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기도
2006. 5. 15. 21:48ㆍ목양자료/4.기도자료
사랑의교회 옥한흠목사님 설교 <교역자에게 하신
당부의말씀>
제목 : 바울의 생각의 패턴
기도 시간마다 기도가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죠. 어떤 때는 진통하는 기도를 하다가 끝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은혜의 지성소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기쁨과 만족을 얻는 기도도 있고 어떤 때는 시간 따라서, 상황 따라서, 감정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기도 시간이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데 항상 기도 시간이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기도가 잘된다고 하는 사람도 제가 볼 때는 솔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25년 동안 주기도문송을 항상 불렀던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될 때, 내 기도가 중언부언하기 쉬울 때 항상 나를 지켜 주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를 잘못해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를 하면 나의 모든 기도가 그것으로 보완이 되고 완성되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기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쉴 사이 없이 말을 해야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한국적인 기도 문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도 문화는 아닙니다. 또 기도는 묵상만 한다는 말도 일방적인 소리입니다.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도 있고 유창한 기도도 있고 어떤 때는 씨름하는 기도도 있고 묵상하는 기도도 있고 어떤 때는 외마디 소리로 끝나는 기도도 있을 정도로 기도는 성경에 보면 다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중요한 본질과 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이 주님이신데 저는 주기도문을 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기도하고는 ‘하나님, 저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향해 잠잠히 보시며 기뻐하시는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내가 기도를 잘못해도 답답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으니까 내 기도를 들어 주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하는 말 속에서 저는 기도의 끈을 찾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게 최고의 기도인데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 나는 이 일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기도가 성취되기 위해서 오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다 보면 기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다가 다음에 있는 기도들이 주님 앞에 아뢰어 지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 아직 내가 아직도 돈 문제에 매여 있는 사람은 아닌가요? 물질에 대한 탐욕이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일용할 양식이면 족한데….’ 이런 기도가 계속 나오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용서의 문제, 죄 사함의 문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 정말 얼마나 중요합니까? 악에 빠지지 않게, 악과 손잡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이런 기도 한마디 한마디를 묵상하면서 조용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적어도 기도에 실패하고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비참한 게 기도에 실패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기도문 이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기도의 총체적인 기도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하나만 해도 우리 기도를 다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주기도문은 내가 지금까지 30, 40분 기도하고 났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한 기도를 완전케 하는 마지막 기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 제가 여러분들과 공식적으로 교역자 회의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꼭 기도에 성공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가만히 보니까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방금 말한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명백하게 이어가는 방법 하나, 그리고 오정현 목사님이 오시고 나서 배운 거 하나 곧 찬양을 기도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막히고 할 때는 찬양을 계속 반복하면서 부르고 부르면서 묵상하고 그러다 보면 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마음이 열립니다. 이것은 나에게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인데 찬양이 기도되게 하는 것, 그래서 기도가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처음부터 기도가 안되면 중보기도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중보기도제목이나 제자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사람들 이름을 놓고 처음부터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보 기도하려면 끝도 없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한참 중보기도 하다 보면 그 다음에 내 기도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기도에 깊이 젖어 들 수가 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나의 기도를 방해하려고 해도 방해할 수 없는, 없게 만드는 우리 나름대로의 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비결을 가르쳐 주는 이유가 기도에 실패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교역자는 새벽기도 나왔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새벽기도를 위해 봉사는 해도 기도를 안 하는 케이스가 참 많습니다.
