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목사 1.시대적 상황 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보호 조약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한민족은 일대 위기를 느꼈다. 이러한 와중에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에서부터 대부흥운동의 불길을 붙였다. 이 부흥운동은 사경회라는 성경공부를 특징으로 했으며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동반했다. 이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길선주 등 초창기 한국목사들이었다. 그 이전까지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던 한국교회 강단은 그 이후 점점 한국 설교자들에 의해 메꾸어져 갔다. 1907년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받게 된 한민족은 감당키 어려운 정치, 경제,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목사들이 소망의 메시지를 직접 선포하게 됐던 것이다. 1919년 한국 기독교의 전폭적인 참여로 3.1운동을 시작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한민족은 심각한 좌절에 빠졌으며 한국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처럼 참담한 상황에서 한국교회 강단은 신앙의 내면화와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20년대 한국교회 강단은 영혼의 안식과 내세의 소망을 중시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1920년대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주도한 대표인물로는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를 꼽을 수 있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길선주 목사(1869-1935)의 제1기와 김익두 목사(1874-1950)의 제2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사역은 1911년 목사안수와 함께 시작되어 1920년대에 절정에 달했고 1950년 10월14일로 끝이났다. 그의 사역은 1919년 3.1운동과 1920년대 이후 신사참배 강요 속에서 진행었다. 김익두 목사는 3.1운동 이후 팽배했던 패배주의적 민족심리를 깨뜨리면서 한민족과 한국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신앙의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1920년대 들어 파급되기 시작한 새 사상적 흐름과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운 시대적 예언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경제적 빈곤층에 기독교 신앙의 생명줄을 공급한 참 목자였다.
2.김익두 목사의 생애 김익두는 1874년 11월3일 항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웅선과 모친 전익선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다음 해에 부친까지 여의게 되자 그는 술과 기생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깡패로 악명을 떨쳤다. 1900년 26세에 친구와 아내의 권유로 "영생"이라는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입교하였다. 그 이후 신약성경을 100독하고 1901년 7월 소안련(W. Swallon)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07년 3월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3회로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시절에도 성경읽기와 기도에 힘썼다. 동기생들이 농촌봉사 활동을 갔을 때 김익두는 산 속에 들어가 40일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는 1911년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뒤 신천서북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해 신유은사 체험을 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그이 부흥사역은 192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의 부흥회에서는 놀라운 신유역사가 나타났으며 회개역사도 동반되었다. 그는 수 많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만들었고 수 많은 교회들도 세웠다. 1920년 제9회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에서 그는 총회장으로 뽑혔다. 그 이후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수차례 경찰서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42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그는 약 1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43년 신의주 제일교회 부흥회 설교후 일본경찰은 김익두 목사와 교인들을 신의주 신사로 강제연행하여 신사 앞에 세운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일본경찰은 한국교계의 신사참배를 유도하기 위해 김익두 목사의 신사참배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김익두 목사를 시기하던 사람들도 이 거짓사실을 확산시켰다. 해방후 북한 공산당은 한국교회를 공산당의 선전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기독교도 연맹을 결성했다. 1946년 11월 공산당은 기독교도 연맹의 세력확장을 위해 당시 기독교계 원로였던 김익두 목사를 강제로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시켰다. 1949년에는 김익두 목사를 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이 된 이후 김익두 목사는 교회강단에서 숙식을 하면서 기도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50년 10월14일 국군의 진격을 감사하는 새벽 기도회를 드린 후 후퇴하던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다. 3.