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의 주의 할점

2006. 5. 15. 22:20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목사들의 주의 할 점

성도와의 상담
성도들과의 상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보다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 성도의 모든 말을 한가지도 놓치지 아니하고 들어주는 성실한 경청에 있다. 성도는 자기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 자체로도 고민과 괴로운 문제를 해결 받는다. 뿐 만 아니라, 놀랍게도 목사에게 자기의 사정을 낱낱이 말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도하는 것이 기독교 상담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목사와 상담을 한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들의 그런 고민과 어려움과 치부들을 목사에게 말한 후에 크게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른 상담 자인 목사가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도들과 상담한 후 꼭 따라야 하는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기 대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 즉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고의적이던 실수든 간에 목사가 사석에서나 공석(설교, 도는 예화든) 그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에 담았을 때에 성도들의 이탈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 다른 성도들은 목사에게 상담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상담 후에 목사가 그들의 일에 무관심하고 상담을 의례적인 관습으로 해 주었다는 느낌이 들면 성도들을 상담을 한 일을 후회하게 된다.
목사가 자기들의 말을 듣고 지나치게 자기 문제들에 개입을 하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과 상담 후에 그 상담의 결산을 매우 지혜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 결산은 상담을 한 성도마다 상황과 성격과 이해에 달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적으로 성도들을 상담하는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①. 상담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나는 목회를 잘 해 볼 심사로 어느 해 여의도 어디에서 개설한 상담 전문 학원에 등록을 해서 6개월 동안 상담이라는 것을 배워 본 일이 있었다. 그 학원에 출강하는 강사는 우리 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유명한 대학 교수들이 많았고 배우는 과목들도 노인 심리학을 비릇하여 그럴듯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6개월을 배운 후에는 상담사 자격증을 주어 상담소를 개설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어 주었다.
매주 3-4회씩 나가 6개월을 배운 후에 나는 몇 가지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상담에 대한 내 무지였으며, 그 무지로 인해 아무라도 상담을 하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상담학이나 심리학이라는 게 종잡을 수 없는 학문이라는 점이였다. 그것은 그 학문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가 근본적으로 체계화 될 수 없고 획일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곳에서 자격증을 얻은 어떤 동창생들이 시내에 상담소를 개설했는데 상담 료를 받기커녕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강제적인 도움 요청에 혀를 내 두르며 문을 닫아 버렸다.
목사들이 성도들을 상담하기 위해서는 7-8년의 상담학 공부를 하던지 아니면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게 상담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없는 것으로 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상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목회 상담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상담에 대한 한 나는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상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담의 방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상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목사의 만용에 가까운 상담에 대한 자신감이 상담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해서 교회를 떠나게 하는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②. 상담 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게 목사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해답을 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쯤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상담을 하려 온 성도들에게 무엇인가 확실한 대답을 주러 단숨에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런 생각이 상담 자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하게 해서 상담 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후회를 하게 한다. 이럴 경우에 상담 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목사의 의견과 생각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즉 문제의 해답을 목사가 하려 들고 상담 자는 목사의 생각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 성도는 목사에게 아무 것도 의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아니한 목사를 찾아 신앙 생활의 방랑을 떠나려 할 것이다.
③. 상담을 여상한 목회의 일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심방이나 기도나 설교와 같은 수준의 목회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른 상담도 목회 중의 한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상담은 특별한 목회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성도 개개인의 생각과 생활과 습관과 시간에 접촉되는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도들이 동시에 한 자리에서 듣는 설교와 다르며,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하나님 말씀 공부와도 다르고 기도와도 다른 성격을 가진다.
목사의 상담은 우리 나라의 경우에 대체적으로 심방 중에 많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적인 형태의 심방에서는 깊이 있는 상담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 목사의 목회 생활에서는 거의 상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④. 상담을 성도의 약점 잡기로 생각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케도릭의 고해 성사는 사제들이 성도들의 약점을 이용해 그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 버면 목사의 심리에 이런 이상하고 요상한 마음이 생긴다. 이런 파렴치하고 이성을 잃고 목사의 양심을 저버린 상담에 대한 목사의 간악한 심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가정 사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라.
