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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강제적으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 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만나게 됐다. 한일합병을 눈앞에 둔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 선주 장로의 제안으로 11월 추수 감사절이 끝나면 그 다음날부터 한 주간 구국 기도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이 기도회를 통해서 일제의 무서운 침략이 서서히 한반도에 몰려오는 것을 전국교회가 알게 됐다. 노일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곧 한국을 식민지로 전환하는데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매국노들은 나라를 송두리체 일제에 넘겨주는 슬픈 일을 만나게 됐다. 이때 여기저기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으며 상동교회 전덕기 전도사는 도끼를 메고 가서 대한문 앞에서 항소문을 낭독하는 등 을사보호조약을 무효화하는 운동을 전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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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교회가 있는 곳마다 선교사들이 선교부별로 남녀미션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여기에 이동휘 같은 교인은 사립학교 100개를 설립하는 운동도 전개하였으며 이승훈 장로는 평북 정주에 오산학당과 오산교회를 설립하고 민족심과 애국심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일제가 군사적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이루자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그리고 서북지방의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기독교인을 구속하고 탄압하였지만 윤산온 선교사 부인이 조작된 사건을 알고 이를 전 세계에 알리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이들을 모두 무죄로 석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금도 늦추지 않고 동화정책이란 미명하에 모든 초등학교마다 일본군인 예비역을 동원하여 교사로 채용하고 공포분위기에서 교육을 했다. 여기에 토지조사라는 이름 하에 신고하지 않는 토지는 모두 몰수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고 몰수 했던 땅을 일본인에게 싼 값으로 팔아 넘겼다. 땅을 빼앗긴 한국인은 할 수 없이 노동자로 전락하고 한강 이남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됐으며 그 이외의 지역 주민은 만주 간도지방으로 대거 이주해 갔었다. 조선 총독부 정치는 가면 갈수록 혹독한 정치를 하자 자연히 탄압을 받았던 일부 시민, 농민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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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미션학교와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서 또는 성경책을 보면서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심이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게 됐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란 케치플레이를 내 걸고 약소민족들이 독립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던 일본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 YMCA회관에서 약 400명이 모여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 선언서를 각국 공사 및 일본 각부 대신 및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들 중 주모자들은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이소식이 곧 본국에 알리어지자 천도교의 최린 손병희 등에게 전하여 졌으며 손병희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기독교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에서 평북 정주에 있는 이승훈 장로에게 먼저 연락하여 서울에서 상면을 하고 3.1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됐다. 이렇게 하여 자금은 천도교 측에서 부담하고 인원동원은 기독교가 맡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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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최남선으로 하여금 3.1 독립운동 선언서를 작성케하고 이를 곧 인쇄하여 전국 각지에 배포하였다. 여기 33인의 민족대표들 중 기독교인이 16명(길선주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이승훈 이명룡 이갑성 이필주 김창준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화영 최성모 정춘수)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3월1일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진해서 경찰서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한편 이른 아침부터 시내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방 속 깊이 숨기고 등교를 하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오전 수업만 받고 탑골공원으로 향하였고 시간이 갈수록 학생 시민들의 수는 많아졌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때 경신학당 출신으로 황해도 해주읍 남본정교회 정재용 전도사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나가 약 4천여 명이 모인 군중에 나타나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청중들은 갑자기 조용해 졌으며 그의 카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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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한 목소리만 탑골공원을 가득채운 청중의 귀에 울려 퍼졌으며 어느덧 인왕산에 부딪치어 메아리로 다시 서울 시민들의 귀에 들려왔다. 여기에 모인 시민 학생들은 공약삼장의 약속대로 질서정연하게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같은 시간에 평양에서는 제 7회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진두지휘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3.1운동으로 한국 교회는 많은 피해를 당하였다. 이 시위가 지방으로 확산 되면서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교회가 전소되고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종교별로 체포된 인원을 파악해 보면 기독교인이 3,348명(장로교 2.468명 감리교 560명기타 320명)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천도교 및 시천교가 2,200명 이었다. 