뒤에서 봉사하다 보면 피곤하잖아요. 그리고 새삼스럽게 시간 내서 앉아서 기도하려고 하면 졸음이 오고 하루 해야 될 일들이 머리에 몰려오고 그러다 보면 기도 못하고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새벽기도가 교역자들을 위한 기도의 전당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전당은 따로 있습니다. 각자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도의 비밀, 기도의 골방도 없이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새벽기도 나와서 한 두 시간 기도했다는 것, 제가 볼 때 교역자에게는 절대로 만족스런 기도의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새벽기도가 정착이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한데 그 대신 새벽기도에 마귀가 파놓은 함정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 나에게는 기도에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에 앉아서 엎드려 기도하면 보통 1시간 안에는 눈을 잘 뜨지 않습니다. 이미 버릇이 되어 버렸습니다. 낮 시간 이든 저녁 시간 이든 시간을 잡아 기도하려면 기도 시간이 그렇게 안 갑니다. 저도 기도 면에서는 새벽체질인데 어쨌든 자기에게 있어서 그 시간을 놓치면 나는 오늘 하루 종일 기도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전에 1-2시간을 정해놓고 아주 기가 막힌 시간을 갖는 사람을 봤습니다. 아주 체질화 돼 버린 케이스였습니다. 이처럼 누구와도 양도할 수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나름대로의 기도 시간이 언제인지 자기에게 제일 좋은 시간을 택하십시오
. 제 경우 아침 시간을 놓쳐 버리면 실패할 확률이 80%입니다. 물론 잠깐 앉아서 책상에서 기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는 기도의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은혜는 아침 시간 놓쳐 버리면 거의 80%는 실패합니다
.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해서 성경 말씀도 읽지 않고 서두를 꺼내는 이유는 교역자만큼 위선자가 되기 쉬운 직업이 없습니다. 제가 35년 사역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역자만큼 위선자가 될 확률이 많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위선하는 것이 나중에는 악습으로 몸에 배어버리면 양심도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무서운 벼랑에 서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빌립보서 1:12-21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2가지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길 바랍니다.
저는 이 내용을 바울의 사고의 패턴, 생각의 패턴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패턴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은혜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습관화 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생각도 습관이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느냐? 습관화되면 그 생각에 따르게 되는데, 생각의 습관화가 잘못되면 나쁜 패턴을 갖게 되고 좋은 생각으로 끌어가면 나중에 좋은 패턴이 됩니다.
바울의 생각의 패턴화는 2가지로 일어납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것이 좋아 보이든 나빠 보이든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항상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바울이 지금 갇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서바나까지 가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면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이것은 도무지 하나에서 열까지, 열에서 백까지 이것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지 긍정적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억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좋게 보려는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지 그것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내가 갇힘으로써 복음은 더 자유 하다. 내가 감옥에 있음으로 복음은 매이지 않고 더 힘있게 증거 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물론 바울이니까 특별한 계시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보면 바울이 특별히 계시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내가 볼 때 바울의 사고의 패턴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내 생각에 이것은 완전히 손해 보는 구나. 그런데 지나고 보니 손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다.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 하는 그런 경험들을 계속 하면서 자기 생각이 굳어진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것은 내가 보기에 아무리 좋게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주님의 복음에 플러스가 되지 절대 마이너스가 아니다.’ 하는 생각으로 탁 볼 수 있는 패턴이 생겼습니다.
우리 교역자에게 이런 사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는 일부러 좋게 보이려고 하는 이야기지 근거가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는 바울의 사고의 패턴은 확실히 은혜와 체험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다 통합해서 볼 때 하나님이 나를 복음의 종으로, 선교사로 불렀으면 나에게 일어나는 어느 것 하나 손해를 안봅니다. 복음은 손해를 안봅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전향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한 생을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간단하게 본문의 바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어떻게 철저하게 주님 중심의 사고를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뒤에 이야기하듯이 나는 죽어도 좋다 살아도 좋다.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 그런데 바울을 보면서 어떻게 철저하게 주님 중심일 수 있을까? 내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저도 이것은 긍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제가 이 말은 아직 긍정 못합니다. 내가 죽고 나서 주님을 위한다 할 정도로 내 마음이 철저하게 주님 중심으로 준비가 되었느냐 아직 나에게는 그런 부분이 약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 앞에서 자기를 쳐 복종시키면서 우리의 생각이 오직 주님 중심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도록 씨름을 해야 합니다. 절대로 쉽게 안됩니다. 나는 여러분보고 주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몇 사람 빼놓고는 ‘진짜 내가 죽어도 주님만 존귀히 된다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직업이 어려운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야 하는데 실제는 잘 안되니까.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불완전한 줄 알면서도 우리를 불렀습니다.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보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어쩌면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상당한 진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에게 숙제로 던집니다. 여러분도 씨름하십시오.
