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에 관한 논문
2005. 11. 12. 12:42ㆍ일반자료/1.일반자료
독서자료: 웃음과 희극의 이론 앙리 베르그손: 웃음. 희극의 의미에 관한 시론. Henri Bergson: 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Paris 1969 (1900). 김진성 옮김, 서울, 종로서적 1997 (초판: 1983). (발췌, 요약, 윤문 - 임한순) 차례 머리말 - i 제 1장 희극성 일반에 관하여 제 2장 상황의 희극성과 언어의 희극성 제 3장 성격의 희극성 23판의 부록, 참고문헌, 옮긴 이의 말 ------------------------- 제1장 희극성 일반에 관하여 - 형태의 희극성과 운동의 희극성 - 희극성의 확산력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스꽝스러운 것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릿광대가 짓는 찌푸린 얼굴, 말장난, 통속희극에서의 오해, 정교한 코미디의 장면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증류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가지각색의 수많은 희극물이 그들의 역겨운 냄새나 섬세한 방향(芳香)을 얻게 되는, 언제나 동일한 본질을 획득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 작은 문제에 도전했으나, 이것은 이러한 노력들 사이에서 언제나 형태를 감추고 빠져나가다가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철학적 사변에 던져진 맹랑한 도전이다. [...] I 여기 우리가 주의를 환기하고자 하는 첫번째 요점이 있으니,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을 떠나서는 희극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원은 아름답거나, 우아하거나, 장엄하거나, 특징이 없거나 또는 보기 흉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스꽝스러울 수는 없다. 사람은 어떤 동물에 관해 웃음을 터뜨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동물에서 인간의 태도나 인간적인 표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자를 보고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사람이 놀려대는 것은 펠트나 밀짚 조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에 부여한 형태이며 그것이 형상화하고 있는 인간적인 변덕이다. [...] 이제 이에 못지 않게 마땅히 주목해야 할 징표로서, 웃음에 일상적으로 수반하는 무감동(insensibilité)에 주의를 환기하자. 희극적인 것은 아주 평온하고, 잘 조화된 영혼의 표면에 닿을 때에만 그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듯하다. 돈담무심(頓淡無心)은 그의 자연적인 장소이다. 웃음은 감동보다 더 큰 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말은 우리에게 예컨대 연민이나 나아가서는 애착까지 불러일으키는 사람에 관해 웃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몇 분 동안만이라도 이 애착을 잊어버리고 연민을 침묵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순순히 지성만으로 성립한 사회에 있어서는 아마도 사람은 더 이상 울지 않으리라. 그러나 어쩌면 여전히 웃음은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극도로 민감하여 인생에 완전히 일치하여 세상의 모든 일이 감정적인 공감에로 연결되는 사람은 웃음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 희극성은 결국 그 모든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심정의 일시적인 무감각 상태와 유사한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순수한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다만 이 지성은 다른 사람들의 지성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의하고자 하는 세 번째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과 유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한, 우스운 것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웃음은 남들의 반향을 필요로 하고 있는 듯하다. 웃음소리를 잘 들어 보라. 그것은 분절되고, 분명하고, 종결을 짓는 음성이 아니다. 그것은 점점 반향을 일으키며 연장되기를 원하는 것, 마치 산중의 천둥소리처럼 파열음으로 시작하여 북소리의 연속적인 타격음(打擊音)처럼 한없이 이어나갈 듯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이 반향은 무한히 나아가지는 않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큰 범위 안에서 진행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우리들의 웃음이란 언제나 어떤 한 집단의 웃음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열차나 음식점의 식탁에서 다른 여행객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마음놓고 웃어대는 것을 보면, 그 이야기가 그들에겐 우스운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 당신이 그들과 같은 일행이었다면 그들처럼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까닭에 당신은 웃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데, 어떤 사람 혼자서만 울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교구 소속이 아닌 걸요." 이 사람이 눈물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웃음에 관해서는 더욱 들어맞는 것이 되리라. 사람들은 웃음이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웃음이란, 실제적이거나 또는 상상적이거나 같이 웃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 말하자면 공범의식 같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극장에서 관객의 웃음은 장내가 만원일수록 더 커진다는 것은 누누이 이야기된 바가 아닌가? 다른 한편, 희극적 효과를 지닌 많은 것들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질 수 없으며, 결국 일정한 사회의 관습과 관념과 상호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수없이 지적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까지 사람들이 웃음거리를 정신이 즐기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고, 웃음 자체에서 여타의 인간 활동과 아무 관계없는 기이하고 유리된 현상을 발견한 것은 이 두 가지 사실이 지니는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희극을 "지적인 대조"니 "감각적 부조리" 니 등등, 관점들 사이에서 파악된 추상적 관계로 돌려버리려고 하는 정의들이 유래한다. 이러한 정의들은 비록 우스운 것의 모든 형태에 실제로 적용된다 해도, 왜 우스운 것이 우리를 웃기게 하는가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설명해 주지 못할 것이다. 결국 다른 모든 논리적 관계가 우리의 신체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데 반해, 무슨 연유로 웃음이 지닌 이 특수한 논리적 관계는,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자마자, 우리의 신체를 수축하고 확장하고 뒤흔들어 놓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러한 측면이 아니다.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웃음을 사회라고 하는 그의 본래적 영역에 다시 위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웃음이 지니고 있는 유용한 기능을 결정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회적 기능이다. 웃음은 공동의 삶의 어떤 필요에 대답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웃음은 진정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위에서 행한 세 가지 예비 고찰이 수렴하는 점을 분명히 해 두기로 하자. 웃음은 집단의 성원들이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그들의 감성을 침묵시키고 다만 지성을 행사할 때 나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의가 향해야 할 특수한 사항은 무엇인가? 