여기서 시민학생들은 12,311명이지만 학생들은 거의가 미션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여 구속자가 많았다 수적으로 볼 때 기독교인들 중 장로교 교인이 더 많이 참여하였으며 당시 장로교 교인은 16만 명이었으며 감리교 교인은 3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총회장 김선두 목사의 구속으로 제 8회 총회는 1919년 10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회집하여 부회장인 마포삼열 선교사가 개회선언을 하고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매년 9월에 개회하던 총회였지만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석방되지 않아 할 수 없이 10월에 총회를 개회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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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성장은 6.25 전쟁을 통해서 이북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수 많은 목회자와 일반 신도들이 월남하면서 남한 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6.25 전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의해 엄청난 교회 손실을 당했고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6.25 전쟁이 휴전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 중에 있었지만 팝 피얼스 빌리 그레함 전도자들이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교회는 더욱 자리를 굳게 잡아 갔었으며 여기에 교파 분열로 자파의 교세를 확장키 위해서 안감힘을 쏟으면서 교회는 성장하게 됐다. 여기에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모여 들면서 대형화된 교회가 하나 둘 생겨나게 됐다. 여기에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쿠테타 후 군사 독재 정권을 창출하여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산업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인권탄압 등 비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해 오다가 10월 유신헌법 발표 등으로 군사독재가 장기화 되었다. 이때 한국 교회 즉 에큐메니칼 노선에 있던 교회들은 민주와 운동에 앞장을 섰으며 그 후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부하에 의해 청와대 안가에서 살해당하면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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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던 수많은 시민학생들은 그 봄마저 만나지 못하고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의 전두환 장군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국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고 갔었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자 광주지역 시민학생들이 5.18 계엄령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두환 군부세력 퇴진을 요구하자 특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하여 결국 광주는 시민군과 특수부대와의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일로 광주의 수 많은 시민 학생 및 기독교 지도자들이 골고다의 십자가를 메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싸움을 하였지만 엄청난 민주인사들이 살상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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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서는 박치순 부총회장이 광주의 비극을 접하고 전국교회에 기도와 구호품을 요구하였고 많은 교회가 참여 하자 박치순 부총회장은 곧 광주로 내려가 총회장 조원곤 목사(광주 양림교회)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이어 증경총회장 한완석 목사(광주제일교회)를 만나 위로하고 진상을 파악한 후 상경하였다. 광주의 그 엄청난 사건을 민간이 나서야 한다면서 한완석 목사가 광주사태수습위원장이 되어 총무 이인국 목사(남광교회)와 함께 광주 시내 교회 목사들과 함께 우선 억울하게 총탄에 쓰러져 죽어간 시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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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도청 상무관에 옮겨 놓고 유족들의 확인을 받은 뒤 입관을 하고 이들이 영원히 쉴 수 있는 광주의 망월동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박치순 부총회장은 곧 상경하여 5월 30일 서울 교역자들이 서울 연동교회에 모여 보고를 들은 후 6월 1일 전국 교회가 광주 5.18 희생자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전국 교회에 알렸다. 박치순 목사는 그해 9월에 총회장이 됐다. 그 후 본 교단에서 민주와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1987년 군사독재정부가 4.13 호헌을 선포하자 즉각 교계는 물론 일반 시민학생들은 호헌을 철폐하고 대통령을 직선제로 선출하자는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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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5월에는 총회장 장동진 목사(광주 서림교회)께서 4.13 호헌철폐를 위한 목회서신을 전국교회에 발송하였다. 역시 6월 10일 서울 시민학생들이 일제히 호헌철폐를 부르짖으면서 거리로 나섰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았던 총회에서는 그냥 있을 수 없어서 6월 22일부터 23일 총회인권위원회 주최로 호헌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갖고 소형 십자가와 촛불을 들고 종로 5가까지 시가행진을 하려고 교회 문을 나서자마자 경찰관의 최류탄으로 막아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철야기도를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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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까지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다. 교계와 일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계자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4.13 호헌을 철폐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발표가 나자 전국에 픝어져 있는 시민은 말할 것 없고 본 교단에 속한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은 즐거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매년 총대가 증가하자 1,880명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를 1,500명으로 제한을 하여 작은 노회에 총대수를 많이 배정하고 큰 노회는 숫자를 줄이기도 하여 현재는 1,500명으로 제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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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숙제로 남아왔던 여성안수문제가 민주와희 열기와 함께 1994년 9월 제 79회 총회에서 해결됐다. 