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주일 설교

2020. 11. 9. 15:37참고자료/1,설교자료

감사하고 찬양하라 -시 100:1-5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이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넘치는 풍년을 주셨다. 우리나라는 매년 풍년이 들어서 문제이다. 너무 많아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우리는 효과적으로 감사하지 못해서 문제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감사의 시이다. 본문을 보면 세 번이나 반복되는 어구인 “나아갈지어다”, “그 문에 들가며”, “그 궁정에 들어가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시편은 사들이 성전에 예배드리러 올라갈 때 사용되었던 노래이다. 그래서 본 시를 감사의 시라고 부른다.

1-3절은 “기쁨과 감사의 고백”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불러라,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정감 넘치는 내용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알고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것이고/ 그의 백성이고/ 그의 양이라는 말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고 만족하고 감사함이 가득차오는 것을 느낄 수 가 있다.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가?

그리고 4-5절을 보면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이름부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찬양하고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다. 그래서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지 못해서 애타하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아무 곳이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찬양과 감사가 있는 곳에 주어진다. 그것은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찬양하는 곳에 복이 임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6장을 보면 다니엘이 모함에 빠져 위기를 맞게 된다. 전처럼 창문을 열고 또 기도하면 사자굴속에 던져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또 기도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질 줄 알면서도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다. 그 상황이 감사할 상황입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감사하였더라”고 했다. 그러니까 거기서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 26장을 보면 예수님 일행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만찬을 마치고 산에 오르실 때 찬미하며 올라갔다(30)했다. 그 시간은 찬양이 나올 마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찬미하며 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완수하고 고난의 길을 무난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된다.

① 성경은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강조한다.

성경을 보면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여러 곳에서 강조하신다. 골 3:15을 보면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다. 16-7을 보면 “너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다. 엡 5:4을 보면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다. 롬 6:17, 대상 16:4, “하나님께 감하라”고 했다. 살후 1:3절에서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또 시편에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다. 대상 16:25을 보면 “극진히 찬양하라”고 했다. 이렇게 성경에 찬양하라는 말씀이 300여 번 감사하라는 말씀이 똑같이 300여 번이나 나온다.

이 감사하는 마음, 정신, 자세는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도리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감사하라, 찬양하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은 이 질서와 정신과 은혜를 잊어버린 시대이다. 그러니까 기본의 질서마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정신의 질서가 하늘에 감사하고 부모에게 감사하는 일이다. 하늘에 감사하는 사람은 부모에게도 감사하고 스승에게도 감사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그래서 감사는 모든 정신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감사한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작용으로 부모를 버리고 스승이 학생들에게 욕을 당하고 있다. 아주 막된 세상이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처럼 감사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하늘에 감사하고 부모에게도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감사의 대상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알고 뒤늦후회를 한다. 그래서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습까? 그래서 “있을 때 잘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은혜를 모르는 시대이다. 참 불행한 시대이다.

※어느 골프장에서 있었던 우스운 이야기다. 골프를 치는데 앞 팀이 너무 느렸다. 공을 치는 것을 보니까 돈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앞 팀이 너무 신중하게 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늘 집에 와서 쉬는 동안 물었다고... “돈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심각하게 치느냐”고.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우리는 모두 형제인데 오늘 골프에지는 사람이 앞으로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거든요”하고 대답하더라는 것...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단면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날까?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감사를 잃어버린 삶의 부작용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이곳저곳에서 명령형으로 말씀하고 있다.

②감사와 찬양 속에서 강한 바이러스가 나온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나 생각이나 언어에서는 강한 바이러스가 나온다. 그 바이러스는 소망을 주고 삶을 일신시키는 바이러스이다. 그래서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웃으라고 하는 것이다. 웃음이나 기쁨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외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엡 5:18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다.