이때 지성은 무엇에 작용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답하는 것은 이미 문제에 한층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이전에 몇 가지 예를 들어야만 한다. II 한 사나이가 길거리를 달리다가 비틀거리더니 쓰러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을 생각이 들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웃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본의 아니게 주저앉았다는 사실을 보고 웃는 것이다. 따라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태도의 급작스런 변화가 아니라, 이 변화에 본의 아닌 것이 있다는 것, 즉 실수인 것이다. 어쩌면 돌멩이가 하나 길 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걸음걸이의 속도를 바꾸거나 장애물을 비켜났어야 했다. 상황이 다른 조치를 요구했음에도 근육은 같은 운동을 계속했다. 유연성의 부족으로, 혹은 잠시 정신을 팔다가, 또는 몸의 경직성 때문에, 요컨대 신체의 둔화나 이미 지닌 속도의 결과로 그런 것이다. 이것이 그 사람이 넘어진 이유이며 행인들이 웃음을 터뜨린 까닭이다. 이제 수학적인 규칙성을 가지고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다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들이 짓궂은 장난꾼에 의해 바꿔치기 당했다. 그 사람은 잉크병에 펜을 찍으나 진흙덩이를 끄집어내고, 튼튼한 의자에 앉는다고 믿고 자리에 앉다가 방바닥에 벌렁 나자빠지고, 결국 언제나 이미 몸에 밴 속도 때문에 엉뚱하게 행동하거나 헛되이 움직인다. 이것은 습관이 행위에의 기제를 몸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행위를 중단하거나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천만에, 그는 기계적으로 곧이곧대로 행위를 계속했다. 따라서 사무실에서의 짓궂은 장난의 희생자는 길거리에서 뛰어가다 나동그라진 사람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동일한 이유로 우스꽝스럽다. 두 경우에 있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 깊은 적응성과 민첩한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계적인 경화(硬化)이다. 이 두 경우에서 유일한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는 제 스스로 일어난 데 반하여 후자는 인위적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앞의 경우에 행인은 오직 구경했을 따름이며, 뒤의 경우에는 짓궂은 장난꾼이 실험한 것이다. 어쨌든 이 두 경우에 각각 결과를 가져온 것은 외적인 상황이다. 따라서 웃음거리는 우발적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람의 표층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어떻게 웃음거리가 내부로 파고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경직성이 드러나도록 상황의 우연성이나 사람의 장난에 의한 장애가 불필요해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이 사람의 고유의 소질로부터, 자연스러운 작용을 통해 밖으로 표현되는 부단히 새로운 계기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마치 반주에 뒤처져서 부르는 노래처럼, 현재 그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막 수행한 일에 항상 몰두해 있는 사람을 가정해 보자. 감각과 지성이 선천적으로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어서,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 보고 듣고 지껄이는 사람, 결국 현재의 실재성에 대처해야 할 때 끊임없이 과거와 상상 속의 상황에 적응하는 사람의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이 경우에 웃음거리는 바로 그 사람 내부에 있을 것이다. 웃음거리의 모든 것, 즉 소재와 형식, 원인과 계기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 자신이다. 멍청히 얼이 빠져 있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희극 작가들의 재치를 한껏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일까?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까지 묘사한 인물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니까.) 라 브뤼에르도 그의 ꡔ성격론ꡕ에서 이런 인물을 다루었는데, 그는 분석을 통해 이러한 사람으로부터 희극적인 효과를 얼마든지 이끌어 낼 수 있는 처방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지나치게 남용했다. 그는 메날끄(Ménalque)에 관해 과도하게 중언부언(重言復言)하면서, 가장 길고도 정치(精緻)한 묘사를 했다. 아마도 주제의 용이함이 그를 너무 붙잡은 것이리라. 결국 방심은 아마도 웃음거리의 원천 자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 원천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일련의 사실과 생각들에 확실히 관계하고 있다. 그것은 웃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경향의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방심의 효과는 강화될 수 있다. 우리가 그 첫 번째 적용을 이제 막 찾아낸 일반율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으리라. 어떤 우스운 결과가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났을 때, 그 결과는 원인이 자연스럽게 생각될수록 더욱 우스꽝스러워진다. 단순한 사실로 제시된 방심상태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런데 이 방심상태는, 그것이 우리가 빤히 보는 가운데서 생겨나 발전해서, 우리가 그 기원을 알고 그 내력을 재구성할 수 있을수록 더 우스운 것이 된다. 정확한 예를 들자면, 연대 소설이나 기사도 소설을 평소 즐겨 읽는 사람을 가정해 보자. 그는 소설의 주인공들에 이끌리고 매혹되어 사고와 의지가 조금씩 그리로 쏠린 나머지, 마침내 몽유병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의 행동들은 얼빠진 상태에서 유래한다. 다만 이러한 얼빠진 상태는 잘 알려진 확실한 원인에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순수하고 단순한 방심이 아니다. 그것은 비록 상상적이긴 하지만 일정한 환경의 인물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도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저 멍하니 다른 데를 쳐다보고 가다 우물에 빠진 경우와 별을 열심히 쳐다보고 가다 우물에 빠진 경우는 다른 것이다. 돈키호테는 바로 하늘의 별을 보고 명상에 잠겼다. 이 낭만적이고 몽상적 정신이 추구한 별에는 얼마나 한없이 깊은 웃음의 요소가 깃들어 있는가! 그러나 웃음의 매체임이 분명한 방심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다면, 이 깊은 웃음의 요소도 가장 피상적인 웃음거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 이 몽상가, 이 과대망상자, 그리고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조리가 정연한 미친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사무실에서의 짓궂은 장난의 희생자나 거리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행인과 같이, 우리에게 동일한 감성의 현(絃)을 울리고, 동일한 내적인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 그들 역시 길거리에서 뛰어가다 넘어지는 사람이며, 사람들이 즐겨 속이는 순진한 자들이다. 다만 그들은 현실에 걸려 비틀거리는, 관념적으로 달리는 사람이며, 세상사가 짓궂게 그 허(虛)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순진한 몽상가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방심자들로서, 다른 방심상태의 사람들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월하다. 즉 그들의 방심은 하나의 핵심적 관념을 중심으로 체계화되고 유기화되어 있으며,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낭패 역시 막무가내의 정연한 논리에 아주 잘 연결되어 있다. [...] 