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고난과 부활

2006. 3. 11. 17:43목양자료/2.설교자료

주님의 고난과 부활

본문: 고린도전서 15:3-4


서론:
오는 3월 21일 주간은 고난주간이고 3월 27일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은 춘분 지나서 첫 만월이 지난 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 즉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가장 귀한 기독교의  두 가지 진리, 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하는 분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1494-1536 까지 42년의 짧은 인생을 살고 화형 장에서 불에 타서 순교한 영국의 William Tyndale은 죽어가면서 “ O Lord, open the eyes of the king of England, 오 주님이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도와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기도는 자유주의를 가르치는 목사님들의 눈을 하나님께서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은 본문 고린도전서 15:3-4에 근거하여 “주님의 고난과 부활” 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I 주님의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요한복음 3:16이나 마태복음 20:28에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뿐만아니라, 마태복음 20:28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라고 아주 명확히 그의 오신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그들의 죄 값을 지불하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말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 하고저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우선 이 죄 문제부터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하고 죄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피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언젠가는 한번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사냥하려 가시는 선친을 따라 나섰던 때 일이 생각납니다.  위기에 직면한 꿩은 포수를 피하여 눈 속에 머리를 처박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다고 죽음을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문제와 심판문제를 기피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련한 꿩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심판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찾아 오게 마련이기에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를 논하려면, 죄가 어디서 왔는가를 말해야 합니다. 죄는 어디서 왔습니까? 로마서 5:12-19에 보면 죄는 한 사람 즉 아담에게서 왔다고 합니다.  성경은 두 사람의 아담을 언급합니다.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입니다. 첫 아담은 에덴동산의 아담입니다. 둘째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그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아담에게 약속했습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행위계약입니다.  아담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자유의지란 오늘 우리가 갖고있는 자유의지와 다릅니다. 타락하기전의 아담의 자유의지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였습니다. 아담이후 모든 인간이 갖는 자유의지란 타락한 탓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그런 자유가 아니라 죄 성을 타고난 자유, 즉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자유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4:6 에서는 “우리의 의는 모두 더러운 옷 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롬 14:23에는 “믿음을 좇아 행치 않는 모든 것이 죄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타락하여 모든 사람에게 죄가 유전 되어 모든 죄가 모든 후손 인류에게 전가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아담이 옛날 에덴동산에서 지은 죄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각각 성을 갖고 있습니다.  김씨, 이씨, 박씨, 정씨 등 모두 각자 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집안 몇 대 조부터 계속해서 그 성을 써왔기 때문에 지금 그의 자손 대에 와서도 같은 성을 쓰는 것이 아닙니까?  할아버지가 정씨이면 아들도 정씨이고 손자도 정씨이고 대대로 언제까지나 정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죄를 지었으면 그 죄 성이 대대로 물려 오게 됩니다. 이것을 아담의 죄의 전가(imputation of Adam's Sin) 라고 합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 온 인류와 연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성을 타고 난 증거는 시편 58편 4절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검증을 해 본다면, 생후의 갖난 아기를 격리시켜 양육하면 저절로 죄지을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성을 타고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51:5에서도 다윗이 범죄한 후에 고백하기를 “어머니가 나를 죄악중에 잉태하였음이여..” 라고 탄식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인고로 우리 모두가 죄를 짓게 됩니다.  아무리 성현군자 라고해도 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바울도 모두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류, 지옥에 들어갈 인류 중에서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자들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둘째 아담 (The Second Adam) 혹은 마지막 아담 (The Last Adam)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 시조인 아담,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죄로 인하여 그 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앞서 본 시편 51편 5절 이나, 시편 58:4 말고도, “ 롬 3:11에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고 바울은 로마서 3:23에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의인이 있는가 하고 보니 한 사람도 없다” 고 탄식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아담의 죄를 물려 받았습니다. 이것을 원죄 (Original sin) 라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나면서 타고난 원죄 말고도 또 각자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짓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범죄 (Actual sin) 이라고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원래의 의미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헬라어의 “하마르티아” 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 “과녁” 이란 바로 조금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법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16이나 로마서 3:20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육체가 없고 율법으로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아무리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법에 비추어 보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댓가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23의 가르침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죽어서는 그 죄의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없는 분이 대신 죽어야 만족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세상 사람은 누구나 모두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을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첫 크리스마스의 감격입니다.