나의 입장이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뜻은 절대로 부정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반드시 선하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사고의식을 갖고 있으면 어떤 일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처럼 죽든지 살든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 우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정말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점을 놓고 비록 부족한 점이 우리에게 남아 있어도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꾸자꾸 닮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을 거의 다 살고 60대 중반에 있는 선배 목사가 이런 문제를 놓고 아직도 씨름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에게 소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속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다듬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살수있고
***기도의 능력을 받아야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일을 할수가 있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갈수 있는것 같습니다 ♡
***내용을 조금 정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새해복많이 받으시구요*^^*한해동안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에 주님의 넘치는 복이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제목 : 바울의 생각의 패턴
기도 시간마다 기도가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죠. 어떤 때는 진통하는 기도를 하다가 끝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은혜의 지성소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기쁨과 만족을 얻는 기도도 있고 어떤 때는 시간 따라서, 상황 따라서, 감정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기도 시간이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데 항상 기도 시간이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기도가 잘된다고 하는 사람도 제가 볼 때는 솔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25년 동안 주기도문송을 항상 불렀던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될 때, 내 기도가 중언부언하기 쉬울 때 항상 나를 지켜 주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를 잘못해도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를 하면 나의 모든 기도가 그것으로 보완이 되고 완성되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기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쉴 사이 없이 말을 해야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한국적인 기도 문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도 문화는 아닙니다. 또 기도는 묵상만 한다는 말도 일방적인 소리입니다.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도 있고 유창한 기도도 있고 어떤 때는 씨름하는 기도도 있고 묵상하는 기도도 있고 어떤 때는 외마디 소리로 끝나는 기도도 있을 정도로 기도는 성경에 보면 다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중요한 본질과 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분이 주님이신데 저는 주기도문을 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기도하고는 ‘하나님, 저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향해 잠잠히 보시며 기뻐하시는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내가 기도를 잘못해도 답답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으니까 내 기도를 들어 주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하는 말 속에서 저는 기도의 끈을 찾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게 최고의 기도인데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 나는 이 일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기도가 성취되기 위해서 오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다 보면 기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다가 다음에 있는 기도들이 주님 앞에 아뢰어 지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 아직 내가 아직도 돈 문제에 매여 있는 사람은 아닌가요? 물질에 대한 탐욕이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일용할 양식이면 족한데….’ 이런 기도가 계속 나오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용서의 문제, 죄 사함의 문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 정말 얼마나 중요합니까? 악에 빠지지 않게, 악과 손잡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
그래서 이런 기도 한마디 한마디를 묵상하면서 조용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적어도 기도에 실패하고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비참한 게 기도에 실패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기도문 이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기도의 총체적인 기도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하나만 해도 우리 기도를 다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주기도문은 내가 지금까지 30, 40분 기도하고 났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한 기도를 완전케 하는 마지막 기도이다.’ 이런 말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 제가 여러분들과 공식적으로 교역자 회의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꼭 기도에 성공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가만히 보니까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방금 말한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명백하게 이어가는 방법 하나, 그리고 오정현 목사님이 오시고 나서 배운 거 하나 곧 찬양을 기도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막히고 할 때는 찬양을 계속 반복하면서 부르고 부르면서 묵상하고 그러다 보면 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마음이 열립니다. 이것은 나에게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인데 찬양이 기도되게 하는 것, 그래서 기도가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처음부터 기도가 안되면 중보기도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중보기도제목이나 제자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사람들 이름을 놓고 처음부터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보 기도하려면 끝도 없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한참 중보기도 하다 보면 그 다음에 내 기도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기도에 깊이 젖어 들 수가 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나의 기도를 방해하려고 해도 방해할 수 없는, 없게 만드는 우리 나름대로의 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비결을 가르쳐 주는 이유가 기도에 실패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교역자는 새벽기도 나왔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새벽기도를 위해 봉사는 해도 기도를 안 하는 케이스가 참 많습니다.
뒤에서 봉사하다 보면 피곤하잖아요. 그리고 새삼스럽게 시간 내서 앉아서 기도하려고 하면 졸음이 오고 하루 해야 될 일들이 머리에 몰려오고 그러다 보면 기도 못하고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새벽기도가 교역자들을 위한 기도의 전당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전당은 따로 있습니다. 각자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도의 비밀, 기도의 골방도 없이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새벽기도 나와서 한 두 시간 기도했다는 것, 제가 볼 때 교역자에게는 절대로 만족스런 기도의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새벽기도가 정착이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한데 그 대신 새벽기도에 마귀가 파놓은 함정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 나에게는 기도에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에 앉아서 엎드려 기도하면 보통 1시간 안에는 눈을 잘 뜨지 않습니다. 이미 버릇이 되어 버렸습니다. 낮 시간 이든 저녁 시간 이든 시간을 잡아 기도하려면 기도 시간이 그렇게 안 갑니다. 저도 기도 면에서는 새벽체질인데 어쨌든 자기에게 있어서 그 시간을 놓치면 나는 오늘 하루 종일 기도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전에 1-2시간을 정해놓고 아주 기가 막힌 시간을 갖는 사람을 봤습니다. 아주 체질화 돼 버린 케이스였습니다. 이처럼 누구와도 양도할 수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나름대로의 기도 시간이 언제인지 자기에게 제일 좋은 시간을 택하십시오
. 제 경우 아침 시간을 놓쳐 버리면 실패할 확률이 80%입니다. 물론 잠깐 앉아서 책상에서 기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는 기도의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은혜는 아침 시간 놓쳐 버리면 거의 80%는 실패합니다
.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해서 성경 말씀도 읽지 않고 서두를 꺼내는 이유는 교역자만큼 위선자가 되기 쉬운 직업이 없습니다. 제가 35년 사역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역자만큼 위선자가 될 확률이 많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위선하는 것이 나중에는 악습으로 몸에 배어버리면 양심도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무서운 벼랑에 서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빌립보서 1:12-21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2가지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길 바랍니다.