그들은 이런 점에서 끊임없이 더해질 수 있는 결과를 통해 무한히 확산적인 웃음을 주위에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고정관념의 경직성이 정신에 대해 갖는 관계는 어떤 악덕이 성격에 대해 갖는 관계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천성(天性)의 짓궂은 비틀림이든 아니면 의지의 위축이든, 악덕은 많은 경우에 영혼의 왜곡에 흡사하다. 의심할 바 없이 세상에는 풍요한 잠재력을 지닌 채 깊이 물들어 있는 악덕들이 있다. 그러면 영혼은 이러한 악덕들을 불러 일으켜 한없는 변양(變樣)의 선풍(旋風)에로 몰고 간다.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비극적인 악덕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악덕은 이와는 달리 우리의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삽입되는 기성의 주형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의 경직성을 부여할 뿐 우리의 유연성을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악덕을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경직성이 우리를 단순하게 할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로 - 우리가 마지막 장에서 자세히 보여 주겠지만 - 코미디와 연극[비극]의 본질적 차이점이 존재한다. 연극은 설사 그것이 일정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열정이나 악덕을 묘사할 때에도 그것들을 아주 잘 주인공에 합치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들이 잊혀지고, 그러한 열정이나 악덕의 일반적 특성들이 소멸되므로 우리는 그것들 자체보다도 그것들을 구현하고 있는 주인공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연극의 제목이 고유 명사만을 취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와는 달리 많은 코미디들은 수전노, 노름꾼 등 보통 명사를 제목으로 가지고 있다.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예컨대 질투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극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면, 스가나렐(Sganarelle) 이나 조르쥬 당뎅(George Dandin)이 머리에 떠오르지 오델로(Othello)가 생각나지는 않을 것이다. 질투장이는 코미디의 제목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희극적인 악덕은 그것이 아무리 구체적인 인물에 내적으로 합일한다 해도 여전히 그의 독자적이고 단순한 존재를 보유하기 대문이다. 희극적 악덕은, 보이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중심 인물로 남아 있는 셈이다. 거기에 무대 위에 등장하는, 육신을 가진 구체적인 인물들이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간혹 이 희극적 악덕이 그 인력으로 주인공들을 끌어당기며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갖가지 상황을 연출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그는 주인공들을 마치 악기처럼 연주하고 인형처럼 멋대로 부린다. 이 점에 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희극 작가의 기교는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이 악덕을 아주 잘 깨닫게 해서, 우리를 그 악덕의 본성에 인도함으로써, 희극 작가가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줄을 함께 붙들게까지 하는 데 있다. 이쯤 되면 우리가 그 줄을 잡고 노는 셈이 된다. 우리가 희극에서 느끼는 재미의 일단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은 일종의 기계적 동작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 이 기계적 동작은 단순한 방심상태와 아주 유사한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희극적 인물은 일반적으로 그가 제 자신을 망각하는 만큼 희극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희극적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생동한다. 마치 지제스(Gygès) 의 반지를 역효과를 갖게 낀 것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에겐 환히 보이면서도 실상 제 자신은 스스로에게 보이지 않게 된다. 비극의 주인공은 우리가 그를 어떻게 판단하리라는 것을 잘 알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그가 우리에게 유발시키는 공포에 대해 아주 명확한 느낌을 갖고 있더라도 자신의 행동양식을 집요하게 고집할 것이다. 그러나 희극에 등장하는 얼간이는 스스로가 웃음거리가 된 줄 아는 순간,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자신을 교정하려고 애쓴다. 아르빠공(Harpagon)은 만약 우리가 그의 인색함을 보고 웃고 있는 줄 안다면, 자신의 인색함을 버리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인색함을 적게 드러내거나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려 할 것이다. 웃음이 "사악한 품성을 단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웃음은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언젠가는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바의 사람으로 자신을 보이게끔 곧바로 애쓰도록 한다. [...] 삶이나 사회가 우리들 각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재 상황의 우여곡절을 분간하는 끊임없이 각성된 주의, 나아가서 그러한 우여곡절에 적응케 하는 신체와 정신의 유연성이다. 긴장과 유연성, 이것이야말로 삶을 가능케 하는 상보적인 두 힘이다. 이것이 신체에 결여되면 각양각색의 사고, 불구, 병 등이 생긴다. 이 결핍이 정신에 작용하면, 각종 심리적 결함, 각종의 광기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성격에 관계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사회생활에의 심각한 부적응, 비참의 근원, 때로는 범죄의 계기가 될 것이다. 생존의 중대한 측면에 관계하는 이러한 결함이 제거되어야만 (이러한 결함은 흔히 사람들이 생존경쟁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사라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살 수 있으며, 특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이것 이상의 다른 것을 요구한다.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그저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는 잘 사는 것을 추구한다. 사회가 이 점에 있어서 염려하는 것은, 우리들 개개인이 삶의 본질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만족한 나머지 그 이외의 것은 이미 굳어버린 습관의 안이한 기계적 동작에 내맡기는 현상이다. 또 한 가지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좀더 정확하게 서로에게 적응하기 위해 그들의 의지 상호간의 좀더 섬세한 균형을 추구하지 않고, 이 균형의 기본조건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기존의 조화만으로는 사회생활에 충분하지 않다. 사회생활은 상호 적응의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성격이나 정신, 나아가서는 신체가 갖는 모든 경직성은 따라서 사회 속에서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비되고 고립되어 가는 행동, 즉 사회가 축으로 삼아 회전하는 공통의 중심으로부터 일탈하는 행동, 한 마디로 중심 이탈을 나타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이러한 행동에 의해 사실상 크게 위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물리적인 강압으로 이에 개입할 수 없다. 사회는 여기서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그러나 오직 징후로서 나타나는, 위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제스처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회는 그것에 다만 단순한 제스처로서 대응한다. 웃음이란 이러한 종류의 어떤 것, 일종의 사회적 제스처임에 틀림없다. 