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여러가지 이야기

2005. 12. 29. 00:11일반자료/1.일반자료

돈(money)
누구나 남녀노소 없이 좋아하는 것 때로는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이 돈이다.
지배자보다는 노예가 된 자가 훨씬 많으며, 화폐는 종류가 다양하다.
쌀, 보리, 밀, 등의 곡식화폐 즉 '곡화'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지금도 쓰이고 있는 화폐이고,
전지구 상에 쓰이는 가장 넓게 쓰이는 화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화폐로 쓰인 것은 소금이다.
AD 1세기까지 쓰인 것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쓰였으며, 로마군인에 지급된 급료이기도 하다.
그래서 월급 받는 사람(salaried man)의 어원을 살피면 소금인 salt에서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봉급이 원래 짠 이유가 소금의 본성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많이 받는 사람이나 적게 받는 사람은 말할 것 없이 월급 받는 사람은 다 짜다라고 하는가 보다.
중앙아메리카의 원주민(아즈텍족과 마야족)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도 화폐로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콩이 사용 되였는데, 가짜 카카오콩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고 한다.
담배가 화폐로 쓰인 적이 있는데, 미국산 담배 이름에 '버지니아'가 있다.
원래 영국인들이 일찍이 '메인플라워'호 배를 타고 미국을 오기 전에 담배를 경작하고 있었다.
(약1600년경)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하였다.
이 시기에 인디언 주장의 딸 '혼다'양은 결혼 할 때 추장이 준 선물에 담배 모종이었다.
이 이야기는
[담배]이야기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식민지인의 시대에는 담배가 화폐로 쓰였고, 인디언들은 '완품'이라는 조개껍질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담배는 또 2차 대전 중에는 유럽과 기타 지역서 화폐로 쓰인 적이 있으며,
우리나라서도 병자호란시 잡혀간 식구를 찾으러 갈 때도 담배를 지고 가서 찾아 왔다고 한다.
또 지금처럼 청동화폐는 그리스와 로마서 쓰였는데 데나리온 이라는 단위를 썼다.
이것을 coin(코인)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는 살아있을 때에 자신의 얼굴을 금화 코인에 새겨 넣은 최초의 인물이다.



<로마청동화(코인)의 인물은 네로 황제이며,
뒤 면의 S.C는 원로원 인가(sentus consulto)의
약자이다.>
알렉산더도 자기 초상화를 넣은 Coin을 세계화폐로 사용하였다.
또 그 지역에 따라 특산물이 화폐로 쓰였으니 중국은 차, 몽고나 유목 민족은 가축이나 가죽을,
에스키모인은 낚시이다.
화폐는 너무 다양하고 종류도 많다.
가축은 영어의 형용사 '피쿠니어리(pecuniary:금전적인 뜻)'는 라틴(로마)어 페쿠스(pecus:가축)이
어원이 되었다.
특이한 것은 미크로 네시아인 이 쓰던 'Stone money'돌 화폐이다.
단위는 ''라고 한다. 얍 (Yap)섬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 섬에서 나오는 돌을 화폐로 쓰는데,
직경이 5m나 되는 돌 돈도 있다.
돌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한자리에 두고 돌 주인이 물건을 살려고 하면,
돌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매매는 이루어진 것이다.
돌을 훔쳐가도 소용이 없다.
많은 사람이 돌 주인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
가장 큰 화폐는 바다 속에 있다고 한다.
그 돌을 만들려고 많은 인부를 데리고 이웃 섬에 갔는데, 운반 도중 너무 무거워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그돌은 바다 속에 있으나 주민 전체가 인정하기 때문에 바다 속에서 화폐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멀로네시아 인들은 자기 섬에 없는 조개를 화폐로 사용하였다.
2차 대전 때 조개 섬을 일본이 점령하고 있어, 조개를 구하지 못하여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조개를 화폐를 구폐라 하여 많은 민족이 사용하였으며, 조개 무덤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멀로네시아의 피지 원주민은 고래이빨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화폐, 얍섬의 돌 화폐 >
또 캐나다는 화폐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하여 화폐를 만들지 못하여 외국서 수입한 트럼프에 금액을 적고
직인을 찍어 돈으로 사용하였다.
위조도 없을 뿐 아니라 질겨 오래 쓸 수 있었으며, 화폐기능을 충분히 하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화폐를 잘 만드는 나라에 속하지만 한 때는 영국에서 찍어 오기도 하였다.
또 일본은 화폐의 단위를 문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신발을 얼마 전 까지만 해도 m/m으로 표기하지
않고 '문'수로 나타내었다. 이것은 돈의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4cm가 좀 안 된다고 한다.
일본 것은 너무 위조가 많아 위조하지 못하는 중국 돈이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1차 대전 후 에는 독일이 화폐가치가 떨어저 아이들은 장난감 대신 돈다발을 가지고 놀았다고 하며,
또 물건을 사기위하여 손수례에 돈을 싣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그 시대에 달러로 지불하고 식사를 하면 식사중에 인플레이션이(화폐가치가 뛰어)되어,
한그릇 더 먹을 수가 있어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보석은 화폐대용으로 지금도 환영받는 곳은 전쟁과 사회가 불안한 곳이다.
보석은 본래는 평화로운 곳에는 장식용으로 쓰이고 화폐의 가치는 없으나,
전쟁이 심한 유럽인에게는 이동과 재산보관이 용이한 것으로, 보석을 애용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유익함과 상관없이 별 쓸모도 없는 것이 값비싼 대우를 받게된 동기다.
투명하고 무색일수록 값비싼 것이라나....

