15 |
목사(牧師)가 시험(試驗)들었을 때의 고통 (0) | 2006.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