저는 이 내용을 바울의 사고의 패턴, 생각의 패턴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패턴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은혜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습관화 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생각도 습관이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느냐? 습관화되면 그 생각에 따르게 되는데, 생각의 습관화가 잘못되면 나쁜 패턴을 갖게 되고 좋은 생각으로 끌어가면 나중에 좋은 패턴이 됩니다.
바울의 생각의 패턴화는 2가지로 일어납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것이 좋아 보이든 나빠 보이든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항상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바울이 지금 갇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서바나까지 가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면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이것은 도무지 하나에서 열까지, 열에서 백까지 이것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지 긍정적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억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좋게 보려는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지 그것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내가 갇힘으로써 복음은 더 자유 하다. 내가 감옥에 있음으로 복음은 매이지 않고 더 힘있게 증거 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물론 바울이니까 특별한 계시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보면 바울이 특별히 계시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내가 볼 때 바울의 사고의 패턴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내 생각에 이것은 완전히 손해 보는 구나. 그런데 지나고 보니 손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다.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셨다.’ 하는 그런 경험들을 계속 하면서 자기 생각이 굳어진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것은 내가 보기에 아무리 좋게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주님의 복음에 플러스가 되지 절대 마이너스가 아니다.’ 하는 생각으로 탁 볼 수 있는 패턴이 생겼습니다.
우리 교역자에게 이런 사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는 일부러 좋게 보이려고 하는 이야기지 근거가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는 바울의 사고의 패턴은 확실히 은혜와 체험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다 통합해서 볼 때 하나님이 나를 복음의 종으로, 선교사로 불렀으면 나에게 일어나는 어느 것 하나 손해를 안봅니다. 복음은 손해를 안봅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전향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고의 패턴을 가지고 한 생을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간단하게 본문의 바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어떻게 철저하게 주님 중심의 사고를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뒤에 이야기하듯이 나는 죽어도 좋다 살아도 좋다.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 그런데 바울을 보면서 어떻게 철저하게 주님 중심일 수 있을까? 내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저도 이것은 긍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제가 이 말은 아직 긍정 못합니다. 내가 죽고 나서 주님을 위한다 할 정도로 내 마음이 철저하게 주님 중심으로 준비가 되었느냐 아직 나에게는 그런 부분이 약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 앞에서 자기를 쳐 복종시키면서 우리의 생각이 오직 주님 중심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도록 씨름을 해야 합니다. 절대로 쉽게 안됩니다. 나는 여러분보고 주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몇 사람 빼놓고는 ‘진짜 내가 죽어도 주님만 존귀히 된다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직업이 어려운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야 하는데 실제는 잘 안되니까.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불완전한 줄 알면서도 우리를 불렀습니다.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보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어쩌면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상당한 진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에게 숙제로 던집니다. 여러분도 씨름하십시오.
나의 입장이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뜻은 절대로 부정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반드시 선하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인도하신다는 분명한 사고의식을 갖고 있으면 어떤 일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처럼 죽든지 살든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 우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정말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점을 놓고 비록 부족한 점이 우리에게 남아 있어도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꾸자꾸 닮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을 거의 다 살고 60대 중반에 있는 선배 목사가 이런 문제를 놓고 아직도 씨름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에게 소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속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다듬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살수있고
***기도의 능력을 받아야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일을 할수가 있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갈수 있는것 같습니다 ♡
***내용을 조금 정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새해복많이 받으시구요*^^*한해동안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에 주님의 넘치는 복이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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