<드라크마 은화>

(2) 돈 어원과 단위
돈(Money) 어원은 여신주노(juno Moneta)이름 모네타(Monet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BC 269 년 로마인이 그녀의 사원에서 최초 주화인 동전(coin)을 만든 것이 유래이다.
돈 단위는 무게와 모양 또는 사람이름에서 주로 왔다. [
헤라 참조]

1. 무게(pensum)에서 온 단위
파운드(pound-£): 영국
마르크(mark-DM):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페소(peso): 필리핀,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멕시코, 쿠바이고 페소는 스페인어로 무게을 뜻 한다.
리라(lira): 이탈리아
드라크마(drachma): 그리스 '움켜쥔다' 뜻으로 한 손에 움켜쥘 수는 화살 수만큼의 가치를 뜻한다.
1 드라크마(한 닢)는 밀 알 67개의 무게와 동일한 은(銀)의 가치를 말한다.
BC500 경 최초의 국제 통화로 지중해, 중동, 이스라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까지 이 화폐로 통용되어
국제교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드라크마는 성경(눅 15:8)에 잃어버린 돈의 예화에 나온다. 지금의 돈 약 16 센트이다.
디나르(Dinar): 쿠웨이트, 바레인, 요르단, 등의회교권 나라의 화폐 단위 로 또는 디람 이라고도
하나 어원은 드라크마에서 왔다.


한국은 화폐를 '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엽전 1냥을 10돈쭝(돈중:錢重)이라고 하는데 왔다는 설과
'화폐는 돌고 돈다'에서 '돈'이 왔다는 설이 있다. 한 돈 쭝은 약 3.7301g이며 1 근은 16냥으로 약600g이다.
또 엽전이라는 어원은 주조 때 여러 개를 한꺼번에 만들려면 주화마다 주물이 들어가도록 통로가 생기는데
이 통로에도 주물로 채워져 다 굳은 후에 주화를 틀에서 빼내면 주화가 나무 가지에 달린 잎처럼 생긴데서
엽전이 왔다. 잎을 하나씩 떼어내어 가공하면 동전이 된다.


2. 모양이나 그림에서 온 것
크로나(krona):
덴마크, 노르웨이, 스웬덴 1551년 이후 발행된 영국 은화에 왕관(crown) 쓴 초상화
때문이다.
프랑(france): 프랑스 14세기 만든 금화에 프랑스 왕 'francorum'에서 유래한다.
엔(¥): 일본 주화의 모양이 원형, 타원형, 막대기형의 여러 가지 모양을 둥근(엔:圓) 모양
하나로 통일 한 것에서 유래 한다.