웃음은 그것이 일으키는 불안감으로 여러 종류의 중심이탈 작용을 제어하고, 자칫하면 유리되고 마비되기 쉬운 자잘한 우리의 일상적 행동들을 끊임없이 각성시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요컨대 사회질서의 표층에 기계적인 경직성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유순케 한다. 따라서 웃음은 순수미학의 소산이 아니다. 웃음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개선이라고 하는 유용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구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많은 구체적인 경우에 부도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은, 사회와 개인이 그들의 자기 보존의 염려에서 해방되어 자기 스스로를 예술작품처럼 대하는 순간 일어나기 때문에, 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여,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침해하고 그래서 그 결과로 당연히 제재를 받게 되는 일련의 행동과 성향의 한계를 상정해 보면, 감정과 투쟁의 영역 밖에, 사람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는 중성지대에, 모종의 신체적, 정신적, 성격적인 경직성이 있게 된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유연성과 최고의 사회성을 얻기 위해 이러한 경직성을 제거하려 한다. 이 경직성이 웃음거리이며, 남들의 웃음은 그것에 대한 징벌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공식에서 모든 웃음을 자아내는 효과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받으리라고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희극에 다른 어떠한 혼합물도 섞이지 않은 기본적이고 이론적인, 따라서 완전한 경우에 적용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웃음에 대한 모든 설명을 인도하는 시도동기(示導動機 leitmotiv)로 삼고자 한다. [...] 이것은 웬만큼 실력 있는 검객이 몸으로는 결투의 연속동작을 해나가면서 기본 검술학의 불연속적인 운동을 생각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제 우리가 재건하려고 하는 것은 희극적 형태의 계통 자체이다. [...] III 가장 간단한 예로부터 시작해 보자. 희극적인 얼굴은 무엇일까? [...] 정상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이 흉내 낼 수 있는 모든 기형은 희극적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곱사등이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경우가 아닐까? 그의 등은 볼썽 사나운 굽신거림이 몸에 밴 듯하다. 그리고 신체적 고질이 되어, 일종의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몸에 밴 이 습관 속에 매여 있는 듯하다. [...] 일정한 형태로 몸을 굽히려 했던, 말하자면 얼굴을 찡그리듯이 그의 몸뚱이를 찡그리려 했던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기계적 동작, 경직성, 몸에 배거나 일정 기간 보존되는 습관성, 이런 것들이 우리를 웃게 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이 한층 깊은 원인, 즉 단순한 표정이 갖는 기계적이고 물질적 경직성에 의해 정신이 완전히 홀리거나 최면에 빠진 것과 같은 어떤 심각한 얼빠진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고 믿어질 때, 웃음의 효과는 그 강도가 더욱 증가한다. 따라서 우리는 풍자화(caricature)가 갖는 희극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이란 그 생김생김이 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 윤곽이 아무리 잘 조화된 것으로 상상될 수 있다 해도, 그 움직임이 그렇게 유연할 수 없다 해도, 균형이 결코 절대적으로 완전하지는 않은 법이다. 얼굴에서 우리는 언제나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선의 치우침이나, 있음직한 찡그린 모습에 대한 어렴풋한 암시, 한 마디로 얼굴의 특성이 한층 더 잘 몰려 있는 듯이 보이는 기형성을 간파할 수 있다. 풍자화의 기술이란 때때로 눈에 띄지 않는 이 경향을 포착하여 확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델이 스스로 극한에까지 얼굴을 찡그릴 때 그렇게 될 것과 같은 형태로 인물의 표정을 왜곡시킨다. 풍자화의 기교는 용모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인 조화 밑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물질의 저항을 예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의 형태 안에서 희미한 윤곽의 상태로 틀림없이 있으나, 보다 높은 힘에 의해 저지 당해 그 형태를 드러내지 못했던 불균형과 왜곡을 구상화하는 것이다. [...] 상상력은 인간의 모든 형태 속에서 물질을 형상화하는, 무한히 부드럽고 영원히 동적인 영혼의 노력을 감지한다. 이러한 영혼은 대지가 끌어당기지 않기 때문에 인력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이 영혼은 천사의 약동을 그가 생명을 불어넣는 육체에 전달한다. 이렇게 해서 물질 속에 흐르는 비물질성이 바로 우리가 우아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완강해서 끝내 저항한다. 그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이 우월한 원리의 활동성을 자기에게로 잡아끌며 자기의 타성에로 역전시키고, 기계주의에로 전락시키려 꾀한다. 물질은 신체의 슬기롭게 다양한 운동을 미련스럽게 판에 박힌 주형으로 고정시키고, 얼굴의 생동적인 표정들을 불변하는 왜곡된 형태로 응고시키려 한다. 살아 있는 이상형과의 접촉을 통해 우리의 전인격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을 물질은 끝내 저지한다. 마치 어떤 기계적인 작동에 매인, 물질성 속에 사로잡혀 가라앉은 듯한 태도를 물질은 우리에게 각인하려 한다. 이처럼 영혼의 생명성을 외형적으로 둔화시키고 그 운동성을 고정시켜 결국 영혼의 우아함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게 되면, 물질은 신체에서 희극적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러니까 대비에 의해 정의해 본다면, 희극적인 것의 반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우아함일 것이다. 희극적인 것은 추함이라기보다 오히려 완고함이다. IV 이제 형태에 있어서의 희극으로부터 몸짓이나 운동에 있어서의 희극으로 넘어가 보자. 우선 이러한 종류의 희극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법칙을 말한다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고찰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이끌어 낼 수 있다. 신체의 태도나 몸짓, 동작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기계적인 것을 연상케 하는 정도에 정비례해서 우스꽝스럽다. [...] 아주 간단히 이 법칙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코믹 만화가의 작품을 좀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오직 그림 자체만을 생각한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그림에 몰두한다면, 그림은 일반적으로 얼마나 또렷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사람을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여기게끔 하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우스꽝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암시가 선명하도록, 한 인물의 내면 속에 있는 기계장치(mécanisme)를 분해해 내어 마치 투명유리를 통해 보듯이,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느끼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또한 암시가 지극히 교묘해서 팔, 다리 할 것 없이 신체의 각 부분이 기계장치의 부분들로 경화되게끔 표현된 인물 전체가,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의 이미지와 기계적인 사람의 이미지가 한층 완벽하게 서로 용해되어 있을수록, 희극적 효과는 그만큼 인상적이고 만화가의 기교는 완벽해진다. [...] 예컨대 연설가의 몸짓은 말과 자웅을 겨루는 듯하다. 마치 웅변을 선망하는 듯이 몸짓은 연설자의 생각을 뒤쫓으며 통역자의 역할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생각은 매순간 변해야만 한다. 