    빌립보서 2:5절 이하에 보면, 그는 하나님이시나 하늘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죽기 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여 의를 이루어 우리는 그 분의 의의 옷을 덧입고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의롭다고 인정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칭의 (稱義 justification) 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순종하여 이룩한  의의 효과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 시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6 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그에게 전가하고 그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 <이중전가 double imputation) 이라고 합니다.  <예수> 란 말 자체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라는 의미로 구약의 여호수아의 의미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수아 와 예수를 모두 <예수아? 라고 발음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이끌어 갔듯,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인 것처럼  예수님은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월절의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그의 백성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구약 신명기 21:22에서 예언하신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가 잡히시던 날 밤, 즉,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감란산으로 들어가 밤늦게 까지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열 두제자 중 가롯사람 유다는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았고, 주님은 체포되어 가야바의 법정에서 유대나라의 법에도 없는 야간 재판을 받으셨으며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에게는 사형권이 없는 고로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인도하여 사형 선고내리기를 간청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으나 아무런 내란 혐의를 찾지 못하여  유대인에게 넘기기로 결정합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무지한 로마 군인들의 손에 매를 맞고 십자가의 중한 고통을 당하시며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값을 지불 완료했다> 는 헬라어의 <tetelestai> 라는 동사 입니다. 완료형이므로 <이미 죄에 대한 형벌이 완료되었으며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지불했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켰으며 그 결과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헬라어의 동사는 시제 (tense) 에 따라서 분명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II. 주님의 부활
   성경은 고린도전서 15:3-4에서 <그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 나셨다> 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18세기 19세기를 풍미했던 구라파의 합리주의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오늘에도 그들의 후예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인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즉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는 자이건 불신자이건 부인하지 못할 12가지의 엄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12가지를 설명해 봅시다.
   1. 예수님은 십자가로 인하여 문자 그대로 죽으셨다는 것
   2.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었다는 것
   3.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무서워서 숨어서 떨었다는 것
   4. 예수님의 무덤은 죽은지 사흘 만에 비어 있었다는 것.
   5. 많은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고, 같이 먹고 마셨고, 같이 대화했다는 것
   6. 예수님의 부활 후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하게,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       샜다는 사실
   7. 초대교회의 설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는 것
   8. 특히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다는 것
   9.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에 기초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
  10. 예수님의 부활직후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변했다는 것.
  11. 야고보나 유다 같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이 부활한 후 예수를 믿었다는 것
  12.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바울이 된것.

이상 모든 일들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들로서 성경만이 아니라 세상문헌도 증거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음으로 설명하는 분도 있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명서 허구를 입증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처음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지 않고 기절했다는 학설입니다. Gresham Machen 박사가 저술한 (Origin of Paul's Religion,바울종교의 기원 이나 Virgin Birth of Christ,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 두 권의 명저에는 이런 사실들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Herman Paulus 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고 기절했다고 하였으나 David Strauss 는 그 학설을 반박합니다. David Strauss 는 사람들이 환상을 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Schleiermacher가 반박하여 그 학설도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Herman Reimarus 는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학설은 Albert Schweitzer 가 반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서로 서로가 서로의 학설을 비방하고 나서서 요즘은 이런 학설을 믿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성경적인 설명이 정확무오하고 성경적인 설명만이 가장 정확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모습대로 무덤에 들어 가셨고, 육신으로 부활하였으며 (not spiritual but physical resurrection)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힙을 얻어 나가서 순교하기 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숨어서 떨던 제자들의 용기가 어디서 난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요한을 제외하고 모두 하나같이 전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도마도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여 인도의 남부 Madras 라는 곳에서 순교하여 그곳에 큰 교회가 세워졌음을 지금도 인도를 방문하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창에 허리를 찔리고, 손발에 못을 박히우고 심장이 파열되어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시던 대로, 그리고 자신이 말씀 하시던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시어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신비적으로 연합된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고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의에 대해 삽니다.

III. 부활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
   주님의 고난과 부활은 모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성경대로 장사한지 삼 일만에 부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뀌였습니다.  창세기 2장과 출애급기 20장에서는 6일간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였고 에7일에 쉬셨으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하지만 신명기 5:15절에 가보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강하신 손으로 애급 땅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 냈으므로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애급은 구원 얻지 못한 죄악의 상태를 말하고, 광야는 현세를 말하고, 가나안은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적 애급에서 건져 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나가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담대히 나가서 전합시다.  사도행전 1장11절에 보면 그 주님은  멀지 않아 하늘에 들리어 올라가시던 그 모습 그대로 영광의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오십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오십니다.  그 날은 땅속에 잠자던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건 불신자인건 모두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는 날입니다. 그 날이 속히 닥아 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우리 성도들의 소망의 날입니다. 우리들의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그가  이 땅에 재림하는 날 우리 몸이 들리어 올라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같이 영원을 사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사랑을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고 그를 위해 다시 한번 신앙을 다짐합시다. 성경적인 신앙 말입니다. 주님은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육적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무덤에 들어갔던 대로 육신으로 부활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두 손의 못자국을 의심 많은 도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바울의 신학의 정수는 바로 <주님의 고난과 부활> 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합시다. 다시는 죄 지을 마음 버리고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신 요한복음 11:25-26 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부활신앙을 널리 전하면서 부활신앙으로 남은 여생을 살아 가시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롬 8:18).       - 주님과 고난과 부활, 끝-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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