<이탈리아 화폐 '리라'
몬테쏘리 여사>

(3)달러 이야기

Dollar 독일 탈러(Thaler) 에서 유래 한다.
또 스페인 화폐 타롈이 미국의 돈 단위로 쓰이게 된 이유는 1775년 대륙 회의서 독립 전쟁 때에
군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채무증서(차용증) 쓸 때 자국 화폐가 없으므로 스페인 돈으로 갚기로 한데서
비롯된다. 정식 화폐 단위가 된 것은 1785년 대륙회의서 10진법으로 채택 되였다.
달러의 표시는 '$'로 하는데 동기가 두 가지가 설이 있다.
하나는 멕시코의 8리알 을 '|8|'로 표기 한 것이라는 설과 스페인 국왕의 문장에서 왔다는 설이다.
'S'자는 스페인의 'S' +'||'는 두 기둥의 뜻으로 이를 '헤라클레스 기둥'이라고 한다.
이 기둥은 헤라의 미움으로 12가지 어려운 노역을 받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스페인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이곳에 온 기념으로 헤라클레는 두개의 산을 만들었으며, 이름은 '칼폐'와 '아뷜라'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한 개의 산을 두개로 나누어 지브롤터 해협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지브롤터 해협의 양쪽 산을 '헤라클레스 기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달러를 화폐 단위를 쓰는 나라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홍콩 등이다.
(달란트)성경, 마 25:14- 30절에 달란트 비유가 나오며, 이는 돈의 단위으로 무게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1달란트는 금, 은, 동의 34.2Kg을 말하며, 약75 파운드이다.
금(金)1달란트(34.2Kg)는 약 40만 달러로 우리 나라 돈 약 5억에 해당한다.
신약에서는 금 1달란트는 약20.4Kg 무게로 일용자의 20년 임금이라고도 한다.
'달란트는 재능의 뜻'으로 사용된다. 탤런트(talent)의 어원은 여기서 왔다.