변화하기를 멈춘다는 것은 살기를 그만두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짓도 생각처럼 생명에 가득 차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몸짓은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는 생명의 근본법칙을 받아들여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똑같은 팔이나 다리의 운동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그것을 눈치채고 은근히 재미를 느껴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내가 예상하던 그 순간에 그런 몸짓이 어김없이 일어난다면, 나는 무의식중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왜 웃을까? 그것은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장치를 그 순간 보게 되기 때문이다. [...] [...] 빠스깔이 그의 ꡔ명상록 Penséesꡕ의 한 구절에서 제기한 사소한 의문은 쉽게 풀린다. “서로 닮은 두 얼굴은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특별히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 않는데, 함께 있으면 그 유사성으로 웃음을 일으킨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연설가의 몸짓은, 그 각각은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으나 반복하면 웃음을 자아낸다.” 참으로 살아 있는 생명에는 반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과 완전히 유사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것 배후에서 어떤 기계적인 것이 숨어 작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 기계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파악하기가 한층 더 어려운 모습들, 즉 단순히 몸짓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 의해 암시되는 모습들을 우리는 예감할 수 있다. 희극의 일상적인 기교들, 그러니까 어떤 대사나 장면의 주기적 반복, 배역의 대칭적 전환, 희극적 오해의 기하학적 전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기법들은 그 희극적 효과를 같은 원천에서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사에서 눈에 띄게 기계적인 작동을 제시하되 그럴 듯하게 보이는 외관, 생명의 명백한 유연성을 거기에 부여하는 것이 아마도 통속희극 작가의 기교일 것이다. [...] V [...] 생명 현상에 심어진 기계적인 것 (Du mecanique plaque sur du vivant),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십자표지요, 여러 방향으로 상상력을 전개시키는 중심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여러 방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방향을 본다. [...] 1. 희극적인 것은 생명 현상에 끼어 든 기계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견해는 우선 생명의 운동성에 붙여진 어떤 종류의 어색함이라는 - 생명의 선을 어색하게 따르지만 그 유연함을 저해하는 - 한층 막연한 이미지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의복이 얼마나 쉽게 우스꽝스러워지는지를 예감할 수 있다. [...] [...] 기계적으로 꾸밈질을 당한 자연,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희극적인 주제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여기에 갖가지 변양들을 적용해 틀림없이 우스꽝스러운 효과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 [제롬(Jerome K. Jerome)의 ꡔ진기한 이야기들(Novel Notes)ꡕ:] 한 늙은 성주의 부인에게 자선사업의 일들이 너무 성가시고 못마땅하다. 그래서 그녀는 선량한 사람들을 무신론자와 술주정뱅이로 급조하여 성 주위에 배치하고는 개종시키거나 악습을 치유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다. 물론 이러한 주제를 먼 반향처럼 울려 전해 주는 희극적인 말들이 있다. 이 때 그 말이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든 가장된 것이든, 천진난만함이 가미되면 주제의 반주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천문학자 까시니가 월식을 관찰하는 데 초대했던 어느 부인이 늦게 도착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드까시니 씨는 저를 위해 다시 한 번 시작해 주시겠지요.” 또는 공디네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이 어느 마을에 도착해서는 주위에 사화산이 있음을 알고 소리친다. “이 마을 놈들은 화산을 갖고 있으면서 그걸 꺼져 버리도록 팽개쳐 두었단 말이지!” 사회의 경우로 옮겨가 보자. 사회 속에서, 그리고 사회에 의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사회를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가장하는 사회, 말하자면 사회적 꾸밈이라는 생각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이미지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살아 움직이는 사회의 표면에서 어떤 타성적인 것, 판에 박힌 듯이 상투적인 것, 요컨대 제정된 것을 감지하는 순간에 얻어진다. 이것 역시 일종의 경직성으로서, 삶의 내적인 유연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활에서 의식적(儀式的)인 측면은 언제나 잠재적인 희극성을 함축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백일하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회라는 신체와 의식(儀式) 사이의 관계는, 우리의 몸과 옷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엄숙한 의식이나 예식의 주제를 잊어버리는 순간,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 몇몇의 여행객이 소형 구명 보트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구조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구조에 용감하게 나섰던 세관원은 이렇게 첫 마디로 그들의 과제를 시작한다. “혹시 뭐 신고하실 것이 없습니까?” 열차 안에서 범죄가 일어난 다음, 한 국회의원이 장관에게 질의를 하면서 던진 다음과 같은 말에서, 비록 한층 더 미묘하긴 해도, 이와 유사한 관념이 발견된다. “살인자는 사람을 해치우고 나서 교통 법규를 위반하면서 플랫홈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자연에 삽입된 기계주의의 요소, 사회의 자동적인 규칙, 이것이 결국 우리의 분석이 도달한 재미있는 효과의 두 유형이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이제 이들을 함께 결합하고 그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일이 남아 있다. 이러한 결합의 결과는 명백히 자연의 법칙 자체에 대치되는 인위적인 규칙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심장은 왼쪽에 있고 간은 오른쪽에 있음을 관찰하라고 제롱뜨가 요구했을 때 스가나렐이 한 답변을 생각해 보자. “예, 예전에는 그랬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지요. 이제 우리는 의술을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적용하고 있답니다.” 우리는 또한 뿌르쏘냑을 진찰한 두 의사의 의논을 상기할 수 있다. “그 점에 관한 당신의 진단은 너무나 박식하고 훌륭한 것이어서, 환자가 히포콘드리 우울증의 증세로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환자가 그러하지 않다면, 당신 말이 탁월하고 추론이 옳다는 사실을 위해 환자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겠지요.” [...] 요약하자면, 우리 신체의 인위적인 기계화라는 관념에서 출발하여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대치라는 관념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결과가 점점 정교한 형태를 띠며 나타난다. [...] 2.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의 출발점은 살아 있는 것에 씌워진 기계적인 것이다. 이 경우 희극성은 어디에서 유래했던가? 그것은 생명체가 기계처럼 굳어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생명체는 [...] 