또 4절을 보면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찬송하며 궁정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왜 자꾸만 성경이 찬송하고 감사하라고 하느냐 하면 그 감사찬송 속에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건강하게 하고/ 소생하하고/ 기쁨을 주고/ 삶을 향상시켜주는 강한 바이러스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감사의 말 속에는 몸속에 있는 암 세포도 죽이게 하는 강한 바이러스가 들어있다. 그리고 감사의 언어 속에는 실패도 딛고 일어서게 하고/ 어두움을 밝게 하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고/ 불평을 잦아들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게 하는 강한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

또 감사과 찬양의 삶 속에는 삶을 일신시키고 창조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이런 강한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말 한마디로 천량 빚도 갚는다고 하지 않습까?

복음서에 보면 임금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왕궁을 나오다 자기에게 조금 빚진 자를 만나서 빚을 갚으라고 멱살을 잡고 고발해서 옥에 가둔다. 그리고 그 신하가 다시 왕에게 불려가 혼난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까?

감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망하게 만드는 강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다. 그래서 감사가 없는 곳에는 불평이 들어오고 짜증이 굴러오고 원망이 굴러오고 불화를 부르는 강한 바이러스가 작용한다.

불평하는 곳에는 밝음이나 따뜻함이나 전진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고 했다.

☆아마 이 지구상에서 감사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민족있다면 그것은 미국인들 일 것이다. 미국인들은 감사가 몸에 배고 언어에 대화에 감사가 배어 있는 민족이다. 그래서 ‘땡큐’라는 말은 미국인들의 언어이다. 미국인들은 말, 언어, 습관이 모두 땡큐로 통한다. 이 땡큐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가 감사의 삶을 조성하고 복을 받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이 그렇게 잘살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미국이라는 나라는 참 엄청나게 복을 받은 나라이다. 땅도 넓다. 넓어도 땅 나름이다. 오늘 중국 땅도 넓지만 그 넓은 땅 중에서 대부분은 사막이다. 그래서 봄이 되면 그 사막에서 일어나는 먼지 때문에 우리나라까지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런데 미국 땅은 넓기도 하지만 그 넓은 땅이 모두 기름지고 풍성하고 자원이 가득 들어있는 땅이다. 감사의 정신과 마음과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복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미국인들의 이 감사의 정신은 성경에서 나온 정신이다. 청교도들이 미국을 창건할 때 이 감사의 정신으로 나라를 건설하였다. 추수감사절도 미국인들의 생활에서 나온 절기이다.

1620. 12. 26. 청교도 102명이 미국 대륙 플리머스 해변에 상하였다. 117일간의 항해를 끝낸 청교도들은 마침내 배에서 내린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모래를 날리며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곧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때 드린 감사의 기도내용이 6가지였다. 첫째는 180톤급 밖안 되는 작은 배에 평균 시속 2마일로 117일간 무사히 항해하게 됨을 감사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117일간 항해하는 도중 2명이 죽었지만 한 아기가 태어남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태풍이 불어 돛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지만 그래도 파선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네 번째는 큰 파도가 칠 때 여자들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2번이나 발생하였지만 모두 구출된 것을 감사합니다.

다섯 번째는 신대륙에 도착해서 접근했을 때 일부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을 못하고 배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지만 그 후 무사히 하선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여섯 번째는 3개월 동안 항해하는 중에 누구 하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이 한사람이 없었음을 감사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배에서 내려 그해 겨울 농사를 짓고 집단생활을 하는초대지사로 임명된 ‘브레드 포드’라는 분이 새 땅에 정착한지 3만에 이렇게 선포하였다고 한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금년에 넘치는 수확을 주셨다, 옥수수 밀, 콩, 호박, 채소를 가꾸고 사냥하고 생선과 조개를 넉넉히 얻도록 축복해 주셨다. 야만인들의 습격에서도 지켜 주셨고 질병에서도 건져 주셨다. 무엇보다 우리의 양심을 따라 자유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모든 순례자들에게 선포한다. 주1623. 11월 29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어른과 아이들은 전원 모여 이 모든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