부흥활동 애초 김익두 목사는 위대한 성자에게만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는 현대에는 기적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는 말씀에 갑자기 확신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의 신유능력을 믿었으며 애써 기도하다가 신유체험을 했다. 그 이후 그는 신유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인도한 부흥회는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776회에 달했다. 그가 한 설교는 2만8천여회, 그로 인해 신설된 교회는 150여개, 그의 집회시 병나은 사람은 1만여명, 그의 설교로 감화받아 목사된 사람은 200여명을 각각 기록했다. 김익두 목사는 신비로운 능력에 힘입어 예수 십자가와 그 보혈, 회개와 천국, 부활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의 설교시에는 격렬한 죄사함의 경험이 나타났고 신유은사도 동반됐다. 이러한 역사는 그의 말씀읽기와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는 신유와 권능의 부흥사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목회자로서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역에서 신유와 이적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1923년 임택권 등 황해노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장로교 정치헌장 3장 1조의 문구("금일에는 이적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 수정안을 총회에 제출했다. 임택권, 장홍범, 유만섭 등은 이적증명회를 만들고 김익두 목사의 이적사실들을 망라해 1921년 7월 [이적 증명서]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 부흥운동은 대단한 인기와 아울러 강한 반발도 불러 일으켰다. 황해노회는 정치헌장 3장 1조의 수정안을 부결시켰고 여타 힘있는 노회들도 김익두 목사의 신유활동에 대해 반발했다. 1926년 5월 김익두 목사가 임시목사로 시무중이던 남문밖 교회에서 일부 신진세력은 김익두 목사 배척운동을 벌였다. 반대세력은 교회를 비우고 전국에 부흥운동을 다닌다는 것, 성경해석의 우매성, 성경해석의 교양결여, 여러 비판으로 인한 목사로서의 명예실추, 미신적인 신앙, 현대과학에 관한 무지, 거친 언어구사 등을 배척이유로 들었다. 1926년 5월21일 전라북도의 좌익계 존북민중 동지연맹과 이리청년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고등무당'이라며 6명의 연사들을 통해 비판대회를 열기도 했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김익두 목사의 신유이적에 대해 "영계를 팔려는 것"이라고 혹평했다. 4.김익두 목사의 설교 초기 한국교회사의 설교사를 크게 3등분하여 1884-1907년:선교사들의 설교기 1907-1929:초기 한국인 주역들이 설교기 1930-1945년:희년시대의 설교기로 나누어서 주성훈, "한국교회 설교사의 유형론적 연구," 박사학위논문(트리니티 신학대학원, 1990.11), 26면. 소안련(W. Swallon)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함으로 신자가 된다. 그는 자기 회심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나는 예수를 맏은지 2개월만에 확실히 성령을 받았다. 나는 눈물속에서 얼마동안 통회의 생활을 했다. 드디어 나는 완전히 세상과 작별하게 되었고 전에 좋아하던 것과 시원히 결별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남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생기게 되었다. 김익두, "성령의 세례," 한국설교대전집 제1권(박문출판사, 1974), 44면. 주성훈, 앞의 논문, 49면에서 재인용.
그의 멧세지는 묵시록적 기독교 신앙을 강조함으로서 1919년 이후 엄청나게 도전하여 오는 국내적 시련에 있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한 설교자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마포삼열박사전기](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육부, 1973), 415면. 주성훈, 앞의 논문, 49면에서 재인용.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시대에 이러한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뜻은 그 무삼 뜻이뇨 이러한 큰일은 거연히 보이실 리치는 만무하고 반드시 깊이가 잇는 줄로 아노라 생각건대 지금이 어떤 시대이뇨 .작년 3월1일 만세 또는 환란과 흉년으로 인하여 굼는쟈도 만히 잇느냐 이러한 곤고와 궁핍으 환란을 당한 이 불샹한 신쟈들은 뉘가 무엇으로 위로하며 그맛음을 굿게하랴. 이는 하느님께서 그 이적을 보이신 까닭의 하나이니......너의 신자들아 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심이로다" 위의 책, 412면. 주성훈, 49면에서 재인용. 그가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면 만여명씩 설교를 들으러 인파가 모여 들었다. 집회를 할 때에는 10일 동안 금식을 한채로 부흥회를 인도하여도 힘이 넘쳐났다고 한다. 신유의 멧세지가 그의 중심 설교였으며 이런 은사와 함께 한국인들에게 큰위로와 힘을 주는 설교였다. 일제시대의 기독교의 저한이 보수 신앙의묵시 사상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서 김익두의 설교와 사역은 장로교의 신앙과 설교에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사건이라는 것이다. 주성훈 50면. 또 김익두 목사는 애국사상이 투철한 목사였다. 김익두 목사는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11월 14일 토요일 새벽설교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여러분 사랑하는 교우여 이렇게 기뿌고 즐거우며 하나님께 감사 할 때가 언제 이겠습니까?우리들이 오랫동안 고생하며 힘써 기도하뎐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축복하시니 우리 국군과 유엔군들은 얼마 안되어 해주를 지나 신처까지 북진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이승만 대통령이 영도하는 평화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찬양부르며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하고 만세를 세 번 부르는데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인민군들이 들어와 강대상에 있는 김목사를 성가대석에서 총살시켰다. 