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발생
세계 4대 문명 발생지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황하강 유역의) 황하문명을 꼽는다.
인류가 본격적인 문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농경과 목축을 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의 생산성을
조절하며 이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4대 문명발생지의 공통적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큰 강 유역에서 발생하였다(큰 강의 정기적인 범람이 기름진 흙을 침잠시켜 농경에 도움을 주었다)
2. 이러한 강을 관리하기 위한 대규모의 치수(治水)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국가의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여 전제군주가
출현하였다.
3. 도시가 형성되고 문자가 발명되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
황하(黃河)
문명은 중국 황하 유역에서 형성된 문명이다. 황하는 중국 북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4000km나 흘러서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중국에서 둘째로 큰
강이다. 이 강 유역의 지층은 황토층으로서, 강물이 누렇게 혼탁하기 때문에 후세에 황하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처음에는 강의 대표 자격으로
단지 하(河)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67778:439:391:jpg) 황하에서 신석기 문명이 일어난 것은 BC 2300년경으로 양사오와 룽산이 가장 유명한 유적이다. 황하 문명은 BC 2000년경에 화북 지방은 물론 랴오둥
지방과 양쯔강 유역까지 확산되었고, 이어 청동기와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읍(국가)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삼황오제> 삼황오제는
황하 문명 초기의 지도자들인 3명의 황(皇)과 5명의 제(帝)를 말한다. 이중 5제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인정하는데 비해
3황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사료에 따라 3황과 5제의 구성원이 다르기도 하다)
3황: *
수인씨(燧人氏):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불을 얻고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 복희씨(伏犧氏):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을 가졌다고 한다)
그물을 발명하여 사람들에게 어획, 수렵 등과 예절을 가르쳤다 * 신농씨(神農氏):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졌다고 한다) 호미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경을 가르치고 시장을 세워 교역과 상업을 가르쳤다
5제: * 황제(黃帝):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 당시의
천자 신농씨에게 복종하지 않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을 물리치고 신농씨에 이은 천자가 되었다. (※황제를 3황의 한 명으로 보고 5제에 소호를 넣은
곳도 있다) * 전욱: (황제의 손자) * 제곡: (전욱의 아들) * 제요(帝堯): (제곡의 아들) 매우 어진 사람으로 가장 이상적인 천자였다. 자신의 친아들이
천자로서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천자 계승자를 일반인 중에서 구했다. * 우순(虞舜): 민간인 출신의 매우 덕망있는 사람으로 제요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제요와 우순을 고대 중국의 가장 이상적인 천자로 추앙하며 이 시대를 요순시대라 한다)
<하(河)나라> 큰 강
유역에서 발생한 다른 문명들도 그랬듯이 황하 유역의 큰 문제는 강의 범람의 문제였다. 그 때 우(禹)라는 사람이 황하의 치수(治水)에 평생을
바친 끝에 성공을 거두고 황하의 범람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우순의 왕위를 이어받고 하(河)나라를 세웠다 (BC 21세기경).
제요가 우순에게, 우순이 우에게
천자 자리를 넘겨주었듯이 혈연에 관계없이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이라 한다. 우왕도 어진 신하를 선택하여 왕위를 선양하려
하였으나 백성들이 왕자 계(啓)를 적임자로 추천하여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였고, 이때부터 왕위의 본격적인 세습이 시작되었다.
하나라는 17대 약 500년 가량 이어졌다.
<은(殷)나라> 하나라가 폭군이었던 걸왕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 지방
영주였던 탕(湯)이 걸왕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상(商)나라를 세웠다 (BC 16세기경). 이것이 훗날 은(殷)이라 부르는 나라이다.
은나라에서는 갑골문자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문자로 한자의 근원이 되었다. 은나라 조정은 전쟁 등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점을 쳐서 하늘의 뜻을 알아보았는데 이 때
사용한 것이 갑골이다. 갑골은 거북의 배껍질이나 소의 뼈를 뜻하는 말로 갑골 뒷면에 글씨를 기록하고 이것을 불로 지진 후 그 균열을 보고 하늘의
뜻을 해석하였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76834:259:300:jpg)
은나라는 제정 일치의 사회였으며 대형 분묘에서 나온 사치스러운 부장품과 순장된 유골들을 볼 때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뚜렷한 계급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주(周)나라>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은 매우 잔인한 폭군이었다.
이 때 서쪽 제후국의 하나였던 주(周)의 희발(姬發=武王)이
혁명을 일으켜 주왕을 물리치고 새로운 천자가 되었다 (BC 1100년경). 그는 수도를 현재의 산시 성 시안에 있는 호경에 정했다.