그동안 꾸준하게 여성안수를 위해 노력했던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및 전국 여교역자연합회 전국여신학생연합회의 노력으로 이 일이 이뤄졌다.이 일로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가 탄생되는 기쁨도 갖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이 교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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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9월은 총회창립 90주년이 되는 해였다. 90년의 역사를 갖게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 그리고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갈라서야 하는 아픔을 안고도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부활 신앙을 믿고 큰 교단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으로는 예장 통합측, 합동측 이렇게 2대 교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고 전진하고 있는 총회는 총회기구개혁을 통하여 작은 총회 본부로 조정하여 지방화 시대를 열어 많은 업무를 지방으로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여기에 개 교회마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와 총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남북이 나누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 남한은 풍요로운 삶 속에서 살고 있으며 북한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북한은 벌써 여러 해 가뭄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생명이 20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동포의 아픔을 깨달았던 우리 총회는 북한 돕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 |
총회 사회부에서는 매년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 옷보내기운동을 비롯해서 많은 구호물자를 보내고 있으며 농어촌부에서는 북한농업돕기운동 일환으로 매년 못자리 비닐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일은 개 교회에서도 북한에 밀가루를 보내기도 하고 아예 국수공장을 만들어 북한 어린이의 양식이 되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다. 먼 훗날 남북이 하나 될 때 남한 교회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어 살아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은 자연히 기독교인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1990년 7월부터 2002년 7월까지 8회에 걸쳐 일본에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주관으로 한국에 있는 본 교단을 중심해서 6개 교단들 대표자들이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자들과 만나 서로 화해와 일치 선교 여기에 평화적인 통일을 바라는 이 만남을 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미 북한에도 평양봉수교회 칠골 교회 등 가정교회에서 모여 예배에 참여한 신도가 1만 2천여 명이나 모인다고 하니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들의 교회도 남한 교회의 힘을 입어 성장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남한 신도들의 기도는 결코 외면되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본 교단은 2005년 12월 말 현재 62개 노회에 7,292개 교회가 있으며 일반 신도는 2,539,431명이다. 세례교인은 1,427,806명 목사는 12,223명 장로는 21,729명이나 되는 교회로 성장했다. 여기에 교단 총회 상임부서로는 교단 행정본부를 비롯해서 국내선교부, 세계선교부, 교육자원부, 사회봉사부, 총회 훈련원, 총회 유지재단, 한국기독공보사, 한국장로교복지재단, 총회 연금재단, 한국장로교출판사,상임부서에는 책임자가 있다. 여기에 총회 안에 상임위원회,상임특별위원 등 도합 20여개가 있다. 여기에 총회 산하 기관으로 남선교회전국연합회,여전도회전국연합회,청년회전국연합회,교회학교아동부연합회,중고등부연합회 등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특별히 남선교회전국연합회에서는 러시아에 이흘애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곳에서 모스크바장로회신학대학교를 운영하는 등 러시아 현지인을 교육시키고 있으며 과거 지하교회 교역자들을 재교육시키는 교역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여전도회연합회도 자체 센타를 갖고 있으며 여성 교육에 힘을 쓰는 한편 해외 군선교등 선교에 힘을 쏟고 있다.
여기에 교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7개의 신학대학이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전주한일장신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대전신학대학교, 부산장신대학교, 서울장신대학교가 있다. 여기에 6개 종합대학교가 있다. 즉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계명대학교, 한남대학교,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이며, 여기에 노회가 운영하는 7개 전문대학(계명문화대학, 서해대학, 광주보건대학, 기전여자대학, 예수간호대학, 관주기독간호대학 포항선린대학)이 있다. 각 지방에 있는 23개 중고등학교와 평신도지도자 양성기관인 2년제 성서신학원은 30개나 된다. 7개의 자선사업단체와 7개의 종합병원(전주예수병원,광주기독병원,대구동산의료원,안동성소병원,부산일신기독병원,포항선린병원,실로암안과병원)이 있다.
또한 세계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는 80개국에 395가족이 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장기,단기,견습 선교사 등 모두 702명이 세계 구석구석까지 나가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 세계교회와의 유대관계는 WCC (세계교회협의회),EACC(동남아기독교협의회), WRCA(세계개혁교회연맹) 등이 있다. 여기에 가까운 일본 기독교단을 비롯해서 재일대한기독교회, 대만기독교장로교회, 태극기독교회, 중국기독교회, 인도마토마교회, 북동인도 장로교회, 인도네시아예수그리스도교회, 멀리는 미합중국장로교회를 비롯해서 미주 한인장로교회, 미국개혁교회, 캐나다장로교회, 브라질 장로교회, 네델란드 개혁교회, 독일서남지역교회, 스위스 개신교회연맹, 체코형제교회, 스코드랜드 교회, 가나복음교회, 자레이칸샤사장로교회, 호주연합교회, 뉴질랜드장로교회 등 21개 교회와 자매 교회 관계를 맺고 있다. 국내연합사업기관으로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대한 성서공회,대한 기독교 서회, 한국기독학생연맹,한국기독교교육협회, CBS, CATV , 한국찬송가공회 등 여러 기관에 이사를 파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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