완벽한 유연성, 항상 각성된 활동성을 지녀야 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성은 실제로는 신체보다 영혼에 고유한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불꽃 자체로서 더욱 우월한 원리에 의해 우리 속에 점화된 것으로,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듯 신체를 통해 지각된다. [...] 누군가가 우리의 관심을 신체의 물질성으로 향하게 한다고 가정해 보자. 다시 말하면, 신체가 [...] 도리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로 보인다고, 천상으로 상승하고픈 영혼을 땅에 잡아매는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보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영혼에 대한 신체의 관계는 조금 전에 얘기했던 몸에 대한 옷의 관계, 즉 살아 있는 에너지에 얹힌 타성적 물질로 바뀔 것이다. [...] 자체가 정신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신체적인 것으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건은 모두 희극적이다. 왜 사람들은 연설가가 연설의 가장 비장한 순간에 재채기를 하면 웃는가? [...] 독일의 어느 철학자에 의해 인용된 弔辭의 구절 - “그는 덕망 있고 살이 쪘었습니다.” - 이 지니는 희극성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 신체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러한 예들 속에서 암시되는 이미지이다. [...] [...] 신체에 대한 배려가 생기면 희극적 요소가 끼어 들 위험이 다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들은 뭘 마시지도, 먹지도, 몸을 따뜻이 하지도 않는다. [...] 이따금씩 심리학자적인 안목을 지녔던 나폴레옹은 사람이 어딘가에 주저앉는 사실만으로 비극은 희극으로 바뀐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군을 격파한] 예나 전투 후에 프러시아 여왕을 알현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마치 [꼬르네유의 대표작 비극 ꡔ르 시드ꡕ의 여주인공] 시멘느처럼 비극적인 어조로 나를 맞았다. [...] 결국 나는 그녀의 태도를 바꾸게 하기 위해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비극적인 장면을 이보다 더 잘 끊는 것은 없다. 사람은 앉고 나면 희극적으로 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제 영혼을 제압하는 신체라는 이미지를 확산하면 우리는 더욱 일반적인 관념을 얻을 수 있다. 본질을 능가하려는 형식, 글에 담긴 정신에게 트집을 잡는 외관적 표현. 코미디가 어떤 직업을 우습게 할 때 우리에게 암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마 이러한 생각이 아닐까? 코미디는 변호사나 재판관이나 의사로 하여금, 마치 건강이나 정의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의사나 변호사나 재판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이런 직업에 어울리는 모든 외적인 형식들은 철저히 준수되어야만 하는 것인 양 말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수단이 목적에, 형식이 본질에 대치되어, 직업이 공중(公衆)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공중이 직업을 위해 있게 된다. 형식에 대한 한결같은 염려, 규칙의 기계적인 적용은 이 때 일종의 직업적 자동주의를 산출해 낸다. 이것은 신체의 습관이 영혼에 부여해서 똑같이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낳은 기계적 동작과 유사하다. [...] [“우리의 의무는 오직 환자를 규칙에 따라 치료해야 하는 것이오.” [...] “규칙에 거슬러서 치유되느니 차라리 규칙에 따라 죽는 편이 낫지.” [...] “무슨 일이 일어나든 형식은 언제나 지켜야 합니다.”] [...] [...] 우리가 상호 접근시킨 두 이미지, 즉 일정한 형식 속에 고착되는 정신과 어떤 결점으로 굳어지는 신체 사이에는 분명히 본성적 유사성이 있다. [...] 3.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생명 현상에 심어진 기계적인 것이라는 중심 이미지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문제되는 생명체는 인간 존재, 즉 사람이었다. 기계적인 장치는 이와는 달리 사물이다. 따라서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것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사물로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계적인 것이라는 명확한 관념에서 사물 일반이라는 더욱 막연한 관념에로 나아가 보자. [...] 우리는 어떤 사람이 사물의 인상을 줄 때 웃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산초 판사가 침대 덮개에 엎어져서 마치 공처럼 공중에 내던져지는 것을 보고 웃는다. 사람들은 또 뮌히하우젠 남작이 대포알이 되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 [...] 당신은 피가로의 비꼬는 대사 속에서 같은 종류의 어떤 것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비록 여기서는 아마도 사물에 관한 이미지라기보다는 동물의 이미지를 암시하려는 것 같지만) “그는 어떤 사람이야? - 그는 미남이고, 몸이 뚱뚱하고, 작달막하고, 활기 찬 노인으로 은회색 머리칼에, 꾀바르고, 수염을 깨끗이 깎고, 무신경하지만 눈치도 보고, 꼬치꼬치 캐고, 잔소리 잘 하며, 투덜거리는 친구지.” [...] 이 모든 효과는 사람을 마치 사물에 불과한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예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라비슈의 연극에서 한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라비슈 작 ꡔ뻬리숑 씨의 여행ꡕ 주인공] 뻬리숑 씨는 열차의 객실에 오르면서 꾸러미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넷, 다섯, 여섯, 그리고 마누라 일곱, 우리 딸내미 여덟, 그리고 나까지 아홉.” 또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아버지가 자기 딸의 박식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는 이제까지 발생한 프랑스의 왕들 모두의 이름을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고 술술 외운다네.” 발생했던 이라는 표현은 왕들을 단순한 사물로 바꾸지는 않지만, 그들을 비인격적인 사건과 동류의 것으로 취급한다. 제2장 상황의 희극성과 언어의 희극성 우리에게 삶에 대한 환상과 기계적 배열에 관한 분명한 인상을 동시에 주는 모든 행동과 사건의 배치는 희극적이다. 1. 디아블로 말의 희극적인 반복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는데, 그 하나는 용수철처럼 풀어지는 억눌린 감정이며 다른 하나는 이 감정을 다시 억압하는 것을 즐기는 의도이다. 도린느가 오르공에게 자기 아내의 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오르공은 따르뛰프의 건강을 묻기 위해 그의 말을 끊임없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 때 “그런데 따르뛰프 씨는요?”하는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물음은 우리에게 튀어나오는 용수철의 느낌을 분명히 준다. 2. 꼭두각시놀이 3. 눈덩이 형태의 연속적 변화, 현상의 불가역성(irréversibilité), 그 자신에 폐쇄적인 계기의 완전한 개체성, 이런 것들이 생명체를 단순히 기계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하는 외적인 특성들이다. 이러한 특성들과 반대되는 것을 살펴보자. 우리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것들은 반복, 역전, 그리고 계기들 사이의 상호간섭이라고 할 수 있다. 1. 반복 2. 역전 [반전] 코미디는 그물을 놓았다가 자기 스스로 그 그물에 결려드는 사람을 자주 보여준다. 자신이 가한 박해에 희생되는 박해자나 기만당한 사기꾼의 이야기는 수많은 코미디의 소재이다. [중세 프랑스 익살극 주인공인] 변호사 빠뜰랭은 그의 손님에게 재판관을 속일 수 있는 계략을 일러준다. 그런데 손님은 이 술책을 변호사 비용을 안 내려고 사용한다. 어느 잔소리꾼 여편네가 남편에게 집안 일을 도맡아 하라고 강요하고는 해야 할 일거리 하나 하나의 목록을 작성했다. 여자가 큰 물통에 빠졌을 때 남편은 그녀를 끌어내 주려고 하지 않는다. 남편이 말하기를, “그건 ‘목록’에는 올라 있지 않은걸.” 근대 문학은 도둑맞은 도둑이라는 주제에 가지가지 색다른 변화를 가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역할의 전도, 그리고 상황을 만들어 낸 사람에게 거꾸로 작용하는 상황이 다루어지고 있다. [...] 