주나라는 원래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 때 크게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문왕이
사냥을 나가면서 점을 쳤더니 짐승이 아닌 사람이 잡힐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리고 사냥을 나가 위수라는 강가에 이르렀을 때 낚시질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문왕은 그 노인과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상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하고 군사(軍師)로 등용했다. 이 노인이 그
유명한 '강태공'이다. 본명은 여상(呂尙)으로 젊은 시절을 공부에 힘쓴 후 곧은 바늘로 매일 낚시질을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꿈을 이루었다는
유명한 고사이다. 태공망은 은나라를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무왕은 일찍이 은 왕조에 복속하고 있던 지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희씨 일족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제후로 삼았다. 태공망 여상에게도 제(齊)나라가 주어졌다. 무왕은 각 제후들로 그 땅의 지배를 상속하게 함으로써
주 왕실은 자기의 권위를 지탱한 것이다. 이것을 봉건제도라 하며,
천자가 중앙에서 천하를 직접 통치하는 군현(郡縣)제도와 구별한다. 이처럼 중국의 봉건제도는 종속적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쌍무적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유럽의 봉건제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인더스문명
인더스 문명은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 일어난 문명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도시문명이 생겨난 것은 BC 2500년경이었고 BC
1500년경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멸망할 때까지 약 1000년간 존속하였다. 인더스 문명을 만든 주민들은 오스트로아시아 계, 드라비다 계,
차이나티베트 계 등 여러 민족(어족)이었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38040:495:602:jpg)
인더스 문명은 큰 강 유역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농사가 잘 되었다. 기후가 따뜻하고, 큰 강을 끼고 있어 홍수
때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이 내려 오기 때문에 식량이 풍부하였다. 기후도 오늘날보다는 훨씬 습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 문명의
여러 도시들은 질서정연하게 계획된 도시들이었다. 이들 중 모헨조다로(Mohenjo
Daro)와 상류의 하라파(Harappa)가 가장 번영한 도시였다. 두 곳 모두 거대한 성채가 있는 언덕에 공중 목욕탕(종교행사를
앞두고 몸을 정결히 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듯하다), 회의장, 사원, 곡물창고 등 공공시설을 건립하고 언덕 아래 평지에는 시가지를 조성했다.
건물의 대부분은 구워낸 벽돌로 만들어졌다. 이들 도시에서는 상업이 발달했고 일찍부터 상형문자를 사용하는 등 상당히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도 인더스의 계획도시들의 특징이었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34245:400:260:jpg) (모헨조다로의 공중 목욕탕)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40158:240:234:gif) (하라파의 곡물 창고)
인더스는 메소포타미아와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인더스의 농경문화와 관개기술도
서아시아에서 전수된 듯하다.
소아시아와 동부 지중해 문명
히타이트(Hittites)는 BC 18세기에 아나톨리아
고원에 세워져 BC 12세기에 멸망한 인도유럽 어족의 나라로 철기를 최초로 오리엔트에 전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에게 해와 시리아 지방에 전했다.
페니키아(Phoenicia)는 지중해 동부 시리아 해안에 위치한 현재의 레바논 지방으로서
시돈, 티루스, 비블로스, 베리투스 등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BC 12세기경부터 지중해 무역에 종사하면서 연안지방에 식민시를 건설했는데 이들 중
대표적인 도시가 카르타고(Carthago)였다. 페니키아인들은
그리스에 항해, 조선기술, 문자 등을 전수해 주었다. 특히, 페니키아가 발명해낸 알파벳은 서양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17621:252:400:jpg) 헤브라이(Hebrai)는 셈 계의
유목민족으로서 BC 2000년경부터 시리아 남부의 팔레스타인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일부는 이집트에 이주했으나, 후에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정착하고 헤브라이 왕국을 건설했다. 헤브라이 왕국은 솔로몬 왕 때 (BC 10세기경) 전성기를
누렸으나, 얼마 후 이스라엘과 유대의 두 나라로 갈라졌다. 그 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정복되고 (BC 722) 유대는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되었다. (BC 586)
오리엔트의 다른 민족들이 대부분 다신교를 믿은 것과 달리 헤브라이인들의 종교는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유대교였다. (유대교는 후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헤브라이인의
역사는 이민족들에 의한 수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고 메시아(구세주)가 나타나서 그들에게 정치적 해방을 이루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의 문명을 통틀어
오리엔트 문명이라고 부른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현재 이라크 남쪽에 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반달 모양의 땅을 뜻한다. 메소포타미아는 개방된 자연적 여건 때문에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 달리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와 민족의 교체가
빈번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어느 문명보다도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이 크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07277:379:256:jpg)
BC 35세기경에 수메르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최초로 도시인 수메르(Sumer)를 건설하고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이룩했다. 이들은 BC 33세경에
쐐기문자(설형문자)의 근본이 되는 상형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역사시대를 개막하게 되었다. BC 3000년대 전반에는 우루크, 우르, 라가시
등의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들 도시국가에서는 왕과 신관 및 군인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급과 평민 및 노예 등의 피지배계급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하는
거대한 탑을 세웠다. 지구라트의 꼭대기는 신전으로 되어 있었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국왕의 사후 주거를 위해 만든 것처럼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지구라트를 신의 현세에서의 주거를 위해 만든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도 지구라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07354:480:285:jpg) (우르의 지구라트)
수메르의 문학은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우루크의
왕이었던 길가메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12개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 중심 주제는 삶과 죽음 또는 죽음의 가혹한 현실이다. 인간의 야수성과
신성·투쟁·우정·애정·욕망·모험 등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대홍수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BC
24세기에 셈 계의 아카드인이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를 정복하고 통일국가를 세웠으나 오래 지탱하지는 못했다. 이어서 BC 20세기 중엽에 시리아
방면에서 이주해온 셈 계의 아무르인이 바빌론(Babylon) 왕조를 세웠다. BC 18세기에
바빌론의 함무라비(Hammurabi) 왕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을 완성했다. 함무라비 왕은 큰 규모의
토목공사를 완성했고, 법률과 행정의 개혁과 종교 및 언어의 통일을 시행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특히, 고대 수메르의 고법을
집대성하여 완성한 함무라비 법전은 오리엔트 여러 나라의 입법의
모범이 되었다. 바빌로니아는 히타이트와 카사이트의 침입에 의해 멸망했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607607:190:480:jpg) (함무라비 법전: 282조로 되어 있고 아카드어로 기록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
이집트는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강 양쪽에 형성된 옥토 지대에서 일찍부터 관개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함족(Hamites)이 이 곳에 수십개의 노모스(Nomos: 도시국가)를 세웠고, BC 3000년경에 메네스가 통일 왕국을 수립하였다. 이것을
제 1왕조라 한다.