이것이 오늘 미국인들이 복을 받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들의 이런 삶속에, 언어 속에, 생각 속을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자하는 생각이 가득 들어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에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1863년 남북전쟁이 극렬할 때 링컨 대통령은 그날의 추수감사절을 미국의 국경일로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모든 미국인은 이날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자.” 그리고 매년 그날만 되면 역대 대통령들이 추수감사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관례가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생각과 환경과 처지를 보고 해석하는 기준이 다르고 판단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런 전통을 가진 미국인들도 오늘날은 거보다 여건이 더 좋아졌는데도 불평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100년 전의 미국인들은 꼭 바라는 것이 16가지였는데 오늘 미국인들은 바라는 것이 92개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 마음에 만족함이나 감사한 마음이 울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바네트 깁슨’이라는 사람이 “제발 부탁하노니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법부터 배우라”고 했다. 우리는 감사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③감사가 성숙한 삶을 이루게 한다.

성숙한 사람은 감사할 줄 한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성숙해 보이질 않는다. 식사할 때 무조건 앉자마자 숟갈부터 들고 먹는 사람들을 보면 야만인 같이 보인다. 감사한 마음, 자세, 정신은 성숙함의 표시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성숙한 삶을 이루어준다.

☆손양원 목사님을 사람들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fms다. 이분이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신 분이다. 1948. 10월 여수 순천반란사건이 터졌다. 이 땅의 좌익세력과 남로당 조직책들이 주동이 되어 난동을 부려 일어난 사건인데 그때 경찰과 그 가족 그리고 양민과 우익인사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그때 손양원 목사님의 25세 19세 된 두 아들이 한날한시에 총살을 당해 죽었다. 그 두 아들 장례식 때 그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이 고백했다는 감사의 기도문이 감동을 주고 그가 사랑의 원탄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두 아들을 잃고 그 두 아들의 장례식에고백한 이 기도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주는 기도문이다. 그 기도문에서 밝힌 감사의 고백이 9가지이다.

1. 나 같은 죄인을 통해서 순교자식을 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2. 허다한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하필 나에게 맡겨주셨는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3. 3남 3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하나님께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4. 한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의 순교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5. 예수 믿다가 병들어 죽는 것도 복이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당해 순교 당하였으니 감사드립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이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을 믿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의 8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을 수 있는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후 두 아들을 죽인 원수 강재선을 구명하석방시킨 뒤 양자로 입양하고 그를 신학교에 보낸다. 그리고 자신도 2년 후에 터진 6,25때 공산군에게 순교당해 죽었다. 그래서 그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말한다. 그의 그 모습이 사랑과 감사의 화신으로 사랑과 감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얼핏 보면 속물같이 보일 때도 있다. 어떤 때는 하는 행동이 짐승만도 못하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런데 인간은 또 너무나 위대해질 때도 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또 그 속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손양원목사님 같은 위대한 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다. 이 감사는 모든 것의 기초정신이고 강한 바이러스를 배출시키는 정신이다. 이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바이러스가 삶을 일신시키고 불평을 소멸시키고 음지를 양지로 어두움을 밝음으로 멸망을 구원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일신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찬송을 부를지어다.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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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 136:1~26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우리나라는 금년에도 농사가 대풍년으로 논밭의 곡식을 추수한 상태이다. 그러나 필리핀이나 베트남같은 경우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우리가 감사의 달을 맞이해서 다른 조건들을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이 넉넉하게 준비해주셨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먹는 식량보다 남는 식량을 보관하는 문제가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는 것을 볼 때, 이런 현실이 하나님 앞에 큰 감사의 조건이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가 많이 발달되어서 옛날 임금님도 잡수시지 못했을 만큼 보편화된 호화로운 문화를 누리고 있다. 들어보지도 못하고, 먹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음식들이 어디를 가도 널려 있음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요즘 금갈비, 금커피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 고종황제그런 것을 못 드셨을 것이다. 제가 총장님이랑 어떤 칼국수 집에 갔었는데 입구에 김영삼 대통령이 그 집 국수를 드시는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그 국수집이 김영삼 대통령의 단골집이었다고 한다. 요즘 대통령이 먹는 음식이나 서민이 먹는 음식이나 똑같아졌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현실은 지구상에 3분의 1정도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까운 북한도 그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또다시 풍요의 추수감사 절기를 맞이했는데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생각하는 추수감사 주일이 되시길 바란다.