3. [계기들의 상호간섭 - (우연의 일치)] 어떤 상황은 그것이 동시에 절대적으로 독립된 사건들의 두 계기에 속하면서 또한 아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언제나 희극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즉시 오해를 떠올릴 것이다. 오해란 실제로 동시에 서로 다른 두 의미를 함축하는 상황이다. [...] 연극적 오해는 하나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 동시적인 두 계기 대신에, 하나는 과거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적인 계기를 취할 수도 물론 있다. [...] 라비슈는 [...] 독립적인 계기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것들이 서로 간섭하게 하는 데 재미를 느낀다. 그는 폐쇄적인 어느 단체, 예컨대 혼인잔치를 소재로 삼은 후, 어떤 묘한 일치가 이 단체를 일시적으로 전혀 엉뚱한 상황에 빠뜨린다. 때로 그는 연극 전체를 통해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동일한 줄거리에 들어 있게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몇 사람이 비밀로 간직해야 할 어떤 것이 있고, 이것이 그들 사이를 서로 한패가 되게 해서, 결국은 연극의 본 코미디 안에서 조그만 코미디[= 극중극]를 연출하게 한다. 매순간 이 두 코미디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망쳐 버릴 듯하다가 다시 일이 풀려, 두 계기 사이의 일치가 회복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감추고 싶어하는 과거가 있다. 그런데 이 과거가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노출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럴 때마다, 과거가 틀림없이 뒤흔들어 놓을 것 같았던 현재 상황과 과거를 조화시키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 독립된 두 계기와 부분적인 일치를 발견한다. [...] II [언어적 희극성의 다양한 형식과 재치의 변양(變樣)] 1. 경직성이나 타성의 결과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무심결에 하는 것이 희극의 주된 원천의 하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방심은 본질적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 관용구의 틀에 부조리한 생각이 삽입되면 희극적인 말이 된다. 2. “어떤 사람의 정신적인 것이 문제될 때, 우리의 주의가 그 사람의 신체로 향하게 되면 웃음이 나오게 마련이다.” - 이것을 언어에 적용해 보자. 어떤 말이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음에도 고유의 의미로 알아들은 양 가장할 때, 희극적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 또는 우리의 주의가 은유의 실제적 측면에 기울어질 때 표현된 생각은 희극적인 것이 된다. [...] [얘야, 증권놀이는 아주 위험하단다. 하루는 벌고 그 다음날은 잃거든. - 그럼, 좋아요, 나는 이틀에 한 번씩만 할 거예요.] 제3장 성격의 희극성 사회 생활에 대한 경화(硬化), 경직성, 비 사회성 (= 희극적 인물의 결함) 악덕이 나의 감정을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 관객의 무감각) 인물의 비 사회성과 관객의 무감각이 결국 [희극성 또는 희극적 효과의] 두 가지 본질적 조건이 된다. 이들 두 가지에 내포되어 있으며 이제까지 우리의 분석이 이끌어내고자 목표로 삼은 세 번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동주의이다. [...]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희극적이다. 어떤 결점이나 또는 장점에서도, 희극적인 것은 한 인물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것, 즉 기계적인 동작이나 무의식적인 말이다. 모든 방심은 희극적이다. 그리고 방심이 지나칠수록 희극적 효과는 더욱 크다.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체계적인 방심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극적인 것이다. 만일 성격이란 말이 우리의 인격에 있어서 기성(旣成)적인 것, 우리 내부에 있는, 마치 시계태엽처럼 일단 감긴 후에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적 요인을 의미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성격은 희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 희극적 인물은 따라서 하나의 전형(type)이다. [...] 예술은 언제나 개별자를 지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가가 그의 화폭에 옮기는 것은, 그가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날 일정한 시간에 본 것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색깔을 지니고 있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리고 오직 그 자신의 것으로서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영혼의 상태이다. 극작가가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은 한 영혼의 삶의 역사, 감정이나 사건의 살아 있는 줄거리, 요컨대 오직 한 번 일어난 것으로서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우리가 이런 감정들에 일반적인 이름을 붙여 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다. 다른 영혼에게 그것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개체화되어 있다. 이 사실에 의해서만 그것은 예술에 속한다. [...] 어떤 감정이 일반적으로 참이라고 인정되더라도, 이로부터 그것이 일반적 감정이라는 사실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햄릿의 성격만큼 독특한 것도 없으리라. 설사 그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닮았다 해도, 그가 우리의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이 점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보편적으로 살아있는 성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오로지 그는 보편적으로 참된 것이다. 다른 예술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술품 하나하나는 독특한 것이지만, 만일 그것이 천재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왜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그것이 그 유(類)에서 유일한 것이라면, 무슨 근거로 그것이 참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의 참됨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게 보도록 요구하는 노력 자체에 의해서이다. [...] 예술가가 그것을 철두철미 진실로 보았다면, 베일을 벗기려고 한 그의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본받도록 한다. [...] 작품이 위대할수록 그 속에 엿보이는 진리는 그만큼 깊고, 그 효과는 더욱더 기대되며, 또한 그 효과는 그만큼 더욱 보편적인 것이 된다. [...] 코미디의 목적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보편성이 작품 자체에 들어 있다. 코미디는 우리가 이전에 만났고 앞으로도 살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될 성격들을 묘사한다. 그것은 유사성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형을 보여 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는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기까지 한다. [...] 유명한 코미디의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염세가, 수전노, 노름꾼, 얼빠진 친구 등은 모두 어떤 유를 지칭하는 이름들이다. 그리고 성격 코미디가 고유명사를 제목으로 갖고 있는 경우에도, 이 고유명사는 그 내용이 무게에 의해 금세 보통명사의 범주로 휩쓸려 들어간다. 우리는 “따르뛰프 같은 사람”[몰리에르]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페드르 같은 사람”[라신느]이니 “뽈리외뜨 같은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비극시인에게는 주인공 주위에 이 주인공의 단순화된 모조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차적 인물들을 등장시키려는 생각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그 유에 있어서 유일한 개체이다. 