![](http://blog.empas.com/rinker1/image.php?i=589916:290:493:jpg)
제 3왕조 시대에 국왕(파라오)이 태양신 라(Ra)의 아들로 군림하며 권력이 발달했다. 그 번영은 제 5왕조
시대에까지 약 4세기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전성기를 고왕국시대라
하며 BC 27세기에서 BC 23세기에 걸친 이 시대의 정치적 중심은 수도 멤피스(Memphis)에 있었다.
이집트 문화는 거의 이 기간에 완성되었다. 나일강 서쪽에 있는 피라미드의 대부분이 이 때 만들어졌다.
제 6왕조 후 파라오의 권력이 점차 쇠퇴하여 BC 2200년쯤부터 노모스가 제각기 독립하면서 왕국이 분열되었다.
그러다기 BC 2000년쯤 테베(Thebes)의 왕가가 다시 이집트를 통일하여 제 11왕조를 세웠다. 이후 테베는
오랫동안 이집트의 정치 및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BC 21세기에서 BC 18세기에 걸친 이 시대를 중왕국시대라 한다.
BC 17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민족이동의 영향으로 힉소스(Hyksos)인이 침입하여 이집트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BC 16세기 전반에 결국 힉소스를 몰아내었고 이때부터 BC 11세기까지를 신왕국시대라 한다.
신왕국 시대에 제 18왕조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IV: 재위기간 BC1377?∼1358?)는
수도를 테베에서 아마르나로 옮겨, 아몬 중심의 다신교와 결별하고 태양신
아톤(Aton)의 일신교를 일으키려 했다. 그는 스스로 아크나톤(아크나텐 또는
이크나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새 수도의 이름을 아케토아톤('아톤의 지평선'이란 뜻)으로 명명했다. 이때는 이집트 미술이 예로부터의
전통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자유롭고 사실적인 아마르나 예술이 발달했다. 그러나 그의 종교개혁은 아몬 숭배자들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하여 그가 죽은
후 궁정은 아몬 신앙으로 되돌아갔다.
(태양을 찬양하는 아크나톤과 왕비 네페르티티)
제 20왕조가 시작된 BC 1200년경부터 이집트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 22왕조부터는 리비아, 누비아 등
이민족에 의한 왕조가 세워졌다. BC 671년에는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이 이집트에 쳐들어와 제 25왕조의 타하르카 왕을 상이집트로 쫓아냈다.
이어서 BC 525년에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고 통치권을 넘겨주었으며 BC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마케도니아의 귀족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마지막 왕조를 세웠고(BC 305년)
이때부터 BC 30년에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로 들어갈 때까지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 한다.
<고대 이집트의
문화>
이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내세적인 신앙이 발달하였다. 이들은 죽은 후 육체가 부패하지 않으면 영생 불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피라미드에 간직하였다. 이 때 장례용 시와 그림을 파피루스(Papyrus: 나일 강변에
자라는 갈대를 말려서 만든 기록매체; Paper의 어원)에 기록하여 피라미드에 함께 보관하였는데 이것을 '사자(死者)의 서(書)'라 한다.
(가장 큰 피라미드인 쿠푸(Khufu)왕의 피라미드)
(제 18왕조 때 만들어진 사자의 서: 오시리스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또한 실생활과 관련된 과학 지식이 발달하여 태양력이 만들어지고, 범람 후 농지 정리와 토목공사의 필요에서 측량술과 기하학이
발달하였다. 또한 미이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의학 지식도 발달하였다. 문자는 상형문자를 사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