성도들의 가정 사에 너무 깊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가끔 어떤 목사는 자기의 사명을 지나치게 오버하여 성도들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며 지나치게 개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에 흥미를 가지며 마치 자기가 성도의 대부가 된 양 처신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목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자기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즉 목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더욱 더 팽대해져서 오늘의 도시 교회 성도들은 목사가 예고 없이 자기 가정을 심방 하는 일도 싫어하고 젊은 성도들은 심지어 봄가을의 정기적인 심방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한 것도 알려지기를 거부하며 그 외의 모든 가정 사에 대하여 간섭이나 충고를 받지 아니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들은 목사가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의 입맛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받을 것과 거부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 든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잘 지도하되 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진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을 빌미로 자기들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습관이나 가정 사에 개입하여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거부한다. 즉 자기들의 신앙을 자기 식으로 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목사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고 변화되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모든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무력감과 성도와의 거리감을 해소할 수 잇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목사가 성도들이 요구하는 생각과 생활을 철저히 감수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들은 정직하지 아니해도 목사는 정직할 것이며, 자기들은 세속적이 여도 목사는 거룩할 것이며, 자기들은 돈을 좋아해도 목사는 물질에 초월하고, 자기들은 좋은 집에서 잘 살기를 바랄지라도 목사는 청빈과 가난을 친구로 하여 살 것이며, 자기들은 좋지 아니한 생활 습관에 젖어 있지만 목사는 언제나 천사와 같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자기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목사는 자기들을 위해 24시간 기도를 해 주고, 자기들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생존 경쟁을 하지만 목사는 죽더라도 하늘의 이슬만 먹고살기를 바란다.
성도들의 목사에 대한 요구는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에 자기 목사가 얼마나 하나님 비슷하게 되었느냐에 따라 목사를 존경하고 목사의 말에 순종하려 든다.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절대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사 내 몰기나 목사 떠나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제 목사들은 한가지 타협할 수 없는 취사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 같은 목사가 되느냐 아니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느냐이다. 성도들에게 카리스마적인 지배력을 가지지 못한 목사는 언제나 "목사님"이라고 불리지 못하고 "목사"라고 불리며 어떤 경우에는 "목사 세끼"라고 불리게 된다. 우리 모두 "목사님"이 되자. 아무래도 목사가 "목사 세끼"라고 불리면 안 될 것 같다. 나도 수 없이 "목사 세끼"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분노로 가득 찬 얼굴들과 핏빛 어린 눈들과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사 세끼"라는 말을 등뒤로 들으며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는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얼마나 좌절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30여년의 목회 생활이 거의 이 지경이 였다. 참으로 회한의 가득 차 세월이 아니 였던가? 

목사의 속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고 착각하지 말라.
목사가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다라는 사고 방식을 경계하라. 목사가 성도들이나 신앙 생활에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처신하기'일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인 성도들에 대하여 어찌 목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목사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성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 목사의 생각이 곧 그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즉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라기 보다는 평소에 그 성도에 대한 목사의 생각일 수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목사의 말에 따르지 아니하면 불순종했다고 하여 그를 멀리 대하는 경우가 생기고, 목사의 말에 따르면 순종 잘하는 자기 사람쯤으로 생각하여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순종심은 목사의 지시에 응하고 안하고 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서 찾아야 한다.
한가지 어처구니없는 실례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친구 목사에게 어느 기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평생 기도만 한다는 권사가 한 사람 찾아 왔다. 그 권사는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목사님에 대한 계시를 해 주셔서 받아 왔습니다.]
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니 무슨 기도를 받아 왔는데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크게 쓰시려고 40일 금식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목사가 40일 금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이다. 그래서 친구는
[그래요. 40일 금식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왜 권사 님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매일 기도를 하고 있으니 내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글쎄요. 아마 목사님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고맙군요. 앞으로 그런 일이 있거든, 박목사에게 직접 말씀하시라고 부탁 좀 드려 주세요]
하나님께서 목사가 아닌 성도 본인에게 직접 무엇인가 말씀하시고 지시하시는 일이 있지 아니할까? 그것이 목사가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지 아니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가?

교회를 떠난 성도들에 대한 미련을 속히 떨치라.