이태선,[불의 사자 김익두 목사](보이스사,1993), 168-170면. 김익두 목사는 그가 가진 부흥회 집회수가 대략 776회, 설교회수2만 8천회, 교회 신축이 150처, 그의 감화로 목사가된 이가 200명이나 된다. 일제의 압박기에 국민가 함께 살아가는 능력있는 신유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지막까지 힘있게 증거한 설교자였다. 주성훈, 52면.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창원군 웅천에서 1921년 김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새벽기도회에서 성려을 받으라는 설교를 듣고 죄책감을 느껴 1921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후에 목사가되어 일제에 항거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까지 하였다. 김재준목사도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동의 파장은 실로 놀라웠으며 만하은 사라마들이 그의 설교를 통하여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사람-200여명, 전도하여 믿고 목사가 된 사람-58명
김익두 목사와 그의 설교 김익두의 설교는 불같은 열정을 가진 설교였다.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든지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통해 서 주기철 목사가 은혜를 받았으며 특히 전재선 목사와 이성봉 목사가 그이 부흥운동의 후계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주니의 사역을 시작한지 반세기 동안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시베리아, 일본까지 그이 발길을 옮겨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고, 150개처의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2만 8천여회의 설교에 그야말로 이땅의 구명사업에 최선봉에 섰던 것이었다. 정성구,[한국교회 설교사](총신대학출판부,1995),157면. 그는 우선 설교의 방향을 결정해두고 , 그방향에 따라 설교 내용을 채우고 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 부활, 천국 들이었고 회개의 설교를 외친 것이었다. 그러면서틈틈히 잘못된 인습을 고쳐야 할 것을 설교했다 그리고, 비 기독교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 불신앙적인 관행, 무당, 서물숭배등 비복음적인 요소를 과감히 지적하는 설교를 하였다. 특히 미신타파를 위한 그의 설교는 익살과 유모어가 풍부한 것으로서 스스로 그 흉을 내며 미신의 무가치한 점과 미개한 점을 지적하였으며, 미신 숭배를 위한 백성들의 무지, 남비, 지나친 열심 등을 파헤치고 민도를 끌어 오리려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교인의 의무에 대한 강력하게 역설했는 데 즉, 세례교인이 교회운영의 기본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과 일반교인이 십일조를 정하고 주님 앞에 빠짐없이 심일조 연보를 하도록 설교하고 [그것이 축복받는 길이요]라고 했다. 김 익두 목사의 설교의 말투는 날카롭고 예민해서 청중들의 깊은데를 건드리는 예가 많았으나 그것이 사람들을 감동케하며 주님의 수난, 십자가와 부활을 말할때면 온청중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어떤때는 원고없이 강단에 서서 외치는데 청산유수격으로 열번을 토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긴박감을 갖고 숨을 몰아쉬게 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 열배 이상의 기도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날카롭고 좌우에 날선 검]을 주님께 로 받기를 힘썼다고 한다. 정성구 158면. 그가 접촉한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일찍이 접근하지 못했던 빈곤과 병고 무뢰의 소외층이었다. 김익두는 이들 계층 특유의 사회적 미덕, 다시 말하면 겸손, 양보, 가난, 정서적 소박성, 이러한 행태를 찬양하면서, 부에의 경원과 현질서의 종말을 심판으로 외쳤던 것이다. 그의 천년 왕국적 종말론은 현실의 죄악성 단죄 때문에 가난과 멸시의 소외층에게 환영받았고 그의 언어형태와 구성 역시 이들과의 동질성 공감 때문에 그호소의 통로가 넙ㄹ고 따라서 수용적이었다. 더구나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속에 내재하는 성령의 강림의 체험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악속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기존 사회의 신분제에의 저항 의식을 민경배,401면. 김익두 메시지는 내세 지향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대중들의 공감을 일으키는 요소가 됐다. 아마도 그것은 일제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찌들고 허탈에 빠진 민족에게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셈이었다. 그러나, 내세지향적인 것은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낳기도 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의 중요한 제목들은 그가 늘 부흥회 때마다 외쳤던 1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예컨대 <서로 사랑하라 > <성신을 받으라><주일을 거룩되이 지키자> ,<기도> <십자가의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신자의 즐거움><여약한 것을 면하고 신령해지자><좁은 문으로들어가라> <근신><깨달음 > <순종>등이 있다. 정성구 159면. 김익두 목사의 성령관 김익두의 (성신을 받으라(행1;1-12)는 설교에서 우리는 그의 성령론을 엿볼 수 잇다. 그의 설교에는 성령을 받아야만 완전한 교인이 되는 것이다. 성령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별하고 있다. 성령 세례는 불이나 비들기가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의본질적인 변화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또한 깨끗하게 씻는 것을 의미한다. 