<미국의 달라>

(4) 옷 이야기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처음한 일이 부끄러움을 알고 옷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들의 옷은 나무 잎과 가죽 옷이었고 이 옷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나무 잎과 껍질로 만든 옷은 아마존 원주민 멀로네시아인이 현재까지도 입고 있다.
이 옷은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옷이다.
서양 그림 중에 자주 나오는 범종(절에 있는 종)같이 생긴 치마는 크게 부풀리기 위해 철사나 상아로
만들었으나, 이것들은 무거운데다가 휘어지면 부러지거나 원상이 잘 되지 않았다.
후에 고래수염으로 만든 것이 가볍고 탄력성이 있어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고래를 잡기 위해 우리나라 동해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
한국과 하와이 참조]
고래 잡이 선원들이 긴급 대피를 하거나 식량, 물 공급을 위해 문호개방을 우리나라에 강요하다가 일어난
사건 이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이다.
원인제공은 여자 치마 때문에 일어난 전쟁인 것이다.
또 이 치마가 아주 요긴하게 쓰인 것은 화장실이 없던 시절 간이변소 역할도 했다고 한다.
남자는 길거리에 외투를 빌려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신세를 져야 만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를 보면 스칼렛의 코르셋을 채워주는 뚱뚱하고 힘센 하녀가 나오는데 힘센
하녀는 부유층 귀부인이라면 누구나 데리고 있었으며, 코르셋의 최고 기술자는 기술보다 힘이었다고 한다.
때로는 코르셋이 갈비뼈를 눌러 사망하는 이도 있었다.
물의 도시 베니스(베네치아)에서는 창녀의 표시로 젖가슴이 나오는 옷을 입었으며,
이것은 여자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여 동성연애자를 없애는 방도로도 이용되었다.
이집트의 귀족은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며, 평민과 노예는 노동하기 때문에 옷을 입었다.
옷은 신분, 직업 등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치와 소비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팬츠는 중세기 때는 일반인은 입지 않았고, 무용수, 창 닦는 여인, 몸매 나쁜 여자만 특별히 입었다.
잠옷도 없어 알몸으로 방석 위에 시트 덮고 자루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남자 팬티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두 일본 여성의 노력 덕분이다.
남자팬티의 앞 구멍이 이중으로 되기 전에는 한 겹에 단추를 달아 사용하였다.
막 시집온 새색시가 남편의 팬티를 다루다가 단추를 보고 불현듯 생각난 것은
'급할 때는? 단추를 모르고 못 잠그면?' 상상하여보았다.
그 불편함을 해결하려고 몰두하였으나 좋은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입구가 이중으로 만들어진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두 겹으로 만들어 포개지도록 만들었다.
남편은 편리할 뿐만 아니라 가격도 같은 가격으로 만들 수 있어 그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집안에서
생산시설을 갖추어 2년만에 전 일본의 남자팬티 시장을 장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범종 모양의 옷>
또 '마이크로팬티'라는 삼각팬티는 탄생시킨 사람은 나이가 50의 중반이 넘은 '사쿠라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라고 한다.
그는 무릎까지 닿는 반바지를 입은 손자가 뛰어 노는데 불편할 뿐 아니라 겉옷을 입히는데 불편함이 있었다.
그분이 속옷이라는 것은 중요한 부분만 가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간단하게 '데드론'으로 만든 자루에 두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팬티가 삼각팬티의 원조가 되었으며, 이것이 대 히트를 하자 계속하여 '유니크 팬티'와 '타이스팬티'
그리고 '유아용 아톰팬티'까지 만들었다.
이 제품들은 '도요레이온'이라는 회사를 통하여 대량생산되었고,
여사는 연간 30만 엔을 받는 기술고문이 되었다.
그리고 남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비키니와 미니스커트는 다리를 노출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사회적
관념 때문에 아주 늦게 등장하였다.
비키니의 등장은 1946년 파리 모리토르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 대회에서 자동차 기술자 출신의
'루이 레아드'가 만든 수영복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리었으며, 배꼽이 나온 수영복이었다.
이 수영복을 입을 여성이 없어 카바레 스트립 댄서가 입고 출전하였다.
레아드는 상표등록을 하였으나 교황청의 부도덕하다고 비난하여 카톨릭 나라인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법으로 금지시켰으며 또 이 수영복을 입으려는 여성이 없었다.
60년 들어 '브라이언 헤이랜드'가 비키니를 주제로 한 노래가 히트하였고,
히피 문화가 퍼지면서 비키니가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64년부터는 가슴 가리개 부분이 없이 노출이 더 심한 '모노비키니'까지 등장하여 보편화되었다.
미니스커트는 가수 윤복희씨가 국내에 첫 소개하였으며, 그 옷을 만든 사람은 영국의 'M.퀸트'여사이다.
1960년 M.퀸트여사는 새로운 의상을 선보이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여사는 남성의 심리를 적용하여 아찔할 정도로 스릴 있는 짧은 스커트를 만들어 다리곡선과 엉덩이를
부각시키는 미니스커트를 과감하게 만들었다.
예상대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항의가 빗발쳤으나 그것도 폭발적인 인기에 묻히고 말았다.
미니스커트는 급속도로 영국과 전세계를 유행하게 되었다.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영국정부도 거대한 수출의 공로를 인정하여 'M.퀸트'여사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미니스커트는 경기침체기에 유독 잘 팔리는 상품이라고 하며, 70년대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는 경찰이
거리에서 단속하였다.
그리고 옷의 혁명 중에 지퍼를 빼놓을 수는 없다.
지퍼의 발명은 옷에 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시카고에 사는 직공 'W.L.저드슨'이라는 젊은이는 뚱뚱하여 허리를 숙여 군화 끈을 맨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1893년 저드슨은 회사를 그만두고 군화 끈을 쉽게 매려고 연구하여 지퍼를 발명하였으나 의복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1912년 양복점을 운영하던 C.쿤 모스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지퍼를 고안하게 되었다.
지퍼라는 이름은 1923년 B.F.굿리치(Goodrich Co.)에서 덧신에 단 이동 잠금쇠에 사용하면서부터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는 방수가 가능한 평면 지퍼와 지퍼의 고리를 들어야만 지퍼가 움직이는 안전 지퍼 등이 생산 된다.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은
미니스커트>

(5) 청바지 이야기
185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어 '골든러시 (golden rush)'가 일어났다.
지금도 '골든러시'라는 용어는 '사람이 많이 덤비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금을 찾아다니던 광부들은 금이 들어 있는 돌을 찾으면 주머니에 넣게 되었으며,
공구와 돌을 넣어도 터지지 않는 튼튼한 옷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부들의 요구에 헤비스트라우스(리바이스)는 텐트를 만드는 천으로 옷을 만들었다.
이것이 '리바이스' 청바지의 기원이다.
청색 깔이 된 것은, 광부들이 사막에 다닐 때 독사들이 위험의 대상이었다.
이 독사들이 싫어하는 '인디고'라 하는 청색의 자연염색 원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비행기 기내에서 우리 나라 재래식 인디고를 만드는 과정을 방영하는 것을 여러번 본적이 있다.
두꺼운 천막 천에 '인디고'로 염색을 한 것이 지금의 '청바지'가 되었다.
그리고 옷과 주머니는 공구나 돌을 넣어도 터지지 않도록 구리나 알루미늄으로 리벳트 하였다.
지금의 청바지도 금속이 많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진(Jeans)이라는 이름은 천이 제노바에서 많이 수입되었는데,
'제노'(Genes)가 영어 발음이 진(Jeans)이다.
유럽에서는 여자들이 바지를 입으면 벌금형을 받았는데,
미국여성들이 청바지를 입고 유럽여행이 많아지면서 자연이 폐지되었다.