먼저 오늘 읽은 시편 136편의 말씀을 보시면 1절에서 26절까26가지 종류의 감사하라는 말로 문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와 같은 기록의 의미는 내 주변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조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26가지만이 아니고 260가지도 된다는 의미를 이렇게 간략한 문맥으로 증거하고 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의 방향이 있는데, 감사하는 것에는 매우 둔감하고, 반면에 원망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특성이 있다.

하나님의 관계나 인간관계에서 원망보다는 감사할 것이 훨씬 더 많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감사가 풍성한 것을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유대민족은 그들의 생활권 안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부분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순서였다.

아예 창세기에서부터 중요하게 나타난다. 인류의 최초의 농사짓는 사람인 가인과 최초의 목축업자가 된 아벨은 각각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유물로 감사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가인은 합당치 않게 그 일을 소홀히 취급을 했고 아벨은 매우 중요한 일로 취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셨다는 기록으로 제사에 대한 평가가 나와 있다.

이로 인해 형제간에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서 지금도 흉악범들을 향해서는 ‘가인의 후예’라고 하는 영원한 저주의 별명을 만들어버렸다.

이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제사를 제도화했다. 엄격한 율법의 명령으로 누구도 소홀히 취급하지 못하도록 했음이 성경에 나타난다. “곡식의 처음 익은 열매는 반드시 여호와께 드리라!” 정성을 다해서 드리라는 것이다.

우양의 첫 새끼는 얼마가 되었든지 반드시 여호와께 드릴지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은 구별하되 가장 좋은 것 점 없고 흠 없는 것으로 하라. 찌꺼기나 나머지를 가지고 드리지 말라.” “레위인은 자식도 첫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리고 제사의 종류도 많았다.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요제 등 다양한 제목의 수없이 많은 제사를 율법화해서 하나님께는 이렇게 정성스럽게 하라!

역대하 29:31에 보면 “너희가 이제 몸을 깨끗케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율법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제사의식을 누구든지 행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소홀히 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영적 분위기로 백성들을 지도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볼 때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나에 천년만 일찍 들어왔어도 모든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가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문화화 되었을 터인데, 우리나라의 모든 제사가 미신 문화로 발전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우리나라 역사에는 신에게 감사드리는 제사가 많이 있었다. 고구려 시대 ‘동맹’이라고 해서 신에게 드리는 감사제가 있었는데 이때가 되면 마을의 모든 부족들이 한 곳에 모여서 주몽신과 그의 어머니 하백녀를 기리는 제사를 같이 드렸다. 이 제사의 뜻은 먹을 양식을 내려주시는 신에 대한 감사제로 드렸던 것이다.

또, 부여에서는 ‘영고’라고 하는 제사 의식이 있었는데 먹을 양식 내려주신 신에 대한 감사제로 고대로부터 제사가 있어왔는데 다만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과 차이가 미신 문화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는 명절이 있다. 추석이다. 이것은 신라 시대 가위에서 출발한 것으로 첫 곡식으로 떡을 빚어 추수의 기쁨을 신에게 드린다고 하는 문화에서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역사에 이렇게 많은 감사 제사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이 미신 문화의 개념으로 발전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엇이나 섬기기를 좋아한다. 무엇이든지 섬기지 않으면 못사는 민족이다. 다른 민족에 비해서 복음을 빨리 받아들인 것도 우리 민족의 종교성 때문이다.