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의 죄를 씻는 것이 성령의 세례란 것이다 몸에 열기가 없는 이가죽은 것처럼 불이 없는 교화는 죽은 교회이며, 개인도 잘못된 설령운동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이른바 잘못된 성령운도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성령운동을 극복하는길은 성경을 읽고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정성구 160면. " 불세례를 이상하게 해석하는 이가 있습니다. 요새보니까 어떤이는 [나는 기도하다 불을 보았다]합니다. 이것 다 성경에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성신이 지금 하늘에서 나려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이 세상에 이미 와 있어서 우리 마음 문만 열면 들어 올려고 무리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김익두, "성령을 받으라," [김익두 목사 설교 및 약전집](혜문사,1969), 46면. 그는 여기서 성령운동을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의 사람들처럼 현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을 거부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그이설교를 통해서 슬픔과 죄절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이 민족에게 구언의 소망과 확시을 주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의 중심은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 주님의부활, 천국에 갈자는 회개 등 순수한 복음을 증거했고, 암매한 군중울 일으키고 깨우쳤다. 정성구 162면. 김익두의 부흥기 "가슴을 칼로찢는 "것과 같은 성령의 내적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 그는 1901년 재령을 거쳐 신천교회에 시무하면서부터 불같은 성령의 임재, 기적의 신유를 가져오는 부흥 목사로 등장했다. 1919년 심각한 민족적 좌절의 아픔, 몰려드는 세속 문명의 도덕적 황잡, 신선한 기풍으로 휩쓸려 넘친 사회주의의 무신론적 투쟁 감각, 여기 신앙의 동요는 격류에 휩쓸리는 듯 걷잡을수 없었다. 그 날에 김익두는 저 지평선에 거인처럼 선 것이다.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특한 사명을 지고 나선 한국교회 전환기의 인도자였다.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398면. 성신의 능력과 기도의 힘, 그리고 소박한 신앙 고생후엔 낙이라는 소식을 계속 전했다. 교육적 배경이 별로 없는 한 촌의 신앙인 김익두를 1919년 이후 사회 전환지에 보낸 신의 섭리와 경륜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민경배 400면.
김익두 목사의 신학 민경배 교수는 그의 신앙을 '복음주의적 경건의보수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통한 한국 초기 교회의 분위기와 형양 신학교의신학의 영향을 받은 김익두복사의 신앙양태는 성서의 권위에 대한 부동으 신앙, 예민한 죄의식과 회개, 개인의 인격적 신앙, 부흥회적 열정 교회 문답식 성서교육, 기독교인으로서의 헌신과 봉사, 시일조, 헌금, 강렬한 주체적 신앙 때문에 겪는 환란, 그리고 선교의 열정등이다. 기도의 강조로 나타난 하나니의 능력은 김익두 목사의 독특한 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하고 한다 김익두, "기도의 종교" [김익두 목사 설교 및 약전집](혜문사, 1969), 9-19면 참조. 그는 또한 한 '칠중의 좁은 문'이라는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7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네 번째문이 바로 기도의 문이라는 것이다. 김익두는 성령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성령에 대히 불의성령, 비둘기의 성령, 물의 성령, 바람의 성령, 기름의 성령으로 구 분하고 성령받은 것을 4가지 조목으로 설명한다. 김익두, "성령의 세례" [김익두 목사 설교 및 약전집](혜문사, 1969), 58-63면 참조. 첫째 일시적 감화, 둘째 외감 셋째 내감 넷째 성령의 충만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충만의 다섯가지 특징을 말하는데, 첫째는 이길수 없는 열심이고 ,두째는 이길수 없는 사랑이고, 세째는 넘치는 진리이며, 그리고 넷째는 넘치는 기쁨이며, 다섯째는 말할 수 없는 능력이다. 김익두,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 감동 여부" [김익두 목사 설교 및 약전집](혜문사, 1969), 51-57면. 그는 성령의임재에 대해서 간조하며 기독교가 타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 성령이라고 한다.성령세례와 성려의 임재 성령충만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성령받지 못한 교인은 교인이 아니라고 하고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완전한 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절대 무오성 김익두에 있어서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신자의 즐거움'이라는 설교에서 신자는 9가지의 즐거움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얻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김익두의 종말론은 천년왕국 종말론이다. 그는 말세를 강조하면서 현생활에서 건덕을 강조한다.김익두의 종말론은 현질서의 종말론을 외치고 천국의 도래를 희구하는 것이지만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현실의 토대위에선 종말론이다. 그의 설교'칠중의 좁은 문'이란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위해서는 일곱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데 일곱문 중에는 성결의 문이 있다. 이것은 현실에서의 거룩한 삶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내세지향적이었고 그의 종말론은 차세성을 배제한 것이라면 김익두에게서 사회개혁 정신을 찿기 어렵다. 그러나 민경배 교수는 김익두에게서 사회개혁적 정신의 비젼이 있다고 말한다. 김익두의 사회개혁 정신은 기도, 성령, 성경을 통한 하나님 신앙의 내적인 분출이다. 그것은 복음을 통한 사회개혁이요 종말론적인 사회개혁으로 연결된다.