<청바지>

(6)
화장실 이야기
프랑스 사람들은 좋은 건물에 냄새나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하여 화장실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요강 사용이 당시의 문화로 베르사유궁전이 그 대표이다.
루이 14세 동생의 부인이 하노버 선제후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면
'저는 기분 좋게 큰일을 볼 수가 없어요. 큰일을 보고 있으면 남자도, 여자도, 처녀도, 총각도, 수도사들도,
스위스 병사도 모두보고 지나갑니다.
이는...큰일을 보지 않고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라고 적고 있다.
월드컵 때도 파리에 화장실이 없어 고생도 하였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으며,
상제리제 거리가 있는 개선문 지하통로는 오줌 냄새로 유명하며, 필자도 지린내가 기억난다.
변소가 없어 선남선녀가 정원의 아무 곳이나 용변을 보았다.
보다 못한 정원사는 여기는 안되겠다 싶은 장소에 '에티켓'이라는 팻말을 써 붙였다.
'에티켓'이라는 뜻은 대변금지의 뜻으로 변만 잘 가리면 에티켓(예의)을 잘 지켰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방에 널린 것이 대변이여서 가장 적게 피해를 입기 위해 '하이힐'라는 신발이 생겼다고 한다.
하루밤 사이에 요강에 일을 보고 모아 두었던 것을 길에 버렸기 때문에 가끔 봉변을 당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남자는 두꺼운 외투와 목 사이로 오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중절모 모양의 모자를 쓰고 건물 쪽으로
걸었고, 여자는 바깥쪽으로 걷는 습관이 되기도 하였다.
영국에서는 인분을 모아 밤에 강에 버렸는데 이 사람을 '나이트 맨'이라고 불렀다.
베르사유 궁전 둿뜰 정원은 남녀가 서로 함께 일을 보는 장소가 되었다.
또 냄새가 독하여 이를 없애기 위해 향수가 발달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요강문화가 발달하였고, 요강은 숙녀의 필수품이 되었다.
요강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나 글을 썼다고 하는데, 주로 애인의 눈을 크게 뜬 그림이나
'청결하게 하여 주면 내가 본 것을 말하지 않을게요' 등의 글이다.
왕이 손가락으로 탁탁 소리를 내면 요강보이가 달려왔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손가락으로 탁탁 치며 웨이터를 부르는 것을 싫어하여 실례가 된다.
일본 막부가 변을 볼 때에 자세는 개구리 뛰는 자세를 취하면 부하 한 사람은 부채를 들고
냄새가 앞으로 오지 않게 부치었으며, 뒤처리는 목숨을 맡길만한 가장 신임하는 장군이 뒤처리를 했는데
이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으며, 서양에서도 동일하였다.
루이14세는 엉터리 주치 치과의사가 이빨을 다 뽑아버려 만성 소화불량에 걸려 의전 행사도 요강 위에서
할 정도였다. 뒤처리는 귀족 중에 가장 신임 받는 귀족이 하였으며, 가장 큰 영광의 자리였다고 한다.
유럽에는 화장실이 귀족과 일반인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레이디스 룸(Ladies Room)'은
귀족이 사용하하였다. 처칠이 총리가 된 후 부인의 제 1성은 '나도 레이디스 룸을 사용해도 되네요'라고 할
정도로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초기 기차에는 변소가 없었다.
일본은 기차에서 방귀를 뀌면 5엔, 소변을 볼 경우 10엔, 대변은 천 엔의 벌금을 내고 급한 일을 해결했다.
1886년부터 기차에도 변소를 설치했는데, 승객들이 정차 시에 볼 일을 보아야 하는 줄 알고 정차때를
기다렸다가 볼 일을 보기 때문에 이것을 계몽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기차가 출발 한 후에 일을 보세요'라는 계도글을 대문짝만하게 써 놓아야만 하였다.

<베르사유궁전에 변소가
없는 것을
풍자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