보라. 시골에서 근래까지도 농부들이 들판 일을 하고 있으면 부인이 점심 식사를 해서 들판으로 내온다. 그러면 그냥 먹지 않 맨 꼭대기에서 밥 한 숟가락을 떠서 논바닥에 집어던지면서 “고수레”라고 한다. 먹을 식량을 주신 신에게 감사드리는 표현으로 그런 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또, 술을 좋아하시는 시골 농부들은 대접에다 막걸리를 가득 채워 그냥 먹는 법이 없다. 한사발의 막걸리 중 논 귀퉁이나 밭도랑에다가 조금 뿌리면서 말한다. “금년 농사 잘 되어 백석을 거두게 하소서.” 이것이 다 신 개념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 추수가 끝나면 떡을 한다. 그것을 고사떡이라고 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해놓으면 먼저 먹는 법이 없다. 제일 위에 있는 떡을 그대로 반짝 들어서 네모반듯하게 정성스럽게 자른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몇 가지신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마당 한 복판에다가 상을 놓고 거기에다 한 접시를 올려놓는 것은 집을 지키는 터주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 된다.

또, 대청마루에 갖다 놓는 떡은 성주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고, 사랑방에 갖다놓는 떡은 조상신에게 드리는 떡이다. 장독대나 변소에 갖다놓는 떡은 잡신을 위한 것으로 “이거 먹고 꺼져라!하는 뜻이 있다. 이러한 신 개념을 가지고 제사가 많았다. 그런데 미신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다.

☆우리 사람들의 공통적 소원이 있다. 인생을 풍성하게 윤택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라고 도와주신다고 하셨다. 방법이 무엇인가?

인생을 풍성하게 살려면 감사하면서 살면 풍성하다. 감사를 우리가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먼저, 오늘 성경말씀대로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감사할 것이 점점 많아지지만 잊어버리면 감사할 조건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의 열 문둥이 사건에서 나온다. 문둥이라고 하는 병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매우 흉악한 질병이라서 우리나라에 있는 나병환자들 공동체에서 성경을 다시 번역해달라고 대한성공회에 요청했다. 문둥병이라고 쓰지 말고 한센병으로 바꿔달라고 말이다. 이름조차도 듣기 싫다는 것이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곳에 가셔서 문둥병이라는 단어를 쓰시큰 실례가 된다. 그러한 질병의 사람 열 명이 자기 인생의 소원인 깨끗함을, 예수님을 만나서 받았으니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감사를 말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

아홉은 어디 갔느냐?” 즉, 우리 사회는 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지만 90퍼센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10퍼센트의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산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종류별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

종류별로 성경구절이 같은 문맥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너희 주변에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라. 수없이 많지 않느냐?.” 이런 뜻이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은 삶이 풍성하여 진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절기이다. 세계 기독교의 공통점으로 사회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추수감사절 설교는 서구 사회와 똑같이 한다.

평양 봉수교회 담임 목사도 추수감사절 예배는 “이것은 청교도의 신앙 때문에 된 일입니다.”라고 역사적으로 밝히면서 설교하는 것을 제가 비디오를 통해서 본 일이 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사막과 같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성경구절이 나와 있는 것과 똑같이 내 주변도 이러한 말로 감사하면서 살라는 뜻이다.

두 번째는 사람에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여러분 한번 계산해 보라. 내가 그래도 무식하지 않고도 무엇을 좀 알고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편리한 것은 나를 가르쳐준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유치원 선생에서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수고의 사람들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을 꽤 잘하는 신앙인이 된 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기도를 해주었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해주었고, 그렇게 많이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분들의 노력을 통해 이만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 것이다.

바울사도는 뭐라고 말합까? “그러므로 나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빚진 자로다.”라고 했다. 이렇게 살아야 인생이 풍성한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내 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야 사람의 만남이 풍성해지고 행복하지 않겠습까?

상식적으로 우리 인생에서 잘 된 것만 감사할 것이 아니다. 소원대로 되지 아니한 부분에서도 감사가 많음을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의 여유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우리 인간관계는 좁게는 부부관계에서부터 크게는 세계인과의 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향해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져한다.

저 같은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가져하고 교인들은 주의 종들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가져서 감사의 교류만이 삶을 풍성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큰 복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복이란 무엇? 영원성이 있는 복을 말한다.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되는 복이 큰 복이다.