2)김익두 목사의 신유적 부흥운동 김익두의 사역은 신유적 부흥운동으로 요약된다. 김익두는 1920년대에 대두된 新思想과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정통신앙을 고수하면서 하층민들에게 엄청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기도중심적 신유사역에서는 많은 기적이 동반된다. 따라서 그의 부흥사역은 전국의 776개 도시와 읍 소재지로 확산된다. 그의 집회에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모두 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부흥사역은 아래와 같이 4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①그의 부흥집회는 실로 대중적이다. 일제시대에 그의 집회처럼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경우는 없다. ②그의 집회는 새벽기도회, 아침 사경회, 오후 교리공부, 저녁 부흥회 등으로 짜여진다. ③그의 설교는 단순명쾌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설교 는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예수 보혈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④그의 부흥사역에 있어 신유는 가히 압권이다. 그는 거지들을 비롯한 하층민의 치유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교인들의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예배중 신유간증을 하게도 한다. 그의 이러한 부흥사역은 당시의 교회성장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병든 하층민을 소생시키는 그의 설교는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그의 메시지는 내세의 삶, 종말론적 천년왕국, 罪와 富에 대한 회개 등을 핵심내용으로 한다. 그의 성령은사적 부흥운동은 당시 형식주의 속에서 무력증에 빠진 기존교회를 각성시키게 된다. 그의 부흥운동은 기존교회의 불신앙을 무너뜨리고 당시 교인들에게 기도와 전도의 열정, 생동하고 승리하는 신앙심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그의 사역은 감성과 기적에 지우쳐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성적 측면은 일제 하의 한국교회가 발산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Young Hoon,Lee,"THE HOLY SPRIT MOVEMENT IN KOREA : ITS HISTORICAL AND DOCTRINAL DEVELOPMENT," (Ph.D. Dissertation,TEMPLE UNIVERSITY,1996), pp. 80-90. (2)김익두와 조용기 목사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조용기 목사의 신유사역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에 있어 신유사역은 핵심중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의 신유사역은 박태선의 감람나무교회가 이단으로 정죄돼 장로교단에서 축출된 뒤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채 홀대돼 버린 아쉬움이 있다. 조용기 목사의 성령운동은 한국사람들의 샤머니즘적 특성을 교회성장으로 분출시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경의 원리를 고수함으로써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실 치유사역에 있어 가장 큰 위험은 무분별하게 치유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샤머니즘적 경향성이다. 따라서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신유사역에서 샤머니즘적 영향을 배제하려고 노력하면서 치유의 성경적 원리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성경적이건, 비성경적이건 상관없이 치유자체에 매달리기 때문에 오순절 교회는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는 실로 대중적었는데 조용기 목사의 경우도 전국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이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단순명쾌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준 것으로 평가되는데 조용기 목사의 설교도 그림을 그리듯이 명쾌해 특히 하층민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다. 무엇보다 양자는 자기 시대의 병자들과 빈자들에게 신유사역과 희망의 복음을 베푼 점에서 일치한다. Young Hoon,Lee,"THE HOLY SPRIT MOVEMENT IN KOREA : ITS HISTORICAL AND DOCTRINAL DEVELOPMENT," (Ph.D. Dissertation,TEMPLE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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