그를 모방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의식적이든 아니든 비극은 희극으로 바뀌게 된다. [...] 이와는 달리 희극시인이 중심인물을 구성할 때에는, 동일한 일반적 특징을 지닌 다른 인물을 등장시켜 주인공 주위에 마치 위성처럼 돌게 하려는 강력한 본능이 지배한다. [...] [비극과 코미디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전자는 개체에, 후자는 유형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II [...] 이 [희극적 성격의 근본] 혼합물은 허영이다. 아마도 이보다 더 피상적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마음속에 더 깊이 뿌리 박힌 결점은 없을 것이다. [...] 일정한 웃음의 효과를 지닌 아주 조야한 희극이 있다. 심리학자는 이것을 대비의 관점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바로 허영이라는 근원에 돌려야 할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 커다란 문을 지나가면서 고개를 숙인다. 한 쪽은 장대같이 크고 다른 쪽은 작달막한 두 친구가 서로 팔을 끼고 장중하게 걷는 모습 등이 이것이다. 두 번째 이미지를 좀더 가까이 고찰한다면, 아마도 키 작은 친구가 키 큰 친구를 향해 발돋움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치 황소만큼 커지려는 개구리처럼. [...] III [직업적 희극성, 직업적 무감각] [...] 불쌍한 죄인이 고문당하는 것을 어떻게 구경할 수 있느냐고 [라신느, ꡔ소송광들ꡕ의 주인공] 이자벨이 재판관 피에르 당뎅에게 묻는다. 이 때 그가 대답하는 말을 회상해 보자. “까짓 것! 의례 한 두 시간이면 되는걸.” 따르뛰프가 [家長인] 오르공의 입을 통해 한 말 역시 일종의 직업적 무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형제고, 자식이고, 어머니고, 아내고, 모두 죽게 놔 둬. 내가 이 이상 할 게 뭐람!” IV [부조리] [...] 돈키호테는 우리가 단순히 풍차를 보는 곳에서 거인을 발견한다. 이것은 희극적이며 부조리하다. 그러나 이것이 임의의 부조리인가? 이것은 상식의 아주 특수한 전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을 사물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관념에 맞추려고 하는 데서 생긴다. [...] 어떤 인물이 제 생각만을 뒤쫓아가서, 사람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그를 가로막는데도 막무가내로 의례 자기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 모든 희극적 인물은 결국 [...] 착각의 길 위에 있으며, 돈키호테는 희극적 부조리의 일반적 전형을 보여 준다. [...] 이러한 상식의 역전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 이것은 다분히 고정관념과 비슷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신착란이나 고정관념은 우리를 웃게 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병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웃음은 우리가 알다시피 감동과는 양립할 수 없다. [...] 희극적 부조리는 꿈의 부조리와 같은 종류이다. [...] [꿈에서] 정신은 제 스스로에 매혹되어 외계로부터 그의 상상력을 구상화할 수 있는 구실만을 찾는다. 잠을 잘 때에도 여전히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귀에 들리고, 색깔이 시각의 영역에서 배회한다. 한 마디로 감각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꿈꾸는 사람은 감각이 지각한 것을 자신이 더 좋아하는 회상에 실체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래서 벽난로로 불어오는 똑같은 바람 소리도 꿈꾸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 그의 상상력을 점유하고 있는 관념에 따라, 야수의 울부짖음이 되기도 하고 감미로운 노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꿈의 착각이 갖는 일상적 작용이다. [...] 꿈에서의 강박관념과 아주 유사한 희극적 강박관념도 있다. [...] 우리는 꿈 속에서 독특한 형태의 크레센도(점점 세게)나 꿈이 진행될수록 강조되는 기묘한 결과를 드물지 않게 만난다. 일단 이성의 길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두 번째 결과를 낳고, 그것이 다시 더 심각한 결과를 이끌어 내면서 마지막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 예컨대 [몰리에르의] ꡔ뿌르쏘냑 씨ꡕ에서는, 처음엔 거의 사리에 맞게 출발하지만 갈수록 온갖 종류의 해괴한 짓이 펼쳐진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ꡔ평민귀족ꡕ에서는 연극이 진전함에 따라 주인공들이 정신착란의 회오리바람에 이끌리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듯하다. “만일 더 철저히 미친 친구를 볼 수만 있다면, 로마에라도 가서 말하지.” 막이 내림을 알리는 이 말은 우리가 이제까지 쥬르뎅 씨와 함께 빠져 있던, 점점 더 기상천외로 펼쳐지던 꿈으로부터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 V [...] 이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서 무엇보다도 교정의 수단을 보았다. 일련의 희극적 효과를 취해 여기저기에서 지배적인 전형을 이끌어 내 보면, 중간에 해당하는 희극적 성격과 효과는 바로 전형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전형들은 사회에 대한 무례의 숱한 본보기임을 알 수 있다. 이 무례에 대해서 사회는 웃음으로 응수하는데, 그 웃음은 한층 더 심한 무례이다. 그러므로 웃음은 크게 관용적이지는 못하다. 그것은 차라리 악에게 악을 되돌려주는 격이다. [...] 희극적 인물은 흔히 우리가 우선 실제로 공감함으로써 맞아들이는 인물이다.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그의 위치에서 그의 몸짓이나 말이나 행위를 받아들인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서 어떤 우스꽝스러운 점을 재미있어 한다면,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가 우리와 함께 즐기기를 권유하는 셈이다. [...] 희극적 인물은 다소간 방심한 사람의 모습을 닮는다. 이 경우 지성의 방심보다는 의지의 방심이 더 문제되며, 결국 이것은 게으름이다. [...] 그는 유희를 하는 사람의 인상을 준다. 이 때에도 우리 마음에서 느끼지는 첫 충동은 게으름에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적어도 한 순간이나마 우리는 유희에 참여한다. 이것 역시 삶의 피곤함을 풀어 준다. 그러나 우리는 한 순간만 휴식을 취할 뿐이다. 희극의 인상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감은 아주 쉽게 사라지는 공감이다. [...] 웃음은 무엇보다도 교정이다. 창피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웃음은 그 대상에게 고통스러운 느낌을 주어야만 한다. 개인이 자신에게 허용했던 자유에 대해 사회는 웃음으로써 복수를 하는 것이다. [...] [...] 사회가 개선될수록, 사회는 그 구성원으로부터 더욱 큰 적응의 유연성을 이끌어내고, 그 기초에 있어 점점 더 잘 균형을 유지하며, 그 표면에 있는 상당한 양의 혼란 요소를 추방한다는 것을, 그리고 웃음은 이러한 파동의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이렇게 심연에서는 깊은 평화가 자리 잡고 있는 동안, 바다의 표면에서는 파도들이 쉴새없이 싸운다. 파도들은 서로 부딪치고 밀치면서 균형을 찾는다. 파도의 변하는 모습을 좇아 가볍고 유쾌한 하얀 물거품이 일어난다. 때때로 쫓기는 물결이 모래밭에 약간의 거품을 남겨놓기도 한다. 가까운 곳에서 노는 어린이가 다가와 한 줌의 거품을 모으려다가, 이내 손바닥에 물방울 몇 개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리라. 그러나 이 물방울은 그것을 몰고 온 파도의 그것보다 훨씬 짜고 씁쓸하다. 웃음은 이 물거품처럼 생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표층에 있는 가벼운 저항을 가리킨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이 동요의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것 역시 짠맛이 있고 또 거품을 일으킨다. 그것은 유쾌함 자체이다. 그러나 맛을 보기 위해 그것을 모으는 철학자는 그 소량 속에 때때로 쓴맛이 조금 섞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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