목사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일 것이다. 멀리 이사를 가서 떠나는 일도 속이 상한데 바로 옆에 있는 교회로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목사를 비방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자기의 교회 떠남을 정당화하는 성도들을 대할 때 목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좌절감과 비애를 함께 느끼게 되고 당장에 목회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불 같이 일어난다. 그런 몹시 속 상하는 일을 당하면 목사는 자제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떠난 그가 남긴 목사에 대한 허위 사실을 해명하고 변명하기 위해 설교 시간에 그에 대하여 공격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건 정말 목사가 스스로 함정을 파고 그 속으로 뛰어 드는 것과 같은 실수가 된다는 것을 알라.
나는 지금까지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교회를 떠난 성도들에게 왜 교회를 떠나야 하는지의 이유를 속 시원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가 교회를 떠난 이유를 혼자 갖은 고민을 하며 추측을 할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나름대로의 추측을 강단에서나 사석에서 말하므로 써 말한 나나 떠난 성도나,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 덕이 되지 못한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실수가 된다.
①. 그런 사람을 생각하고 설교를 하면 남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상처만 받는다. 들어야 할 사람은 여기 없다는 것을 알라.
②. 떠난 성도가 목사를 비방한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이 목사의 해명성 발언으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더 큰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목사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목사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오염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도의 목사에 대한 생각을 오염시키는 것은 목사가 비방하고 떠난 성도들의 말에 대하여 해명을 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았으면 목사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혹 알더라도 목사가 해명하는 것보다 더 목사를 이해하고 동정할 것이다.
③. 교회를 떠날 마음을 먹은 성도들은 어느 땐가 반드시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이다. 교회를 떠난다고 발하고 다니는 성도를 목사가 설득하고 회유하여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그가 평생 교회를 잘 섬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그가 교회를 떠난다는 말에 대하여 목사와 성도들이 자기를 어떻게 잘 대해 주었으며 어떤 반응을 했는가를 알기 때문에 조그마한 불만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교회 생활에서 목사와 다른 성도들에게서 받은 은혜는 오래 동안 기억하지 못하고 섭섭했던 일들이나 시험을 당해 고통스러웠던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잊어버릴 수 없는 일들이 세월이 감에 따라 자꾸 누적되고 폭발하는 때가 있다. 사실 교회 생활에서 받은 은혜와 격려와 위로가 훨씬 큰 것인데도 그것과 이것을 상쇄한다 던지 은혜를 더욱 강조해 기억하는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지 않지만 불평이 쌓인 경우에는 교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망각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④. 떠난 성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 와도 못쓴다. 다시 시험에 든다.
교회와 목사를 근심하게 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다녀 보다가 다시 교회를 찾아오는 일이 있다. 목사는 그를 반기며 기회도 그를 반겨 그의 원래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고 한 가족으로 대한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다시 돌아 온 그는 회개하고 돌아 온 탕자가 아니라, 불평과 불만을 마음속에 지우지 못하고 물위에 겉도는 기름 꼴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전에 했던 그 반역적인 일을 다시 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목회에 지장을 주는 반역을 한다. 이런 대체적인 경향을 간파하고 있는 목회에 노련한 목사는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⑤. 자기가 섬기던 교회를 떠난 성도들을 자기 교회 교인을 만들어 사역하게 한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다. 그 분은 이미 작고하신 분인데 한남 동의 산 위에 있는 모 교회를 담임하셨다. 원래 그 목사님은 대구 지방에서 목회를 하셨지만 70년대에 서울로 올라 오셔서 그 때 당시에는 아주 약한 작은 교회인 그 교회를 담당하셨다.
그런데 그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달란트가 있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교회에서 무슨 무슨 일로 목사와 교회를 버리고 떠나 방황하는 장로들이나 집사들을 자기 교회로 대려 와 정말 모범적인 성도들이 되게 해서 교회를 섬기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목사님은 그들과 함께 지금의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 상전을 건축했으며 그 옆에 교육관까지 잘 건축해서 성경 학교를 유치하기도 하고 아주 유명한 부흥 목사를 배출하기도 했는데 그 분이 한얼 산의 이천석 목사님이셨다.
나는 그 목사님이 어떤 달란트로 그런 버린 자들을 거두어 좋은 하나님의 일군 되게 했는지 잘 모른다. 오로지 신비하고 놀라울 뿐이다. 이는 마치 다윗이 악한 자들과 비류들을 모아 다윗 왕국을 세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삼상30:22) 그 목사님은 성씨 임씨 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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