천국의 삶이 약속되어져 있어야 지상의 삶도 행복한 것이지 마지막에 영생, 생명, 불멸, 진리에 대한 어떤 약속도 되어 있지 않다면 현재 삶에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했다고 하여도 불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소 지상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부분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풍성함이 있어야 행복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까? “만약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우리는 불쌍한 자다.”

그의 소망적 고백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나는 달려갈 길을 믿음으로 달렸는데, 이제 후로는” 바로 “이제 후로는”라는 말이 큰 복의 조건을 말한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영생에 대한 약속이 큰 복이다.

다소 지상의 삶이 고난스러워도 영생의 복이 약속된 자는 풍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있음을 발표하는 것이다. 이렇게 큰 복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삶이 날마다 풍성하다.

성경에는 영원한 복을 기억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다가 복은 고사하고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들소개하고 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의 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자리에서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역사가 있고, 가룟 유다는 돈 30냥이라고 하는 세상의 기준을 선택했다가 예수님께서 주신 12사도의 영원한 복을 상실하고 저주의 배반자의 대명사가 되어버자가 되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의 가치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장자의 명분을 집어던져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족장의 자리를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우리는 큰 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는 내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순자들이 죽어간 것이 아닙니까? 큰 복, 영원한 영생의 복을 놓치지 말아야 삶이 풍성하다.

다음으로 작은 복에도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 한격언 가운데 성경말씀 같은 격언이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무슨 뜻입까? 내가 하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자, 여기 음식 만드는 재료가 있다. 똑같은 자료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요리를 만들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다 각기 다른 맛의 요리를 가지고 왔다. 자기가 생각한 요리를 해온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설교학 교수께서 학생들에게 똑같은 성경구절을 준다. 이 구절로 설교를 작성해 오라고 한다. 50명이 똑같은 성경구절을 받았는데 설교는 다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라는 재료를 우리 각 사람에게 주셨다. 네가 만들어라! 네 인생은 네가 만들어야 돼!” ‘인생’이라는 제목을 주고 만들라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숙제이며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만들어가는 작품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내가 만들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 중에 하나님 말고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하고 관심가져주는가? 나 자신에 대해서 나 자신이 제일 관심이 많다. 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된다. 재료는 넉넉하다.

작은 것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것도 감사를 모르게 되있다. 우리 주변에는 작은 행복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불평만 늘어놓다가 더 큰 불행을 만나는 경우의 사람들수없이 많다. 재료는 똑같은데 남들은 그것을 가지고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데 아무것도 못 만든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점점 더 괴로운 자리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나는 외롭다는 생각에 빠져들면 점점 더 깊은 수렁빠져 우울증이 되어버린다. 내가 나를 도와주면 나의 삶을 빛나고 창조적으로 만들 사람은 나 자신이다. 누구도 나에 대해서 나만큼 관심이 없다.

원망을 떠나 감사의 세계로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오늘 우리들은 주변에 감사한 방향을 더 많바라보고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정치권을 바라보면 아주 흉년이 들어서 얻어먹을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을 들판에는 풍년이다. 이럴 때는 우리는 들판을 바라보아야 한다.

방주교회 교인들은 금년에 좋은 일이 많았다. 설립예배, 결혼한 부부도 있었고 아기들도 탄생했고, 진급한 사람도 있고…,,

저는 요즘 감사한 일이 참으로 많다. 늦은 나이지만 이렇게 방주교회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목회하고 있다. 여러분도 방주교회에서 신앙생활한 것에 감사하라.

이렇게 우리가 감사를 찾아가면서 살아야 인생이 풍성한 것이그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입에 원망만 붙어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은지 그런 사람은 평생 풍성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렇게 많은 감사의 조항들을 기록했다. 왜 그랬겠습까? “너도 네 주변에서 찾아보라! 26가지! 아니면 260가지의 무한대의 감사 조건이 있것이다.” 이런 뜻으로 똑같은 문맥의 감사 언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다소 우리 주변에 고난스러운 문제들이 있다할지라도 이렇게 풍성한 감사의 달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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